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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근 (18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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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원근은 1886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1965년 사망한 인물로, 교육자이자 기업가, 그리고 친일 행위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청주로 이주하여 잡화상, 행상으로 시작해 상업 활동을 통해 재산을 모았으며, 1920년대부터 교육 사업에 헌신하여 대성보통학교, 청주상업학교 등을 설립했다. 1930년대에는 광산 사업, 무역회사 등을 운영하며 기업가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 행위를 했으며,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후에도 교육 사업과 구휼 활동을 지속했으며, 1965년 충청북도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 생애

2. 1. 초기 활동 (1886년 ~ 1905년)

김원근은 1886년 10월 10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신라 흥무왕 김유신의 후손 김한중(金漢重)이며, 어머니는 강릉진씨(江陵陳氏) 혹은 여양진씨(驪陽陳氏)이다. 동생은 함께 교육사업에 참여한 석정 김영근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와중에 가세가 기울자, 행상을 하던 김국선(金局善)을 따라 고향을 떠나 청주에 오게 되었다. 12세 때 청주 저자거리의 장돌뱅이가 되고 이후 잡화상이 되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조치원의 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후원자의 파산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서당 학우들이 전별금으로 모아 준 돈으로 기름장사를 시작하였다. 종교는 불교였는데, 언제부터 사찰에 다녔는지, 모태 불교 신앙인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2. 2. 행상, 상업 활동 (1903년 ~ 1930년대 초)

1903년 연기군 조치원에 거주하며 행상에 종사했다. 이때 모은 재산으로 1905년 김원근상회를 설립, 동생 김영근과 함께 운영하며 일본 오사카 지역과 무역을 하였으나 1906년의 홍수로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다시 상점을 운영하여 20대 때 연기군 조치원(鳥致院)에서 경영한 해산물상과 무역상이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미곡, 광업 분야의 상업에도 종사하여 갑부가 되었고, 청주군 사주면 외덕리(四州面外德里, 현 청주시 우암동)으로 이주했다가 청주군 청주읍 본정목 4가(현, 청주시 북문로(北門路) 2가)에 정착하여 청주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08년 조치원 좌사접장(左社接長)으로 활동하면서 연기군 옛 객사에 연청학원(燕淸學院)을 설립하였다. 이후 조치원청년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16년 조치원청년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연기군 조치원면 관내에 충남중학교(忠南中學校)를 설립하고 토지와 비용을 손수 대고, 학교설립 기성회까지 구성했으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인허가 거부로 좌절되었다. 이후 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 설립위원을 비롯하여 조치원에서도 보통학교 학무위원과 고등보통학교 설립위원을 역임하는 등 교육 분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청주읍에 사립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경영하면서 읍회의원과 면협의원, 소방대 부대장, 금융조합평의원 등을 역임했다. 자신은 무명옷과 고무신을 신으며 자신의 재산을 학교에 투자하였다.

2. 3. 교육 활동 (1923년 ~ 1965년)

1923년 사재를 출연하여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정 지원을 했다. 학교 건립 시 공사감독을 직접 맡았으며, 1949년까지 대성보통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학부형에게는 학비를 받지 않고 순수 자신의 사재를 들였으며, 개교 16년 만에 도비 보조금이 연 100원, 개교 20년인 1943년부터는 200원의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1921년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고등보통학교 유치 운동에 참여하여 1922년 공주고등보통학교(현, 공주고등학교) 설립에 기여하였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반대로 실패했다.

1935년 동생 김영근과 함께 청주상업학교(현 청주대성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재단 김해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1939년 대성여자중학교를 설립했다. 1944년 청주여자상업고등보통학교를 신설했다.

1946년 청주상과대학(현 청주대학교)을 설립하고, 재단명을 대성학원으로 변경했다. 1959년 대성여자중학교를 복구하고, 1960년 대성여자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65년 대성국민학교(대성초등학교의 전신)를 재개교했다.

