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가와 스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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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가와 스구루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1987년까지 선수 생활을 한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다. 고등학교 시절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많은 기록을 세웠고, 호세이 대학에서는 통산 47승을 기록했다. 1978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전격 계약을 맺었으나, 한신 타이거스와의 교섭 끝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프로에서는 135승을 기록하며 1980년과 1981년에 다승왕, 1981년에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뛰어난 구속과 커브,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신 킬러'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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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 스구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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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에가와 스구루 |
원어 이름 | Suguru Egawa |
일본어 표기 | 江川 卓 (えがわ すぐる; Egawa Suguru) |
출생일 | 1955년 5월 25일 |
출생지 | 후쿠시마현 이와키 군 요시마 촌 |
신장 | 183cm |
체중 | 90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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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 |
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연도 | 1978년 |
드래프트 순위 | 1순위 |
첫 출장 | 1979년 6월 2일 |
최종 경기 | 1987년 10월 28일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 (1979)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9 ~ 1987) |
NPB (일본 프로 야구) 통계 | |
승-패 | 135승 72패 |
평균 자책점 | 3.02 |
탈삼진 | 1366 |
수상 경력 | |
일본 트리플 크라운 | 1981년 |
센트럴 리그 MVP | 1981년 |
유튜브 채널 | |
채널 이름 | 에가와 다쿠의 다카사레 |
채널 URL | 에가와 다쿠의 다카사레 채널 |
활동 시작 | 2022년 1월 7일 |
장르 | 야구 |
구독자 수 | 약 25.6만 명 (2024년 1월 2일 기준) |
조회수 | 71,612,260회 (2024년 1월 2일 기준) |
실버 버튼 획득 | 2022년 |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Draft Dodgers - The Three Biggest Draft Scandals in NPB History Suguru Egawa - The Enemy of the People NPB Player Profiles |
2. 선수 경력
에가와 스구루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뛰어난 실력으로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쿠신가쿠인 시절 노히트 노런 9회, 퍼펙트 게임 2회를 기록했고, 호세이 대학 시절에는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17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1977년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스에 지명되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만 뛰고 싶다는 이유로 입단을 거부했다.[3] 1년 후 한신 타이거스가 1978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했지만, 에가와는 '공백의 하루'를 이용하여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었다.[7] 이 사건으로 에가와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한신에 입단한 후 고바야시 시게루와 트레이드되어 요미우리로 이적했다.[47]
프로 데뷔전(1979년 6월 2일 한신전)에서 리로이 스탠턴에게 홈런을 맞는 등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50] 이후 프로 첫 승을 거두며 활약했다. 루키 시즌은 9승 10패로 마감했다.
1980년 16승, 219탈삼진으로 최다 승리와 최다 탈삼진을 기록,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 20승, 평균 자책점 2.29, 221탈삼진으로 투수 5관왕을 달성하고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81년 일본 시리즈 4차전과 6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82년에도 19승, 196탈삼진, 24완투를 기록했지만, 사와무라상은 기타벳푸 마나부에게 돌아갔다. 1983년 여름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했지만,[54] 1984년 올스타전에서 8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했다.
1985년 랜디 바스와 대결에서 대부분 투수들이 고의사구를 선택했지만, 에가와는 정면 승부를 펼쳐 주목받았다. 바스는 에가와를 "최고의 투수"라고 평가했다.[125] 1986년 6월 26일, 에가와는 바스에게 7경기 연속 홈런 기록을 허용했다.
1987년 9월 20일, 고바야카와 다케히코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후 은퇴를 결심했다.[65] 은퇴 기자 회견에서 에가와는 오른쪽 어깨 부상의 한계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
프로 선수 시절 동안 뛰어난 완급 조절 능력을 보였다.[126] 9회까지 완투하기 위해 상대 중심 타선에는 전력 투구, 하위 타선에는 맞춰 잡는 투구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 머리에 사구를 맞은 경험[127]과 심판의 볼 판정을 싫어했기[128] 때문에 몸에 맞는 공과 볼넷이 적었다.
한신전 통산 36승 18패로 '한신 킬러'로 불렸다. 반면, 에가와와 트레이드된 고바야시 시게루는 한신 이적 후 요미우리전에서 부진했다. 타격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프로 초반에는 투수들의 공에 적응하지 못해 36타석 만에 첫 안타를 기록했다.[129]
2. 1. 아마추어 야구 시절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에서 태어나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덴류구(사쿠마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덴류강에서 돌팔매질을 하며 어깨를 단련했다.사쿠마 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하여 처음에는 외야수를 맡았으나, 1학년 도중 투수로 전향했다. 2학년 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도치기현 오야마시로 이주하여 오야마 중학교로 전학했다. 오야마 중학교 3학년 때 현 대회에서 우승했다. 오야마 고등학교 진학 예정이었으나, 소케이센을 보고 감명받아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2. 1. 1.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에서 태어나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덴류구(사쿠마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덴류강에서 돌팔매질을 하며 어깨를 단련했다.[17]사쿠마 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하여 처음에는 외야수 겸 투수였으나, 1학년 도중 투수로 전향했다. 2학년 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도치기현 오야마시로 이주하여 오야마 중학교로 전학했다. 오야마 중학교 3학년 때 현 대회에서 우승하고,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오야마 고등학교 진학 예정이었으나, 소케이센을 보고 감명받아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2. 1. 2. 고등학교 시절
사쿠신가쿠인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며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고교 재학 중 공식전에서 노히트 노런 9회, 퍼펙트 게임 2회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5] 특히, 1973년 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발 대회에서는 6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여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을 세웠다.[6]1971년 여름, 제53회 전국 대회 도치기현 예선 2차전(vs 아시오 고등학교)에서 구원 등판하여 5이닝 무안타 무볼넷 7탈삼진으로 퍼펙트 릴리프를 기록, 고교 첫 등판과 동시에 첫 승리를 장식했다. 준준결승전(vs 가라스야마 고등학교)에서는 도치기현 고교 야구 사상 최초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18][19] 그러나 준결승전(vs 우쓰노미야 상업고등학교)에서 연장 11회까지 던졌으나 후속 투수가 실점하는 바람에 팀은 패하여 고시엔 대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가을, 제24회 추계 간토 지구 대회 도치기현 예선에서 4경기에 등판해 30이닝 2실점, 탈삼진 37개, 평균 자책점 0.67을 기록했다. 1차전에서는 스즈키 다카마사, 이시다 마코토와 함께 ‘속구 투수 3인방’으로 불린 이시다가 소속된 아시카가 공업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승리했다. 간토 대회 1차전인 군마 현립 마에바시 공업고등학교전에서는 1회 2사부터 4회까지 10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압도적인 투구를 선보였으나, 5회 타석에서 상대 투수의 공에 머리를 맞아 퇴장당했다(그대로 병원에 입원).[20]
1972년 여름, 제54회 전국 대회 도치기현 예선에서 2차전(vs 오타와라 고등학교) , 3차전(vs 이시바시 고등학교), 준준결승전(vs 도치기 공업고등학교)에 등판하여 3경기 모두 노히트 노런(그 중 3차전에서는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27이닝 연속 무안타와 46개의 탈삼진(한 경기 평균 15.3 탈삼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107] 그러나 준결승전(vs 오야마 고등학교)에서 연장 11회말 끝내기 스퀴즈 번트를 허용하며 패해 고시엔 대회 출전은 좌절되었다.
