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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레트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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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레트바 전투는 1943년 2월 말,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독일군과 추축국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독일군은 파르티잔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요 파르티잔 병원을 파괴하기 위해 6개 사단, 이탈리아군 3개 사단, 크로아티아군 2개 사단, 체트니크 및 우스타샤 병력을 동원하여 3단계 작전을 수행했다.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포위망에 갇혔지만,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전략으로 다리를 폭파하고 임시 다리를 건설하여 네레트바 강을 건너 체트니크 부대를 격파했다. 비록 추축군의 피해가 컸지만, 파르티잔은 지휘부와 병원을 보존하여 전투력을 유지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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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레트바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작전 지도
분쟁유고슬라비아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시기1943년 1월 20일 – 1943년 3월
장소점령된 유고슬라비아,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네레트바 강 인근
결과추축국의 전술적 승리
파르티잔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작전 지속 가능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체트니크 (MVAC)
교전 세력 2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및 지도자 1알렉산더 뢰르
루돌프 뤼터스
마리오 로아타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자하리예 오스토이치
도브로슬라브 예브제비치
파블레 주리시치
보이슬라브 루카체비치
지휘관 및 지도자 2요시프 브로즈 티토
아르소 요바노비치
벨리미르 테르지치
코차 포포비치
페코 답체비치
페로 체트코비치
비츠코 크르스툴로비치
병력 규모
병력 규모 1독일, 이탈리아, NDH 군대 90,000명
항공기 12개 비행대
체트니크 12,000–15,000명
병력 규모 2알 수 없음
(약 20,000명)
피해 규모
피해 규모 1독일군: 사망 514–583명, 부상 1,214–1,642명, 실종 145–158명
이탈리아군: 사망 1,605명, 포로 983명
크로아티아 독립국: 사망 126명, 부상 258명, 실종 218명
체트니크: 사망 또는 부상 2,000–3,000명
총합: 7,000–8,600명
피해 규모 2사망 11,915–12,000명, 처형 616명
포로 2,099–2,506명 (독일 주장)
사망, 부상, 실종 10,000명, 포로 2,000명 (유고슬라비아 주장)
민간인 피해사망 3,370명
강제 수용소로 이송 1,722명
명칭
독일어 명칭Fall Weiss (화이트 작전)
세르보크로아티아어 명칭Četvrta neprijateljska ofenziva / ofanziva (4차 적 공세)
관련 전투
관련 전투네레트바 전투

2. 배경

1942년 말,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이 수세에 몰리자, 독일 최고 사령부는 발칸 반도에 연합군이 상륙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독일의 방어 작전과 자원 수탈을 방해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에 아돌프 히틀러는 동남유럽군 사령관인 알렉산더 뢰어에게 유고슬라비아 저항 세력을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월 18일에서 19일까지 열린 회의에서 국방군 참모본부는 비하치 공화국 파괴를 결정했고, 1월 8일 뢰어와 이탈리아 제2군 사령관 마리오 로아타는 자그레브에서 만나 상세한 계획을 세웠다.

2. 1. 배경: 한국의 시각

3. 작전

작전은 세 단계로 수행될 계획이었다.


  • ''바이스 1''은 리카, 코르둔, 바니야, 카진스카 크라이나 및 그르메치의 파르티잔 점령 지역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43년 1월 20일에 시작하여 2월 25일까지 지속되었다.
  • ''바이스 2''는 비하치 공화국 남동부의 파르티잔, 즉 드르바르, 글라모치, 리브노, 야이체 및 클류치에 집중했다.
  • ''바이스 3''은 동부 헤르체고비나몬테네그로에서 실행될 예정이었으며, 주로 왕당파 체트니크를 목표로 했다. 이 단계는 1943년 2월 초에 취소되었다.


독일군은 파르티잔 운동의 중앙 지휘부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 중앙위원회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 그리고 최고 사령부 주변의 파르티잔 부대의 주력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추축군은 9만 명의 병력과 12개 비행대대로 구성된 10개의 사단을 동원했다.

