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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셰바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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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니트 셰바르신은 소련의 KGB 요원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91년까지 활동했다. 모스크바 국립 국제 관계 대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KGB에 합류하여 파키스탄, 인도, 이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89년 KGB 제1본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91년 소련 8월 쿠데타 이후 잠시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퇴역했다. 퇴역 후에는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으며, 2012년 77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모스크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2년 은메달을 받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셰바르신은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인도어학과에 입학하여 우르두어를 배웠다. 1954년, 이 연구소는 모스크바 국립 국제 관계 대학교(MGIMO)로 통합되었고, 셰바르신은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1958년 재편성된 모스크바 국립 국제 관계 대학교(MGIMO) 동양학부를 졸업했다.[1]

1957년, 그는 중국어를 전공하는 동급생 니나 바실리예브나 푸쉬키나와 결혼했다. 1958년 10월 졸업 후, 그는 파키스탄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1]

3. KGB 경력

1958년 모스크바 국립 국제 관계 대학교(MGIMO) 동양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 셰바르신은, 1962년 KGB에 스카우트되어 KGB 대학교에서 비밀 공작 훈련을 받았다. 훈련 후에는 제1본부에서 동남아시아를 담당하는 제14과로 배치되었다.

셰바르신은 파키스탄, 인도, 이란 등에서 KGB 대표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파키스탄 대표부에서 근무했고, 1971년부터 1977년까지는 인도 대표부에서 부대표 및 대표를 역임했다. 1979년에는 이란 대표부 대표로 임명되어 1983년까지 근무했다.

1983년 가을, KGB 제1본부 분석부 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부장이 되었다. 1987년에는 제1본부 부본부장, 1989년에는 KGB 제1본부장으로 승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셰바르신은 1991년 8월 22일부터 23일까지 단 하루 동안 KGB 의장 임시 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에게 자리를 내주고, 같은 해 KGB에서 퇴역했다.

3. 1. 파키스탄

1962년, 셰바르신은 제1총국에 합류하라는 초대를 받아 소위이자 보안 요원으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정보학교에서 1년간 훈련을 받은 후, 외교관 신분으로 파키스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파키스탄은 군사 정치 블록인 CENTO 및 SEATO에 참여하고,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인접국 인도와의 갈등, 그리고 중국과의 화해로 인해 파키스탄 지부가 소련 정보기관에게 중요해졌다. 파키스탄 주변의 미국 시설에서 정보원을 확보하는 것은 KGB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시 이 지역은 군사 고문, 외교관, 스파이, 언론인 및 기타 중요한 요원들을 포함한 미국 식민지였다.

소련의 주도로 파키스탄 대통령 아유브 칸과 인도 총리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1966년 1월 타슈켄트 선언을 통해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타슈켄트에서 만났다. 이는 알렉세이 코시긴이 이끄는 소련 대표단의 주요 외교적 성공이었다. 셰바르신은 협상 준비에 기여한 공로로 진급했다. 셰바르신의 상사들은 나중에 그가 "모집 활동에서 구체적인 결과를 달성했다"고 말하며, 그가 정보 요원에게 뇌물을 주고 정보를 획득했음을 시사했다.

3. 2. 인도

1971년 초, 셰바르신은 KGB에 의해 인도로 파견되었고, 1975년에는 레지던트로 임명되었다.[1] 1971년부터 1977년까지는 KGB 인도 대표부 부대표, 이후 대표로 인도에 장기 파견되었다.[1]

셰바르신이 해외에 있는 동안,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여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고, 파키스탄 분할과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독립, 그리고 인도 비상사태가 발생했다.[1] 인도 주재 미국 대표의 활동은 소련 정보팀의 면밀한 감시 대상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소련의 주요 적대국으로 남아 있었다.[1] 당시 인도의 중국과의 관계 또한 중요했다.[1] 셰바르신의 주요 지역에서의 활동은 소련 정치 지도부에 의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1]

3. 3. 이란

1978년 말, 셰바르신은 팔라비 이란에서 근무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1979년 5월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 소련 정보기관과 이란 관리들 간의 연계는 이란 군주제의 비밀 경찰인 SAVAK에 의해 수행된 방첩 작전의 부분적인 영향으로 약화되었다.[3]

