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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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태진은 한국사 연구에 매진한 학자이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붕당정치론, 규장각 연구,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 안중근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식민사학 타파에 기여하여 3.1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 정년 후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역사 관련 논쟁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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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리사는 1970년대 국가대표 탁구 선수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업적을 남겼고, 은퇴 후 태릉선수촌장 등을 역임했으며, 국회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였고 현재는 한국여성의정 감사 및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 중인 인물이다. - 영천 이씨 (이능간) - 이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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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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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이태진 |
원어 이름 | 李泰鎭 |
출생일 | 1943년 10월 14일 ()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성주군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영천(寧川) |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국사전공 문학석사 |
경력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직업 | 사학자 |
2. 학력
3. 경력
196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과 한국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부터 1972년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학과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197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동 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1992년에는 국사학과 학과장을 맡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관리실장, 인문대학 학장 등 교내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학계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여 1999년부터 2년간 한국18세기학회 회장을, 같은 해부터 한국산업기술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2003년에는 6개월간 미국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방문교수로 강의했으며, 같은 해부터 2년간 한국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진단학회, 역사학회,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및 한일역사가회의 한국운영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한국 역사학 발전에 기여했다.
2003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10년에는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사 연구 및 편찬 사업을 이끌었다. 또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정년 퇴임 후에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4. 생애 및 학문적 업적
한국사 연구자로서 붕당정치론 제창, 규장각 독립을 통한 조선 후기 연구 활성화, 정조 재평가 등 학문적 기여를 했다. 프랑스에 약탈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을 이끌었으며, 안중근 연구를 통해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했다.[1]
식민사학 극복 노력으로 3.1문화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1] 일본 학계와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두고 논쟁했으며,[4] 국내에서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비판하며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강조했다.[1][5] 그의 연구는 해외에도 소개되었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국어로 한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1]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사 전반에 걸쳐 연구했으며, 특히 대한제국 연구를 통해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밝히고 일제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1]
4. 1. 초기 연구 활동
한국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1980년대에는 붕당 정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 '붕당정치론'을 제창하여, 기존의 부정적 시각이 담긴 '당파성론'을 교과서에서 밀어내는 데 기여했다.[1] 1990년대에는 규장각의 독립 운영을 이끌어내며 조선 후기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 시기를 한국사의 르네상스로 평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정조를 '절대계몽군주'로 처음 평가하며 개혁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또한,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을 국내에서 주도하여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1][3] 이러한 식민사학 극복 노력과 한국사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3.1문화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의궤 반환 운동에 대한 공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1]
그의 논문과 저서는 수백 편에 달하며, 주요 저작들은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오랫동안 일본의 진보 성향 월간지 <<세카이(世界)>>를 통해 일본 학자들과 논쟁하며 일제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4] 또한 <<교수신문>> 등 국내 매체를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고, 대한제국이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지향했음을 강조했다.[1][5] 일본 동경대학에서는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강의했으며,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수 최초로 한국어로 한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1]
최근에는 안중근 연구를 새로이 소개하여 대한제국과 연계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에도 힘쓰고 있다.[1] 그의 연구는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사 전반에 걸쳐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시대의 학술대회에 참여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특히 대한제국 시기 연구에 집중하여 일제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논증하고,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재조명하는 데 힘썼다.[1]
4. 2. 붕당정치론과 조선 후기사 연구
한국사 연구에 있어 1980년대에는 붕당정치론을 제창하여 기존의 부정적 인식인 "당파성론"을 교과서에서 퇴출시키는 데 기여했다. 1990년대에는 규장각을 독립시켜 조선 후기를 르네상스로 평가하는 새로운 연구의 장을 열었으며, 정조를 절대계몽군주로 최초로 평가하여 정조의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4. 3.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과 안중근 연구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을 대한민국 내에서 일으켜서 의궤 환수에 공헌하였다. 프랑스 의궤 반환 운동의 공으로 훈장을 수여받았다.최근에는 안중근 연구를 새로이 소개하여 대한제국과 연계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4. 4. 국제 학술 활동과 역사 논쟁
한국사 연구에 매진하며 여러 학문적 논쟁과 국제 활동에 참여했다. 1980년대에는 붕당정치론을 제창하여 기존의 "당파성론"을 비판하고 교과서 서술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1990년대에는 규장각을 독립시키고 조선 후기를 '르네상스'로 재평가하는 연구의 장을 열었으며, 정조를 '절대계몽군주'로 처음 평가하여 개혁군주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또한, 외규장각 도서반환운동을 국내에서 주도하여 프랑스로부터 외규장각 의궤를 환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안중근 연구를 통해 대한제국과 연계된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학 극복 노력으로 3.1문화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의궤 반환 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그의 논저는 수백 편에 달하며, 주요 저서는 일본, 미국 등에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일본의 잡지 <<세카이>>에서는 장기간 일본 학자들과 논쟁하며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주장했다. <<교수신문>>에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논쟁하며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근대 국가 지향을 강조했다. 일본 도쿄 대학에서는 2001년 11월과 2004년 6월에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화 과정을 주제로 강의했으며,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수 최초로 한국어로 역사를 강의했다.
