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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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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문은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영은문 터에 세운 건축물이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1896년 기공하여 1898년 완공되었으며,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독립문은 독립협회의 주도로 건립되었고, 독립신문은 독립문 건립의 의의를 알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검열을 받았지만,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활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독립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1979년 성산로 건설로 인해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으며,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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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서울, 대한민국의 독립문 정면
서울, 대한민국의 독립문 정면
종류기념 아치
위치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면적2,715.8 m2
건립1898년 1월
건축가(심의석)
건축 양식개선문
관리 주체서대문구
소유 주체대한민국 정부
문화재 지정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
지정 날짜1963년 1월 21일
명칭
한글독립문
한자獨立門
로마자 표기Dongnimmun
크기

2. 역사적 배경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은 청일전쟁 이후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청나라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음에도, 국내외적으로 그 사실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서재필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우는 계획을 세웠고, 이는 조선 정부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져 조선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의 후원을 받았다.[20][21]

독립문 건립은 독립협회가 주도하였다. 독립협회는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명하여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2. 1.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시모노세키 조약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 제국청나라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독립하였다.[3][5][6]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청나라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외국인들은 물론 조선 국민들조차 널리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독립의 상징으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우는 계획을 세웠다.[20]

淸|청중국어나라에 대한 복속을 상징하던 영은문1895년 2월에 철거되었다.[4] 이후 독립협회가 영은문 터 바로 옆에 독립문을 세웠고, 영은문 옆에 있던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개명되어 독립협회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의해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정축약조 이후 약 250년 동안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었다는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한국 내에서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점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13]

2. 2. 서재필의 제안과 독립협회 창립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청나라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음에도, 국내외적으로 그 사실이 널리 인식되지 못하는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다.[20] 그는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의 상징으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단체로 독립협회를 창립했다.[20] 이러한 서재필의 제안은 당시 내외 압력에 직면했던 조선 정부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하여, 조선 정부와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독립문 건축에 많은 후원을 하였다.[21]

서재필은 자신이 발행한 독립신문1896년 6월 20일 자 국문본 논설에서 독립문 건립 취지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제안했다.[20] 이 논설은 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고 있어,[22] 독립문의 취지가 일본 제국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23]

1896년 7월 4일독립신문 국문본 논설에서도 서재필은 독립문과 독립공원의 취지를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연결 지어 설명했다.[21]

그러나 1896년 6월 20일 발행된 독립신문 영문본에서 서재필은 독립문의 의미를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 및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사기, 부패, 속임수 체제 극복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설명했다.[21]

요약하면,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통해 조선이 청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외세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독립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하고자 했다.

2. 3. 조선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의 후원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외국인들은 물론 조선 국민들조차 널리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20] 이를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우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실행할 단체로 독립협회를 창립했다.[20]

서재필의 이러한 제안은 당시 대내외적 압력에 직면해 있던 조선 정부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와 이후의 대한제국 정부는 독립문 건립에 많은 후원을 하게 되었다.[21]

서재필은 독립문 건설 지원을 위해 독립 협회를 창립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조선 시민들은 신문의 공개 캠페인을 통해 독립문 건설에 기부했다.[7] 서재필은 독립신문 영문판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The Independent영어 (독립신문), 1895년 6월 20일[8]

The fault-finders will find fault and the pessimists will croak, and those who can see nothing but the fact that the Emperor is still enjoying the hospitality of the Russian Legation, may treat Korean independence as a joke, but they all argue from their fears and not from actual facts or future possibilities. Today we rejoice in the fact that His Majesty has decided to erect a new gate outside the West Gate on the site of the old EUN-MOON, or the gate of ' '''Independent Gate'''. We hope the inscription will be in the Un-moon, though it may be in Chinese. For centuries that gate stood as a constant insult to Korean autonomy, which China always claimed whenever she was held responsible for any tremor in the peninsula, but which she always disclaimed whenever it was safe to do so. She disclaimed once too often, and now her "suzerainty" is where the old gate was, viz., nowhere. And now on the same spot a gate is to be erected to show for all time the negation of Manchu domination, and that Korea is free from the baneful influence of Chinese patronage. We also hope that this gate means independence from the system of fraud, corruption and chicanery which today makes the most populous empire in the world the laughing stock of the world. This gate means independence not only from China, but from Japan, Russia, and every European power. …영어