그는 교육 유공으로 1929년 충청북도지사 표창, 1931년 충북교육회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2. 4. 구휼, 자선 사업, 기업인 활동 (1920년대 ~ 1965년)

대 지주였던 김원근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충청북도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청원군과 증평, 충주 일대의 주민들을 구제하였다. 1906년 수재민 구호사업에 참여하였으며 1925년 4월에는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 및 연기 서면의 기근자 약 7,500여 명을 손수 구휼하고, 청주의 빈민 2백여 명에게 손수 농사지은 좁쌀을 나누어주었다. 이후에도 매년 빈민, 흉년 구제 활동에 참여했다. 1929년에는 청원군 남일면 두산리에 있는 자신의 하천부지 6만 평을 개간하여 844호의 농민들을 안착시키고 자신의 토지를 나눠주었으며, 쌀 5470가마를 단독으로 구입하여 3개 면의 재민 구제 활동을 하였다. 먹을 것이 없어 만주로 이민을 가려는 농민들 800가구에 양곡 3300포를 풀어주기도 했다. 우암산법당을 짓는 데도 기부하였다.

1929년 5월에는 청주시(당시 청주군) 남일면 두산리 소전이 마을에 남일면 12개리 주민들이 흉년 구제에 감사하는 뜻으로 김원근 구제기념비를 세웠다.

1931년 조선총독부에서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합병안이 제기되자 충청남도, 북도 통합 반대 운동에 참여했으며, 통합반대 청주 시민대회를 조직하고, 합병 반대 시민운동을 추진하였다.

1930년대 초 광산들을 매입, 경영에 참여했다. 1933년 충북 음성군 원남면, 괴산군 도안면 일대 98만여 평의 광산과, 1937년 괴산군 사리면의 광산을 운영하였으며, 금 제련업을 허가받아 괴산군 증평면의 땅을 사들여 증평 문암금광제련장을 운영하였다. 1935년 무역회사인 주식회사 중앙상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2. 5. 세계 대공황과 일제 강점기 후반 (1933년 ~ 1945년)

1933년 세계 대공황에 적절히 대응하고 대규모 무역 등으로 큰 자산가가 되었다.[1]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고, 동생 김영근과 함께 청주상업학교를 설립하였다.[1][2] 같은 해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 성요셉공원 입구에 김원근 진휼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밖에도 청주시 강서동 , 청원군 가덕면, 남일면, 문의면, 미원면에 김원근의 구휼선정비가 세워졌다. 1937년에는 청주시 강서동에 김원근 구휼 시혜비, 10월에는 미원면 경찰서 옆에 김원근 구제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밖에 증평, 가덕, 문의 등에도 흉년 구제 기념으로 주민들이 김원근의 구휼 시혜비를 세웠다. 1939년 대성여자중학교를 세웠으며, 그 해 청주 및 청주 인근의 흉작 기근민 구제에 앞장섰다.

1942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하는 등 전쟁 체제에 협조하였다.[3] 일본군 비행기 대금으로 거액을 헌납하기도 했다. 1944년 3월에는 청주상업고등학교 외에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청주여자상업고등보통학교를 신설하였다.

2. 6. 광복 이후 활동과 사망 (1945년 ~ 1965년)

1945년 광복 후 충북전재민구제회장으로 활동하며 전쟁 피해 복구에 힘썼다.[5][6] 1946년 충북신보사 대표, 국민일보사 대표, 충북산업 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월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소환되자, 직접 서울로 상경, 2월 말까지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자수한 점이 감안되어 불기소 처리되어 처벌받지 않았다.[5][6] 그는 방을 얻어 출석하고 조사 받았다. 일부 시민이 탄원서를 제출하고 충청북도 조사부에서 김원근이 육영사업, 빈민구제 등에 공헌이 많다는 서한을 별도로 작성해서 반민특위 중앙조사부에 선처를 호소하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운영 중이던 대성초, 중학교가 모두 폐교되고 피난하였다. 휴전 후 청주로 돌아와 1952년에는 삼창(三昌) 토건산업을 창업하였다. 삼창토건 대표료 재직 중에는 1954년 청주대학교에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한국 전쟁 후에도 지역의 재난 복구 사업에 사재를 희사하였고 1954년에는 토지와 건물, 재산을 청주경찰서 3층 건물과 청원군 가덕면사무소 부지와 건물, 건립에 기부하였다. 1956년 4월 16일 대한교육연합회로부터 교육유공자 표창, 독지가 및 단체 부문을 수여받았다.[5][6]

자신이 운영하던 청주여자상업고등학교를 정부에 기증하였고, 1958년 대한민국 정부령으로 국민학교가 의무교육으로 정해지자 대성보통학교 역시 국가에 기부하여 공립 학교로 편입시켰다.

