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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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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선(金鐥)은 신라 시대 인물로, 언양 김씨의 시조로 여겨지나, 그에 대한 기록은 불확실하다. 1981년 언양 김씨 족보에서 김선을 시조로 소원했으나, 김은열 묘지명의 출처 불분명 및 족보 기록과의 불일치로 인해 논란이 있다. 김선의 아버지는 경순왕, 어머니는 낙랑공주 왕씨이며, 아들은 김진, 손자는 김정보이다. 김취려 묘지명과 김은열 묘지명을 근거로 김수를 김선의 고조부로 설정했으나, 김수가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후손인지, 신라의 봉사손인지, 경순왕의 아들과 동일인물인지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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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 (신라)
인물 정보
한글 이름김선
한자 이름金鐥
로마자 표기Gim Seon
활동 시기10세기 후반

2. 시조 논란 및 기록의 문제점

김선신라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 왕씨 사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며, 고려 시대에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언양 김씨는 김선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김선의 실존 여부와 언양 김씨 시조로서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김선에 대한 기록은 1784년(정조 8년)에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김은열 묘지명》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묘지명 외에는 『고려사』 등 다른 문헌이나 금석문 자료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김은열 묘지명》 자체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767년에 간행된 언양 김씨 족보 《정해보》(丁亥譜)에는 고려 시대 인물인 '''김수(金壽)'''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어, 김선을 시조로 보는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기록상의 불일치와 근거 부족으로 인해 김선의 존재와 언양 김씨 시조로서의 위상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2. 1. 김은열 묘지명의 한계

김선은 1784년(정조 8년) 개성의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인물로, 경순왕의 일곱 번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그러나 김선이라는 인물은 《김은열 묘지명》 외에는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문헌이나 금석문 자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1]

또한 《김은열 묘지명》 자체도 내용상 한계를 지닌다. 배우자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으며, 단지 형제들의 순서만 기술되어 있어 완전한 형태의 묘지명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1] 이러한 이유로 《김은열 묘지명》은 후대에 위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후 경주 김씨 일부 문중의 족보에 김선이 등재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름이 바뀌거나 관직이 추가되는 등 내용이 덧붙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현재 전해지는 관련 기록들은 역사 자료로서의 신뢰성에 의문을 받고 있다.[1]

실제로 1767년에 간행된 언양 김씨의 《정해보》에는 시조가 고려 시대 신호위 별장 동정을 지낸 '''김수(金壽)'''로 기록되어 있다. 김수의 증손자인 김취려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여러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판병부사에 오르고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면서 사실상 언양 김씨의 시조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1] 이는 김선이 후대에 언양 김씨의 시조로 소급 적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2. 2. 언양 김씨 족보 기록과의 불일치

김선에 대한 기록은 1784년(정조 8)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김은열 묘지명》에 처음 등장한다. 이 묘지명에는 김선이 경순왕의 일곱 번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선이라는 인물은 《김은열 묘지명》 외에는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어떤 문헌이나 금석문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김은열 묘지명》 자체도 배우자나 생애에 대한 기록 없이 형제 순서만 나열되어 있는 등 내용이 완전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김은열 묘지명》은 후대에 위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후 경주 김씨 일부 문중의 족보에 김선이 등재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름이 바뀌거나 관직이 추가되는 등 가필이 심하게 이루어져 현재 관련 기록들은 역사 자료로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받고 있다.

한편, 1767년에 간행된 언양 김씨의 족보인 《정해보》(丁亥譜)에는 시조가 고려 시대 신호위 별장 동정을 지낸 '''김수(金壽)'''로 기록되어 있다. 이 족보에 따르면 김수의 증손인 김취려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여러 반란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판병부사에 오르고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면서 사실상 언양 김씨의 시조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는 김선을 시조로 삼는 기록과는 명백히 다른 내용이다.

3. 가계 및 봉사손 관련 논란

김선의 가계와 신라 봉사손(奉祀孫) 계승 여부는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는 1784년(정조 8년)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낙랑공주 왕씨 사이의 아들로 처음 언급된 인물이다.[1] 언양 김씨1981년 《신유보(辛酉譜)》 편찬 시 김선을 시조로 소급하여 모시고 있다.

