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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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하라번은 아쓰미 반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일본의 번으로, 무로마치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를 거쳐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1601년 도다 가문이 다하라 성을 중심으로 다하라 번을 창설했으나, 1664년 미야케 가문으로 교체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미야케 가문이 통치했다. 다하라 번은 학문 장려로 와타나베 가잔과 같은 학자를 배출했으며, 1871년 폐번되어 다하라 현으로 개편된 후 아이치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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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하라번 - 다하라성 (아이치현)
다하라성은 아이치현 다하라시에 위치하며, 과거 미카와 만으로 둘러싸여 해상 방어에 유리했던 아쓰미 반도 기슭의 성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도다 씨의 거점이었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를 거쳐 현재는 니노마루 야구라가 재건되고 다하라시 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 1601년 설립 - 동관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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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의 역사
아쓰미 반도의 대부분은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동안 도다 씨족의 지배를 받았다. 도다 씨족은 이마가와 씨족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는 도쿠가와 씨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90년 오다와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 지방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할당했고, 도다 씨족은 영지를 빼앗겨 히데요시의 가신인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주어졌다. 도다 씨족은 이에야스를 따라 에도로 갔으며, 이즈 국 시모다에 5,000 곡의 작은 영지를 가진 ''하타모토''로 지위가 강등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수립 후, 도다 가타쓰구는 10,000곡의 ''다이묘''로 지위가 상승했으며, 1601년 새롭게 창설된 다하라 번의 중심지가 된 다하라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1664년, 그의 아들 도다 타다마사는 분고 국 아마쿠사 번으로 전봉되었고, 다하라 번은 미야케 씨족에게 재할당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통치했다.
169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번에는 4,314가구에 20,343명이 거주했다. 이 번은 에도 한조몬에 주요 거주지(''가미야시키'')를 유지했다.[1] 에도 시대 말에 이 번의 영지는 미카와 국 아쓰미 군의 34개 마을로 구성되었다.
다하라 번은 수입은 적었지만, 요새화된 거주지인 ''진야''만 허용된 대부분의 번과 달리 성을 허용받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또한 번 학원과 학문으로 유명했으며, 와타나베 가잔과 같은 저명한 학자를 배출했다.
2. 1. 초기 역사
1480년(文明일본어 12년), 국인 영주 도다 무네미쓰가 다하라 성을 축성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를 거쳐, 미카와 국 요시다 성의 성주가 된 이케다 테루마사가 다하라 성을 다스렸다. 테루마사는 가로인 이기 타다쓰구를 성대(城代)로 임명하였다.[1]1600년(慶長일본어 5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테루마사는 동군에 가담하여 기후 성 공격과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무공을 세워 하리마 히메지 번으로 추가 봉읍되었다.
1601년(慶長일본어 6년) 3월, 이즈 시모다 5,000석에서 도다 무네미쓰의 방계 일족인 도다 다카쓰구가 1만 석으로 다하라 번에 입성하였다.[1]
2. 2. 도다 가문 통치 시기 (1601년 ~ 1664년)
1601년(게이초 6년) 3월, 도쿠가와 씨의 부대로 도다 가타쓰구가 1만 석으로 입성하면서 다하라 번이 시작되었다. 도다 가문은 이전에 다하라를 다스렸던 도다 무네미쓰의 방계 일족이었다.[1]1664년(간분 4년) 5월 9일, 3대 번주인 도다 다다마사는 히고 아마쿠사 군의 도미오카 번으로 이봉되었다.[1]
2. 3. 미야케 가문 통치 시기 (1664년 ~ 1871년)
1664년(간분 4년) 5월 9일, 도다 타다마사가 히고 아마쿠사 군의 도미오카번으로 이봉되었다.그 대신, 미카와 고로모번에서 미야케 야스카쓰가 1만 2000석으로 들어왔다. 미야케 가문은 소규모 다이묘였지만, 성을 소유한 다이묘로 인정받을 정도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번사 수가 많았고, 다하라 지역의 토지가 척박할 뿐만 아니라 풍수해 피해도 잦아 항상 재정난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1832년(덴포 3년), 제11대 번주 미야케 야스나오 시대에 가로로 등용된 와타나베 가잔은 유능한 인재 등용을 위해 각 고분합제의 급여 개혁, 비축 제도의 의창 제도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덴포 대기근으로부터 번을 구했다. 1841년(덴포 12년) 와타나베 가잔 사후에는 농정가인 오쿠라 나가츠네 등에 의해 번정 개혁, 재정 개혁이 계속되었다. 무라카미 노리유키에 의해 군제 개혁도 이루어져 대포 주조와 서양식 포술 도입을 추진했다.
