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궁정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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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인 궁정백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으며, 로타링기아 궁정백에서 유래하여 라인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지배했다. 11세기 말부터 라인 궁정백으로 불렸으며, 13세기 중반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되어 자취를 감추면서 단순히 궁정백이라고 하면 라인 궁정백을 가리키게 되었다. 1356년 금인칙서로 선제후가 되었고, 팔츠 선제후로 불리며 팔츠 선제후국을 다스렸다. 이후 비텔스바흐 가문 내부의 분할 상속과 종교 개혁, 30년 전쟁 등을 거치며 영토와 지위가 변화했다. 1803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와 함께 선제후 지위가 소멸되었고, 현재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이 전통적인 칭호로 라인 궁정 백작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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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 궁정백 - 라인공 루퍼트
보헤미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사이에서 태어난 라인공 루퍼트는 30년 전쟁으로 네덜란드 헤이그로 망명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며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팔츠 지역 회복을 위해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으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 라인 궁정백 - 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는 신성 로마 황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라인 궁정백으로, 독일 왕 선출 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대립, 교황과의 갈등 속 황제 대관식, 영토 확장 및 왕조 정책 추진, 제후들과의 반목, 룩셈부르크 가문과의 갈등 속 교황으로부터의 폐위 등의 특징을 가진다.
2. 명칭
라인 궁정백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라인 궁정백은 10세기 초 로타링기아의 궁정 백작령에서 유래했다. 궁정백은 황제에 의해 각지에 배치된 일종의 대제후 감시역이었다. 로타링기아 궁정백은 라인강 연안의 잘리어 왕가 영지가 비드가우 백작 비게리크라는 귀족에게 주어지면서 시작되었다.[3]
본래 이름은 로타링기아(로트링겐) 궁정백이었을 것이다. 궁정백은 황제에 의해 각지에 배치된, 일종의 대제후 감시역이었다. 11세기 말 무렵부터는 라인 궁정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3세기 중반 무렵에는 라인 궁정백을 제외하고 다른 궁정백들은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되어 사라졌다. 이 때문에, 단순히 "궁정백"(Pfalzgraf)이라고 하면 라인 궁정백을 가리키게 되었다.
라인 궁정백은 선제후가 되었고, 그 권리는 1356년의 금인칙서로 명문화되었다. 이 때문에, "팔츠"의 "선제후"(Kurfürst)로서 Kurfürst von der Pfalz(팔츠 선제후)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역사
11세기 말 무렵부터 그 지배권이 축소되어 라인강 중류 유역의 양안으로 제한되면서 라인 궁정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3세기 중반 무렵에는 라인 궁정백을 제외한 다른 궁정백들이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되어 자취를 감추면서, "궁정백"(Pfalzgraf)이라고 하면 라인 궁정백을 가리키게 되었다. 또한, 그 소유령도 "팔츠"(Pfalz)라고 불리게 되었다.
라인 궁정백은 선제후가 되었고, 그 권리는 1356년 금인칙서로 명문화되었다. 이 때문에 "팔츠"의 "선제후"(Kurfürst)로서 Kurfürst von der Pfalz(팔츠 선제후)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소유령(팔츠 선제후령)은 Kurpfalz라고 불리게 되었다.
3. 1. 로트링겐 궁정백 (915년–1085년)
비게리히 임 비트가우 백작 (915년경-922년)[3]
고트프리트 임 이윌리히가우 백작 (940년경)[3]
에초가는 11세기에 라인강 양안의 백국 여러 개를 소유했다. 그들의 영토의 중심지는 쾰른-본 일대였으며, 남쪽으로는 모젤강과 나헤강을 넘어 알차이에 다다랐다.[3]
3. 2. 라인 궁정백 (1085년–1356년)
1085년 에초가가 단절되면서 로트링겐 지역은 군사적 중요성을 잃고 여러 백국으로 분할되었다. 구 로트링겐 궁정백국의 영토는 라인강변으로 줄어들었고, 이때부터 "라인 궁정백"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한동안 세습되지 못하고 임명 백작들로 채워졌다.[1]
최초의 세습 라인 궁정백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의 남동생 콘라트 데어 슈타우퍼였다.[1]
하지만 1195년 콘라트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가의 지배는 불과 1대에 그치고 벨프가로 넘어간다.[1]
벨프가도 단절되면서 작위는 비텔스바흐가로 넘어간다. 이 때 비텔스바흐가는 바이에른 공작으로서 선제후이자 또한 바이에른 궁정백 작위도 가지고 있었다.[1]
비텔스바흐가 내부적으로 분할상속이 이렇게저렇게 얽히면서 1356년 선제후의 지위가 바이에른 공작으로부터 라인 궁정백으로 넘어간다. 이 때부터 라인 궁정백국은 궁정선제후국(팔츠 선제후국)이 되고, 루프레히트 1세는 최초의 궁정선제후(데어 팔츠 선제후)가 된다.[1]