그러나 김선의 실존 여부는 《김은열 묘지명》 외의 문헌이나 금석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불확실하다. 또한, 해당 묘지명 자체의 발견 경위와 내용의 완전성, 약 800년이라는 시간적 간극 등으로 인해 사료적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기록의 불확실성은 김선의 가계와 봉사손 계승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묘지명에 언급된 아들 김진(金進), 김적(金迪)이나 손자 김정보(金精寶) 등의 존재는 물론, 언양 김씨의 실질적 시조로 여겨지는 김취려의 증조부 김수를 김선의 후손으로 보는 것 역시 불확실한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신라 멸망 후 고려경순왕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신라의 제사를 잇도록 하였는데, 이 봉사손이 김선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신라 멸망 직후 봉사손의 이름이 명확히 전해지지 않고, 김선의 후손으로 연결되는 김수가 실제로 경순왕의 후손인지, 봉사손이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김선의 봉사손 계승 여부는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3. 1. 불확실한 가계

'''김선(金鐥)'''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고려에 항복한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다.[1] 고려 시대에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고 전해지며, 언양 김씨는 김선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김선에 대한 기록은 1784년(정조 8년) 개성의 한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하는 《김은열 묘지명》에 처음 등장한다. 이 묘지명에는 김선이 경순왕의 일곱 번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은열 묘지명》 외에는 『고려사』를 비롯한 어떤 문헌이나 금석문 자료에서도 김선이라는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또한, 《김은열 묘지명》 자체도 배우자나 생애에 대한 기록 없이 형제 순서만 나열되어 있어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이후 경주 김씨 계열의 족보에 김선이 포함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름이 바뀌거나 관직이 추가되는 등 내용이 덧붙여져 현재 이 묘지명과 관련 문헌들은 역사 자료로서의 신뢰성에 의문을 받고 있다.

원래 언양 김씨1767년에 간행된 《정해보(丁亥譜)》에서 시조를 고려 시대 신호위 별장 동정을 지낸 김수(金壽)로 기록하고 있었다. 김수의 증손자인 김취려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여러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판병부사에 오르고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면서 사실상 언양 김씨의 시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1981년에 간행된 언양 김씨 《신유보(辛酉譜)》에서는 선계(先系)를 김선(金鐥), 김진(金進), 김정보(金精寶), 김경숙(金鏡淑), 김수(金壽)로 이어지는 것으로 변경하고, 김선을 시조로 소급하여 올렸다. 김취려의 묘지명에는 그의 증조부가 김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언양 김씨와 경주 김씨 측에서는 이 기록과 김은열 묘지명 등을 근거로 김수의 고조부를 김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김선의 아들로는 예부시랑을 지낸 김진(金進)과 공부시랑을 지낸 김적(金迪)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손자로는 호부상서를 지낸 김정보(金精寶)가 있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신라가 멸망한 지 800년 이상 지난 후에 발견되었고, 그 출처 또한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김수가 신라 왕실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봉사손, 奉祀孫)이었으므로 김선 역시 봉사손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신라 멸망 직후 봉사손의 이름이 현재 전해지지 않아 김선이 경순왕의 7번째 아들과 동일 인물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게다가 김수 자체가 경순왕과 낙랑공주 사이의 후손인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3. 2. 봉사손 계승 여부 논란

신라가 멸망한 이후 고려경순왕을 우대하였으며, 그의 아들이 신라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奉祀孫)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1] 이 봉사손이 김선 (신라)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김은열 묘지명》은 신라 멸망 후 약 800년이 지난 1784년에 발견되었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사료로서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언양 김씨경주 김씨 측에서는 김취려의 묘지명에 그의 증조부가 김수로 기록된 것과 《김은열 묘지명》 등을 바탕으로 김수를 김선의 현손으로 보고 있다.

만약 김수가 신라의 봉사손이었다면, 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김선 역시 봉사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 멸망 직후 봉사손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김선이 실제로 경순왕의 아들로서 봉사손의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김수가 경순왕과 낙랑공주 왕씨 사이의 후손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김선이 신라의 봉사손을 계승했는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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