제12대 번주 미야케 야스야스 시대인 1869년(메이지 2년) 6월, 판적봉환으로 야스야스는 다하라 번지사로 임명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 폐번치현으로 다하라 번은 폐지되었고, 다하라현을 거쳐 누카타현에 편입된 후 아이치현에 편입되었다.[1]
2. 4. 메이지 유신과 폐번치현
1869년(메이지 2년) 6월, 판적봉환으로 미야케 야스야스는 다하라 번지사로 임명되었다.[2] 1871년(메이지 4년) 7월 폐번치현으로 다하라 번은 폐지되었고, 다하라 현을 거쳐 누카타현에 편입된 후, 아이치현에 편입되었다.[2]다하라 번의 에도 번저(상옥)는 하야부사 정의 에도 성 내호리를 따라 성을 바라보는 장소에 있었다. 메이지 유신 후, 번저 부지는 도쿄 제1위수병원, 육군 항공본부 청사, 주일 미군주택 팰리스 하이츠를 거쳐, 현재는 최고재판소와 국립극장이 되었다.[2] 번저 부지 앞 내호리 거리의 언덕인 미야케자카는 다하라 번주였던 미야케 가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2]
3. 역대 번주
다하라번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도다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로 1601년부터 1664년까지 다하라 번을 다스렸다. 도다 다카쓰구를 시작으로 도다 다다요시, 도다 다다마사가 번주를 역임했다. 다다마사는 아마쿠사번으로 이봉되면서 21,000 석으로 증봉되었다.
미야케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 가문으로 1664년부터 1871년까지 다하라 번을 다스렸으며, 1만 2천 석을 유지했다. 미야케 야스오는 슨푸 가번, 닛코 제례 봉행, 오쿠즈메, 코쇼, 주자반, 지샤 부교를 역임했고, 미야케 야스타카, 미야케 야스유키, 미야케 야스타케, 미야케 야스토모는 닛코 제례 봉행을, 미야케 야스토모, 미야케 야즈카즈, 미야케 야스아키는 대판 가번을 역임했으며, 미야케 야스나오는 닛코 제례 봉행, 대판 가번, 주자반을 역임했다.
3. 1. 도다 가문
3. 2. 미야케 가문
미야케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 가문으로 1만 2천 석을 다스렸다. 미야케 가문은 미야케 야스카쓰가 고로모번에서 이봉된 것을 시작으로, 미야케 야스오는 슨푸 가번, 닛코 제례 봉행, 오쿠즈메, 코쇼, 주자반, 지샤 부교를 역임했고, 미야케 야스타카, 미야케 야스유키, 미야케 야스타케, 미야케 야스토모는 닛코 제례 봉행을 역임했다. 미야케 야스토모, 미야케 야즈카즈, 미야케 야스아키는 대판 가번을 역임했으며, 미야케 야스나오는 닛코 제례 봉행, 대판 가번, 주자반을 역임했다.