3. 3. 팔츠 선제후국 (1356년-1803년)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선제후의 지위가 바이에른 공작으로부터 라인 궁정백으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라인 궁정백국은 궁정선제후국(팔츠 선제후국)이 되었고, 루프레히트 1세는 최초의 궁정선제후(데어 팔츠 선제후)가 되었다.13세기 초 벨프 가문의 상속녀 아그네스와의 결혼으로, 이 영토는 비텔스바흐 바이에른 공작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바이에른의 팔츠 백작이기도 했다.[1]
1356년 금인칙서는 내부 비텔스바흐 계약을 적용하지 않고 팔츠를 세속적인 선제후 중 하나로 인정했다. 백작은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관(Erztruchseß)과 프랑켄, 슈바벤, 라인, 남부 독일의 제국 부황 (Reichsverweser)의 세습 관직을 받았다. 그 이후로 라인 팔츠 백작은 일반적으로 팔츠 선제후(Kurfürst von der Pfalz)로 알려졌다.[2] 선제후의 지위는 이전에도 존재했지만(예를 들어, 1257년에 두 명의 경쟁 독일 왕이 선출되었을 때: 콘월의 리처드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정확한 지위의 기원을 결정하기는 어렵다.[2]
16세기 초, 비텔스바흐 가문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영토를 분할 상속했다. 이로 인해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하위 가문들은 하부 팔츠의 심머른, 카이저슬라우테른, 츠바이브뤼켄과 상부 팔츠의 노이부르크, 술츠바흐를 통치하게 되었다.[3] 하이델베르크에 기반을 둔 팔츠 선제후는 1530년대에 루터교를, 1550년대에는 칼뱅주의를 채택했다.[3]
종교 개혁에서 라인 궁정백은 칼뱅파를 지지하여 1608년 신교 연합을 결성했다. 1619년 가톨릭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싫어하는 프로테스탄트 보헤미아 귀족들이 라인 궁정백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5세는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어머니의 친가가 있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1623년 라인 궁정백령은 황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궁정백 지위를 가톨릭 제후의 영수이자 프리드리히 5세와 같은 비텔스바흐가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주었다. 금인칙서에 의해 보호받는 선제후 지위를 황제가 박탈하고 마음대로 수여한 이 행위는 30년 전쟁 장기화의 원인이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드비히가 라인 궁정백위에 복귀했고, 바이에른 공작도 선제후가 되었다(라인 궁정백의 선제후위를 바이에른이 계승하고, 라인 궁정백은 신설된 제8의 선제후가 됨). 바이에른과 라인 궁정백이 동군 연합하면 라인 궁정백의 선제후권은 상실되게 되었다.
1685년 카를 1세 루드비히의 아들 카를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남자계로 먼 친척인 팔츠-노이부르크 공작필리프 빌헬름이 계승했다. 독일에서는 남자에게만 계승권이 있었으므로 이 계승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라인 궁정백은 칼뱅파였지만, 필리프 빌헬름은 가톨릭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카를 2세의 매제인 자신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팔츠에 군대를 진격시켰다. 신성 로마 제국 제후, 스웨덴,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여 대항, 팔츠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결과, 필리프 빌헬름의 아들 요한 빌헬름은 라인 궁정백위를 유지했다(필리프 빌헬름은 전쟁 중 사망, 기타 전쟁 결과는 레이스바이크 조약 참조). 이후 팔츠는 점차 가톨릭화되었다.
1742년 요한 빌헬름의 동생 카를 3세 필리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라인 궁정백위는 팔츠-슐츠바흐 공작카를 4세 필리프 테오도르가 이었다. 1777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가가 단절되자, 카를 4세 필리프 테오도르는 바이에른 선제후위도 계승했다. 이로 인해 바이에른과 라인 궁정백의 양 비텔스바흐가는 통합되었고, 베스트팔렌 조약 규정에 따라 라인 궁정백으로서의 선제후위는 소멸되었다.
3. 4. 선제후 지위 소멸 이후 (1803년-현재)
1801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는 팔츠 전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했다. 이후 남독일에서 영토를 확대하여 1806년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로 즉위했다. 프랑스는 라인 강 좌안을 프랑스령으로 하고, 우안은 바덴 변경백과 뷔르템베르크 공국에 할양했다.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프랑스령이었던 좌안만이 바이에른 왕국의 월경지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기타 라인 좌안의 지역과 합쳐져, 연합군 군정기인 1946년 라인란트-팔츠주로 재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독일 군정은 바이에른으로부터 라인 궁정 백국을 가져와 인접 지역과 합쳐 마인츠를 주도로 하는 새로운 주, 라인란트팔츠 (Rheinland-Pfalzde)를 형성했다.[1] 주민들은 수 세대 동안 뮌헨의 정부에 의해 소외되었다고 느꼈고, 나중에 국민투표를 통해 합병을 승인했다.[1]
현재 비텔스바흐가의 수장인 프란츠, 바이에른 공작(1933년 출생)은 전통적으로 "바이에른 공작 폐하, 프랑켄과 슈바벤 공작, 라인 궁정 백작"으로 불린다.[2]
4. 역대 통치자 목록
켈하이머 루트비히 1세는 바이에른 공작 오토 1세 폰 비텔스바흐의 아들로, 1214년에 라인 궁정백을 얻어 라인 궁정백을 역임했다. 1231년에 암살되었다.
참조
[1]
서적
Histoire du Luxembourg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10
[2]
서적
Kleine Geschichte der Kurpfalz
G. Braun Buchverlag
2005
[3]
서적
Kleine Geschichte der Kurpfalz
G. Braun Buchverlag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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