불평론자들은 불평하고 비관론자들은 불만을 터뜨릴 것이며, 고종 황제가 여전히 러시아 공사관의 환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농담으로 취급될 수 있지만, 그들은 모두 현재의 사실이나 미래의 가능성이 아닌 자신들의 두려움에 근거하여 논쟁을 벌입니다. 오늘 우리는 국왕 폐하께서 서대문 밖의 옛 영은문 터에 독립문이라는 새로운 문을 세우기로 결정하신 사실에 기뻐합니다. '''독립문'''. 우리는 그 비문이 언문으로 쓰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수세기 동안 그 문은 한국의 자율성에 대한 끊임없는 모욕으로 서 있었는데, 중국은 한반도에서 어떤 떨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마다 항상 이 자율성을 주장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할 때는 항상 이를 부인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여러 번 부인했고, 이제 그녀의 "종주권"은 옛 문이 있던 곳, 즉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같은 자리에 문이 세워져 영원히 만주 지배를 부정하고, 한국이 중국의 후원이라는 해로운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보여주기 위해 세워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문이 오늘날 그 가장 인구가 많은 제국을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기, 부패, 속임수 체제에서도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문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한국어

3. 건축 과정

1896년 11월 21일자 독립문 기공식 초정장


독립문 기공식 전경


독립문은 프랑스 파리에투알 개선문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정부의 지원과 각계 조선 국민들의 광범위한 모금 활동을 통해 1896년 11월 21일 기공식을 열었다.[27] 1898년 1월에 준공되었다.[19] 독립공원은 자금력의 한계로 인해 원래 계획대로 크게 개설되지는 못하였다.[23]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면서, 독립협회는 청에 대한 복속을 상징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터 바로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 또한 영은문에 인접해 있던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개명되어 독립협회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독립문은 높이 14.28m, 너비 11.48m이며,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고, 1979년 정비 사업으로 본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이동되었다.

칙령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독립관은 일진회의 연설 장소가 되었고, 청중이 늘어나 독립관이 비좁아지자 그 북쪽에 팔각정이 건설되었다.[12]

3. 1. 설계와 디자인



독립문은 프랑스 파리에투알 개선문을 본떠 만들어졌다.[27] 설계는 외국인이 맡았으나, 건축 과정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였다.[21]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독립문을 설계한 사람이 독일공사관에 근무한 스위스인 기사라고만 설명하였다.[21] 2009년에 들어 일부 러시아 사학자들은 독립문의 설계자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라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바틴이 여러 국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국제인이라는 것뿐이다.[31] 문화재청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2020년대까지도 사바틴은 명성황후 시해를 목격한 외국인으로서의 행적이 널리 알려져 있을 뿐이고, 경복궁 관문각과 러시아 공사관에 대해서만 관여가 확실하게 확인될 뿐이며, 독립문 설계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32]

독립문은 화강석을 쌓은 형태로, 내부에 정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독립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20]

3. 2. 심의석의 역할



독립문 건축 과정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였다.[21] 1896년 11월 21일 기공식을 열고[27] 1898년 1월에 준공되었다.[19]심의석|Sim Ŭi-sŏk한국어이 건설 과정을 감독했다.[1]

3. 3. 건립 비용과 모금 활동

서재필1896년 7월 4일자 『독립신문』 논설에서 독립문 건설의 의의를 밝혔다.[11]

독립문은 프랑스 파리에투알 개선문을 본떠 만들어진 것으로, 정부 지원 및 각계 조선 국민들의 광범위한 모금 활동을 통해 1896년 11월 21일 기공식을 열었다.[27]

4. 독립문의 상징성과 활용

독립문은 높이 14.28m, 너비 11.48m로,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 파리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에는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이동되었다.[11]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승리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은 청에 대한 복속을 상징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협회는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또한 영은문 옆에 있던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협회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독립문 건립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모금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독립문 건립의 주된 목적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가 이씨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것이었다.[13] 그러나 한국 내에서는 정축약조 이후 약 250년간 이씨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었다는 역사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고, 한일 병합이나 일제강점기에 대한 감정이 강하여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13] 광복절처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기념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아,[15] 2010년대 이후에도 독립문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14][15][9]

