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도쇼다이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쇼다이지는 당나라 승려 감진이 759년에 창건한 일본 나라 시대의 사찰이다. 일본 불교의 계율 정비를 위해 감진이 6번의 실패 끝에 일본에 건너와 동대사에서 계율을 전파한 후, 신다부친왕의 저택 부지를 하사받아 창건되었다. 주요 건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금당, 강당, 경장, 보장, 고루 등이 있으며, 감진의 초상 조각과 히가시야마 가이이의 장벽화 등 다양한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현재는 긴테쓰 가시하라선 니시노쿄역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하며, 주변에는 야쿠시지와 보라이산 고분이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라시의 절 - 고후쿠지
    고후쿠지는 669년 후지와라 가마타리가 창건한 나라의 불교 사찰로, 후지와라 씨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피해를 입고 재건을 거듭했으며, 현재는 여러 문화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나라시의 절 - 야쿠시지
    야쿠시지는 아스카 시대에 덴무 천황이 창건을 시작하여 헤이조쿄로 이전된 후 재건된 사찰로, 국보인 약사여래삼존상 등을 보유하며 다양한 문화재와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봉납 콘서트가 열리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된다.
  • 헤이조쿄 - 고후쿠지
    고후쿠지는 669년 후지와라 가마타리가 창건한 나라의 불교 사찰로, 후지와라 씨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피해를 입고 재건을 거듭했으며, 현재는 여러 문화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헤이조쿄 - 헤이조궁
    헤이조궁은 710년부터 784년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조쿄의 천황 거처로, 내정과 외조, 주작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영 역사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 고도 나라의 문화재 - 고후쿠지
    고후쿠지는 669년 후지와라 가마타리가 창건한 나라의 불교 사찰로, 후지와라 씨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화재와 전란으로 피해를 입고 재건을 거듭했으며, 현재는 여러 문화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고도 나라의 문화재 - 헤이조궁
    헤이조궁은 710년부터 784년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조쿄의 천황 거처로, 내정과 외조, 주작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영 역사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쇼다이지
지도
금당([[국보]])
금당(국보)
금당
금당
기본 정보
이름도쇼다이지(唐招提寺)
로마자 표기Tōshōdai-ji
위치나라현나라시 고조초 13-46
종교율종
주신비로자나불
국가일본
웹사이트도쇼다이지 공식 웹사이트
창건자감진
완공 연도759년
사찰 정보
산호없음
종파율종
사격총본산
본존비로자나불 (국보)
창건 년도덴표호지 3년 (759년)
개산감진
중흥 년도간겐 2년 (1244년)
중흥각성 (대비보살)
순례지야마토 북부 88개소 영장 제26·27번
신불영장 순례의 길 제24번 (나라 제11번)
문화재금당, 강당, 건칠 감진화상 좌상 외 (국보)
예당, 목조 미륵여래 좌상, 목조 대일여래 좌상 외 (중요문화재)
세계유산
기타 정보
관련 기사감진 스님의 당 재건, 6월에 낙경 법요, 도쇼다이지

2. 역사

일본후기 등에 따르면, 당장사당나라 승려 감진(鑑真)이 천평보자(天平宝字) 3년(759년) 신다부친왕(新田部親王)(천무천황(天武天皇)의 7번째 황자)의 옛 저택 터를 궁정으로부터 하사받아 절을 세운 것이다. 절 이름은 처음에는 “당률초제(唐律招提)”라 불렀다. “초제(招提)”는 산스크리트어 차투르디샤 상가(cāturdiśa(사방을 의미하는) + 상가(僧伽, 승가, 승단 조직을 의미하는))에서 유래한 중국어[3]로, 사방에서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했다. 감진 연구가인 안도 코세이(安藤更生)에 따르면, 당나라에서는 관사가 아닌 절을 “초제(招提)”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률초제(唐律招提)”는 “당나라의 율을 배우는 도장”이라는 뜻이며, 후에 관액(官額)을 받은 후 “당장사(唐招提寺)”라고 부르게 되었다[4]

=== 건립 배경 및 감진의 도일(渡日) ===

8세기 전반, 일본 불교는 체계적인 계율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8][9] 당시 일본에서는 정식 수계 제도가 없어 수계 자격이 있는 승려가 부족했고, 사적으로 출가하는 사도승(私度僧)이 증가하여 사회 질서가 혼란스러워졌다.[8][9] 이러한 상황에서 733년 견당사(遣唐使)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유학 승려 보조(普照)와 영예(榮叡)는 742년 양주(揚州)(현 장쑤성(江蘇省)) 대명사(大明寺)에서 감진(鑑真)을 만나 일본에 정식 전계의 스승이 없음을 알리고 고승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10] 감진의 제자들은 항해의 위험 등을 이유로 일본 입국을 거부하였으나, 감진은 스스로 일본행을 결심한다.[10]

그러나 당시 당나라에서 출국하는 것은 국금(國禁)을 범하는 일이었기에 감진의 도일(渡日)은 순탄치 않았다.[10] 743년부터 748년까지 다섯 번에 걸친 시도는 밀고, 강풍, 난파, 표류 등으로 좌절되었고, 이 과정에서 영예가 병사하고 상언(祥彦)이 사망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었다.[10] 감진 자신도 실명하는 역경을 겪었으나,[10] 753년 여섯 번째 시도에서 견당부사(遣唐副使) 대반고마로(大伴古麻呂)의 도움으로 견당사 배에 승선, 류큐(琉球)를 거쳐 753년 12월 사쓰마(薩摩)에 상륙하여 마침내 일본 입국에 성공한다.[12]

754년 2월 난바(難波) (오사카(大阪))에 도착한 감진은[12] 같은 해 4월 동대사(東大寺) 대불전(大仏殿) 앞에서 성무천황(聖武天皇), 광명황후(光明皇后), 효겸천황(孝謙天皇) 등에게 보살계를 수여하고, 사미(沙彌)와 승려에게 구족계를 수여하였다.[12] 755년부터 동대사 당선원(唐禪院)에 머물던 감진은[12] 759년 신다부친왕(新田部親王)(천무천황(天武天皇)의 7번째 황자)의 옛 저택 터를 하사받아[4] 사찰을 건립하고 처음에는 “당률초제(唐律招提)”라 불렀다.[4] “초제(招提)”는 산스크리트어 차투르디샤 상가(cāturdiśa(사방을 의미하는) + 상가(僧伽, 승가, 승단 조직을 의미하는))에서 유래한 중국어[3]로, 사방에서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하며, “당률초제(唐律招提)”는 “당나라의 율을 배우는 도장”이라는 뜻이다.[4] 후에 관액(官額)을 받은 후 “당장제사(唐招提寺)”라고 부르게 되었다.[4] 대승도(大僧都)에 임명되고 후에 대화상(大和上)의 존칭을 받은[12] 감진은 763년 5월, 76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12]

=== 가람 정비 ===

도쇼다이지의 가람은 감진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정비되었다.[13][14][15] 주요 건물로는 금당, 강당, 경장, 보장 등이 있다.

