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칠십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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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문동 72현은 고려 말,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거한 72명의 충신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역사적 기록보다는 후대에 형성된 상징적 의미가 강하며, 1783년 서유방의 상소문에는 조의생, 임선미, 맹씨 3명의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두문동 72현에 대한 기록은 《두문동실기》, 《두문동록》, 《두문동서원지》 등 다양한 문헌에 나타나며, 각 기록마다 포함된 인물에 차이가 있다. 두문동서원에는 120위의 인물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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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문동 72현의 정의와 범위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은 고려 말 두문동에 은거하며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충절을 지킨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72명이라는 명확한 숫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1] 이 숫자는 공자의 뛰어난 제자 72명을 비유하여,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현인들을 높여 부르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2]
두문동칠십이인 이야기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들의 상징으로 전해 내려오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기록들은 두문동 72현 전설의 형성 과정과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실제로 두문동에 은거했던 인물들의 수나 명단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며, 정확히 누구를 '72현'으로 지칭하는지에 대한 통일된 기준은 없다. 따라서 '두문동 72현'은 특정 72명의 인물을 지칭한다기보다는,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선비 집단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3]
3. 두문동 72현 관련 기록
주요 기록으로는 조선 정조 대인 1783년 개경부유수 서유방이 올린 상소문이 있으며, 이후 간행된 《두문제현충렬록》과 1928년 김진근이 펴낸 《두문동록》 등에는 두문동에 은거했거나 고려에 충절을 지킨 인물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 명단은 서로 차이를 보이며, 실제로 두문동에 은거하지 않은 인물이 포함되거나 누락된 경우도 존재한다. 또한, 2012년에는 두문동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을 정리한 《두문동서원지》의 번역본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각 기록의 구체적인 내용과 포함된 인물 명단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개경부유수 서유방의 상소문 (1783년)
1783년 개경부유수 서유방의 상소문에 의하면, 두문동 태학생 72인 중에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은 조의생, 임선미와 맹씨 뿐이라고 하였다.[6]
3. 2. 《두문제현충렬록》
《두문동실기》〈두문제현충렬록(杜門諸賢忠烈錄)〉에는 '두문동에 들어갔다(入杜門洞)'거나 '두문동에 살았다(居杜門洞)'고 기록된, 두문동과 관련된 인물들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각 인물의 호와 이름 순서로 기재하였다.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없거나 다른 지역에서 은거한 것이 명확한 인물은 제외하였다.)
3. 3. 《두문동록》 (1928)
김진근(金振根)이 1928년에 펴낸 《두문동록(杜門洞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여조병절신칠십이인록(麗朝秉節臣七十二人錄)〉에는 고려 말기에 충절을 지킨 신하 72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명단에는 실제로 두문동에 은거하지 않은 인물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3. 4. 《두문동실기》, 《두문동록》 누락 인물
신라박씨 충헌공파 대종회에서 제시한 72현인 목록[1]과 대조했을 때, 성사제(成思齊)는 국문 표기 문제, 민보(閔普)는 마지막 글자 누락 문제로 간주하여 제외하고, 《두문동실기》와 《두문동록》에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다음과 같다.
3. 5. 《두문동서원지》 (2012)
재령 이씨 창원종친회에서 2012년 10월 발행한 《초역 두문동서원지》에 따르면, 두문동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 번역본의 출간을 기념하여 재령 이씨 모은공파 대종회는 2013년 1월 17일 함안문화원에서 발간 기념회를 열었다.[13]두문동 서원은 표절실(表節室), 순절실(殉節室), 항절실(抗節室), 정절실(靖節室)의 4실 22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절실에서는 두문동 72현을 순절반, 항절반, 정절반으로 나누어 배향하고, 순절실, 항절실, 정절실에서는 각각 순절반, 항절반, 정절반으로 나누어 두문동 외 제현을 배향한다.[14] 서원에 배향된 인원은 두문동 72현 55위와 두문동 외 제현 65위로, 총 120위이다.[14] 각 실과 반에 따른 봉안 위수는 아래 표와 같다.
4. 두문동 72현 명단 (종합)
5. 두문동 72현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재조명
(내용 없음)
참조
[1]
웹인용
고려시대의 제도 고려충신 72현
http://chungheongong[...]
신라박씨 충헌공파 대종회
2017-02-15
[2]
문서
고려충열록
[3]
문서
광산김씨족보 권1'서문 고려두문동72현선생제명기'(1898년)
[4]
뉴스
파주통일동산 '고려통일대전 30일 준공'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5]
웹사이트
고려대전 충신각
http://www.koryo.or.[...]
[6]
서적
정조실록
1783-07-14
[7]
서적
순조실록
1810-09-10
[8]
웹사이트
UC Berkeley 소장 링크
http://kostma.korea.[...]
[9]
문서
조선말에 재간한 두문동선생실기에는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과 권말에 김굉의 발문이 있고, 속록에는 성대진(成大璡)과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ㆍ국립중앙도서관ㆍ연세대학교 도서관ㆍ경북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10]
웹사이트
고려대전 충신각 배향위 현황
http://www.koryo.or.[...]
[11]
웹사이트
절개의 뜻을 굽히지 않기 위해 독자인 아들의 이름을 두문동의 첫 자인 두(杜)로 고치고, 아들 '두'를 관향인 창녕으로 피신시켰다. 성두(成杜)의 후손들이 후일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곽재우 가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http://wisrl.kaist.a[...]
[12]
문서
길재: 안향,우탁,신현,정몽주의 고려 성리학 대통을 조선 사림성리학으로 잇는 조선 사림 성리학의 시조이다. 고려 멸망 후 고향인 영남으로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 고려 성리학의 사림적 학맥은 길재의 제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김숙자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종직의 제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굉필의 제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인 한양 출신 정암 조광조가 바로 이 영남 사림의 맥을 기호 지역으로 전파하여 조광조의 제자 청송(廳松) 성수침(成守琛)과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그리고, 성수침의 아들 우계(牛溪) 성혼(成渾, 후일 소론), 백인걸의 제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후일 노론)로부터 기호 사림이 형성된다. 영남우도에서는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의 학맥을 이어받아 창녕 조씨인 남명 조식을 통해 남명학파가 형성된다. 한편, 영남좌도에서는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독자적 학문 성취로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중후기를 이끈 조선 4대 성리학파인 남명학파 (북인), 우계학파 (소론), 퇴계학파 (남인), 율곡학파 (노론) 모두 순절 고려 충신 정몽주와 그 제자 길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결국,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닌 선죽교에서 순절한 정몽주가 조선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13]
뉴스
재령이씨 국역 두문동서원지 발간
http://hanews.co.kr/[...]
함안인터넷신문
2013-01-29
[14]
서적
초역 두문동서원지
http://jaeryoung.com[...]
재령이씨 창원종친회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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