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트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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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트니크는 18세기부터 사용된 단어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적 목표를 가진 군사 또는 준군사 조직을 지칭한다. 19세기 말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위한 조직으로 확대되었으며, 20세기 초 발칸 게릴라 부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세르비아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추축국과 협력하여 파르티잔과 대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시기에는 부활하여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으며, 현재는 역사적 평가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는 단체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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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트니크 | |
|---|---|
| 기본 정보 | |
| 활동 기간 | 1941년 – 1945년 |
| 소속 |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1944년 8월까지) |
| 지도자 |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처형) |
| 주요 근거지 | 수보보르 근처 라브나 고라 |
| 이념 | |
| 주요 이념 | 대세르비아주의 반공주의 |
| 추가 이념 | 유고슬라비아 군주제 유고슬라비아 민족 통합주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
| 규모 | |
| 규모 정보 | 유고슬라비아 아버지의 군대 조직도 참조 |
| 관련 전쟁 | |
| 관련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
| 주요 전투 | 1941년: 세르비아 봉기 드바르 봉기 로즈니차 전투 바냐 코빌랴차 점령 샤바크 공격 크루셰바츠 공격 마치바 작전 우지체 작전 크랄레보 포위전 몬테네그로 봉기 스르브 봉기 로가티차 포위전 올로보 점령 노비 파자르 전투 미하일로비치 작전 동부 코소보 전쟁 1942년: 작전 트리오 체트니크의 추축국 통신선 파괴 공작 몬테네그로 공세 코자라 공세 알파 작전 코파오니크 작전 1943년: 케이스 화이트 쿠겔블리츠 작전 그차리체 전투 투르야크 포위전 비셰그라드 전투 1944년: 카메슈니차 아래 마을 학살 뢰셀스프룽 작전 할리아드 작전 크닌 전투 1945년: 모스타르 작전 사라예보 작전 리에브체 평원 전투 트리에스테 작전 젤렌고라 전투 폴랴나 전투 |
| 지휘관 | |
| 주요 지휘관 |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처형)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비르차닌 (자연사) 도브로슬라브 예브제비치 파블레 주리시치 (처형) 몸칠로 주이치 자하리예 오스토이치 (처형) 페타르 바초비치 (처형) 보이스라브 루카체비치 (처형) 드라구틴 케세로비치 (처형) 예즈디미르 당기치 (처형) 니콜라 칼라비치 (처형 또는 전사) 즈보니미르 부치코비치 미로슬라브 트리푸노비치 (전사) 프레드라그 라코비치 (전사) 드라고슬라브 라치치 (전사) 벨리미르 필레티치 칼 노박 |
| 교전 세력 | |
| 연합군 (초기) | 연합군 (1941–44) (1941–44)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1944년 8월까지) 파르티잔 (1941년 7월 – 10월) |
| 추축국 (협력) | 추축국 (1942년부터) 세르비아 구국 정부 (1941–1944) 세르비아 자원군단 (1944–45) 세르비아 국가 경비대 (1944–45) 유고슬라비아 국가 운동 (1944–45) (1942–45) 페차나츠 체트니크 (1941–43) (1941–43)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자치 방위대 러시아 보호 군단 (1941–44) |
| 적대 세력 | 연합군 파르티잔 (1941년 10월 – 1945년 5월) 추축국 (1941–42) 세르비아 구국 정부 세르비아 자원군단 (1941–44) 세르비아 국가 경비대 (1941–44) 알바니아 (1943–44) (1941–42; 1945) (1941) 알바니아 (1941–43) 슬로베니아 자치 방위대 [[File:Islam creciente.png|22px]] 산자크 무슬림 민병대 러시아 보호 군단 (1944) [[File:Balli Kombetar.png|22px]] 발리 콤베타르 |
| 그 외 지휘관 | |
| 그 외 지휘관 | Kosta Pećanac Ilija Trifunović-Birčanin Pavle Đurišić Dobroslav Jevđević Momčilo Đujić |
2. 어원
"체트니크"라는 단어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약탈하고 불태우다"를 의미하는 터키어 단어 ''çete''에서 유래했다고 믿는다.[6] 반면, 다른 견해는 "company의 구성원"을 의미하는 원시 슬라브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7] 이 단어는 라틴어 단어 coetus|코에투스la("모임" 또는 "집회")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다. 접미사 ''-nik''은 슬라브어 일반 인칭 접미사로, "관련되거나 연루된 사람 또는 사물"을 의미한다.
게릴라전과 유사한 소규모 반란 활동은 남슬라브족 거주 지역, 특히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1804년에 시작된 제1차 세르비아 봉기에서 무법자 부대(hajdučke čete|하이두츠케 체테sr)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대규모 전투로 인해 오스만이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봉기는 1813년에 진압되었다.[1] 2년 후 제2차 세르비아 봉기가 발발했고, 게릴라전은 다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여 부분적으로 독립된 세르비아 공국의 설립을 도왔으며, 1833년에 크게 확장되어 1878년에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1] 이 기간과 19세기 말까지 게릴라전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었으며, 세르비아 정부는 1848년과 1868년에 게릴라전에 관한 책을 의뢰하여 출판했다.[2] 독립 4년 후 공국은 세르비아 왕국이 되었다.[3]
18세기 중반 즈음, 군대 및 경찰 부대의 구성원을 설명하기 위해 "체트니크"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마티야 반은 1848년, 세르비아 공국 외부에서 무장 부대를 설립하여 발칸 반도의 민족주의 부상 이후 세르비아-오스만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 통치에 반대할 필요성에 관해 "체트니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9세기 말에는 이 용어가 세르비아인의 민족주의적 목표를 가진 군사 또는 준군사 조직의 구성원에게 확대되었다. 1904년부터 세르비아어 단어 četnik|체트니크sr는 "밴드" 또는 "부대"를 의미하는 Cheta (armed group)|chetasr (četa|체타sr/чета|체타sr)라고 불리는 발칸 게릴라 부대의 구성원을 설명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체트니크"라는 단어는 "대세르비아 이념에 의해 추진되는 패권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정치를 따르는" 모든 그룹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3. 역사적 배경

1904년부터 1912년 사이에 세르비아에서 개인적으로 모집, 장비, 자금을 지원받은 소규모 전투 부대가 마케도니아 지역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하고 현지 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르비아에 합병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부대들은 주로 장교와 부사관이 세르비아 왕립군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면서 지휘했고, 세르비아 정부는 곧 이 활동을 관리했다. 그리스 왕국과 불가리아 공국도 이 지역을 자국에 통합하려 하여 마케도니아에 유사한 병력을 보냈고, 그 결과 세르비아 체트니크는 불가리아의 경쟁자들과 오스만 당국과 충돌했다. 사회 민주주의 언론을 제외한 세르비아에서는 이러한 체트니크 활동을 지지했으며,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했다.[4][5] 이러한 체트니크 활동은 1908년 청년 투르크 혁명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 대부분 중단되었다.[6]
1921년, 체트니크 참전 용사들은 베오그라드에서 "조국 자유와 명예를 위한 체트니크 협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체트니크의 역사를 기리고, 체트니크 애국 사상을 전파하며, 사망한 체트니크의 가족과 장애가 있는 체트니크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기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당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민 급진당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1924년 분열되었다. 친급진파 대세르비아주의 세력은 "국왕과 조국을 위한 세르비아 체트니크 협회"와 "세르비아 체트니크 '페타르 므르코니치' 협회"를 결성했다. 이 두 조직은 1925년 7월 "국왕과 조국을 위한 세르비아 체트니크 '페타르 므르코니치' 협회"로 통합되었고, 푸니샤 라치치가 이끌었다.[1] 라치치는 1928년 국회에서 크로아티아 농민당 대표 3명을 살해하는 등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1] 1929년 알렉산다르 1세의 왕실 독재 이후, 라치치의 조직은 해산되었고, 이전 반대파들은 원래의 "조국 자유와 명예를 위한 체트니크 협회"에 다시 합류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마케도니아에서는 친불가리아 정서가 강했고, 베오그라드 정부는 이곳을 남세르비아로 부르며 세르비아화 정책을 펼쳤다.[2] 불가리아 정교회 학교 폐쇄, 역사 교과서 개정, 불가리아어 사용 금지 등 강압적인 조치가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2] 요반 바분스키를 포함한 체트니크 단체들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친불가리아 저항 지도자들을 살해했으며, 현지 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2]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저항은 1922년 페차나츠와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루네가 슈티프에 기반을 둔 불가리아 강도단 반대 협회를 결성하는 등 더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3] 페차나츠와 그의 체트니크들은 코소보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알바니아인들과도 전투를 벌였다.[4]
체트니크는 단일한 운동이 아니었고, 1929년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비르차닌이 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2년까지 재임한 후 경쟁 조직인 "구 체트니크 협회"를 설립했지만, 큰 영향력은 없었다.[5] 그는 페차나츠로 교체되었고, 페차나츠는 1941년 유고슬라비아 침공까지 조직을 이끌었다.[6][7] 1929년부터 주요 체트니크 조직은 세르비아 본토 외곽의 최소 24개 도시에 지부를 설립했으며, 이로 인해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8][9] 페차나츠의 지도력 아래, 체트니크 조직은 5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공격적인 세르비아 정당 조직으로 변모했다.[10][11] 1935년 이후, 체트니크 활동은 사바 바노비나와 드라바 바노비나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낮은 수준에서 계속 활동했다.[12] 페차나츠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한 밀란 스토야디노비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3] 1938년, 참모총장은 체트니크 협회에 어떠한 중요한 전시 기능도 맡기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14]
3. 1. 1918년 이전
게릴라전과 유사한 소규모 반란 활동은 남슬라브족 거주 지역, 특히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1804년에 시작된 제1차 세르비아 봉기에서 무법자 부대(hajdučke čete|하이두츠케 체테sr)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대규모 전투로 인해 오스만이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봉기는 1813년에 진압되었다.[1] 두 번째 봉기는 2년 후에 발발했고, 게릴라전은 다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여 부분적으로 독립된 세르비아 공국의 설립을 도왔으며, 1833년에 크게 확장되어 1878년에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1] 이 기간과 19세기 말까지 게릴라전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었으며, 세르비아 정부가 게릴라전에 관한 책을 의뢰하여 1848년과 1868년에 출판했다.[2] 독립 4년 후 공국은 세르비아 왕국이 되었다.[3]