1972년, 제25회 추계 간토 지구 도치기현 예선에서는 4경기에 등판해 29이닝 무실점, 45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고 2경기를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간토 대회 준결승에서는 조시 상고를 상대로 1안타 20개의 탈삼진 완봉승을 거두었다.
1973년, 제45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에가와의 대회’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었다. 1차전에서 호쿠요 고교를 상대로 4안타 19탈삼진 완봉승을 거두었다. 2차전 고쿠라미나미 고교전에서는 7이닝 10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준준결승 이마바리니시 고교전에서는 8연속 탈삼진을 포함해 매이닝 20탈삼진, 1안타 완봉승을 기록했다. 준결승에서 히로시마 상고를 상대로 매이닝 1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호투했으나, 8회에 실점하며 패했다. 이 대회에서 통산 6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현재까지 유지).
1973년 여름, 제55회 전국 대회 도치기현 예선에서 5경기에 등판하여 2피안타 70탈삼진 무실점, 연습 경기를 포함한 140이닝 무실점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기며 하계 고시엔 대회 진출을 확정지었다. 2차전(vs 모카 공업고등학교), 3차전(vs 우지이에 고등학교), 결승전(vs 우쓰노미야히가시 고등학교)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하계 고시엔 대회 1차전에서는 야나가와 상고를 상대로 연장 15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했다. 이 경기에서 한 경기 23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대회 통산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세웠다. 2차전 조시 상고전에서는 연장 12회말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2. 1. 3. 대학교 시절
호세이 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여 야구부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 통산 47승(역대 2위), 17완봉(리그 기록)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6회 선정되었다.[1] 1976년과 1977년 호세이 대학의 리그 4연패에 기여했다. 1977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에 1순위 지명되었으나 입단을 거부했다.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에가와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뛰어난 실력으로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쿠신가쿠인 시절에는 노히트 노런 9회, 퍼펙트 게임 2회를 기록했고, 호세이 대학 시절에는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17 완봉승을 기록하며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1977년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스에 지명되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만 뛰고 싶다는 이유로 입단을 거부했다.[3] 1년 후, 한신 타이거스가 1978년 드래프트에서 에가와를 1순위로 지명했지만, 에가와는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었다.[7] 이 과정에서 '에가와 사건'이 발생했고, 에가와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에가와는 한신에 입단한 후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47]
프로 데뷔전은 1979년 6월 2일 한신전이었는데, 리로이 스탠턴 등에게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50] 그러나 이후 프로 첫 승리를 거두는 등 활약했지만, 루키 시즌은 9승 10패로 마감했다.
1980년에는 16승, 219탈삼진으로 최다 승리와 최다 탈삼진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 20승, 평균 자책점 2.29, 221탈삼진으로 투수 5관왕을 달성하고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81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과 6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2년에도 19승, 196탈삼진, 24완투를 기록하며 활약했지만, 사와무라상은 기타벳푸 마나부에게 돌아갔다. 1983년 여름에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했지만, 침술 치료를 받으며 투구를 이어갔다.[54] 1984년 올스타전에서는 8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랜디 바스와의 대결에서 대부분의 투수들이 고의사구를 선택한 반면, 에가와는 정면 승부를 펼쳐 주목받았다. 바스는 에가와를 "일본과 미국을 통틀어 최고의 투수"라고 평가했다.[125] 1986년 6월 26일, 에가와는 바스에게 7경기 연속 홈런 기록을 허용했다.
