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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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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가을은 1977년 독일에서 발생한 일련의 테러 사건과 그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반응을 일컫는 용어이다. 독일 적군파(RAF)의 주요 인물들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납치 사건과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서독 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슐라이어 납치 사건은 옥중에 있는 RAF 멤버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루프트한자 납치 사건은 테러리스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서독 정부는 테러 방지를 위한 법률 및 제도를 강화했으며, 정치권에서는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사건들은 서독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독일의 정치, 법률,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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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적군파 로고
적군파 로고
발생 기간1977년 9월 5일 ~ 1977년 10월 18일
발생 장소서독
소말리아
기타 국가
주요 관련 장소쾰른
슈투트가르트
뮐하우젠

브뤼셀
팔마데마요르카
주요 사건위르겐 폰토 납치 및 살해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납치 및 살해
란츠후트 납치 사건
모가디슈 사건
결과서독의 승리
교전 세력
서독서독
적군파적군파
혁명 세포혁명 세포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지휘관 및 지도자
서독헬무트 슈미트
한스-위르겐 비슈니프스키
울리히 베게너
적군파안드레아스 바더 (사망)
구드룬 엔슬린 (사망)
얀-카를 라스페 (사망)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조하 이르 야히아 아카체 (사망)
피해 규모
사망자7명
부상자4명
배경
시기냉전 시대
관련 용어
독일어 명칭Deutscher Herbst (독일의 가을)
Deutschland im Herbst (독일의 가을)
추가 정보
관련 영화독일의 가을
관련 서적독일의 가을

2. 배경

RAF는 여러 차례 테러 사건을 일으켰으나, 1972년안드레아스 바더, 울리케 마인호프 등 핵심 멤버들이 체포되어 슈투트가르트의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조직이 와해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변호사이자 적군파 지지자였던 클라우스 크로아상(Klaus Croissant)과 지크프리트 하크(Siegfried Haag)는 조직의 재건을 도모했다. 이들은 RAF의 후계를 이을 "2세대" 멤버들을 모집하고 훈련했으며, 옥중에 있는 "1세대" 멤버들과 면회하며 그들의 메시지를 외부의 지지자들에게 전달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수감된 RAF 1세대 멤버들은 옥중에서 여러 차례 대규모 단식 투쟁을 벌이며 저항을 이어갔다. 한편, 새롭게 조직된 RAF 2세대는 1975년 정치인 페터 로렌츠(Peter Lorenz) 납치 사건과 스톡홀름 서독 대사관 점거 사건 등 주목도 높은 사건들을 연달아 일으키며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이후 1977년에 벌어질 격렬한 사건들, 즉 '독일의 가을'의 배경이 되었다.

2. 1. 초기 사건 (1977년 봄-여름)

1977년은 독일 적군파(RAF) 2세대의 활동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 RAF는 주요 인물들을 잇따라 공격하여 수사를 혼란시키고 정부의 의지를 꺾을 목적으로[3], "77년 공세"라 불리는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이 시기, 특히 봄과 여름에 발생한 사건들은 이후 '독일의 가을'로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의 시작을 알렸다. 일반적으로 9월 이전의 사건들은 독일의 가을의 일부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그 배경이 되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지크프리트 부바크 암살1977년 4월 7일, 연방 검찰 총장 지크프리트 부바크가 카를스루에에서 암살당했다. 부바크는 운전기사 볼프강 괴벨, 연방 검찰청 차량 관리 책임자 게오르크 부르스터와 함께 자동차로 이동하던 중 신호 대기를 위해 멈춰 섰다. 이때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한 울리케 마인호프 사령부(''Kommando Ulrike Meinhof'') 소속 RAF 단원들이 자동 소총으로 차량에 총격을 가했고, 세 사람 모두 현장에서 사망했다.
위르겐 폰토 암살1977년 7월 30일, 드레스드너 은행 이사회 대변인이었던 위르겐 폰토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근교 도시 오버우르젤의 자택 앞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RAF 단원인 수잔네 알브레히트, 브리기테 모른하우프트, 크리스티안 클라르가 폰토를 납치하려다 실패하면서 발생했다. 알브레히트는 폰토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그녀의 자매는 폰토가 대부를 맡기도 했다. 알브레히트의 정치적 급진화를 알지 못했던 폰토는 의심 없이 이들을 ''오버회흐슈타터 슈트라세''에 있는 자택으로 맞이했다. 폰토가 납치에 저항하자 클라르와 모른하우프트가 그에게 여러 발의 총을 쏘아 치명상을 입혔다. 범인들은 폰토의 집 앞에서 페터-위르겐 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주했다.
기타 사건같은 해 8월 25일에는 카를스루에에 있는 독일 연방 검찰청 건물에 대한 공격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봄과 여름의 사건들은 가을에 벌어질 더 격렬한 테러와 사회적 긴장의 서막이었다.