1904년에서 1912년 사이에 세르비아에서 개인적으로 모집, 장비, 자금을 지원받은 소규모 전투 부대가 마케도니아 지역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하고 현지 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르비아에 합병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부대는 주로 장교와 부사관이 세르비아 왕립군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면서 지휘했고, 세르비아 정부는 곧 이 활동을 관리했다. 그리스 왕국과 불가리아 공국도 이 지역을 자국에 통합하려 하여 마케도니아에 유사한 병력을 보냈고, 그 결과 세르비아 체트니크는 불가리아의 경쟁자들과 오스만 당국과 충돌했다. 사회 민주주의 언론을 제외하고, 이러한 체트니크 활동은 세르비아에서 지지받았으며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4][5] 이러한 체트니크 활동은 1908년 청년 투르크 혁명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 대부분 중단되었다.[6]
3. 2. 전간기 (1918-1941)
1921년, 체트니크 참전 용사들은 베오그라드에서 "조국 자유와 명예를 위한 체트니크 협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체트니크의 역사를 기리고, 체트니크 애국 사상을 전파하며, 사망한 체트니크의 가족과 장애가 있는 체트니크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기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민주당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민 급진당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1924년 분열되었다. 친급진파 대세르비아주의 세력은 "국왕과 조국을 위한 세르비아 체트니크 협회"와 "세르비아 체트니크 '페타르 므르코니치' 협회"를 결성했다. 이 두 조직은 1925년 7월 "국왕과 조국을 위한 세르비아 체트니크 '페타르 므르코니치' 협회"로 통합되었고, 푸니샤 라치치가 이끌었다.[1] 라치치는 1928년 국회에서 크로아티아 농민당 대표 3명을 살해하는 등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1] 1929년 알렉산다르 1세의 왕실 독재 이후, 라치치의 조직은 해산되었고, 이전 반대파들은 원래의 "조국 자유와 명예를 위한 체트니크 협회"에 다시 합류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마케도니아에서는 친불가리아 정서가 강했고, 베오그라드 정부는 이곳을 남세르비아로 부르며 세르비아화 정책을 펼쳤다.[2] 불가리아 정교회 학교 폐쇄, 역사 교과서 개정, 불가리아어 사용 금지 등 강압적인 조치가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2] 요반 바분스키를 포함한 체트니크 단체들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친불가리아 저항 지도자들을 살해했으며, 현지 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2]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저항은 1922년 페차나츠와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루네가 슈티프에 기반을 둔 불가리아 강도단 반대 협회를 결성하는 등 더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3] 페차나츠와 그의 체트니크들은 코소보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알바니아인들과도 전투를 벌였다.[4]
체트니크는 단일한 운동이 아니었고, 1929년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비르차닌이 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2년까지 재임한 후 경쟁 조직인 "구 체트니크 협회"를 설립했지만, 큰 영향력은 없었다.[5] 그는 페차나츠로 교체되었고, 페차나츠는 1941년 유고슬라비아 침공까지 조직을 이끌었다.[6][7] 1929년부터 주요 체트니크 조직은 세르비아 본토 외곽의 최소 24개 도시에 지부를 설립했으며, 이로 인해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8][9] 페차나츠의 지도력 아래, 체트니크 조직은 5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공격적인 세르비아 정당 조직으로 변모했다.[10][11] 1935년 이후, 체트니크 활동은 사바 바노비나와 드라바 바노비나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낮은 수준에서 계속 활동했다.[12] 페차나츠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한 밀란 스토야디노비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3] 1938년, 참모총장은 체트니크 협회에 어떠한 중요한 전시 기능도 맡기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14]
4. 제2차 세계 대전 (1941-1945)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에 대항할 준비가 부족했다. 1940년 4월 유고슬라비아 참모총장은 체트니크 사령부를 설립하여 전국에 6개 대대를 구성했다. 그러나 1941년 4월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전까지 게릴라전에 대한 준비는 미흡했고, 체트니크 협회 활용도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침공 직전, 페차나츠는 제5군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 조직 권한과 무기, 자금을 지원받았다. 제5군은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국경에서 철문과 그리스 왕국 국경 사이를 담당했다.
1941년 4월 6일,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렸다. 유고슬라비아 영토는 추축국에 병합되었고, 파시즘 괴뢰 국가인 우스타샤의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크로아티아 독립국hr)이 수립되었다. 페타르 2세 국왕과 정부는 런던에서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를 조직했다. 침공 동안 체트니크 사령부 구성원들은 포로로 잡혔고, 항복 이후 조직적인 활동은 없었다.
침공 초기,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은 보스니아 제2군 부참모총장이었다. 4월 13일 도보이 지역에서 부대 지휘 중 항복을 통보받았으나, 따르지 않고 세르비아인 부대원들과 산으로 이동하여 저항을 계속했다. 4월 28일 약 80명 규모의 그룹은 드리나 강을 건너 세르비아 영토로 들어갔다. 5월 6일 미하일로비치 그룹은 우지체 근처에서 독일군에 포위되어 거의 파괴되었다. 5월 13일 미하일로비치는 라브나 고라에 도착, 7명의 장교와 27명의 병사로 그룹을 이끌고 저항 운동의 핵심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미하일로비치 조직은 "라브나 고라 운동"으로 알려졌다.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최초의 저항 운동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지만, 지속적인 무장 작전을 수행하는 정치, 군사 조직으로서의 저항 운동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라브나 고라 도착 직후, 미하일로비치 체트니크는 지휘소를 설치하고 "유고슬라비아 육군 체트니크 분견대"로 명명했다. 이는 이전 체트니크 전통을 계승했지만, 전간기 체트니크 협회나 1940년 설립된 체트니크 사령부와는 관련이 없었다.
8월 초, 체트니크 중앙 민족 위원회(CNK)가 결성되어 미하일로비치에게 국내외 정치 문제에 대한 조언을 제공했다. 위원회 주요 구성원은 드라기샤 바시치, 스테반 몰예비치, 믈라덴 주요비치 등이었으며, 바시치는 미하일로비치의 부사령관 역할을 했다.
실제 군사 행동에서 체트니크는 추축군과의 적극적인 전투를 회피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 군대와 전투를 반복했다. 영국 지원을 받던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방침에 따라, 파르티잔과도 적대하며 공격했다. 소련도 망명 정부를 지지하며 체트니크 지원에 나섰고, 티토에게는 통일을 강요했다.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1941년 11월부터 독일, 세르비아 구국 정부와 협력하여 파르티잔을 주요 상대로 삼았다. 1943년 7월 허스키 작전 이후 이탈리아 항복으로 쇠퇴했고, 1945년 연합국 지원도 끊겼으며, 독일 항복 후 5월 붕괴했다. 미하일로비치는 1946년 3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체트니크는 반독 저항 조직으로 설립되었지만, 추축군과의 교전은 제한적이었고, 오히려 협력했다. 또한, 크로아티아인, 무슬림인 등 민족, 종교적으로 대립하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전후 유고슬라비아 분쟁에서 세르비아인 민병 중 일부는 체트니크를 칭하며 민족주의를 계승했고, 세르비아 급진당 등 극우 정당도 후계임을 자처하여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경계 대상이 되고 있다.
4. 1. 결성과 이념
1941년 4월 6일, 독일 국방군은 대규모 부대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순식간에 점령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은 10일 정도 만에 궤멸되었지만, 민중의 저항이 이를 대신했다. 처음 유고슬라비아에는 2개의 저항 조직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 해방군 및 파르티잔 부대 총사령부(파르티잔)"였고, 다른 하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내에서 항복을 거부한 세르비아인 장병들이 결성한 "체트니크"였다.[8][9][10]체트니크는 군사 저항 조직이었으며, 그 명칭은 19세기에 터키와 싸운 세르비아 게릴라에서 유래되었다. 그 사상 신념은 철저한 대세르비아주의, 반공주의였다.[8][9][10]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지휘하에 봉기한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의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산악 지대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지에서의 정규전용 전략과 전술을 중시했으며, 군의 구성과 부대 편성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이른 시기부터 내부가 부패에 물들고, 규율도 부족하여, 비정규전 수행에 필수적인 지역 주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8][9][10]
1941년 5월 미하일로비치의 운동이 시작된 이래 1944년 1월의 바 의회까지, 이 운동의 이념과 목표는 일련의 문서들을 통해 공표되었다. 1941년 6월, 스테반 몰예비치는 ''동질적 세르비아''라는 제목의 각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대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대 세르비아를 창설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전쟁 전 유고슬라비아 영토의 압도적인 부분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이웃 국가에 속한 상당한 양의 영토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에는 대규모 인구 이동을 통해 대 세르비아 국경 내 비(非) 세르비아계 인구를 추방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지만, 구체적인 숫자는 제시되지 않았다.

몰예비치가 ''동질적 세르비아''를 구상하는 동안, 베오그라드 체트니크 위원회는 몰예비치의 계획과 유사한 영토 조항을 담은 제안을 공식화했다. 이 제안은 대 세르비아에서 2,675,000명을 추방할 것을 주장했는데, 여기에는 1,000,000명의 크로아티아인과 500,000명의 독일인이 포함되었다. 총 1,310,000명의 세르비아인이 국경 밖에서 대 세르비아로 이주될 것이며, 이 중 300,000명은 크로아티아 출신 세르비아인이었다.
1942년 3월, 체트니크 디나라 사단은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다음 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 달마티아 및 리카에서 온 체트니크 사령관들의 스르미차 회의에서 수용되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1941년 12월 미하일로비치가 파블레 쥬리시치와 조르지예 라시치에게 보낸 지침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세르비아인을 동원하여 다른 민족 집단을 "정화"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몇 가지 추가적인 전략이 채택되었다.
1942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이탈리아 점령하 몬테네그로의 샤호비치에서 몬테네그로의 젊은 체트니크 지식인 회의가 열렸다. 미하일로비치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의 참모장 자하리예 오스토이치, 쥬리시치, 라시치가 참석했다.

1944년 1월 바 의회 이전에 나타난 마지막 체트니크 이데올로기 문서는 1942년 말 몬테네그로의 젊은 체트니크 지식인 회의와 비슷한 시기에 체트니크 지도부에 의해 준비된 매뉴얼이었다. 이 매뉴얼은 체트니크가 전쟁을 세 단계로 보았다고 설명했다.
체트니크 이데올로기를 자세히 설명하는 마지막 문서는 1944년 1월 미하일로비치가 소집한 바 의회에서 제작되었다. 바 의회에서 제작된 문서는 ''라브나 고라 운동의 목표''라고 불렸으며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부분인 ''라브나 고라 운동의 유고슬라비아 목표''는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을 위한 각각의 단위가 있는 민주적 연방이 될 것이며, 소수 민족은 추방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두 번째 부분인 ''라브나 고라 운동의 세르비아 목표''는 기존의 체트니크 아이디어를 강화하여 모든 세르비아 지방이 연방 배치 내 세르비아 단위로 통합될 것이며,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세르비아 지역 간의 연대와 단원제 의회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주요 세르비아 미개척지주의 목표 외에도,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 운동은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이었으며, 유고슬라비아주의에 형식적인 언급을 했지만, 실제로는 반대했다. 또한 반 크로아티아 정서, 반 무슬림 정서를 보였으며, 군주제를 지지했고, 반공주의를 보였다.

