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 4세 드 툴루즈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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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몽 4세 드 툴루즈 백작은 툴루즈 백작 기욤 4세의 동생으로, 형의 사후 툴루즈 백작 지위를 찬탈하여 권력을 잡았다. 그는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활약했으나,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되는 것을 거절하고 트리폴리 공략을 시도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사후 조카와 아들에 의해 트리폴리 백국이 건설되었다. 레몽 4세는 세 번 결혼했으나, 처음 두 번은 근친혼으로 파문당했으며, 십자군 시기에는 남프랑스 제후들의 리더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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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파 드 툴루즈 여백작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의 딸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와 결혼하여 툴루즈 탈환 시도와 정치적, 종교적 활동에 참여했으나 남편의 외도로 갈등을 겪다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레몽 4세 드 툴루즈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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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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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트리폴리 백작 |
통치 기간 | 1102년 – 1105년 |
후계자 | 알폰소 주르당 |
작위1 | 툴루즈 백작 |
통치 기간1 | 1094년 – 1105년 |
이전 통치자1 | 기욤 4세 |
후계자1 | 베르트랑 |
출생일 | 1041년경 |
사망일 | 1105년 2월 28일 |
사망 장소 | 트리폴리 백국 트리폴리의 성채 |
가문 | 툴루즈 가문 |
아버지 | 퐁스 드 툴루즈 |
어머니 | 알모디스 드 라 마르슈 |
배우자 | 고프리 1세 드 아를의 딸 마틸다 디 시칠리아 엘비라 데 카스티야 |
자녀 | 베르트랑 알폰소 주르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별칭 | 드 생질 (de Saint Gilles) |
2. 생애
툴루즈 백작 퐁스와 라 마르슈의 알모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는 아버지로부터 생질 영지를 물려받았고, 1094년 형 툴루즈 백작 기욤 4세가 사망하자 조카 필리파를 밀어내고 툴루즈 백작위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필리파의 남편인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같은 해 프로방스 변경백 작위도 계승했다.
세 번 결혼했으나 처음 두 번의 결혼은 근친혼 문제로 혼인 무효가 되고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첫 아들 베르트랑은 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십자군 이전에도 스페인에서 이슬람교도와 싸운 경험이 있으며, 제1차 십자군 소집 시 가장 먼저 참여를 맹세한 주요 제후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최고령이자 가장 부유한 지도자로서 남프랑스 제후들을 이끌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에게 신종 맹세 대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십자군 원정 중 니케아 공방전, 도릴레움 전투, 안티오키아 공방전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안티오키아 함락 후 도시의 소유권을 두고 보에몽과 심각하게 대립했으며, 이는 이후 그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 공략에도 참여했으나, 함락 후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이를 거절하였다. 이후 아스칼론 전투에 참전했지만, 도시 점령 문제를 놓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갈등을 빚었다.
십자군 지도부와의 불화 후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위해 트리폴리 지역에 대한 공략을 추진했다. 1101년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 다시 동로마 황제의 지원을 받아 트리폴리 공략에 나섰다. 몽스 페레그리누스("순례자의 산") 요새를 건설하던 중 트리폴리 군의 공격으로 심한 화상을 입고 1105년 사망했다.
그의 사후, 조카 기욤 주르당과 아들 베르트랑이 트리폴리 공략을 이어받아 1109년 도시를 함락시키고 트리폴리 백국을 세웠다.
2. 1. 초기 생애
레몽은 툴루즈 백작Comte de Toulouse프랑스어 퐁스와 라 마르슈의 알모디스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생질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1094년, 그의 형인 툴루즈 백작 기욤 4세가 사망하자, 형이 후계자로 지명했던 딸 필리파를 밀어내고 레몽이 툴루즈 백작위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필리파와 결혼한 아키텐 공작Duc d'Aquitaine프랑스어 기욤 9세는 여러 차례 툴루즈 백작의 지위를 주장하며 공격해왔다.