3. 독일의 가을 (1977년 가을)

1977년 가을, 서독 사회는 독일 적군파(RAF)에 의한 일련의 테러 사건으로 극심한 혼란과 위기를 겪었다. 이 시기를 흔히 독일의 가을(Deutscher Herbstdeu)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들은 서독 정부와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 방식과 사회적 논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건의 시작은 1977년 9월 5일, 당시 독일 고용주 연합회(BDA) 및 독일 산업 연맹(BDI) 회장이었던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가 쾰른에서 RAF 조직원들에게 납치되면서부터였다. RAF는 슐라이어를 인질로 삼아,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RAF 1세대 핵심 조직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이끄는 서독 정부는 과거 페터 로렌츠 납치 사건 때와는 달리 테러리스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정부의 강경 대응에 직면한 RAF는 압박 수위를 높이기 위해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과 공조하여 10월 13일, 마요르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루프트한자 181편 여객기를 납치했다. '란츠후트'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비행기는 여러 국가를 경유한 끝에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착륙했다. 서독 정부는 GSG 9 특수부대를 급파하여 10월 18일 새벽,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을 펼쳐 납치범들을 제압하고 모든 인질을 구출했다.

같은 날 새벽, 란츠후트 구출 작전 성공 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RAF 핵심 간부 안드레아스 바더, 구드룬 엔슬린, 얀-카를 라스페가 각자의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서독 정부는 이들의 죽음을 집단 자살로 공식 발표했지만, 이 사건은 이후에도 많은 논란과 의혹을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슐라이어 납치범들은 다음 날인 10월 19일, 슐라이어를 살해했으며 그의 시신은 프랑스 뮐루즈에서 발견되었다.

이처럼 약 6주간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서독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테러리즘의 위협과 국가의 대응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3. 1.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납치 사건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


1977년 9월 5일, 독일 고용주 연합회(Bundesvereinigung der Deutschen Arbeitgeberverbände, BDA)와 독일 산업 연맹(Bundesverband der Deutschen Industrie, BDI) 회장이었던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가 쾰른에서 독일 적군파(RAF)의 '코만도 부대'에게 납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슐라이어가 탑승한 메르세데스-벤츠가 습격당했으며, 그의 운전기사, 보디가드, 그리고 경호를 맡은 경찰관 두 명 등 총 네 명이 살해되었다. 슐라이어는 쾰른 교외의 한 임대 아파트에 감금되었다.

당시 다임러 벤츠의 중역이기도 했던 슐라이어는 1968년 서독 전역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국면에서 경영계를 대표하여 강경한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좌파 진영으로부터 주요 공격 대상으로 여겨졌다. 또한, 과거 나치 당원이었으며 친위대 고급 장교 출신이라는 그의 전력과 독일 보수 정계와의 깊은 관계 역시 논란의 대상이었다.

납치범들은 슐라이어를 인질로 삼아,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RAF 1세대 테러리스트 11명의 석방을 헬무트 슈미트 당시 서독 총리 정부에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슐라이어에게 강요했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여러 차례 슐라이어가 감금된 장소 근처까지 접근했으며, 한 수사관은 슐라이어가 갇혀 있던 아파트의 방까지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경찰과 연방 경찰 수사 본부 간의 정보 공유 및 협조 부족으로 인해 결정적인 단서를 놓쳐 검거에 실패했다.

3. 2.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 (란츠후트 사건)

1975년 페터 로렌츠 납치 사건 당시 서독 정부는 적군파(RAF) 조직원 석방 요구에 응했지만, 이번에는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며 추가 석방을 거부했다. 이에 적군파는 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기 위해 공조 관계에 있던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과 협력하여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를 계획했다.

1977년 10월 13일, 팔마 데 마요르카를 출발해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루프트한자 181편(보잉 737-230 기종, 애칭 '란츠후트', Landshut)이 PFLP 소속 테러리스트 4명에게 납치되었다. 당시 비행기에는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총 91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로마에 비행기를 착륙시킨 뒤, 서독 정부에 수감 중인 적군파 조직원 11명의 석방과 1500만달러의 몸값을 요구했다.

란츠후트호는 이후 키프로스라르나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두바이를 전전했다. 그러나 두바이를 이륙한 뒤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어떤 공항에서도 착륙 허가를 받지 못했고, 결국 10월 15일 남예멘아덴에 강제 착륙했다. 아덴에서 이륙한 후, 납치범들은 저항하던 기장 위르겐 슈만(Jürgen Schumann)을 기내에서 살해했다.