2009년 정년 퇴임 후에는 뉴라이트 계열과 일부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폄하하고, 이승만 중심의 대한민국사 서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역사를 지우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양 극단의 역사인식을 모두 비판하며,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 해석의 틀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대한제국 연구에 집중하여 일제의 강제병합이 불법적이었음을 증명하고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밝혀내는 데 힘썼다. 이태진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관심을 보이며 다양한 시대의 학술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사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뉴라이트와의 논쟁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0년 4월에는 한국 강제 병합 100년 공동 행동의 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여 "한일 병합이 정당화된 결과 많은 역사가 왜곡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과거의 문제가 아닌 우리 미래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재일 한인 역사 자료관 (강덕상 관장) 개관 5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한일 병합 조약에 대해 "순종 황제의 명의로 서명 위조도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펼치며 한일 병합의 불법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1].
5. 논란
한국 역사학계의 주요 인물로서, 특히 경제사학파 중심의 뉴라이트 세력과의 역사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 자주 참여하였다. 그의 활동과 발언은 신군부 반대 시국선언 참여, 뉴라이트 역사관 비판, 한일 병합의 불법성 주장[1], 역사 교과서 편찬 및 국정화 문제[2][3][4], 을미사변 관련 자료 해석 등 다양한 영역에서 논란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5. 1. 신군부 반대 시국선언 참여
1980년 서울대학교 교수 재직 시절 신군부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서를 직접 기초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시국선언을 주도한 대표 교수는 해직당했으며, 이태진은 이후에도 군사독재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5. 2. 뉴라이트 비판과 역사 논쟁
1980년 서울대학교 교수 재직 시절 신군부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서 기초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시국선언 주도 교수는 해직되었고, 이태진은 이후 군사독재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2009년 정년 퇴임 직후, 경제사 중심의 뉴라이트 계열과 기존 근현대사 역사연구자 양측을 비판하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사료에 입각한 연구를 강조하였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좌파 역사학자들, 이념 벗어나 사료 연구해야” 이 발언은 보수 및 진보 언론 양측에서 각자의 입장에 유리하게 보도되었다. 특히 일부 진보 논객이나 매체 기자들조차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왜곡된 내용만을 인용하며 비판하는 경향을 보였고, 정작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등에 실린 뉴라이트 비판 기사는 외면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등에서는 조선일보 보도를 바탕으로 한 비판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하여, 마치 이태진이 뉴라이트를 수용한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태진 교수를 야누스로 만들어버린 기사
2010년 4월, 한국 강제 병합 100년 공동 행동 심포지엄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여 "한일 병합이 정당화된 결과 많은 역사가 왜곡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하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과거사 문제를 미래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같은 해 5월 9일에는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한일 양국 지식인 200여 명의 이름으로 "한일병합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일본 정부의 과거사 재인식과 사과를 요구하는 선언을 주도했다. 이 선언에는 최종적으로 중국 지식인까지 참여하여 1,000여 명이 서명하였다. 日 지식인들 “한일합방 원천무효”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국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 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 한국과 일본의 사법부는 모두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사법부의 입장 변화 이후 오히려 한국 외교부가 외교 마찰을 이유로 일본 측 입장을 대변하며 '사법부 자제론'을 주장하는 연구 용역을 발주하는 등 모순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재일 한인 역사 자료관(강덕상 관장) 개관 5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한일 병합 조약이 순종 황제의 서명 위조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지론을 펼치며 불법성을 주장했다.[1]
