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1952년)
1. 개요
김기태(1952년)는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한 프로 야구 선수이다. 1970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언더스로 투수로 활약하며 1974년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1975년 교통사고로 시력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79년과 1980년에는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수상하며 난카이 호크스에서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 198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후 한국 프로 야구 청보 핀토스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1970년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언더핸드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1980년에는 0구 세이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선수명 | 김성기태(金基泰) |
|---|---|
| 원어명 | Kim Ki-Tae |
| 로마자 표기 | Gim Gitae |
| 국적 | 대한민국 → 일본 |
| 출생지 |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 |
| 신장 | 178cm |
| 체중 | 78kg |
| 利き腕 | 오른쪽 |
| 打席 | 오른쪽 |
| 수비 위치 | 투수 |
| NPB 드래프트 | 드래프트 5위 |
|---|---|
| KBO 리그 입단 년도 | 1986년 |
| 경력 | 고노하나 상업 고등학교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1 ~ 1976) 난카이 호크스 (1977 ~ 1984)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5) 청보 핀토스 (1986) 삼성 라이온즈 (1987) |
|---|
| NPB 첫 출장 | 1972년 5월 31일 |
|---|---|
| NPB 최종 출장 | 1985년 10월 24일 |
| KBO 첫 출장 | 1986년 4월 1일 인천 대 롯데전 구원 등판 |
| KBO 최종 출장 | 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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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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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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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일본 사람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20세기 일본 사람 -
스가마타 데쓰오
스가마타 데쓰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수비수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히타치 제작소 축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1980년과 1982년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
1952년 출생 -
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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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출생 -
이학영
2. 일본 프로 야구 경력
1971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한 김기태는 1976년까지 뛰었다. 이후 1977년부터 1984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에서, 1985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김기태의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소속팀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승률 | 투구 이닝 | 방어율 | WHIP |
|---|---|---|---|---|---|---|---|---|---|---|---|---|
| 1972 | 히로시마 | 27 | 7 | 2 | 0 | 3 | 3 | - | .500 | 70.2 | 3.95 | 1.47 |
| 1973 | 40 | 15 | 3 | 2 | 10 | 6 | - | .625 | 131.1 | 2.54 | 1.02 | |
| 1974 | 44 | 36 | 11 | 2 | 20 | 15 | 0 | .571 | 252.0 | 3.64 | 1.13 | |
| 1975 | 16 | 2 | 0 | 0 | 1 | 0 | 4 | 1.000 | 27.0 | 2.67 | 1.19 | |
| 1976 | 43 | 10 | 1 | 0 | 2 | 9 | 4 | .182 | 102.1 | 4.84 | 1.42 | |
| 1977 | 난카이 | 31 | 25 | 10 | 2 | 10 | 11 | 1 | .476 | 189.2 | 2.51 | 1.13 |
| 1978 | 19 | 0 | 0 | 0 | 0 | 4 | 3 | .000 | 30.1 | 4.15 | 1.15 | |
| 1979 | 53 | 0 | 0 | 0 | 4 | 5 | 16 | .444 | 98.1 | 3.29 | 1.03 | |
| 1980 | 31 | 0 | 0 | 0 | 6 | 4 | 13 | .600 | 56.2 | 3.65 | 1.09 | |
| 1981 | 23 | 0 | 0 | 0 | 2 | 0 | 7 | 1.000 | 30.0 | 1.80 | 0.87 | |
| 1982 | 57 | 0 | 0 | 0 | 6 | 9 | 21 | .400 | 78.1 | 2.64 | 1.07 | |
| 1983 | 40 | 0 | 0 | 0 | 4 | 4 | 15 | .500 | 54.0 | 3.67 | 1.19 | |
| 1984 | 20 | 0 | 0 | 0 | 0 | 1 | 8 | .000 | 21.0 | 3.86 | 1.24 | |
| 1985 | 요미우리 | 17 | 0 | 0 | 0 | 0 | 0 | 0 | ---- | 20.1 | 4.87 | 1.52 |
| 통산 || 461 || 95 || 27 || 6 || 68 || 71 || 92 || .489 || 1162.0 || 3.33 || 1.16 |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2.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71-1976)
1970년 가을, 고하나 상업고등학교(현 오사카카이세이학원고등학교)에서 이듬해 봄 호세이 대학 진학이 거의 결정되었으나, 히로시마 도요 카프 스카우트 기바 사토루의 끈질긴 설득으로 드래프트 5위로 입단했다. 긴조 본인도 "사실은 호세이 대학으로 결정되어 PL학원의 아라이 히로마사와 함께 갈 예정이었다"라고 말했다.
