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코시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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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세이 코시긴은 1904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소련의 정치인으로,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붉은 군대에서 복무하고 콤소몰에 가입한 후, 레닌그라드에서 직물 공장장으로 일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39년 소련 섬유 산업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련의 전쟁 경제를 지도하며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주민 대피를 관리했다. 전후에는 소련 경제 계획을 담당했으며, 1965년에는 경제 개혁을 추진했지만, 브레즈네프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고 건강 악화로 1980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실용적이고 유능한 행정가로 평가받으며, 소련과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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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코시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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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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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
로마자 표기 | Aleksei Nikolaevich Kosygin |
러시아어 표기 |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сы́гин |
출생일 | 1904년 2월 21일 |
출생지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
사망일 | 1980년 12월 18일 |
사망지 | 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
안장 장소 | 크렘린 벽 묘지, 모스크바 |
국적 | 소련 |
민족 | 러시아인 |
배우자 | 클라브디아 안드레예브나 (1967년 사망) |
직업 | 교사, 공무원 |
거주지 | 제방 위의 집 |
출신 학교 | 레닌그라드 전문학교 |
군사 복무 | |
소속 | 붉은 군대 |
복무 기간 | 1919년 – 1921년 |
계급 | 징집병 |
참전 | 러시아 내전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1927년–1980년) |
제18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46년 3월 18일 – 1948년 9월 4일 |
제19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52년 10월 16일 – 1953년 3월 5일 |
제20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57년 6월 29일 – 1960년 5월 4일 |
제18기 정치국 위원 | 1948년 9월 4일 – 1952년 10월 16일 |
제22기-25기 정치국 위원 | 1960년 5월 4일 – 1980년 10월 21일 |
정부 직책 | |
러시아 SF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43년 6월 23일 – 1946년 3월 23일 |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59년 3월 20일 – 1960년 5월 4일 |
소련 각료평의회 제1부의장 | 1960년 5월 4일 – 1964년 10월 15일 |
소련 각료평의회 의장 | 1964년 10월 15일 – 1980년 10월 23일 |
소련 각료평의회 의장 | 니키타 흐루쇼프 |
수상 재임 기간 | |
재임 기간 | 1964년 10월 15일 – 1980년 10월 23일 |
대통령 | 아나스타스 미코얀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
제1부수상 |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키릴 마주로프 드미트리 폴랸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
전임 수상 | 니키타 흐루쇼프 |
후임 수상 | 니콜라이 티호노프 |
훈장 | |
훈장 | [[파일:Hero of Socialist Labor medal.png|사회주의 노동영웅|20px]] [[파일:Hero of Socialist Labor medal.png|사회주의 노동영웅|20px]]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10월 혁명 훈장 노동적기훈장 [[파일:PER Order of the Sun of Peru - Grand Cross BAR.png|페루 태양훈장|20px]] |
2. 초기 생애와 교육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은 1904년 2월 21일(율리우스력 2월 8일)[33]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34] 3월 7일에 세례를 받았다.[34] 그의 아버지는 지방 공장에서 선반 조작원으로 일했다. 어린 코시긴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 정부를 장악했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혁명적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유아기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서 자랐다.
