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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올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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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올트먼(Robert Altman, 1925–2006)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독창적인 연출 스타일로 '알트먼 풍'이라는 평가를 받은 미국의 영화인이다. 그는 1970년 영화 《M*A*S*H》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내슈빌》, 《숏 컷》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미국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날카롭게 그려냈다.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장려하고, 대규모 앙상블 캐스트와 겹치는 대사를 활용하는 등 독창적인 연출 기법을 선보였으며, 2006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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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올트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3년의 로버트 알트만
1983년의 알트만
본명로버트 버나드 알트만
출생일1925년 2월 20일
출생지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사망일2006년 11월 20일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직업영화 감독
프로듀서
각본가
활동 기간1947년–2006년
배우자LaVonne Elmer (1946년–1951년)
Lotus Corelli (1954년–1957년)
Kathryn Reed (1959년–2006년)
자녀6명, 스티븐 알트만 포함
군사 경력
소속 국가미국
군종미국 육군 항공대
복무 기간1943년–1947년
계급제1중위
소속 부대제13공군
제307폭격비행단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아시아-태평양 전구
훈장육군 항공대 조종사 휘장
공군 대통령 부대 표창
미국 전역 종군 메달
아시아-태평양 전역 종군 메달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메달
필리핀 대통령 부대 표창
관련 인물
가족 관계스티븐 알트만 (아들)
리처드 C. 사라피안 (의붓 형제)
테디 사라피안 (조카)
데란 사라피안 (조카)
수상
아카데미상명예상
2005년 경력 전반에 걸쳐 예술 형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다른 영화 제작자 및 관객에게 영향을 미친 공로
칸 영화제그랑프리
1970년 『MASH』
감독상
1992년 『플레이어』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황금사자상
1993년 『숏 컷』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1993년 『숏 컷』
명예 황금사자상
1996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황금곰상
1976년 『빅 아메리칸』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1985년 『명예로운 철수 ~닉슨의 밤~』
명예 황금곰상
2002년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감독상
1992년 『플레이어』
영국 작품상
2001년 『고스포드 파크
에미상감독상(드라마 시리즈 부문)
1988년 『Tanner '88
미국 영화 연구소(AFI)감독상
2001년 『고스포드 파크
골든 글로브상감독상
2001년 『고스포드 파크
전미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1975년 『내슈빌』
2001년 『고스포드 파크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1975년 『내슈빌』
1992년 『플레이어』
2001년 『고스포드 파크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공로상
2003년
기타 수상전미 비평가 위원회상
감독상
1975년 『내슈빌』
관련 작품
주요 작품『M★A★S★H 매쉬』(1970년)
『갬블러』(1971년)
『이미지스』(1972년)
『롱 굿바이』(1973년)
『내슈빌』(1975년)
『빅 아메리칸』(1976년)
『웨딩』(1978년)
『플레이어』(1992년)
『숏 컷』(1993년)
『프레타포르테』(1994년)
고스포드 파크』(2001년)
『오늘 밤, 피츠제럴드 극장에서』(2006년)

2. 이력

로버트 올트먼은 1944년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1946년 하사로 예편했다. 이듬해 단역 영화배우로 데뷔했으나, 이후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전향하여 활동하였다.

1946년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후, 1948년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의 영화 《보디가드》의 원안을 RKO에 팔았다. 이후 광고 제작 일을 하며 촬영 및 편집 기법을 익혔고, 1951년부터 단편 및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1957년 첫 장편 극영화 《불량소년》을 제작했는데, 본인은 "끔찍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지만 알프레드 히치콕은 감탄하여 히치콕 극장 연출을 의뢰했다. 1958년 조셉 코튼 주연의 《크리스마스 이브》 등 1편을 제작했다. 또한 1957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제임스 딘 이야기》 역시 히치콕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소니호 공중모험》 연출을 거쳐 세 번째 아내인 캐서린 리드를 만났다. 《피터 건》, 《보난자》, 《로어링 20》, 《하와이안 아이》, 《루트 66》, 《버스 정류장》 등 많은 TV 드라마를 제작하며 인기 감독이 되었다. 1962년에는 TV 시리즈 《컴뱃!》의 제작과 초기 10개 에피소드의 연출을 맡았다. 자신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혹독한 전장의 인간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제작자와 갈등을 빚었지만, 5년간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1968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우주 대정복》을 촬영했으나, 잭 워너가 러시를 본 후 배우들에게 동시에 대사를 시켰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러나 1970년 개봉한 한국 전쟁을 다룬 영화 《M*A*S*H》로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전쟁 영화이면서 기존의 이미지를 뒤엎는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개봉과 동시에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며 흥행에 성공했고,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작품은 이후 TV 시리즈로 제작되었고, 현재까지 미국 뉴 시네마의 걸작으로서 컬트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M*A*S*H》의 성공을 발판 삼아 197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감독했다. 1971년 개봉된 《도박사》에서는 서부극에 처음 도전했지만, "반(反)서부극"적인 연출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73년에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 《기나긴 이별》을 영화화한 《롱 굿바이》를 발표하여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높아지며 컬트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총 24명의 등장인물을 그린 군상극 《내슈빌》(1975)에서는 컨트리 음악을 통해 미국의 본질을 그려 다시 아카데미 작품상아카데미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1976년 서부극 《빅 아메리칸》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등 연이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Lion's Gate Films사를 설립하여 자신의 작품 제작과 병행하여 재능 있는 사람들의 작품을 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주춤하기 시작하여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포페이》(1980)가 흥행 및 비평 면에서 모두 실패하면서 할리우드에서 외면받았고, 1980년대에는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연출을 하거나 미시간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대학교수 시절에는 학생들을 스태프로 기용하여 밀실 1인극 《명예로운 철수 ~닉슨의 밤~》을 제작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에 할리우드로 돌아와 1992년 할리우드의 이면을 그린 군상극 《플레이어》가 제4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감독상에도 노미네이트되며 부활했다. 1993년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군상극 《숏 컷츠》가 제50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여 앙리조르주 클루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 최고상을 모두 수상한 역사상 세 번째 감독이 되었고, 2년 연속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가 되었다.