체트니크는 세르비아인으로 간주되는 상당수의 몬테네그로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적으로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방 방어 부대, 세르비아 마을 주민들의 약탈단, 반(反)파르티잔 보조 부대, 강제 동원된 농민, 무장한 난민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붙잡히지 않은 소규모 유고슬라비아 장교단이 조직적인 전투 부대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4. 2. 초기 활동과 파르티잔과의 갈등
초기 미하일로비치의 조직은 다양한 지역에서 그룹을 모집하고 설립하며, 자금을 모으고, 연락망을 구축하고, 무기와 탄약을 수집하는 데 집중했다.[1] 처음부터 그들의 전략은 조직을 구성하고 힘을 키우는 것이었지만, 서방 연합국의 유고슬라비아 상륙을 기대하며 점령군에 대한 무력 작전을 연기했다.[2]전쟁 전 체트니크 지도자 페차나크는 곧 세르비아 군사령관 지역의 네디치 협력 정권과 협약을 맺었다.[3]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은 "점령 세력에 저항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라브나 고라에 본부를 설치하고 그의 그룹을 페차나크 체트니크와 구별하기 위해 "라브나 고라 운동"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다른 체트니크들은 독일과 협력했으며 체트니크라는 이름은 다시 미하일로비치와 연관되었다.[4]
이 운동은 나중에 "국내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명될 예정이었지만,[5] 운동의 원래 이름은 체트니크 자신을 포함하여 전쟁 기간 동안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반적으로 "체트니크"라고 불리는 세력은 바로 이 세력이며, 페차나크, 네디치, 디미트리예 류티치를 포함한 다른 소규모 그룹에서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6]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주도의 파르티잔은 봉기를 조직했으며, 1941년 6월부터 11월까지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은 추축국에 대항하는 활동에 대체로 협력했다.
1941년 7월 초 서부 세르비아에서 추축국 점령군에 대한 체트니크 봉기가 파르티잔과 연계되어 시작되었다. 로즈니차, 로가티차, 반야 코빌랴차 및 올로보 지역의 봉기는 초기 승리를 이끌었다. 1941년 9월 19일, 티토와 미하일로비치는 스트루가니크에서 처음 만났으며, 티토는 부대 통합을 조건으로 미하일로비치에게 참모총장 직책을 제안했다. 미하일로비치는 보복이 두려워 독일군을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파르티잔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하일로비치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인도주의적이었다. 독일군이 살해된 독일군 병사 1명당 민간인 100명, 부상당한 병사 1명당 민간인 50명이라는 공개된 비율로 세르비아인에 대한 독일군의 보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0월 20일, 티토는 협력의 기초로 12가지 조항을 미하일로비치에게 제안했다. 6일 후, 티토와 미하일로비치는 미하일로비치의 본부에서 만났고, 미하일로비치는 공동 본부 설립, 독일군 및 괴뢰 정권에 대한 공동 군사 작전, 병력 보급을 위한 합동 참모 구성, 민족 해방 위원회 구성 등 티토의 제안의 주요 조항을 거부했다. 이러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저항군 간의 조정 부족으로 인해 몬테네그로와 노비 파자르에서 봉기가 진압되었다. 미하일로비치의 지속적인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크랄레보와 크라구예바츠에서 세르비아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된 두 차례의 대량 살인으로 현실이 되었고, 사망자는 총 4,500명이 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의 살인도 한창 진행되어 수천 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이 우스타샤 민병대와 죽음의 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10월 말, 미하일로비치는 추축국보다는 파르티잔이 체트니크의 주요 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르비아 민간인에 대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부대로 싸웠다. 점령된 유고슬라비아의 정교회 성직자 중 4분의 3이 체트니크를 지지했으며, 모치로 주지치와 같은 일부는 체트니크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추산된다. 파르티잔이 추축국에 의한 민간인에 대한 보복으로 이어진 공개적인 사보타주 행위를 선택한 반면, 체트니크는 더 은밀한 형태의 저항을 선택했다. 체트니크는 철도를 파괴하고 추축국의 철도 노선을 방해하기 위해 TNT를 폭파하는 대신, 철도 연료원을 오염시키고 기계 부품을 조작하여 기차가 무작위로 탈선하거나 고장 나도록 했다. 이러한 사보타주 행위는 북아프리카에서 싸우는 아프리카 군단의 보급선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11월 2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우지체 파르티잔 본부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격퇴되었고 다음 날 반격이 이어졌으며, 체트니크는 이 두 전투에서 1,000명의 병력과 많은 무기를 잃었다. 11월 18일, 미하일로비치는 티토의 휴전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공동 전선 구축 시도는 실패했다. 그 달,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의 요청에 따라 영국 정부는 티토에게 미하일로비치를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요구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파르티잔-체트니크 휴전은 체트니크에 의해 반복적으로 위반되었으며, 먼저 10월에 지역 파르티잔 지휘관을 살해하고, 나중에 미하일로비치의 참모의 명령에 따라 11월에 파르티잔 지지자 30명(대부분 소녀와 부상자)을 학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 보스니아의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은 한동안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1941년 12월 런던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는 페테르 2세 국왕 아래 미하일로비치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유고슬라비아 국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무렵 미하일로비치는 네디치와 그의 국가 구원 정부 및 파르티잔과 싸우기 위해 무기를 요청한 독일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는 프란츠 뵘 장군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파르티잔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며 미하일로비치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 무렵 독일군은 미하일로비치 세력에 대한 공격을 라브나 고라에서 시작했고, 체트니크를 세르비아 군사령관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몰아냈다. 체트니크 세력의 대부분은 동부 보스니아와 산자크로 후퇴했으며 체트니크 활동의 중심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이동했다.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영국 연락 담당자는 우지체에 대한 독일군의 공격에서 파르티잔에 대한 공격 이후 체트니크에 대한 보급을 중단하라고 연합군 사령부에 조언했지만, 영국은 계속해서 보급했다.
1941년과 1942년 기간 동안 체트니크와 파르티잔 모두 연합군 전쟁 포로, 특히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추축국 포로 수용소로 향하는 철도 차량에서 탈출한 ANZAC 군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크레타 전투에서 연합군이 패배한 후, 전쟁 포로들은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철도 차량으로 수송되었고, 일부 ANZAC 군인들은 점령된 세르비아에서 탈출했다. 미하일로비치의 지휘 아래 체트니크는 이들 ANZAC 군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추축국에 의해 송환되거나 재포획되었다.[11]
4. 3. 추축국과의 협력
초기에 미하일로비치의 조직은 다양한 지역에서 그룹을 모집하고 자금을 모으며 연락망을 구축하고, 무기와 탄약을 수집하는 데 집중했다.[1] 처음부터 그들의 전략은 조직하고 힘을 키우는 것이었지만, 서방 연합국의 유고슬라비아 상륙을 기대하며 점령군에 대한 무력 작전을 연기했다.[2][3]전쟁 전 체트니크 지도자 페차나크는 곧 세르비아 군사령관 지역의 네디치의 협력 정권과 협약을 맺었다.[4]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은 "점령 세력에 저항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라브나 고라에 본부를 설치하고 그의 그룹을 페차나크 체트니크와 구별하기 위해 "라브나 고라 운동"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다른 체트니크들은 독일과 협력했으며 체트니크라는 이름은 다시 미하일로비치와 연관되었다.[5]
이 운동은 나중에 "국내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명될 예정이었지만,[6][7] 운동의 원래 이름은 체트니크 자신을 포함하여 전쟁 기간 동안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반적으로 "체트니크"라고 불리는 세력은 바로 이 세력이며, 페차나크, 네디치, 디미트리예 류티치를 포함한 다른 소규모 그룹에서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8]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주도의 파르티잔은 봉기를 조직했으며, 1941년 6월부터 11월까지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은 축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에 대체로 협력했다.
1941년 7월 초 서부 세르비아에서 축 세력 점령군에 대한 체트니크 봉기가 파르티잔과 연계되어 시작되었다. 로즈니차, 로가티차, 반야 코빌랴차 및 올로보 지역의 봉기는 초기 승리를 이끌었다. 1941년 9월 19일, 티토와 미하일로비치는 스트루가니크에서 처음 만났으며, 티토는 부대 통합을 조건으로 미하일로비치에게 참모총장 직책을 제안했다. 미하일로비치는 보복이 두려워 독일군을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파르티잔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9] 미하일로비치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인도주의적이었다. 독일군이 살해된 독일군 병사 1명당 민간인 100명, 부상당한 병사 1명당 민간인 50명이라는 공개된 비율로 세르비아인에 대한 독일군의 보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10] 10월 20일, 티토는 협력의 기초로 12가지 조항의 프로그램을 미하일로비치에게 제안했다. 6일 후, 티토와 미하일로비치는 미하일로비치의 본부에서 만났고, 미하일로비치는 공동 본부 설립, 독일군 및 괴뢰 정권에 대한 공동 군사 작전, 병력 보급을 위한 합동 참모 구성, 민족 해방 위원회 구성 등 티토의 제안의 주요 조항을 거부했다.[9] 이러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저항군 간의 조정 부족으로 인해 몬테네그로와 노비 파자르에서 봉기가 진압되었다. 미하일로비치의 지속적인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크랄레보와 크라구예바츠에서 세르비아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된 두 차례의 대량 살인 캠페인으로 현실이 되었고, 사망자는 총 4,500명이 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의 살인도 한창 진행되어 수천 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이 우스타샤 민병대와 죽음의 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11] 10월 말, 미하일로비치는 축 세력보다는 파르티잔이 체트니크의 주요 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르비아 민간인에 대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부대로 싸웠다. 점령된 유고슬라비아의 정교회 성직자 중 4분의 3이 체트니크를 지지했으며, 모치로 주지치와 같은 일부는 체트니크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추산된다.[12][13] 파르티잔이 축 세력에 의한 민간인에 대한 보복으로 이어진 공개적인 사보타주 행위를 선택한 반면, 체트니크는 더 은밀한 형태의 저항을 선택했다. 체트니크는 철도를 파괴하고 축 세력의 철도 노선을 방해하기 위해 TNT를 폭파하는 대신, 철도 연료원을 오염시키고 기계 부품을 조작하여 기차가 무작위로 탈선하거나 고장 나도록 했다.