금당 평면도


강당 평면도


금당은 나라 시대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중요한 건축물로, 781년에 벌채된 재목이 사용된것으로 보아 8세기 말에 건립된것으로 추정된다.[19] 강당은 헤이조쿄(平城京)의 동조집전(東朝集殿)을 이축한 것으로, 나라 시대 궁궐 건축의 유일한 유구로서 매우 귀중하다.[16] 경장은 니타베 신노 저택의 창고를 개조한 것으로, 도쇼다이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15] 보물창고는 도쇼다이지가 세워진 이후 건립된것으로 추정된다.[32]

이 외에도 경내에는 가마쿠라 시대에 건립된 고루(사리전),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이 있는 종루, 에도 시대에 재건되지 않고 석단만 남은 계단, 1970년에 건립된 신보물창고 등이 있다. 경내 동쪽에는 수경천신사가 있으며, 과거에는 동탑이 있었으나 1802년 낙뢰로 소실되었다.[21]

=== 중흥 ===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계율 수호가 쇠퇴하면서 도쇼다이지는 쇠락하였다. 그렇지만, 1140년에는 금당, 강당, 보장, 영상당, 아미타원 등은 남아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석가 신앙, 사리 신앙과 계율 부흥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감진과 그가 가져온 사리에 대한 신앙이 부흥하였다. 가사기지의 정경이 1203년 도쇼다이지에서 석가염불회를 시작하였다.[22]

도쇼다이지 중흥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은 율종 고승 각성이다. 각성은 1243년에 사리회를 창설하고 감진의 유덕을 헌창하는 등 도쇼다이지 재건에 힘썼으며, 이듬해인 1244년에 정식으로 당사에 입사하여 재흥시켰다.[23] 각성의 법등을 계승한 증현은 여러 가람의 수리와 불상 조립 등에 힘썼으며, 계단의 창설도 행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 고다이고 천황가메야마 천황의 선율 진흥 정책을 계승하여 도쇼다이지를 숭경하였다. 1330년 8월 9일에는 고다이고 천황이 각성에게 “대비보살”의 시호를 증여하였다.

=== 근현대 ===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에 호지인(護持院) 륭광(隆光)이 도쇼다이지에서 수계를 받았다. 륭광은 후에 에도 막부(江戸幕府)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와 그의 생모인 게이쇼인(桂昌院)의 귀의를 받았고, 쓰나요시와 게이쇼인은 륭광과의 관계로 인해 도쇼다이지에도 귀의하여 이를 보호하고 수리하였다. 겐로쿠(元禄) 11년(1698년)에는 계단원(戒壇院)을 재건하였다. 한편, 여러 차례 지진이나 낙뢰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입었고, 쿄와(享和) 2년(1802년) 화재에서는 동탑(五重塔) 등 중요 건축물을 많이 잃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신불분리가 이루어지면서 수경천신사도 독립하였다. 근대 이후,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여러 당의 수리·보존 공사가 시행되었다. 1934년(쇼와 9년) 9월 21일, 무로토 태풍의 폭풍우로 보장과 개산당이 반파되고, 고루도 피해를 입었다.[24]

1941년(쇼와 16년)에는 율종계학원이 설립되었고, 1963년(쇼와 38년)에는 영묘당(구 고후쿠지(興福寺) 일승원 신전을 이축한 것)이 건립되었다.

또한, 감진의 생애와 도쇼다이지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천평의 이랑』(1957년)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감진 화상의 업적과 명성을 통해 1978년(쇼와 53년)의 일중 평화우호조약 체결에도 기여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1. 건립 배경 및 감진의 도일(渡日)

8세기 전반, 일본 불교는 체계적인 계율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8][9] 당시 일본에서는 정식 수계 제도가 없어 수계 자격이 있는 승려가 부족했고, 사적으로 출가하는 사도승(私度僧)이 증가하여 사회 질서가 혼란스러워졌다.[8][9] 이러한 상황에서 733년 견당사(遣唐使)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유학 승려 보조(普照)와 영예(榮叡)는 742년 양주(揚州)(현 장쑤성(江蘇省)) 대명사(大明寺)에서 감진(鑑真)을 만나 일본에 정식 전계의 스승이 없음을 알리고 고승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10] 감진의 제자들은 항해의 위험 등을 이유로 일본 입국을 거부하였으나, 감진은 스스로 일본행을 결심한다.[10]

그러나 당시 당나라에서 출국하는 것은 국금(國禁)을 범하는 일이었기에 감진의 도일(渡日)은 순탄치 않았다.[10] 743년부터 748년까지 다섯 번에 걸친 시도는 밀고, 강풍, 난파, 표류 등으로 좌절되었고, 이 과정에서 영예가 병사하고 상언(祥彦)이 사망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었다.[10] 감진 자신도 실명하는 역경을 겪었으나,[10] 753년 여섯 번째 시도에서 견당부사(遣唐副使) 대반고마로(大伴古麻呂)의 도움으로 견당사 배에 승선, 류큐(琉球)를 거쳐 753년 12월 사쓰마(薩摩)에 상륙하여 마침내 일본 입국에 성공한다.[12]

754년 2월 난바(難波) (오사카(大阪))에 도착한 감진은[12] 같은 해 4월 동대사(東大寺) 대불전(大仏殿) 앞에서 성무천황(聖武天皇), 광명황후(光明皇后), 효겸천황(孝謙天皇) 등에게 보살계를 수여하고, 사미(沙彌)와 승려에게 구족계를 수여하였다.[12] 755년부터 동대사 당선원(唐禪院)에 머물던 감진은[12] 759년 신다부친왕(新田部親王)(천무천황(天武天皇)의 7번째 황자)의 옛 저택 터를 하사받아[4] 사찰을 건립하고 처음에는 “당률초제(唐律招提)”라 불렀다.[4] “초제(招提)”는 산스크리트어 차투르디샤 상가(cāturdiśa(사방을 의미하는) + 상가(僧伽, 승가, 승단 조직을 의미하는))에서 유래한 중국어[3]로, 사방에서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하며, “당률초제(唐律招提)”는 “당나라의 율을 배우는 도장”이라는 뜻이다.[4] 후에 관액(官額)을 받은 후 “당장제사(唐招提寺)”라고 부르게 되었다.[4] 대승도(大僧都)에 임명되고 후에 대화상(大和上)의 존칭을 받은[12] 감진은 763년 5월, 76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12]

2. 2. 가람 정비

도쇼다이지의 가람은 감진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정비되었다.[13][14][15] 주요 건물로는 금당, 강당, 경장, 보장 등이 있다.