1938년 코시긴은 레닌그라드의 산업 운송부의 우두머리로 임명된후, 레닌그라드의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소련 최고 소비에트로 선출되었다.[7] 1939년 1월, 34세의 나이에 소련 섬유 산업 인민위원(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7] 1940년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부총리)이 되었으며, 소련 산업의 경제 계획을 담당하였다.[6]
194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6] 1946년-1947년 소련 기근 기간 동안 가장 고통받는 지역에 대한 식량 구호 임무를 이끌었다.[6] 종전 후, 소련 경제 계획을 계속 지도하였다. 1948년 소련 재무장관을 역임하고,[6] 같은 해 9월 4일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6]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실각한 후, 코시긴은 소련 총리에 취임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최고회의 상임위원장)와 함께 '트로이카' 집단 지도체제를 구축했다. 서방에서는 처음에 “브레즈네프-코시긴 정권”이라고 표현했다. 코시긴은 흐루쇼프 축출 계획에 대해 직전까지 알지 못했으며, 소련 국가안전위원회(KGB)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계획에 동의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혁명에 동정적이었고, 1919년 15세의 나이에 코시긴은 정권을 탈환하려는 세력에 대항하는 볼셰비키들의 새롭게 설립된 공산당 정부를 방어하고 있었던 붉은 군대에 자원했다.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들은 승리하였고 1921년 정부의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가입하였다. 1921년 적군에서 제대한 후, 코시긴은 레닌그라드 협동조합 기술학교에 다녔으며[36] 노보시비르스크, 시베리아의 소비자 협동조합 시스템에서 일자리를 얻었다.[37] 경제의 협동조합 부문에서 일한 이유를 묻자 코시긴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슬로건을 인용하며 "협동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다.[7]
1924년 졸업 후 코시긴은 국가 통제 경제 안에서 협동 작업 제도를 창조하는 도움을 주러 시베리아로 이주하였다. 코시긴은 시베리아 협동조합 협회의 회장이 되었고 1927년 정식으로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39] 시베리아에 있던 동안 그는 결혼하고 슬하 2명의 자녀를 두었다. 1930년 코시긴은 레닌그라드로 돌아와 레닌그라드 직물 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1935년 자신의 교육을 완료한 그는 점장부터 공장장까지 직물 공장에서 일하였다.
3. 초기 정치 경력과 전쟁 시기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1945년) 동안, 코시긴은 소련의 전쟁 경제를 지도하고 산업 시설과 인력을 안전 지역으로 대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1942년 1월,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라도가 호수를 가로지르는 빙상 도로와 파이프라인건설을 관리하여, 주민 약 50만 명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공장과 발전소에 연료를 공급했다.[8] 1943년 러시아 SFSR 인민위원회의장으로 승진했다.[39]
4. 전후 정치 경력
코시긴의 행정 능력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그를 자신의 측근으로 삼도록 이끌었다. 스탈린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아나스타스 미코얀,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소유하고, 얼마나 지출하고, 직원들에게 얼마나 지불했는지와 같은 정보를 코시긴과 공유했다. 스탈린은 코시긴을 각 가정으로 보내 그들의 집을 "정돈"하도록 했다.
1948년 8월, 코시긴의 후원자였던 즈다노프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라브렌티 베리아와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스탈린을 설득하여 즈다노프파 구성원들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어진 잔혹한 숙청, 소위 레닌그라드 사건 동안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 알렉세이 쿠즈네초프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코시긴은 1952년까지 명목상으로는 정치국원직을 유지했지만, 소련 경공업부 장관직으로 좌천되었다.[9] [10]
니키타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사망에 이어 코시긴은 조직이 25명에서 10명의 회원들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국 직위를 잃었다. 9월, 스탈린 사망 6개월 후 코시긴은 소련 공업재 생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스탈린의 후계자인 말렌코프 휘하에서 부총리로 복귀했다. 1956년 12월에는 흐루쇼프의 권력 장악이 이루어진 후, 국가경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57년 흐루쇼프와 소위 '반당파 그룹' 간의 권력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코시긴은 흐루쇼프를 지지했다.[12]
1957년 6월 다시 부총리로 임명되었고, 중앙위원회(개명된 정치국)의 후보위원이 되었다. 1959년 3월 고스플란 의장이 되었고, 1960년 5월 4일에는 부총리 1위로 승진했으며 중앙위원회 정식 위원이 되었다.[13] 부총리 1위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도, 아르헨티나, 이탈리아와 같은 국가들을 방문했다. 1959년부터 코메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카리브 해 위기 이후 코시긴은 소련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위한 소련 대변인이었다.[9]
5. 소련 총리 재임 (1964-1980)
코시긴은 주로 경제를 중심으로 한 내정을 담당했지만, 총리 취임 초기에 브레즈네프가 당 서기장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외교권을 행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코시긴은 비공산권에서 일반적인 것처럼 정부 수반이 외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등은 코시긴을 소련 최고 지도자로 여기게 되었다. 탕트의 물결을 타고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 등 서방 지도자들과 적극적으로 회담을 갖고, 서방 진영과의 군비 통제 협상을 주도하는 등 평화 공존을 모색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은 미소 관계 개선으로 이어졌고, 미국 정부는 협력을 더욱 증진하기 위해 코시긴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초청했다.