1959년 한국 전쟁으로 폐교된 대성여자중학교를 부활시키고 1960년에는 대성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생애 후반에는 공익 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1962년 공익포상, 1964년 정부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1965년에는 역시 한국전쟁 때 폐교된 대성국민학교(대성초등학교의 전신)를 부활, 재개교하였다.

육영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그는 1965년 12월 29일 충청북도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어 충청북도 청주시 우암동 우암산에 안장되었다. 이는 1966년 1월 10일 대한늬우스에 보도되었다. 그에 의하면 조국의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데 평생을 바쳐왔다 한다. 1966년 11월에 지역 유지들의 공의로 묘비가 세워졌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평가와 논란

4대 대통령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윤보선은 김원근을 거룩한 분이라 평가하였다.[7] 윤보선은 김원근은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하여 번, 그 피나는 돈을 몽땅 육영사업에 바친 거룩한 분이라며 육영에 헌재한 것이 적지 않으려니와 스스로 이룩한 피땀의 결정을 이처럼 아낌없이 던진 이가 어찌 흔하랴고 하였다.[8]

반민특위의 별도 조사서에 의하면 그의 성격을 말하길 그는 애인심(愛隣心)이 강하고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며, 도민이 그를 활불(活佛)로 칭송한다 하였다.

김원근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전쟁 체제에 협력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등 친일 관련 명단에 포함되었다.

3. 1. 긍정적 평가

4대 대통령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윤보선은 김원근을 거룩한 분이라 평가하였다.[7] 윤보선은 김원근은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하여 번, 그 피나는 돈을 몽땅 육영사업에 바친 거룩한 분이라며 육영에 헌재한 것이 적지 않으려니와 스스로 이룩한 피땀의 결정을 이처럼 아낌없이 던진 이가 어찌 흔하랴고 하였다.[8]

반민특위의 별도 조사서에 의하면 그의 성격을 말하길 그는 애인심(愛隣心)이 강하고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며, 도민이 그를 활불(活佛)로 칭송한다 하였다.

3. 2. 부정적 평가

김원근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전쟁 체제에 협력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등 친일 관련 명단에 포함되었다.

4. 가족 관계

아버지는 김한중(金漢重)이며, 어머니는 여양진씨(驪陽陳氏)이다. 동생은 김영근(金永根, 호는 석정(錫定), 1888년 ~ 1976년)이다. 부인은 김경희이다. 아들이 없어 동생 김영근의 아들 중 1명인 김준철을 양자로 입양했다. 양자 김준철(1922년 ~ 2011년 12월 2일)은 손자 김윤배, 김상배(신도양개발 대표이사), 김진배(엘버트 대표이사)와 손녀 김순배, 김민선, 김복동, 김미경을 두었다.

5. 상훈


  • 1956년 4월 16일 대한교육연합회 교육유공자 표창, 독지가 및 단체 부문을 수상하였다.
  • 1962년 공익포상을 수여받았다.
  • 1964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았다.

참조

[1]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4-03-18
[2]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4-03-18
[3]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4] 뉴스 "金元根氏兄弟 祝賀와 慰勞會" 경향신문 1946-12-22
[5] 뉴스 "敎育有功者表彰" 동아일보 1956-01-12
[6] 뉴스 "45年을 敎育界에" 조선일보 1956-01-12
[7] 뉴스 "遊說萬里 特別寄稿 4, 尹潽善 敗軍의 몸이 무슨말이 있으리오만…" 조선일보 1963-10-30
[8] 뉴스 "遊說萬里 特別寄稿 4, 尹潽善 敗軍의 몸이 무슨말이 있으리오만…" 조선일보 196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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