11월 2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우지체 파르티잔 본부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격퇴되었고 다음 날 반격이 이어졌으며, 체트니크는 이 두 전투에서 1,000명의 병력과 많은 무기를 잃었다. 11월 18일, 미하일로비치는 티토의 휴전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공동 전선 구축 시도는 실패했다. 그 달,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의 요청에 따라 영국 정부는 티토에게 미하일로비치를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요구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파르티잔-체트니크 휴전은 체트니크에 의해 반복적으로 위반되었으며, 먼저 10월에 지역 파르티잔 지휘관을 살해하고, 나중에 미하일로비치의 참모의 명령에 따라 11월에 파르티잔 지지자 30명(대부분 소녀와 부상자)을 학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부 보스니아의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은 한동안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1941년 12월 런던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는 페테르 2세 국왕 아래 미하일로비치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유고슬라비아 국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무렵 미하일로비치는 네디치와 그의 국가 구원 정부 및 파르티잔과 싸우기 위해 무기를 요청한 독일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는 프란츠 뵘 장군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파르티잔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며 미하일로비치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 무렵 독일군은 미하일로비치 세력에 대한 공격을 라브나 고라에서 시작했고, 체트니크를 세르비아 군사령관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몰아냈다. 체트니크 세력의 대부분은 동부 보스니아와 산자크로 후퇴했으며 체트니크 활동의 중심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이동했다.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영국 연락 담당자는 우지체에 대한 독일군의 공격에서 파르티잔에 대한 공격 이후 체트니크에 대한 보급을 중단하라고 연합군 사령부에 조언했지만, 영국은 계속해서 보급했다.
1942년 4월, 보스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체트니크에 대항하기 위해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1,200명의 최고의 병사들로 구성된 2개의 충격 반체트니크 대대(그르메치 및 코자라)를 설립했다. 이후 전쟁 중 연합군은 발칸 반도 침공을 심각하게 고려했고, 유고슬라비아 저항 운동은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으며, 두 세력 중 누가 독일과 싸우고 있는지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러 특수 작전 집행부(SOE) 요원들이 유고슬라비아로 보내져 현장 사실을 확인했다. 1980년에 처음 출판된 새로운 기록 보관 증거에 따르면, 미하일로비치와 그의 체트니크가 영국 연락 장교 찰스 더글러스 암스트롱 준장과 함께 수행한 추축국에 대한 일부 작전은 실수로 티토와 그의 공산주의군에 의해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편,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파르티잔을 결정적인 공세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체트니크는 독일 작전을 지원하기로 합의했으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보급품과 탄약을 제공받았다.
이러한 대규모 반파르티잔 공세 중 첫 번째는 네레트바 전투로 알려진 ''백색 작전''이었다. 체트니크는 20,000명에 달하는 상당한 병력으로 참여하여 동쪽(네레트바강 건너편)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포위를 지원했다. 그러나 티토의 파르티잔은 포위를 뚫고 강을 건너 체트니크와 교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갈등은 거의 완전한 파르티잔의 승리로 이어졌고, 그 후 체트니크는 드리나강 서쪽 지역에서 거의 전적으로 무력화되었다. 파르티잔은 계속 나아갔고, 나중에 수체스카 전투에서 다시 독일군을 피했다. 그동안 연합군은 발칸 반도 침공 계획을 중단하고 마침내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대신 파르티잔을 지원했다. 1943년 테헤란 회담과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과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영향력을 절반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체트니크와 파시스트 이탈리아 점령군 간의 협력은 주로 세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탈리아가 점령하고 병합한 달마티아, 이탈리아의 괴뢰국인 몬테네그로 왕국(1941~1944), 이탈리아가 병합했다가 독일이 점령한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주. 달마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일부 지역에서의 협력이 가장 광범위했다. 파르티잔과 체트니크 사이의 분열은 이 지역에서 더 일찍 일어났다.
파르티잔은 모든 점령군을 "파시스트의 적"으로 간주한 반면, 체트니크는 우스타셰를 증오했지만 이탈리아와 싸우는 것을 꺼렸고, 1941년 7월과 8월 초에 이미 리카 출신 세르비아 정치인 스테보 라제노비치를 통해 이탈리아 제6군단(사령관 렌조 달마초 장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특히 체트니크 ''보이보다''("지도자")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비르차닌과 도로슬라브 예브제비치는 이탈리아에 호의적이었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에 대한 이탈리아 점령이 우스타셰 국가의 영향력에 해로울 것이라고 믿었다. 협력의 또 다른 이유는 우스타셰와 발리 콤베타르로부터 세르비아인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유고슬라비아의 이탈리아 점령군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체트니크는 이탈리아가 점령지에서 세르비아인을 이용하여 크로아티아인을 속이는 전통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추축국이 승리할 경우 이탈리아가 리카, 북부 달마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인을 우대하고 이 지역에 이탈리아 보호령 하의 세르비아 자치 정부가 세워질 것이라고 믿었다.[14] 이탈리아(특히 달마초 장군)는 이러한 접근 방식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고, 먼저 체트니크와의 교전을 피하고, 파르티잔에 대항하는 데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그들은 이 전략이 자신들에게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2년 1월 11일 이탈리아 제2군 대표인 안젤로 데 마테이스 대위와 보스니아 남동부의 체트니크 대표인 무티미르 페트코비치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나중에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보스니아 수석 대표인 보슈코 토도로비치 소령이 서명했다. 협정의 다른 조항 중 이탈리아는 무기와 물자로 체트니크 부대를 지원하고, 축국 강제 수용소(야세노바츠, 라브 등)에서 "추천된 개인"의 석방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체트니크와 이탈리아의 주요 관심사는 파르티잔이 이끄는 저항 세력과 싸우는 데 서로를 돕는 것이었다.
1942년 몇 달 동안, 이탈리아 제2군 사령관인 마리오 로아타 장군은 체트니크, 우스타셰, 파르티잔과의 관계에 대한 ''Linea di condotta''("정책 지침")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에 따라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장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이탈리아 정책의 개요를 설명했다. (괴뢰) 우스타셰와의 모든 협상은 피해야 하지만 체트니크와의 접촉은 "권장"되었다. 파르티잔에 관해서는 "결연한 투쟁"이었다. 이는 로아타 장군이 체트니크에 대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1942년 4월 체트니크와 이탈리아군은 크닌 주변에서 파르티잔과 전투에서 협력했다.[15]
그는 이탈리아 육군 참모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의 정책의 네 가지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1942년과 1943년 동안, 유고슬라비아 점령 지역의 이탈리아 통제 지역에 있는 압도적인 비율의 체트니크 부대는 반공 자원 민병대(''Milizia volontaria anti comunista'', MVAC)의 형태로 이탈리아의 보조 부대로 조직되었다. 당시 대령이자 로아타의 참모장이었던 자코모 자누시 장군에 따르면, 크로아티아 독립국 이탈리아 점령 지역에만 19,000~20,000명의 체트니크가 MVAC에 있었다. 체트니크는 수천 정의 소총, 수류탄, 박격포 및 포병을 광범위하게 공급받았다.
체트니크와 이탈리아 간의 충성은 리카와 달마티아 지역의 세르비아인을 우스타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이탈리아군은 세르비아 민간인에게 마을을 보호할 무기를 제공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탈출하는 수천 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을 수용했다. 주이치는 이러한 사건을 충성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했고, 1943년 2월 미하일로비치의 명령에 따라 이러한 충성을 깨뜨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주이치는 거부하고 휴전의 중단은 수만 명의 세르비아 민간인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장교들은 이 협력 체트니크 부대에 대한 궁극적인 통제권이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손에 남아 있음을 주목하고, 변화하는 전략적 상황에 비추어 이러한 군대의 적대적인 재지향 가능성을 고려했다. 이 부대의 사령관은 트리푸노비치-비르차닌이었으며, 그는 1941년 10월 이탈리아가 병합한 스플리트에 도착하여 1942년 봄 미하일로비치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 카시빌레 휴전이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크로아티아 독립국 이탈리아 통제 지역의 모든 체트니크 분견대는 한 번 이상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와 협력했다. 이러한 협력은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체트니크 군대는 이탈리아의 철수 후 파르티잔이 해방한 해안 도시에서 파르티잔을 몰아내기 위해 독일 점령을 지원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연합군이 희망했던 대로 달마티아에 상륙하지 않자, 이 체트니크 분견대는 독일군과 파르티잔 사이에서 갇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독일군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체트니크 집단은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우스타샤와 근본적으로 의견이 달랐지만, 그들은 파르티잔에서 공동의 적을 발견했고, 이것이 NDH의 우스타샤 당국과 보스니아의 체트니크 부대 간의 협력이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므르코니치 그라드 지역에서 에밀 라타이 소령과 체트니크 조직 지휘관인 우로시 드레노비치 사이에 1942년 4월 27일에 코자라 파르티잔 대대와의 충돌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은 후 협정이 체결되었다. 계약 당사자는 파르티잔에 맞서 공동 투쟁을 하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세르비아 마을은 "공산주의자, 소위 파르티잔의 공격"으로부터 체트니크와 함께 NDH 당국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16][17] 1942년 5월 13일 르바스 강과 사나 강 사이의 체트니크 지휘관은 적대 행위 중단에 대해 NDH 당국에 서면 자백서를 제출했고 파르티잔과의 싸움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틀 후 바냐 루카에서 르바스와 사나 사이의 지역에서 체트니크에 대한 적대 행위 중단과 국방군 부대의 철수에 대한 협정이 페타르 즈보즈디치와 체트니크 지휘관 라자르 테사노비치(체트니크 부대 "오빌리치") 및 크베트코 알렉시치(체트니크 부대 "므르코니치") 사이에 체결되었다.[16] 여러 협약 체결 후, 코토르 바로쉬 근처에서 열린 회의에서 체트니크 지휘관들은 다른 체트니크 부대도 이러한 협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협약이 체트니크 운동에 큰 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NDH 당국은 1942년 5월과 6월 동안 일부 동부 보스니아 체트니크 부대와도 이와 같은 협약을 체결했다. 오즈렌 체트니크 부대의 사령관인 츠비예틴 토디치는 NDH 당국 대표와 합의를 위해 회의를 요청했다. 안테 파벨리치는 이러한 협상을 위해 사람을 임명했고,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즉,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무기를 넘겨주고 NDH 당국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모든 세르비아 마을은 파르티잔과 싸울 무기를 받게 될 것이며, 국가 고용을 받게 될 것이며, 파르티잔과의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낸 체트니크는 훈장과 포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오즈렌 및 트레바바 체트니크 부대는 1942년 5월 28일에 이 협정에 서명했다. 1942년 5월 30일 마예비차 체트니크 부대는 이 협정의 중요한 새로운 점인 오즈렌 및 트레바바 지역의 체트니크에게 "자치 권한", 즉 체트니크 지휘관이 행사할 자치권을 부여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거의 동일한 협정이 1942년 6월 14일에 제니차 체트니크 부대와 체결되었다. 이후 리카와 북부 달마티아 지역의 체트니크 부대와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었다.[16][15]
다음 3주 동안 보스니아 지역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 3개의 추가 협정이 체결되었다(그 안에 있는 체트니크 부대 포함). 이 협약의 조항에 따라 체트니크는 우스타샤 국가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우스타샤는 이 지역에 정규 행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 1944년 2월 26일 에드문트 글라이제-호르스테나우의 보고서에 따르면, 공식 NDH 데이터를 바탕으로 NDH 영토에는 35개의 체트니크 그룹이 존재했으며, 그 중 19개 그룹(17,500명)이 크로아티아 및 독일 당국과 협력했고, 반군 체트니크는 16개 그룹(5,800명)이 존재했다. 체트니크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주권을 인정했고 그 안에서 합법적인 운동이 되었다. 주요 조항인 협정 제5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다.