금당은 나라 시대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중요한 건축물로, 781년에 벌채된 재목이 사용된것으로 보아 8세기 말에 건립된것으로 추정된다.[19] 강당은 헤이조쿄(平城京)의 동조집전(東朝集殿)을 이축한 것으로, 나라 시대 궁궐 건축의 유일한 유구로서 매우 귀중하다.[16] 경장은 니타베 신노 저택의 창고를 개조한 것으로, 도쇼다이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15] 보물창고는 도쇼다이지가 세워진 이후 건립된것으로 추정된다.[32]

이 외에도 경내에는 가마쿠라 시대에 건립된 고루(사리전),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이 있는 종루, 에도 시대에 재건되지 않고 석단만 남은 계단, 1970년에 건립된 신보물창고 등이 있다. 경내 동쪽에는 수경천신사가 있으며, 과거에는 동탑이 있었으나 1802년 낙뢰로 소실되었다.[21]

2. 3. 중흥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계율 수호가 쇠퇴하면서 도쇼다이지는 쇠락하였다. 그렇지만, 1140년에는 금당, 강당, 보장, 영상당, 아미타원 등은 남아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석가 신앙, 사리 신앙과 계율 부흥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감진과 그가 가져온 사리에 대한 신앙이 부흥하였다. 가사기지의 정경이 1203년 도쇼다이지에서 석가염불회를 시작하였다.[22]

도쇼다이지 중흥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은 율종 고승 각성이다. 각성은 1243년에 사리회를 창설하고 감진의 유덕을 헌창하는 등 도쇼다이지 재건에 힘썼으며, 이듬해인 1244년에 정식으로 당사에 입사하여 재흥시켰다.[23] 각성의 법등을 계승한 증현은 여러 가람의 수리와 불상 조립 등에 힘썼으며, 계단의 창설도 행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 고다이고 천황가메야마 천황의 선율 진흥 정책을 계승하여 도쇼다이지를 숭경하였다. 1330년 8월 9일에는 고다이고 천황이 각성에게 “대비보살”의 시호를 증여하였다.

2. 4. 근현대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에 호지인(護持院) 륭광(隆光)이 도쇼다이지에서 수계를 받았다. 륭광은 후에 에도 막부(江戸幕府)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와 그의 생모인 게이쇼인(桂昌院)의 귀의를 받았고, 쓰나요시와 게이쇼인은 륭광과의 관계로 인해 도쇼다이지에도 귀의하여 이를 보호하고 수리하였다. 겐로쿠(元禄) 11년(1698년)에는 계단원(戒壇院)을 재건하였다. 한편, 여러 차례 지진이나 낙뢰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입었고, 쿄와(享和) 2년(1802년) 화재에서는 동탑(五重塔) 등 중요 건축물을 많이 잃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신불분리가 이루어지면서 수경천신사도 독립하였다. 근대 이후,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여러 당의 수리·보존 공사가 시행되었다. 1934년(쇼와 9년) 9월 21일, 무로토 태풍의 폭풍우로 보장과 개산당이 반파되고, 고루도 피해를 입었다.[24]

1941년(쇼와 16년)에는 율종계학원이 설립되었고, 1963년(쇼와 38년)에는 영묘당(구 고후쿠지(興福寺) 일승원 신전을 이축한 것)이 건립되었다.

또한, 감진의 생애와 도쇼다이지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천평의 이랑』(1957년)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감진 화상의 업적과 명성을 통해 1978년(쇼와 53년)의 일중 평화우호조약 체결에도 기여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 주요 건축물



금당(金堂)은 일본 국보로,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건립된 사찰 금당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앞쪽 7칸×1칸을 툇마루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8개의 굵은 원형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건물은 분에이 7년(1270년), 겐표 3년(1323년), 겐로쿠 6년(1693년)부터 겐로쿠 7년(1694년)에 걸쳐 수리되었다. 특히 겐로쿠 시대의 수리는 대규모로, 지붕 구조를 근세풍으로 바꾸었다. 1898년부터 1899년의 수리에서는 지붕 구조를 서양식 킹포스트 트러스로 개조하였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헤이세이 대수리"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창건 당시의 부재가 양호하게 남아있음이 밝혀졌다. 지붕 서까래는 9할이 당초 재료를 재사용하고 있으며,[25] 문짝도 당초 재료를 가공하여 사용하고 있다.[25] 2005년 나라현 교육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금당 부재에는 덴오 원년(781년)에 벌채된 히노키 재료가 사용되었으며,[26] 건립은 그 해 이후가 된다.[27]

금당 내부의 여러 불상. 오른쪽부터 약사여래입상, 여래좌상, 천수관음입상. 앞에 서 있는 것은 오른쪽이 범천입상, 왼쪽이 제석천입상(모두 국보)


당내는 넓은 공간으로, 그 위에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는 본존인 건칠여래좌상(국보), 오른쪽에는 목심건칠약사여래입상(국보), 왼쪽에는 목심건칠천수관음입상(국보) 등 3구의 거상이 안치되어 있다. 본존 앞 좌우에는 범천·제석천입상(국보), 소맷단의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국보)이 안치되어 있다. 여래, 약사여래, 천수관음의 조합은 다른 예가 없고, 경전에도 보이지 않아 그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도다이지(본존은 여래), 시모쓰케 약사지, 츠쿠시 관세음사를 「천하 삼계단」이라고 칭하지만, 당장사의 삼존은 여래·약사·관음의 조합으로 천하 삼계단을 나타내고 있다는 설도 있다.

  • 건칠여래좌상: 국보. 높이 304.5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범망경의 주존이다. 삼베를 옻칠로 굳혀 조형한 탈활건칠상이다. 제작에 수고가 드는 탈활건칠상인 것으로부터, 조동대사사의 기능공에 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광배의 천불은 860체 이상이 남아 있다. 금당의 헤이세이 대수리와 함께 당내의 불상도 반출되어 보존 수리를 받았다. 여래상의 수리는 1999년도부터 2002년도에 걸쳐 행해졌으며, 이때 몇 가지 새로운 지견이 있었다. 대좌의 연판은 현재는 12방 6단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당초는 8방 12단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 연판의 부착 흔적의 조사에서 판명되었다. X선 촬영 결과, 본상의 양손에는 2개씩의 작은 구슬(구멍이 관통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염주알로 추정됨)이 매립되어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또, 본상의 눈동자에는 돌이나 도자기와 같은 단단한 물체가 끼워져 있지만, X선 촬영 결과, 이 눈동자의 뒷면(또는 내부)에 지름 0.6센티미터 정도의 구상의 물체가 매립되어 있는 것도 판명되었다. 이러한 눈과 손바닥에 대한 공작은, 불상이 눈동자로부터의 방광 등의 「호상」을 나타내는 것을 기대하여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28][29]
  • 목심건칠약사여래입상: 국보. 높이 336.5센티미터. 목심에 목시칠을 불려 조형한 목심건칠상이다. 1972년 수리 시 왼쪽 손바닥 안쪽에 3장의 옛날 돈이 넣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그 중 가장 시대가 늦은 융평영보가 연력 15년(796년) 이후의 주조이기 때문에, 본상의 제작도 그 이후, 즉 헤이안쿄 천도 후가 된다. 광배는 이 불상의 것으로서는 너비가 너무 넓고, 다른 불상의 광배를 전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목심건칠천수관음입상: 국보. 높이 535.7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의 작품으로, 여래상보다 약간 시대가 늦다고 여겨진다. 천수관음상은 40수(합장 수를 포함하여 42수)로 천수를 대표하는 것이 많지만, 본상은 실제로 1,000개의 손을 나타낸 예로, 큰 손 42개 사이에 작은 손을 빽빽하게 심는다. 현재는 큰 손 42개, 작은 손 911개, 총 953개이지만, 제작 당초는 총 1,000개의 손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불상이 곁에 들고 있는 지물은 그 대부분이 후보이지만, 그중에는 궁전, 연화 등 당초의 것도 있다. 본상은 여래상과 마찬가지로 1999년도부터 2002년도에 걸쳐 보존 수리가 행해져, 이때 모든 곁손을 일단 떼어내고, 보존 조치를 한 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수리 시, 절 안의 수장고에서 본상의 뒷면 옷자락 부분의 조각이 발견되어, 수리 후 이 조각을 원래 위치에 복원하고 있다.
  • 목조범천·제석천입상(국보): 높이는 각각 186.2 및 188.2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헤이안 시대 초기.
  • 목조사천왕입상(국보): 높이는 185.0~188.5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헤이안 시대 초기.


