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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케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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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케 칸은 1209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251년 쿠릴타이에서 몽골 제국의 제4대 황제(카안)로 즉위한 그는 중앙 정부를 강화하고 무역로를 확보하는 데 힘썼다.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고려에 항복을 요구했으며, 북부 인도를 점령했다. 또한, 몽골 제국의 인구 조사와 조세 징수를 성문화하고, 티베트와 대리국을 정복하는 등 활발한 내정 및 대외 정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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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케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몽케와 그의 궁정, 타리크-이 자한구샤이에 묘사됨
몽케와 그의 궁정, 타리크-이 자한구샤이에 묘사됨
칭호몽골 제국의 제4대 카안
전체 이름몽골어:
다른 이름몽케 카안
통치
즉위1251년 7월 1일
퇴위1259년 8월 11일
이전 통치자구유크 칸, 오굴 카이미시 (섭정)
다음 통치자아리크 부케 (주장자), 쿠빌라이 칸
대관식1251년 7월 1일
생애
출생일1209년 1월 11일
출생지몽골 제국
사망일1259년 8월 11일 (50세)
사망지남송 쓰촨 성
매장지알려지지 않음, 추정 부르칸 할둔
가족
왕가보르지긴 가문
아버지톨루이
어머니소르칵타니 베키
형제자매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 부케 외
사후 정보
묘호헌종 (憲宗) (1266년 추서)
시호환숙황제 (桓肅皇帝) (1266년 추서)

2. 생애

2. 1. 어린 시절

1209년 1월 10일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인 툴루이와 케레이트족 출신 소르칵타니 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70] 쿠빌라이 칸, 훌라구 칸, 아리크 부케는 그의 동복 친동생들이었다. 기욤 드 뤼브룩에 의하면 몽케는 중간 정도 되는 키와 체구였다.

칭기즈 칸의 대제사장 중 1명인 무당 텝 텡그리 쿠추는 몽골의 밝은 미래를 상징하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

원사 헌종전에는 어려서 황홀탑(黃忽答) 부족의 관상가가 어린 몽케를 보고 그가 후에 귀하게 될 관상이라 예언하였다 한다.

몽케는 어기차고 용감하며 굳센 성격으로, 말수가 적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사냥을 즐겼으며, 무속 신앙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십팔사략에 의하면 그는 강직, 명석하고 씩씩하고 굳셌다, 침착하고 단호했으며 학술 교양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원사(元史)에는 그가 침착했다, 말수가 적으며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하들을 엄격하게 통솔했다고 기록하였다. 우구데이 칸의 시대에 몽케를 비롯한 일부 몽골 왕족들은 위구르계와 이란계 관료들로부터 페르시아어 문학과 페르시아어로 소개된 그리스, 로마 문며이 이야기 등을 튀르크어나 몽골어 번역을 통해서 접했다. 몽케 자신은 몽골어, 튀르크어, 중국어, 페르시아, 아랍어 등 몇개 국어를 회화, 구사할 수 있었다. 라시드 알딘의 집사에 의하면 몽케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의 문제를 풀줄 알았다 한다.

큰아버지 우구데이 카안은 쿠추, 시레문 다음으로 그를 잠재적인 차기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대했다.

그는 리더십과 재능이 있었고, 준엄했으며 자신에게도 엄격하였다. 사치품을 싫어하기로 유명했고, 어떤 일에 탐닉하기를 거부했으며 사냥 이외에는 취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의 통합, 단결을 소홀히 여겼고, 독단적인 행동을 곧잘 하였다. 몽케는 형제 중 아리크부카를 총애하였고, 일찍부터 중국문화와 문치주의,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다른 동생 쿠빌라이를 속마음으로 불신하여 견제했다.

오고타이의 카툰 중 앙회 2황후(昻恢 二皇后)는 자녀가 없었고, 몽케를 양자로 삼아 한동안 데려다 길렀다. 이때 오고타이 칸의 첩 중 1명인 화리차(火里差)가 몽케에게 주어졌다. 화리차는 몽케가 칸위에 오른 뒤 카툰(황후)의 한 사람으로 책봉된다. 오고타이 칸은 총애하던 아들 쿠추가 1236년 남송 원정길에 죽자, 몽케를 잠정적 후계자 후보로 낙점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은 페르시아 학자 이디 단 무하메드에게 명하여 몽케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3]

1230년 몽케는 아버지 툴루이, 숙부 오고타이 칸을 따라 금나라 전쟁에 출정하였다. 그해 몽케는 아버지지 툴루이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금나라의 서북 지방을 공격하였다. 1232년 1월에는 아버지 툴루이를 따라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의 장군 완안진화상과 교전하였다. 1232년 10월 툴루이가 독배를 마시고 죽자, 몽케는 쓰촨성 일대 툴루이의 영지로 보내져 다스렸다. 생부 툴루이는 병든 오고타이 칸을 대신하여 저주가 든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하나, 일설에는 퇴레게네 카툰 혹은 오고타이의 측근들이 툴루이를 견제, 음모를 꾸며 죽였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 툴루이가 죽자, 몽골 관습에 따라 몽케는 아버지의 첩들 중 한 명인 오이라트족의 오굴 투이미시를 물려 받았다. 오굴 쿨미시는 몽케의 사촌 귀위크의 부인 오굴 카미시의 자매이기도 하다. 몽케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의 큰 딸 시린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71][5] 일설에는 오굴 투이미시는 툴루이와 결혼하기로 했는데, 툴루이가 죽어 몽케가 대신 결혼했다는 설도 있다.

1234년 몽케는 오고타이의 명으로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 전투에 출전, 채주을 공격했다. 완안승린은 체포되어 처형됐지만 금나라 장군 곽하마는 몽케의 본진이 퇴각한 뒤에도, 서주(西州) 성 외곽에서 몽골군을 상대로 2년을 더 항전했다.

1224년 일리강 근처에서 첫 사냥을 한 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샤 왕조 정복에서 돌아오는 길에 손자인 몽케와 쿠빌라이에게 의식을 거행했다.[4] 당시 몽케는 15세였으며, 그의 형제인 쿠빌라이와 함께 토끼와 영양을 사냥했다. 할아버지는 몽골 전통에 따라 사냥한 동물의 기름을 그들의 중지에 문질렀다.



1235년, 2대 몽골 황제 오고타이 치하에서 카라코룸쿠릴타이에서 여러 나라 원정 계획이 제기되었다. 그중 하나로 조치 울루스의 당주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럽 원정이 결정되었고, 칭기스칸 가문의 각 왕가에서 차기 당주급 왕족들을 선발하여 이 원정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몽케도 툴루이 가문의 당주로서 이복동생 보체크(툴루이 칠남)와 함께 참여했다. 1236년 원정이 시작되었고, 몽케는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를 따라 먼저 볼가 불가르 지방에 침입하여 수도 불가르를 수베데이와 함께 정복했으며, 이듬해 1237년에는 보체크와 함께 키프차크 여러 부족의 수장 바추만을 추격하여 사살하는 군공을 세웠다. 1238년에는 카프카스 지방으로 내려가 오고타이 육남 카다안 오굴과 함께 아란인(알란인)들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데 힘썼고, 루스 여러 나라 정복에서는 키예프 공략에서 전공을 세웠다. 『원조비사』 등에 따르면, 이 원정 중 연회에서 오고타이의 장남 괴욱과 차가타이 가문의 왕자 뷔리가 총사령관인 바투와 다투고 욕설을 했다고 하며, 바투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는 격노하여 괴욱 등을 엄벌에 처하기 위해 몽골 본토로 소환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집사』에 따르면 뷔리는 원정군에 남겨졌지만, 괴욱은 1239년 가을에 군대를 떠나 몽골 본토로 귀환하는 길에 올랐다고 하며, 몽케도 이에 동행한 것 같고, 원정군은 그대로 서진하여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원정을 계속했고, 괴욱과 몽케는 이듬해 몽골 고원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이미 오고타이는 사망했다.

원래 할아버지 칭기스칸 사후에는, 막내 계승에 따라 툴루이가 몽골 황제(카안)가 될 예정이었지만, 툴루이가 고사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몽케를 새로운 카안으로 추대하기로 약속이 있었다.

2. 1. 1. 생애 초반

1209년 1월 10일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인 툴루이와 케레이트족 출신 소르칵타니 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70] 쿠빌라이 칸, 훌라구 칸, 아리크 부케는 그의 동복 친동생들이었다. 기욤 드 뤼브룩에 의하면 몽케는 중간 정도 되는 키와 체구였다.

칭기즈 칸의 대제사장 중 1명인 무당 텝 텡그리 쿠추는 몽골의 밝은 미래를 상징하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

원사 헌종전에는 어려서 황홀탑(黃忽答) 부족의 관상가가 어린 몽케를 보고 그가 후에 귀하게 될 관상이라 예언하였다 한다.

몽케는 어기차고 용감하며 굳센 성격으로, 말수가 적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사냥을 즐겼으며, 무속 신앙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십팔사략에 의하면 그는 강직, 명석하고 씩씩하고 굳셌다, 침착하고 단호했으며 학술 교양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원사(元史)에는 그가 침착했다, 말수가 적으며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하들을 엄격하게 통솔했다고 기록하였다. 우구데이 칸의 시대에 몽케를 비롯한 일부 몽골 왕족들은 위구르계와 이란계 관료들로부터 페르시아어 문학과 페르시아어로 소개된 그리스, 로마 문며이 이야기 등을 튀르크어나 몽골어 번역을 통해서 접했다. 몽케 자신은 몽골어, 튀르크어, 중국어, 페르시아, 아랍어 등 몇개 국어를 회화, 구사할 수 있었다. 라시드 알딘의 집사에 의하면 몽케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의 문제를 풀줄 알았다 한다.

큰아버지 우구데이 카안은 쿠추, 시레문 다음으로 그를 잠재적인 차기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를 잠재적인 후계자로 대했다.

그는 리더십과 재능이 있었고, 준엄했으며 자신에게도 엄격하였다. 사치품을 싫어하기로 유명했고, 어떤 일에 탐닉하기를 거부했으며 사냥 이외에는 취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의 통합, 단결을 소홀히 여겼고, 독단적인 행동을 곧잘 하였다. 몽케는 형제 중 아리크부카를 총애하였고, 일찍부터 중국문화와 문치주의,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다른 동생 쿠빌라이를 속마음으로 불신하여 견제했다.