군사적, 정치적 편의성이 이러한 협정을 가장 잘 설명하며, 역사가 엔버 레지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스타샤-체트니크 협정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가적 이익의 합류나 상호 수용 및 존중에 대한 욕구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각 측면이 파르티잔의 진격을 방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18] 이 협정은 우스타샤에 의한 세르비아인에 대한 범죄나 체트니크에 의한 무슬림 및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범죄를 막지 못했다. 그들은 상대방이 통제하는 지역과 협정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 지속되었다.
필요한 탄약과 물품은 우스타샤 군에 의해 체트니크에게 공급되었다. 그러한 작전에서 부상당한 체트니크는 NDH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것이며, 작전 중 사망한 체트니크의 고아와 미망인은 우스타샤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을 것이다. 체트니크 지휘관이 특별히 추천한 사람들은 우스타샤 강제 수용소에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협정은 독일-이탈리아 경계선 동쪽 보스니아에 있는 대부분의 체트니크 군대를 포괄했으며, 전쟁의 대부분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크로아티아 군대는 즉시 독일 군사 점령에 종속되었으므로, 크로아티아 군대와의 협력은 사실상 독일과의 간접적인 협력이었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지휘하에 있는 디나라 사단이 NDH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미하일로비치의 지휘하에 있는 체트니크는 NDH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하일로비치는 NDH를 적으로 언급했고 세르비아 국경 지역에서 우스타샤 군대와 교전했다. 미하일로비치가 우스타샤에 대한 적대감은 세르비아인 및 기타 소수 집단에 대한 NDH의 지속적인 집단 학살 정책 때문이었다.
1945년 3월 파르티잔에서 도망치던 중 파블레 듀리시치는 우스타샤 및 우스타샤가 지원하는 몬테네그로 분리주의자 세쿨라 드를리에비치와 협정을 맺어 그의 체트니크가 NDH를 통과할 수 있도록 안전 통행을 제공했다. 우스타샤는 이에 동의했지만, 체트니크가 합의된 철수 경로를 따르지 않자, 우스타샤는 리에브체 들판 전투에서 체트니크를 공격한 후, 체포된 지휘관을 살해했고, 나머지 체트니크는 NDH 군대와 그들의 군사적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로 철수를 계속했다.
우스타샤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NDH 군대에 모치로 듀이치와 그의 디나라 사단 체트니크에게 "질서정연하고 방해받지 않는 통행"을 명령했고, 듀이치와 그의 부대는 NDH를 가로질러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1945년 4월, 안테 파벨리치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본부에서 두 명의 장군을 받아 티토의 공산주의자에 맞서 공동 투쟁을 벌이기로 그들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1945년 5월 초 체트니크 군대는 우스타샤가 점령한 자그레브를 통해 철수했고, 이들 중 다수는 블라이부르크 귀환의 일환으로 체포된 우스타샤와 함께 파르티잔에 의해 나중에 살해되었다.
추축국과의 주요 체트니크 협력은 "네레트바 전투"에서 발생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역사학에서는 "제4차 적 공세"로 알려진 "백색 작전"의 최종 단계였다. 1942년, 파르티잔 부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서 광대한 해방 지구를 건설하면서 세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점령군과의 협력의 일부로, 체트니크 부대 또한 세력을 키웠지만, 파르티잔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며, 해방 지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추축국의 군수 지원이 필요했다. 변화하는 전략적 상황을 고려하여, 히틀러와 독일 고위 지휘부는 체트니크를 무장 해제하고 파르티잔을 완전히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히틀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점령 유지를 위한 동맹군으로서 체트니크를 잃을 여유가 없다는 정당성을 내세우며, 결국 체트니크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그리하여 그러한 행동 방침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게릴라전에 훈련되고 적응된 조직인 체트니크를 만났다. 1941년 5월 초부터 독일군과 체트니크 사이에 충돌이 있었지만, 미하일로비치는 저항을 점령군에 대항할 때가 되면 일어설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유럽 저항 운동에 대한 영국의 정책은 그들의 조기 파멸로 이어질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었고, 이 정책은 처음에는 미하일로비치의 운동이 운영되는 기초 개념과 일치했다. 독일과 협력한 체트니크와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미하일로비치는 처음에는 이 운동을 "라브나 고라 운동"이라고 불렀다.
1942년 봄부터 독일은 우스타셰와 체트니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상당 부분에서 수립한 협력 협약을 선호했다. 우스타셰 군대는 독일 군사 점령에 의해 지원을 받았고 직접적인 종속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두 세력 간의 협력은 간접적인 독일-체트니크 협력을 구성했다. 이 모든 것은 주로 그 협약이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이루어졌고, 독일 전쟁 물품에 중요한 지역의 평화에 기여했으며, 추가적인 독일 점령군에 대한 필요성을 줄였기 때문에 독일에게 유리했다(체트니크가 점령을 지원했기 때문).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독일 제114 예거 사단은 심지어 일시적으로 해방된 아드리아 해안을 파르티잔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진격하는 과정에서 체트니크 분견대를 편입시키기도 했다. 1943년 11월 19일 제2 기갑군에 보낸 제15 군단의 독일-체트니크 협력 보고서에는 체트니크가 거의 1년 동안 "독일군에 의존"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독일-체트니크 협력은 이탈리아 항복 이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이는 독일이 이전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을 감시해야 했고 유고슬라비아 전체에서 파르티잔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체트니크에 대한 정책을 상당히 완화하고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모든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을 동원했다. 제2 기갑군은 이러한 발전을 감독했는데, 제15 군단은 이제 공식적으로 체트니크 부대를 활용하고 "지역 동맹"을 맺는 것이 허용되었다. 독일 점령군과 체트니크 간의 첫 번째 공식적이고 직접적인 협정은 1943년 10월 초 서부 보스니아와 리카에서 활동하는 마네 로크비치 휘하의 체트니크 분견대와 독일이 지휘하는 제373 (크로아티아) 보병 사단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독일은 이후 점령된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시베니크, 메트코비치에서 경계 임무에 체트니크 부대를 사용하기도 했다.
우스타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군대의 대량 탈영이 파르티잔으로 이어져 신뢰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NDH 부대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독일 점령군은 크로아티아 군의 친파르티잔 성향 때문에 실제로 체트니
4. 4. 연합국의 지원 중단과 몰락
1942년 4월, 보스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체트니크에 대항하기 위해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1,200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2개의 충격 반체트니크 대대(그르메치 및 코자라)를 설립했다.[12][13] 전쟁 중 연합군은 발칸 반도 침공을 고려했고, 유고슬라비아 저항 운동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두 세력(체트니크와 파르티잔) 중 어느 쪽이 독일과 싸우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여러 특수 작전 집행부(SOE) 요원들이 유고슬라비아로 파견되어 현장 상황을 파악했다. 한편,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파르티잔을 제거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고, 이때 체트니크는 독일 작전을 지원하기로 하고 보급품과 탄약을 제공받았다.네레트바 전투로 알려진 ''백색 작전''에서 체트니크는 20,000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참여하여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포위를 지원했다. 그러나 티토의 파르티잔은 포위를 뚫고 강을 건너 체트니크와 교전하여 승리했고, 이후 체트니크는 드리나강 서쪽 지역에서 거의 무력화되었다. 파르티잔은 계속 전진하여 수체스카 전투에서 다시 독일군을 따돌렸다. 그동안 연합군은 발칸 반도 침공 계획을 중단하고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는 대신 파르티잔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43년 테헤란 회담과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과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영향력을 절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서방 연합국의 정보 임무는 유격대와 체트니크 양측에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했다. 영국 임무 책임자인 윌리엄 베일리 대령은 미하일로비치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5] 독일군은 검은 작전을 수행 중이었고, F.W.D. 디킨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의 보고서는 유격대가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용감하고 공격적이며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과 독일 제1산악사단 전체가 체트니크 통제 지역을 통과하는 철도를 통해 이동했다는 점을 담고 있었다. 영국 정보 해독은 독일 통신에서 체트니크의 소극적인 태도를 확인했다.
1943년 9월, 영국은 체트니크와 유격대에 동등한 지원을 지시했지만, 12월까지 체트니크가 독일군 파괴 명령을 거부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영국은 이탈리아 및 독일과의 협력을 중단하지 않고 싸우기를 거부하는 체트니크 대신 유격대로 지원을 옮겼다.
테헤란 회담 이후, 유격대는 연합국으로부터 정당한 민족 해방군으로 인정받았고, 발칸 공군이 설립되어 유격대에 대한 보급 및 전술 공중 지원이 늘어났다. 1944년 2월,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모라바강과 이바르강을 건너는 주요 다리를 파괴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영국은 연락 장교를 철수하고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영국이 지원을 중단했지만, 미국은 반공산주의 체트니크에 대한 영국의 포기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지원이 유격대로 이동함에 따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연합국을 돕겠다는 의지를 보여 지원 재개를 시도했다. 1944년 중반 할리아드 작전을 통해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417명의 미국 공군 조종사를 구조했다. 미하일로비치는 이후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으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다.

1944년 8월 14일, 유격대와 망명 정부 간의 티토-슈바시치 협정이 비스 섬에서 체결되었다. 이 문서는 모든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세르비아인에게 유격대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다.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니크는 왕립 정부의 협정을 거부하고 유격대와 계속 교전했다. 1944년 8월 29일, 페테르 2세 국왕은 미하일로비치를 유고슬라비아군 참모총장에서 해임하고 9월 12일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임명했다. 1944년 10월 6일, 네디치 정부는 세르비아 국가 경비대를 미하일로비치의 지휘 하에 넘겼지만, 협력은 불가능했고 1945년 1월 보스니아에서 분리되었다.
