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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파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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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로파포스는 콤마게네 왕족 출신으로, 로마에서 활동하며 원로원 의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콤마게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안티오코스 4세의 손자이며, 아르메니아, 그리스, 메디아 혈통을 지녔다. 72년 가족과 함께 아테네에 정착하여 로마와 아테네에서 다양한 공직을 수행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친구로, 플루타르코스와 교류하기도 했다. 116년 사망 이후, 여동생 율리아 발빌라와 아테네 시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2. 가족 관계 및 초기 생애

필로파포스는 명망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유력 인사들과 폭넓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콤마게네의 그리스계 왕족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르켈라우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와 이집트그리스인 여성 클라우디아 카피톨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의 유일한 형제자매인 여동생 율리아 발빌라는 시인이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비비아 사비나 황후와 절친한 사이였다.

필로파포스의 외조부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빌루스였는데, 그는 점성가이자 학자였으며, 이후 이집트 총독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발빌루스와 그의 아버지인 이집트계 그리스인 문법학자이자 점성가인 멘데스의 트라실루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등 초기 로마 황제들과 친구 사이였다.

필로파포스는 콤마게네 왕국의 수도였던 사모사타에 있는 콤마게네의 안티오코스 4세의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였다. 그의 별칭이자 현재 널리 알려진 이름은 필로파포스 혹은 필로파푸스인데, '선조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콤마게네의 안티오코스 4세 및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빌루스와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이 별칭을 얻었다. 필로파포스는 전형적인 그리스 상류층 교육을 받았다.

서기 72년, 시리아 속주 총독 루키우스 카이센네우스 파이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콤마게네의 안티오코스 4세, 필로파포스의 아버지 에피파네스, 숙부 칼리니코스가 로마에 맞서 반란을 계획하고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었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 고발의 진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콤마게네 왕국은 멸망하고 로마에 병합되었다.

2. 1. 가계

필로파포스는 콤마게네의 왕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르켈라우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와 이집트 출신 그리스인 여성 클라우디아 카피톨리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여동생 율리아 발빌라는 시인이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친구였다.[1] 필로파포스의 부모는 먼 친척 관계였다.[1]

필로파포스는 아르메니아, 그리스, 메디아 혈통을 지녔다. 조부들을 통해서, 그는 혈통을 셀레우코스 제국프톨레마이오스 왕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1] 그의 외조부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빌루스였는데, 그는 점성가이자 학자였고, 나중에는 이집트 총독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1]

2. 2. 출생 및 교육

필로파포스는 콤마게네의 그리스계 왕족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르켈라우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와 이집트계 그리스인 여성 클라우디아 카피톨리나의 장자로, 사모사타에 있는 안티오코스 4세의 궁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필로파포스'는 ''할아버지를 사랑하는''이라는 뜻으로, 콤마게네의 안티오코스 4세 및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빌루스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이 별칭을 얻었다. 그는 전형적인 그리스 상류층 교육을 받았다.

2. 3. 콤마게네 왕국의 멸망

서기 72년, 시리아 속주 총독 루키우스 카이센네우스 파이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콤마게네의 안티오코스 4세와 그의 아들 (필로파포스의 아버지) 에피파네스, 그리고 필로파포스의 숙부인 칼리니코스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으려 한다고 고발했다. 이 고발의 진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파이투스의 서한을 읽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콤마게네 왕가가 사모사타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는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것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안티오코스 4세에게 콤마게네 통치를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파이투스는 페라타 제6군단을 이끌고 콤마게네 왕국을 침공했다. 칼키스의 아리스토불로스와 에메사의 소하이모스 등 종속국 왕들도 파이투스에게 군대를 지원했는데, 이들은 전투 전날 밤에 도착했다.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코스가 야전을 준비하는 동안, 안티오코스 4세는 킬리키아로 도피할 준비를 했다.

전투 당일 아침, 에피파네스는 로마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족, 칼리니코스와 함께 파르티아로 도망쳤고, 안티오코스 4세는 킬리키아로 도망쳤다.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코스가 파르티아로 도망치기 전 잠시 저항했을 가능성도 있다.

안티오코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은 백성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은 로마와 전쟁을 원치 않았고, 자신들에 대한 혐의를 해명하고 싶어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에피파네스와 그의 가족, 칼리니코스를 의장대와 함께 로마로 압송했다. 그들은 남은 생을 로마에서 안티오코스 4세와 함께 보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들에게 충분한 생활비를 지원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게 했고, 극진히 대접했다.

필로파포스와 그의 가족은 콤마게네로 돌아가지 못했다. 콤마게네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편입되었다.