몽케는 1209년 1월 11일 칭기즈 칸의 아들인 투루이의 장남이자 소르칵타니 베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브 텐그리 코크추라는 샤먼은 별에서 아이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그에게 몽골어로 '영원한'을 의미하는 몽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삼촌인 외게데 칸의 자식이 없는 왕비인 안기는 몽케를 자신의 오르다(유목민 궁전)에서 키웠다.[3] 외게데는 페르시아 학자 이디단 무하마드에게 몽케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도록 지시했다.

1224년 일리강 근처에서 첫 사냥을 한 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샤 왕조 정복에서 돌아오는 길에 손자인 몽케와 쿠빌라이에게 의식을 거행했다.[4] 당시 몽케는 15세였으며, 그의 형제인 쿠빌라이와 함께 토끼와 영양을 사냥했다. 할아버지는 몽골 전통에 따라 사냥한 동물의 기름을 그들의 중지에 문질렀다.

1230년 몽케는 처음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외게데와 그의 아버지 투루이를 따라 금나라와의 전투에 참전했다. 투루이는 1232년에 사망했고, 외게데는 소르칵타니를 투루이 가문의 앱파네이지(appanage)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몽골 관습에 따라 몽케는 그의 아버지의 아내 중 적어도 한 명인 위구르 부족 출신의 오굴-호이미시를 상속받았다. 몽케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의 큰딸인 시린에게 특별한 총애를 베풀었다.[5]

외게데는 1235년 그를 친척들과 함께 서쪽의 킵차크족, 키예프 루스, 볼가르족을 공격하도록 파견했다. 가장 강력한 킵차크족 수장인 바흐만이 볼가강 삼각주의 섬으로 도망치자 몽케는 강을 건너 그를 사로잡았다. 몽케가 바흐만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지만, 바흐만은 거부했고 몽케의 형제인 부젝에 의해 처형되었다. 몽케는 또한 몽골의 루스 침략 중 백병전에도 참여했다. 그의 사촌인 시반과 뷔리가 크림반도로 갔을 때, 몽케와 외게데의 아들인 카단은 카프카스의 부족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7] 몽골군은 알란족의 수도인 마가스를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많은 알란족과 체르케스족 수장들이 몽케에게 항복했다. 동유럽 침략 후, 몽케는 그들을 몽골로 데려왔다. 그는 또한 키예프 공성전 (1240년)에 참여했다. 몽케는 키예프의 화려함에 매료되어 항복을 제안했지만, 그의 사절들은 살해당했다.[8] 바투 칸의 군대가 몽케의 군대에 합류한 후, 그들은 도시를 약탈했다. 그는 또한 모히 전투에서 바투와 함께 싸웠다. 1241년 여름, 원정이 조기에 끝나기 전에, 몽케는 그의 삼촌 외게데가 1240-41년 겨울에 그를 소환했기 때문에 귀환했다. 그러나 외게데는 1241년 12월에 사망했다.

1246년, 칭기즈 칸의 남은 유일한 형제인 템위게는 쿠루르타이(kurultai)의 승인 없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새로운 카간인 귀유크는 오드치긴(Odchigin, '화로의 수호자' 칭기즈 칸의 두 동생에게 모두 주어진 칭호)을 재판하는 까다로운 임무를 몽케와 바투의 형인 오르다 칸에게 맡겼다. 귀유크는 결국 1248년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바투와 몽케가 주요 경쟁자로 등장했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아버지 툴루이와 함께 금나라의 명장 완안진상을 삼봉산 전투에서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다. 1232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툴루이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1235년, 2대 몽골 황제 오고타이 치하에서 카라코룸의 쿠릴타이에서 여러 나라 원정 계획이 제기되었다. 그중 하나로 조치 울루스의 당주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럽 원정이 결정되었고, 칭기스칸 가문의 각 왕가에서 차기 당주급 왕족들을 선발하여 이 원정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몽케도 툴루이 가문의 당주로서 이복동생 보체크(툴루이 칠남)와 함께 참여했다. 1236년 원정이 시작되었고, 몽케는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를 따라 먼저 볼가 불가르 지방에 침입하여 수도 불가르를 수베데이와 함께 정복했으며, 이듬해 1237년에는 보체크와 함께 키프차크 여러 부족의 수장 바추만을 추격하여 사살하는 군공을 세웠다. 1238년에는 카프카스 지방으로 내려가 오고타이 육남 카다안 오굴과 함께 알란인(알란인)들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데 힘썼고, 루스 여러 나라 정복에서는 키예프 공략에서 전공을 세웠다. 『원조비사』 등에 따르면, 이 원정 중 연회에서 오고타이의 장남 괴욱과 차가타이 가문의 왕자 뷔리가 총사령관인 바투와 다투고 욕설을 했다고 하며, 바투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는 격노하여 괴욱 등을 엄벌에 처하기 위해 몽골 본토로 소환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집사』에 따르면 뷔리는 원정군에 남겨졌지만, 괴욱은 1239년 가을에 군대를 떠나 몽골 본토로 귀환하는 길에 올랐다고 하며, 몽케도 이에 동행한 것 같고, 원정군은 그대로 서진하여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원정을 계속했고, 괴욱과 몽케는 이듬해 몽골 고원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이미 오고타이는 사망했다.

원래 할아버지 칭기스칸 사후에는, 막내 계승에 따라 툴루이가 몽골 황제(카안)가 될 예정이었지만, 툴루이가 고사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몽케를 새로운 카안으로 추대하기로 약속이 있었다. 『집사』 등에 따르면 오고타이는 생전 1236년 남송 원정 중 전사한 적출 삼남 쿠츄의 손자 시레문을 오고타이 가문의 후계자로 정했다고 한다. 따라서 차기 황제는 이 시렘운 또는 툴루이가의 장남인 몽케를 원했다고 전해지며, 소르코크타니 베키와 몽케 등 툴루이 가문 측에 그 뜻을 비밀리에 약속했다고 한다.

2. 1. 2. 청소년기

오고타이의 카툰 중 앙회 2황후(昻恢 二皇后)는 자녀가 없었고, 몽케를 양자로 삼아 한동안 데려다 길렀다. 이때 오고타이 칸의 첩 중 1명인 화리차(火里差)가 몽케에게 주어졌다. 화리차는 몽케가 칸위에 오른 뒤 카툰(황후)의 한 사람으로 책봉된다. 오고타이 칸은 총애하던 아들 쿠추가 1236년 남송 원정길에 죽자, 몽케를 잠정적 후계자 후보로 낙점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페르시아 학자 이디 단 무하메드에게 명하여 몽케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3]

1230년 몽케는 아버지 툴루이, 숙부 오고타이 칸을 따라 금나라 전쟁에 출정하였다. 그해 몽케는 아버지지 툴루이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금나라의 서북 지방을 공격하였다. 1232년 1월에는 아버지 툴루이를 따라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의 장군 완안진화상과 교전하였다. 1232년 10월 툴루이가 독배를 마시고 죽자, 몽케는 쓰촨성 일대 툴루이의 영지로 보내져 다스렸다. 생부 툴루이는 병든 오고타이 칸을 대신하여 저주가 든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하나, 일설에는 퇴레게네 카툰 혹은 오고타이의 측근들이 툴루이를 견제, 음모를 꾸며 죽였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 툴루이가 죽자, 몽골 관습에 따라 몽케는 아버지의 첩들 중 한 명인 오이라트족의 오굴 투이미시를 물려 받았다. 오굴 쿨미시는 몽케의 사촌 귀위크의 부인 오굴 카미시의 자매이기도 하다. 몽케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의 큰 딸 시린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71][5] 일설에는 오굴 투이미시는 툴루이와 결혼하기로 했는데, 툴루이가 죽어 몽케가 대신 결혼했다는 설도 있다.

1234년 몽케는 오고타이의 명으로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 전투에 출전, 채주을 공격했다. 완안승린은 체포되어 처형됐지만 금나라 장군 곽하마는 몽케의 본진이 퇴각한 뒤에도, 서주(西州) 성 외곽에서 몽골군을 상대로 2년을 더 항전했다.

몽케는 1209년 1월 11일 칭기즈 칸의 아들인 투루이의 장남이자 소르칵타니 베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브 텐그리 코크추라는 샤먼은 별에서 아이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그에게 몽골어로 '영원한'을 의미하는 몽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224년 일리강 근처에서 첫 사냥을 한 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샤 왕조 정복에서 돌아오는 길에 손자인 몽케와 쿠빌라이에게 의식을 거행했다.[4] 당시 몽케는 15세였으며, 그의 형제인 쿠빌라이와 함께 토끼와 영양을 사냥했다. 할아버지는 몽골 전통에 따라 사냥한 동물의 기름을 그들의 중지에 문질렀다.

1235년 그를 친척들과 함께 서쪽의 킵차크족, 키예프 루스, 볼가르족을 공격하도록 파견했다. 가장 강력한 킵차크족 수장인 바흐만이 볼가강 삼각주의 섬으로 도망치자 몽케는 강을 건너 그를 사로잡았다. 몽케가 바흐만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지만, 바흐만은 거부했고 몽케의 형제인 부젝에 의해 처형되었다. 몽케는 또한 몽골의 루스 침략 중 백병전에도 참여했다. 그의 사촌인 시반과 뷔리가 크림반도로 갔을 때, 몽케와 외게데의 아들인 카단은 카프카스의 부족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7] 몽골군은 알란족의 수도인 마가스를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많은 알란족과 체르케스족 수장들이 몽케에게 항복했다. 동유럽 침략 후, 몽케는 그들을 몽골로 데려왔다. 그는 또한 키예프 공성전 (1240년)에 참여했다. 몽케는 키예프의 화려함에 매료되어 항복을 제안했지만, 그의 사절들은 살해당했다.[8] 바투 칸의 군대가 몽케의 군대에 합류한 후, 그들은 도시를 약탈했다. 그는 또한 모히 전투에서 바투와 함께 싸웠다. 1241년 여름, 원정이 조기에 끝나기 전에, 몽케는 그의 삼촌 외게데가 1240-41년 겨울에 그를 소환했기 때문에 귀환했다. 그러나 외게데는 1241년 12월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아버지 툴루이와 함께 금나라의 명장 완안진상을 삼봉산 전투에서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다. 1232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툴루이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1235년, 2대 몽골 황제 오고타이 치하에서 카라코룸쿠릴타이에서 여러 나라 원정 계획이 제기되었다. 그중 하나로 조치 울루스의 당주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럽 원정이 결정되었고, 칭기스칸 가문의 각 왕가에서 차기 당주급 왕족들을 선발하여 이 원정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몽케도 툴루이 가문의 당주로서 이복동생 보체크(툴루이 칠남)와 함께 참여했다. 1236년 원정이 시작되었고, 몽케는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를 따라 먼저 볼가 불가르 지방에 침입하여 수도 불가르를 수베데이와 함께 정복했으며, 이듬해 1237년에는 보체크와 함께 키프차크 여러 부족의 수장 바추만을 추격하여 사살하는 군공을 세웠다. 1238년에는 카프카스 지방으로 내려가 오고타이 육남 카다안 오굴과 함께 아란인(알란인)들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데 힘썼고, 루스 여러 나라 정복에서는 키예프 공략에서 전공을 세웠다. 『원조비사』 등에 따르면, 이 원정 중 연회에서 오고타이의 장남 괴욱과 차가타이 가문의 왕자 뷔리가 총사령관인 바투와 다투고 욕설을 했다고 하며, 바투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는 격노하여 괴욱 등을 엄벌에 처하기 위해 몽골 본토로 소환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집사』에 따르면 뷔리는 원정군에 남겨졌지만, 괴욱은 1239년 가을에 군대를 떠나 몽골 본토로 귀환하는 길에 올랐다고 하며, 몽케도 이에 동행한 것 같고, 원정군은 그대로 서진하여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원정을 계속했고, 괴욱과 몽케는 이듬해 몽골 고원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이미 오고타이는 사망했다.