1994년 파리 패션위크를 배경으로 한 《프레타포르테》에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소피아 로렌, 로런 버콜 등이 출연했고, 장 폴 고티에, 카를라 브루니 등이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1996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75]

21세기에 들어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고, 영국의 컨트리 하우스를 배경으로 제작한 《고스포드 파크》(2001)가 제59회 골든 글로브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고 다시 아카데미 작품상아카데미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200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2006년, 오랜 창작 활동에 대한 공로로 제78회 아카데미상에서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여받았다.[76] 아카데미 감독상에 5회, 제작자로서 아카데미 작품상에 2회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고, 긴 경력 중 처음으로 수상하게 되었다. 또한 수상 소감에서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2006년 11월 20일,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서 암으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7] 같은 해 2월 유작이 된 《프레리 홈 컴패니언》을 제5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발표했으며, 차기작 구상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2007년 감독 작품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알트먼에게 헌정했다.[78] 2008년 제23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로버트 알트먼상이라는 이름의 앙상블 상이 신설되었다.

2014년에는 론 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로버트 알트먼: 할리우드에서 가장 미움받고 사랑받았던 남자》가 개봉되었다.

2. 1. 초기 생애 (1925-1946)

로버트 올트먼은 1925년 2월 20일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났다.[1][2] 아버지는 부유한 보험 판매원이자 아마추어 도박꾼이었고, 어머니는 메이플라워호 탑승자의 후손이었다.[1][2] 그의 조상은 독일계, 영국계, 아일랜드계였으며, 할아버지가 가족의 성을 "Altmann"에서 "Altman"으로 바꾸었다.[2]

올트먼은 가톨릭 신앙으로 자랐지만,[3] 성인이 된 후에는 종교를 따르지 않았다.[4] 그는 캔자스시티의 로크허스트 고등학교를 포함한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았고,[6] 1943년 미주리주 렉싱턴의 웬트워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18세의 나이로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7][8]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올트먼은 보르네오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B-24 리베레이터 부조종사로 50회 이상의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7][8] 1946년 미국 육군 하사로 예편하였다.

2. 2. 군 복무 및 영화계 입문 (1943-1957)

1943년, 로버트 올트먼은 18세의 나이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77] 1944년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2차 대전에 참전했고, 1946년에 미국 육군 하사로 예편했다. 이듬해 1947년 단역 영화배우로 데뷔했으나, 이후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전향하여 활동했다.

1946년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올트먼은 1948년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의 영화 《보디가드(Bodyguard)》의 원안을 RKO에 팔았다. 이후 광고 제작 일을 하며 촬영 및 편집 기법을 익혔고, 1951년부터 단편 및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1957년에는 첫 장편 극영화 《불량소년(The Delinquents)》을 제작했는데, 본인은 "끔찍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지만 알프레드 히치콕은 감탄하여 히치콕 극장 연출을 의뢰했다. 1958년 조셉 코튼 주연의 《크리스마스 이브(Together)》 등 1편을 제작했다. 또한 1957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제임스 딘 이야기(James Dean Story)》 역시 히치콕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소니호 공중모험(Whirlybirds)》 연출을 거쳐 세 번째 아내인 캐서린 리드(Catherine Reed)를 만났다.