1987년 9월 20일, 고바야카와 다케히코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후 은퇴를 결심했다.[65] 은퇴 기자 회견에서 에가와는 오른쪽 어깨 부상의 한계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 동안 뛰어난 완급 조절 능력을 보였다.[126] 9회까지 완투하기 위해 상대 중심 타선에는 전력 투구를, 하위 타선에는 맞춰 잡는 투구를 했다. 몸에 맞는 공은 적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머리에 사구를 맞은 경험 때문에 몸쪽 공을 던지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127] 볼넷도 적었는데, 이는 심판에게 볼 판정을 받는 위치로 공을 던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128]
한신과의 상대 전적에서 통산 36승 18패를 기록하며 '한신 킬러'로 불렸다. 반면, 에가와와 트레이드된 고바야시 시게루는 한신 이적 후 요미우리전에서 부진했다. 타격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프로 데뷔 초반에는 투수들의 공에 적응하지 못해 36타석 만에 첫 안타를 기록했다.[129]
2. 2.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과정 (공백의 하루 사건)
1978년 드래프트 회의 이틀 전, 에가와는 급히 귀국했다. 드래프트 회의 전날인 11월 21일, 후쿠오카 야구에서 세이부 그룹에 양도된 라이온즈의 독점 교섭권이 11월 20일로 상실되었다는 해석[44] 하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드래프트 외로 전격 계약을 맺었다. 이를 '공백의 하루 사건'이라고 한다.[45]센트럴 리그 사무국은 이 계약을 즉시 무효로 하고 에가와의 선수 등록을 취소했다. 이에 항의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다음 날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했다.[45]
드래프트 회의에서 난카이, 긴테쓰, 롯데, 한신의 4개 구단이 에가와를 1순위로 지명했고, 추첨 결과 한신이 에가와와의 교섭권을 획득했다.[46]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전 12개 구단이 참석하지 않은 드래프트 회의는 무효"라며 한신의 교섭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카네코 사토시커미셔너의 "강력한 요청"으로 1979년 1월 31일, 에가와는 한신과 계약을 맺고 입단한 후, 같은 날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게 되었다.[47]
이 사건으로 에가와는 세간의 비판을 받으며 악역으로 몰렸다. 언론은 에가와를 비판하고 고바야시를 비극의 영웅으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 "에가와루"(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억지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라는 신조어가 유행어가 되었다. 또한, "요미우리 자이언츠-다이호-계란 구이"를 비꼬아 "에가와-피망-기타노우미"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48]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시 등번호 19번을 제시받았지만, 고바야시 시게루가 사용하던 번호이기에 거부하고 비어 있던 등번호 30번을 착용했다. 한신 입단 시 등번호는 3번이었다.
개막 이전의 트레이드는 야구 협약 위반이라는 비판이 있어 철회되었고, 시즌 개막일인 4월 7일에 정식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되었다.
2.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에가와는 197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과정에서 '에가와 사건'이라는 논란을 겪었지만,[47] 데뷔 첫 해에 9승 10패를 기록했다. 1980년에는 16승을 거두며 다승왕과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했다.1981년에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20승 6패, 평균 자책점 2.29, 221탈삼진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6번째이자 20세기 마지막, 그리고 쇼와 시대 마지막 투수 5관왕[12]을 달성했다. 센트럴 리그 MVP도 수상하며[13]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인정받았다.
1983년 여름,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1984년 올스타전에서 8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125]
1985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와의 정면 승부로 화제를 모았다.[9] 당시 대부분의 요미우리 투수들이 바스를 고의사구로 거른 반면, 에가와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그해 바스에게 홈런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단 2개의 홈런만을 허용하며 강한 면모를 보였다.
1987년, 에가와는 고바야카와 다케히코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은퇴를 결심했다. 9월 20일, 히로시마전에서 고바야카와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후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135승 72패 3세이브, 평균 자책점 3.02를 기록했다.
3. 은퇴 후
니혼 TV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74] 스포츠 우르구스, Going!Sports&News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에가와 스구루는 뛰어난 구속과 많은 회전이 걸린 직구, 그리고 큰 각도로 꺾이는 커브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직구 위주의 투구를 했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슬라이더 등 다양한 변화구를 연마했다.[85] 9회까지 완투하기 위해 완급 조절을 하는 능력이 뛰어났다.[87] 몸에 맞는 공과 볼넷이 적어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였다.[88][89][90] 홈런을 많이 허용하는 '일발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91]
에가와의 빠른 공은 고교 시절 이미 최고조에 달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당시 스피드건은 없었지만 150km/h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로 입단 후 최고 구속은 151km/h[79]) 스피드건이 도입된 이후 에가와의 직구 구속이 135km/h 전후로 기록된 영상이 남아있는데, 이에 대해 가케후 마사유키, 니시모토 사토시, 마키하라 히로미 등은 "에가와의 구속이 140km/h를 밑돌 리 없다"고 증언하며 당시 스피드건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가케후는 "최소 150km, 컨디션이 좋으면 155km 이상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12월 4일 Going!Sports&News에서 에가와 자신이 가장 빨랐다고 하는 1981년 나카즈카 마사유키에게 던진 스트레이트의 구속을 분석한 결과, 158km/h로 나왔다.[80]
에가와의 강속구는 짧은 손가락 덕분이기도 하다. 짧은 손가락은 회전을 걸기에는 유리했지만, 포크볼 등의 변화구를 던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 입단 전까지는 커브만 던질 수 있었다. 가케후와 다카기 유타카에 따르면 에가와는 손목 관절이 매우 유연하여, 타석에서 보면 릴리스 직전까지 손바닥이 보였다고 한다. 이 유연하고 강인한 손목으로 공에 강력한 백 스핀을 주어, 에가와 특유의 뻗어 나가는 직구가 만들어졌다고 다카기는 해설했다. 가케후는 이를 "스핀이 걸린 독특한 스트레이트"라고 평가했다.[83]
1980년대에는 회전이 걸린 스트레이트는 "구질이 가볍다", "장타를 맞기 쉽다"는 평가를 받으며 경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유체역학을 이용한 해석을 통해, 백 스핀 수가 많은 스트레이트는 일반적인 직구보다 가라앉지 않고 치기 어려운 공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에가와의 떠오르는 듯한 스트레이트는 이 효과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에가와의 변화구는 커브뿐이지만, "명수"라고 불릴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에가와는 프로 입단 초에는 빼는 커브였지만, 어깨를 다친 후에는 휘두르는 커브로 바꿨다고 한다.[85] 1985년경부터 던지기 시작한 "상대의 허리를 젖히는 슬라이더 계열의 볼"은 코시히카리가 화제가 되어, 실제로 코시히카리가 증정된 일화가 있다. 이에 재미를 붙인 에가와는 멜론을 받으려고 "상대의 마스크(얼굴)를 녹여버리는 얼굴 앞을 통과하는 볼"인 마스크 멜론을 개발했다. 현역 시절의 라이벌이었던 가케후 마사유키는 "스트레이트에 대한 강한 고집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투수였다고 말했다.[86]
한신의 랜디 버스가 55홈런이나 7경기 연속 홈런 등으로 오 사다하루의 기록에 근접했을 때, 소극적인 요미우리 투수진 가운데 승부를 건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버스가 2년 연속 3관왕을 획득한 1985년과 1986년, 1985년에는 에가와에게 피홈런 0개, 1986년에는 7경기 연속 홈런과 연속 경기 타점 기록 경신 중 마지막 경기(13경기)에서 맞은 2개뿐이었다. 에가와 은퇴 시, 버스는 에가와를 "일본, 미국을 통틀어 지금까지 대전한 최고의 투수"라고 칭찬했다.