원래 할아버지 칭기스칸 사후에는, 막내 계승에 따라 툴루이가 몽골 황제(카안)가 될 예정이었지만, 툴루이가 고사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몽케를 새로운 카안으로 추대하기로 약속이 있었다.

2. 2. 중앙아시아, 서유럽 원정

1235년 외게데이 칸의 명으로 소집된 쿠릴타이에서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럽 원정이 결정되었고, 몽케는 툴루이 가문의 당주로서 이복동생 보체크(툴루이 칠남)와 함께 참여했다. 1236년 원정이 시작되었고, 몽케는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를 따라 볼가 불가르 지방에 침입하여 수도 불가르를 수베데이와 함께 정복했으며, 1237년에는 보체크와 함께 킵차크 여러 부족의 수장 바추만을 추격하여 사살했다. 1238년에는 카프카스 지방으로 내려가 오고타이 칸의 육남 카다안 오굴과 함께 알란인(아란인)들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고, 루스 여러 나라 정복에서는 키예프 공략에서 전공을 세웠다.

원정 중 연회에서 차가타이 가문의 왕자 뷔리가 총사령관인 바투와 다투고 욕설을 했고, 바투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 칸은 격노하여 귀위크 등을 엄벌에 처하기 위해 몽골 본토로 소환하라고 명령했다. 뷔리는 원정군에 남겨졌지만, 귀위크는 1239년 가을에 군대를 떠나 몽골 본토로 귀환하는 길에 올랐고, 몽케도 이에 동행했다. 원정군은 그대로 서진하여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원정을 계속했고, 귀위크와 몽케는 이듬해 몽골 고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오고타이 칸은 사망했다.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 등이 주치의 혈통을 문제삼아 바투를 모욕했고, 귀유크는 부리 등에 동조하면서 서방 원정군 사이에 말썽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오고타이 칸은 분개하여 귀위크를 소환했으나, 귀위크가 몽골로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칸의 죽음으로 서방 원정은 취소되고, 몽케 역시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1240년 몽케와 그의 군대는 몽골고원에 도착했다. 1244년 그는 툴루이의 울루스로 보내져, 툴루이 몫의 영지를 세습하였다.

1246년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동생인 종조부 테무게 옷치킨이 쿠릴타이 없이 대칸 자리를 탈취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퇴레게네 카툰의 강한 반발로 무산되었고, 귀위크가 돌아온 뒤 테무게의 부하 장군들은 전원 체포, 사형당했다. 테무게도 곧 사망한다. 귀위크는 테무게에게 부여된 옷치킨(화로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바투 칸의 형 오르다와, 몽케에게 나누어서 수여하려 했다.

퇴레게네 카툰이 몽골 귀족을 설득하는 한편, 상황 조종을 하여 1246년 7월의 쿠릴타이에서 귀위크가 대칸에 선출되게 했다. 몽케는 퇴레게네 카툰의 귀위크 추대 운동에 불만을 가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퇴레게네 생존 중에는 비밀리에 킵차크 한국의 바투와 손을 잡았다. 1246년 8월 24일 귀위크가 몽골 제국의 대칸 위에 올랐다. 몽케는 바투와 함께 귀위크 칸의 주요 경쟁자로 지목되었다.

유럽 원정 총사령관이며, 주치가문의 당주 바투는 원정중의 대립도 있고, 퇴레게네의 정치 공작과 구유크의 즉위에 반발해, 섭정이 된 퇴레게네가 3회의 쿠릴타이 소집하여 불렀으나 질병 요양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몽케도 이에 불만을 가지지만, 퇴레게네 생존 시에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숨어 지내며 바투와 교류, 손을 잡았다.

그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그에게 조언, 주치 울루스의 바투를 설득, 그의 지지를 얻어냈다. 구유크 칸 재위기간 중, 몽케는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의 조언을 따라, 당시 통풍으로 거동 불편한 바투를 만나러 킵차크 한국을 여러 번 찾아가기도 했다 한다. 1248년 구유크 칸이 죽자, 그의 처 오굴 카이미쉬 카툰이 섭정을 맡아보았다. 오굴 카이미시는 우구데이 가문에서 후계자를 세우려 했고, 툴루이 계열은 이에 반발했다. 1250년 바투의 영지에서 쿠릴타이가 열려 몽케가 칸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차가타이 가문과 오고타이 가문에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구유크와 사이가 좋지 않던 주치계 바투는 툴루이 가문의 손을 들어주었다.

1250년 말 몽케와 소르칵타니 베키는 각처의 몽골 울루스에 사자를 보내 케룰렌 강, 쿠데에 아랄로 친지와 일족을 소집, 1251년 2월 24일부터 3월 25일 다시 케룰렌 강, 쿠데에 아랄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몽케의 선출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바로 대칸 위에 오르지 못하고, 원사에 의하면 1260년 6월의 쿠데에 아랄과 오논강변에서 개최한 쿠릴타이에서 다시 몽케를 대칸으로 선출하여 대칸위에 올랐다 한다. 집사에는 음력 6월 11일(7월 1일)에 몽케가 최종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한다.

2. 2. 1. 귀환 이후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 등이 주치의 혈통을 문제삼아 바투를 모욕했고, 귀유크는 부리 등에 동조하면서 서방 원정군 사이에 말썽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오고타이 칸은 분개하여 귀위크를 소환했으나, 귀위크가 몽골로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칸의 죽음으로 서방 원정은 취소되고, 몽케 역시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1240년 몽케와 그의 군대는 몽골고원에 도착했다. 1244년 그는 툴루이의 울루스로 보내져, 툴루이 몫의 영지를 세습하였다.

1246년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동생인 종조부 테무게 옷치킨이 쿠릴타이 없이 대칸 자리를 탈취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퇴레게네 카툰의 강한 반발로 무산되었고, 귀위크가 돌아온 뒤 테무게의 부하 장군들은 전원 체포, 사형당했다. 테무게도 곧 사망한다. 귀위크는 테무게에게 부여된 옷치킨(화로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바투 칸의 형 오르다와, 몽케에게 나누어서 수여하려 했다.

퇴레게네 카툰이 몽골 귀족을 설득하는 한편, 상황 조종을 하여 1246년 7월의 쿠릴타이에서 귀위크가 대칸에 선출되게 했다. 몽케는 퇴레게네 카툰의 귀위크 추대 운동에 불만을 가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퇴레게네 생존 중에는 비밀리에 킵차크 한국의 바투와 손을 잡았다. 1246년 8월 24일 귀위크가 몽골 제국의 대칸 위에 올랐다. 몽케는 바투와 함께 귀위크 칸의 주요 경쟁자로 지목되었다.

유럽 원정 총사령관이며, 주치가문의 당주 바투는 원정중의 대립도 있고, 퇴레게네의 정치 공작과 구유크의 즉위에 반발해, 섭정이 된 퇴레게네가 3회의 쿠릴타이 소집하여 불렀으나 질병 요양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몽케도 이에 불만을 가지지만, 퇴레게네 생존 시에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숨어 지내며 바투와 교류, 손을 잡았다.

그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그에게 조언, 주치 울루스의 바투를 설득, 그의 지지를 얻어냈다. 구유크 칸 재위기간 중, 몽케는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의 조언을 따라, 당시 통풍으로 거동 불편한 바투를 만나러 킵차크 한국을 여러 번 찾아가기도 했다 한다. 1248년 구유크 칸이 죽자, 그의 처 오굴 카이미쉬 카툰이 섭정을 맡아보았다. 오굴 카이미시는 우구데이 가문에서 후계자를 세우려 했고, 툴루이 계열은 이에 반발했다. 1250년 바투의 영지에서 쿠릴타이가 열려 몽케가 칸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차가타이 가문과 오고타이 가문에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구유크와 사이가 좋지 않던 주치계 바투는 툴루이 가문의 손을 들어주었다.

1250년 말 몽케와 소르칵타니 베키는 각처의 몽골 울루스에 사자를 보내 케룰렌 강, 쿠데에 아랄로 친지와 일족을 소집, 1251년 2월 24일부터 3월 25일 다시 케룰렌 강, 쿠데에 아랄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몽케의 선출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바로 대칸 위에 오르지 못하고, 원사에 의하면 1260년 6월의 쿠데에 아랄과 오논강변에서 개최한 쿠릴타이에서 다시 몽케를 대칸으로 선출하여 대칸위에 올랐다 한다. 집사에는 음력 6월 11일(7월 1일)에 몽케가 최종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한다.