같은 해(1094년), 프로방스의 기욤 베르트랑이 사망하면서 그의 프로방스 변경백 작위 또한 레몽에게 넘어갔다. 1096년 7월 22일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내린 칙서에는 레몽을 "툴루즈와 루에르그 백작이자 프로방스 변경백 레몽"(comes nimirum Tholosanorum ac Ruthenensium et marchio Provintie Raimundusla)으로 명시하고 있다.
레몽은 세 번 결혼했으나, 처음 두 번의 결혼은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혼인 무효가 되었고, 이 때문에 두 차례 파문을 당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베르트랑은 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이전에도 스페인에서 이슬람교도와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참가 권유를 받았을 때, 그는 제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참가를 서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참가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으며, 남프랑스 제후들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2. 2. 제1차 십자군
thumb에 전시된 19세기의 그림으로, 레몽 4세와 르퓌의 아데마르를 묘사하고 있다]]레몽은 독실한 신자였으며 성지에서 죽기를 소망했기에, 제1차 십자군이 소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참여를 맹세했다. 그는 십자군 이전에도 스페인에서 이슬람교도와 싸운 경험이 있었으며, 십자군 내 최고령자이자 가장 부유한 제후로서 남프랑스 제후들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예루살렘 순례 중 성묘 교회 문지기와의 싸움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소문 때문에 "외눈박이"(라틴어: ''monoculus'')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096년 10월 말, 레몽은 아내 카스티야의 엘비라, 갓난 아들(후에 사망), 그리고 교황 특사인 르퓌의 아데마르 주교를 포함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툴루즈를 떠났다. 그는 툴루즈 상속녀인 조카 필리파의 통치권 요구를 무시하고, 장남 베르트랑에게 툴루즈 통치를 맡겼다. 그의 군대는 디라키움을 거쳐 타란토의 보에몽과 같은 경로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1097년 4월 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레몽은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 달리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에게 신종 맹세를 하지 않고, 대신 우정의 맹세를 맺었다. 이는 두 사람의 공동의 적인 보에몽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레몽은 1097년 니케아 공방전과 도릴레움 전투에 참여했으며, 1097년 10월 시작된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십자군이 셀주크 투르크가 안티오키아를 버렸다는 소문을 듣자, 레몽은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먼저 보냈으나, 이는 안티오키아를 원했던 타란토의 보에몽과의 갈등을 유발했다. 도시는 여전히 점령 상태였고, 1098년 6월 힘겨운 공방전 끝에 함락되었다. 레몽은 도시 내 에미르 야기-시얀의 궁전과 다리 문 위의 탑을 점령했다. 이후 모술의 아타베그 케르보가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 의해 안티오키아가 다시 포위되었을 때 레몽은 병을 앓았다. 이 시기, 레몽의 부하인 수도사 피터 바솔로뮤가 성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십자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고, 이는 케르보가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성창은 레몽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유물이 되었으나, 그 진위 여부를 두고 르퓌의 아데마르와 보에몽 등은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으며, 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성창은 가짜로 밝혀지고, 레몽을 지지하던 피터 바솔로뮤가 아르카 공성전 때 자신이 본 계시를 입증하는 실험을 하다 화상을 입고 죽자, 레몽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레몽은 보에몽이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주장하자, 십자군이 맹세한 대로 도시를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안티오키아 함락 직후 교황 특사 아데마르가 사망하면서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안티오키아에서 보에몽에게 밀려난 레몽은 그의 영토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트리폴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예루살렘으로의 진격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그는 이 계획을 잠시 미루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 등과 함께 예루살렘 공략에 나섰다.
예루살렘 함락 후, 레몽은 초대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성스러운 땅에서 왕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 이로 인해 고드프루아가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그 역시 왕 칭호를 사양하고 '성묘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레몽은 아스칼론 전투에 참전했으나, 아스칼론의 점령 문제를 두고 고드프루아와 다툼을 벌여 결국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 일로 십자군 지도부와 결별한 레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 머물렀다.
그곳에서 1101년 십자군에 합류했으나 아나톨리아에서 패배를 겪었다.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원조를 받아 트리폴리 공략을 재개했지만, 원정 도중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조카 기욤 주르당이 트리폴리 포위를 이어갔고, 이후 레몽의 아들 베르트랑이 지휘권을 넘겨받아 1109년 트리폴리를 함락시키고 트리폴리 백국을 세웠다.
