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스 프랑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클라스 프랑크는 1939년 뮌헨에서 나치 독일의 고위 관료였던 한스 프랑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나치 범죄 행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아버지의 삶을 다룬 책과 연극을 발표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언론 매체에 기고했고,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의 언론인 -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알려진 19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도덕, 종교, 형이상학 비판,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 등의 개념 제시로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의 언론인 -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가, 언론인, 혁명가이자 공산주의 사상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등을 통해 역사적 유물론, 계급 투쟁, 자본주의 비판 이론을 체계화하여 사회주의 운동과 현대 사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의 작가 - 레기오몬타누스
레기오몬타누스는 15세기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 빈 대학교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에서 연구하며 《알마게스트》 요약, 《삼각형에 대하여》 저술, 뉘른베르크 과학 출판 인쇄소 설립, 천문 관측 및 역법 개혁 기여, 천문표 제작 등으로 탐험가들에게 활용되었다. - 독일의 작가 - 막스 베버
막스 베버는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법학자로서, 종교사회학, 정치 체제 등을 연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분석했으며, 권위의 유형을 구분하고 사회과학 연구의 객관성과 가치 중립성을 강조했다. - 1939년 출생 - 달머스 라수라라
달머스 라수라라는 흑인 착취 영화와 TV 미니시리즈 《뿌리》에서 활약한 미국의 배우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출연했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1939년 출생 - 윤석남
윤석남은 자연과 여성을 주제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는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가로, 1985년 '시월모임' 결성을 통해 한국 여성주의 미술 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국제적인 무대에서도 활동하며 여성의 삶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니클라스 프랑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939년 3월 9일 |
출생지 | 뮌헨, 바이에른주, 독일 |
가족 | 한스 프랑크 (아버지) |
직업 | 작가 및 언론인 |
주요 작품 | 히틀러의 아이들 제3제국의 그림자 아래에서 |
2. 초기 생애 및 배경
니클라스 프랑크는 나치 독일의 고위 관료이자 폴란드 총독부 총독이었던 한스 프랑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전범 행위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처형(1946년)은 그의 유년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1][2][3]
195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니클라스는 독일 문학, 사회학, 역사를 공부하고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플레이보이'' 독일판과 주간지 ''슈테른'' 등에서 활동했으며, 이 시기 폴란드 노동운동 지도자 레흐 바웬사 등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수년에 걸쳐 아버지에 대한 그의 감정은 초기 당혹감에서 시작하여, 40년간의 탐색 과정 끝에 아버지의 삶에 대한 세부 사항들을 발견하면서 "불타는, 강박적인 증오"로 발전했다.
2. 1. 출생과 가족
프랑크는 1939년 3월 9일 뮌헨에서 한스 프랑크와 브리짓 헤르스트 사이에서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이름 | 출생 연도 | 사망 연도 | 비고 |
---|---|---|---|
시그리드 | 1927년 | ? | 남아프리카에서 사망 |
노먼 | 1928년 | 2010년 | |
브리짓 | 1935년 | 1981년 | |
미하엘 | 1937년 | 1990년 |
니클라스가 생후 약 8개월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 있는 총독부의 히틀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에서 한스 프랑크는 폴란드인을 노예화하는 나치 정책과 폴란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니클라스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형되었을 때(1946년 10월 16일) 그는 일곱 살이었다. 그 당시 그는 아버지의 믿음, 즉 자신이 전 가족 친구인 카를 라슈의 아들이라는 믿음 때문에 아버지에게 외면당했고,[1] 그의 유모 힐데와 더 가까웠다.[2]
아버지의 나중에 강제 수용소와 게토에 대한 입장과는 달리, 그의 자녀들은 비록 부모가 그들과 직접적으로 논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고립되지 않았다. 니클라스는 종종 유모 힐데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데려가졌다. 한 번은 니클라스와 그의 형 노먼의 재미를 위해 경비병들이 영양실조에 걸린 죄수들을 당나귀에 앉혔고, 당나귀는 그들을 뛰어넘어 땅에 던지도록 만들어졌다. 니클라스는 또한 슬픈 죄수는 "마녀"이며, 곧 "죽을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또 다른 때, 폴란드인 하인이 그을음으로 침대 시트를 더럽혔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수용소로 보낼 것이라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니클라스는 폴란드인과 친구가 되었고 울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그 남자를 꾸짖는 것을 멈추고 아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그 문제를 넘겼고, 전쟁 후 살아남은 폴란드인 남편과 그의 아내는 니클라스가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고 칭찬했다.[3]
그의 어머니는 1959년에 사망했다.