이후 칙령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독립관은 일진회의 연설 장소가 되었고, 청중이 늘어나 독립관이 비좁아지자 그 북쪽에 팔각정이 건설되었다.[12]

4. 1.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상징

일제강점기에 독립문은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특히 3·1 운동 과정에서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28]

일본 제국은 통치 초기에 독립문을 청일전쟁에서의 승리와 내선일체의 상징으로 활용하고자 문화재로 지정하고 수리하기도 하였다.[28] 그러나 독립문이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 상징물이 되자, 일본 제국은 독립문에 대한 기록을 검열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독립문에 관한 일제강점기의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문은 주로 해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되었다.[29]

4.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활용

일제강점기에는 독립문에 관한 기록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일본 제국의 검열 때문으로 추측된다. 일본 제국은 통치 초기에 독립문을 청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 내선일체의 상징 등으로 활용하고자 문화재로 지정하고 수리하였으나, 오히려 3·1 운동 과정에서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가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28] 이에 독립문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으나, 주로 외국에서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광복 이후 독립문은 독립협회의 회원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 하에 독립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1954년부터 사용된 대한민국의 100환 지폐 뒷면에는 독립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에는 성산대로 건설 과정에서 해체되어 영은문 주초와 함께 약 70m 이전되었다.[30] 현재는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있으며,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또는 5번 출구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4. 3. 현판 글씨 논란

독립문 현판 글씨는 누가 썼는지에 대해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과 김가진이 썼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은 그가 독립협회 초기에 긴밀하게 관여했고,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는 풍문이 실렸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23] 반면, 김가진이 썼다는 주장은 김가진 역시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의 글씨체가 독립문 현판 글씨와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23] 김가진의 후손들은 이러한 점을 들어 독립문 현판 글씨가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23]

5. 현대의 독립문

1963년 1월 21일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30]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영은문 주초와 함께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되었다.[30][6][2] 현재 위치는 서대문독립공원 내이며,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2021년 6월 2일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회원들이 독립문 앞에서 일본에 항의하는 미신고 시위를 벌였다.[16]

5. 1. 사적 지정과 이전

1963년 1월 21일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30]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영은문 주초와 함께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되었다.[30][6][2] 현재 위치는 서대문독립공원 내이며,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5. 2. 위치와 접근성

독립문은 원래 영은문 터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대 도시 도로 건설로 인해 영은문 주초와 함께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되었다.[6][2] 현재는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있으며,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또는 5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5. 3. 최근 사건

2021년 6월 2일, 대한민국 좌파이자 이적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회원들이 독립문 앞에서 일본에 항의하는 미신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도쿄 올림픽과 일본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적힌 욱일기를 불태웠다.[16]

6. 갤러리



이전 후의 독립문과 서울 영은문 주초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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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Dongnimmun Arch, Seoul http://English.cha.g[...] 2022-08-01
[3] 서적 Everlasting Flower: A History of Korea Reaktion Books
[4] 서적 Korea-China Relations in History and Contemporary Implications https://link.springe[...] Palgrave Macmillan Cham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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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뉴스 독립문, 일제 아닌 중국한테서 독립 상징 https://www.hani.co.[...] 한겨레 2022-07-25
[24] 웹인용 조선 인민이 독립이라 하는 것을 모르는 까닭에 외국 사람들이 … https://lod.nl.go.kr[...]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2022-07-25
[25] 웹인용 아마 조선도 차차 되어 가나 보더라 어찌 하여 그렇소 조선 사람들이 … http://lod.nl.go.kr/[...]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2022-07-25
[26] 웹인용 The Croakers May Croak and the Pessimists May Growl and the Independence of Korea May … http://lod.nl.go.kr/[...]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202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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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뉴스 일제는 왜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했을까? https://www.asiae.co[...] 아시아경제 2022-07-25
[29] 웹인용 독립문 120년의 여정 https://museum.seoul[...]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기획전시 - 로비전시 2022-07-25
[30] 뉴스 ‘건립부터 이전까지’… 120년의 역사로 살펴본 ‘독립문’ https://www.newscj.c[...] 천지일보 2022-07-25
[31] 뉴스 한국 서양건축의 비조 사바친 베일 벗어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22-07-25
[32] 뉴스 ‘명성황후 시해 목격자’ 러 청년 사바틴이 조선의 건축물에 남긴 흔적은…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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