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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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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복진은 1901년 충북 청주 출신의 조각가로, 한국에 서양 조각을 처음 도입하고 사실주의 조각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으며, 데이코쿠미전에 입선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또한 토월미술연구회, 조선미술원 등을 통해 후진 양성에도 힘썼으며, 법주사 대불 제작을 시도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불우한 시기를 겪었으나, 한국 근대 조각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연극, 평론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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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복진 자작상 1923
1923년에 만든 자작 상
이름김복진
원어 이름金復鎭
별칭호(號)는 정관(井觀)
출생일1901년 11월 3일
출생지대한제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사망일1940년 8월 18일 (향년 38세)
사망지일제 강점기 경성부
국적대한제국
일본 제국
직업연극배우
조각가
미술평론가
문예이론가
사회운동가
소속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학력일본 도쿄 미술학교 졸업
친척김팔봉(아우)
김복희(조카딸)
배우자허하백
분야조각
종교유교(성리학)
대표작소년

2. 생애

1924년 데이코쿠미전(帝國美展)에 작품 〈나상(裸像)〉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같은 해 도쿄 미술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배재중학 교원이 되었다. 한편 ‘토월미술연구회’, 청년학관(Y.M.C.A.) 미술과,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미술강사 등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다.[2] 1925년 제4회 선전(鮮展)에 작품 〈3년 전〉을 출품, 3등상을 수상하고, 제5회 및 제16회 선전에서는 특선, 제15회 선전에서는 입선했다.[2] 1930년 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지냈으며, ‘조선미술원’을 창립했다.[2] 1936년 법주사 대불(大佛)을 착공했으나 미완성인 채 서울에서 사망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01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2]

3. 기타 활동 및 평가

김복진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하다 일제 강점기에 일찍 사망하여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부인 허하백이 김복진 사망 후 친일 연설과 기고에 적극적으로 나서 비난받았고, 미군정 하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실종 또는 타살된 점도 김복진의 이름이 금기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월북 예술인 해금 이후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묘소에 묘비도 세워지고 《김복진 전집》, 《김복진의 예술세계》 등이 출간되면서 재평가되었다.[2]

3. 1. 다방면의 활동

김복진은 옥고를 치르는 등 불우한 생활 가운데서도 한국 근대조각을 개척하는 데 크게 공헌한 선각자이며, 연극과 평론 활동에도 종사한 다재다능한 조각가로 평가된다.[2]

본래 문학 청년이던 김복진은 조각 공부를 하면서 토월회를 결성해 신극 운동을 벌이는 등 문예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사회주의 사상에도 입문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윤효중 등 여러 제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려공산청년회의 학생위원회를 담당하여 학생 운동 지도자로도 활동했으나, 제1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김복진은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다양하게 붙는 선구적인 예술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조각가, 한국 미술비평의 첫 스승, 토월회로 신극 운동을 개창한 연극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창립한 사회주의 사상가, 만화와 광고에 처음 눈을 뜬 언론인 등이다. 동생이자 카프 동료였던 김기진은 "망형(亡兄) 김복진의 이름은 조선문화사의 첫 페이지에 기록돼도 좋으리라 생각된다"고 썼다.

그러나 김복진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하다 일제 강점기에 일찍 사망하여 오랫동안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부인 허하백이 김복진 사망 후 친일 연설과 기고에 적극적으로 나서 비난받았고, 미군정 하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실종 또는 타살된 것도 김복진의 이름이 금기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월북 예술인 해금 이후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묘소에 묘비도 세워지고 《김복진 전집》, 《김복진의 예술세계》 등이 출간되면서 재평가되었다.

3. 2. 사후 평가

김복진은 옥고를 치르는 등 불우한 생활 속에서도 한국 근대조각을 개척하는 데 크게 공헌한 선각자이며, 연극과 평론 활동에도 종사한 다재다능한 조각가로 평가된다.[2]

원래 문학 청년이었던 김복진은 조각 공부를 하면서 토월회를 결성해 신극 운동을 벌이는 등 문예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때 사회주의 사상에도 입문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윤효중 등 여러 제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고려공산청년회의 학생위원회를 담당하여 학생 운동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김복진은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다양하게 붙는 선구적인 예술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조각가, 한국 미술 비평의 첫 스승, 토월회로 신극 운동을 개창한 연극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창립한 사회주의 사상가, 만화와 광고에 처음 눈을 뜬 언론인 등으로 꼽힌다. 동생이자 카프 동료였던 김기진은 "망형(亡兄) 김복진의 이름은 조선 문화사의 첫 페이지에 기록돼도 좋으리라 생각된다"라고 썼다.