강당(講堂)은 일본 국보로, 헤이조쿄의 동조집전을 이축·개조한 것이다. 덴표호지 4년(760년)경 헤이조쿄 개수에 따라 이축되었다. 동조집전은 벽과 문짝이 거의 없는 개방적인 건물이었으나, 사찰용으로 개조하면서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하고 문짝을 설치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겐치 원년(1275년)에도 개조되었지만, 나라 시대 궁궐 건축의 유일한 유구로서 매우 귀중하다.

당내에는 본존 미륵여래좌상(일본 중요문화재, 가마쿠라 시대)과 지국천, 증장천입상(국보, 나라 시대)을 안치한다. 1970년에 신보장이 완성될 때까지 당내에 많은 불상을 안치하고 있었다. 강당은 승려들이 수학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강사, 독사가 앉는 논의대가 놓여 있다.

목조 미륵불좌상은 높이 283.3센티미터로 가마쿠라 시대 작품이다. 무릎 뒤에는 코안 10년(1287년)의 기록이 있지만, 『소대천세전기』에 따르면 개안공양은 5년 후인 쇼오 5년(1292년)이다.

목조 지국천, 증장천입상은 높이가 각각 132.5 및 128.2센티미터이다. 갑옷 무늬의 조각 기법 등에 당나라 시대 석조와의 유사성이 지적되어, 간진과 함께 귀국한 장인이 제작에 관여했다고 추정된다.

경장(経蔵)은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건립된 일본 국보로, 도쇼다이지 창건 이전부터 존재했던 건물이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교창조(校倉造) 건물이다. 보장(宝蔵)은 경장과 함께 나라 시대에 건립된 교창조 창고로, 일본 국보이다.

고루(鼓楼)는 가마쿠라 시대에 건립된 사리전으로, 일본 국보이다. 간진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안치하고 있다. 1240년에 재건되었다.

미에이도(御影堂)은 일본 중요문화재이다.[30] 원래 흥복사(興福寺) 일승원(一乗院)의 신전이었으며, 1649년에 건립되었다.[30] 일승원이 폐사된 후에는 나라현청(奈良県庁) 및 나라지방법원(奈良地方裁判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64년에 도쇼다이지로 이축되었다.[30]

어영당에는 간진(鑑真)의 초상 조각(국보)이 안치되어 있으며, 개산기 전후인 6월 5일~7일에만 공개된다.[30] 이 초상 조각은 닌키(忍基)가 감진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만들게 한 것이라고 전해지며, 763년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 조각으로 알려져 있으며, 눈을 감은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30] 1977년에는 파리의 쁘띠 팔레 미술관(プティ・パレ美術館)에서 전시되었고, 1980년에는 중국 양주와 베이징에서 공개되었다.[30] 2013년에는 복제상이 제작되었다.

어영당 내벽에는 일본 화가 히가시야마 가이이(東山魁夷)가 감진상에 봉납하기 위해 그린 장벽화가 있다.[30][31] 10년 이상에 걸쳐 일본과 중국의 여러 곳을 스케치하여 제작한 것으로, 감진에게 고향 중국과 일본의 풍경을 봉납하고 영령을 위로한다는 취지로 그려졌다.[30][31]

장벽화는 채색화와 수묵화로 구성되어 있다. 채색화는 일본의 바다와 산의 풍경을 표현한 『도성(濤声)』(16면)과 『산운(山雲)』(10면)으로, 1975년에 완성되었다. 수묵화는 감진의 고향 양주를 포함한 중국의 풍경을 그린 『양주훈풍(揚州薫風)』(26면), 『황산효운(黄山暁雲)』(8면), 『계림월소(桂林月宵)』(8면)로, 1980년에 완성되었다.[30][31] 특히 『황산효운(黄山暁雲)』은 중국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의 풍경을 먹으로만 표현한 작품이다.[30] 감진상의 궤 내벽에는 1981년에 그려진 『서광(瑞光)』이 있다.[31]

도쇼다이지 경내에는 다양한 건물과 시설이 있다. 남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금당(국보)이 있고, 그 뒤편에 강당(국보)이 있다. 옛날에는 남대문과 금당 사이에 중문이 있었고, 중문 좌우에서 회랑이 나와 금당 좌우에 이르렀다. 금당·강당 사이 동서쪽에는 각각 고루(국보)와 종루가 있다. 강당 동쪽에는 남북으로 긴 동실(일본 중요문화재)이 있는데, 이 건물 남쪽은 라이도(禮堂, 중요문화재)이라고 불린다.

  • 라이도(禮堂)(중요문화재)은 본래 승방을 1283년에 개축한 것이다. 고루 동쪽에 있는 남북으로 가늘고 긴 건물로, 가로 19칸, 세로 4칸, 이리모야지붕, 본기와葺き이다. 예당 내에는 청량사식 석가여래입상(중요문화재)과 일공사리탑(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 * 목조석가여래입상 - 높이 166.7센티미터. 교토·사가 청량사에 있는, 삼국 전래의 영상으로 신앙을 모으는 석가상의 양식을 본뜬 "청량사식"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석가상이다.
  • 동실(東室)(중요문화재)
  • 보물창고(宝蔵)(국보)는 예당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교창조 창고로, 나라 시대 건립되었다. 팔작지붕이며, 보물창고는 이곳이 절이 된 이후의 건물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 경장(経蔵)(국보)은 나라 시대 건립되었으며, 니타베 신노 저택이었던 시대부터의 건물로, 미곡창고를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맞배지붕이었다.
  • 신보물창고(新宝蔵) 는 1970년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수장고이다. 매년 봄과 가을에 기간을 정하여 일반에 공개된다.
  • 계단(戒壇)은 경내 서쪽에 있으며, 출가자가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한 수계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다. 1978년에 인도·산치식 고탑을 본뜬 보탑이 단 위에 놓였다.
  • 감진화상묘(鑑真和上墓)는 개산묘라고도 불린다.
  • 그 외에, 개산당, 중흥당, 영묘당(중요문화재), 조자양이 손수 심은 경화, 동탑터 등이 있다.