2. 2. 아버지 한스 프랑크
니클라스의 아버지 한스 프랑크는 나치 독일의 고위 관리였다. 니클라스가 태어난 지 약 8개월 후인 1939년 10월경, 한스 프랑크는 히틀러에 의해 독일 점령하 폴란드에 세워진 총독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을 맡으면서 그는 폴란드인을 노예화하는 나치 정책과 폴란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니클라스 가족은 한스 프랑크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살았다.한스 프랑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어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이때 니클라스는 일곱 살이었다. 니클라스는 아버지가 자신을 전 가족 친구였던 카를 라슈의 아들이라고 의심하여 외면당했다고 회고했다.[1][2]
2. 3. 유년 시절
프랑크는 1939년 3월 9일 뮌헨에서 한스 프랑크와 브리짓 헤르스트 사이에서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자매로는 시그리드(1927년~남아프리카에서 사망), 노먼(1928~2010), 브리짓(1935~1981), 미하엘(1937~1990)이 있었다. 니클라스가 태어난 지 약 8개월 후, 그의 아버지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총독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에서 아버지 한스 프랑크는 폴란드인을 노예화하는 나치 정책과 폴란드 유대인 학살을 실행하는 데 중요한 책임이 있었다.니클라스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10월 16일 처형되었는데, 이때 니클라스는 일곱 살이었다. 당시 니클라스는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했는데, 이는 아버지가 니클라스를 전 가족 친구였던 카를 라슈의 아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1] 그는 아버지보다 유모 힐데와 더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2]
아버지 한스 프랑크가 나중에 강제 수용소와 게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든 간에, 니클라스를 포함한 그의 자녀들은 유년 시절 이러한 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지 않았다. 부모가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주지는 않았지만, 니클라스는 유모 힐데를 따라 종종 강제 수용소에 가곤 했다. 한 번은 니클라스와 그의 형 노먼의 재미를 위해 경비병들이 영양실조에 걸린 유대인 죄수들을 당나귀에 태우고, 당나귀가 날뛰어 죄수들을 땅에 내동댕이치게 만드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슬퍼 보이는 죄수들을 가리켜 "마녀"이며 곧 "죽을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다른 일화로는, 폴란드인 하인이 실수로 침대 시트를 더럽히자 니클라스의 어머니는 그를 강제 수용소로 보내겠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니클라스는 그 폴란드인 하인과 친구였기에 울음을 터뜨렸고, 어머니는 하인을 꾸짖는 것을 멈추고 아들을 달랬다. 결국 어머니는 문제를 더 이상 삼지 않았고, 전쟁 후 살아남은 그 폴란드인과 그의 아내는 니클라스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칭찬했다.[3]
3. 언론 및 저술 활동
프랑크는 젊은 시절 작가로 활동하여 1967년 영화 ''살인의 정도''와 1973년 ARD의 범죄 드라마 시리즈 ''타트오르트''의 에피소드 ''Weißblaue Turnschuhe''의 각본을 썼으나, 이를 통해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가족사를 다룬 논쟁적인 저술 활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아버지 한스 프랑크의 나치 전범 행적을 강하게 비판한 책 ''Der Vater: Eine Abrechnungde''을 출간하여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어머니 브리짓 프랑크를 다룬 ''Meine deutsche Mutterde''(2005)와 형 노먼 프랑크와의 관계 및 기억을 다룬 ''Bruder Norman!de''(2013)을 차례로 출간하며 가족사를 주제로 한 저술을 이어갔다.[5] 또한 이스라엘 작가 조슈아 소볼과 함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의 연극 ''Der Vaterde''를 집필하여 1995년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하기도 했다.[4]
3. 1. 아버지 비판 저서 출간
1987년, 프랑크는 아버지 한스 프랑크에 관한 책 Der Vater: Eine Abrechnung|데어 파터: 아이네 아프레히눙de("아버지: 결산")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91년 In the Shadow of the Reich|인 더 섀도 오브 더 라이히영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독일 잡지 슈테른에 연재되었는데, 저자가 아버지를 "히틀러 광신도의 구더기 구멍"이라고 부르고 그의 사형 직전 회개를 의심하는 등, 전례 없이 신랄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기억을 완전히 파괴하려 시도하여 독일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프랑크는 이스라엘 작가 조슈아 소볼과 함께 아버지의 범죄를 다룬 연극 Der Vater|데어 파터de("아버지")를 집필했다. 이 연극은 비너 페스트보헨(빈 페스티벌)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으며, 1995년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파울루스 맹커의 연출로 처음 공연되었다. 연극은 아들이 아버지 한스의 부패한 시체를 발굴하여 그의 과거 행위에 대해 답변하도록 되살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4]
3. 2. 추가 저술 활동