레몽의 부하였던 레몽 다지르(Raimundus de Aguilers)는 제1차 십자군의 여정을 레몽의 관점에서 기록으로 남겼다.
2. 3. 권력 투쟁과 트리폴리 백국 건설
안티오키아 공방전 이후, 레몽은 도시 내에 병력을 주둔시켰으나, 안티오키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보에몽과의 갈등 끝에 1099년 1월 도시에서 밀려났다. 같은 남프랑스 출신으로 중재자 역할을 하던 교황 사절 아데마르가 안티오키아 함락 직후 사망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성창 발견으로 얻었던 명성에도 불구하고 레몽은 안티오키아를 확보하지 못했다.이에 레몽은 보에몽의 남하를 견제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트리폴리를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1099년 2월 14일, 그는 트리폴리 토후국 영토 내의 아르카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는 예상보다 길어졌고, 그 사이 중요한 요새인 히스 알아크라드(훗날 크락 데 슈발리에)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트리폴리 점령에 집착하며 예루살렘 진군을 미루자 많은 지지를 잃었다.
결국 휘하 병사들과 기사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레몽은 1099년 5월 13일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에 동의했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 등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7월 15일 함락시켰다. 예루살렘 함락 후, 레몽은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고 죽은 도시에서 왕이라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칭호를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고드프루아가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그 역시 왕 칭호를 사양하고 '성묘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레몽은 예루살렘에 머무르기보다는 트리폴리 공략을 계속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이나, 도시 함락 후 점령했던 다윗 성탑을 쉽게 포기하지 않아 고드프루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예루살렘 점령 직후 벌어진 아스칼론 전투에서 레몽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군대를 격파하는 데 참여했다. 그러나 전투 후 아스칼론의 소유권을 두고 고드프루아와 다시 대립했고, 레몽은 도시를 고드프루아에게 넘기느니 자신이 차지하려 했으나 결국 어느 쪽도 점령하지 못하고 아스칼론은 이슬람 세력 하에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은 십자군 세력 확장에 아쉬움을 남겼으며, 아스칼론은 1153년에야 십자군에게 점령되었다. 고드프루아는 아르수프 점령 실패의 책임도 레몽에게 돌렸다.
잇따른 갈등으로 인해 레몽은 1099년 겨울, 십자군 주력과 결별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보에몽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던 라오디케이아를 점령하며 보에몽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보에몽의 팽창을 경계하던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와 동맹을 맺었다.

레몽은 실패로 돌아간 1101년 십자군에 참여하여 메르시반 전투에서 아나톨리아에서 패배했다. 그는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1102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바다를 통해 안티오크로 갔는데, 그곳에서 보에몽이 포로로 잡힌 동안 안티오크의 섭정이었던 탕크레드에 의해 투옥되었고, 안티오크와 아크레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는 즉시 약속을 어기고 타르투스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그의 트리폴리 포위전을 돕기 위해 몽스 페레그리누스 ("순례자의 산")에 성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안티오크의 적대적인 국가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트리폴리에 우호적인 국가를 선호했던 알렉시오스 1세의 도움을 받았다.
트리폴리의 카디, 파크르 알-물크 이븐 아마르는 1104년 9월 몽스 페레그리누스를 공격하여 요새의 한 구역에 불을 질렀다. 레몽은 지붕을 넘어 탈출했지만 심한 화상을 입었고 고통 속에서 마지막 몇 달을 보냈다. 그는 트리폴리가 함락되기 전인 1105년 2월 28일 부상으로 사망했다.
레몽 사후, 트리폴리 포위는 그의 조카인 기욤 주르당이 이어받았으나, 이후 레몽의 장남 베르트랑이 도착하여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베르트랑은 1109년 마침내 트리폴리를 함락시키고 트리폴리 백국을 세워 초대 백작이 되었다.