3. 1. 금당(金堂)



금당(金堂)은 일본 국보로,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건립된 사찰 금당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앞쪽 7칸×1칸을 툇마루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8개의 굵은 원형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건물은 1270년, 1323년, 1693년부터 1694년에 걸쳐 수리되었다. 특히 1693년의 수리는 대규모로, 지붕 구조를 근세풍으로 바꾸었다. 1898년부터 1899년의 수리에서는 지붕 구조를 서양식 킹포스트 트러스로 개조하였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헤이세이 대수리"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창건 당시의 부재가 양호하게 남아있음이 밝혀졌다. 지붕 서까래는 9할이 당초 재료를 재사용하고 있으며,[25] 문짝도 당초 재료를 가공하여 사용하고 있다.[25] 2005년 나라현 교육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금당 부재에는 781년에 벌채된 히노키 재료가 사용되었으며,[26] 건립은 그 해 이후가 된다.[27]

당내는 넓은 공간으로, 그 위에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는 본존인 건칠여래좌상(국보), 오른쪽에는 목심건칠약사여래입상(국보), 왼쪽에는 목심건칠천수관음입상(국보) 등 3구의 거상이 안치되어 있다. 본존 앞 좌우에는 범천·제석천입상(국보), 소맷단의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국보)이 안치되어 있다. 여래, 약사여래, 천수관음의 조합은 다른 예가 없고, 경전에도 보이지 않아 그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도다이지(본존은 여래), 시모쓰케 약사지, 츠쿠시 관세음사를 「천하 삼계단」이라고 칭하지만, 당장사의 삼존은 여래·약사·관음의 조합으로 천하 삼계단을 나타내고 있다는 설도 있다.

  • 건칠여래좌상: 국보. 높이 304.5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범망경의 주존이다. 삼베를 옻칠로 굳혀 조형한 탈활건칠상이다. 제작에 수고가 드는 탈활건칠상인 것으로부터, 조동대사사의 기능공에 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광배의 천불은 860체 이상이 남아 있다. 금당의 헤이세이 대수리와 함께 당내의 불상도 반출되어 보존 수리를 받았다. 여래상의 수리는 1999년도부터 2002년도에 걸쳐 행해졌으며, 이때 몇 가지 새로운 지견이 있었다. 대좌의 연판은 현재는 12방 6단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당초는 8방 12단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 연판의 부착 흔적의 조사에서 판명되었다. X선 촬영 결과, 본상의 양손에는 2개씩의 작은 구슬(구멍이 관통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염주알로 추정됨)이 매립되어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또, 본상의 눈동자에는 돌이나 도자기와 같은 단단한 물체가 끼워져 있지만, X선 촬영 결과, 이 눈동자의 뒷면(또는 내부)에 지름 0.6센티미터 정도의 구상의 물체가 매립되어 있는 것도 판명되었다. 이러한 눈과 손바닥에 대한 공작은, 불상이 눈동자로부터의 방광 등의 「호상」을 나타내는 것을 기대하여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28][29]
  • 목심건칠약사여래입상: 국보. 높이 336.5센티미터. 목심에 목시칠을 불려 조형한 목심건칠상이다. 1972년 수리 시 왼쪽 손바닥 안쪽에 3장의 옛날 돈이 넣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그 중 가장 시대가 늦은 융평영보가 796년 이후의 주조이기 때문에, 본상의 제작도 그 이후, 즉 헤이안쿄 천도 후가 된다. 광배는 이 불상의 것으로서는 너비가 너무 넓고, 다른 불상의 광배를 전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목심건칠천수관음입상: 국보. 높이 535.7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의 작품으로, 여래상보다 약간 시대가 늦다고 여겨진다. 천수관음상은 40수(합장 수를 포함하여 42수)로 천수를 대표하는 것이 많지만, 본상은 실제로 1,000개의 손을 나타낸 예로, 큰 손 42개 사이에 작은 손을 빽빽하게 심는다. 현재는 큰 손 42개, 작은 손 911개, 총 953개이지만, 제작 당초는 총 1,000개의 손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불상이 곁에 들고 있는 지물은 그 대부분이 후보이지만, 그중에는 궁전, 연화 등 당초의 것도 있다. 본상은 여래상과 마찬가지로 1999년도부터 2002년도에 걸쳐 보존 수리가 행해져, 이때 모든 곁손을 일단 떼어내고, 보존 조치를 한 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수리 시, 절 안의 수장고에서 본상의 뒷면 옷자락 부분의 조각이 발견되어, 수리 후 이 조각을 원래 위치에 복원하고 있다.
  • 목조범천·제석천입상(국보): 높이는 각각 186.2 및 188.2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헤이안 시대 초기.
  • 목조사천왕입상(국보): 높이는 185.0~188.5센티미터. 나라 시대 말기~헤이안 시대 초기.

3. 2. 강당(講堂)

강당은 일본 국보로, 헤이조쿄의 동조집전을 이축·개조한 것이다. 덴표호지 4년(760년)경 헤이조쿄 개수에 따라 이축되었다. 동조집전은 벽과 문짝이 거의 없는 개방적인 건물이었으나, 사찰용으로 개조하면서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하고 문짝을 설치하였다. 겐치 원년(1275년)에도 개조되었지만, 나라 시대 궁궐 건축의 유일한 유구로서 매우 귀중하다.

당내에는 본존 미륵여래좌상(중요문화재, 가마쿠라 시대)과 지국천, 증장천입상(국보, 나라 시대)을 안치한다. 1970년에 신보장이 완성될 때까지 당내에 많은 불상을 안치하고 있었다. 강당은 승려들이 수학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강사, 독사가 앉는 논의대가 놓여 있다.

목조 미륵불좌상은 높이 283.3센티미터로 가마쿠라 시대 작품이다. 무릎 뒤에는 코안 10년(1287년)의 기록이 있지만, 『소대천세전기』에 따르면 개안공양은 5년 후인 쇼오 5년(1292년)이다.

목조 지국천, 증장천입상은 높이가 각각 132.5 및 128.2센티미터이다. 갑옷 무늬의 조각 기법 등에 당나라 시대 석조와의 유사성이 지적되어, 간진과 함께 귀국한 장인이 제작에 관여했다고 추정된다.

3. 3. 경장(経蔵)과 보장(宝蔵)

경장(経蔵)은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건립된 일본 국보로, 도쇼다이지 창건 이전부터 존재했던 건물이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교창조(校倉造) 건물이다. 보장(宝蔵)은 경장과 함께 나라 시대에 건립된 교창조 창고로, 일본 국보이다.

3. 4. 고루(鼓楼)

고루(鼓楼)는 가마쿠라 시대에 건립된 사리전으로, 일본 국보이다. 감진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안치하고 있다. 1240년에 재건되었다.

3. 5. 어영당(御影堂)

어영당(御影堂)은 중요문화재이다.[30] 원래 흥복사(興福寺) 일승원(一乗院)의 신전이었으며, 1649년에 건립되었다.[30] 일승원이 폐사된 후에는 나라현청(奈良県庁) 및 나라지방법원(奈良地方裁判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64년에 도쇼다이지로 이축되었다.[30]

어영당에는 감진(鑑真)의 초상 조각(국보)이 안치되어 있으며, 개산기 전후인 6월 5일~7일에만 공개된다.[30] 이 초상 조각은 닌키(忍基)가 감진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만들게 한 것이라고 전해지며, 763년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 조각으로 알려져 있으며, 눈을 감은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30] 1977년에는 파리의 쁘띠 팔레 미술관(プティ・パレ美術館)에서 전시되었고, 1980년에는 중국 양주와 베이징에서 공개되었다.[30] 2013년에는 복제상이 제작되었다.