에가와는 9회를 완투하기 위해 중심 타자에게는 "최고 출력"까지 올리고, 하위 타선의 선수에게는 컨트롤을 중시하는 등 완급 조절을 했다.[87] 9회에 전력 투구로 삼진을 잡는 것을 "역시 칠 수 없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중시하며, 그 때문에 7회·8회는 약간 힘을 뺐다고 말했다. 현역 시절 팀 동료였던 시노즈카 카즈노리는 "에가와 씨에게는 기어가 있다"고 표현하며, "경기 중에 여기다 싶은 때, 특히 주력 타자와 대전할 때는 톱 기어에 들어갔다. 그 큰 몸이 더욱 한 바퀴 크게 보였다"고 회고했다.
에가와는 사구 수가 매우 적었는데, 이는 고교 시절 자신이 머리에 사구를 맞은 경험에서 엄하게 안쪽을 공략하는 것에 망설임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88] 또한 볼넷도 적었다. 에가와의 경우, 강속구로 압도할 수 있었던 전성기의 볼넷 수가 매우 적은 것이 눈에 띈다. 에가와는 볼을 던지는 것 자체가 싫었다고 말하며, 당시 요미우리에서는 카운트 2스트라이크 노볼에서 안타를 맞으면 벌금을 냈기 때문에, 포수의 간청으로 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볼을 던졌다고 한다.[90] 일반적으로 속구파 투수는 컨트롤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에가와는 그렇지 않았고, 컨트롤 면도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홈런이 많아 '일발병'이라고 불린 투수 중 한 명이며, 홈런을 맞았을 때 마운드 위에서 양손을 허리에 대고 목을 갸우뚱거리는 장면이 자주 보였다. 1982년에는 리그 최다인 36홈런을 맞았다. 9이닝당 피홈런은 통산 1.23개이다.[91] 에가와는 퀵 모션을 하지 않는 투수였던 것으로 알려져, 야야시키 카나메는 "에가와 씨가 던지고 있을 때의 도루 성공률은 100%에 가깝지 않을까. 주자를 무시하니까 여유 있게 달릴 수 있잖아요. 반대로, 얼마나 자신의 오른팔에 자신감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라고 증언했다.[92]
5. 논란 및 사건
에가와 스구루는 선수 생활 동안 '공백의 하루 사건', 은퇴 기자 회견 등 여러 논란과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43][48]
5. 1. 공백의 하루 사건
1978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 전날, 에가와 스구루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전격적으로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계약은 드래프트 회의를 통한 정식 계약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백의 하루'를 이용한 편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 프로 야구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43]당시 일본 프로 야구 규약에는 드래프트 회의에서 선수 지명권을 얻은 구단만이 선수와 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규정에는 허점이 있었다. 드래프트 회의 전날은 이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공백의 하루'였던 것이다. 요미우리는 이 점을 이용하여 에가와와 비밀리에 계약을 맺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구단들과 야구 팬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에가와를 1차 지명했던 한신 타이거스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커미셔너는 요미우리의 에가와 영입을 무효화하고, 에가와는 한신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가와는 곧바로 요미우리의 고바야시 시게루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되었다.[43]
이 사건으로 인해 에가와는 '일본 야구계의 악역'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고, 언론과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에가와루'(えがわる)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5. 2. 은퇴 기자 회견
引退記者会見|은퇴 기자 회견일본어은 감동적인 장면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에가와는 은퇴 기자 회견에서 '금단의 단지'에 침을 맞는 치료를 받았다고 밝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48]6. 인간 관계
니시모토 다카시와는 현역 시절 라이벌 관계였다. 에가와가 요미우리에 입단했을 때, 구단이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에가와에게 주었기 때문에 니시모토가 에가와를 라이벌로 생각했다. 1981년 니시모토가 사와무라 상을 수상한 이후에는 에가와도 니시모토를 라이벌로 인정했다.[97] 두 사람은 투구 연습 때 330개 이상 공을 던지거나, 서로가 선발 등판하는 경기에서 상대가 부진하기를 바라는 등 경쟁심을 불태웠다. 그러나 은퇴 후에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99]
가케후 마사유키와는 현역 시절에 올스타전에서 말을 섞는 정도였으나, 은퇴 후 해설자로 함께 일하며 친분을 쌓았다.[100]
7. 평가
에가와 스구루는 뛰어난 실력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들로 인해 일본 야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 시절, 공식전에서 노히트 노런 9회, 퍼펙트 게임 2회를 기록하고,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한 대회 통산 최다 탈삼진 60개 및 8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압도적인 활약을 펼쳐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2] 특히 1973년 봄 제45회 선발 대회는 "에가와를 위한 대회"라고 불릴 정도였다.[22]
일본 프로 야구에 입단한 후에는 1978년 드래프트 회의 전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전격 계약하며 이른바 "공백의 하루 사건"을 일으켰다.[44] 이 사건으로 인해 에가와는 세간의 비판을 받으며 악역으로 몰리기도 했다.[47]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1980년대 일본 프로 야구와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1981년에는 투수 5관왕[12]을 달성하고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3]
은퇴 후에는 니혼TV·라디오 일본의 야구 해설을 맡고 있으며, 여러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8.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에가와 스구루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다음과 같은 여러 타이틀과 상을 받았다.
