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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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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시대사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서로, 네로 황제 사후 혼란스러운 시대를 다룬다. 타키투스는 원래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시대를 다루려 했으나, 네 명의 황제의 해의 내전과 플라비우스 왕조의 성립 과정을 중심으로 내용을 수정했다. 타키투스는 군주제 황제만이 평화와 제국의 결속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폭군이나 무능한 황제 모두 비판했다. 그는 빠른 전개, 군중 심리 묘사, 인물 묘사에 능하며, 짧고 날카로운 문체와 생략 기법을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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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사
개요
제목히스토리아에
원어 제목Historiae
언어라틴어
저자타키투스
쓰여진 시기기원후 100년–110년 경
다루는 시기기원후 69년–96년 경
내용
주제네로에서 도미티아누스까지의 로마사

2. 시대적 배경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아그리콜라'' 서두에서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를 다루고 싶다는 의도를 밝혔으나, 이후 저술한 ''역사''에서는 계획을 수정했다. ''역사''의 서문에서 그는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시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대신 서기 69년 네 명의 황제의 해에 벌어진 내전부터 시작하여 플라비우스 왕조의 통치까지 이어지는 시기를 기록했다. 현재는 서기 69년과 70년 일부를 다루는 처음 네 권과 다섯 번째 권의 일부(26장)만 전해진다. 이 저작은 서기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까지 다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다섯 번째 권에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티투스의 승리 기록에 앞서 고대 유대인에 대한 민족지학적 조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로마 지식인들이 유대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황제로 즉위한 직후인 약 30년 뒤에 ''역사''를 저술했다. 그가 주목한 서기 69년의 혼란기는 네 명의 황제가 연이어 등장했던 사건들로, 타키투스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황제 계승 방식의 변화와 군사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배경이 되었다.

네르바도미티아누스 사후 원로원의 지명으로 황제가 되었으며, 이후 군대의 지지를 얻고 있던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고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타키투스는 트라야누스가 양자로 지명될 당시 황실 회의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저술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권력 안정 과정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2. 1. 네 명의 황제의 해 (69년)

로마 제국, 69년. 네로 황제 사후 혼란기에 네 명의 황제가 연이어 등장했다.


네로 황제가 사망한 후인 서기 69년, 로마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 해에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네 명의 유력자가 연이어 빠르게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며 권력 다툼을 벌였는데, 이 시기를 네 명의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이 시기의 내전과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의 성립 과정을 다루었다.

네 명의 황제가 차례로 즉위하는 과정은 황제의 권력이 군단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또한, 이는 황제가 수도 로마뿐만 아니라 강력한 군단이 주둔한 제국의 어느 지방에서든 추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2. 2. 도미티아누스의 죽음과 그 이후 (96년)

서기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후 원로원은 네르바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이는 네 명의 황제의 해였던 서기 69년, 갈바네로 사후 원로원의 지명으로 황제가 된 방식과 유사했다.

네르바 역시 갈바처럼 즉위 과정에서 근위대의 반란에 직면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을 맞았다. 이러한 사건들은 황제의 권력이 군단의 지지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으며, 이제 황제가 로마뿐 아니라 충분한 군단이 집결된 제국의 어느 곳에서든 선택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네르바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양자 입양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활용했다. 그는 군대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후계자를 선택했던 갈바와 달리, 군대 전체에서 인기가 높고 라인강 상류 군단을 지휘하던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 결정은 네르바의 권력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권력을 잡은 직후 이 시기를 기록했으며, 트라야누스가 양자로 지명될 당시 황실 회의에 참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타키투스는 네르바의 이러한 조치를 통해 제국이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3. 타키투스의 이념과 정치적 입장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Historiae|히스토리아이la 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냈다.[1] 그는 로마 제국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황제 중심의 원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동시에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고 폭정을 행하지 않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강조했다.[1] 타키투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5현제 시대를 제국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평가했다.[1]

