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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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풍군은 조선 세조의 증손이자 월산대군의 서자로, 1485년에 태어났다. 성종은 숙부, 중종은 친사촌 동생이며, 장경왕후의 형부로서 인종에게는 처조카이자 5촌 조카가 된다. 1497년 윤여필의 딸 파평현부인 윤씨와 혼인하였으며, 1506년에 사망하였다. 묘는 경기도 고양군에 위치하며, 사후 소도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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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초기 국방 강화와 빈민 구제에 힘썼으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자행하여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폭정, 한글 탄압, 사찰 훼손, 방탕한 사생활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조선 덕종 - 귀인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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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초기 국방 강화와 빈민 구제에 힘썼으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자행하여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폭정, 한글 탄압, 사찰 훼손, 방탕한 사생활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덕풍군 | |
|---|---|
| 기본 정보 | |
![]() | |
|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숙(璹) |
| 자 | 자온(子蘊) |
| 시호 | 효민(孝敏)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성종 |
| 어머니 | 숙의 권씨 |
| 부인 | 청주 한씨 |
| 생애 | |
| 출생 | 1488년(성종 19년) |
| 사망 | 1506년(중종 1년) |
|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
| 기타 | |
| 봉작 | 덕풍군 |
2. 생애
덕풍군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조의 증손이자 월산대군의 서자이다. 1485년 8월 20일에 태어나 1506년(연산군 12년) 3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최종 품계는 승헌(承憲)에 이르렀으며, 사후 소도(昭悼)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다룬다.
2. 1. 초기 생애
1485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조선 세조의 증손이며,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서손자이다. 아버지는 월산대군이며, 어머니는 부호군 김량신(金良信)의 딸인 원주 김씨이다. 형제가 한 명 있었다고 전해지나,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성종은 덕풍군의 숙부이며, 중종은 그의 사촌 동생이다. 후에 중종이 덕풍군의 처제인 장경왕후와 혼인하면서 동서 관계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인종은 덕풍군에게 처조카가 되면서 동시에 부계로는 5촌 조카가 된다.
왕조실록 등 관련 기록에는 그의 초기 생애나 유년기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1497년(연산군 3년),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대부인은 연산군에게 덕풍군의 혼례를 자신의 동복 남동생인 박원종이 주관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따라 덕풍군은 윤여필의 딸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혼인하였다. 이때 파평현부인 윤씨가 시집오면서 데리고 온 여자 노비 종이(終伊)는 훗날 덕풍군이 사망한 뒤, 그의 처남인 윤임이 첩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1]
2. 2. 혼인과 사망
1497년(연산군 3년) 승평부대부인은 연산군에게 남편 월산대군의 서자인 덕풍군의 혼사를 자신의 동복 남동생인 경상도 절도사 박원종이 주관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1] 이에 따라 윤여필의 딸인 파평현부인 윤씨와 혼인하였다. 이때 파평현부인 윤씨가 데려온 여자 노비 종이(終伊)는 덕풍군 사후, 그의 처남인 윤임의 첩이 되었다.[1]최종 품계는 승헌(承憲)에 이르렀으며, 1506년(연산군 12년) 3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1리(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위치한 견달산(見達山)의 아버지 월산대군 묘소 아래 임좌(壬坐) 방향에 안장되었다. 부인 파평현부인의 묘는 덕풍군 묘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과거 묘소 인근 신원1리 물구리부락과 조관동 부락에는 그의 후손들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사후에는 소도(昭悼)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2. 3. 사후
둘째 아들 계림군 이유는 성종의 서자이자 서4촌동생인 계성군 순의 양자로 입양되었다.[1] 그러나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면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윤원형 등은 그의 처남인 윤임이 인종 승하 시 경원대군 추대를 원치 않았으며, 성종의 양손자인 계림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거짓 명분으로 사화를 일으켰다.[1]이 무고로 인해 계림군은 목숨을 위협받게 되자 안변군 황룡산(黃龍山) 속 이웅(李雄)의 집에 숨었으나, 결국 1545년 9월 28일 토산현감(兎山縣監) 이감남(李坎男)에게 체포되었다.[1] 한성부로 압송된 계림군은 국문을 당하며 왕위 찬탈이라는 누명을 쓰고, 같은 해 10월 15일 오전에 효수형을 당했다.[1]
계림군이 반역죄로 처형당하자, 그의 생부인 덕풍군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금부도사가 명을 받고 덕풍군의 묘로 가서 묘 앞에 세워진 신도비를 장검으로 내리쳤다.[1] 이때 비석의 이수(螭首, 용 모양 머릿돌) 부분에서 붉은 피가 솟아오르고,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폭풍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관리들을 덮쳤다고 전해진다.[1] 이에 놀란 관리들은 허둥대다가 근처에 있던 중종(中宗)의 부마이자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의 묘갈(墓碣)을 다시 치자,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고 비바람과 천둥이 멎었으며, 이수에서 흐르던 피가 비석에 스며들었다고 한다.[1] 이 피자국은 이후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고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칼로 내리친 자국 또한 그대로 남아있다고 전해진다.[1]
3. 가족 관계
(동서)
(처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