《피터 건(Peter Gunn)》, 《보난자(Bonanza)》, 《로어링 20(The Roaring 20’s)》, 《하와이안 아이(Hawaiian Eye)》, 《루트 66》, 《버스 정류장(Bus Stop)》 등 많은 TV 드라마를 제작하며 인기 감독이 되었다. 1962년에는 TV 시리즈 《컴뱃!》의 제작과 초기 10개 에피소드의 연출을 맡았다. 자신의 전쟁 경험을 그린 이 작품은 혹독한 전장의 인간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제작자와 갈등을 빚었지만, 5년간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계로 돌아온 올트먼은 1968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우주 대정복(Countdown)》을 촬영했으나, 잭 워너가 러시를 본 후 배우들에게 동시에 대사를 시켰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2. 3. 초기 영화 경력과 텔레비전 진출 (1949-1969)

올트먼은 듀몽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드라마 시리즈 《펄스 오브 더 시티(1953~1954)와 1956년 서부극 시리즈 《코치스의 보안관》의 한 에피소드를 통해 텔레비전 연출에 데뷔했다. 1956년, 캔자스시티의 한 지역 사업가로부터 청소년 범죄를 다룬 장편 영화의 각본 및 연출을 의뢰받았다. 60000USD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델링퀀츠(1957)》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150000USD에 팔렸다. 원시적이긴 했지만, 이 십대 착취 영화는 자연스러운 일상 대화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올트먼의 후기 작품의 기초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올트먼은 캔자스시티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는 배우 제임스 딘의 사망을 이용하여 급히 개봉된 다큐멘터리 《제임스 딘 스토리(1957)》를 공동 연출했다. 이 영화는 그의 열렬한 팬들을 대상으로 마케팅되었다. 두 작품 모두 알프레드 히치콕의 주목을 받았고, 그는 올트먼을 CBS의 앤솔러지 시리즈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츠》의 연출자로 고용했다. 두 에피소드만 연출한 후, 올트먼은 제작자와의 의견 차이로 사임했지만, 이 경험을 통해 성공적인 텔레비전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 후 10년 동안 올트먼은 텔레비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거의 전적으로 시리즈 드라마에서) 《훨리버드》, 《밀리어네어》, 《미합중국 연방 보안관》, 《트러블슈터스》, 《격동의 20년대》, 《보난자》, 《버스 스톱》, 《크래프트 미스터리 씨어터》, 《전투!》 등 여러 에피소드를 연출했으며, 《하와이안 아이》, 《매버릭》(올트먼이 집필하고 로저 무어가 주연한 4시즌 에피소드 "Bolt From the Blue"도 포함), 《로우맨》, 《서프사이드 6》, 《피터 건》, 《66번 국도》 등 다른 주목할 만한 시리즈의 단일 에피소드도 연출했다.

1960년대가 되자 올트먼은 제한된 예산으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업하는 능력 덕분에 텔레비전 연출가로 자리매김했다. 네트워크의 지시에 따르기를 거부하여 텔레비전 프로젝트에서 자주 해고되었지만, 항상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64년, 제작자들은 그의 《크래프트 서스펜스 씨어터》 에피소드 중 하나인 "Once Upon a Savage Night"을 확장하여 《시카고의 악몽》이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영화로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1963년 에피소드 "The Hunt"에는 제임스 칸브루스 던이 출연했다.

2년 후, 올트먼은 저예산 우주 여행 영화 《카운트다운(1967)》의 연출을 맡았지만, 영화를 적당한 길이로 편집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프로젝트 종료 며칠 만에 해고되었다. 그는 다시 제임스 칸과 함께 작업했는데, 칸은 로버트 듀발과 함께 주연을 맡았다. 그는 《그 공원의 차가운 날(1969)》까지 다른 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는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실패했다. 이 기간 동안 올트먼은 자신의 작품 속에 정치적 함의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감정을 표출했다. 이 때문에 올트먼은 반전 운동과 연관되면서 그의 경력은 다소 타격을 입게 된다.[12]

3. 작품 세계

로버트 올트먼은 “할리우드의 이단아”로 불렸으며, 그의 독특한 연출 기법은 “알트마네스크”라고 불린다.