1944년 9월, 소련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점령하고 유고슬라비아 국경에 배치되었다. 체트니크는 전쟁 기간 내내 세르비아인들의 친러시아적, 범슬라브적 공감을 이용하려 했다. 1944년 9월 10일, 약 150명의 체트니크 사절단이 크라이오바에서 소련군과 접촉했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소련의 중재를 통한 내전 중단, 연합국의 감독하에 자유 선거 실시, 전쟁 관련 재판 연기였다. 그러나 사절단은 10월 1일에 소련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트니크는 파르티잔과 싸우면서 동시에 소련의 동맹군으로 싸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독일군과 대립하면서 소련과 약간의 지역적 협력을 하기도 했다. 10월 중순, 케세로비치 중령의 부대는 소련군과 만나 크루셰바츠 마을을 점령했고, 소련은 케세로비치에게 마을을 맡겼다. 그러나 케세로비치는 곧 소련이 파르티잔과만 대화하고 체트니크를 무장 해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라코비치 대위의 부대도 차차크 점령에 참여하여 ''러시아 보호 군단 세르비아'' 병사 339명을 포로로 잡았지만, 티토의 항의로 케세로비치와 라코비치의 협력은 끝났다.
1945년 4월과 5월,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장악하면서 많은 체트니크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로 후퇴했다. 많은 체트니크가 체포되거나 블라이부르크 송환 과정에서 살해되었고, 일부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미하일로비치는 체포되어 1946년 3월 베오그라드로 이송, 재판 후 7월에 처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모든 탈영병에게 일반 사면을 선포했다.[26]
5. 전쟁 범죄
체트니크는 전쟁 기간 동안 점령군에 대해 소극적이었고, 점차 추축국과 협력하여 유고슬라비아 저항 세력으로서의 국제적 인정을 잃었다.[1] 초기 협력 후, 파르티잔과 체트니크는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체트니크는 파르티잔을 주적으로 삼고 추축국과 협력하여 물류 지원을 받았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체트니크의 주요 적이 "파르티잔, 우스타샤, 무슬림, 크로아티아인, 마지막으로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이라고 인정했다.[2]
체트니크군은 분쟁 초기 추축국 점령에 대항하는 봉기에 참여했으나, 파르티잔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파르티잔을 공격하고 추축국과는 소규모 충돌만 했다. 독일군 공격은 강력한 보복을 초래했고, 체트니크는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협상하기 시작했다. 파르티잔 파괴라는 공동 목표는 협상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러한 협력은 체트니크가 참여한 파르티잔 "우지체 공화국" 작전에서 처음 나타났다.[3]
체트니크는 우스타샤와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지만, 파르티잔이라는 공동의 적을 발견했고, 이는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의 우스타샤 당국과 보스니아 체트니크 부대 간의 협력으로 이어졌다. 1942년 4월 27일 므르코니치 그라드 지역에서 우로시 드레노비치가 코자라 파르티잔 대대와의 충돌에서 패배한 후 협정이 체결되었다. 양측은 파르티잔에 맞서 공동 투쟁을 하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세르비아 마을은 NDH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16][17] 1942년 5월 13일 르바스 강과 사나 강 사이의 체트니크 지휘관은 NDH 당국에 적대 행위 중단을 자백하고 파르티잔과의 싸움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밝혔다.
이틀 후 바냐 루카에서 르바스와 사나 사이 지역에서 체트니크에 대한 적대 행위 중단과 국방군 부대 철수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16] 여러 협약 체결 후, 코토르 바로쉬 근처 회의에서 체트니크 지휘관들은 이러한 협약이 체트니크 운동에 큰 이점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NDH 당국은 1942년 5월과 6월 동안 일부 동부 보스니아 체트니크 부대와도 협약을 체결했다. 오즈렌 체트니크 부대 사령관 츠비예틴 토디치는 NDH 당국 대표와 회의를 요청했고, 안테 파벨리치는 협상 조건을 제시했다. 오즈렌 및 트레바바 체트니크 부대는 1942년 5월 28일에 협정에 서명했다. 1942년 5월 30일 마예비차 체트니크 부대는 오즈렌 및 트레바바 지역 체트니크에게 "자치 권한"을 부여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거의 동일한 협정이 1942년 6월 14일에 제니차 체트니크 부대와 체결되었다. 이후 리카와 북부 달마티아 지역 체트니크 부대와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었다.[16][15]
다음 3주 동안 보스니아 지역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 3개의 추가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체트니크는 우스타샤 국가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우스타샤는 이 지역에 정규 행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 1944년 2월 26일 보고서에 따르면, NDH 영토에는 35개의 체트니크 그룹이 존재했으며, 그 중 19개 그룹(17,500명)이 크로아티아 및 독일 당국과 협력했고, 반군 체트니크는 16개 그룹(5,800명)이었다.[4] 체트니크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주권을 인정했고 그 안에서 합법적인 운동이 되었다.[5] 협정 제5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다.
> 파르티잔 무장 세력으로부터 위험이 있는 한, 체트니크 부대는 파르티잔을 상대로 싸우고 파괴하는 데 크로아티아 군대와 자발적으로 협력하며, 이러한 작전에서 크로아티아 군대의 전반적인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 체트니크 부대는 자체적으로 파르티잔에 대한 작전에 참여할 수 있지만, 크로아티아 군 지휘관에게 제때 보고해야 한다.
군사적, 정치적 편의성이 이러한 협정을 설명하며, 역사가 엔버 레지치는 "우스타샤-체트니크 협정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가적 이익의 합류나 상호 수용 및 존중에 대한 욕구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각 측면이 파르티잔의 진격을 방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다.[18][7] 이 협정은 우스타샤에 의한 세르비아인에 대한 범죄나 체트니크에 의한 무슬림 및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범죄를 막지 못했다.[8]
탄약과 물품은 우스타샤 군에 의해 체트니크에게 공급되었다. 부상당한 체트니크는 NDH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작전 중 사망한 체트니크의 고아와 미망인은 우스타샤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체트니크 지휘관이 추천한 사람들은 우스타샤 강제 수용소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 협정은 독일-이탈리아 경계선 동쪽 보스니아에 있는 대부분의 체트니크 군대를 포괄했으며, 전쟁의 대부분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크로아티아 군대는 독일 군사 점령에 종속되었으므로, 크로아티아 군대와의 협력은 사실상 독일과의 간접적인 협력이었다.[9][10]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지휘하에 있는 디나라 사단이 NDH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미하일로비치의 지휘하에 있는 체트니크는 NDH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다. 미하일로비치가 우스타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이유는 세르비아인 및 기타 소수 집단에 대한 NDH의 지속적인 집단 학살 정책 때문이었다.[11][12]
1945년 3월 파르티잔에서 도망치던 중 파블레 듀리시치는 우스타샤 및 우스타샤가 지원하는 몬테네그로 분리주의자 세쿨라 드를리에비치와 협정을 맺어 체트니크가 NDH를 통과할 수 있도록 안전 통행을 제공했다.[13] 우스타샤는 이에 동의했지만, 체트니크가 합의된 철수 경로를 따르지 않자, 우스타샤는 리에브체 들판 전투에서 체트니크를 공격한 후, 체포된 지휘관을 살해했고, 나머지 체트니크는 NDH 군대와 그들의 군사적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로 철수를 계속했다.[14]
우스타샤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NDH 군대에 모치로 듀이치와 그의 디나라 사단 체트니크에게 "질서정연하고 방해받지 않는 통행"을 명령했고,[15] 듀이치와 그의 부대는 NDH를 가로질러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1945년 4월, 안테 파벨리치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본부에서 두 명의 장군을 받아 티토의 공산주의자에 맞서 공동 투쟁을 벌이기로 그들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1945년 5월 초 체트니크 군대는 우스타샤가 점령한 자그레브를 통해 철수했고, 이들 중 다수는 블라이부르크 귀환의 일환으로 체포된 우스타샤와 함께 파르티잔에 의해 나중에 살해되었다.
체트니크의 이념은 유고슬라비아 국경 내에 세르비아인이 발견되는 모든 영토에서 창설될 대세르비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 목표는 오랫동안 대세르비아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추축국 점령 기간 동안, 이러한 영토를 "민족 청소"하려는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주로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우스타샤에 의한 세르비아인 학살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졌다.[16] 그러나 가장 큰 체트니크 학살은 동부 보스니아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상당한 우스타샤 작전보다 먼저 일어났다.[17] 파블로비치에 따르면, 체트니크 조직의 지역 사령관들이 테러 전술을 저질렀다. 미하일로비치는 민간인에 대한 이러한 민족 청소 행위에 반대했지만, 그는 지역 사령관에 대한 지휘력 부족과 체트니크 지휘 구조 내의 기본적인 통신 수단으로 인해 이러한 테러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1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테러 전술의 사용은 이 지역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양한 억압된 집단이 자유를 추구하면서 유고슬라비아에서 분쟁에 참여한 모든 당사자가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19] 점령 초기 단계에서,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 박해를 돕기 위해 많은 무슬림을 모집했으며, 그러한 행동은 가톨릭교도, 정교회, 무슬림 간의 폭력과 보복의 순환을 시작하여 각자가 통제하는 영토에서 다른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했다.[20]
특히, 우스타샤 이데올로기는 NDH 내의 대규모 세르비아인 소수 민족에 대해 우려했으며, 1941년 5월에 광범위한 테러 행위를 시작했다. 두 달 후인 7월에 독일군은 이러한 행동의 잔혹성에 항의했다. 네베시녜의 경우와 같이 보복이 뒤따랐는데, 세르비아 농민들이 박해에 항의하여 봉기를 일으켜 우스타샤 민병대를 몰아냈지만, 그 후 보복에 참여하여 우스타샤와 연관된 수백 명의 무슬림과 일부 크로아티아인을 살해했다.[21]
1941년 12월 20일, 몬테네그로의 새로 임명된 사령관인 조르지에 라시치 소령과 파블레 듀리시치 대위에게 보낸 지침은, 무엇보다도, 대세르비아를 창설하기 위해 세르비아인이 아닌 인구를 청소하는 것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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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왕 페타르 2세 폐하의 치하에서 우리 전체 국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
2.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리엠, 바나트, 바치카를 포함하는 민족적으로 순수한 대세르비아와 그 안의 대유고슬라비아의 창설;
3.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아직 해방되지 않은 슬로베니아 영토(트리에스테, 고리치아, 이스트라, 슬로베니아 카린티아)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와 알바니아 북부 (슈코더)의 유고슬라비아 편입을 위한 투쟁;
4. 모든 소수 민족 및 비민족적 요소를 국가 영토에서 청소;
5. 산자크에서 무슬림 인구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무슬림 및 크로아티아 인구를 청소함으로써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 그리고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 사이에 인접한 국경을 창설.