3. 1. 원수정(Principatus)의 옹호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Historiae|히스토리아이la 제1권에서 갈바 황제의 입을 빌린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갈바는 형식에 얽매이고 정치 현실 감각이 부족하여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반면, 네르바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군단을 통합하고 군대의 정치 개입을 막았으며, 군단 간의 혼란을 방지하여 황제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을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타키투스는 오직 원수정(principatus), 즉 황제가 다스리는 군주제만이 평화 유지, 군대의 충성 확보, 제국의 결속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1]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타키투스는 악티움 해전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자인 프린켑스(Princeps)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타키투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프린켑스는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폭군이어서도 안 되고, 갈바처럼 무능해서도 안 되었다. 그는 원로원의 권위와 존엄성을 존중하면서도 임페리움(imperium, 통치권)을 안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지도자여야 했다. 이는 세네카가 제시했던 이상적인 군주상과도 맥을 같이 한다. 타키투스는 5현제 시대의 황제들이 보여준 통치 방식을 당시 로마 제국이 처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으로 여겼다.[1]

3. 2. 이상적인 황제상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히스토리아이'(Historiaela) 첫 번째 책에서 갈바 황제의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그는 갈바처럼 형식만 중시하고 정치적 현실 감각이 부족하여 사건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도자를 비판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폭군 역시 이상적인 통치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타키투스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악티움 해전 이후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제적 황제, 즉 '프린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원수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오직 원수정만이 평화, 군대의 충성, 제국의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군단을 통합하고 군대의 정치 개입을 막아 제국의 안정을 꾀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프린스는 폭군이나 무능력자가 아니라, 원로원의 위신과 존엄성을 존중하면서도 임페리움(imperiumla, 지배권)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키투스는 소(小) 세네카와 마찬가지로, 5현제 시대 황제들의 통치를 당시 로마 제국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겼다.

4. 서술 방식과 문체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

4. 1. 빠른 전개와 극적인 서술

서술 방식은 사건의 속도를 반영하여 매우 빠르다. 서술의 리듬은 속도를 늦추거나 벗어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스타일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해 타키투스는 자료에서 상당한 정보를 요약해야 했으며, 때로는 부분을 생략하기도 했다. 더 흔하게는 이야기를 단일 장면으로 나누어 극적인 서술을 만들어냈다.

타키투스는 대중을 묘사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대중이 평온할 때의 모습뿐만 아니라, 반란의 위협과 공포에 질린 도주 장면을 보여주는 데에도 뛰어났다.

타키투스는 귀족의 관점에서 글을 썼다. 그는 군인들의 소란과 수도의 무리에 대해 경멸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을 보였다. 또한, 원로원 의원들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며 그들의 행동을 악의적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그들의 공개적인 이미지와 이면에 감춰진 아첨, 음모, 야망 같은 현실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역사』는 전반적으로 폭력, 부정직함, 불의를 다루며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타키투스는 짧고 날카로운 메모와 완전한 인물 묘사를 번갈아 사용하며 인물들을 능숙하게 보여준다. 그의 기법은 살루스티우스와 유사하다. 부조화, 병렬구문, 느슨한 문체 구조가 결합되어 인물들을 날카롭게 만든다. 살루스티우스의 영향은 타키투스 스타일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타키투스는 서술을 과거와 연결하는 ''엄숙함''과 극적인 효과를 내는 ''연민''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여 이 방식을 개선했다. 그는 동사 및 접속사의 생략을 선호했으며, 서술에 다양성과 움직임을 주기 위해 불규칙한 구조와 잦은 주어 변경을 사용했다. 문장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 대개 암시적이거나 간접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놀라운 "꼬리"로 문장을 확장하는 경우가 많다.

타키투스의 스타일이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다는 이론도 제기된다. 이는 타키투스의 스타일과, 트로구스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후대 역사가 유스티누스의 필리포스 역사와 세계 기원 및 토지 위치 스타일 간의 유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오히려 유스티누스의 스타일이 타키투스의 작품을 기반으로 했다는 대안적인 견해도 존재한다.[3]

4. 2. 군중 묘사

타키투스는 군중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는 평온한 상태의 군중뿐만 아니라, 반란 직전의 불안한 분위기나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묘사했다. 다만 그의 묘사는 귀족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면이 있다. 그는 군인들의 소란이나 수도 로마의 군중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약간의 경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4. 3. 인물 묘사