12,000명에서 15,000명 사이의 체트니크 지원병과 부대도 참가하여 이탈리아군과 긴밀히 협력했다. 이 작전은 이른바 "보스니아 행진"과 일치했는데, 이 계획은 리카, 북부 보스니아, 북부 달마티아, 헤르체고비나 및 몬테네그로에서 체트니크를 사용하여 그곳의 파르티잔 점령 지역을 파괴하는 것을 요구했다. "보스니아 행진"은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산자크의 무슬림 인구의 민족 청소를 요구했다. 독일군에 따르면, 체트니크군은 1943년 2월에 15만 명(1942년 8월의 10만 명에서 증가)으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파르티잔은 그 숫자의 3분의 1도 안 되었다. 1월 2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파르티잔의 비하치 공화국을 파괴하여 "공산주의 테러로부터 이 세르비아 영토를 해방시키기" 위한 계획을 체트니크에게 보고했다. 21일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보스니아 문제는 가장 중요하다. 서부 보스니아와 리카에서 우리는 현재 파벨리치의 크로아티아를 파괴하는 것을 막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결정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최종 준비를 하고 있다."

작전 명령은 포로로 잡힌 파르티잔과 민간인에 대한 극심한 가혹성을 요구했다. 전자는 체포 후 총살되었고,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민간인들은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전투 지역의 마을은 초토화될 예정이었다. 현장 지휘관들은 지나친 가혹함에 대해 부하를 처벌하는 것을 금지했다.

독일군은 파르티잔 활동의 중앙 사령부(즉,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와 주요 파르티잔 병원을 파괴하려 계획했다. 추축국 전력으로 독일군 6개 사단, 이탈리아군 3개 사단, 2개의 크로아티아 사단, 체트니크우스타샤 조직에서 상당수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총 약 150,000명의 추축국 병력이 훨씬 적은 수의 파르티잔 부대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세 단계로 실행되었다.

  • 백 I: 1943년 1월 20일, 보스니아 서부와 크로아티아 중부의 파르티잔 점령 지역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 백 II: 2월 25일부터 보스니아 서부 및 남서부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파르티잔은 네레트바강 남서쪽으로 후퇴했다.
  • 백 III: 3월부터 북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포위된 파르티잔 부대는 몬테네그로 북부로 탈출했고, 이 세 번째 단계는 완수되지 못했다.


전투의 후반, 파르티잔은 네레트바강을 등진 계곡에 몰려 있었다. 서안에는 여러 정예 부대와 기갑 여단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이, 강 건너 동쪽 강변에는 조직되지 않은 체트니크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유일한 다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파르티잔에게는 강을 건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여겨졌지만, 추축군은 파르티잔에 대한 마지막 총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었고, 파르티잔은 다리를 건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극복하기 어려운 어려움에 직면하여 파르티잔 지휘관 요시프 브로즈 티토 원수는 치밀한 계략을 준비했다.

티토는 공병에게 명령하여 강에 유일한 다리를 폭파시켰다. 이 사태를 파악한 독일군 사령부는 파르티잔이 현재 위치에서 서안을 따라 북쪽으로 마지막 돌격을 감행할 예정이며, 사기를 높이고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다리를 폭파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에 사령부는 공격을 통해 파르티잔을 근절하기 위해 지역 내 군대의 복잡한 재배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티토의 공병 부대가 다리를 응급 수리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강 건너편에 있는 체트니크 부대를 제거할 길을 열어주었다.

사령부는 즉시 그 사실을 파악했지만, 그 전에 내린 이동 명령 때문에 신속하고 효과적인 공격을 준비하지 못했고, 파르티잔은 독일 공군의 대규모 폭격 속에서 강을 건넜다. 티토의 공병 부대에 의해 응급 수리된 다리는 산악 지형의 복잡함까지 더해져 독일 공군의 공격으로 인한 파괴를 면했고, 탈출 완료 후 추격을 막기 위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훗날, 추축국의 굴욕적인 전략적 실패는 티토에 의해 선전되었다.