2011년 11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재직 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발표 과정에서 논란이 발생했다. 해당 기준에서 '이승만 독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의 표현이 빠지고,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자유민주주의', '독재화' 등 보수 세력의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3] 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미화하고 독재 정부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심으려는 시도라는 비판으로 이어졌으나,[2] 이태진 본인은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뉴라이트 인사가 다수 참여한 정부 자문위원회(국가브랜드위원회)가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 비정상적으로 개입하려 하여 역사학계의 반발이 컸으며, 이태진은 양측을 중재하려 했으나 오히려 양측으로부터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2년 10월 3일, 새누리당에서 이태진을 선대위 자문위원으로 발표했으나, 배우 손숙 등과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박근혜 캠프, 손숙·이태진 등 본인 동의없이 자문위원 위촉 논란 같은 해 10월 9일 국정감사에서는 야권으로부터 역사교과서 편찬의 중립성에 대한 공세를 받았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일본 편향적 역사 기술 논란에 대해 해명했으며[4], 이태진은 직접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보도 내용과 실제 발언이 다름을 설명하고 5.16을 쿠데타로 규정하며 군사독재정부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태진 "5.16은 쿠데타, 5.18은 민주화운동" 확인 당시 일부 야당 정치인의 비판 과정에서 사실관계 확인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2013년 8월,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검정을 주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책임론이 다시 불거졌다. 9월 16일, 이태진은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에 출석하여 "국사편찬위원회가 감독기관으로서 결과를 내놓은 게 사회적 물의가 크게 일어난 데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그는 국사편찬위원장의 역할이 심사위원단 선정에 있으며 직접 모든 심사본을 채점하지는 않는다고 해명하면서도 재차 사과했다. 이태진 국편위원장 "교학사 교과서 물의 송구" 이후 2015년 11월 3일 증언을 통해,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미 교학사 교과서의 식민지근대화론 문제에 대해 반대하는 공식 의견을 정부에 전달했음이 밝혀졌다.
2015년 7월 29일, 와다 하루키, 김영호 등과 함께 《2015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는 2010년 선언을 확장하여 유럽과 미주 지역 지식인까지 참여했으며, 강제병합 원천무효를 재확인하고 일본 정부의 우경화 및 위안부 문제를 비판하며 한일 양국의 진정한 미래를 위한 역사 청산을 요구했다. 한·일·세계 지식인 공동성명 “아베, 식민지배·침략 사죄해야”
2015년 10월 3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민주적이라고 비판하고, 현행 검정 교과서들은 청와대 검토를 거쳤으므로 좌편향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태진 "국정화, 반민주적…현 교과서 좌편향 불가능" 11월 3일에는 정부의 국정화 고시에 맞서 단독 기자회견을 열고, 현행 8종 교과서 모두 우파 성향이며 좌파몰이는 근거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검정 당시 교학사 교과서의 식민지근대화론 문제의 심각성을 정부에 공식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이태진 "현 역사교과서 8종 모두 우파…좌파몰이 근거없다" 이태진 “교학사 교과서 문제점, 이미 청와대·교육부에 보고”
한편, 을미사변 관련 '우치다 보고서'에 대해 자신이 최초 발견자라고 주장하며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사실을 은폐했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태진은 한국 역사학계의 주요 인물로서, 경제사학파 중심의 뉴라이트와 지속적인 논쟁 관계에 있다. 도쿄 대학에서 2001년과 2004년에 강의하기도 했다.