서브마린 투수로,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속구를 무기로 1972년에 1군에 정착했다. 1973년에는 10승 6패의 성적으로 규정 투구 이닝 (리그 8위, 방어율 2.54)에 도달했다.
1974년에는 소토키바 요시로, 아니야 무네야, 사에키 가즈시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의 중심으로 분전하여, 팀은 최하위였지만 20승을 거두어 최다승, 207탈삼진으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다. 최하위 팀에서의 최다승 획득은 1962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쿠보 마사히로 이후 사상 두 번째였다.
그러나 같은 해 오프에 포상으로 향한 오이타현 유후인에서 지인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동승했을 때 교통 사고에 휘말려, 흩날린 앞 유리 파편을 얼굴에 맞았다. 당시 일본차에서는 1987년까지 접합 유리 사용이 의무화되지 않았고, 강화 유리가 사용된 차종이 많아 자칫하면 실명 위기에 빠졌다.
1975년 8월에 복귀하여 등판 16경기에서 1승 4세이브를 기록, 히로시마의 첫 우승에 공헌했다.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4경기에 등판했다. 제3전에서 선발로 나섰지만, 4실점하고 3회에 강판되었다. 리그 우승 결정 경기 다음 날 경기에서 승리 투수를 둘러싸고 감독 코바 다케시에 대한 불신감이 싹트며 관계가 악화되었다.
1976년은 2승에 그쳤고, 노무라 가쓰야의 희망도 있어, 마쓰바라 아키오, 몬다 준료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했다. 코바는 후년에 "노무라 씨라서 긴조를 넘겨줬다"라고 말했다.
2.2. 난카이 호크스 시절 (1977-1984)
장명부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한 김기태는 1977년 에가와 스구루의 구원 투수 전향으로 선발로 복귀하여 10승, 방어율 2.51(리그 4위)를 기록했다. 이는 난카이 선발 투수진 유일의 방어율 2점대였다. 1978년부터 다시 마무리로 전향하여 팀이 부진한 가운데 구원 에이스로 활약했다.
1979년에는 4승 16세이브(20SP)로 최우수 구원 투수가 되었다. 1980년에도 6승 13세이브(19SP)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받았다.
1984년 6월 9일 킨테츠전에서는 가토 히데지에게 통산 10번째 만루 홈런이자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허용했는데, 이는 당시까지의 만루 홈런 피홈런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85)
1984년 시즌 후, 나카조 요시노부와의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했다. 그러나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985년 시즌 후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났다. 당시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세이브 수(92)는 역대 5위였다.
3. 한국 프로 야구 경력
김기태는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난카이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1970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언더스로 투수로 활약하며 1974년에는 20승을 거두며 최다승,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동시에 획득했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인해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여 구원 투수로 전향, 2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지만,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세이브는 당시 역대 5위였다.
| 구단 | 연도 |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71년-1976년 |
| 난카이 호크스 | 1977년-1984년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5년 |
3.1. 청보 핀토스 시절 (1986)
1986년, 김기태는 한국 프로 야구 팀인 청보 핀토스에 입단하여 한국 무대에 데뷔했다. 청보에서는 장명부나 신포 스오 등과 같은 선수들과 동등한 활약을 기대했지만, 42경기에 등판하여 9승 5세이브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이는 같은 해 입단한 김성래에게 뒤지는 결과였다.