10월 17일 아침, 란츠후트호는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납치범들은 살해한 슈만 기장의 시신을 활주로에 내던졌다. 이들은 적군파 조직원 석방의 최종 시한을 처음에는 같은 날 정오로 정했다가, 이후 10월 18일 아침으로 연장했다. 하지만 서독 정부는 이미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대테러 특수부대 GSG 9를 라르나카에서부터 납치된 비행기에 근접시켜 추적하고 있었다. 당시 서독 총리였던 헬무트 슈미트는 소말리아의 최고 권력자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와의 협상을 통해 GSG-9의 기내 진입 작전을 승인받았다.

10월 18일 새벽 0시 5분(CET), 최종 시한을 약 1시간 앞두고 GSG-9 대원들이 란츠후트호 기내로 전격 돌입하여 신속하게 납치범들을 제압했다. 이 작전으로 납치범 4명 중 3명이 사살되고 1명은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인질 87명(승객 82명, 승무원 5명 중 4명)은 전원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GSG-9 대원 1명과 승무원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작전 성공 소식은 당일 아침 도이칠란트푼크의 특별 보도를 통해 "모든 인질이 풀려났다"고 발표되었다.

3. 3. 슈탐하임 교도소에서의 죽음과 슐라이어의 죽음



1977년 10월 18일 이른 아침, "슈탐하임 죽음의 밤"으로 알려진 사건이 발생했다. 슈투트가르트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독일 적군파(RAF)의 핵심 조직원 안드레아스 바더, 구드룬 엔슬린, 얀-카를 라스페가 각자의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서독 정부는 이들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했다. 구드룬 엔슬린은 목을 매달았고, 안드레아스 바더와 얀-카를 라스페는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수감 중이던 이르가르트 묄러 역시 가슴에 여러 차례 자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으나, 자살 시도에서 살아남아 치료를 받았다.

같은 날 밤,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했던 범인들은 네덜란드벨기에를 거쳐 이동하던 중, 슈탐하임 교도소에서 일어난 세 간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이들은 벨기에를 떠나 프랑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슐라이어를 살해했다. 슐라이어의 시신은 다음 날인 10월 19일 저녁, 프랑스 알자스 지역 뮐루즈의 한 길가에 주차된 녹색 아우디 100 차량 트렁크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슐라이어가 9월 5일 쾰른에서 납치된 지 44일 만이었다.

4. 정치적 반응 및 영향

독일의 가을 사건들은 서독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치권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야당이었던 중도우파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DU)과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CSU)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주의-자유주의 연립 정부(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자유민주당(FDP))가 적군파(RAF) 테러리스트들과 이념적으로 가깝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연립 정부는 야당이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과잉 반응을 보이며 서독을 경찰 국가로 만들려 한다고 맞받아쳤다[4]

이러한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여야는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납치 사건 이후 위기 관리를 위해 협력했다. 9월 6일부터 정부 내에 초당적인 '대규모 위기 관리 팀'(Große Krisenstab, GKS)이 구성되어 운영되었다. 이 조직은 독일 기본법에 근거하지 않은 초법규적 기구였으며, 이를 통해 서독은 공식적인 비상사태 선언 없이 사실상의 비상사태에 대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

란츠후트 여객기 납치 사건 이후, 서독 정부는 테러에 대한 강경 대응 기조를 확립하고 이후 테러리스트와는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비록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구출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이러한 단호한 결단은 이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4. 1. 법률 및 제도 변화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납치 사건이 시작되자,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분데스탁(서독 연방하원)의 모든 정당 그룹 구성원이 참여하는 '대위기 위원회'(''Großer Krisenstab'')를 소집했다. 역사학자 볼프강 크라우샤르는 이 시기를 "선포되지 않은 예외 상태"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초당적 합의의 결과 중 하나로 1977년 가을 '접촉 금지법'(''Kontaktsperre'')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변호사와의 상담을 포함하여 수감된 테러리스트 간의 모든 접촉을 금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회민주당(SPD) 소속 정치인이자 변호사인 후베르트 베버는 "연방 공화국은 비상 사태가 아니다"라며 이 법을 환영하고, 법원이 비상 사태의 법적 정의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형사 소송법(''Strafprozessordnung'') 개정을 통해 피고인이 선임할 수 있는 변호사의 수를 최대 3명으로 제한했다.

