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무라 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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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무라 고타로는 일본의 시인이자 조각가로, 188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대 초 뉴욕, 런던, 파리에서 유학하며 예술적 경험을 쌓았으며, 귀국 후에는 예술 전위 운동에 참여하고 미술 평론 활동을 펼쳤다. 1914년 나가누마 지에코와 결혼하여 40여 년간 지에코와의 삶을 시로 썼으며, 1941년에는 연애 시집 《지에코초》를 출간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전쟁 협력 시를 발표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종전 후에는 은둔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6년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일본 근대 시와 조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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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무라 고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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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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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카무라 미쓰타로 |
출생일 | 1883년 3월 13일 |
출생지 | 도쿄도다이토구 |
사망일 | 1956년 4월 2일 |
사망지 | 도쿄도나카노구 |
직업 | 시인, 작가, 조각가 |
경력 | |
사사 | 다카무라 고운 (아버지) |
영향 | 오귀스트 로댕 |
영향받은 인물 | 다카다 히로아쓰 |
수상 | |
수상 내역 | 일본 예술원상 (1942년) 요미우리 문학상 (1950년) |
주요 작품 | |
문학 | 『도정』 『지혜코초』 『전형』 |
조각 | 『오토메의 상』 『나부 좌상』 『석류 (목조)』 『매미 (목조)』 |
2. 생애
1883년 조각가 다카무라 코운의 장남으로 태어난 다카무라 고타로는 1898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예술가로서 성장했다. 귀국 후에는 일본 미술계의 구태의연함에 맞서 싸우며, '팬의 모임'에 참여하고 일본 최초의 실험적 화랑인 로켄도(琅玕洞)를 열기도 했다.
1911년 나가누마 지에코를 만나 1914년 결혼했다. 지에코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졸업하고 여성 해방을 표방한 잡지 세이토(青鞜)의 표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와 결혼 생활을 내용으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써서 지에코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고,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 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29년 지에코 친정이 파산하면서 지에코는 정신 분열증을 앓기 시작했고,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타로는 지에코의 죽음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 정부의 정책에 찬동하는 시를 써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아틀리에가 소실되자 이와테현으로 피난, 종전 후에도 하나마키시 오타무라 야마구치의 작은 오두막에서 자취 생활을 하며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1945년 12월 시집 ≪전형≫을 시작으로 자연과 순수한 시작(詩作)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발표했고, 1947년 7월에는 자전적 시편 《암우소전(暗寓小伝)》을 발표했으나, 제국예술원 회원 추대는 사퇴했다.
1950년 11월 ≪지에코초 그 후(智恵子抄その後)≫ 시문집을 출간하고, 1952년 도와다호반에 세울 지에코 나부상(裸婦像) 제작을 위해 도쿄로 돌아갔다. 1955년 12월 《요미우리 신문》에 마지막 시 <생명의 큰 강(生命の大河)>을 발표하고,[12] 1956년 4월 나카니시 도시오의 아틀리에에서 폐결핵으로 74세에 사망했다.
고타로의 기일(4월 2일)은, 생전 아틀리에 정원에 핀 연교 꽃을 좋아하여 그의 고별식에서 관 위에 그 한 가지가 놓였던 것에서 유래하여 '''연교기'''라고 불린다.[14][15]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83년 도쿄에서 조각가 다카무라 코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렌페이 초등학교(현: 타이토구립 헤이세이 초등학교)와 시타야 고등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896년 쿄리츠 미술 학관 예비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897년 도쿄 미술 학교(현: 도쿄 예술 대학 미술 학부) 조각과에 입학했다.도쿄 미술 학교 재학 중에는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요사노 뎃칸이 이끄는 신시사(新詩社)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묘조』에 작품을 기고했다.[7] 1902년 조각과를 졸업하고 연구과에 진학했으나, 1905년 서양화과로 전과했다.
2. 2. 유학 생활 (1906-1909)
다카무라 고타로는 1906년 2월부터 1909년 6월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유학했다.[2] 이 시기에 고타로는 서구 문명과 그 속에서 형성된 근대적 자아를 체득하며 예술혼에 눈을 뜨게 되었다.뉴욕에서는 1년 2개월 동안 머물렀다.[2] 그는 "어떻게 식량을 구하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조각가 가트손 보글럼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조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야간 학교에서 공부했다.