2. 3. 즉위 후의 생애

## 즉위 직후

1251년 7월 1일, 예전부터 지정되어 있던 칭기즈 칸의 대오르도가 있던 코데에 아랄 지방의 쿠릴타이에서 몽케는 만장일치로 몽골 제국의 제4대 황제(카안)로 즉위했다.[9] 몽케 칸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의 조언에 따라 몽케는 통풍을 앓고 있던 바투 칸이 있는 킵차크 한국으로 갔다. 바투는 몽케의 즉위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알라 카마크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칭기즈 칸의 형제들의 가문 지도자들과 여러 중요한 장군들이 쿠릴타이에 참석했다. 괴욱의 아들인 나쿠와 호자도 잠시 참석했지만 이내 떠났다. 오굴 카이미시의 서기관인 발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는 몽케를 칸으로 승인했다. 참석자와 장소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 쿠릴타이의 유효성은 의문스러웠다. 바투는 몽케를 그의 형제인 베르케와 투카테무르, 그리고 그의 아들 사르탁의 보호 아래 몽골의 코도에 아랄에서 공식 쿠릴타이를 소집하도록 보냈다. 소르칵타니와 베르케가 1251년 7월 1일에 두 번째 쿠릴타이를 조직했을 때, 모인 군중은 몽케를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포했고,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의 일부 인물들, 예를 들어 그의 사촌인 카단과 폐위된 칸 카라 훌레구도 이 결정을 인정했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원래라면 시레문 또는 몽케가 계승해야 했지만, 오고타이의 황후였던 도레게네의 정치 공작으로 오고타이와 도레게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구유크가 계승하게 되었다. 유럽 원정의 총사령관이었던 조치 가문의 당주 바투는 원정 중의 대립도 있어 도레게네의 공작과 구유크의 즉위에 반발하여, 섭정이 된 도레게네의 거듭된 쿠릴타이 소집에도 불구하고, 병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몽케도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레게네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잠복하고 바투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년 동안, 몽골 제국은 카안의 공위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고, 제국 각지, 특히 변방에서는 주둔군의 폭행이나 현지 책임자의 칙령 위조 및 군령 남발 등이 반복되면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본 툴루이 가문의 소르코크타니 베키는 도레게네의 요구에 응하여, 1246년 봄에 쿠릴타이 개최를 제국 전역에 알렸다. 바투는 자신의 출석은 병을 이유로 거부했지만, 장남 오르다와 차남 벨케 등 조치 가문의 유력 왕족들을 몽골 본토로 파견하여, 템게 오치긴 등 동방 삼왕가와 오고타이, 차가타이, 툴루이 가문의 왕족 여러 장수들, 그리고 제국 각지의 귀순 여러 정권의 대표들도 참석시켜, 같은 해 8월의 쿠릴타이에서 구유크가 제3대 황제(카안)에 즉위했다.

도레게네는 구유크를 보내고, 그 2개월 후에 병사했다. 구유크는 오고타이, 차가타이 양 가문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확고히 하려고 무리하게 당주 지위의 개폐를 행하고, 또한 조카인 시레문도 멀리했다. 특히 전년부터 불화하던 조치 가문의 바투와의 대립이 결정적이 되어, 곧 내전이 될 뻔했지만, 즉위 2년 후인 1248년에 구유크도 병사했다.

바투는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고, 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조치 가문과 툴루이 가문이 공동으로 제국의 국정 재건을 계획하고, 소르코크타니 베키와 연계했다. 구유크가 죽은 후, 그의 황후 오굴가이미시가 섭정이 되었지만, 바투는 소르코크타니 베키와 몽케, 쿠빌라이 등 툴루이 가문의 왕족들과 유력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독자적으로 회합을 열고, 오굴가이미시를 비롯한 오고타이 가문 정권의 거부를 표명했다. 다음으로 조치 가문과 툴루이 가문이 주최하는 쿠릴타이를 강행하여, 만장일치로 몽케를 차기 몽골 황제로 지명했다. 오굴가이미시 측은 계승 후보로 구유크의 아들 호자 오굴을 원하고 있었고, 다른 오고타이 가문이나 차가타이 가문의 왕족들은 시레문을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미성년이었고, 바투 등이 추대하는 몽케에 비해 몽골 황족이나 여러 장수들의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오굴가이미시는 바투 등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오히려 당시 오논 강, 켈렌 강의 발원 지역에 있던 칭기즈칸의 오르도에서 개최하는 두 번째 쿠릴타이 참석을 권유받았다. 구유크에 의해 차가타이 가문의 당주가 된 예수 몽케도 바투를 비난했지만, 바투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미성년자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서간으로 반박하고, 거듭 쿠릴타이 참석을 요구했다.

이렇게 바투 측과 오굴가이미시 등 이에 대항하는 여러 세력은 제국 각지에서 지지자 확보에 분주하여 2년을 더 보냈지만, 이 이상의 지연이 가져올 제국의 혼란을 우려한 바투는 툴루이 가문과 동방 삼왕가와도 협의하여 오굴가이미시 측과 예스 몽케에게 마지막 설득을 했다. 마침내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계승 후보 시레문과 호자 오굴 등 자신들이 출석을 표명했지만, 그들은 약속한 날짜에 지정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몽케는 조상들이 가던 길을 따라가겠다고 선언했으나 다른 나라의 길을 모방하지는 않을 것이라 했다.[9] 즉위 직후 몽케는 차가타이계의 분리독립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를 강화하고 몽골 제국무역로 확보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무슬림중앙아시아상인들을 통해 교역로 확보 정책을 펼쳤다.

몽케는 사치스러운 관행과 비용이 많이 드는 행사들의 제한, 금지했으며, 모든 법령은 보르지긴 및 비 보르지기드 귀족에게도 적용시켰다. 또한 지방관과 부족장들에게 선물을 제한하고, 녹봉을 지급하였으며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몽케는 무역 조건을 간소화하되, 일반 상인에게 세금이 부과하였다. 또한 몽케는 몽골 부족장, 귀족들에 의한 약탈을 법으로 금지하고, 과도한 세금부과도 억제하여 교역이 증가했다. 파이자 사용을 금지시켰다.[74] 몽케는 귀족의 사치, 상인의 미신고 밀거래를 금지하였다.

그는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킵차크 한국의 바투에 대해, 종주권을 인정하되 독자적인 통치, 자치권을 허용해주었다. 몽골 제국의 점령지와 직할지에 몽케는 직접 총독, 재무담당자, 세금 장수 담당자를 파견했으나 킵차크 한국에는 파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결하도록 승인해주었다. 종교에 대해서도 그는 관대하여, 할아버지 징기스칸처럼 각자가 원하는 대로 숭배하는 신을 믿으면 된다며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고, 모든 종파를 포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 오고타이 계열, 차가타이 계열 왕족 숙청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차가타이계 왕자들은 몽케를 붙잡아 폐위시킬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했다.

귀위크 칸의 아들 호자와 오고타이의 손자 시레문/失烈门중국어 등이 몽케에게 "충성을 표하기" 위해 왔지만, 오고타이 세력의 전체 군대를 데리고 왔다.[9] 몽케의 매사냥꾼 케시그는 공격 준비를 발견하고 몽케에게 알렸다. 몽케의 아버지의 충신 멩게사르 노얀의 조사로 친척들이 유죄임을 밝혀냈다.[9]

시레문/失烈门중국어을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대칸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금세 발각되어 음모의 주동자인 시레문을 비롯한 여러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귀위크 칸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 등이 툴루이의 측근이었던 멘게사르 노얀에 의해 체포, 숙청당했다. 몽케는 오굴 카이미쉬를 고문 후 펠트에 싸서 강물에 던져 익사시켰다.[9] 일설에는 사약을 내려 사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도 오고타이계 인사 77명을 처형했는데, 입에 돌과 흙이 물려 있었다. 일설에는 3백여 명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색목인 출신 재상 친카이(鎭海) 혹은 친친카이(田鎭海) 등 오고타이 가문의 측근 관료들도 대거 숙청하였다. 귀족, 관리, 몽골 지휘관의 사망자 수는 엘지기데이, 예수 몽케, 뷔리, 그리고 실렘운을 포함하며 77명에서 300명까지 추정된다.[9]

라시드 앗 딘에 의하면 반란을 일으킨 오고타이계의 처우를 놓고 누군가 고목 나무를 뽑아 그 자리에 신목을 심는다는 고사를 언급하자, 몽케는 이를 계기로 오고타이계 숙청에 돌입한다.

오고타이계 왕자들과 차가타이계 왕자들의 가담을 확인한 몽케 칸은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오고타이계 왕자들, 차가타이계 왕자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이후 살아남은 오고타이 계 왕자들은, 카이두를 제외하고는 몽골을 떠나 차가타이 울루스, 주치 울루스로 망명하였다. 차가타이의 후손 예수 몽케 역시 숙청당했다. 차가타이계 왕자들 역시 숙청되면서 차가타이 후손들은 몽골 본국과 교류를 끊고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한다. 몽케는 오고타이와 차가타이의 후손들은 견제, 박해하였다. 위구르인 출신 관료 발라, 위구르족의 족장 이디쿠트 살린디 등도 몽케에 반대하다가 적발되어 공개 처형시켰다. 위구르족 서기관인 발라와 이디쿠트 살린디(위구르족의 군주)의 몽케 반대 음모가 발각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9]

귀위크 칸의 아들 호자, 나쿠 등은 사형은 면제했으나, 카라코룸 서부 지역으로 추방하였다. 몽케는 칭기즈 칸의 후손들, 왕족들 중에서도 오고타이 계열을 지지하는 왕공족들을 대거 숙청, 추방하였다.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는 형식적으로는 몽케에게 복종했으나, 오고타이 가문을 몰락시킨 것에 불만을 품고 점차 몽케 칸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반발하였다. 카이두는 후일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간 내전이 발생하자 아리크부카의 편에 붙었고, 아리크부카 몰락 이후에는 아리크부카 계승을 선언하고 쿠빌라이에게 저항한다.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의 패배 후, 몽케는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순종적인 가족 구성원들에게 투르키스탄이나 중국 북서부의 새로운 영토를 할당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 후, 몽케는 포로와 사로잡힌 사람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을 명령했다.