3.2.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87)
1987년 1월, 청보 핀토스에서 정현발, 김근석과의 2:1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7승을 기록하며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였다. 1987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 등판했으나 패전 투수가 되었고,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선수 시절 특징
김기태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드문 언더핸드 강속구 투수였다. 테이크백에서 타자에게 등번호가 보일 정도로 상체를 크게 비트는 독특한 투구폼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투구폼은 한국 야구계에 "매가 하늘을 나는 듯한 폼"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우아하고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히로시마와 난카이 시절 팬들은 "인상적인 아름다운 폼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마츠누마 히로히사는 스기우라 타다시,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김기태를 언더스로 3걸로 꼽으며, 그의 백 스윙과 팔의 휘두름 크기는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평가했다. 다만, 야마다 히사시는 타자에게 공의 그립이 완전히 보인다는 약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김기태의 구속이 "정말로 빨랐다"고 평가했다.
김기태는 위력적인 직구를 주무기로 삼았으며, 변화구는 거의 던지지 않았다. 고토 마사하루의 저서 『스카우트』에 따르면, 김기태는 현역 은퇴 시까지 '약간 변화하는 정도의 체인지업(본인의 말로는 "안 꺾이는 커브")'밖에 던질 수 없었다고 한다. 1975년 교통사고로 시력에 문제가 생겼으나, 특수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고 경기에 임하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베이스볼 매거진에 따르면, 수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왼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고, 특수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여 전력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쿠모토 유타카는 난카이 시절의 김기태를 모리 시게카즈나 쓰다 쓰요시와 같은 본격파 투수였다고 평가하며, "(투구의 팔로스루 가까이까지) 좀처럼 공을 놓지 않고, 떠오르는 듯한 궤도로 보여서, 꺼리는 투수 중 한 명이었다"고 말했다.
5. 은퇴 이후
은퇴 후 오사카시히라노구에서 소바집을 경영했다. 이후 한국 지인이 경영하는 관련 회사를 맡아 12년 정도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2020년 현재는 오사카에서 소년 야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6. 기타
김기태는 호세이 대학 시절, PL학원의 아라이 히로마사와 함께 뛸 예정이었고, 실제로 친분이 있었다. 1980년 10월 2일에는 0구 세이브라는 진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 시절, 김기태는 뛰어난 실력으로 한국 야구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프로 의식과 옵션 계약 개념을 심어주는 등, 리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7. 상세 정보
김기태는 일본 고노하나상업고등학교(현재: 고노하나학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프로 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1971년-1976년), 난카이 호크스(1977년-1984년, 장명부를 상대로 트레이드), 요미우리 자이언츠(1985년)를 거쳐, 한국 프로 야구 청보 핀토스(1986년), 삼성 라이온즈(1987년 1월 청보 핀토스에서 트레이드, 연봉 120)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80년 10월 2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난카이 대 한큐 후기 12차전에서 9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하여, 초구를 던지기 전에 1루 주자 후쿠모토 유타카를 견제구로 아웃시키면서 경기가 종료되어 "0구 세이브"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고등학교 시절인 1969년,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한국어의 일원으로서 방한한 적이 있어, 프로 입단 전부터 유명했다. 1969년 첫 방한 당시, 지나친 의욕으로 연습을 많이 한 탓에 손가락이 부어올라 원정 첫 경기에 결장했고,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한국어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특별시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선린상업고등학교, 성남고등학교 (서울)한국어와의 경기에서 3일 연속 등판했다. 15일 더블헤더 2차전 선린상고전에서는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16일 성남고전, 17일 선린상고-성남고 연합전에서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었다. 20일 선린상고전에서도 완투승을 거두며, "잠수함"이라는 별명과 함께 잠실야구장을 연일 만원으로 만들 정도의 흥행력을 과시했다. 김기태가 3일 연속 등판을 자청한 이유는 재일동포에 대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의지와 "지방에서 친척들이 관람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1970년 두 번째 방한 당시, 선린상업고등학교전에서 16탈삼진 완봉승은 한국 야구 관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같은 해 김기태가 히로시마에 입단했을 때 중앙일보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허구연한국어은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특별 프로그램 『전설의 재일동포 야구 선수들』에서 "당시 한국에는 언더스로가 거의 없었던 탓에, 김기태의 투구에는 전혀 속수무책이었다"고 회고했다.