지침의 진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4] 일부는 지침이 미하일로비치에게서 왔다고 주장했다.[25][26][27] 다른 사람들은 원본이 없으며 듀리시치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위조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28][29] 미하일로비치의 본부는 제2사라예보 체트니크 여단 사령관에게 목표를 명확히 하는 추가 지침을 보냈다. "전쟁 후 또는 적절한 시기가 되면,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완수할 것이며 세르비아 땅에는 세르비아인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모든 사람에게 명확히 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 백성에게 설명하고 그들이 이것을 우선순위로 삼도록 하라. 이것을 서면으로 쓰거나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터키인[무슬림]도 그것에 대해 듣게 될 것이고 이것은 입소문으로 퍼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30]
체트니크는 점령한 마을에서 무슬림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1941년 늦가을, 이탈리아군은 보스니아 남동부의 비셰그라드, 고라즈데, 포차와 주변 지역을 체트니크에게 넘겨 괴뢰 행정부로 운영하도록 했고, NDH군은 이탈리아군에 의해 그곳에서 철수해야 했다.[31] 1941년 11월 29일, 체트니크가 고라즈데를 장악한 후, 그들은 홈 가드 포로와 NDH 관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역 무슬림 민간인에 대한 체계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1941년 12월 5일, 체트니크는 이탈리아로부터 포차 마을을 받았고, 약 500명의 무슬림을 학살했다.[32] 1942년 8월, 자하리예 오스토지치의 지휘하에 있는 부대는 차이니체와 포차 지역에서 최소 2,000명의 무슬림을 살해했다.[19] 1942년 봄부터 리카, 북부 달마티아, 고르스키 코타르 및 코르둔에서 체트니크와 이탈리아군의 특정 군사 작전에서 살인이 더 빈번해졌고 마을은 약탈되고 불태워졌다. 가장 많은 희생자는 NOP 활동가와 그 가족이었고, 특히 세르비아인들이 위협을 받았다. 모음칠로 주지치는 1942년 리카와 서부 보스니아의 인구를 위한 선언에서 모든 체트니크 부대에 ''"모든 마을과 도시를 점령하고 모든 권력을 그들의 손에 넣으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이 크로아티아인이든 세르비아인이든 상관없이 저항하면 ''"모든 정착지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20] 포차 지역에 대한 추가적인 무슬림 학살은 1942년 8월에 발생했다. 총 2,000명 이상이 포차에서 살해되었다.[33]
1월 초, 체트니크는 스레브레니차에 진입하여 마을과 인근 마을에서 약 천 명의 무슬림 민간인을 살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체트니크는 비셰그라드로 갔고, 그곳에서 수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살은 그 지역에서 다음 달에도 계속되었다.[34] 제파 마을에서만 1941년 말에 약 300명이 살해되었다. 1월 초, 체트니크는 체레비치에서 54명의 무슬림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3월 3일, 체트니크 부대는 42명의 무슬림 마을 사람들을 드라칸에서 불태워 죽였다.[35]
1943년 1월 초와 다시 2월 초에 몬테네그린 체트니크 부대는 무슬림에 대한 "청소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6] 1943년 1월 10일, 이러한 작전을 담당한 체트니크 장교 파블레 듀리시치는 최고 사령부 참모장인 미하일로비치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의 보고서에는 이러한 "청소 작전"의 결과가 포함되어 있으며, "33개의 무슬림 마을이 불탔고, 400명의 무슬림 전사(이탈리아가 지원하는 무슬림 자위 민병대원)와 약 1,000명의 여성과 어린이가 살해되었고, 체트니크 사망자는 14명, 부상자는 26명"이었다.[37]
1943년 2월 13일 듀리시치가 보낸 또 다른 보고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체트니크는 약 1,200명의 무슬림 전사와 약 8,000명의 노인, 여성 및 어린이를 살해했다. 작전에서 체트니크의 손실은 22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했다."[38] 그는 덧붙여 "작전 중 성별과 연령에 관계없이 무슬림 주민 전체가 파괴되었다"고 말했다.[39] 1943년 1월과 2월 사이의 반무슬림 작전에서 사망한 총 인원은 10,000명으로 추정된다. 2월 작전이 시작될 때 이미 많은 무슬림이 도망쳐 대부분 사라예보로 갔기 때문에 사상자 수는 더 높았을 것이다.[40]
1943년 2월 24일 체트니크 최고 사령부의 성명에 따르면, 이는 무슬림의 공격적인 활동에 대한 대응 조치였지만, 모든 상황은 이러한 학살이 1941년 12월 20일 지침에 따라 저질러졌음을 보여준다.[41] 1943년 3월, 미하일로비치는 산자크에서의 체트니크 작전을 그의 성공 중 하나로 꼽으며, "작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마을의 무슬림을 제거했다"고 언급했다.[42]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행동은 규모가 작았지만 행동은 비슷했다.[43] 1941년 여름, 트루바르 학살, 보산스코 그라호보 학살 그리고 크르네우사 학살은 보스니아 남서부 보스니아 크라이나에서 에스닉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최초의 학살과 기타 공격이 발생한 곳이었다.[21] 1942년 8월과 9월, 페타르 바치비치의 지휘하에 있는 체트니크는 남부 달마티아의 후방 지역 전역에서 지역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행동을 강화했다. 8월 29일, 체트니크는 이탈리아의 반파르티잔 "알비아 작전"에 참여하여 자비오크블례, 비오코보 및 세티나 지역의 여러 마을에서 141명에서 160명의 크로아티아인을 살해했다.[22][44] 8월 말부터 1942년 9월 초까지 체트니크는 17개의 크로아티아 마을을 파괴하고 마카르스카 학살에서 마카르스카 마을 주변에서 900명의 크로아티아인을 살해했다.[45]
1942년 10월 초, 스플리트 근처의 가타 마을에서 약 100명이 살해되고 많은 집이 불탔으며, 이는 이 지역의 일부 도로 파괴에 대한 보복으로 이탈리아의 책임으로 수행되었다고 한다. 같은 10월, 페타르 바치비치와 도브로슬라브 예브제비치의 지휘하에 있는 부대는 프로조르 지역에서 이탈리아의 알파 작전에 참여하여 최소 500명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을 학살하고 수많은 마을을 불태웠다.[46] 바치비치는 "우리 체트니크는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를 살해했다... 17개의 마을이 불에 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제2군 사령관 마리오 로아타는 비전투 민간인에 대한 이러한 "대규모 학살"에 반대하며, 체트니크가 중단하지 않으면 이탈리아의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47]
크로아티아 역사가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는 처음에 체트니크에 의해 살해된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의 수를 65,000명(33,000명의 무슬림과 32,000명의 크로아티아인; 전투원과 민간인 모두)으로 추정했다. 1997년에 그는 이 수치를 47,000명(29,000명의 무슬림과 18,000명의 크로아티아인)으로 수정했다. 크로아티아 역사 연구소의 블라디미르 가이거에 따르면, 역사학자 즈드라브코 디즈다르는 체트니크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총 50,000명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대부분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한다.[23] 라메에 따르면, 체트니크는 300개의 마을과 작은 도시와 많은 모스크와 가톨릭 교회를 완전히 파괴했다.[48] 일부 역사가들은 이 기간 동안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에게 대량 학살이 저질러졌다고 주장한다.[49][50][24]
파르티잔 역시 테러 전술의 대상이었다. 세르비아 군사 사령관 영토에서, 네디치와 료티치의 부대에 대한 몇몇 테러 행위와 몬테네그로에서 분리주의자에 대한 행위를 제외하고, 테러는 이념적 근거로 파르티잔, 그 가족 및 동조자에게만 향했다. 목표는 파르티잔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체트니크는 제거될 개인의 목록을 만들었고, "블랙 트로이카"로 알려진 특별 부대가 이러한 테러 행위를 수행하도록 훈련받았다. 1942년 여름, 미하일로비치가 제공한 이름을 사용하여, 암살하거나 위협할 개별 네디치와 료티치 지지자의 목록이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BBC 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에서 방송되었다. 영국이 이를 발견하자, 방송은 중단되었지만, 이것이 체트니크가 암살을 계속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6.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체트니크의 부활

1989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집권한 후, 여러 체트니크 단체들이 다시 등장했다.[1] 그의 정권은 1990~1992년 체트니크 봉기를 일으키고 자금을 지원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2] 체트니크 이념은 세르비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의 각서의 영향을 받았다.[2] 19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 600주년을 기념하여 북부 달마티아의 세르비아인들(크닌, 오브로바츠, 벤코바츠)이 참여한 반 크로아티아 정부 시위가 처음으로 열렸다.[3]
같은 날, 모칠로 듀이치는 보이슬라프 셰셸에게 체트니크 보이보다 역할을 수행하라고 선언[4]하고, "거룩한 세르비아 땅에서 모든 크로아티아인, 알바니아인, 기타 외국인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하며, 세르비아가 "마지막 유대인,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으로부터 정화될 때만 돌아올 것이라고 밝혔다.[5] 세르비아 정교회는 라자르 공의 유물함 행렬을 시작했고, 여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즈보르니크-투즐라 교구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는 민족주의적 선언과 체트니크 도상과 함께 "새로운 코소보를 경험하는 세르비아 민족의 역사적 비극"이라는 감정이 있었다.[6]
그해 말, 보이슬라프 셰셸, 부크 드라슈코비치, 미르코 요비치는 체트니크 정당인 세르비아 민족 부흥(SNO)을 결성했다.[7][8] 1990년 3월, 드라슈코비치와 셰셸은 분열하여 세르비아 부흥 운동(SPO)이라는 별도의 체트니크 정당을 결성했다.[8][9] 1990년 6월 18일, 셰셸은 세르비아 체트니크 운동(SČP)을 조직했지만, 체트니크 정체성으로 인해 공식 등록이 허용되지 않았다. 1991년 2월 23일, 국가 급진당(NRS)과 합병하여 세르비아 급진당(SRS)을 설립하고 셰셸을 대표로, 토미슬라브 니콜리치를 부대표로 임명했다.[10] 이 당은 신파시즘을 지향하며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체트니크 정당이었다.[8][10][11] 1991년 7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충돌이 발생했고, 라브나 고라 산에서 전쟁을 옹호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에 대한 체트니크 학살을 회상하는 집회가 열렸다.[12] SPO는 라브나 고라에서 많은 집회를 열었다.[13][14]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 많은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원들이 스스로를 체트니크라고 칭했다.[1] SRS의 군사 조직은 "체트니크"로 알려졌으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세르비아 경찰로부터 무기를 받았다.[15] 셰셸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직접 무장시키고,[15]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 지원병을 모집하여 크로아티아에 5,000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최대 30,000명을 파견했다.[16] 셰셸은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 경찰의 보호를 벗어나 행동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15] 젤리코 라즈나토비치는 세르비아 의용군(SDG)이라는 체트니크 부대를 이끌었다.[1][17] 1990년 10월 11일에 설립된 SDG는 세르비아 내무부에 연결되어 있었고,[18] JNA의 지휘를 받았으며,[19] 밀로셰비치에게 직접 보고했다.[20] 이 부대는 1,000명에서 1,500명 사이의 병력을 보유했다.[16] 당시 세르비아 내무부 장관이었던 요비치는 SNO의 청년 조직을 백색 독수리로 조직했다.[18]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체트니크 운동을 기반으로 한 준군사 조직이었으며,[3] "무슬림과 불신자가 없는 기독교 정교회 세르비아"를 외쳤다.[21] 백색 독수리는 SRS와 연관되었지만 셰셸은 그 연관성을 부인했다.[22]