## 고려에 항복 요구

1251년 10월 몽케 칸은 고려에 특사를 보내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고종이 직접 몽골로 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은 동생과 왕족들을 보내기로 했다. 몽케의 특사는 고려 고종에게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28]

그러나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떠나지 않았고, 무신 정권은 수도 천도에 반대했다. 몽케는 다시 특사를 파견, 고려 관료들은 몽케의 특사를 일단 환대하였으나 천도하지 않았고, 몽케의 특사는 고려 관료들을 비난하고 귀국했다. 1253년 7월 몽케는 예쿠(한국 한자: 也窟 또는 也古)에게 군사를 딸려 고려의 강화도로 파견,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형식적인 답을 주어 되돌려보냈다.[29] 1254년 1월 고려 고종은 왕족 중 한명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칭하고 몽골 카라코룸으로 보내 몽케 칸에게 입조하게 했다. 몽케는 고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중에 몽케 칸은 고려의 사절단이 돌아간 뒤, 고려에서 보낸 사절이 고려 왕조의 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분개,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 고려를 비난했다.[29]

## 북부 인도 점령

1248년 델리 술탄국의 내부 갈등으로 마물루크 술탄 나시루딘 마흐무드의 형제인 잘랄 알 딘 마수드는 몽골로 망명했다. 잘랄 알 딘 마수드는 몽케가 칸에 즉위하는데 참여하고, 자신의 조상의 영역을 되찾도록 도움을 요청했다.[38]

1252년부터 1253년 몽케는 타타르족의 살리 노얀 또는 살리 바하두르에게 군사를 딸려 인도로 보냈다. 살리는 후일 훌라구 진영으로 가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으나 인도 정복은 실패했고, 인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잘랄 알 딘은 라호르, 쿠자, 소드라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인도 북부에 다루가치를 파견한다. 1254년 델리 술탄령의 쿠슐루는 몽케 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몽골 다루가치를 받아들였다.[38] 샴 알-딘 무함마드 카르트는 헤라트의 속국 말릭으로서 몽골군에 동행했다. 1257년에서 1258년 겨울에 살리 노얀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신드에 진입하여 무탄의 요새를 파괴했으며, 그의 군대는 인더스강의 섬 요새인 바크카르를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다.[39]

## 내정 활동

몽케는 칙령, 조서를 내릴 때 반드시 초안을 직접 기초하였다. 직접 조서를 작성하고 검토했으며, 신하들이 문구와 어구를 수정해서 올리면 네번을 다시 읽고 검토한 뒤에 시행하였다. 몽케는 지도력과 준엄하고 일관성, 과단성 있는 정책으로 우구데이 칸 사후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몽골 제국의 분열을 일시적으로 완화하였다. 자신의 즉위에 대해 차가타이 가문과 카단, 오굴 카이미쉬를 제외한 우구데이 칸 가문, 차가타이 가문 일부를 다소 혹독하게 다스렸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통솔력을 믿고, 몽골 공동체 간의 관계를 소홀히 했으며, 독단적인 정책 추진도 있었다.[10]

상인에게도 세금을 부과, 백성들의 착취를 막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 또한 귀족과 지역 유력자들의 사치품 소비, 재정적 적자를 엄금하였다.[10]

몽케는 형벌을 엄격히 적용했다. 몽케는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엄격하여 자신의 가족, 측근, 몽골 제부족장과 몽골인, 정복지와 속국의 백성들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여인이 홀로 물항아리를 들고 여행해도, 강도, 강간의 위험이 없다는 말이 회자화되었다. 몽케는 사법과 행정을 분할하여 재판관과 조사 담당자를 분할, 따로 임명하였다.

점령지와 정복지에는 몽골인 군대를 주둔시키고, 총독인 다루가치와 고위층은 몽골인, 무슬림을 임명하는 한편 실무 담당자는 현지인을 채용하여 통치하였다. 또한, 몽골 백성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는 한편, 현지 주민의 종교와 풍속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정책을 펼쳤다. 1일에 약 5백여 대의 세금과 공물을 실은 수레가 카라코룸을 다녀갔다.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친중국화 정책, 성리학과 도교를 수용했고, 몽케 칸은 이를 내심 불쾌하게 여겼다. 몽골의 보수적 부족장들 또한 쿠빌라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몽케는 쿠빌라이가 다스리던 허베이 성의 세무, 재무 조사를 실시하여, 쿠빌라이 측근들이 조세를 바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내를 보내고 자신도 직접 가서 몽케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자말 알 딘 등 아랍 출신 학자들을 기용, 수도에 천문대를 개설하였다.

1253년 프랑스의 군주 루이 9세가 프란시스코회 소속 수도사 기욤 드 뤼브룩을 카라코룸으로 보냈다. 기욤 드 뤼브룩은 몽케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고했으나, 몽케 칸은 생각해보겠다며 완곡한 방법으로 거절하였다. 기욤은 이 당시의 기록을 귀국 후, 기행문 형식으로 출간한다. 몽케 칸의 재위 중 러시아의 류리크의 사절단,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 헥툼 2세의 사절단이 몽골 제국 카라코룸을 방문, 이들을 접견하였다.

몽케 칸 시대의 몽골 제국


멩게세르 노얀


몽케는 보르지긴과 보르지긴이 아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비용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왕자들에게 주는 선물을 제한하여 정기적인 봉급으로 전환했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10] 몽골의 후원을 받는 상인들의 사업을 감독하기 위해 황실 조사관을 파견했다. 그는 상인들이 황실 봉수대인 역로(yam)와 민간인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요구할 권한을 부여하는 파이자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10]

1253년 몽골과 비몽골 귀족들이 화폐를 과다 발행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지폐 발행을 통제하기 위한 화폐국을 설립했다.[12]

1252년부터 1259년 사이에 몽케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및 북중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15] 중국의 인구 조사는 1252년에 완료되었지만, 극 북서쪽의 노브고로드는 1258년에서 1259년 겨울까지 계산되지 않았다.

1257년 노브고로드에서 몽골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도시가 몽골의 인구 조사와 세금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1259년 조지아의 왕 다비드 6세는 몽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쿠타이시로 도망쳤고, 거기서 서조지아의 이메레티를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다스렸다. 1261년 그는 나중에 몽골의 지배를 종식시키려고 했던 다비드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 후 황제로서의 지위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북과 투르키스탄 등에 행정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관리 마흐무드 얄라바치와 마수드 베크 부자를 중용하여 재정 정책에 중점을 두고 재정을 풍족하게 했다.

## 인구조사와 조세 징수 성문화

1252년부터 1259년까지 몽케는 몽골 및 북부 중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정복지와, 속국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남부 러시아, 중앙아시아 일대 공국 등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75] 1252년 그 해에 북부 중국의 인구 조사가 완료되었다. 오고타이 칸 때부터 호라즘의 총독으로 다스리던 오이라트부 출신 아르군을 신임, 그에게 지시하여 호구 조사와 세금 징수 강화를 명했다. 후일 훌라구의 일 한국 건국 후, 이때 정리된 아르군의 호구 조사와 세금 징수 방법을 그대로 참고하게 된다.

그러나 동부 및 남부 러시아와 노브고로드는 1258~1259년 겨울까지는 계산되지 않았다. 1257년 노브고로드에서 몽골의 종주권에 대한 반란이 있었지만, 노브로로드 대공 알렉산드르 네브스키는 몽골의 인구 조사와 과세에 복종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했다.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자원량을 파악 한 후 이를 활용하여, 세금을 징수했다. 새로운 인구 조사는 가구 뿐만 아니라, 징병을 목적으로 15세~60세의 남성 인구 수를 일일이 파견 지방관과 부족장들을 통해 직접 파악하게 하고, 정확한 세금, 공물 징수 기준을 정하고자 가축, 논밭, 농장, 과수원, 포도원의 수도 계산하여 문서화했다.

몽케는 자신의 칙령을 직접 작성하고 개정 과정을 면밀히 감독했다. 몽케는 보르지긴과 보르지긴이 아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비용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왕자들에게 주는 선물을 제한하여 정기적인 봉급으로 전환했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10] 몽케는 악명 높은 폐단을 제한하고 몽골의 후원을 받는 상인들의 사업을 감독하기 위해 황실 조사관을 파견했다. 그는 상인들이 황실 봉수대인 역로(yam)와 민간인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요구할 권한을 부여하는 파이자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10]

몽케 칸은 허가 없이 군대가 민간인을 약탈하도록 허용한 장군과 왕자들(그의 아들 포함)을 반복적으로 처벌했다.[11] 그는 북중국, 무슬림, 위구르 관리들을 사용했다. 카간의 수석 판사(다루가치)는 자이트-자라이르 관리인 몽케셀/忙哥撒儿중국어였고, 수석 서기는 기독교인이었던 케레이트의 불가이였다. 몽케 칸의 16명의 주요 지방 관리 중 9명은 확실히 무슬림이었다. 그는 휘종의 세 명의 관리인 중국에 있는 마흐무드 야라바치, 투르키스탄에 있는 마수드 베그, 오이라트이란에 있는 아르군 아카를 재임명했다. 몽케는 법정의 대법관 직책과 수석 서기관 직책을 분리했다.

1253년 몽케는 몽골과 비몽골 귀족들이 휘종 시대 이후 화폐를 과다 발행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지폐 발행을 통제하기 위한 화폐국을 설립했다.[12] 그의 권위는 ''수케'' 또는 은괴를 기준으로 통일된 척도를 확립했지만, 몽골은 외국 신민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단위와 무게를 사용하여 주화를 주조하도록 허용했다.[13]

1252년부터 1259년 사이에 몽케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및 북중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15] 중국의 인구 조사는 1252년에 완료되었지만, 극 북서쪽의 노브고로드는 1258년에서 1259년 겨울까지 계산되지 않았다. 1257년 노브고로드에서 몽골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도시가 몽골의 인구 조사와 세금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새로운 인구 조사는 가구뿐만 아니라 15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성 수, 들판, 가축, 포도원 및 과수원의 수를 계산했다. 민간 등록부 내에서 장인은 별도로 나열되었고, 군사 등록부에서는 보조병과 일반 가구가 구별되었다. 승인된 종교의 성직자는 분리되었고 계산되지 않았다. 새로운 등록부가 완성되면 사본 하나는 카라코룸으로 보내고 사본 하나는 지방 행정부에 보관했다.[16] 몽케는 필요한 부대에 전달할 수 있는 황실 대리인이 징수하는 고정된 인두세를 만들려고 했다.