3. 콤마게네 이후 생애

서기 72년, 필로파포스의 여동생 율리아 발빌라가 로마에서 태어났다. 조부들이 모두 사망한 후, 필로파포스와 그의 가족들은 아테네에 정착한다. 아버지가 92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자, 클라우디아 카피톨리나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정치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루푸스와 재혼한다. 카피톨리나는 여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냈고, 이 기간에 발빌라는 어머니와 같이 있다가 이후에 아테네에 있는 필로파포스에게 돌아갔다.[1]

트라야누스는 필로파포스를 친위대에 임명했다. 이후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필로파포스의 아버지나 선조들이 원로원 계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원로원 의원으로 승격시켰다. 필로파포스는 109년에 보좌 집정관에 올랐다.[1]

필로파포스가 어느 시점에 결혼하여 자녀와 후손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 1. 아테네 정착

필로파포스는 스스로 군주의 지위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아테네에서 여생을 보냈고 아테네의 중요한 인물이자 존경받는 후원자가 되었다. 필로파포스는 아테네와 로마의 도시 문제, 정치, 종교 업무를 맡았다. 그는 로마 엘리트에 속했고 트라야누스 황제 및 트라야누스의 후임자이자 이종조카인 하드리아누스와 친구가 되었다.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를 통해, 필로파포스는 이들의 가족들과도 안면을 트기도 했다.[1]

필로파포스는 로마 시민권과 아테네 시민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아르콘 역할을 수행했고 그리스 철학자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이 철학자들을 통해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를 알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에서 필로파포스를 “매우 관대하고 보상을 하는 데 아끼지 않는다”라며 묘사했고 그의 성격에 대해선 “아주 유쾌한 사람이고 학문에 관해 열정적이다”라며 표현했다.[1]

필로파포스는 두 차례 코레고스(코러스 운영단)를 했고, 아고노테테스(스포츠 경기 운영장)도 한 차례, 베사 (Besa) 데메의 운영회 일원으로서도 활동했다. 105년과 116년 사이에 그는 라레스 및 풍년을 내려주는 신들에게 매년 제물을 바치는 고대 로마의 사제 단체인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의 일원이기도 했다.[1]

3. 2. 로마와 아테네에서의 활동

필로파포스는 스스로 군주의 지위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아테네에서 여생을 보냈고, 중요한 인물이자 존경받는 후원자가 되었다. 필로파포스는 아테네로마에서 시민, 정치, 종교 업무를 맡았다. 그는 로마 엘리트 계층에 속했고, 트라야누스 황제 및 그의 후임자이자 친척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친구가 되었다.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를 통해, 필로파포스는 이들의 가족들과도 안면을 트기도 했다.[1]

필로파포스는 로마 시민권과 아테네 시민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아르콘 역할을 수행했고 그리스 철학자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이 철학자들을 통해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를 알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에서 필로파포스를 “매우 관대하고 보상을 하는 데 아끼지 않는다”라며 묘사했고 그의 성격에 대해선 “아주 유쾌한 사람이고 학문에 관해 열정적이다”라고 표현했다.[1]

필로파포스는 두 차례 코레고스(코러스 운영단)를 했고, 아고노테테스(스포츠 경기 운영장)도 한 차례, 베사 (Besa) 데메의 운영회 일원으로서도 활동했다. 105년과 116년 사이에 그는 라레스 및 풍년을 내려주는 신들에게 매년 제물을 바치는 고대 로마의 사제 단체인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의 일원이었다.[1]

트라야누스는 그를 로마의 친위대로 임명했다. 그 이후에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필로파포스의 아버지나 선조들이 원로원 계급자들이 아니었음에도 그를 원로원 의원으로 승격시켰다. 필로파포스는 이 계급을 통해 109년에 보좌 집정관에 올랐다.[1]

3. 3. 플루타르코스와의 관계

필로파포스는 아테네에서 아르콘 역할을 수행했고 그리스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플루타르코스를 알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필로파포스를 “매우 관대하고 보상을 하는 데 아끼지 않는다”라고 묘사했고, 그의 성격에 대해선 “아주 유쾌한 사람이고 학문에 관해 열정적이다”라고 표현했다.

4. 필로파포스 기념비

필로파포스 기념비


116년 필로파포스가 사망하자, 그의 여동생 율리아 발빌라와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남서쪽에 있는 무세이온 언덕에 무덤을 세웠다. 이 대리석 무덤은 필로파포스 기념비로 알려졌으며, 이 언덕은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4. 1. 기념비 건립

116년 필로파포스의 죽음은 그의 누이 율리아 발빌라, 아테네 시민, 그리고 아마도 황실 가족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발빌라는 아테네 시민들과 함께 아크로폴리스 남서쪽 무세이온 언덕에 묘를 세웠다. 그의 대리석 묘는 "필로파포스 기념비"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언덕은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5. 대중문화에서 필로파포스

필로파포스는 중세 그리스 서사시 디예니스 아크리티스에 등장하는 강도단의 우두머리로 묘사되기도 한다. 데니슨 빙엄 홀은 이 등장인물의 이름이 역사적 인물에서 따온 것이며, "이 이름에 얽힌 많은 전설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시에 엮여 있다"라고 언급했다.[2][1]

참조

[1] 서적 Digenis Akritas: The two-blood border lord Ohio University Press
[2] 서적 Digenis Akritas: The two-blood border lord Ohio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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