어영당 내벽에는 일본 화가 히가시야마 가이이(東山魁夷)가 감진상에 봉납하기 위해 그린 장벽화가 있다.[30][31] 10년 이상에 걸쳐 일본과 중국의 여러 곳을 스케치하여 제작한 것으로, 감진에게 고향 중국과 일본의 풍경을 봉납하고 영령을 위로한다는 취지로 그려졌다.[30][31]

장벽화는 채색화와 수묵화로 구성되어 있다. 채색화는 일본의 바다와 산의 풍경을 표현한 『도성(濤声)』(16면)과 『산운(山雲)』(10면)으로, 1975년에 완성되었다. 수묵화는 감진의 고향 양주를 포함한 중국의 풍경을 그린 『양주훈풍(揚州薫風)』(26면), 『황산효운(黄山暁雲)』(8면), 『계림월소(桂林月宵)』(8면)로, 1980년에 완성되었다.[30][31] 특히 『황산효운(黄山暁雲)』은 중국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의 풍경을 먹으로만 표현한 작품이다.[30] 감진상의 궤 내벽에는 1981년에 그려진 『서광(瑞光)』이 있다.[31]

3. 6. 기타



도쇼다이지 경내에는 다양한 건물과 시설이 있다. 남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금당(국보)이 있고, 그 뒤편에 강당(국보)이 있다. 옛날에는 남대문과 금당 사이에 중문이 있었고, 중문 좌우에서 회랑이 나와 금당 좌우에 이르렀다. 금당·강당 사이 동서쪽에는 각각 고루(국보)와 종루가 있다. 강당 동쪽에는 남북으로 긴 동실(중요문화재)이 있는데, 이 건물 남쪽은 예당(禮堂, 중요문화재)이라고 불린다.

  • 예당(禮堂)(중요문화재)은 본래 승방을 1283년에 개축한 것이다. 고루 동쪽에 있는 남북으로 가늘고 긴 건물로, 가로 19칸, 세로 4칸, 이리모야지붕, 본기와葺き이다. 예당 내에는 청량사식 석가여래입상(중요문화재)과 일공사리탑(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 * 목조석가여래입상 - 높이 166.7센티미터. 교토·사가 청량사에 있는, 삼국 전래의 영상으로 신앙을 모으는 석가상의 양식을 본뜬 "청량사식"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석가상이다.
  • 동실(東室)(중요문화재)
  • 보물창고(宝蔵)(국보)는 예당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교창조 창고로, 나라 시대 건립되었다. 팔작지붕이며, 보물창고는 이곳이 절이 된 이후의 건물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 경장(経蔵)(국보)은 나라 시대 건립되었으며, 니타베 신노 저택이었던 시대부터의 건물로, 미곡창고를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맞배지붕이었다.
  • 신보물창고(新宝蔵) 는 1970년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수장고이다. 매년 봄과 가을에 기간을 정하여 일반에 공개된다.
  • 계단(戒壇)은 경내 서쪽에 있으며, 출가자가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한 수계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다. 1978년에 인도·산치식 고탑을 본뜬 보탑이 단 위에 놓였다.
  • 감진화상묘(鑑真和上墓)는 개산묘라고도 불린다.
  • 그 외에, 개산당, 중흥당, 영묘당(중요문화재), 조자양이 손수 심은 경화, 동탑터 등이 있다.

4. 문화재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건립된 금당, 강당, 보장, 경장과 1240년에 재건된 고로는 일본 국보이다.[34] 금당에는 옛 鴟尾 2개[33], 옛 부재 22매, 고재 11점이 부속되어 있고,[34] 강당에는 蛙股 4개, 고좌 1쌍, 고재 53점이,[34] 고루에는 厨子, 고재 21점이,[34] 경장에는 고재 9점,[34] 보장에는 고재 4점이 부속되어 있다.[34]

조각으로는 영견당에 안치된 건칠 감진화상좌상, 금당에 안치된 건칠 盧舎那仏좌상, 목심건칠 천수관음입상, 목심건칠 약사여래입상, 목조 범천·제석천입상, 목조 사천왕입상이 일본 국보이다. 목조 약사여래입상 1구, 목조 전중보왕보살입상 1구, 목조 전사자후보살입상 1구, 목조 전대자재왕보살입상 1구, 목조 이천왕입상 2구 (계 6구)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35][36]

금당제불 (앞에서부터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천수관음)


160px

목심건칠천수관음입상


목조사천왕입상 중 다문천


목조범천·제석천입상 중 범천


공예품으로는 감진화상이 가져온 사리를 담은 백유리 사리호(白瑠璃舎利壺) 1구 (부속: 후다이고 천황 봉화압, 아시카가 요시미츠 봉화압, 아시카가 요시노리 봉)와 방원채사화망 1매, 금귀사리탑(金亀舎利塔) 1기가 일본 국보이다.

도쇼다이지(唐招提寺) 구내지(舊境内) 또한 일본 국보이다.

도쇼다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문화재가 있다.
건축물

  • 강당(동실 포함)
  • 구 일승원 2동(영묘당)
  • 신전
  • 전상 및 현관
  • 미에이도
  • 라이도

회화
동정화전 제1권 제1단 (감진의득도)

  • 비단에 채색한 십육나한상
  • 비단에 채색한 대위덕명왕상
  • 비단에 채색한 법화만다라도
  • 종이에 채색한 동정화권 연행필 5권
  • 비단에 채색한 약사십이신장상 - 가마쿠라 시대 후기 작품.[38]
  • 종이에 금박을 입히고 채색한 남만인도래도·경마도 육폭 병풍(부속 목제 병풍상자 1합) - 에도 시대 작품.[39][40]
  • 비단에 채색한 행기보살상 1폭 (나라국립박물관 위탁)
  • 비단에 채색한 원조율사상 1폭
  • 비단에 채색한 흥정보살상 1폭

조각

  • 목조 미륵여래좌상(강당 안치)
  • 목조 궤 속 석가여래입상 정가 2년(1258년)(강당 안치)
  • 목조 지장보살입상(지장당 안치)
  • 목조 대비보살좌상 응영 2년(1395년) 성경 작(중흥당 안치)
  • 목조 대일여래좌상
  • 목조 여래형입상(두부, 양수 결손) 9세기
  • 목조 보살입상(면부·좌수 결손)
  • 목심건칠보살입상 2구
  • 목조 천부형입상(전 제석천)
  • 목조 여래좌상(전 석가여래, 전 다보여래) 2구
  • 목조 보생여래입상
  • 목조 여래형좌상·지장보살입상·보살형입상(두부 결손)·천부형입상(전 범천)
  • 목조 십일면관음입상(1900년(메이지 33년) 중문 지정)
  • 목조 십일면관음입상(1901년(메이지 34년) 중문 지정, 법화원 구장)
  • 목조 성덕태자입상
  • 목조 대위덕명왕상
  • 목조 부동명왕좌상 탐해 작
  • 목조 길상천입상
  • 목조 행기보살좌상
  • 목심건칠불두(1902년 중문 지정)
  • 목심건칠불두(1915년 중문 지정)
  • 목조 보살두
  • 동판 압출 삼존불상
  • 동판압출불상 5면(약사여래입상, 십일면관음입상, 길상천입상, 여래입상, 여래좌상)
  • 전 아미타여래상(전 문수보살상)
  • 쇠로 만든 지팡이 1개

