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동
1. 개요
김명동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이후에는 제헌 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1903년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태어나 한문 교육을 받았으며, 3·1 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간사 등으로 활동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법 기초위원,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뇌물 수수 및 업무상 횡령 혐의로 수감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사망했다.
| 이름 | 김명동 |
|---|---|
| 한자 표기 | 金明東 |
| 출생일 | 1903년 11월 25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공주 |
| 사망일 | 1950년 6월 25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본관 | 안동(安東) |
| 종교 | 유교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학력 | 한문사숙 |
|---|
| 주요 경력 |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 홍성노동조합조직위원장 공주치안유지회위원장 대한중앙협의회 총본부 총무 반탁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집행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직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조선유교대동사 조직, 중앙집행위원 제헌 국회의원(대한민국/제1공화국) 제2대 국회의원(대한민국/제1공화국) |
|---|
| 임기 | 1948년 5월 31일 ~ 1950년 6월 25일 |
|---|---|
| 국가 | 대한민국 |
| 직책 | 제헌·제2대 국회의원 |
| 대통령 | 이승만 대통령 |
| 국무총리 | 이범석 국무총리 |
| 국회의장 | 신익희 국회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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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의 인물 -
한용운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불교 혁신과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저항 문학을 대표했다. -
신간회의 인물 -
권동진
권동진은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을미사변 가담 후 천도교에 입교, 3·1 운동 민족대표,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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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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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정치인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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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정치인 -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필리핀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98년 부통령에 당선되어 2001년 에드사 혁명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2004년 재선에 성공했다.
2. 생애
1903년 11월 25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아버지 김복한(金福漢, 1860. 7. 24. ~ 1924. 5. 4.)과 청주 이씨(1882 ~ 1905. 2. 6) 이주찬(李周讚)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한문사숙(漢文私淑)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으로 강화도에서 농성하다가 순절한 김상용(金尙容, 1561. ~ 1637. 2. 16.) 우의정의 후손으로 조상들이 대대로 현감(縣監:종6품)으로부터 군수(종4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직에 출사(出仕)한 명문가의 자제였다. 8.15 광복 후 우익(右翼) 정치인으로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집행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공주지회 회원,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공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헌 국회의원 직위에 재임하였다. 이후 국회에서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6월 4일 국회법 기초위원에 선임되며 국회법을 만드는데 기여하였고 같은 해 8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에도 선임되었다.
1950년 임기 중 6.25 전쟁이 생기면서 9명의 비서들과 45명의 경호대들로부터 보좌를 받으며 피신하였으나 향년 4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 출신이다.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9년의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1927년부터 신간회 간사, 중앙상무집행위원, 대회준비위원회 재무부 부원, 홍성 노동조합 조직위원장, 공주 치안유지회 위원장, 대한중앙협의회 총본부 총무,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실행위원,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조선 유교 대동사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발족에 관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1948년의 제1대 총선에 공주 갑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50년의 제2대 총선에 공주 을 선거구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맡았을 때의 뇌물 수수·업무상 횡령 혐의로 제헌 국회의원 임기 말부터 제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으며, 1950년 1월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6월에 징역 1년의 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곧 국회의 석방 요구 결의에 따라 다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에 의원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1. 가계와 초기 생애
1903년 11월 25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아버지 김복한(金福漢, 1860. 7. 24. ~ 1924. 5. 4.)과 청주 이씨(1882 ~ 1905. 2. 6) 이주찬(李周讚)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한문사숙(漢文私淑)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으로 강화도에서 농성하다가 순절한 김상용(金尙容, 1561. ~ 1637. 2. 16.) 우의정의 후손으로 조상들이 대대로 현감(縣監:종6품)으로부터 군수(종4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직에 출사(出仕)한 명문가의 자제였다.
2.2. 독립운동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 출신으로,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 1927년부터 신간회 간사, 중앙상무집행위원, 대회준비위원회 재무부 부원, 홍성 노동조합 조직위원장, 공주 치안유지회 위원장, 대한중앙협의회 총본부 총무,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실행위원,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조선 유교 대동사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발족에 관여했다.
1948년 제1대 총선에 공주 갑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0년 제2대 총선에 공주 을 선거구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맡았을 때 뇌물 수수·업무상 횡령 혐의로 제헌 국회의원 임기 말부터 제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다. 1950년 1월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6월에 징역 1년의 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곧 국회의 석방 요구 결의에 따라 다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에 의원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3. 해방 이후 정치 활동
김명동은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 출신으로,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1927년부터 신간회 간사, 중앙상무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홍성 노동조합 조직위원장, 공주 치안유지회 위원장, 대한중앙협의회 총본부 총무,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실행위원,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조선 유교 대동사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발족에 관여했다.
1948년 제1대 총선에 공주 갑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0년 제2대 총선에 공주 을 선거구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맡았을 때 뇌물 수수·업무상 횡령 혐의로 제헌 국회의원 임기 말부터 제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다. 1950년 1월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6월에 징역 1년 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곧 국회의 석방 요구 결의에 따라 다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에 의원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4. 독직 사건과 사망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 출신이다.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9년의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1927년부터 신간회 간사, 중앙상무집행위원, 대회준비위원회 재무부 부원, 홍성 노동조합 조직위원장, 공주 치안유지회 위원장, 대한중앙협의회 총본부 총무,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실행위원,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조선 유교 대동사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발족에 관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1948년의 제1대 총선에 공주 갑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50년의 제2대 총선에 공주 을 선거구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맡았을 때의 뇌물 수수·업무상 횡령 혐의로 제헌 국회의원 임기 말부터 제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으며, 1950년 1월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6월에 징역 1년의 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곧 국회의 석방 요구 결의에 따라 다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에 의원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