- 다승왕: 2회 (1980년, 1981년)[101]
-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 (1981년)
- 최고 승률: 2회 (1981년, 1984년)[102]
- 최다 탈삼진: 3회 (1980년, 1981년, 1982년)[101]
- MVP: 1회 (1981년)[12]
- 최우수 투수: 2회 (1980년, 1981년)
- 베스트 나인: 2회 (1980년, 1981년)
- 월간 MVP: 2회 (1981년 7월, 1981년 8월)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81년)
- 올스타전 MVP: 1회 (1984년 제3차전)
- 고라쿠엔 MVP상: 1회 (1980년)
- 주니어 올스타 게임 최우수 투수상: 1회 (1979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1981년)[13]
1981년에는 MVP와 최우수 투수상을 동시에 수상했고, 베스트 나인에도 2회(1980년, 1981년) 선정되었다.
8. 1. 타이틀
연도 | 소속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79 | 요미우리 | 27 | 23 | 7 | 2 | 1 | 9 | 10 | 0 | -- | .474 | 653 | 161.0 | 132 | 22 | 50 | 3 | 0 | 138 | 0 | 1 | 57 | 50 | 2.80 | 1.13 |
1980 | 34 | 34 | 18 | 5 | 2 | 16 | 12 | 0 | -- | .571 | 1055 | 261.1 | 226 | 34 | 60 | 5 | 2 | 219 | 0 | 0 | 88 | 72 | 2.48 | 1.09 | |
1981 | 31 | 30 | 20 | 7 | 3 | 20 | 6 | 0 | -- | .769 | 931 | 240.1 | 187 | 27 | 38 | 2 | 4 | 221 | 0 | 1 | 68 | 61 | 2.29 | 0.94 | |
1982 | 31 | 31 | 24 | 6 | 10 | 19 | 12 | 0 | -- | .613 | 994 | 263.1 | 200 | 36 | 24 | 2 | 3 | 196 | 0 | 0 | 77 | 69 | 2.36 | 0.85 | |
1983 | 33 | 29 | 10 | 2 | 2 | 16 | 9 | 3 | -- | .640 | 883 | 217.2 | 187 | 27 | 59 | 5 | 2 | 131 | 1 | 0 | 83 | 79 | 3.27 | 1.13 | |
1984 | 28 | 28 | 13 | 3 | 2 | 15 | 5 | 0 | -- | .750 | 782 | 186.0 | 186 | 20 | 58 | 4 | 3 | 112 | 0 | 0 | 80 | 72 | 3.48 | 1.31 | |
1985 | 30 | 26 | 3 | 1 | 0 | 11 | 7 | 0 | -- | .611 | 735 | 167.0 | 188 | 34 | 56 | 2 | 3 | 117 | 1 | 0 | 102 | 98 | 5.28 | 1.46 | |
1986 | 26 | 26 | 8 | 1 | 2 | 16 | 6 | 0 | -- | .727 | 791 | 194.0 | 172 | 27 | 49 | 4 | 4 | 119 | 1 | 1 | 64 | 58 | 2.69 | 1.14 | |
1987 | 26 | 25 | 7 | 0 | 1 | 13 | 5 | 0 | -- | .722 | 685 | 166.2 | 150 | 26 | 49 | 6 | 2 | 113 | 1 | 0 | 71 | 65 | 3.51 | 1.19 | |
통산:9년 | 266 | 252 | 110 | 27 | 23 | 135 | 72 | 3 | -- | .652 | 7509 | 1857.1 | 1628 | 253 | 443 | 33 | 23 | 1366 | 4 | 3 | 690 | 624 | 3.02 | 1.12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101]
- 다승왕: 2회 (1980년, 1981년) ※ 2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최장 기록과 같음 (다른 선수로는 가네다 마사이치, 곤도 히로시, 무라야마 미노루, 히라마츠 마사지, 엔도 가즈히코,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마사, 세스 그레이싱어, 우츠미 테츠야, 스, 아오야기 코요가 있음)
- 최우수 평균자책점: 1회 (1981년)
- 탈삼진왕: 3회 (1980년, 1981년, 1982년) ※ 당시 연맹 표창 없음, 3년 연속은 에가와 유타카에 이은 센트럴 리그 2위 타이
- 최고 승률: 2회 (1981년, 1984년) ※ 당시 연맹 표창 없음
- MVP: 1회(1981년)
- 최우수 투수: 2회(1980년, 1981년)
- 베스트 나인: 2회(1980년, 1981년)
- 월간 MVP: 2회(1981년 7월, 1981년 8월)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1981년)
- 올스타전 MVP: 1회(1984년 제3차전)
- 고라쿠엔 MVP상: 1회(1980년)
- 일본 프로 야구 사상 6번째, 20세기 마지막, 쇼와 시대 마지막 투수 5관왕[12]
- 1980년대의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13]
8. 2. 수상
9. 개인 기록
에가와 스구루는 사쿠신가쿠인 시절 공식전에서 노히트 노런 9회, 퍼펙트 게임 2회를 기록했다.[12]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한 대회 통산 최다 탈삼진 60개 및 8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으며, 춘하 합산 고시엔 탈삼진율 14.0을 기록하는 등 고교 야구계의 전설적인 투수였다.