그는 추축군의 손에 의한 "처형"(그것은 훗날 "수체스카(Sutjeska) 전투" 이후 실제로 일어났다)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부상자를 모두 데려가겠다는 (유명한) 약속을 완수할 수 있었다.

다른 문헌[3]에 따르면 파르티잔은 사라예보 남서쪽에 있는 코니츠에서 네레트바강을 건너려 했지만, 그곳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니츠 서쪽의 야블라니차에서 파르티잔이 폭파되어 강에 떨어진 다리 위에 판자를 깔아 도하했다. 도하 후, 전면에 펼쳐진 프레니 산에 배치되어 있던 체트니크 부대를 기습하여 괴멸시키고 남쪽 몬테네그로로 향했다. 도하 지점인 야블라니차에는 네레트바 전투 기념관("Museum of the Battle for the Wounded at Neretva" Google Map에 의거)이 설립되어 있다.

3. 1. 백색 작전 1단계 (Weiss 1)

1943년 1월 20일에 시작되어 2월 25일까지 지속된 백색 작전 1단계는 리카, 코르둔, 바니야, 카진스카 크라이나 및 그르메치의 파르티잔 점령 지역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계획에 따르면, 4개의 독일 사단(제7 SS 의용 산악, 제369, 제714 및 제717)은 카를로바츠에서 글리나, 코스타이니차, 보산스키 노비 및 산스키 모스트를 거쳐 비하치-페트로바치 라인까지 공격할 예정이었다. 3개의 이탈리아 사단("롬바르디아", "레" 및 "사사리")은 리카와 북부 달마티아를 통해 진격할 예정이었다. 제7 SS 사단과 제717 사단은 작전 이틀째에 브르토체에서 만나고, 증강된 제369 사단과 제714 사단은 그들과 만나 그르메츠 산 지역의 대부분의 파르티잔 부대를 포위할 예정이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3개 사단은 포위된 파르티잔을 파괴하고, 이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의 부활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인구를 추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독일 사단은 제202 전차 대대와 제2, 제3 향토 방위 산악 여단으로 보강되었다. 이탈리아 사단은 리카, 달마티아 및 헤르체고비나 체트니크 보조 부대, 3개의 우스타샤(제31, 제32 및 제34) 및 1개의(제2 예거) 향토 방위 대대를 사용했다.

독일군은 파르티잔 활동의 중앙 사령부와 주요 파르티잔 병원을 파괴하려 계획했다. 추축국 전력으로 독일군 6개 사단, 이탈리아군 3개 사단, 2개의 크로아티아 사단, 체트니크우스타샤 조직에서 상당수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총 약 150,000명의 추축국 병력이 훨씬 적은 수의 파르티잔 부대를 공격했다.

== 파르티잔의 방어 ==

20일부터 모든 방향에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어떤 사단도 원래의 일정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추축군은 파르티잔 제1 크로아티아 군단과 제1 보스니아 군단이 통제하는 영토를 공격했다. 카를로바츠-비하치 축에서 7 SS 사단의 공격에 맞서 4개의 파르티잔 여단(제8 코르둔 사단의 제4 및 제15 여단과 제6 및 제14 리토랄-고르스키 코타르 여단)이 방어했다. 제7 바니야 사단은 글리나와 코스타이치차에서 카진과 보산스카 크루파 방향으로 진격하는 제369 사단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제6 리카 사단은 이탈리아의 공격에 맞서 플리트비체 호수–그라차츠 전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제717 사단은 산스키 모스트에서 페트로바치로 진격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월 20일에 제749 연대와 제202 전차 대대의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했지만, 산스키 모스트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서 제1 크라이나 여단과 제7 크라이나 여단 1개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다음 며칠 동안 양측은 주요 지점에서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노력을 강화했다. 파르티잔은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는 동시에 격렬한 야간 반격을 가했다. 1월 25일, 2개의 국토 방위 대대와 1개의 독일 회사로 구성된 전투단은 제6 크라이나 여단 제1 대대와 제1 크라이나 여단 제3 대대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디폴드 장군은 1월 26일에 제2 국토 방위 여단이 완전히 궤멸되었다고 보고했다. 1월 27일에는 강화된 제737 연대로 서쪽으로 더 야심 찬 공격이 시작되어 베나코바츠에 도달했지만, 제6 크라이나 여단에 의해 저지되었다. 제2 및 제5 크라이나 여단이 코자라에서 증원으로 도착했고, 제737 연대는 2월 3일까지 고립된 채 공격을 받았다.

