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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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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윤후는 고려 시대의 승려이자 무관으로, 몽골의 침입에 맞서 처인성 전투와 충주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몽골군을 물리쳤으며, 1253년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임명되어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 충주를 지켜냈다. 이후 동북면 병마사, 추밀원 부사, 수사공 우복야 등을 역임했다. 조선 시대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드라마 《무신》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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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법명김윤후
속명미상
출생지미상
입적지미상
종파미상
직업승려, 군인
생애
활동 시기고려
주요 활동몽골 제국의 침입 격퇴
관련 사건제2차 몽골-고려 전쟁
처인성 전투

2. 생애

김윤후는 승려 출신으로, 몽골 제국의 침입에 맞서 큰 공을 세운 고려의 장군이자 관리이다.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고, 1253년 충주산성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김윤후는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능력을 중시하고 백성들과 함께 싸우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공로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1259년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동북면이 이미 몽골에 함락되어 부임하지 못했다. 이후 1262년 추밀원 부사, 1263년 수사공 우복야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15][9][16][17]

2. 1. 초기 생애와 승려 시절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 오늘날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위치해 있음[10])에 있었다.[9] 김윤후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지만, 단지 승려로서 백현원에 살았다는 것만 전해진다. 김윤후가 살았던 시대는 몽골 제국의 전성기였으며, 1231년에 몽골 제국군이 고려국을 침공하여 단기간에 수도인 개경을 포위해 고려 조정을 굴복시켰다.[1] 그러나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감독관)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고려 조정은 1232년에 몽골에 반기를 들고 강화도로 천도했다.[2]

2. 2. 몽골의 침입과 처인성 전투

1232년(고종 19년), 몽골의 침입 당시 김윤후는 처인성(현재 경기도 용인시 남사읍 아곡리에 위치)에서 몽골 장군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이는 큰 공을 세웠다.[11] 당시 고려 조정은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였고,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강화도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고려 본토를 유린하였다.[3] 김윤후는 몽골군의 침입을 피해 처인성으로 피신하였고, 이곳에서 살리타를 사살하였다.[4]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테게 코르치에게 이끌려 철수하였다.[4] 고려 조정은 김윤후에게 상장군 직을 내리려 했으나 김윤후는 "전투가 시작될 때 저는 활과 화살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저 혼자 이토록 큰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 직을 받았다.[5] 이 전투의 승리로 처인부곡은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었다.[12]

2. 3. 충주산성 전투

1253년(고종 40년) 김윤후는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임명되어 몽골군의 침입에 맞섰다. 몽골군은 70여 일 동안 충주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김윤후는 군민, 관노, 백정 등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로 뭉쳐 성을 지켜냈다. 김윤후는 "힘을 다해 몽골군을 격퇴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관작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관노 문서를 불태우고, 획득한 우마를 나누어 주는 등 사기를 진작시켜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9][6] 이 공로로 김윤후는 감문위(監門衛) 섭상장군(攝上將軍)에 임명되었고,[13] 공을 세운 관노와 백정들까지도 상을 받았다.[9] 이듬해인 1254년(고종 41년)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14]

2. 4. 이후의 관직 생활

1259년(고종 46년)에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15] 당시 동북면은 몽골에 함락당했으므로 부임하지 못했다.[9] 1262년(원종 3년)에 추밀원 부사로 임명되었다.[16] 1263년(원종 4년)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임명되었다.[17]

3. 조선 시대의 평가

조선 시대에는 김윤후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았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영조 대에는 올바른 인사 정책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김윤후의 공적이 언급되기도 하였다.[18]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격문에서 김윤후를 언급하며 백성들의 항쟁 의지를 고취했다.[19]

4. 김윤후가 등장한 작품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 박해수가 김윤후 역을 연기했다.

4. 1. 드라마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 박해수가 김윤후 역을 연기했다.

5. 관련 논문


  • 김호준, 〈고려 대몽항쟁기 김윤후 장군의 3차례 승전의 의의〉, 《백산학보》 114, 백산학회, 2019년
  • 강재광, 〈1253년 충주성 전투 승첩과 방호별감(防護別監) 김윤후의 역할〉, 《한국사연구》 202, 한국사연구회, 2023년

참조

[1] 서적 池内1979,6頁
[2] 서적 池内1979,17頁
[3] 서적 池内1979,20頁
[4] 서적 元史
[5] 서적 高麗史
[6] 서적 高麗史
[7] 서적 高麗史
[8] 서적 고려사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11] 서적 동국이상국집·전집
[12] 문서
[13] 서적 고려사절요 1254-02-01
[14] 서적 고려사
[15] 서적 고려사 1259-01-14
[16] 서적 고려사 1262-12-25
[17] 서적 고려사 1263-12-20
[18] 간행물 승정원일기 1730-09-07
[19] 서적 중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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