1907년 런던으로 건너가 1년 1개월 동안 머물면서 버나드 리치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1] 1908년에는 파리에서 1년간 유학하며 유럽 미술의 중심지를 경험했다.[2]
1909년 6월, 고타로는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2]
2. 3. 귀국 후 활동
다카무라 고타로는 구태의연한 일본 미술계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도쿄 미술 학교의 교직도 거절했다. 빵의 회에 참가하여 『스바루』 등에 미술 비평을 기고했다.[7]1910년 『시라카바』가 창간되자,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등과 교류하며 "로댕의 말" 번역 등을 기고했다. 같은 해에 예술의 자유를 선언한 평론 "녹색 태양"을 발표하고, 간다 아와지초에 일본 최초의 화랑 "롱간동"을 개점했다.[7]
1912년 고마고메 하야시초에 아틀리에를 지었다. 이 해, 기시다 류세이 등과 결성한 제1회 휴잔회전에 유화를 출품했다.[7]
2. 4. 나가누마 지에코와의 만남과 결혼
1911년 12월, 다카무라 고타로는 하시모토 야에코의 소개로 나가누마 지에코를 처음 만났다.[4] 지에코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졸업하고, 여성 해방을 표방한 잡지 세이토(青鞜)의 표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가진 신여성이었다.[4] 고타로와 지에코는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진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깊이 공감하며 사랑을 키워갔다.1914년 10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와 결혼 생활을 소재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썼고, 이는 훗날 지에코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2. 5. 시인으로서의 성공
다카무라 고타로는 1914년(다이쇼 3년) 10월에 첫 시집 『도정』을 출판했다.[7] 이 시집은 나가누마 지에코와의 결혼을 앞두고 낸 것이다.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와 결혼 생활을 소재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썼으며, 지에코가 세상을 떠난 후인 1941년(쇼와 16) 8월에 이 시들을 모아 『지에코 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다.[7] 이 시집은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45년 12월 시집 『전형』을 시작으로, 고타로는 자연과 순수한 시작(詩作)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7] 1947년 7월에는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자전적 시편인 ≪암우소전(暗寓小伝)≫을 발표했고, 1950년 11월에는 ≪지에코초 그 후(智恵子抄その後)≫ 시문집을 출판했다.[7]
1951년에는 시집 『지에코 초』로 제2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5]
『도정』, 『지혜자초』, 『기록』, 『전형』, ≪지에코초 그 후≫를 포함하는 그의 7권의 시(문)집은 일본 근대 시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메이지, 다이쇼, 쇼와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한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 내고자 했던 시인의 인생 기록으로서 크나큰 감동을 주고 있다.
2. 6. 전쟁 협력과 비판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자, 다카무라 고타로는 "이 날 세계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 앵글로색슨의 주권, 이 날 동아의 땅과 바다에서 부정된다"라고 적은 "기억하라, 12월 8일"[8]을 발표하며 전쟁을 칭송했다. 그는 전쟁 협력 시를 많이 발표하여 전쟁 의지를 높이는 데 힘썼으며, 일본 문학 보국회 시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전시 가요곡 "걷는 노래"(작곡은 이다 노부오)를 작사하기도 했다.전후, 다카무라 고타로는 전쟁 중 많은 전쟁 협력 시를 지은 것에 대해 스스로를 꾸짖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인해 폐결핵으로 고통받으며 사망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
2. 7. 은둔 생활과 말년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아틀리에가 소실되자 이와테현으로 피난, 종전 후에도 하나마키시 오타무라 야마구치의 작은 오두막에서 자취 생활을 하며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10][11] 1945년 12월 시집 《전형》을 시작으로 자연과 순수한 시작(詩作)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발표했고, 1947년 7월에는 자전적 시편 《암우소전(暗寓小伝)》을 발표, 제국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사퇴했다.1950년 11월 《지에코초 그 후(智恵子抄その後)》 시문집을 출간하고, 1952년 도와다호반에 세울 지에코 나부상(裸婦像) 제작을 위해 도쿄로 돌아갔다. 1955년 12월 《요미우리 신문》에 마지막 시 <생명의 큰 강(生命の大河)>을 발표하고,[12] 1956년 4월 나카니시 도시오의 아틀리에에서 폐결핵으로 74세에 사망했다.