타키투스는 기본적으로 귀족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군인들이 일으키는 소란이나 수도 로마의 군중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경멸감을 드러냈다. 또한 원로원 의원들에 대해서도 낮은 평가를 내렸는데, 겉으로 보이는 공적인 이미지와 실제 모습, 즉 아첨이나 음모, 개인적인 야망과 같은 이면의 현실 사이의 차이를 부각하며 그들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역사』는 폭력, 부정직, 불의와 같은 어두운 주제를 다루며 당시 사회의 암울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는 대중을 묘사하는 데에도 능숙하여, 평온할 때의 모습뿐만 아니라 반란의 조짐이나 공포에 질려 흩어지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그려냈다.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능숙했는데, 짧고 날카로운 평가와 상세하고 완전한 인물 설명을 번갈아 사용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는 살루스티우스의 방식과 유사점을 보인다. 타키투스는 부조화, 병렬구문, 그리고 다소 자유로운 문장 구조를 결합하여 인물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살루스티우스의 영향은 그의 문체 전반에서 확인되는데, 타키투스는 서술을 과거와 연결 짓는 엄숙함과 극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민 사이의 긴장감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동사나 접속사를 생략하는 기법을 선호했으며, 불규칙한 구조와 잦은 주어 변경을 통해 서술에 다채로움과 역동성을 더했다. 문장이 끝난 것처럼 보이다가도, 암시적이거나 간접적인 논평을 덧붙여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타키투스의 문체가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도 제기된다. 이는 그의 문체와, 트로구스의 저작을 바탕으로 글을 쓴 후대 역사가 유스티누스의 문체 사이에 유사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논쟁적인 해석이며, 반대로 유스티누스가 타키투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

4. 4. 문체의 특징

서술 방식은 사건의 속도를 반영하여 매우 빠르다. 효과적인 글쓰기를 위해 타키투스는 자료의 정보를 상당 부분 요약하거나 때로는 생략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단일 장면으로 나누어 극적인 서술을 만들어낸다.

타키투스는 살루스티우스와 유사하게 부조화, 병렬구문, 느슨한 문체 구조를 결합하여 인물들을 날카롭게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살루스티우스의 영향은 그의 스타일 전반에서 나타나는데, 타키투스는 서술을 과거와 연결하는 ''엄숙함''과 극적인 효과를 내는 ''연민''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며 이를 발전시켰다. 그는 동사 및 접속사의 생략을 선호하며, 불규칙한 구조와 잦은 주어 변경을 사용하여 서술에 다양성과 움직임을 부여한다. 문장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종종 암시적이거나 간접적인 코멘트를 추가하는 놀라운 "꼬리"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타키투스의 스타일이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이 있다. 이는 타키투스의 스타일과, 트로구스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후대 유스티누스의 필리포스 역사와 세계 기원 및 토지 위치 스타일 간의 유사성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반대로 유스티누스의 스타일이 타키투스의 작품을 기반으로 했다는 대안적인 주장도 존재한다.[3]

5. 주요 내용



타키투스의 저서 ''역사''는 네 명의 황제의 해(서기 69년)의 혼란스러운 내전 시기부터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까지를 다룬다. 이 시기는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네 명의 황제가 짧은 기간 동안 연이어 권력을 잡았던 격동기였다. 타키투스는 이 사건들을 통해 황제의 권력이 수도 로마뿐만 아니라, 군단이 주둔한 제국 어느 곳에서든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현존하는 부분은 서기 69년과 70년 일부를 기록한 다섯 권 분량이다.

''역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요 내용
1권갈바의 통치와 몰락, 그리고 오토의 등장을 다룬다. 라인강 군단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오토의 통치가 위협받기 시작한다.
2권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오토가 비텔리우스에게 패배하고 자살한다.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지만, 곧이어 동방 군단의 지지를 받은 베스파시아누스의 도전을 받게 된다.
3권이탈리아에서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 군대 간의 전투가 벌어진다. 결국 비텔리우스 군대는 무너지고, 비텔리우스 자신도 살해당하며 베스파시아누스가 최종 승리자가 된다.
4권로마 군대 내 바타비족 부대의 반란으로 시작된 바타비 전쟁을 다룬다. 또한, 새로운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5권티투스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대신하여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지휘를 맡는 과정과 바타비 전쟁의 종결을 기록한다. 특히, 유대 전쟁을 설명하기에 앞서 고대 유대인에 대한 로마인의 관점을 보여주는 민족지학적 조사가 포함되어 있어 당시 로마 지식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Tacitus and the Writing of History 1981
[2] 서적 The Annals: The Reigns of Tiberius, Claudius, and Nero Oxford 2008-06-12
[3] 간행물 Justin's ''Epitome'': The unlikely adaptation of Trogus' world history https://research.ncl[...] 201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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