호세이 대학 시절에는 도쿄 6대학 야구 리그 시대의 17완봉 등, 2020년까지 깨지지 않았던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사상 6번째이자 20세기 마지막, 쇼와 시대 마지막 투수 5관왕[12]에 빛나는 등, 1980년대 일본 프로 야구와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활약했다.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배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79 | 요미우리 | 27 | 23 | 7 | 2 | 1 | 9 | 10 | 0 | -- | .474 | 653 | 161.0 | 132 | 22 | 50 | 3 | 0 | 138 | 0 | 1 | 57 | 50 | 2.80 | 1.13 |
1980 | 34 | 34 | 18 | 5 | 2 | 16 | 12 | 0 | -- | .571 | 1055 | 261.1 | 226 | 34 | 60 | 5 | 2 | 219 | 0 | 0 | 88 | 72 | 2.48 | 1.09 | |
1981 | 31 | 30 | 20 | 7 | 3 | 20 | 6 | 0 | -- | .769 | 931 | 240.1 | 187 | 27 | 38 | 2 | 4 | 221 | 0 | 1 | 68 | 61 | 2.29 | 0.94 | |
1982 | 31 | 31 | 24 | 6 | 10 | 19 | 12 | 0 | -- | .613 | 994 | 263.1 | 200 | 36 | 24 | 2 | 3 | 196 | 0 | 0 | 77 | 69 | 2.36 | 0.85 | |
1983 | 33 | 29 | 10 | 2 | 2 | 16 | 9 | 3 | -- | .640 | 883 | 217.2 | 187 | 27 | 59 | 5 | 2 | 131 | 1 | 0 | 83 | 79 | 3.27 | 1.13 | |
1984 | 28 | 28 | 13 | 3 | 2 | 15 | 5 | 0 | -- | .750 | 782 | 186.0 | 186 | 20 | 58 | 4 | 3 | 112 | 0 | 0 | 80 | 72 | 3.48 | 1.31 | |
1985 | 30 | 26 | 3 | 1 | 0 | 11 | 7 | 0 | -- | .611 | 735 | 167.0 | 188 | 34 | 56 | 2 | 3 | 117 | 1 | 0 | 102 | 98 | 5.28 | 1.46 | |
1986 | 26 | 26 | 8 | 1 | 2 | 16 | 6 | 0 | -- | .727 | 791 | 194.0 | 172 | 27 | 49 | 4 | 4 | 119 | 1 | 1 | 64 | 58 | 2.69 | 1.14 | |
1987 | 26 | 25 | 7 | 0 | 1 | 13 | 5 | 0 | -- | .722 | 685 | 166.2 | 150 | 26 | 49 | 6 | 2 | 113 | 1 | 0 | 71 | 65 | 3.51 | 1.19 | |
통산:9년 | 266 | 252 | 110 | 27 | 23 | 135 | 72 | 3 | -- | .652 | 7509 | 1857.1 | 1628 | 253 | 443 | 33 | 23 | 1366 | 4 | 3 | 690 | 624 | 3.02 | 1.12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이정표 기록
- 1000 투구 이닝: 1983년 6월 14일, 대 한신 타이거스 10차전(고라쿠엔 구장), 1회초 2사에 달성
- 1000 탈삼진: 1984년 9월 9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5차전(고라쿠엔 구장), 2회초에 구로사카 마사미쓰로부터 달성(사상 69번째)
- 100승: 1985년 6월 4일, 대 한신 타이거스 10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선발 등판으로 6⅔이닝 6실점으로 달성(사상 88번째)
- 1500 투구 이닝: 1986년 4월 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차전(고라쿠엔 구장), 4회초 1사에 달성
9. 1. 첫 기록
- 첫 등판·첫 선발: 1979년 6월 2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고라쿠엔 구장), 8이닝 5실점에서 패전 투수[47]
- 첫 탈삼진: 상동, 1회초에 마이크 라인배치로부터
- 첫 승리·첫 선발 승리: 1979년 6월 1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1차전(고라쿠엔 구장), 7과 1/3이닝 1실점(무자책점)
- 첫 완투 승리: 1979년 8월 14일, 대 한신 타이거스 21차전(고라쿠엔 구장), 9이닝 1실점
- 첫 완봉 승리: 1979년 8월 2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차전(고라쿠엔 구장)
- 첫 세이브: 1983년 7월 2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6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말 1사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과 2/3이닝을 무실점
9. 2. 기타 기록
- 시즌 10 무사사구 경기 (1982년, 센트럴 리그 기록)[12]
- 올스타전 출장 : 8회 (1980년 ~ 1987년)[12]
- 투수 3관왕: 1회 (1981년)[12]
- 투수 4관왕: 1회 (1981년) ※ 쇼와 시대 마지막[12]
- 투수 5관왕: 1회 (1981년) ※ 20세기 마지막, 쇼와 시대 마지막[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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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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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qualing Oh's HR record proved diffic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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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テレビ「江川卓プロフィー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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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川卓氏「山本由伸もいるし」WBCの大谷とダルの起用法 4番候補・鈴木の打順を予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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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連載】福島に生きる 「かわいそうだから、じゃない!」 ~オールスターゲームがいわき市であるワ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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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久間町大井の本来の通学区は山香小、山香中(両校とも廃校)だったが、父の方針で生徒数の多い佐久間小、佐久間中に越境通学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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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はへばっていた初の完全試合/江川卓8 - 野球の国から 高校野球編 - 野球コ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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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祖“怪物”…江川卓が残した数々の伝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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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の大会記録は、2012年夏に桐光学園中学校・高等学校・松井裕樹が記録した10者連続奪三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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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怪物・江川」の残像 元広島の達川・大野「格が違う」 - 高校野球:朝日新聞デジタ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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迫田監督の策に嵌った江川は、この試合で計8四球を与え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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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会記録|選抜高校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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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年、江川雨中の押し出し/夏の甲子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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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対柳川商戦での6連続三振内訳】全22球:直球20、カーブ2。 ボール4、ストライク18(直球17)。 そのうち空振り10、ファウル6、見送り1。 カーブ空振り1。
[29]
문서
延長戦による記録であるため参考記録扱い。公式記録における1位は松井裕樹(桐光学園中学校・高等学校)の22奪三振。参考記録を含めた1位は板東英二(徳島県立徳島商業高等学校)の18回25奪三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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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江川が投じた最速の一球<後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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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宮清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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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뉴스
元巨人篠塚氏を育てた“怪物・江川”の剛速球 高校時代に絶望した「見たことない球」 - ベースボール専門メディア Full-Count
https://full-count.j[...]