4. 번의 특징
다하라 번은 아쓰미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는 도다 씨족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1] 도다 씨족은 이마가와 씨족에 충성했지만, 나중에는 도쿠가와 씨족에 충성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 지방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었고, 도다 씨족은 영지를 빼앗겼다.[1]
도쿠가와 막부 수립 후, 도다 가타쓰구는 1만곡의 ''다이묘''로 지위가 상승하여 1601년 다하라 번의 중심지인 다하라 성으로 돌아왔다. 1664년, 그의 아들 도다 타다마사는 분고 국 아마쿠사 번으로 전봉되었고, 다하라 번은 미야케 씨족에게 재할당되었다.[1]
169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다하라 번에는 4,314가구에 20,343명이 거주했다. 이 번은 에도 한존몬에 주요 거주지(''가미야시키'')를 유지했다.[1] 에도 시대 말에 이 번의 영지는 미카와 국 아쓰미 군의 34개 마을로 구성되었다.[1] 다하라 번은 에도 번저 (상옥)를 하야부사 정의 에도성 내호리를 따라 성을 바라보는 장소에 두었다. 메이지 유신 후, 이 부지는 도쿄 제1위수병원, 육군 항공본부 청사, 주일 미군주택 팰리스 하이츠를 거쳐 현재는 최고재판소와 국립극장이 되었다.[2]
4. 1. 경제
다하라 번은 규모가 작아 재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농업 생산성이 낮은 토지가 많았고, 풍수해 등 자연재해로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잦았다.[1]4. 2. 정치
미야케 씨족은 메이지 유신까지 다하라 번을 다스렸다.[1] 다하라 번은 번 학원과 학문으로 유명했으며, 와타나베 가잔과 같은 저명한 학자를 배출했다.[1]4. 3. 군사
다하라 번은 요새화된 거주지인 ''진야''만 허용된 유사한 규모의 대부분의 번과는 달리 완전한 성을 허용받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다하라 번은 번 학원과 학문으로 유명했으며, 와타나베 가잔과 같은 저명한 학자를 배출했다.[1]4. 4. 교육
1810년(문화 7년), 번의 유의(儒医) 가야부 겐준이 번교 성장관을 개관하였다. 성장관은 현재의 다하라 중부 초등학교 부지에 위치했다.[5]성장관이라는 교명은 논어 공야장편의 "비연(斐然)하여 장(章)을 이루는" (비연성장)이라는 구절에서 유래되었으며, 학문과 도를 후세에 전하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오와리, 미카와 지역의 다른 번교들과 마찬가지로 번사 자제들을 주된 교육 대상으로 삼았다.
번주 미야케 가문의 지원과 와타나베 가잔, 스즈키 슌잔, 무라카미 노리치 등 저명한 학자들의 활동으로 성장관은 명성을 얻었다. 설립 초기에는 한적 소독(素読)과 무술을 주로 가르쳤으나, 1834년(덴포 2년)부터 스즈키 슌잔 등을 초빙하여 서양학을, 무라카미 노리치를 통해 서양 병술을 교육하기 시작했다.[6]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인해 62년간의 역사를 뒤로하고 자연스럽게 폐교되었다. 이후 1901년(메이지 34년) 근대 교육 기관으로 성장관이 부흥되었고, 변천을 거쳐 1948년(쇼와 23년) 아이치현립 성장고등학교가 되었다.
5. 막말의 영지
6. 다하라 번의 가신
文政일본어 10년(1837년) 당시 다하라 번의 에도 주재 가신은 다음과 같다.[7] △ 표시는 에도에 주재했음을 의미한다.
참조
[1]
웹사이트
Edo daimyo.net
http://www1.parkcity[...]
[2]
웹사이트
麹町周辺の軍関連施設
https://smtrc.jp/tow[...]
三井住友トラスト不動産
2021-03-13
[3]
문서
[4]
문서
[5]
서적
田原町史 中巻
田原町教育委員会
1975
[6]
서적
愛知県教育史 二巻
愛知県教育委員会
1972
[7]
서적
田原藩三宅家分限帳
田原町文化財調査委員会
197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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