그러나 김복진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하다 일제 강점기에 일찍 사망하여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부인 허하백이 김복진 사망 후 친일 연설과 기고에 적극적으로 나서 비난받았고, 미군정 하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실종 또는 타살된 점도 김복진의 이름이 금기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월북 예술인 해금 이후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묘소에 묘비도 세워지고 《김복진 전집》, 《김복진의 예술세계》 등이 출간되면서 재평가되었다.

3. 3. 비판적 시각

김복진은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김복진 사후 부인 허하백이 친일 행적을 보인 점, 미군정 시기 사회주의 운동 경력으로 인해 김복진의 이름이 금기시된 점도 재평가를 어렵게 만들었다.[2]

4. 작품 세계

김복진은 한국에 서양 조각을 처음 도입하고 사실주의 조각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표현이 주를 이룬다. 대표작으로는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다산 선생상〉, 〈소년〉, 〈백화〉 등이 있지만, 혼란기를 거치며 두 점만이 남아 있다.[2] 1922년 소실된 〈금산사 중앙 미륵불〉을 재건하기도 했다.

〈미륵불〉

4. 1. 사실주의 조각

김복진은 한국에 서양 조각을 처음 도입하고 사실주의 조각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작품 경향은 사실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다산 선생상〉, 〈소년〉, 〈백화〉가 있으나,[2] 혼란기를 거치며 두 점만 남아 있다. 1922년 소실된 <금산사 중앙 미륵불> 재건하였다.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충청북도 보은 법주사에 있다. 80척의 철근 콘크리트로 된 대불(大佛)이다. 조각가 김복진의 필생의 대표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1935년경에 제작하기 시작했으나 두부(頭部)와 전체의 비례만을 마치고 자금난으로 중지되어 그의 생존시에 완성을 못 보았다. 이후 1949년 윤효중(尹孝重)이 이어받아 추진되었으나 역시 도중에 중단, 장기은(張基殷), 임천(林泉) 등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63년 3월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30여 년의 제작 기간을 거치는 동안 김복진의 원형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변모되고 말았으나 근대조각으로서 특기할 만한 온건한 용모와 풍만한 입체감을 갖춘 기념비적 조상(彫像)이다.[3]

;〈소년〉

김복진의 대표적인 조각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제19회 선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은 그의 최후작이다.[4]

4. 2. 대표작

김복진의 작품 경향은 사실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다산 선생상〉, 〈소년〉, 〈백화〉가 있으나,[2] 혼란기를 거치며 두 점만 남아 있다. 1922년 소실된 <금산사 중앙 미륵불>을 재건하기도 했다.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충청북도 보은 법주사에 있다. 높이 약 24.38m의 철근 콘크리트로 된 대불(大佛)이다. 조각가 김복진이 심혈을 기울여 1935년경에 제작하기 시작했으나 두부(頭部)와 전체의 비례만을 마치고 자금난으로 중지되어, 그의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후 1949년 윤효중(尹孝重)이 이어받아 추진되었으나 역시 도중에 중단, 장기은(張基殷), 임천(林泉) 등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63년 3월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30여 년의 제작 기간을 거치는 동안 김복진의 원형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나, 근대 조각으로서 특기할 만한 온건한 용모와 풍만한 입체감을 갖춘 기념비적 조상(彫像)이다.[3]

;〈소년〉

김복진의 대표적인 조각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제19회 선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은 그의 최후작이다.[4]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내허하백1909년 - ?, 교육자, 정치인. 전국부녀총동맹 제2부총재 역임.
동생김팔봉1903년 8월 21일 - 1985년 5월 8일, 본명 김기진.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조카딸김복희1928년 3월 31일 - , 소프라노 성악가. 개신교 신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김팔봉의 딸.


6. 학력

참조

[1] 블로그 https://blog.naver.c[...]
[2] 백과사전 김복진 글로벌 세계 대백과
[3] 백과사전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
[4] 백과사전 소년 글로벌 세계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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