[32]
문서
『豪球列伝』の江川の項参照。
[33]
문서
上位十傑の2位以下は、2位:板東英二(徳島県立徳島商業高等学校)…12.1(62回・83奪三振)、3位:藤浪晋太郎(大阪桐蔭中学校・高等学校)…10.7(76回・90奪三振)、4位:尾崎行雄 (野球)(浪商)…10.3(89回・102奪三振)、5位:島袋洋奨(興南)…10.1(115回2/3・130奪三振)、6位:田中将大(駒澤大学附属苫小牧高等学校)…10.1(91回1/3・102奪三振)、7位:柴田勲(法政大学第二中学校・高等学校)…9.8(103回2/3・113奪三振)、8位:松坂大輔(横浜)…8.8(99回・97奪三振)、9位:ダルビッシュ有(東北)…8.5(92回・87奪三振)、10位:牛島和彦(浪商)…8.4(100回・93奪三振)である。
[34]
문서
桐光学園の松井裕樹は、甲子園通算の奪三振率は17.0で江川を上回ったが、甲子園への出場は2012年夏の1回のみで、通算奪三振数は68であり、甲子園通算80奪三振に達していないので、この記述では除外する。
[35]
Youtube
空白の一日までを掛布が江川卓に直撃!ドラフト1位指名3回に至るまでに何が起こったのか初公開! 2022年2月6日
https://www.youtube.[...]
[36]
문서
最年少ベストナイン投手の記録は33年後の{{by|2007年}}春に当時早大1年生で19歳の誕生日直前だった[[斎藤佑樹]]が更新。
[37]
문서
阪急(またはオリックス)の1位指名を拒否した高校3年生が大学1年生時に明治神宮野球大会の決勝戦で先発投手となった例は江川の他に1999年の[[九州共立大学硬式野球部|九州共立大]]・[[新垣渚]]の例がある。
[38]
문서
1975年春秋は[[明治大学硬式野球部|明大]]が連覇。法大は上級生と下級生の軋轢があり、殊に秋のリーグ戦は江川の肩の不調もあり、優勝を逃している。
[39]
문서
この年、早大には[[岡田彰布]](北陽高→早大→[[阪神タイガース|阪神]]→[[オリックス・バファローズ|オリックス]])が入学。秋のリーグ戦で7番レフトで登場した1年生の岡田は江川からいきなり3打数3安打を放っている。だが、その後は江川は岡田に対してシュートを交えて全力で投げ抑えている。
[40]
웹사이트
東京六大学野球リーグ戦 個人投手記録
http://www.big6.gr.j[...]
一般財団法人 東京六大学野球連盟
2017-02-04
[41]
문서
なお、昭和52年最終学年組全選手の首位打者は江川で、通算打率は.309。以下、②金光.304 ③袴田.299 ④堀場.282 ⑤山倉.276 ※70ゲーム(210打席)以上。
[42]
뉴스
江川にこみ上げる涙「申し訳ない気持ち一生持ち続ける」最後の言葉は「元気でやれよ」虎番疾風録其の四 小林繁伝(431)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24-04-04
[43]
웹사이트
【12月3日】1977年(昭52) 江川が二度目の入団拒否、クラウン蹴って米国留学へ
https://www.sponichi[...]
2012-06-16
[44]
문서
当時の[[野球協約]]では、ドラフト会議で交渉権を得た球団がその選手と交渉できるのは、翌年のドラフト会議の前々日までとされていた。
[45]
문서
ただし、のちに[[ドラフト外入団|ドラフト外]]という手段で[[明治大学硬式野球部|明大]]・[[鹿取義隆]]ら新人選手を10人獲得している。
[46]
문서
日本プロ野球ドラフト会議史上、ドラフト1位指名を3回も受けたのは江川のみである。
[47]
웹사이트
【1月31日】1979年(昭54) 巨人のエース・小林繁、“阪神の新人”・江川卓とトレード
https://www.sponichi[...]
2014-06-16
[48]
웹사이트
「江川ピーマン北の湖」強すぎで揶揄/アラカルト
https://www.nikkansp[...]
2024-04-20
[49]
문서
あくまでも球団側の要請による「自粛」であり、「出場停止」ではない。
[50]
웹사이트
【6月2日】1979年(昭54) “元チームメイト”江川粉砕 4年目ラインバックが逆転弾
https://www.sponichi[...]
2013-06-16
[51]
문서
『日本野球25人 私のベストゲーム』参照。
[52]
웹사이트
第11回 「印象に残る契約更改」名鑑
https://yakyutaro.jp[...]
[53]
웹사이트
若手時代の原辰徳も憧れた超大物大リーガーが巨人へ、“ティーチャー”スミスとは?/昭和助っ人賛歌【プロ野球死亡遊戯】 {{廃止されたテンプレート|!}}
[54]
문서
『巨人-阪神論』p.122
[55]
문서
『巨人-阪神論』pp.128-129
[56]
웹사이트
【10月29日】1983年(昭58) 江川研究に3か月、田淵が放った日本シリーズ初本塁打
http://www.sponichi.[...]
2010-06-16
[57]
웹사이트
【7月24日】1984年(昭59) だから江川卓 江夏と並ぶのは興味がなかった?
https://web.archive.[...]