동시에, 제717 사단은 클류치와 페트로바치 방향의 주요 적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1월 28일 이른 시간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제1 크라이나 여단 대대는 야간에 독일군의 시작 위치에 선제 공격을 가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고 부대를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 독일군은 전차를 앞세운 공격을 감행했지만, 파르티잔의 대전차 사격으로 첫 번째 전차가 파괴되었고, 제202 전차 대대 사령관 폰 가이소 중령이 사망했다.

== 그르메치 산 공격 ==

제7 SS 사단의 진격으로 파르티잔 방어선은 무너졌다. 1월 24일에 슬룬을, 27일에 라코비차를 점령했다. 그 결과 비하치가 위협을 받게 되어 대피해야 했고, 독일군은 1월 29일 전투 없이 비하치에 입성했다. 수천 명의 난민들이 파르티잔 부대와 함께 바니야를 떠났고, 그 과정에서 공습, 기아, 추위, 질병에 시달렸다.

제7 SS 사단은 2월 7일 페트로바치에 도달했고, 2월 9일 마침내 제717 사단과 합류했다. 제369 사단은 1월 30일 보산스카 크루파에 도달했고, 며칠 후 베나코바츠에서 포위된 제737 연대를 구출했다. 제369 사단은 2월 4일 비하치 근처에서 제7 SS 사단과 합류했다. 이로써 광범위한 그르메치 지역은 세 개의 독일 사단에 의해 포위되었다. 2월 6일, 증원을 받은 후 제369 사단, 제187 사단, 제717 사단은 그르메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제2, 제5 크라이나 여단은 약 15,000명의 주민들과 함께 포위되었다. 2월 10일 여단은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포트칼리예를 향해 크루파-산스키 모스트 도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주민들은 여단을 따라갔지만, 많은 수(최대 2,000명)가 혹독한 추위에 굴복했다. 남아있는 약 400명의 민간인이 독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독일군 보고서(바이스 1, 2월 18일자)에 따르면 제7 SS 사단은 149명이 사망하고, 222명이 부상, 68명이 실종되었으며, 제717 사단의 사상자는 118명이 사망하고, 290명이 부상, 20명이 실종되었다.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파르티잔의 사상자는 6,561명이 사망했지만, 단 286정의 소총만 노획되었다고 덧붙였다. 이 수치의 극심한 불균형은 사망자가 주로 민간인이었음을 시사한다.