공예품

  • 악어가죽 북 테두리(1915년 중문 지정)
  • 악어가죽 북 테두리(부: 가죽 조각 일괄)(1959년 중문 지정)
  • 징 북 테두리(1915년 중문 지정)
  • 징 북 테두리(1929년 중문 지정)
  • 징 북 테두리 1쌍(1959년 중문 지정)
  • 소가죽 화만잔궐 8매분(부: 조각 일괄)
  • 금동 금강반
  • 금동 사리기
  • 금동 법구류(금강반, 오고령, 독고척, 삼고척, 오고척)
  • 금동 법구류(화사 2, 육기 24, 살수기 1, 도향기 1)
  • 금동 연변식 법구(화사 1, 화병 2, 육기 6, 음식기 2, 살수기 1, 도향기 1)
  • 동 향수호
  • 흑칠 화반
  • 흑칠 사리궤
  • 주철 삼구족(부: 목함 영정 13년 명)
  • 일공사리탑
  • 법회소용구류(혜려 1구, 갈고 1구, 고동 1구, 목제순 3매, 목제병향로 3구(부: 잔궐 10구), 목제룡두 8두, 목제마두 1두)
  • 당장사 칙액
  • 범종
  • 흑칠 경가 - 무로마치 시대, 분명 10년(1478년) 작품.[38]
  • 금동장 윤보문거함·연화문향로함 1쌍 - 나라 국립박물관 위탁. 가마쿠라 시대 작품.[38]

서적·전적, 고문서, 역사자료

  • 근본설일체유부계경·노모육영경 2권(천평 12년 5월 1일 광명황후 원경)
  • 계율전래기 상권 보안 5년 악서
  • 사분률산번보궐행사초 권하之삼
  • 대반야경 권제백육십칠 보규 10년 원문
  • 대비루자나성불신변가지경 승력 3년 독파악서 및 승안 4년 독파악서
  • 법화경(개결공) 10첩 각성필 관원 1년·2년 악서
  • 사분계본(관원 1년 악서) 1첩, 범망경(관원 1년 악서) 2첩, 보갑인다라니경 1첩, 유식삼십송·대승백법명문론·반야심경(보지 1년 악서) 1첩 이상 5첩 각성필
  • 유가사지론 권제삼십팔 홍안 5년 중궁사니 신여이점악서(나라시대 서사)
  • 당장사 일체경 4,794첩(송판 4,456첩, 화판 88첩, 사본 250첩) 부 원판 오부대승경(내화판 83권 사본 29권) 269권
  • 령사기단간(군방령, 영선령, 관시령) 2지
  • 당장사문서 2권
  • 남섬부주대일본국정통도(전향사 구장)
  • 불당납치문서함 및 소납문서, 목찰 5구 1권(10통) 1통 - 무로마치 시대.[38]


(참고) 교토·임생사의 목조 지장보살입상(중요문화재)는 당장사 구장.

4. 1. 국보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건립된 금당, 강당, 보장, 경장과 1240년에 재건된 고로는 일본 국보이다.[34] 금당에는 옛 鴟尾 2개[33], 옛 부재 22매, 고재 11점이 부속되어 있고,[34] 강당에는 蛙股 4개, 고좌 1쌍, 고재 53점이,[34] 고루에는 厨子, 고재 21점이,[34] 경장에는 고재 9점,[34] 보장에는 고재 4점이 부속되어 있다.[34]

조각으로는 영견당에 안치된 건칠 감진화상좌상, 금당에 안치된 건칠 盧舎那仏좌상, 목심건칠 천수관음입상, 목심건칠 약사여래입상, 목조 범천·제석천입상, 목조 사천왕입상이 일본 국보이다. 목조 약사여래입상 1구, 목조 전중보왕보살입상 1구, 목조 전사자후보살입상 1구, 목조 전대자재왕보살입상 1구, 목조 이천왕입상 2구 (계 6구)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35][36]

공예품으로는 감진화상이 가져온 사리를 담은 백유리 사리호(白瑠璃舎利壺) 1구 (부속: 후다이고 천황 봉화압, 아시카가 요시미츠 봉화압, 아시카가 요시노리 봉)와 방원채사화망 1매, 금귀사리탑(金亀舎利塔) 1기가 일본 국보이다.

도쇼다이지(唐招提寺) 구내지(舊境内) 또한 일본 국보이다.

4. 2. 중요문화재

도쇼다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문화재가 있다.
건축물

  • 강당(동실 포함)
  • 구 일승원 2동(영묘당)
  • 신전
  • 전상 및 현관
  • 미에이도
  • 라이도

회화

  • 비단에 채색한 십육나한상
  • 비단에 채색한 대위덕명왕상
  • 비단에 채색한 법화만다라도
  • 종이에 채색한 동정화권 연행필 5권
  • 비단에 채색한 약사십이신장상 - 가마쿠라 시대 후기 작품.[38]
  • 종이에 금박을 입히고 채색한 남만인도래도·경마도 육폭 병풍(부속 목제 병풍상자 1합) - 에도 시대 작품.[39][40]
  • 비단에 채색한 행기보살상 1폭 (나라국립박물관 위탁)
  • 비단에 채색한 원조율사상 1폭
  • 비단에 채색한 흥정보살상 1폭

조각

  • 목조 미륵여래좌상(강당 안치)
  • 목조 궤 속 석가여래입상 정가 2년(1258년)(강당 안치)
  • 목조 지장보살입상(지장당 안치)
  • 목조 대비보살좌상 응영 2년(1395년) 성경 작(중흥당 안치)
  • 목조 대일여래좌상
  • 목조 여래형입상(두부, 양수 결손) 9세기
  • 목조 보살입상(면부·좌수 결손)
  • 목심건칠보살입상 2구
  • 목조 천부형입상(전 제석천)
  • 목조 여래좌상(전 석가여래, 전 다보여래) 2구
  • 목조 보생여래입상
  • 목조 여래형좌상·지장보살입상·보살형입상(두부 결손)·천부형입상(전 범천)
  • 목조 십일면관음입상(1900년(메이지 33년) 중문 지정)
  • 목조 십일면관음입상(1901년(메이지 34년) 중문 지정, 법화원 구장)
  • 목조 성덕태자입상
  • 목조 대위덕명왕상
  • 목조 부동명왕좌상 탐해 작
  • 목조 길상천입상
  • 목조 행기보살좌상
  • 목심건칠불두(1902년 중문 지정)
  • 목심건칠불두(1915년 중문 지정)
  • 목조 보살두
  • 동판 압출 삼존불상
  • 동판압출불상 5면(약사여래입상, 십일면관음입상, 길상천입상, 여래입상, 여래좌상)
  • 전 아미타여래상(전 문수보살상)
  • 쇠로 만든 지팡이 1개