1259년 조지아의 왕 다비드 6세는 몽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쿠타이시로 도망쳤고, 거기서 서조지아의 이메레티를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다스렸다. 1261년 그는 나중에 몽골의 지배를 종식시키려고 했던 다비드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다비드 울루는 몽골과 평화를 맺고 1262년 트빌리시로 돌아왔다. 몽케와 바투의 관리인 알군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귀족들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저명한 지도자들을 처형했다.[18] 그는 조지아인들을 여섯 개의 투멘으로 나눴다. 한편, 바이주는 1256년 앙카라 근처에서 셀주크 술탄 카이카우스 2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터키 동부에 대한 몽골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 티베트 기증, 대리국 원정

1251년부터 1252년 조카이자 쿠빌라이의 서자 코리다이 등을 티베트 원정군을 딸려보내 정벌하게 하기도 했다.[37] 몽케는 1251년 꼬리다이를 티베트 주둔 몽골 및 한족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252년에서 1253년 사이에 꼬리다이는 티베트를 침략하여 담슝까지 이르렀다. 중앙 티베트의 사찰들은 몽골에 복속했고, 몽골 왕자들은 그것들을 자신의 식읍으로 나누었다. 몽케는 티베트티베트 불교의 승려들과도 연락했다. 티베트의 홍사에 의하면 몽케 칸은 티베트 불교 중 디군파(派)와 시주-복전 관계를 형성했다 한다. 1250년 티베트의 승려, 역사(譯師), 티베트 각처의 지방 수령, 왕공들이 뭉케를 방문, 왕실 형제들이 라마에게 공양할 분지를 정해주기를 요청했다. 몽케 칸은 코단에게서 티베트 영지를 거두고 티베트 영지를 분할, 티베트 불교의 각 교파에 공양했다 한다.

1252년 6월 몽케는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윈난성(雲南省) 일대의 대리국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귀족, 군주들은 친중국적인 쿠빌라이를 의심하였고, 몽케 역시 친중국적인 동생 쿠빌라이를 내심 의심, 견제하였다. 동생 쿠빌라이는 7월에 군사를 이끌고 출발, 대리국으로 가 교전하였다. 이때 쿠빌라이와 같이 딸려보낸 일부 족장이 갑자기 독에 중독돼 회군하기도 했다. 1253년 8월 쿠빌라이의 군대는 섬서성(陝西省)에 도착하고 윈난성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겨울에 대리국으로 들어갔다. 1254년 1월 2일 단흥지(段興智)의 항복을 받아내,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하였다.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하고 윈난행성(雲南行省)을 설치했다. 1256년 단흥지(段興智)는 숙부 단신저복(段信苴福) 등을 데리고 몽골고원으로 친히 와

2. 3. 1. 즉위 직후

1251년 6월 11일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귀위크 칸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의 강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툴루이계의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었다.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자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쿠릴타이를 무효화 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여기에는 중근동 다루가치인 엘지기데이와 그의 두 아들이 연루되었다. 이들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귀위크 칸의 왕비 오굴 카이미쉬 카툰은 다음 칸은 시레문(失烈門)이라며 몽케를 추대하는 것은 오고타이 칸의 유지를 어기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몽케는 누가 오고타이 칸의 뜻에 어긋났느냐며 반박했다. 몽케는 이전 쿠릴타이에서 귀위크를 칸으로 세운 사람들은 누구이고, 오고타이가 후계자로 세운 시레문이 대신 다른 사람을 세운 것은 누구인가, 오고타이 칸의 유언을 뒤집은 것은 오고타이 가문 사람들이며, 이제 또 시레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칸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자격은 있느냐며 반박했다. 일설에는 몽케 칸이 아니라 쿠빌라이가 현장에서 오고타이 가문의 주장을 반박했다는 설도 있다.

몽케는 조상들이 가던 길을 따라가겠다고 선언했으나 다른 나라의 길을 모방하지는 않을 것이라 했다.[73] 즉위 직후 몽케는 차가타이계의 분리독립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를 강화하고 몽골 제국무역로 확보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무슬림중앙아시아상인들을 통해 교역로 확보 정책을 펼쳤다.

몽케는 사치스러운 관행과 비용이 많이 드는 행사들의 제한, 금지했으며, 모든 법령은 보르지긴 및 비 보르지기드 귀족에게도 적용시켰다. 또한 지방관과 부족장들에게 선물을 제한하고, 녹봉을 지급하였으며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몽케는 무역 조건을 간소화하되, 일반 상인에게 세금이 부과하였다. 또한 몽케는 몽골 부족장, 귀족들에 의한 약탈을 법으로 금지하고, 과도한 세금부과도 억제하여 교역이 증가했다. 파이자 사용을 금지시켰다.[74] 몽케는 귀족의 사치, 상인의 미신고 밀거래를 금지하였다.

그는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킵차크 한국의 바투에 대해, 종주권을 인정하되 독자적인 통치, 자치권을 허용해주었다. 몽골 제국의 점령지와 직할지에 몽케는 직접 총독, 재무담당자, 세금 장수 담당자를 파견했으나 킵차크 한국에는 파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결하도록 승인해주었다. 종교에 대해서도 그는 관대하여, 할아버지 징기스칸처럼 각자가 원하는 대로 숭배하는 신을 믿으면 된다며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고, 모든 종파를 포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몽케 칸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의 조언에 따라 몽케는 통풍을 앓고 있던 바투 칸이 있는 킵차크 한국으로 갔다. 바투는 몽케의 즉위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알라 카마크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칭기즈 칸의 형제들의 가문 지도자들과 여러 중요한 장군들이 쿠릴타이에 참석했다. 괴욱의 아들인 나쿠와 호자도 잠시 참석했지만 이내 떠났다. 오굴 카이미시의 서기관인 발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는 몽케를 칸으로 승인했다. 참석자와 장소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 쿠릴타이의 유효성은 의문스러웠다. 바투는 몽케를 그의 형제인 베르케와 투카테무르, 그리고 그의 아들 사르탁의 보호 아래 몽골의 코도에 아랄에서 공식 쿠릴타이를 소집하도록 보냈다. 소르칵타니와 베르케가 1251년 7월 1일에 두 번째 쿠릴타이를 조직했을 때, 모인 군중은 몽케를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포했고,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의 일부 인물들, 예를 들어 그의 사촌인 카단과 폐위된 칸 카라 훌레구도 이 결정을 인정했다.

그 직후, 오굴의 아들 호자와 오고타이의 총애를 받던 손자 이 새로운 통치자 몽케에게 "충성을 표하기" 위해 왔지만, 그들은 오고타이 세력의 전체 군대를 데리고 왔다. 몽케의 칸칼리 매사냥꾼 케시그는 공격 준비를 발견하고 그의 주군에게 알렸다. 그의 아버지의 충직한 신하인 멩게사르 노얀의 조사 끝에, 그는 그의 친척들이 유죄임을 밝혀냈지만, 처음에는 대 야사에 기록된 대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했다. 몽케의 관리들은 이에 반대했고, 그 후 그는 친척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재판은 동쪽의 몽골과 중국에서부터 서쪽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몽케와 바투의 형제 베르케는 오굴이 몽케에게 흑마법을 사용했다고 고발하도록 조치했다. 소르칵타니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후, 오굴 카이미시는 자루에 꿰매어져 강에 던져져 익사당했는데, 이는 흑마법을 사용한 것에 대한 전통적인 몽골의 처벌이었다. 귀족, 관리, 몽골 지휘관의 사망자 수는 엘지기데이, 예수 몽케, 뷔리, 그리고 실렘운을 포함하며 77명에서 300명까지 추정된다. 그러나 음모에 연루된 칭기즈 칸의 후손 대부분은 어떤 형태의 유배를 받았다. 위구르족 서기관인 발라와 이디쿠트 살린디(위구르족의 군주)의 몽케 반대 음모가 발각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자, 원래라면 시레문 또는 몽케가 계승해야 했지만, 오고타이의 황후였던 도레게네의 정치 공작으로 오고타이와 도레게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구유크가 계승하게 되었다. 유럽 원정의 총사령관이었던 조치 가문의 당주 바투는 원정 중의 대립도 있어 도레게네의 공작과 구유크의 즉위에 반발하여, 섭정이 된 도레게네의 거듭된 쿠릴타이 소집에도 불구하고, 병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몽케도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레게네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잠복하고 바투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년 동안, 몽골 제국은 카안의 공위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고, 제국 각지, 특히 변방에서는 주둔군의 폭행이나 현지 책임자의 칙령 위조 및 군령 남발 등이 반복되면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본 툴루이 가문의 소르코크타니 베키는 도레게네의 요구에 응하여, 1246년 봄에 쿠릴타이 개최를 제국 전역에 알렸다. 바투는 자신의 출석은 병을 이유로 거부했지만, 장남 오르다와 차남 벨케 등 조치 가문의 유력 왕족들을 몽골 본토로 파견하여, 템게 오치긴 등 동방 삼왕가와 오고타이, 차가타이, 툴루이 가문의 왕족 여러 장수들, 그리고 제국 각지의 귀순 여러 정권의 대표들도 참석시켜, 같은 해 8월의 쿠릴타이에서 구유크가 제3대 황제(카안)에 즉위했다.

도레게네는 구유크를 보내고, 그 2개월 후에 병사했다. 구유크는 오고타이, 차가타이 양 가문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확고히 하려고 무리하게 당주 지위의 개폐를 행하고, 또한 조카인 시레문도 멀리했다. 특히 전년부터 불화하던 조치 가문의 바투와의 대립이 결정적이 되어, 곧 내전이 될 뻔했지만, 즉위 2년 후인 1248년에 구유크도 병사했다.

바투는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고, 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조치 가문과 툴루이 가문이 공동으로 제국의 국정 재건을 계획하고, 소르코크타니 베키와 연계했다. 구유크가 죽은 후, 그의 황후 오굴가이미시가 섭정이 되었지만, 바투는 소르코크타니 베키와 몽케, 쿠빌라이 등 툴루이 가문의 왕족들과 유력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독자적으로 회합을 열고, 오굴가이미시를 비롯한 오고타이 가문 정권의 거부를 표명했다. 다음으로 조치 가문과 툴루이 가문이 주최하는 쿠릴타이를 강행하여, 만장일치로 몽케를 차기 몽골 황제로 지명했다. 오굴가이미시 측은 계승 후보로 구유크의 아들 호자 오굴을 원하고 있었고, 다른 오고타이 가문이나 차가타이 가문의 왕족들은 시레문을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미성년이었고, 바투 등이 추대하는 몽케에 비해 몽골 황족이나 여러 장수들의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오굴가이미시는 바투 등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오히려 당시 오논 강, 켈렌 강의 발원 지역에 있던 칭기즈칸의 오르도에서 개최하는 두 번째 쿠릴타이 참석을 권유받았다. 구유크에 의해 차가타이 가문의 당주가 된 예스 몽케도 바투를 비난했지만, 바투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미성년자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서간으로 반박하고, 거듭 쿠릴타이 참석을 요구했다.