백색 독수리와 SDG는 유고슬라비아 방첩국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15] 1991년 9월-10월, 오즈렌 체트니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최고' 체트니크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설립되었다.[23] 밀란 루키치가 이끌던 체트니크 복수자라는 준군사 조직도 존재했으며,[24] 나중에 백색 독수리의 지휘를 맡았다.[22] 슬라브코 알렉시치가 이끄는 체트니크 부대는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지휘를 받았다. 1991년에는 크라이나 지역에서, 1992년에는 사라예보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다.[25]
밀로셰비치와 라도반 카라지치는 셰셸과 라즈나토비치의 체트니크 부대를 하위 부대로 사용하여 비세르비아인을 추방하고 민족 청소, 테러, 사기 저하를 통해 대세르비아를 형성하려 했다.[26] 셰셸과 라즈나토비치의 부대는 RAM 계획에서 "자율적인" 집단으로 활동하며 세르비아 외부의 세르비아인을 조직하고, 세르비아 민주당(SDS)의 통제를 통합하며, 무기와 탄약을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27][28] 그들의 노력은 "모든 세르비아인이 그들의 영토와 함께 같은 국가에서 살게 될"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29] 노엘 말콤은 "카라지치와 그의 정당이 취한 조치 - [세르비아] '자치 지역' 선언, 세르비아 인구의 무장, 사소한 지역 사건, 끊임없는 선전, 연방군의 '보호' 요청 - 은 크로아티아에서 수행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고 말했다.[29]
체트니크 부대는 대량 학살과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1] 1991년, SDG와 JNA는 에르두트 마을을 강제로 점령하고[30]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병합했다. 크로아티아인과 기타 비세르비아인들은 추방되거나 살해되었고, 세르비아인들이 그 지역에 재정착했다.[31] 1992년 4월 1일, SDG는 비옐리나를 공격하여 무슬림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32] 4월 4일, 체트니크 민병대는 사라예보 포격에서 JNA를 도왔다. 4월 6일, 체트니크와 JNA는 비옐리나, 포차, 브라투나츠, 비셰그라드를 공격했다. 4월 9일, SDG와 셰셸의 체트니크는 JNA와 세르비아 보안군의 특수 부대를 도와 즈보르니크를 점령하고 현지 무슬림 인구를 제거했다.[33]
라즈나토비치가 밀로셰비치, 라트코 믈라디치, 블라고예 아지치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계획이 진행 중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스니아인 인구에 대한 심리적 공격이 효과적이며 지속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34] 체트니크 부대는 부코바르와 스레브레니차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1] 백색 독수리는 보친, 비셰그라드, 포차, 셰베린, 슈트르프치에서 학살을 저질렀으며,[22] 산자크의 무슬림 인구를 테러했다.[35] 1992년 9월, 체트니크는 플레블랴의 산자크 무슬림들을 강제로 도망치게 하려 했고, 1993년 중반까지 100건 이상의 폭탄 테러, 납치, 추방, 총격 사건을 겪었다. SPO는 산자크의 자치 요구에 대응하여 무슬림들에게 추방을 위협했다.[36]
1993년 5월 15일, 셰셸은 18명의 체트니크 전사를 보이보다로 선포했으며, 그들의 인용문에는 비세르비아인들이 제거된 마을의 이름을 명시하고, 이후 정교회 사제가 그들을 축복했다.[37] 셰셸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살인 특공대가 체트니크 전통의 가장 나쁜 부분을 수행한 인물"로 묘사되었다.[38]
이후 SRS는 밀로셰비치의 정부 연립 파트너가 되었고, 1998년 듀이치는 셰셸에게 칭호를 수여한 것을 공개적으로 후회하며, "셰셸을 보이보다로 지명했을 때 나는 순진했다. 국민에게 나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했다.[39] 그는 "이름만 바꾼 공산주의자들과 밀로셰비치의 사회당과 공개적으로 협력하는 셰셸에 실망했다. ... 셰셸은 체트니크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명성을 더럽혔다"라고도 말했다.[40] 2000년, 라즈나토비치는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에서 기소되기 전에 암살되었다.[41] 2003년, 셰셸은 전쟁 범죄 혐의로 ICTY에 자수했으며,[42] 2016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3년에 셰셸에게 보이보다 칭호를 받고[43] "조국 방어에 대한 개인적인 용기"를 기리기 위해 체트니크 기사단을 수여받은[44] 토미슬라브 니콜리치는 SRS를 인수했다.[42] 그는 "평화적 수단"을 통해 대세르비아를 추구하겠다고 맹세했다.[45] 2008년, 밀란 루키치는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46]
영국 저널리스트 미샤 글레니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부활은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 몰락의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측면"'' 중 하나였으며, ''"용납할 수 없는 잔혹 행위를 저지르면서 양육되는 이 종은 발칸 사회에서 비합리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요약한다."''[31]라고 말했다.
7. 현대의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 금지되었다. 1945년 11월 29일, 국민 투표 결과에 따라 페타르 2세 국왕은 폐위되었고, 체트니크 지도자들은 국외로 도피하거나 체포되었다. 1946년 3월, 미하일로비치는 체포되어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7월 17일에 처형되었다.[28]
1945년 8월, 체트니크 사령관 드라구틴 케세로비치와 보이슬라브 루카체비치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47년, 주이치는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디나라 사단의 사령관으로서 대량 살인, 학살, 고문, 강간 등을 조직하고 실행했으며, 독일 및 이탈리아 점령자들과 협력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전쟁 중 1,500명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기소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주이치와 그의 부대는 세르비아 체트니크의 라브나 고라 운동 창설에 기여했다. 다른 체트니크 파벌들은 미국 중서부와 호주로 향했다.
데니스 베치로비치에 따르면,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는 대부분의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의 세르비아 정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일부 사제들이 체트니크 운동을 지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29][30]
1951년 1월,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체트니크 성향의 16명을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기소했다. 1952년에는 4~5개의 체트니크 "여단"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되었다. 전쟁 당시 체트니크에 대한 재판은 1957년까지 계속되었다.
1957년, 블라고예 요보비치는 안테 파벨리치 암살 계획을 실행했다. 파벨리치는 두 발의 총상을 입었지만, 부상으로 1959년 12월 28일에 사망했다.
1975년, 니콜라 카바야는 유고슬라비아 영사의 집에 폭탄 테러를 가했다. 그는 테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67년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대에 세르비아 역사가들은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복권을 추진했다.[32][33] 세르비아 역사가들은 체트니크를 나치에 맞서 싸운 자유 투사로 묘사하고, 이탈리아 및 독일과의 동맹 관계를 삭제했으며, 체트니크가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에게 저지른 범죄는 "침묵 속에 가려졌다."[34][35][36]
세르비아에서 체트니크 운동이 부활했다. 1990년대 초부터 세르비아 개혁당(SPO)은 매년 "라브나 고라 의회"를 개최해 왔다. 세르비아 급진당(SRS)은 대세르비아를 지지하고 체트니크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르비아 교과서는 1990년대부터 체트니크의 제2차 세계 대전 역할에 대한 역사적 수정주의를 담고 있다. 2002년 세르비아 교과서는 체트니크를 국가 애국자로 칭찬하고 파르티잔 운동을 최소화했다. 체트니크 협력이나 잔혹 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체트니크는 "세르비아 시민 저항의 핵심"이라고 불렸으며, 서방 연합국의 배신을 당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2004년 3월, 세르비아 국민 의회는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을 동등한 반파시스트로 간주하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켰다. 2009년, 세르비아 법원은 드라기샤 바시치를 복권했다. 2012년, 세르비아 헌법 재판소는 체트니크 참전 용사에게 연금 및 재활 권리를 유지하면서 수당 및 의료 지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2004년 법을 위헌으로 선언했다.
세르비아 농구 선수 밀란 구로비치는 미하일로비치의 문신 때문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터키에서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다. 세르비아 록 음악가 보라 조르제비치는 스스로를 체트니크라고 선언했지만, 이를 "제2차 세계 대전보다 훨씬 오래된 국가 운동"이라고 불렀다.
2002년, 베라네 근처에 "몬테네그로 라브나 고라" 기념 단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몬테네그로 정부는 이를 금지했다.
1996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릅스카 공화국은 옛 체트니크를 명시적으로 포함하는 퇴역 군인 권리법을 제정했다. 보스니아 전쟁 동안, 브르치코의 주요 간선 도로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장군대로"로 개명되었고, 1997년에는 미하일로비치의 동상이 세워졌다. 2000년, 이 거리는 "평화의 대로"로 개명되었고, 동상은 브르치코 외곽으로 옮겨졌다가 2013년 비셰그라드에서 공개되었다.
1998년, 스릅스카 공화국의 체트니크 라브나 고라 운동이 창설되었다. 이 단체는 14개 지역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민간 단체에 침투했다. 2001년, 이 단체는 트레비네와 바냐루카에서 파괴된 모스크의 초석 건립 기념식을 방해했다. 2005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 단체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다.
2007년, 스레브레니차 학살 12주년에 체트니크 복장을 한 남성들이 스레브레니차 거리를 행진했다. 2009년, 라브나 고라 체트니크 운동 회원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국기 훼손을 하고, 믈라디치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체트니크 노래를 불렀다.
크로아티아 독립 민주 세르비아당의 밀로라드 푸포바츠는 이 단체를 "파시스트 협력자"라고 묘사했다.
1941년4월 6일, 독일 국방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유고슬라비아에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라는 두 개의 저항 조직이 있었다.
체트니크는 군사 저항 조직이었으며, 대세르비아주의와 반공주의를 신봉했다.
체트니크는 평지에서의 정규전용 전략과 전술을 중시했으며, 내부 부패와 규율 부족으로 지역 주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들은 추축군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크로아티아 독립국 군대와 전투를 반복했다. 또한,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던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의 방침에 따라 파르티잔과도 적대했다.
체트니크는 1941년 11월부터 독일 및 세르비아 구국 정부와 협력 관계에 들어갔다.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쇠퇴했고, 1945년에는 연합국으로부터의 지원도 끊겼으며, 독일 항복 후 붕괴했다. 미하일로비치는 1946년3월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체트니크는 크로아티아인이나 무슬림인 등 민족적, 종교적으로 대립하는 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크로아티아인 희생자는 약 20만 7000명, 무슬림인 희생자는 약 8만 6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후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분쟁 당시 세르비아인 민병 중에는 체트니크를 칭하는 조직이 나타났으며, 세르비아 급진당과 같은 극우 정당이 체트니크의 후계임을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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