3. 지에코와의 결혼 생활
1914년(다이쇼 3년) 나가누마 지에코와 결혼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와 결혼 생활을 내용으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써서 지에코가 사망한 후 1941년 8월에 ≪지에코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다. ≪지에코초≫는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인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 내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4] 1951년 제2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5]
3. 1. 지에코의 고통과 정신 질환
1914년(다이쇼 3년) 지에코와 결혼 후 24년간의 결혼 생활은 고타로에게 "생생한 고투"[19]의 날들이었다.지에코는 유화를 지망했으나, 문전(文展)에 출품한 작품이 낙선하고, 고타로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창작 활동을 줄이고 가사에 전념하면서 유화에 대한 열정이 식고 절망하게 된다. 니혼마쓰의 대화재, 친부의 사망, 친가의 파산까지 겹치면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932년(쇼와 7년) 최면제인 아달린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지에코는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다 환각 증세를 보이고, 의식도 몽롱해져 고타로가 지에코의 식사와 목욕 등을 도왔다.
고타로는 처음에는 지에코의 증상을 갱년기로 보고 구주쿠리 해안의 친척에게 요양을 보냈다. 요양 덕에 몸은 튼튼해지고 몽롱한 상태는 벗어났지만, 정신 문제는 오히려 심해졌다. 1934년(쇼와 9년) 다카무라 고운이 사망하면서, 그 유산을 지에코의 요양비로 충당했다.[19] 고타로는 지에코를 다시 아틀리에로 데려왔지만, 지에코의 병세는 "마치 기차처럼 맹진"[19]하여 광폭한 행동을 보였다.
1935년(쇼와 10년) 2월, 고타로는 지인의 소개로 미나미시나가와의 제임스 언덕 병원에 지에코를 입원시켰다. 이후 간호사가 된 지에코의 조카 하루코의 도움을 받아 1938년(쇼와 13년) 10월 5일까지 지에코를 간병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 사별 후 『지에코의 반생』에서 회고했다.
3. 2. 고타로의 헌신적인 간호
1932년 (쇼와 7년)에 지에코가 최면제인 아달린으로 자살 미수를 한 이후, 지에코는 환각과 의식 몽롱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고타로는 지에코의 식사와 입욕 등을 도우며 간호하게 되었다.[19]水野葉舟|미즈노 하슈일본어에게 보낸 1934년 (쇼와 9년) 5월 9일 자 편지에서 고타로는 "지에코는 한때 꽤나 좋아질 뻔했는데 최근의 날씨 탓인지 다시 역전되어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의사와 상의한 결과 어쩔 수 없이 가타카이의 시골에 있는 여동생 집에 어머니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저께 보냈습니다. 소생의 3년간의 간호도 힘이 없었습니다."라고 밝혔다.[19]
고타로는 갱년기 증상으로 보고 지에코를 구주쿠리 해안에서 요양시켰지만, 몸은 회복되었어도 정신적인 문제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1934년 (쇼와 9년) 아버지 다카무라 고운이 사망하고, 그 유산으로 지에코의 요양비를 충당했다.[19] 지에코를 다시 아틀리에로 데려왔지만, 병세는 더욱 심해져 광폭한 행동을 보였다.[19]
1935년 (쇼와 10년) 1월 8일 나카하라 아야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타로는 "하루에 소생 2, 3시간의 수면으로 벌써 2주쯤 하고 있습니다. 병자의 광조 상태는 6, 7시간 계속 독백이나 방음(放吟)을 하고, 목이 쉬어 숨이 막힐 정도에 이릅니다. 저희 집 문은 모두 못 박았습니다."라고 당시의 힘든 상황을 전했다.[19]
같은 해 1월 11일 나카하라 아야코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는 "벌써 만 3년 소생은 제작욕을 죽이고 있습니다. 쇼와 7년 7월 15일에 지혜코가 갑자기 아달린 자살을 꾀했을 때부터의 지혜코의 변조로 소생의 생활은 급회전하여 공부의 길이 간호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갈아 놓은 끌이나 칼을 모두 손에서 숨겨 버렸습니다. 소생은 목각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며 자신의 창작 활동을 포기하고 지에코 간호에 전념해야 했던 상황을 설명했다.[19]
결국 1935년 (쇼와 10년) 2월, 고타로는 지인의 소개로 지에코를 미나미시나가와의 제임스 언덕 병원에 입원시켰다. 이후 간호사가 된 지에코의 조카 하루코의 도움을 받아 1938년 (쇼와 13년) 10월 5일까지 지에코를 간병했다.[19]
3. 3. 요양 생활과 병세 악화
1914년에 지에코와 결혼한 후, 고타로는 "생생한 고투"의 날들을 보냈다.[19] 지에코는 문전(文展)에 출품한 작품이 낙선하고, 고타로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창작 활동을 줄이면서 유화에 대한 절망감을 느꼈다. 1932년에는 최면제인 아달린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지에코는 환각 증세를 보이며 의식이 몽롱해졌고, 고타로는 지에코의 식사와 목욕 등을 돕게 되었다.고타로는 지에코를 갱년기 장애로 생각하고 구주쿠리 해변으로 요양을 보냈다. 지에코는 요양을 통해 몸은 건강해졌지만, 정신 질환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1934년에는 고타로의 아버지인 다카무라 고운이 사망했고, 고타로는 그 유산을 지에코의 요양비로 사용했다.