이렇게 바투 측과 오굴가이미시 등 이에 대항하는 여러 세력은 제국 각지에서 지지자 확보에 분주하여 2년을 더 보냈지만, 이 이상의 지연이 가져올 제국의 혼란을 우려한 바투는 툴루이 가문과 동방 삼왕가와도 협의하여 오굴가이미시 측과 예스 몽케에게 마지막 설득을 했다. 마침내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계승 후보 시레문과 호자 오굴 등 자신들이 출석을 표명했지만, 그들은 약속한 날짜에 지정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몽케를 추대하는 바투를 시작으로 조치 가문, 툴루이 가문, 동방 삼왕가는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1251년 7월 1일, 예전부터 지정되어 있던 칭기즈칸의 대오르도가 있던 코데에 아랄 지방의 쿠릴타이에서 몽케는 만장일치로 몽골 제국의 제4대 황제(카안)로 즉위했다.

이때, 후일의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선제 구유크의 황후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오굴가이미시, 그리고 시레문, 예스 몽케 등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의 반대파를 처형, 숙청하는 냉혹함을 보였다.

2. 3. 2. 오고타이 계열, 차가타이 계열 왕족 숙청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차가타이계 왕자들은 몽케를 붙잡아 폐위시킬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했다.

귀위크 칸의 아들 호자와 오고타이의 손자 시레문(失烈門)등이 몽케에게 "충성을 표하기" 위해 왔지만, 오고타이 세력의 전체 군대를 데리고 왔다.[9] 몽케의 매사냥꾼 케시그는 공격 준비를 발견하고 몽케에게 알렸다. 몽케의 아버지의 충신 멩게사르 노얀의 조사로 친척들이 유죄임을 밝혀냈다.[9]

시레문(失烈門)을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대칸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금세 발각되어 음모의 주동자인 시레문을 비롯한 여러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귀위크 칸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 등이 툴루이의 측근이었던 멘게사르 노얀에 의해 체포, 숙청당했다. 몽케는 오굴 카이미쉬를 고문 후 펠트에 싸서 강물에 던져 익사시켰다.[9] 일설에는 사약을 내려 사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도 오고타이계 인사 77명을 처형했는데, 입에 돌과 흙이 물려 있었다. 일설에는 3백여 명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색목인 출신 재상 친카이(鎭海) 혹은 친친카이(田鎭海) 등 오고타이 가문의 측근 관료들도 대거 숙청하였다. 귀족, 관리, 몽골 지휘관의 사망자 수는 엘지기데이, 예수 몽케, 뷔리, 그리고 실렘운을 포함하며 77명에서 300명까지 추정된다.[9]

라시드 앗 딘에 의하면 반란을 일으킨 오고타이계의 처우를 놓고 누군가 고목 나무를 뽑아 그 자리에 신목을 심는다는 고사를 언급하자, 몽케는 이를 계기로 오고타이계 숙청에 돌입한다.

오고타이계 왕자들과 차가타이계 왕자들의 가담을 확인한 몽케 칸은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오고타이계 왕자들, 차가타이계 왕자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이후 살아남은 오고타이 계 왕자들은, 카이두를 제외하고는 몽골을 떠나 차가타이 울루스, 주치 울루스로 망명하였다. 차가타이의 후손 예수 몽케 역시 숙청당했다. 차가타이계 왕자들 역시 숙청되면서 차가타이 후손들은 몽골 본국과 교류를 끊고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한다. 몽케는 오고타이와 차가타이의 후손들은 견제, 박해하였다. 위구르인 출신 관료 발라, 위구르족의 족장 이디쿠트 살린디 등도 몽케에 반대하다가 적발되어 공개 처형시켰다. 위구르족 서기관인 발라와 이디쿠트 살린디(위구르족의 군주)의 몽케 반대 음모가 발각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9]

귀위크 칸의 아들 호자, 나쿠 등은 사형은 면제했으나, 카라코룸 서부 지역으로 추방하였다. 몽케는 칭기즈 칸의 후손들, 왕족들 중에서도 오고타이 계열을 지지하는 왕공족들을 대거 숙청, 추방하였다.

오고타이 한국의 카이두는 형식적으로는 몽케에게 복종했으나, 오고타이 가문을 몰락시킨 것에 불만을 품고 점차 몽케 칸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반발하였다. 카이두는 후일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간 내전이 발생하자 아리크부카의 편에 붙었고, 아리크부카 몰락 이후에는 아리크부카 계승을 선언하고 쿠빌라이에게 저항한다.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의 패배 후, 몽케는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순종적인 가족 구성원들에게 투르키스탄이나 중국 북서부의 새로운 영토를 할당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 후, 몽케는 포로와 사로잡힌 사람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을 명령했다.

2. 3. 3. 고려에 항복 요구

1251년 10월 몽케 칸은 고려에 특사를 보내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고종이 직접 몽골로 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은 동생과 왕족들을 보내기로 했다. 몽케의 특사는 고려 고종에게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28]

그러나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떠나지 않았고, 무신 정권은 수도 천도에 반대했다. 몽케는 다시 특사를 파견, 고려 관료들은 몽케의 특사를 일단 환대하였으나 천도하지 않았고, 몽케의 특사는 고려 관료들을 비난하고 귀국했다. 1253년 7월 몽케는 예쿠(한국 한자: 也窟 또는 也古)에게 군사를 딸려 고려의 강화도로 파견,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형식적인 답을 주어 되돌려보냈다.[29] 1254년 1월 고려 고종은 왕족 중 한명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칭하고 몽골 카라코룸으로 보내 몽케 칸에게 입조하게 했다. 몽케는 고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중에 몽케 칸은 고려의 사절단이 돌아간 뒤, 고려에서 보낸 사절이 고려 왕조의 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분개,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 고려를 비난했다.[29]

2. 3. 4. 북부 인도 점령

1248년 델리 술탄국의 내부 갈등으로 마물루크 술탄 나시루딘 마흐무드의 형제인 잘랄 알 딘 마수드는 몽골로 망명했다. 잘랄 알 딘 마수드는 몽케가 칸에 즉위하는데 참여하고, 자신의 조상의 영역을 되찾도록 도움을 요청했다.[38]

1252년부터 1253년 몽케는 타타르족의 살리 노얀 또는 살리 바하두르에게 군사를 딸려 인도로 보냈다. 살리는 후일 훌라구 진영으로 가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으나 인도 정복은 실패했고, 인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잘랄 알 딘은 라호르, 쿠자, 소드라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인도 북부에 다루가치를 파견한다. 1254년 델리 술탄령의 쿠슐루는 몽케 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몽골 다루가치를 받아들였다.[38] 샴 알-딘 무함마드 카르트는 헤라트의 속국 말릭으로서 몽골군에 동행했다. 1257년에서 1258년 겨울에 살리 노얀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신드에 진입하여 무탄의 요새를 파괴했으며, 그의 군대는 인더스강의 섬 요새인 바크카르를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다.[39]

2. 3. 5. 내정 활동

몽케는 칙령, 조서를 내릴 때 반드시 초안을 직접 기초하였다. 직접 조서를 작성하고 검토했으며, 신하들이 문구와 어구를 수정해서 올리면 네번을 다시 읽고 검토한 뒤에 시행하였다. 몽케는 지도력과 준엄하고 일관성, 과단성 있는 정책으로 우구데이 칸 사후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몽골 제국의 분열을 일시적으로 완화하였다. 자신의 즉위에 대해 차가타이 가문과 카단, 오굴 카이미쉬를 제외한 우구데이 칸 가문, 차가타이 가문 일부를 다소 혹독하게 다스렸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통솔력을 믿고, 몽골 공동체 간의 관계를 소홀히 했으며, 독단적인 정책 추진도 있었다.[10]

상인에게도 세금을 부과, 백성들의 착취를 막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 또한 귀족과 지역 유력자들의 사치품 소비, 재정적 적자를 엄금하였다.[10]

몽케는 형벌을 엄격히 적용했다. 몽케는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엄격하여 자신의 가족, 측근, 몽골 제부족장과 몽골인, 정복지와 속국의 백성들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여인이 홀로 물항아리를 들고 여행해도, 강도, 강간의 위험이 없다는 말이 회자화되었다. 몽케는 사법과 행정을 분할하여 재판관과 조사 담당자를 분할, 따로 임명하였다.

점령지와 정복지에는 몽골인 군대를 주둔시키고, 총독인 다루가치와 고위층은 몽골인, 무슬림을 임명하는 한편 실무 담당자는 현지인을 채용하여 통치하였다. 또한, 몽골 백성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는 한편, 현지 주민의 종교와 풍속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정책을 펼쳤다. 1일에 약 5백여 대의 세금과 공물을 실은 수레가 카라코룸을 다녀갔다.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친중국화 정책, 성리학과 도교를 수용했고, 몽케 칸은 이를 내심 불쾌하게 여겼다. 몽골의 보수적 부족장들 또한 쿠빌라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몽케는 쿠빌라이가 다스리던 허베이 성의 세무, 재무 조사를 실시하여, 쿠빌라이 측근들이 조세를 바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내를 보내고 자신도 직접 가서 몽케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자말 알 딘 등 아랍 출신 학자들을 기용, 수도에 천문대를 개설하였다.

1253년 프랑스의 군주 루이 2세가 프란시스코회 소속 수도가 기욤 드 뤼브룩을 카라코룸으로 보냈다. 기욤 드 뤼브룩은 몽케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고했으나, 몽케 칸은 생각해보겠다며 완곡한 방법으로 거절하였다. 기욤은 이 당시의 기록을 귀국 후, 기행문 형식으로 출간한다. 몽케 칸의 재위 중 러시아류리크의 사절단,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 헥툼 2세의 사절단이 몽골 제국 카라코룸을 방문, 이들을 접견하였다.

몽케는 보르지긴과 보르지긴이 아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비용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왕자들에게 주는 선물을 제한하여 정기적인 봉급으로 전환했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10] 몽골의 후원을 받는 상인들의 사업을 감독하기 위해 황실 조사관을 파견했다. 그는 상인들이 황실 봉수대인 역로와 민간인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요구할 권한을 부여하는 파이자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10]

1253년 몽골과 비몽골 귀족들이 화폐를 과다 발행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지폐 발행을 통제하기 위한 화폐국을 설립했다.[12]

1252년부터 1259년 사이에 몽케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및 북중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15] 중국의 인구 조사는 1252년에 완료되었지만, 극 북서쪽의 노브고로드는 1258년에서 1259년 겨울까지 계산되지 않았다.