회담에서는 양 정상이 탄도 미사일 요격 시스템 제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지만, 미소의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 8월 12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방소했을 때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하여 서독과의 관계가 더욱 개선되었다. 1971년에는 록펠러 등 미 대표단과 회담을 갖고 코시긴은 미소 관계, 환경 보호, 군비 통제 및 기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966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을 중재하여 타슈켄트 선언에 서명하게 하는 등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해결에 힘썼다. 또한 핀란드의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과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고, 냉전하에서 양국 간 활발한 무역을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 1972년에는 이라크와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하여 이전 아브드 엘 카림 카심 정권 시대와 같이 바스당과 소련 간에 강력한 관계가 구축되었다.
1964년 10월, 브레즈네프는 소련 우주비행사를 기리는 기념식에서 당의 권한 강화를 촉구했는데, 이것은 브레즈네프가 코시긴을 축출하기 위한 작업의 서막이었다. 코시긴은 원래부터 브레즈네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프라우다 등 소련 신문들은 “비현실적인 경제 계획을 수립했다”며 각료회의와 의장인 코시긴을 비판했다. 코시긴은 1965년 9월에 계획·관리 면에서 기업 분권화를 도모하는 경제 개혁(코시긴 개혁)을 추진했지만, 1960년대 말까지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소련 경제는 침체되었다. 또한 코시긴은 소비재 증산을 주장했지만, 이에 대해 브레즈네프는 측근인 콘스탄틴 체르넨코와 함께 블라디미르 레닌이 경공업보다 농업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코시긴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리고 제23차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파의 주장이 통과되어 군사와 농업에 대한 예산 증액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코시긴의 입장에 영향을 미쳤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발생하자 코시긴의 정책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일어났고, 8월에는 갑자기 총리 사임설이 퍼졌다.[41] 1960년대를 통해 서방 국가들과의 최고 협상가였던 코시긴이었지만, 브레즈네프가 정치국 내에서 지위를 굳히고,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이 자신의 권한에 대한 간섭을 싫어하자 동구권과의 외교를 제외하고는 외교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중소 대립 중이던 1969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의 호찌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들른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지만, 이 회담에서는 긍정적인 결론을 얻지 못했고, 중소 양국은 1969년부터 1970년에 걸쳐 군사 충돌을 반복했다. 1974년 9월 17일에 만난 당시 창가학회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에게 “소련은 중국을 공격할 의도도, 고립시킬 의도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가 일리아 젬초프(Илья Земцов)에 따르면, 코시긴은 제24차 당 대회 이후 실권을 잃기 시작했다고 한다.
5. 1. 흐루쇼프 실각과 집단 지도 체제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실각한 후, 코시긴은 소련 총리에 취임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최고회의 상임위원장)와 함께 '트로이카' 집단 지도체제를 구축했다. 서방에서는 처음에 “브레즈네프-코시긴 정권”이라고 표현했다. 코시긴은 흐루쇼프 축출 계획에 대해 직전까지 알지 못했으며, 소련 국가안전위원회(KGB)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계획에 동의했다.
코시긴은 주로 경제를 중심으로 한 내정을 담당했지만, 총리 취임 초기에 브레즈네프가 당 서기장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외교권을 행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코시긴은 비공산권에서 일반적인 것처럼 정부 수반이 외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등은 코시긴을 소련 최고 지도자로 여기게 되었다. 탕트의 물결을 타고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 등 서방 지도자들과 적극적으로 회담을 갖고, 서방 진영과의 군비 통제 협상을 주도하는 등 평화 공존을 모색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은 미소 관계 개선으로 이어졌고, 미국 정부는 협력을 더욱 증진하기 위해 코시긴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초청했다.
회담에서는 양 정상이 탄도 미사일 요격 시스템 제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지만, 미소의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 8월 12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방소했을 때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하여 서독과의 관계가 더욱 개선되었다. 1971년에는 록펠러 등 미 대표단과 회담을 갖고 코시긴은 미소 관계, 환경 보호, 군비 통제 및 기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966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을 중재하여 타슈켄트 선언에 서명하게 하는 등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해결에 힘썼다. 또한 핀란드의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과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고, 냉전하에서 양국 간 활발한 무역을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 1972년에는 이라크와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하여 이전 아브드 엘 카림 카심 정권 시대와 같이 바스당과 소련 간에 강력한 관계가 구축되었다.