공예품

  • 악어가죽 북 테두리(1915년 중문 지정)
  • 악어가죽 북 테두리(부: 가죽 조각 일괄)(1959년 중문 지정)
  • 징 북 테두리(1915년 중문 지정)
  • 징 북 테두리(1929년 중문 지정)
  • 징 북 테두리 1쌍(1959년 중문 지정)
  • 소가죽 화만잔궐 8매분(부: 조각 일괄)
  • 금동 금강반
  • 금동 사리기
  • 금동 법구류(금강반, 오고령, 독고척, 삼고척, 오고척)
  • 금동 법구류(화사 2, 육기 24, 살수기 1, 도향기 1)
  • 금동 연변식 법구(화사 1, 화병 2, 육기 6, 음식기 2, 살수기 1, 도향기 1)
  • 동 향수호
  • 흑칠 화반
  • 흑칠 사리궤
  • 주철 삼구족(부: 목함 영정 13년 명)
  • 일공사리탑
  • 법회소용구류(혜려 1구, 갈고 1구, 고동 1구, 목제순 3매, 목제병향로 3구(부: 잔궐 10구), 목제룡두 8두, 목제마두 1두)
  • 당장사 칙액
  • 범종
  • 흑칠 경가 - 무로마치 시대, 분명 10년(1478년) 작품.[38]
  • 금동장 윤보문거함·연화문향로함 1쌍 - 나라 국립박물관 위탁. 가마쿠라 시대 작품.[38]

서적·전적, 고문서, 역사자료

  • 근본설일체유부계경·노모육영경 2권(천평 12년 5월 1일 광명황후 원경)
  • 계율전래기 상권 보안 5년 악서
  • 사분률산번보궐행사초 권하之삼
  • 대반야경 권제백육십칠 보규 10년 원문
  • 대비루자나성불신변가지경 승력 3년 독파악서 및 승안 4년 독파악서
  • 법화경(개결공) 10첩 각성필 관원 1년·2년 악서
  • 사분계본(관원 1년 악서) 1첩, 범망경(관원 1년 악서) 2첩, 보갑인다라니경 1첩, 유식삼십송·대승백법명문론·반야심경(보지 1년 악서) 1첩 이상 5첩 각성필
  • 유가사지론 권제삼십팔 홍안 5년 중궁사니 신여이점악서(나라시대 서사)
  • 당장사 일체경 4,794첩(송판 4,456첩, 화판 88첩, 사본 250첩) 부 원판 오부대승경(내화판 83권 사본 29권) 269권
  • 령사기단간(군방령, 영선령, 관시령) 2지
  • 당장사문서 2권
  • 남섬부주대일본국정통도(전향사 구장)
  • 불당납치문서함 및 소납문서, 목찰 5구 1권(10통) 1통 - 무로마치 시대.[38]


(참고) 교토·임생사의 목조 지장보살입상(중요문화재)는 당장사 구장.

5. 행사


  • '''범망회(うちわまき)'''(5월 19일) - 가마쿠라 시대도쇼다이지를 중흥시킨 각성 상인을 기리는 행사이다. 각성은 살생계를 지켜 모기도 죽이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그 덕을 기리는 법화사니중이 모기라도 쫓아줄 수 있도록 영전에 부채를 바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15시, 고루에서 하트 모양을 한 1500장의 액막이 부채를 참배객들에게 뿌린다. 이 부채는 해충 및 낙뢰를 막는 영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 '''개산기(開山忌)'''(6월 5일 - 6월 7일) - 감진의 명일인 6월 6일을 전후하여 3일간 영묘당에서 국보 감진화상좌상을 공개한다. 동산 규이의 장벽화(障壁画)도 함께 공개된다.
  • '''관월찬불회(観月賛仏会)'''(음력 8월 14일 - 16일) - 야간에 금당을 개방하여 불상을 감상할 수 있다.

6. 갤러리

도쇼다이지 앞 기념비


7. 교통

긴테쓰 가시하라선 니시노쿄역에서 도보 8분.

8. 주변

야쿠시지와 보라이산 고분(수닌 천황릉)이 근처에 있다.

참조

[1] 서적 普通话水平测试实施纲要. Putonghua Shuiping Ceshi Gangyao. 商务印书馆 2004
[2] 웹사이트 鑑真さんのお堂よみがえる 6月に落慶法要、唐招提寺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22-04-06
[3] Youtube 佐々木閑「仏陀の生涯26」(動画) https://www.youtube.[...]
[4] 서적 (大橋, 2016)
[5] 서적 (森, 2016)
[6] 서적 (竹田, 2016)
[7] 서적 (片岡, 2016)
[8] 서적 (奈良国立博物館, 2009年)
[9] 서적 (上杉, 2016)
[10] 서적 (鷲塚, 2009)
[11] 서적 (林, 2016)
[12] 서적 (奈良国立博物館, 2009)
[13] 뉴스 創建時伽藍 東西255メートル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2016-09-01
[14] 서적 (奈良国立博物館, 1993)
[15] 서적 (鷲塚, 2009)
[16] 서적 (片岡, 2016)
[17] 서적 (片岡, 2016)
[18] 서적 (片岡, 2016)
[19] 서적 (光谷, 2009)
[20] 서적 (片岡, 2016)
[21] 서적 (山本, 1993)
[22] 서적 (山本, 1993)
[23] 서적 (細川, 2009)
[24] 뉴스 京都・奈良の国宝建造物も大損害 大阪毎日新聞 1934-09-23
[25] 간행물 唐招提寺金堂の解体修理現場から 国宝鑑真和上展 図録 2009
[26] 간행물 年輪年代測定調査 月刊文化財 554号 2009
[27] 간행물 金堂の建築及び平成の大修理 月刊文化財 554号 2009
[28] 서적 (奥, 2009)
[29] 서적 (神田, 2009)
[30] 웹사이트 特集 唐招提寺障壁画・海と山〜東山魁夷制作の記録 https://www2.nhk.or.[...] NHKアーカイブス
[31] 서적 唐招提寺への道
[32] 서적 日本の国宝6
[33] 법령 平成24年7月9日文部科学省告示第107号 2012-07-09
[34] 법령 令和4年9月20日文部科学省告示第119号 2022-09-20
[35] 법령 令和元年7月23日文部科学省告示第23号 2019-07-23
[36] 웹사이트 文化審議会答申〜国宝・重要文化財(美術工芸品)の指定及び登録有形文化財(美術工芸品)の登録について〜 https://www.bunka.go[...] 2019-03-18
[37] 웹사이트 唐招提寺の小院が80年ぶり里帰り - 産経WEST http://www.sankei.co[...] 2014-03-11
[38] PDF 奈良県指定文化財一覧 http://www.pref.nara[...]
[39] PDF 紙本金地著色南蛮人渡来図・競馬図 http://www.pref.nara[...]
[40] PDF 奈良県教育委員会告示第19号 http://www3.pref.nar[...] 2017-02-14
[41] 뉴스 天平の三彩瓦65点 - 唐招提寺 https://www.nara-np.[...]
[42] 뉴스 近くの建物で使用か - 唐招提寺・三彩瓦/西室跡周辺 大量に出土 https://www.nara-np.[...]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