1999년 6월 27일 요미우리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시구 투수를 맡았지만, 타석에 들어선 야마모토 고지에게 초구를 거른 후, 2구째를 좌익수석 홈런으로 허용하는 진기한 일이 일어났다. 김기태와 야마모토의 등번호는 모두 27번이었지만, 착용했던 유니폼은 김기태는 1971년 - 1972년의, 야마모토는 1968년 - 1970년의 것이었다.
김기태(일본어: かねしろ もとやす일본어, 1971년 - 1985년) 또는 김기태(김기태한국어, 1986년 - 1987년)라는 등록명을 사용했다.
| 구단 | 등번호 |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24번 (1971년 ~ 1976년) |
| 난카이 호크스 | 24번 (1977년 ~ 1984년)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3번 (1985년) |
| 청보 핀토스 | 19번 (1986년) |
| 삼성 라이온즈 | 19번 (1987년) |
7.1. 연도별 투수 성적
7.2. 타이틀
* 최다승: 1회 (1974년)
* 최다 탈삼진: 1회 (1974년) ※일본어당시 연맹 표창 없음,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표창
* 최우수 구원 투수: 2회 (1979년, 1980년)
7.3. 기록
* 1980년 10월 2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난카이 대 한큐 후기 12차전에서 9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하여, 초구를 던지기 전에 1루 주자 후쿠모토 유타카를 견제구로 아웃시키면서 경기가 종료되어 "0구 세이브"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 한국에서는 고치카 상업고등학교 시절인 1969년,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한국어의 일원으로서 방한한 적이 있어, 프로 입단 전부터 유명한 존재였다.
* 1969년 첫 방한 당시, 지나친 의욕으로 연습을 많이 한 탓에 손가락이 부어올라 원정 첫 경기에 결장하게 된다. 김기태가 빠진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한국어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한국 측 관계자들로부터는 "결국 약한 선수들이 중심이 된 모국 관광단인가"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특별시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선린상업고등학교, 성남고등학교 (서울)한국어와의 경기에서 3일 연속 등판했다. 15일 더블헤더 2차전 선린상고전에서는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끝에 1-1로 비겼다. 16일 성남고전, 17일 선린상고-성남고 연합전에서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며, 한국 측 관계자들로부터 "재일동포는 역시 격이 다르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일 선린상고전에서도 완투승을 거두었지만, 이때 이미 서울 시민들로부터 "잠수함"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언더스로의 특이함 때문에 잠실야구장을 연일 만원으로 만들 정도의 흥행력을 과시했다. 김기태가 이 해에 3일 연속 등판을 자청한 이유는, 한국인들에게 재일동포에 대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지방에서 친척들이 관람하러 왔기 때문"이라는 실정도 있었다고 한다.
* 다음 해인 1970년 두 번째 방한 당시, 선린상업고등학교전에서 16탈삼진으로 완봉승을 거둔 경기는 한국의 야구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같은 해 김기태가 히로시마에 입단했을 때 중앙일보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후에, 청보 핀토스 감독으로서 김기태를 영입한 허구연한국어은,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특별 프로그램 『전설의 재일동포 야구 선수들』에서,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한국어 시절의 김기태를 평하며 "당시 한국에는 언더스로가 거의 없었던 탓에, 김기태의 투구에는 전혀 속수무책이었다"고 말했다.
* 1999년 6월 27일 요미우리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시구 투수를 맡았지만, 타석에 들어선 카프 우승 당시의 전우였던 야마모토 고지에게 초구를 거른 후, 2구째를 좌익수석 홈런으로 허용하는 진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때는 입단했던 해의 유니폼과 등번호를 재현하여 착용했기 때문에, 김기태와 야마모토의 등번호가 모두 27번이었지만, 착용했던 유니폼은 김기태는 1971년 - 1972년의, 야마모토는 1968년 - 1970년의 것이었다.
7.4. 등번호
| 구단 | 등번호 |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24번 (1971년 ~ 1976년) |
| 난카이 호크스 | 24번 (1977년 ~ 1984년) |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3번 (1985년) |
| 청보 핀토스 | 19번 (1986년) |
| 삼성 라이온즈 | 19번 (1987년) |
7.5. 등록명
* 김기태 (かねしろ 모토야스, 1971년 - 1985년)
* 김기태 (김기태한국어, 1986년 - 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