셰바르신은 결국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1979년 1월에 국외로 도피한 후 이란의 군주제가 붕괴된 후에 도착했다. 반대 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와 이맘의 칭호로 국가적 인정을 받았다. 이란 혁명은 내분 격화의 전례 없는 시작을 알렸고, 이는 모든 대립 세력에 의해 벌어진 무장 충돌과 수많은 테러 행위로 이어졌다.[4]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소련의 반응은 엇갈렸다. 그들은 샤를 잃었지만, 혁명의 초기 단계는 결과적인 권력 공백 속에서 진보적인 연합을 형성할 기회로 여겨졌다. KGB는 공산주의 이란 투데 당을 은밀히 지원했고, 야당 그룹인 이란 인민 모자헤딘 기구와 이란 인민 페다이 게릴라 조직과 비밀리에 소통했다. 처음에는 소련과 투데 당이 이란에서 권력을 잡은 종교 지도자들을 지지했는데, 그들의 통치가 이후 더 진보적인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1979년 11월, 이란 인질 사태가 시작되었고, 이란과 미국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소련에게 유리하도록 이란의 상황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란 지도부는 북쪽 이웃의 영향력 증가를 막기로 결심했다. 1979년 12월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란-소련 관계의 추가적인 냉각을 초래했고, 소련 대사관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을 촉발했다. 소련의 정보 작전은 어려움을 겪었고, 정보원과의 협력 조건은 극도로 복잡해졌다.

1982년, 테헤란의 소련 거주지는 셰바르신의 부하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쿠지치킨의 망명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쿠지치킨은 테헤란 주재 스웨덴 대사관의 영국 이익 대표부에 가서 망명했다. 그는 영국인들과 수많은 소련 기밀을 공유했고, 영국인들은 그것들을 CIA뿐만 아니라 호메이니 정권과도 공유했다. 쿠지치킨과 영국 관리들은 그의 망명이 즉흥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셰바르신은 영국이 오랫동안 그를 포섭했다고 믿었다.

이 재앙은 셰바르신에게 큰 수치심을 안겨주었고, 1983년 그가 모스크바로 소환된 이유의 일부가 되었을 수 있다. 셰바르신은 이란인들이 소련 요원과 이란 좌파에 대한 단속을 시작하는 과정에 있었기에 추방을 피하기 위해 소환되었다고 주장했다.

셰바르신은 1983년 2월 이란을 떠났다. 이란 정권은 누레딘 키아누리, 투데 당 지도자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그는 당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소련을 위해 첩보 행위를 했다는 공개 자백을 강요받았다.

3. 4. KGB 최고위직

1983년, 셰바르신은 PGU KGB 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의 지휘 아래 몇 달 동안 모스크바 본부로 복귀했다. 셰바르신은 정보 분석 부서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84년 셰바르신은 크류치코프를 수행하여 카불로 임무를 수행했다. 1991년 중반까지 그는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20회 이상의 임무에 참여하여 바브라크 카르말, 모하마드 나지불라, 술탄 알리 케시트만드 등 이 나라의 지도자들과 친밀해지려 했다. 1987년 셰바르신은 PGU KGB 부국장으로 임명되어 크류치코프 다음으로 2인자가 되었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정보 작전을 관리했다. 1989년 2월, 그는 크류치코프를 대신하여 제1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중장으로 진급했다.

1991년 8월, 셰바르신은 KGB 수장 크류치코프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부차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크류치코프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FCD 요원과 준군사 부대를 동원했지만, 그들에게 셰바르신에게서 직접 명령을 받도록 지시했다. 쿠데타가 시작된 지 며칠 만에 셰바르신은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공모자들과의 협력을 중단했다. 일주일도 안 되어 쿠데타는 종료되었고, 크류치코프와 8인방의 다른 구성원들은 구금되었다. 셰바르신은 고르바초프를 만나 새로운 KGB 수장으로 임명되었다.[5]

그는 단 하루만 재임했다. RSFSR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이 임명에 반대하며 새로운 후보를 요구했다.[6] 그는 KGB를 해체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셰바르신은 바카틴이 그와 상의 없이 새로운 FCD 부국장 블라디미르 로즈코프를 발표할 때까지 FCD 수장으로 복귀했다. 1991년 9월 20일 셰바르신은 사임했다.

