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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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본웅은 일제강점기 및 한국 전쟁 시기에 활동한 화가이자 문예지 편집자이다. 한성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신고등보통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일본 유학을 통해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를 창립하고, 종합문예지 《청색지》를 창간하며 모더니즘 미술을 주도했다. 야수파 화풍으로 강렬한 색채와 붓질이 특징이며, 대표작으로 〈여인〉, 〈우인상〉 등이 있다. 한국 전쟁 중 사망했으며, 유작전과 시화첩 발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조명되었다. 외손녀는 발레 무용가 강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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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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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구본웅 |
한자 표기 | 具本雄 |
로마자 표기 | Gu Bon-ung |
출생일 | 1906년 3월 7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사망일 | 1952년 2월 2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별칭 | 자(字)는 사영(士英) |
아호 | 서산(西山) |
별칭 | 한국의 로트레크 |
학력 | |
학력 |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학사 |
직업 및 소속 | |
직업 | 서양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 |
소속 | 前 정판사 사장 |
가족 관계 | |
부모 | 구자혁(부), 상산 김씨 부인(모), 변동숙(계모) |
자녀 | 구근모(딸) |
친척 | 강수진(외손녀), 구자옥(친숙부), 변동림(이모뻘), 이상(이모부뻘), 김환기(이모부뻘) |
분야 및 작품 | |
분야 | 서양화, 조각, 미술평론 |
주요 작품 | 〈친구의 초상〉 |
2. 생애
구본웅은 한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 사고로 척추를 다쳐 평생 지체장애인으로 살았다.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고희동에게 서양화를,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우며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조각 작품으로 특선을 수상한 후 일본으로 유학, 가와바타 미술학교, 니혼 대학,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등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1933년 귀국 후에는 서양화가 단체 목일회를 창립하고, 1938년에는 종합문예지 《청색지》를 창간하여 이상, 이육사 등 당대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의 화풍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질이 특징이며, 〈여인〉, 〈우인상〉 등의 대표작을 통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미술 교과서 편찬에 참여하고, 한국 전쟁 중에는 《서울신문》 제작에 참여했다. 1953년 한국 전쟁 중 폐렴으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7] 사후에는 유작전과 시화집 출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재조명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장애
한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彰文社)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이고, 숙부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유력 인사 구자옥이다. 구본웅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릴 때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다쳐 지체장애인이 되었다.[7]2. 2. 학창 시절과 미술 공부
한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彰文社)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이고, 숙부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유력 인사 구자옥이다. 어머니가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한 뒤, 어릴 때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다쳐 지체장애인이 되었다.[2]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고려미술회의 고희동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여 화가이면서도 조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921년 조선미술전람회 조각 부문에 〈얼굴습작〉으로 특선 입상한 뒤 일본에 유학했다.[7]
일본에서는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니혼 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다. 니혼 대학은 다른 교육 기관보다 예술 교육에 덜 엄격한 학문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더 폭넓은 교양 교육을 제공했으며, 더 다양하고 스타일리시하며 이념적으로 다양한 학생들을 유치했다.[3]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재학 중 이미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1933년에 귀국하였다.[7]
2. 3. 귀국 후 활동과 모더니즘
1933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를 창립했고, 1938년에는 《청색지》를 창간해 약 2년 동안 발행했다. 종합문예지인 《청색지》는 이상, 이육사 등의 작품이 실린 수준 높은 잡지였다.[8]구본웅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색채가 강렬하고 붓질이 거칠어 야수파 계열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묘사한 〈여인〉(1930년), 초등학교 동창인 작가 이상을 그린 〈우인상〉(1935년) 등이 있다. 형태의 왜곡과 어두운 색조를 통한 강한 주관성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일찍부터 표현주의적 경향을 받아들여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도 불린다.[8]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가 후원한 한국 최대의 미술 전시회인 조선미술전람회의 엄격한 아카데믹 스타일에 불만을 품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사회적 흐름의 일원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의 장은 파리의 커피하우스와 살롱을 모방한 서울의 커피하우스였다. 이러한 곳에서는 서양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미술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곳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서로의 작품을 지원하는 중심적인 만남의 장소였다.[2]
구본웅의 첫 번째 전시 작품은 1931년 커피하우스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의 일부였다. 그의 첫 개인전은 1931년 6월 서울 동아일보 사옥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에는 도쿄에서 완성된 50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에 대한 반응은 미미했는데, 김용준 평론가가 사회가 구본웅의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너무 "미성숙"하다고 주장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2]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1933년 커피하우스 봉아미에서 열렸다. 이 무렵 그는 모길레라는 예술가 단체에 참여했다. 그들의 작품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퇴폐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2]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친구의 초상"으로,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급생이었던 시인이자 작가인 이상의 초상화이다.