1964년 10월, 브레즈네프는 소련 우주비행사를 기리는 기념식에서 당의 권한 강화를 촉구했는데, 이것은 브레즈네프가 코시긴을 축출하기 위한 작업의 서막이었다. 코시긴은 원래부터 브레즈네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프라우다 등 소련 신문들은 “비현실적인 경제 계획을 수립했다”며 각료회의와 의장인 코시긴을 비판했다. 코시긴은 1965년 9월에 계획·관리 면에서 기업 분권화를 도모하는 경제 개혁(코시긴 개혁)을 추진했지만, 1960년대 말까지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소련 경제는 침체되었다. 또한 코시긴은 소비재 증산을 주장했지만, 이에 대해 브레즈네프는 측근인 콘스탄틴 체르넨코와 함께 블라디미르 레닌이 경공업보다 농업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코시긴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리고 제23차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파의 주장이 통과되어 군사와 농업에 대한 예산 증액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코시긴의 입장에 영향을 미쳤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발생하자 코시긴의 정책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일어났고, 8월에는 갑자기 총리 사임설이 퍼졌다.[41] 1960년대를 통해 서방 국가들과의 최고 협상가였던 코시긴이었지만, 브레즈네프가 정치국 내에서 지위를 굳히고,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이 자신의 권한에 대한 간섭을 싫어하자 동구권과의 외교를 제외하고는 외교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중소 대립 중이던 1969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의 호찌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들른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지만, 이 회담에서는 긍정적인 결론을 얻지 못했고, 중소 양국은 1969년부터 1970년에 걸쳐 군사 충돌을 반복했다. 1974년 9월 17일에 만난 당시 창가학회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에게 “소련은 중국을 공격할 의도도, 고립시킬 의도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가 일리아 젬초프(Илья Земцов)에 따르면, 코시긴은 제24차 당 대회 이후 실권을 잃기 시작했다고 한다.
5. 2. 경제 개혁 (코시긴 개혁)
1965년 코시긴은 소련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코시긴 개혁'으로 알려진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21] 이 개혁은 기업의 자율성 확대, 이윤 동기 도입, 생산량 증대 및 인센티브 제공 등을 목표로 했다.[21] 코시긴은 이윤 창출과 같은 제1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장 메커니즘을 일부 도입하여 소련 산업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21] 그는 또한 생산량 증대, 관리자와 노동자에 대한 인센티브 증가, 그리고 관리자들을 중앙 집권화된 국가 관료주의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21] 이 개혁은 경공업의 336개 기업에 시험적으로 적용되었다.[21]
코시긴은 분권화, 반(半)국영 기업 및 협동조합이 제1세계의 현대적인 경제 성장 수준에 따라잡는 데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의 개혁은 "국가가 관리하는 경제"에서 "국가가 기업을 지도하는 데 국한하는" 경제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21]
그러나 이 개혁은 보수파의 반발과 체제의 경직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60년대 말에 사실상 중단되었다.[21] 많은 소련 공무원들은 코시긴의 개혁 제안에 불편함을 느꼈다.[21]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군사적으로 체코의 개혁 운동을 분쇄했고, 코시긴의 아이디어들은 보류되었다.[21]
코시긴의 개혁은 소련 경제학자 예브세이 리베르만의 연구에 영향을 받았다. 코시긴은 소련 행정 기구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과대평가했고, 이는 분권화에 대한 리베르만의 보다 논란이 되는 믿음에 대한 "수정"으로 이어졌다. 비평가들에 따르면, 코시긴이 리베르만의 원래 구상을 변경한 것이 개혁의 실패 원인이 되었다.[21]
8차 5개년 계획(1966~1970)은 소련 경제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기 중 하나로 여겨지며, 특히 소비재 생산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계획으로 평가된다.[17] 이 시기는 "황금기"로 알려져 있다.[18] 제23차 당대회와 9차 5개년 계획(1971~1975)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 의해 소련 지도부 내 권력 투쟁으로 인해 연기되었다.[21]
코시긴은 1973년 경제 개혁을 통해 중앙 부처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공화국 및 지방 차원의 지역 당국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려 했다. 이 개혁은 코시긴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취소되었지만, 다양한 기업을 대표하는 조직인 '협회(associations)'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21]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지도부가 시행한 마지막 중요한 개혁은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의 공동 결정에 따라 코시긴의 5차 정부가 시작한 1979년 개혁이다.[21] 이 개혁은 1965년 개혁과는 달리 부처의 임무와 책임을 강화함으로써 중앙 정부의 경제 개입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1980년 코시긴의 사임과 니콜라이 티호노프의 보수적인 경제 접근 방식으로 인해 개혁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다.[22]
5. 3. 외교 정책