3. 1. 1. 파르티잔의 방어

20일부터 모든 방향에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어떤 사단도 원래의 일정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추축군은 파르티잔 제1 크로아티아 군단과 제1 보스니아 군단이 통제하는 영토를 공격했다. 카를로바츠-비하치 축에서 7 SS 사단의 공격에 맞서 4개의 파르티잔 여단이 방어했다. 제8 코르둔 사단의 제4 및 제15 여단과 제6 및 제14 리토랄-고르스키 코타르 여단이었다. 제7 바니야 사단은 글리나와 코스타이치차에서 카진과 보산스카 크루파 방향으로 진격하는 제369 사단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제6 리카 사단은 이탈리아의 공격에 맞서 플리트비체 호수–그라차츠 전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제717 사단은 산스키 모스트에서 보산스키 페트로바츠로 진격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사단은 1월 20일에 제749 연대와 제202 전차 대대의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공중 지원에도 불구하고, 산스키 모스트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서 제1 크라이나 여단과 제7 크라이나 여단 1개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사단의 제737 연대는 돌파구를 활용하기 위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지만, 제749 연대는 돌파에 실패했다. 다음 며칠 동안 양측은 주요 지점에서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노력을 강화했다. 파르티잔은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는 동시에 격렬한 야간 반격을 가했다. 제717 사단은 산스키 모스트에서 서쪽으로 제2 산악 국토 방위 여단과 함께 양동 공격을 시도했다. 1월 25일, 2개의 국토 방위 대대와 1개의 독일 회사로 구성된 이 전투단은 제6 크라이나 여단 제1 대대와 제1 크라이나 여단 제3 대대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파르티잔은 40정의 경기관총, 10정의 중기관총, 4문의 산포와 1문의 대전차포를 포함한 무기를 노획했다. 제717 사단 사령관 디폴드 장군은 1월 26일에 제2 국토 방위 여단이 완전히 궤멸되었고, 제2 및 제4 대대의 잔여 병력이 제749 척탄병 연대에 흡수되었다고 루터스 장군에게 보고했다. 1월 27일에는 강화된 제737 연대로 서쪽으로 더 야심 찬 공격이 시작되어 베나코바츠에 도달했지만, 제6 크라이나 여단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동안, 제2 및 제5 크라이나 여단이 코자라에서 증원으로 도착했고, 제737 연대는 갑자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대안이 없다고 판단한 연대는 전방위 방어를 펼쳤고, 2월 3일까지 고립된 채 공격을 받았다.

동시에, 제717 사단은 클류치와 보산스키 페트로바츠 방향의 주요 적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공격은 1월 28일 이른 시간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제1 크라이나 여단 대대는 야간에 독일군의 시작 위치에 선제 공격을 가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고 부대를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 독일군은 무기와 낙오병을 수집할 목적으로 전차를 앞세운 공격을 감행했지만, 파르티잔의 대전차 사격으로 첫 번째 전차가 파괴되었고, 제202 전차 대대 사령관 폰 가이소 중령이 사망했다.

3. 1. 2. 그르메치 산 공격

대부분의 독일군 공격을 견뎌냈던 파르티잔 방어선은 마침내 제7 SS 사단의 진격으로 무너졌다. 이 부대는 우익 측면의 두 개의 이탈리아 사단의 도움을 받아 네 개의 파르티잔 여단을 꾸준히 밀어내며 1월 24일에 슬룬을, 27일에 라코비차를 점령했다. 그 결과 비하치가 위협을 받게 되어 대피해야 했고, 독일군은 1월 29일 전투 없이 비하치에 입성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또한 바니야 지역의 제7 파르티잔 사단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제7 SS 사단 앞에서 비하치-페트로바츠 축을 덮는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천 명의 난민들이 파르티잔 부대와 함께 바니야를 떠났고, 그 과정에서 공습, 기아, 추위, 질병에 시달렸다.