4. 퇴역 이후

1991년 9월 20일, 셰바르신은 사임했다.[5]

셰바르신은 적기 훈장(1981)과 적성 훈장(1970)을 수여받았다. 그는 또한 "정보 공로" 훈장(1967)과 "명예 국가 보안 요원" 훈장(1972)을 받았다.[7]

1991년, 셰바르신은 친구 니콜라이 레오노프와 함께 모스크바에 본사를 둔 컨설팅 회사인 러시아 국가 경제 안보 서비스(RNESS) (Российской национальной службы экономическ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РНСЭБ)ru)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첫 해 동안 알렉스 코나니킨과 관련된 구조의 일부였다.[8][9][10]

2012년 3월 30일, 77세의 셰바르신은 모스크바 자택에서 총으로 자살했다.[11] 당시 그는 뇌졸중으로 완전한 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심각한 질병을 앓았으며, 이로 인해 자살했을 수 있다.[12][13]

5. 사망

Леонид Владимирович Шебаршин|레오니트 블라디미로비치 셰바르신ru은 2012년 3월 30일 77세의 나이에 모스크바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11] 당시 그는 뇌졸중으로 인해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에 따르면,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12][13]

6. 평가

레오니트 셰바르신은 KGB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우르두어를 전공하고 외무성에서 근무하다가 KGB에 스카우트되었다. 파키스탄, 인도, 이란 등에서 해외 정보 활동을 담당했으며, 소련 8월 쿠데타 직후에는 KGB 의장 임시 대행을 맡기도 했다. 퇴역 후에는 경제 보안 서비스 회사의 사장을 지내다가 2012년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7. 수상

레오니트 블라디미로비치 셰바르신은 적기 훈장(1981년)과 적성 훈장(1970년)을 받았다. 또한 "정보 공로" 훈장(1967년)과 "명예 국가 보안 요원" 훈장(1972년)을 받았다.[7]

참조

[1] 뉴스 Russia warns of Iraqi fallout http://www.atimes.co[...] 2011-02-11
[2] 뉴스 Soviet ex-KGB chief Leonid Shebarshin 'kills himself' https://www.bbc.co.u[...] BBC 2012-03-30
[3] 간행물 "A Priest does not consider the toppling of the Shah as an option" The KGB and the revolution in Iran 2022-10
[4] 웹사이트 AP WAS THERE: Shah leaves Iran as 1979 revolution looms https://apnews.com/a[...] 2019-01-16
[5] 웹사이트 Requiem for a Russian Spy https://foreignpolic[...] 2023-08-17
[6] 서적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1985-1991 Pearson
[7] 웹사이트 SHEBARSHIN LEONID VLADIMIROVICH http://svr.gov.ru/hi[...] Foreign Intelligence Service of the Russian Federation 2023-08-17
[8] 뉴스 Герой: Его обласкали в кремлевских кабинетах. В свои неполные тридцать он руководит одним из крупнейших в России банков и добивается для него всех степеней уполномоченности. Он финансирует предвыборную кампанию Бориса Ельцина. Контролирующие органы бессильны перед его детищем -- валютными аукционами. Это не Владимир Потанин и не ОНЭКСИМбанк. Речь идет об Александре Конаныхине и Всероссийском биржевом банке, а события датированы 1991-1992 годами. Нынешним летом Конаныхин вышел из американской тюрьмы. Свое первое за много лет затворничества интервью он дал "Профилю" в США. http://www.profil.or[...] 2023-11-03
[9] 뉴스 Владимир Снегирев: Леонид Шебаршин был правильным человеком: Из жизни разведчика https://rg.ru/2012/0[...] 2023-11-03
[10] 뉴스 Леонид Владимирович Шебаршин. Биографическая справка https://ria.ru/20120[...] 2023-11-03
[11] 뉴스 Former Soviet KGB spy chief commits suicide https://www.reuters.[...] 2012-03-30
[12] 뉴스 An Illness Could Be The Only Cause of the Suicide Committed by the Ex-Director of the Soviet Foreign Intelligence Service http://www.rosbalt.r[...] Rosbalt 2012-04-02
[13] 뉴스 The Last Soviet Intelligence Officer http://www.gazeta.ru[...] Gazeta.ru 2012-03-30
[14] 뉴스 Застрелился бывший глава внешней разведки СССР http://lenta.ru/news[...]
[15] 뉴스 前 KGB 수장 모스크바 자택서 권총 자살 https://news.v.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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