196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에 취임하고, 코시긴은 소련의 총리가 되어, 브레즈네프, 니콜라이 포드고르니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서방에서는 처음에 “브레즈네프-코시긴 정권”이라고 표현되었다. 코시긴은 주로 경제를 중심으로 한 내정을 담당했지만, 총리 취임 초기에 브레즈네프가 당 서기장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외교권을 행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코시긴은 비공산권에서 일반적인 것처럼 정부 수반이 외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7년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한 후, 미국 정부는 코시긴을 린든 B. 존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초청했다. 글래스보로 정상회담으로 알려진 이 정상회담에서 존슨과 코시긴은 대탄도탄 방어 시스템 제한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정상회담의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는 "글래스보로 정신"으로 불렸다. 코시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비판했지만, 글래스보로 회담은 양국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 체결과 전략 무기 제한 협상 개시에 합의했다.
1966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고, 두 국가가 타슈켄트 선언에 서명하도록 했다. 코시긴은 군축 문제에 대한 대변인이 되었다.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완화를 위해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회담했다. 코시긴은 마오쩌둥의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1969년에 잠시 베이징을 방문했다.
1970년 서독과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관계를 개선했다. 1972년 이라크와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소련과 이라크 아랍 사회주의 바스당의 강력한 유대와 이라크 지도자 압드 엘-카림 카심과의 이전 긴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핀란드 대통령 우르호 케코넨과 긴밀한 우호 관계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소련이 핀란드와 활발한 상호 무역을 유지하고 냉전 대결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데 기여했다.
5. 4. 브레즈네프와의 권력 투쟁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당 제1서기(이후 서기장)에 취임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알렉세이 코시긴은 같은 해 10월, 총리에 취임하여 브레즈네프,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의장과 함께 “트로이카”라 불리는 집단 지도체제를 구성했다. 서방에서는 처음에 “브레즈네프-코시긴 정권”이라고 표현했다.
코시긴은 경제를 중심으로 한 내정을 담당했지만, 총리 취임 초기에는 브레즈네프가 당 서기장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외교권을 행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코시긴은 비공산권에서 일반적인 것처럼 정부 수반이 외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코시긴의 주도로 외교가 이루어진 결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등은 코시긴을 소련 최고 지도자로 여기게 되었다.
1964년 10월, 브레즈네프는 소련 우주비행사들을 기리는 기념식에서 당의 권한 강화를 촉구했는데, 이는 브레즈네프가 코시긴을 축출하기 위한 작업의 서막이었다. 코시긴은 원래부터 브레즈네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프라우다 등 소련 신문들은 “비현실적인 경제 계획을 수립했다”며 각료회의와 의장인 코시긴을 비판했다.
1960년대 후반, 코시긴이 추진한 경제 개혁(코시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소련 경제는 침체되었다. 코시긴은 소비재 증산을 주장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측근인 콘스탄틴 체르넨코와 함께 블라디미르 레닌이 경공업보다 농업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코시긴의 주장을 비판했다. 제23차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파의 주장이 통과되어 군사와 농업에 대한 예산 증액이 결정되었고, 이는 코시긴의 입지에 영향을 미쳤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발생하자 코시긴의 정책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일어났고, 8월에는 갑자기 총리 사임설이 퍼졌다.[41] 이후 정치국 내에서 브레즈네프의 지위가 우세해졌다. 1960년대를 통해 서방 국가들과의 최고 협상가였던 코시긴이었지만, 브레즈네프가 정치국 내에서 지위를 굳히고,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이 자신의 권한에 대한 간섭을 싫어하자 동구권과의 외교를 제외하고는 외교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이 발발하자, 코시긴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의 호찌민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들른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지만, 긍정적인 결론을 얻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일리아 젬초프(Илья Земцов)에 따르면, 코시긴은 제24차 당 대회 이후 실권을 잃기 시작했다고 한다. 브레즈네프는 정부 기관에 대한 당의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코시긴의 입장을 더욱 약화시키고, 총리의 권한 일부를 최고회의로 이양했기 때문에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의장인 포드고르니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1977년 소위 “브레즈네프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각료회의는 최고회의에 종속되는 기관으로 지정되었고, 포드고르니에 의한 각료회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같은 해, 브레즈네프가 포드고르니를 실각시키고 스스로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의장직을 겸임하게 되자 코시긴의 권한은 극적으로 축소되었다.