아버지에 대한 작업을 마친 니클라스 프랑크는 이후 사망한 어머니, 한때 '폴란드의 여왕'으로 불렸던 브리짓 프랑크에 집중하여 2005년 ''Meine deutsche Mutterde''를 출간했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고위 나치 여성에 대한 풍자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는 3부작의 마지막으로 2013년에 ''Bruder Norman!de''을 발표했는데, 이 책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그가 가장 사랑했던 형 노먼과의 고통스러운 논쟁을 기록하고 있다. 책에서는 점령된 폴란드에서의 유년 시절과 부모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과 평가를 다루고 있다.[5]4. 다큐멘터리 출연
니클라스 프랑크는 여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영화에 직접 출연하여 자신의 경험과 아버지 한스 프랑크의 나치 전범 행위를 비판하는 입장을 밝혔다.[6][7] 그는 이러한 출연을 통해 과거사를 조명하고 반성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4. 1. 주요 출연작
니클라스 프랑크는 여러 다큐멘터리에 본인으로 출연하여 자신의 경험과 아버지 한스 프랑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이야기했다.- 1993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Personenbeschreibung|인물 묘사de''에 출연했다.
- 2012년 영화 ''히틀러의 아이들''에 출연했다.
- 2015년 BBC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2016년 5월 인디펜던트 렌즈의 에피소드 ''My Nazi Legacy: What Our Fathers Did|나의 나치 유산: 우리 아버지들이 한 일영어''으로 방영되었다.[6]
- 2017년 4월 BBC 하드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했다.[7]
- 2019년 ''Hitler's Most Wanted|히틀러의 최고 수배자영어'' 시리즈의 한스 프랑크 편(시리즈 1, 에피소드 8)에서 인터뷰했다.
5.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나치 독일의 고위 관료이자 폴란드 총독으로서 홀로코스트에 깊이 관여한 한스 프랑크의 아들, 니클라스 프랑크의 삶은 과거사 문제와 씨름하는 여러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아버지의 죄과를 회피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평생에 걸쳐 나치즘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속죄하는 활동을 이어왔다.[1]
이러한 니클라스 프랑크의 행보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경험과 그 이후 친일파 청산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에 특히 주목할 만한 지점을 제공한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친일 부역자에 대한 청산이 미흡했다는 비판에 꾸준히 직면해 왔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사회적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2] 프랑크가 보여준, 가족이라는 관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과오를 직시하고 단호하게 비판하는 태도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자세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의 사례는 과거사 청산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단죄를 넘어,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고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물려주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을 강조한다. 가해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고 책임지지 않을 경우, 역사는 반복되거나 왜곡될 위험이 있으며, 이는 사회 통합에도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니클라스 프랑크처럼 개인적인 고통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용기는, 한국 사회가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성찰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3]
나아가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가해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인정과 진심 어린 반성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그의 삶은 역설한다. 과거의 잘못을 덮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책임지는 자세야말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임을 니클라스 프랑크의 사례는 보여주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I knew my father would be hanged’: Remembering Nuremberg
https://www.aljazeer[...]
2024-10-21
[2]
웹사이트
Oral history interview with Niklas Frank RG-50.030.0880
https://collections.[...]
2016-06-06
[3]
웹사이트
Oral history interview with Niklas Frank RG-50.030.0880
https://collections.[...]
2016-06-06
[4]
문서
Glothlin 2006: 174–198
[5]
웹사이트
Oral history interview with Niklas Frank RG-50.030.0880
https://collections.[...]
2016-06-06
[6]
웹사이트
TV Schedule
http://www.wyes.org/[...]
2013-01-24
[7]
웹사이트
Nazi leader's son: 'Don't trust us' Germans
https://www.bbc.co.u[...]
2017-04-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