제7 SS 사단은 주로 제7 바니야 사단으로 구성된 파르티잔 방어선을 상대로 페트로바츠로 계속 진격했다. 그 50km를 이동하는 데 또 10일이 걸렸다. 제7 SS 사단은 2월 7일 페트로바츠에 도달했고, 2월 9일 마침내 제717 사단과 합류하여 작전 둘째 날로 예정되었던 임무를 완수했다. 제369 사단과 제3 국토방위 산악 여단은 파르티잔 후위 부대만을 상대하며 1월 30일 보산스카 크루파에 도달했고, 며칠 후 베나코바츠에서 포위된 제737 연대를 구출했다. 제369 사단은 2월 4일 비하치 근처에서 제7 SS 사단과 합류했다. 이로써 광범위한 그르메치 지역은 세 개의 독일 사단에 의해 포위되었다. 2월 6일, 증원을 받은 후 제369 사단, 제187 사단, 제717 사단은 그르메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제2, 제5 크라이나 여단은 약 15,000명의 주민들과 함께 포위되었다. 2월 10일 여단은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포트칼리예를 향해 크루파-산스키 모스트 도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주민들은 여단을 따라갔지만, 많은 수(최대 2,000명)가 혹독한 추위에 굴복했다. 남아있는 약 400명의 민간인이 독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독일군 보고서(바이스 1, 2월 18일자)에 따르면 제7 SS 사단은 149명이 사망하고, 222명이 부상, 68명이 실종되었으며, 제717 사단의 사상자는 118명이 사망하고, 290명이 부상, 20명이 실종되었다.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파르티잔의 사상자는 6,561명이 사망했지만, 단 286정의 소총만 노획되었다고 덧붙였다. 이 수치의 극심한 불균형은 사망자가 주로 민간인이었음을 시사한다.

3. 2. 백색 작전 2단계 (Weiss 2)

독일 사령부는 리브노를 파르티잔 영토의 남동부 절반의 중심지로 판단하고, 바이스 작전 2단계를 통해 리브노에 대한 동심원 공격으로 파르티잔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파르티잔 주력 부대는 이미 프로조르와 코닉 사이의 네레트바 계곡으로 이동한 후였다.

독일군 작전인 바이스 작전 2단계, 모스타르와 바이스 작전 2, 그리고 네레트바 강을 건너는 파르티잔


독일군은 원래 계획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제7 SS 사단과 제369 사단을 투입하여 2월 25일부터 진격을 개시했다. 제7 SS 사단은 보산스키 페트로바츠-드르바르-보산스코 그라호보-리브노 경로로, 제369 사단은 므르코니치-그라드-밀리니스타-글라모치-리브노 경로로 진격했다. 파르티잔 제1 보스니아 군단은 결정적 방어 대신 부대와 주민 대피를 위한 지연전을 펼치고 독일군을 회피하는 전략을 택했다.

제7 SS 사단은 2월 28일 드르바르를 점령하고 그라호보로 진격했으며, 제369 사단은 글라모치 방면에서 파르티잔의 저항에 부딪혔다. 3월 2일, 독일군이 그라호보와 글라모치를 점령하자, 파르티잔 군단은 회피 기동을 통해 사토르 산을 넘어 크라이나로 복귀했다. 혹독한 날씨와 깊은 눈으로 인해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독일군은 파르티잔을 추격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월 5일, 독일군은 리브노를 점령했지만, 파르티잔 주력 부대는 이미 네레트바 방면으로 이동한 뒤였다. 제7 SS 사단은 모스타르 보크사이트 지역으로, 제369 사단은 야블라니차로 이동을 재개했다.

한편, 바치비치가 지휘하는 헤르체고비나 체트니크 부대는 스플리트에서 네레트바로 이동하며 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은 브르고라츠 부근에서 파르티잔 제9(달마티아) 사단과 교전했으나, 결국 파르티잔 부대는 야블라니차로 후퇴하여 주요 작전 집단에 합류했다.

독일군은 파르티잔 중앙 사령부와 주요 병원을 파괴하고자 6개 사단, 이탈리아군 3개 사단, 크로아티아 사단 2개, 체트니크우스타샤 병력 등 약 15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3. 3. 백색 작전 3단계 (Weiss 3)

백색 작전 3단계는 동부 헤르체고비나와 몬테네그로에서 왕당파 체트니크를 목표로 1943년 3월부터 북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집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포위된 파르티잔 부대가 몬테네그로 북부로 탈출하면서 이 단계는 완수되지 못했다. 이 단계는 1943년 2월 초에 취소되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전황의 변화와 체트니크와의 협력 관계 악화 때문으로 추정된다.