6. 은퇴와 사망
알렉세이 코시긴은 1970년대에 2회의 심근 경색을 겪었다. 1976년 첫 심장마비를 겪은 후, 코시긴은 이전과 달리 활력을 잃고 지친 모습을 보였으며,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일을 계속할 의지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17] 1970년대 초중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권력 기반을 강화하여 코시긴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1977년 소련 헌법 개정으로 최고 소비에트 의장단에 내각의 일부 기능이 부여되면서 코시긴의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다.[23] 1970년대 동안 코시긴은 건강 악화로 자주 입원했으며, 여러 차례 키릴 마주로프 (부수상 내각 제1부수상)가 그의 대리로 활동했다.
1980년 코시긴은 건강상의 이유로 소브민 의장직에서 사임했으며, 니콜라이 티호노프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코시긴은 1980년 10월 입원 중 사직서를 제출했고, 다음 날 정치 생활 동안 누렸던 모든 정부 혜택을 박탈당했다.[43] 1980년 12월 18일 코시긴은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브레즈네프의 생일 전날이자 스탈린의 사망일이었기 때문에 3일 연기되었다.[24]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국장이 거행되었고 코시긴은 동료들에 의해 예우를 받았다. 브레즈네프, 유리 안드로포프, 그리고 티호노프는 그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했다.[26]
7. 유산 및 평가
알렉세이 코시긴은 실용적이고 비교적 독립적인 지도자로, 소련 내에서 유능한 행정가로 평가받는다.[27] 익명의 GRU 관계자는 코시긴을 "고독하고 다소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신중한 태도를 언급했다. 코시긴의 전 동료는 그가 협상에 능숙하고 새로운 자료에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27]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코시긴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선구자와 같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27]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코시긴이 자신의 일에 헌신적이었다고 회고했다.[28]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코시긴을 "폴리트뷰로에서 가장 지능적이고 강인한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23]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그를 "매우 조용하지만 매우 단호하고, 뛰어난 능력과 적용력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했다.[29] 미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록펠러는 코시긴을 서투른 소련 경제를 다스리는 데 기적을 행하는 재능 있는 관리자로 묘사했다.[30]
코시긴의 온건한 1965년 개혁은 흐루쇼프의 해동과 마찬가지로 소련 개혁 운동을 과격화시켰다.[27]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중앙 집중화된 계획 경제를 유지하려 한 반면, 코시긴은 분권화를 통해 경제 시스템을 활성화하려 했다.[27]
일리야 젬초프, 모세 레윈, 그레고리 엘리엇, 데이비드 로 등 여러 역사학자들은 코시긴을 뛰어난 행정가로 평가하며 그의 업무 능력을 강조했다. 이반 모즈들리와 스티븐 화이트는 브레즈네프가 코시긴을 해임할 수 없었던 이유로 그의 능력을 꼽았다.[27] 로이 메드베데프와 조레스 메드베데프는 코시긴을 "뛰어난 조직자"라고 평가했다.[27] 아치 브라운은 코시긴의 개혁이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그를 유능한 행정가로 인정했다.[27]
코시긴은 소련 국민들로부터 동정심을 얻었으며, 현재도 러시아와 소련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26] 니콜라이 예고리체프에 따르면, 코시긴의 인기는 브레즈네프의 질투를 샀다.[26] 미하일 스미르튜코프는 코시긴이 브레즈네프와 술을 마시는 것을 거부하여 브레즈네프를 화나게 했다고 회상했다.[26] 니콜라이 류즈코프는 최고회의 연설에서 1965년 개혁의 실패를 언급하며, 개혁 철회 후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주장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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