5. 3. 역사 교과서 논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직하던 2011년 11월,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뉴라이트 인사가 다수 참여한 정부 자문위원회(국가브랜드위원회)가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 개입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역사학계의 강한 반발이 있었다. 이태진은 양측을 중재하려 했으나, 양편으로부터 모두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발표된 집필 기준은 ‘이승만 독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의 서술을 축소하거나 제외하고,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자유민주주의’, ‘독재화’ 등 보수 세력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회적 비판에 직면했다.[2][3]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축소하고 독재 정부를 미화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2] 이태진 본인은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이를 반박했다.2012년 10월 9일 국정감사에서는 야당 의원들로부터 역사 교과서 편찬의 중립성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다. 특히 일부 교과서 내용의 일본 편향성 논란에 대해 해명해야 했으며[4], 라디오 인터뷰 등을 통해 보도 내용과 실제 발언 내용이 다름을 설명하고 5.16을 쿠데타로 규정하며 군사독재정부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2013년 8월에는 뉴라이트 성향으로 평가받는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검정을 주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책임론이 다시 불거졌다. 같은 해 9월 16일, 이태진은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에 출석하여 "국사편찬위원회가 감독기관으로서 결과를 내놓은 게 사회적 물의가 크게 일어난 데 대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다만 "위원장이 직접 검정심사위원단에게 질의하면서 모든 심사본에 대해 채점하거나 하지 않는다"며 국사편찬위원회의 역할은 심사위원단을 선정하는 데 있음을 해명했다. 이후 2015년 11월 3일 증언을 통해, 당시 국사편찬위원회가 교학사 교과서의 식민지근대화론적 서술에 대해 반대하는 공식 의견을 정부에 전달했음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반대했던 교과서 문제로 인해 부당한 비판을 받게 된 셈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서는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2015년 10월 3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정부의 국정화 추진은 반민주적이라고 비판했으며, 당시 사용되던 검정 교과서들은 청와대의 검토까지 거쳤기 때문에 좌편향이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또한 정부가 국정화 고시를 발표한 2015년 11월 3일에는 단독 기자회견을 열어, 현행 8종의 검정 교과서가 모두 우파 성향에 가까우며 '좌편향'이라는 정부 여당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검정 당시 교학사 교과서의 식민지근대화론 문제의 심각성을 정부에 공식적으로 보고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5. 4. 을미사변 자료 관련 논란
을미사변 관련 자료인 '우치다 보고서'에 대해, 이태진은 자신이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 보고서는 이미 대학 도서관 등에 비치되어 공개된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은밀하게 살해한 것인데 그 보고서를 은밀하게 숨겼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발언 역시 사실 관계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6. 저서
'''단독 저작'''
저서명 | 출판 연도 | 비고 |
---|---|---|
조선 후기 정치와 군영제 발달 | 1985년 | |
한국 사회사 연구 | 1986년 | |
조선 유교 사회사론 | 1989년 | 일본어 번역: 조선 왕조 사회와 유교 (호세이 대학 출판국, 2000년) |
왕조의 유산 - 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 1994년 | |
고종 시대의 재조명 | 2000년 | |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 기술 | 2002년 | |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 메이지 일본의 한국 침략사 | 2005년 | |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 2005년 | |
역사용어 바로쓰기 | 2006년 | |
백년후 만나는 헤이그 특사 | 2008년 | |
한국병합과 현대 | 2009년 | |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 2009년 | |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 | 2010년 | |
12시간의 통일 이야기 | 2011년 | |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 2011년 | |
새한국사 | 2012년 |
'''편저'''
저서명 | 출판 연도 |
---|---|
조선 시대 정치사 재조명 | 1985년 |
일본의 대한 제국 강점 | 1995년 |
한국 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 2001년 |
한국 병합의 불법성 연구 | 2003년 |
'''공저'''
저서명 | 출판 연도 |
---|---|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조선전기편 | 1985년 |
한국사 특강 | 1990년 |
한국 사회 발전사론 | 1992년 |
서울 상업사 | 2000년 |
7. 수상
연도 | 상훈 | 비고 |
---|---|---|
1986년 | 월봉저작상 (제12회) | 《한국 사회사 연구》 |
1989년 | 치암학술상 | |
2003년 | 백상저작상 | |
2009년 | 동아시아출판인회 인문도서 100권 지정 | |
홍조근정훈장 | ||
2010년 | 3.1 문화상 학술상[5] | |
2011년 | 황조근정훈장 | |
2019년 | 수당상 |
참조
[1]
뉴스
人間の尊厳踏みにじった韓国強制併合 「歴史認識の違い」東京シンポ
http://www.mindan.or[...]
民団新聞
[2]
뉴스
독재미화, 위키피디아 보고 교과서 집필?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궤변론, 측은하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1-11-14
[3]
뉴스
MB정권의 '5.18 민주화운동 삭제'에 국민 격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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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스앤뉴스
20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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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사편찬위 “역사교과서 왜곡 보도, 사실과 다르다”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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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26일 국학진흥 명예자문위원회 개최 :: 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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