고타로는 지에코를 다시 아틀리에로 데려왔지만, 지에코의 병세는 "마치 기차처럼 맹진"[19]하여 광폭한 행동을 보였다. 고타로는 지에코를 간호하느라 창작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지에코의 가혹한 상황은 고타로에게 생활과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을 강요했다. 1935년 2월, 고타로는 지인을 통해 지에코를 미나미 시나가와의 제임스 언덕 병원에 입원시켰다. 이후 간호사가 된 지에코의 조카 하루코의 도움을 받으며, 1938년 10월 5일까지 지에코를 간병했다.[19]
3. 4. 제임스 언덕 병원 입원과 사별
1935년 2월, 다카무라 고타로는 지인의 소개로 지에코를 미나미 시나가와의 제임스 언덕 병원에 입원시켰다.[19] 이후 간호사가 된 지에코의 조카 하루코의 도움을 받았다. 1938년 10월 5일, 지에코가 같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타로는 그녀를 간병했다.[19]지에코와 사별한 후, 고타로는 『지에코의 반생』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4. 인물
다카무라 고타로는 1883년 도쿄 시타야(下谷)에서 불사(仏師)였던 아버지 고운과 어머니 와카(통칭 도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다. 이 시기에 예술혼에 눈뜨고 서구 문명과 근대적 자아를 체득한 고타로는 귀국 후 아버지와의 갈등, 일본 예술계의 벽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귀국 직후 ‘빵의 회’에 참여해 탐미적 생활을 했고, 1909년에는 조부의 은거처를 아틀리에로 개조해 예술 활동을 했다. 1910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험적 화랑인 로켄도(琅玕洞)를 열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지에코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나와 여성 해방을 표방한 잡지 ≪세이토≫의 표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두 예술가의 만남은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졌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 결혼 생활을 내용으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써서 ≪지에코초≫(1941)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다.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지에코 사후 고타로는 전쟁 중 일본 정부 정책에 찬동하는 시를 써서 오점을 남겼다.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아틀리에가 소실되자 이와테현으로 피난했고, 종전 후에도 이와테현 시외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며 자연 친화적 생활을 했다. 1947년 제국예술원(帝国芸術院) 회원으로 추대되지만 사퇴했다.
1952년 도와다호반에 세울 지에코 나부상(裸婦像) 제작을 위해 도쿄로 돌아갔다. 1955년 ≪요미우리 신문≫에 시 <생명의 큰 강>을 발표하고, 1956년 4월 74세로 사망했다. 그의 7권의 시(문)집은 일본 근대 시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격변기 속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시인의 인생 기록으로서 큰 감명을 준다.