구본웅의 작품은 마티스, 세잔, 분석적 큐비즘, 표현주의의 시각 언어를 통합하면서, 모던 걸과 한국 정체성의 다양한 측면과 같은 아이디어를 탐구했다. 그는 광복 이후 한국 정체성의 문제와 씨름하며 "나는 일본의 영향력이라는 그물 안에서 내 예술 경력 전체를 보냈다... 심지어 한국적 영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4]
구본웅은 1923년에 창문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다. 창문사를 통해 그는 이상의 글을 출판했다.[3]
2. 4. 작품 세계와 야수파적 경향
구본웅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색채가 강렬하고 붓질이 거칠어 야수파 계열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묘사한 〈여인〉(1930년), 초등학교 동창인 작가 이상을 그린 〈우인상〉(1935년) 등이 있다. 형태의 왜곡과 어두운 색조를 통한 강한 주관성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일찍부터 표현주의적 경향을 받아들여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도 불린다.[8]그의 작품은 마티스, 세잔, 분석적 큐비즘, 표현주의의 시각 언어를 통합하면서, 모던 걸과 한국 정체성의 다양한 측면과 같은 아이디어를 탐구했다. 그는 광복 이후 한국 정체성의 문제와 씨름하며 "나는 일본의 영향력이라는 그물 안에서 내 예술 경력 전체를 보냈다... 심지어 한국적 영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4]
2. 5. 광복 이후와 죽음
미군정 교육부에서 일하며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미술 교과서를 만들었고,[5]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 과목 편찬을 담당했다.[7] 한국 전쟁 중 서울로 복귀하여 《서울신문》 제작에 참여했다.[8]1953년 한국 전쟁 중 급성 폐렴으로 46세에 사망했다.[7] 그의 그림 대부분은 유실되거나 파괴되었다.[3] 1954년 유작전이 열렸고, 1974년에는 유작전과 더불어 시화첩 《허둔기》가 출간되었다.[8]
3. 작품
구본웅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가 후원한 한국 최대의 미술 전시회인 조선미술전람회의 엄격한 아카데믹 스타일에 불만을 품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사회적 흐름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파리의 커피하우스와 살롱을 모방한 서울의 커피하우스에서 교류했는데, 이곳에서는 서양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미술 전시회를 개최하며 예술가와 작가들이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서로의 작품을 지원했다.[2]
구본웅의 첫 번째 전시 작품은 1931년 커피하우스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의 일부였다. 그의 첫 개인전은 1931년 6월 서울 동아일보 사옥에서 열렸으며, 도쿄에서 완성된 50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에 대한 반응은 미미했는데, 김용준 평론가는 사회가 구본웅의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너무 "미성숙"하다고 평했다.[2]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1933년 커피하우스 봉아미에서 열렸다. 이 무렵 그는 모길레라는 예술가 단체에 참여했는데, 그들의 작품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퇴폐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2]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친구의 초상"으로,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급생이었던 시인이자 작가인 이상의 초상화이다.
구본웅의 작품은 마티스, 세잔, 분석적 큐비즘, 표현주의의 시각 언어를 통합하면서, 모던 걸과 한국 정체성의 다양한 측면과 같은 아이디어를 탐구했다. 그는 광복 이후 한국 정체성의 문제와 씨름하며 "나는 일본의 영향력이라는 그물 안에서 내 예술 경력 전체를 보냈다... 심지어 한국적 영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했다"고 말했다.[4]
1923년, 구본웅은 창문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며 이상의 글을 출판했다.[3] 만년에는 주한 미군정 교육부에서 일하며 어린이들을 위한 최초의 미술 교과서를 만들었다.[5]
경신고등학교 재학 중 고희동에게서 서양화를,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각 부문 '얼굴 습작'이 특선으로 입상했다. 일본 유학 후 가와바타 화학교, 일본 대학, 태평양미술학교(현 태평양미술회 연구소)에서 수학했으며, 태평양미술학교 재학 중 두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33년 귀국하여 1934년에 목일회를 창설하고, 1938년에는 종합 문예지 《청색지》를 창간하여 이상, 이육사 등의 작품을 게재했다.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 과목 편찬을 담당했다. 한국 전쟁 중 서울에 피난하여 서울신문 촉탁을 맡았으나, 급성 폐렴으로 46세에 사망했다.[7] 1954년에 유작전이 개최되었고, 1974년에는 유작전과 함께 《허둔기》가 출판되었다.
4. 가족 및 친척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구자혁 | |
아들 | 구환모, 구상모, 구순모 | |
딸 | 구원모, 구정모, 구근모, 구희모, 구춘모 | |
숙부 | 구자옥 | 해방 직후 첫 경기도지사, 대한민국의 1, 2대 경기도지사 |
의붓어머니 | 변동숙 | |
의붓이복이모 | 변동림 |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이복 누이동생 |
의붓이복이모부 | 이상 | 변동림의 첫 번째 남편 |
김환기 | 변동림의 두 번째 남편 | |
외손녀 | 강수진 | 구본웅의 딸인 구근모의 딸 |
5. 학력
6. 평가 및 유산
구본웅은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MMCA는 2021년 "근대 시기 한국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라는 전시에서 《친구의 초상》을 전시했다.[6] 구본웅은 한국 전쟁 중인 195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그림 대부분은 유실되거나 파괴되었다.[3] 1954년에 유작전이 개최되었고, 1974년에는 유작전과 함께 《허둔기》가 출판되었다.
참조
[1]
논문
Ku Ponung (구본웅, 具本雄) (1906–1953)
http://dx.doi.org/10[...]
Routledge
2016-00-00
[2]
논문
Korean Modernists and the Nangnang Parlour Coffeehouse in the 1930s
http://dx.doi.org/10[...]
Routledge
2021-08-13
[3]
논문
A Cultural Network in 1930s Korea
http://dx.doi.org/10[...]
Routledge
2021-08-13
[4]
저널
Modern Art in Late Colonial Korea: A Research Experiment
http://dx.doi.org/10[...]
2018-00-00
[5]
웹사이트
The Korea Times article on Musical Korean Wave: Mee-You Kwon, "Musical as Next 'Hallyu'" September 18, 2012
http://dx.doi.org/10[...]
[6]
웹사이트
MMCA showcases the radiant relationships between artists and authors
https://koreajoongan[...]
2021-02-08
[7]
웹사이트
구본웅(具本雄)
http://encykorea.aks[...]
[8]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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