전투 후반, 파르티잔은 네레트바강을 등진 계곡에 몰려 있었다. 서안에는 여러 정예 부대와 기갑 여단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이, 강 건너 동쪽 강변에는 조직되지 않은 체트니크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유일한 다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파르티잔 지휘관 요시프 브로즈 티토공병에게 강에 유일한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 사령부는 파르티잔이 서안을 따라 북쪽으로 마지막 돌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병력을 재배치했다. 그러나 티토의 공병 부대는 다리를 응급 수리할 시간을 벌었고, 강 건너편 체트니크 부대를 제거했다.

다른 문헌에 따르면 파르티잔은 사라예보 남서쪽에 있는 코니츠에서 네레트바강을 건너려 했지만, 독일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야블라니차에서 파르티잔이 폭파한 다리 위에 판자를 깔아 도하했다.[3] 도하 후, 프레니 산에 배치되어 있던 체트니크 부대를 기습하여 괴멸시키고 남쪽 몬테네그로로 향했다.[3] 야블라니차에는 네레트바 전투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3]

4. 네레트바 전투

파르티잔군에 의해 폭파되기 전 유명한 다리의 원래 구조


파괴된 다리, 현재 기념 단지의 일부로, 영화 제작을 위해 구조가 변경되었다.


오늘날의 기념 단지, 네레트바 강의 다리는 영화 ''네레트바 전투'' 촬영 중에 두 번 건설되고 두 번 파괴되었기 때문에 원래 구조와 다르다.


2월 말, 티토의 주력 부대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사라예보에서 증강된 독일 제718사단의 압박, 모스타르에서 이탈리아-체트니크 전투단의 압력, 네레트바 강 동쪽의 체트니크군 증가, 그리고 서쪽에서 접근하는 두 개의 독일 사단(제7SS, 제369사단)의 위협까지,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티토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1943년 2월 28일, 그는 공격 방향을 전환하여 프로조르를 압박하는 독일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3월 1일부터 4일 사이에 네레트바 강을 가로지르는 모든 다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적을 혼란시키기 위한 기만 작전이었다.

독일군은 파르티잔의 주력 부대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그리고 주요 파르티잔 병원을 파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독일군 6개 사단, 이탈리아군 3개 사단, 크로아티아 2개 사단, 그리고 체트니크우스타샤 등 약 15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작전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 백 I: 1943년 1월 20일, 보스니아 서부와 크로아티아 중부의 파르티잔 점령 지역 공격.
  • 백 II: 2월 25일부터 보스니아 서부 및 남서부 전투, 파르티잔은 네레트바 강 남서쪽으로 후퇴.
  • 백 III: 3월부터 북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집중. 그러나 파르티잔은 몬테네그로 북부로 탈출하여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파르티잔은 네레트바 강을 등진 채 서쪽의 독일군 정예 부대와 동쪽의 체트니크 부대에게 포위되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강을 건너는 것이었지만, 추축군은 파르티잔의 섬멸을 위해 집결하고 있었다.

이때, 티토는 기발한 계책을 생각해냈다. 그는 공병에게 강에 있는 유일한 다리를 폭파시키라고 명령했다. 독일군은 파르티잔이 북쪽으로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려는 것으로 오판하고, 병력을 재배치했다. 그러나 이는 티토의 함정이었다. 공병대는 다리를 임시로 수리했고, 파르티잔은 이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 체트니크 부대를 격파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독일군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파르티잔은 강을 건넌 후였다. 독일 공군(Luftwaffe)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산악 지형 덕분에 파르티잔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탈출이 완료된 후, 티토는 추격을 막기 위해 다리를 완전히 파괴했다.

다른 문헌[3]에 따르면 파르티잔은 사라예보 남서쪽에 있는 코니츠에서 네레트바강을 건너려 했지만, 그곳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니츠 서쪽의 야블라니차에서 파르티잔이 폭파되어 강에 떨어진 다리 위에 판자를 깔아 도하했다. 도하 후, 전면에 펼쳐진 프레니 산에 배치되어 있던 체트니크 부대를 기습하여 괴멸시키고 남쪽 몬테네그로로 향했다. 도하 지점인 야블라니차에는 네레트바 전투 기념관("Museum of the Battle for the Wounded at Neretva" Google Map에 의거)이 설립되어 있다.