1257년 노브고로드에서 몽골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도시가 몽골의 인구 조사와 세금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1259년 조지아의 왕 다비드 6세는 몽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쿠타이시로 도망쳤고, 거기서 서조지아의 이메레티를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다스렸다. 1261년 그는 나중에 몽골의 지배를 종식시키려고 했던 다비드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 후 황제로서의 지위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북과 투르키스탄 등에 행정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관리 마흐무드 얄라와치와 마수드 베크 부자를 중용하여 재정 정책에 중점을 두고 재정을 풍족하게 했다.

2. 3. 6. 인구조사와 조세 징수 성문화

1252년부터 1259년까지 몽케는 몽골 및 북부 중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정복지와, 속국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남부 러시아, 중앙아시아 일대 공국 등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75] 1252년 그 해에 북부 중국의 인구 조사가 완료되었다. 우구데이 카안 때부터 호라즘의 총독으로 다스리던 오이라트부 출신 아르군을 신임, 그에게 지시하여 호구 조사와 세금 징수 강화를 명했다. 후일 훌라구의 일 한국 건국 후, 이때 정리된 아르군의 호구 조사와 세금 징수 방법을 그대로 참고하게 된다.

그러나 동부 및 남부 러시아와 노브고로드는 1258~1259년 겨울까지는 계산되지 않았다. 1257년 노브고로드에서 몽골의 종주권에 대한 반란이 있었지만, 노브로로드 대공 알렉산드르 네브스키는 몽골의 인구 조사와 과세에 복종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했다.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자원량을 파악 한 후 이를 활용하여, 세금을 징수했다. 새로운 인구 조사는 가구 뿐만 아니라, 징병을 목적으로 15세~60세의 남성 인구 수를 일일이 파견 지방관과 부족장들을 통해 직접 파악하게 하고, 정확한 세금, 공물 징수 기준을 정하고자 가축, 논밭, 농장, 과수원, 포도원의 수도 계산하여 문서화했다.

몽케는 자신의 칙령을 직접 작성하고 개정 과정을 면밀히 감독했다. 몽케는 보르지긴과 보르지긴이 아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비용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왕자들에게 주는 선물을 제한하여 정기적인 봉급으로 전환했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10] 몽케는 악명 높은 폐단을 제한하고 몽골의 후원을 받는 상인들의 사업을 감독하기 위해 황실 조사관을 파견했다. 그는 상인들이 황실 봉수대인 역로와 민간인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요구할 권한을 부여하는 파이자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10]

몽케 칸은 허가 없이 군대가 민간인을 약탈하도록 허용한 장군과 왕자들(그의 아들 포함)을 반복적으로 처벌했다.[11] 그는 북중국, 무슬림, 위구르 관리들을 사용했다. 카간의 수석 판사(다루가치)는 자이트-자라이르 관리인 였고, 수석 서기는 기독교인이었던 케레이트의 불가이였다. 몽케 칸의 16명의 주요 지방 관리 중 9명은 확실히 무슬림이었다. 그는 휘종의 세 명의 관리인 중국에 있는 마흐무드 야라바치, 투르키스탄에 있는 마수드 베그, 오이라트이란에 있는 알군 아카를 재임명했다. 몽케는 법정의 대법관 직책과 수석 서기관 직책을 분리했다.

1253년 몽케는 몽골과 비몽골 귀족들이 휘종 시대 이후 화폐를 과다 발행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지폐 발행을 통제하기 위한 화폐국을 설립했다.[12] 그의 권위는 ''수케'' 또는 은괴를 기준으로 통일된 척도를 확립했지만, 몽골은 외국 신민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단위와 무게를 사용하여 주화를 주조하도록 허용했다.[13]

1252년부터 1259년 사이에 몽케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및 북중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15] 중국의 인구 조사는 1252년에 완료되었지만, 극 북서쪽의 노브고로드는 1258년에서 1259년 겨울까지 계산되지 않았다. 1257년 노브고로드에서 몽골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도시가 몽골의 인구 조사와 세금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새로운 인구 조사는 가구뿐만 아니라 15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성 수, 들판, 가축, 포도원 및 과수원의 수를 계산했다. 민간 등록부 내에서 장인은 별도로 나열되었고, 군사 등록부에서는 보조병과 일반 가구가 구별되었다. 승인된 종교의 성직자는 분리되었고 계산되지 않았다. 새로운 등록부가 완성되면 사본 하나는 카라코룸으로 보내고 사본 하나는 지방 행정부에 보관했다.[16] 몽케는 필요한 부대에 전달할 수 있는 황실 대리인이 징수하는 고정된 인두세를 만들려고 했다.

1259년 조지아의 왕 다비드 6세는 몽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쿠타이시로 도망쳤고, 거기서 서조지아의 이메레티를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다스렸다. 1261년 그는 나중에 몽골의 지배를 종식시키려고 했던 다비드 7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다비드 울루는 몽골과 평화를 맺고 1262년 트빌리시로 돌아왔다. 몽케와 바투의 관리인 알군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귀족들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저명한 지도자들을 처형했다.[18] 그는 조지아인들을 여섯 개의 투멘으로 나눴다. 한편, 바이주는 1256년 앙카라 근처에서 셀주크 술탄 카이카우스 2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터키 동부에 대한 몽골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2. 3. 7. 티베트 기증, 대리국 원정

1251년부터 1252년 조카이자 쿠빌라이의 서자 코리다이 등을 티베트 원정군을 딸려보내 정벌하게 하기도 했다.[37] 몽케는 1251년 꼬리다이를 티베트 주둔 몽골 및 한족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252년에서 1253년 사이에 꼬리다이는 티베트를 침략하여 담슝까지 이르렀다. 중앙 티베트의 사찰들은 몽골에 복속했고, 몽골 왕자들은 그것들을 자신의 식읍으로 나누었다. 몽케는 티베트티베트 불교의 승려들과도 연락했다. 티베트의 홍사에 의하면 몽케 칸은 티베트 불교 중 디군파(派)와 시주-복전 관계를 형성했다 한다. 1250년 티베트의 승려, 역사(譯師), 티베트 각처의 지방 수령, 왕공들이 뭉케를 방문, 왕실 형제들이 라마에게 공양할 분지를 정해주기를 요청했다. 몽케 칸은 코단에게서 티베트 영지를 거두고 티베트 영지를 분할, 티베트 불교의 각 교파에 공양했다 한다.

1252년 6월 몽케는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운남성(雲南省) 일대의 대리국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귀족, 군주들은 친중국적인 쿠빌라이를 의심하였고, 몽케 역시 친중국적인 동생 쿠빌라이를 내심 의심, 견제하였다. 동생 쿠빌라이는 7월에 군사를 이끌고 출발, 대리국으로 가 교전하였다. 이때 쿠빌라이와 같이 딸려보낸 일부 족장이 갑자기 독에 중독돼 회군하기도 했다. 1253년 8월 쿠빌라이의 군대는 섬서성(陝西省)에 도착하고 운남성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겨울에 대리국으로 들어갔다. 1254년 1월 2일 단흥지(段興智)의 항복을 받아내,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하였다.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하고 운남행성(雲南行省)을 설치했다. 1256년 단흥지(段興智)는 숙부 단신저복(段信苴福) 등을 데리고 몽골고원으로 친히 와 카라코룸에서 알현하고, 몽케 칸은 단흥지를 운남행성의 총독인 대리성총관 주국사(主國事)로 임명하여 대대로 세습하게 했다. 몽케 칸은 1253년 쿠빌라이를 달리 왕국으로 파견했다. 지배 가문인 고씨는 저항하며 몽골 사신들을 살해했다. 몽골군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동쪽으로 쓰촨 분지로 진격했다. 우량카다이가 이끄는 두 번째 부대는 쓰촨 서부 산악 지대로 어려운 길을 택했다.[32] 쿠빌라이 자신은 초원 지대를 남쪽으로 향해 첫 번째 부대와 합류했다. 우량카다이가 북쪽 호숫가를 따라 질주해 오자, 쿠빌라이는 달리의 수도를 함락했고, 사신 살해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살려주었다. 몽골은 두안싱즈 왕을 지역 통치자로 임명하고 그곳에 평정 책임자를 주둔시켰다.[33] 쿠빌라이가 떠난 후 흑장족 사이에 불안이 일었다. 1256년까지 수부타이의 아들 우량카다이는 달리를 완전히 평정했다. 후일 쿠빌라이가 자신의 아들 후게치를 운남왕에 봉해 파견할 때까지는 구 대리성은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했다. 일설에는 몽케 칸이 단흥지에게 마하라자(摩訶羅嵯)로 봉해 사실상 왕으로 승인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쿠빌라이에게 딸려 보낸 군사의 일부는 운남성으로 가지 않고, 중도에 쿠빌라이 본진에서 나뉘어 위구르로 가 투루판(吐魯蕃) 일대를 공략하였다.

|thumb|몽골의 베트남 침략 (1257년)]]

달리를 정복한 후, 쿠빌라이는 우량카다이(수부타이의 아들)를 남쪽으로 파견했다. 우량카다이는 베트남에 사신을 보내 남송을 공격할 경로를 요청했지만, 쩐 왕조 베트남은 몽골 사신들을 투옥했다.[34] 1257년, 우량카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그의 아들 아주와 3,000명의 몽골군 및 10,000명의 이족과 함께 베트남(당시 대월)을 침략했다.[34] 그들은 베트남군을 격파하고 수도 탕롱(1831년 하노이로 개명)을 약탈했다. 우량카다이는 사신 살해에 대한 책임으로 주민들을 처형했다. 탕롱에 머물던 몽골군은 낯선 기후로 인해 질병에 걸렸다. 베트남은 몽골군을 몰아낼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반격을 가하여 동보더우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쩐 왕조는 몽골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35] 우량카다이는 철수했다.[36] 베트남 왕 쩐타이통은 말라리아를 피해 베트남을 신속히 떠난 우량카다이에게 조공을 바쳤다. 쩐 왕조는 봉신 관계를 받아들이고 몽케의 정부에 조공을 바쳤다.[37]

몽케는 중국에서의 전쟁에 더욱 몰두하여, 1254년 달리 왕국(현재 윈난성) 정복과 동남아시아 침략을 통해 송나라를 측면에서 공격함으로써 몽골이 북쪽, 서쪽, 남쪽에서 침략할 수 있도록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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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논문 Fortresses that Shatter Empires: A Look at Möngke Khan's Failed Campaign against the Song Dynasty, 1258–1259 Central Europea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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