조각가 다카무라 고운의 장남으로, 1902년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각과 유화를 전공했다. 1906년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공부했으며, 조각가 거즌 보글럼 밑에서 수학했다. 1907년 런던에서 버나드 리치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1] 1908년 파리 유학 후 1909년 귀국했다.[2] 그의 조각은 오귀스트 로댕과 시라카바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의 예술 스타일을 전통 일본 미술과 구분하려 했다.[3]
시인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1941년 발표한 시집 『치에코초』는 1938년 사망한 아내 지에코에 관한 시를 모은 것이다.[4] 1951년 제2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5]
4. 1. 건강 관리
뉴욕 유학 이전에는 유진 샌도가 세상에 널리 알린 "샌도식 체조"로 육체를 단련했다. 이는 그가 예술 활동에 필요한 강인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4. 2. 유학 시절 에피소드
뉴욕 유학 시절, 예술 학교 급우들이 고타로의 작품에 자주 장난을 쳤다. 이에 분개한 고타로는 레슬링 경험이 있는 주동자와 시합을 벌이게 되었다. 교실에서 벌어진 이 시합에서 다카무라는 유도 스타일, 상대는 복싱 스타일로 맞붙었다. 샌도식 체조로 단련된 완력을 지닌 고타로는 상대를 제압했고, 이후 급우들의 장난은 사라졌다. 그는 만년에 "작품에 대한 장난이 없어 다행이었다"라고 회고했다.5. 주요 저작
다카무라 고타로는 조각가이자 화가였지만, 오늘날에는 『도정』, 『지혜자초』 등의 시집으로 더 유명하며, 교과서에도 많은 작품이 실려 있어 일본 문학사상 근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평론, 수필, 단가도 저술하였으며, 능서가로도 알려져 있다.[1] 그의 작품은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한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시인의 인생 기록으로서 큰 감명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시집 『도정』, 『지혜자초』, 『기록』, 『전형』, 『지혜자초 그 후』 등이 있으며, 미술 평론으로는 『인상주의의 사상과 예술』, 『미에 대하여』, 『조형미론』 등이 있다. 오귀스트 로댕의 『로댕의 말』, 에밀 베르하렌의 『천상의 불꽃』, 빈센트 반 고흐 여동생의 『회상의 고흐』, 월트 휘트먼의 『자선 일기』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5. 1. 시집
- 도정
- 지혜자초
- 위대한 날에
- 할아버지의 시
- 기록
- 전형
- 지혜자초 그 후 - 시문집
- 전형 이후 - 사후 간행
- 맹수편 - 사후 간행
5. 2. 가집
5. 3. 미술 평론
인상주의의 사상과 예술, 미에 대하여, 조형미론 등의 저술을 남겼다.5. 4. 수필
5. 5. 번역
6. 주요 미술 작품
다카무라 고타로는 조각가이자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각 작품은 오귀스트 로댕을 비롯한 서양과 시라카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 스타일을 전통적인 일본 미술 스타일과 구분하고자 노력했으며,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일본 미술의 혁명을 이끈 선구자로 평가받는다.[3]
종류 | 작품명 | 소장처 |
---|---|---|
조각 | 손 |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
조각 | 석류 (목조) | 개인 |
조각 | 연근 (목조) | 개인 |
조각 | 메기 (목조) | 도쿄 국립 박물관 |
조각 | 나부 좌상 | |
조각 | 나루세 진조 흉상 | 일본 여자 대학교 |
조각 | 코운 1주기 기념 흉상 | 도쿄 예술대학 |
조각 | 소녀상 | 아오모리현 도와다 호 |
서예 | 유기무기첩 | 일본 근대 문학관 |
서예 | "플러스가 되는 것, 음식과 미" | 개인 |
대표적인 조각 작품과 서예 작품은 위의 표와 같다. 조각 작품은 미술 교과서에도 많이 실려 있다.
6. 1. 조각

- 손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
- 석류 (목조) (개인 소장)
- 연근 (목조) (개인 소장)
- 메기 (목조)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 나부 좌상
- 나루세 진조 흉상 (일본 여자 대학교 구내)
- 코운 1주기 기념 흉상 (도쿄 예술대학 구내)
- 소녀상 (아오모리현 도와다 호반)
조각 작품은 미술 교과서에도 많이 실려 있다.
6. 2. 서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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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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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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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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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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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ia University Press
201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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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miuri Shim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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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経済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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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日新聞
朝日新聞東京本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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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太郎の心、今も 東京で空襲、賢治の縁で疎開
https://www.asah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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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沢清六「花巻から山小屋までの高村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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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村光太郎|生命の大河|ARCHIVE
http://www.projec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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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村光太郎連翹忌運営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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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翹忌(れんぎょうき) の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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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翹忌(4月2日 記念日)
https://zatsuneta.co[...]
雑学ネタ帳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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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村光太郎連翹忌運営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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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談社文芸文庫 現代日本のエッセイ わが光太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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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智恵子の半生
https://www.aozo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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