독일 적군(RAF)의 위협이 커지면서 여야 간의 논쟁도 격화되었다. 야당인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CDU/CSU) 우파 진영은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자유민주당(FDP)의 좌파·중도 연립 정권이 극좌 테러리스트와 사상적으로 가까워 은밀히 공감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반면, 연립 정권 측은 야당이 위기를 과장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 하며, 집권 시 연방 공화국을 더욱 경찰 국가화하려 한다고 비판했다[4]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여야는 위기 관리를 위해 협력했다. 슐라이어 납치 다음 날인 9월 6일부터 정부 내에 두 개의 위기 관리 조직이 구성되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를 중심으로 한 SPD·FDP 내각 핵심 인사들과 재계·사법계 대표로 구성된 '소규모 팀'(Kleine Lage)이 매일 여러 차례 대책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 여야 주요 정치인과 RAF 수감 시설이 있는 주의 총리들을 더한 '대규모 위기 관리 팀'(Große Krisenstab, GKS)이 주 몇 차례 소집되어 연방 정부와 각 주 수사 기관, 법 집행 기관, 의회의 활동을 조율하고 결정했다. 이 위기 관리 조직은 독일 기본법에도 규정되지 않은 초법규적인 기구였으며, 통상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정당 및 정부 기관 간의 즉각적이고 긴밀한 소통을 통해 신속하게 의사를 결정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서독은 공식적인 비상사태 선언 없이 사실상의 비상사태(예외 상태)에 돌입한 것으로 평가된다[5]

이 위기 관리 팀의 지휘 아래 RAF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 형무소에 수감된 RAF 조직원들에 대해서는 형법의 긴급피난 조항을 근거로 외부와의 면회, 다른 수감자와의 접촉, TV 시청, 라디오 청취 등을 금지하는 접촉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이후 이러한 조치를 합법화하는 접촉 금지법이 연방의회에서 신속하게 통과되어 발효되었다. 미디어에 대한 통제도 이루어져, 독일 국내 언론은 RAF의 성명 등을 보도하지 않는 자율 규제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해외 언론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기에, 슐라이어 납치 사건과 RAF 성명에 대한 보도는 계속되었다.

란츠후트 여객기 납치 사건 이후, 서독 정부는 테러리스트와는 더 이상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비록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구출하지 못하고 그의 사망을 막지 못했지만, 당시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단호한 결단은 높이 평가받았다.

5. 더 보기

1977년 4월 7일, 연방 검찰총장 지크프리트 부바크, 그의 운전기사 볼프강 괴벨, 그리고 연방 검찰청 차량 관리 책임자 게오르크 부르스터는 카를스루에에서 오토바이를 탄 독일 적군파의 '울리케 마인호프 사령부'(''Kommando Ulrike Meinhof'') 소속 단원들에게 자동차 안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977년 7월 30일, 드레스드너 은행 이사회 대변인인 위르겐 폰토가 납치 미수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폰토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독일 적군파 단원 수잔네 알브레히트는 브리기테 모른하우프트와 크리스티안 클라르와 함께 폰토를 방문했다. 알브레히트의 정치적 급진화를 알지 못했던 폰토는 오버우르젤의 자택에서 의심 없이 그들을 맞이했다. 폰토가 납치에 저항하자 클라르와 모른하우프트는 그에게 여러 발의 총격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다. 이들은 폰토의 별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페터-위르겐 북이 운전하는 탈출 차량을 타고 도주했다.

1977년 8월 25일, 카를스루에에 있는 독일 연방검찰청 건물에 대한 독일 적군파의 공격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1977년 9월 5일, 독일 고용주 연합회(BDA)와 독일 산업 연맹(BDI) 회장이었던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가 쾰른에서 독일 적군파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운전기사와 세 명의 경찰관이 살해되었다. 납치범들은 독일 적군파 단원 11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독일 정부가 2년 전 페터 로렌츠 납치 사건 때와 달리 협박에 응하지 않자,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독일 적군파와 연계된 테러리스트들은 1977년 10월 13일 루프트한자 "란츠후트" 여객기(루프트한자 181편)를 납치하여 압력을 가중시켰다. 여객기는 중동 여러 곳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조종사 위르겐 슈만 기장이 살해되었다. 최종적으로 여객기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10월 18일 CET 기준 오전 0시 5분경, 서독 대테러 부대 GSG 9가 여객기를 급습하여 인질 구출 작전을 성공시켰다. 작전 직후 도이칠란트푼크는 "모든 인질이 풀려났다. 사상자가 있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보도했다. 승무원 4명을 포함한 87명의 인질 전원이 구출되었으며, 납치범 3명은 사살되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참조

[1] 웹사이트 Deutscher Herbst 1977 https://www.swr.de/s[...] www.swr.de null
[2] 웹사이트 アレクサンダー・クルーゲ監督特集 https://kobe-eiga.ne[...] null 2017
[3] 간행물 Jahrbuch Extremismus und Demokratie, Band 8 1996
[4] 서적 Nach der Katastrophe. Eine Geschichte des geteilten Deutschlands. Berlin 2000
[5] 웹사이트 Der nicht erklärte Ausnahmezustand http://www.bpb.de/th[...] Hamburger Edition HIS Verlag, Hamburg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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