4. 1. 파르티잔의 반격

티토는 네레트바 강을 도하하는 대신, 프로조르를 압박하는 독일군을 공격하는 역발상을 했다. 1943년 3월 2일 새벽, 제4 프롤레타리아 여단 제2대대는 빌리차 굼노에 도착하여 독일 제749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수 시간의 방어전 끝에, 여단은 적 진지를 공격하여 독일군을 라두사 산 비탈 아래로 몰아냈다. 이 전투는 격렬하고 극적이었으며, 파르티잔 측 피해는 심각했다. 제2대대와 지휘관 니코 스트루가르는 이 성공으로 티토의 공식적인 칭찬을 받았다.

3월 4일, 9개 여단 전체가 동원된 전면적인 파르티잔 반격이 개시되었다. 5개 여단은 독일군 진지를 정면으로 공격했고, 나머지 4개는 측면을 우회하려 했다. 독일군은 부고이노 근처까지 밀려났고, 3월 8일까지 그곳에서 방어를 기다리고 준비했다. 3월 4일 전투에서 제2 프롤레타리아 여단은 제738연대 제3대대장 슈트레커 소령을 포로로 잡았고, 며칠 동안 그를 이용하여 독일군에게 포로 교환과 다른 문제에 대한 회담을 제안했다. 이것은 유명한 3월 협상으로 이어졌다.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고, 독일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4. 2. 네레트바 강 도하

티토는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공병에게 강 위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파르티잔이 북쪽으로 탈출을 시도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 독일군이 병력을 재배치하게 만들었다.

네레트바를 건너는 최후의 파르티잔 진격


야블라니차의 파괴된 다리를 재건하여 네레트바 강을 건너는 파르티잔


그러나 이것은 티토의 속임수였다. 파르티잔 공병은 폭파된 다리 옆에 임시 다리를 건설했고, 이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 동쪽 강둑의 체트니크 부대를 격파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독일군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파르티잔은 네레트바 강을 도하한 후였다.

이 과정에서 파르티잔은 독일 공군 (Luftwaffe)의 격렬한 폭격을 받았으나, 산악 지형 덕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4. 2. 1. 도하 과정: 한국의 시각

네레트바 강 도하는 파르티잔의 불굴의 의지와 티토의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사건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는 정신을 강조한다.

5. 결과

3월 말까지 독일군은 약 11,915명의 파르티잔을 살해하고, 616명을 처형했으며, 2,50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 추축군의 이러한 전술적 승리와 파르티잔의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잔 부대는 지휘부와 병원을 확보하여 전투력을 보존하고 작전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파르티잔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로 이동하면서 드리나 강 서쪽 지역에서 체트니크 세력을 거의 무력화시켰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추축군이 실시한 다음 주요 작전은 슈바르츠 작전이었다.

5. 1. 결과: 한국의 시각

6. 대중 문화

알리스테어 맥린의 1968년 스릴러 소설 ''나바론에서 온 10인의 특공대''는 이후 영화화되었으며, 수적으로 열세인 파르티잔들이 독일군과 체트니크에 맞서 싸우고 네레트바 다리를 폭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사건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이다. 1969년 오스카 후보에 오른 영화 ''네레트바 전투''는 이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Report of the operations department of the Southeast Command 22 March 1943, National Archives Washington, NAW, T311, Roll 175, frame 000563 http://www.znaci.net[...] Znaci.net 2014-03-03
[2] 웹사이트 IV. neprijateljska ofenziva – Unternehmen Weiss II: Bitka na Neretvi http://povijest.net/[...] 2014-02-17
[3] 서적 ライフ「パルチザンの戦い」 P.102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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