한편, 레몽의 종군 사제였던 레몽 다길레스(Raimundus de Aguilers)는 제1차 십자군의 여정을 레몽의 관점에서 기록한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3. 가족 관계
레몽은 툴루즈의 퐁스와 라 마르슈의 알모디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기욤 4세의 동생이었으며, 형이 사망한 후 조카딸인 필리파를 대신하여 툴루즈 백작위를 계승했다. 이로 인해 필리파와 결혼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와 영지 계승권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레몽 4세는 총 세 번 결혼했다. 처음 두 번의 결혼은 근친혼 문제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1076년과 1078년 두 차례 파문당했으며, 결국 무효가 되었다.[3] 1080년 첫 부인이 사망하면서 파문은 해제되었다.
- 첫 번째 부인: 아를 백작 고드프리 1세의 딸 (이름 미상). 1066년 결혼, 1076년 파혼.
- 아들: 베르트랑 (? ~ 1112년). 툴루즈 백작, 트리폴리 백작. 결혼 무효 문제로 서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 두 번째 부인: 시칠리아 백작 로제 1세의 딸 마틸다(마팔다). 1080년 결혼, 1094년 사망.
- 세 번째 부인: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의 사생아 딸 엘비라. 1094년 결혼.
- 아들: 알폰소 조르당 (1103년 ~ 1148년). 트리폴리 백작, 툴루즈 백작.
레몽 사후, 그의 조카 기욤 주르당이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트리폴리 백국을 세웠으나, 곧 레몽의 장남 베르트랑에게 폐위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레몽은 독실한 신자였으며 성지에서 죽기를 소망하여 제1차 십자군이 소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참여를 맹세한 인물 중 하나였다.[3] 예루살렘 순례 중 성묘 교회 문지기와의 싸움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소문 때문에 "외눈박이"(monoculusla)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십자군 원정 당시 그는 참가한 제후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부유했으며, 자연스럽게 남프랑스 제후들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완전한 충성 맹세는 거부했지만, 공동의 적인 타란토의 보에몽에 대항하는 우호 관계를 맺었다.
안티오키아 공방전 중 피에르 바르톨로뮤가 성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을 때, 레몽은 이를 지지하며 십자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성창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과 르퓌의 아데마르 주교의 회의적인 태도, 보에몽의 조롱 속에서 성창의 신성함은 의심받았고, 결국 피에르 바르톨로뮤가 신성 재판 과정에서 사망하면서 레몽의 입지도 약화되었다. 또한 안티오키아 점령 후 도시의 소유권을 두고 보에몽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레몽은 맹세대로 도시를 알렉시오스 1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보에몽은 이를 거부하고 도시를 차지하려 했다.
예루살렘 공략 이후, 레몽은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예수가 고난받은 도시에서 왕이라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 이는 그의 신앙심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트리폴리 지역에 자신만의 영지를 확보하려는 세속적인 야망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그는 예루살렘의 다윗 성탑 점유를 고집하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후 아스칼론 전투에 참여했지만, 아스칼론의 소유권을 두고 고드프루아와 다시 대립하면서 도시 점령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레몽은 독실한 신앙심과 세속적인 야망 사이에서 복합적인 면모를 보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성창 발견을 지지하고 예루살렘 왕위를 거절하는 등 종교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툴루즈 백작 지위를 조카에게서 빼앗고, 안티오키아나 트리폴리 등 새로운 영토 확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1101년 십자군 원정 실패 이후에도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지원을 받아 트리폴리 공략을 계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몽스 페레그리누스 요새를 건설했다.
레몽은 트리폴리 함락을 보지 못하고 1105년 사망했지만, 그의 노력은 트리폴리 백국 건국의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그의 사후 조카 기욤 주르당과 아들 베르트랑이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1109년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백국을 세웠으며, 이 백국은 12세기 동안 툴루즈 백작 가문의 지배하에 놓였다. 또한, 레몽의 군대에 속했던 사제 레몽 드 아길리에르는 제1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레몽의 관점에서 서술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참조
[1]
서적
Raymund of Toulouse
Encyclopedia Britannica 1911
[2]
간행물
Raymond IV, of Saint-Gilles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1
[3]
서적
The Counts of Toulouse (1050–1250)
Fayard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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