2015-06-16
[58]
문서
この年の江川は[[山根和夫]](広島)と並ぶ3完封で1位タイ。1980年、81年、82年は単独1位だった。
[59]
문서
シーズン防御率5.28は、この年のセ・リーグ規定投球回到達投手の中では最下位。
[60]
문서
この年の7勝目、通算102勝目を挙げた7月12日の阪神戦では、7回から登板して9回までの3イニングを自責点0のパーフェクトリリーフ。江川にとってはプロ生活唯一のレギュラーシーズンでの[[救援勝利]]となった(同試合で江川の女房役・[[山倉和博]]が3イニング連続本塁打)。
[61]
웹사이트
ランディ・バースが明かす、日本で戦った最高の投手とは?(3/3)
https://number.bunsh[...]
2024-04-20
[62]
문서
勝利数はリーグ2位、防御率と勝率はリーグ3位。
[63]
웹사이트
プロ野球選手の「異常に安かった」バブル期の年俸 沢村賞投手に提示された“衝撃の額” (1/3)
https://dot.asahi.co[...]
[64]
Youtube
【契約更改】プロ野球選手の年俸事情!江川卓は年俸の大幅増減に賛成?江川は自らダウン提示をした!?
https://www.youtube.[...]
[65]
문서
この年の小早川はリーグ最多の16[[勝利打点]]を挙げている。また、小早川はヤクルトに移籍した初年度の開幕戦(1997年4月4日)で、前年の沢村賞受賞者である巨人の[[開幕投手]]・[[斎藤雅樹]]から3打席連続本塁打を記録しているが、その試合のテレビ中継の解説者は江川だった。
[66]
뉴스
1987年11月13日付の[[日刊スポーツ]]3面の記事
[67]
웹사이트
“怪物”江川が引退を決めた1球【1987年9月20日】 {{廃止されたテンプレート|!}}
[68]
웹사이트
巨人・澤村 “施術ミス”の波紋
https://web.archive.[...]
2017-09-12
[69]
문서
1987年5月10日、江川は、作新学院時代にバッテリーを組んだ[[亀岡偉民|小倉偉民]]の実姉・睦美の夫だった男性(二人は1983年に離婚)の[[おじ|叔父]]である[[亀岡高夫]]([[衆議院議員]])と小倉自身が前年秋に[[養子縁組]]をした記念に[[ホテルニューオータニ]]で開催された[[政治資金パーティー]]にゲスト参加した。本来、そのパーティーは丸1か月前の4月10日に予定されていたが、当日は星野仙一新監督が率いる中日ドラゴンズ(この年、トレードによって落合博満が新加入)との開幕戦の日だったことから、(江川が開幕投手となることを想定して)パーティーの開催日は1か月延期された。しかし、開幕投手には西本が選ばれたため、江川は[[王貞治|王監督]]に不信感を抱いたという。江川は翌11日の開幕第2戦に先発、7回を投げて自責点2に抑え、シーズン初勝利を挙げている{{要出典|date=2013年11月}}。
[70]
문서
『たかが江川されど江川』(新潮文庫版)pp.160-161
[71]
서적
巨人-阪神論
[72]
서적
巨人-阪神論
[73]
서적
たかが江川されど江川
[74]
뉴스
気がつけば40年(22)夢のまた夢に終わってしまった江川VS掛布の監督対決 バブル崩壊のツケ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 Sponichi Ann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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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巨人-阪神論
[76]
서적
巨人-阪神論
[77]
웹사이트
【プロ野球】巨人の後任監督人事 白石オーナー「できるだけ速やかに」
https://www.sankei.c[...]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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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江川卓氏、YouTubeチャンネル「江川卓のたかされ」開設で超大物ゲスト登場予告 チャンネル名は本宮ひろ志氏と決定
https://www.sanspo.c[...]
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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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スピードガンの盲点/江川卓「怪物」直球語る 前編 - 「未来へ」高校野球を愛する君に送る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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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江川卓のストレートを最新技術で分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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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テレNEWS24
202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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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ラミレス登場】日本に来て衝撃だったこと!練習しすぎて頭がどうかしてると思った!〇〇を変えて打てるようになった!?江川卓も気付かなかったラミレスの工夫!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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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こういう前提で番組作るから「○○は170km/h出ていた!」みたいな番組ができるんですよね。 んなわけない。
https://twitter.com/[...]
201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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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掛布雅之(2)完 指揮官からは「高め真っすぐ」だけを狙わされた…ライバル江川卓との対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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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201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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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スーパーカートリオ」屋鋪要が証言 「江川卓さんはランナー無視ですから、余裕で走れるわけですよ」 (4ページ目)
https://sportiva.shu[...]
2024-09-13
[85]
웹사이트
江川卓と工藤公康が初の対談を実施! 「カーブの達人」「現代の魔球」などを語る
https://sports.yahoo[...]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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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阪神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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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阪神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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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さんまのまんま
関西テレビ
201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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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阪神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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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阪神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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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歴代最高記録 被本塁打 【通算記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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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野球機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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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スーパーカートリオ」屋鋪要が証言 「江川卓さんはランナー無視ですから、余裕で走れるわけですよ」 (3ページ目)
https://sportiva.shu[...]
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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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8月16日】1980年(昭55) 電撃トレードから564日、江川卓vs小林繁 雨中の決着
http://www.sponichi.[...]
200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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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巨人-阪神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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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川卓氏親戚有未さんアメザリ平井と結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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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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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本聖 「エース」の座を争った江川卓との9年間(全4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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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サ芸プラ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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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士通「夢をかたちに」スペシャル 『20世紀スポーツ名勝負 ライバル伝説…光と影 封印された涙の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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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野球機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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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野球機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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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の夏 1973年2回戦 銚子商×作新学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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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川卓のCM出演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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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CON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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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별을 향한 길: 부자 매, 에가와와 하라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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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한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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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한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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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잔류시켜라" 지바 롯데팬 11만2493명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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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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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한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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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한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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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에가와 그렇지만 에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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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에가와 그렇지만 에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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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한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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