그는 여러 배우들이 동시에 대사를 하도록 하거나, 촬영 후 애드리브나 음향 효과를 넣어 자유로운 대사와 배경음을 추가하는 혁신적인 음향 기법을 선보였다. 또한, 배우들에게 즉흥 연기를 장려하고, 앙상블 영화 스타일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앙상블 영화로는 내슈빌, 플레이어, 숏 컷, 고스포드 파크 등이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러한 올트먼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3. 1. 1970년대: 전성기

올트먼의 영화 제작 스타일은 여러 장르를 다루었는데, "올트먼풍"(Altmanesque)[25]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통 풍자와 유머를 사용하여 그의 개인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전복적" 또는 "반 할리우드"적인 요소가 있었다. 배우들은 그의 연출 아래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 대규모 앙상블 캐스트를 선호했고, 여러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는 다층 녹음 기법을 개발했다. 이는 시청자에게 보다 자연스럽고 역동적이며 복잡한 경험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화면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매우 이동성이 높은 카메라 작업과 줌 렌즈를 사용했다. 평론가 폴린 케일은 그의 연출 스타일을 평하면서 올트먼은 "거의 아무것도 없이 영화의 불꽃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26]

올트먼은 사운드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배우에게 대화 장면에서 동시에 대사를 하게 하거나, 동시녹음이 아닌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애드리브나 음향 효과를 넣어 자유로운 대사와 배경음을 추가하는 참신한 기법을 사용했다.

3. 2. 1980년대: 침체기

텔레비전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 올트먼은 중년에 영화계에 새롭게 진출했다. 그는 텔레비전 매체가 부과하는 창작의 한계를 이해했고, 미국 사회와 할리우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비전을 표현하는 영화를 감독하고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는 나중에 전통적인 영화의 "오토르적 공격"과 "특이한 변형"으로 묘사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미묘한 코미디나 풍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관찰을 표현했다.[26]

그의 영화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이념적, 개인적인 주제와 관련이 있었고, 올트먼은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39] 그는 종종 "반(反)할리우드"로 묘사되며, 업계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압력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로 인해 그의 많은 영화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는 영화 제작자로서의 독립성이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올트먼은 영화 산업의 상업적인 형식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진정한 영화계의 독립적인 인물(마베릭)"이라고 불렸다.[27] 그는 영화계의 골칫거리였고,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미국 문화 전반에 걸쳐 날카롭고 신랄한 시선을 던졌으며, 종종 장르와 캐릭터의 원형을 파괴했다. 올트먼은 불완전한 사람들, 영화가 관객에게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모습 그대로의 사람들에게 매료되었다.[27]

독립적인 연출 스타일로 인해 그는 각본가들과 영화 사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쁜 평판을 얻었다. 그는 "나는 수년에 걸쳐 각본가들에게 나쁜 평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는 당신이 쓴 대로 하지 않아, 뭐 이런 식이죠.'... 링 라드너 주니어는 내 각본을 따르지 않았다고 매우 화를 냈습니다."라고 인정했다.[45] 올트먼은 스튜디오 사장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고, 한 번은 자신이 작업 중인 영화에서 6분을 삭제하라고 고집한 임원의 코를 주먹으로 때려 수영장에 빠뜨리기도 했다.[35]

올트먼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언급하며, 샐리 켈러먼은 그의 영화에서 연기할 기회를 포기한 것을 후회하며 회상했다.

올트먼은 ''O.C. & Stiggs''의 실패도 자신이 촬영한 것처럼 "십대 영화의 풍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십대 영화"로 마케팅된 탓으로 돌린다.[45]

3. 3. 1990년대: 재기와 부활

로버트 올트먼은 1992년 영화 《플레이어》를 통해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매우 온화한 풍자"를 선보이며 재기에 성공했다.[34] 빈센트 캔비는 이 영화에 대해 "풍자로서 ''플레이어''는 간지럽히지만, 피를 뽑지는 않는다"고 평했다.[34]

3. 4. 2000년대: 노장의 활약

로버트 올트먼은 여러 인물 간의 상호 관계를 표현하는 이야기를 선호했으며, 복잡한 줄거리보다는 인물의 동기 부여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만 간략하게 개요를 잡고, 시나리오를 행동에 대한 "청사진"으로 여겼다. 배우들에게 대사를 즉흥적으로 연기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올트먼은 "배우 중심의 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유명 배우들이 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39]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은 영화 《내슈빌》의 첫 리허설에서 올트먼이 "대본을 가져왔습니까?"라고 묻자, "그럼 버리세요.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으며,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회상한다.[30]

올트먼은 리허설 중이나 때로는 실제 촬영 중에도 배우들이 즉흥 연기를 통해 인물을 개발하도록 허용했다.[35] 그는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매우 설정된 것입니다. 즉흥 연기는 오해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을 풀어놓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37]

캐롤 버넷(Carol Burnett)은 올트먼이 자신의 영화에 담긴 많은 아이디어가 배우들로부터 나왔다고 인정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독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30]

그는 셸리 듀발(Shelley Duvall)과 버트 렘센(Bert Remsen) (각 7편), 폴 둘리(Paul Dooley) (6편), 마이클 머피(Michael Murphy) (5편), 제프 골드블럼(Jeff Goldblum), 릴리 톰린(Lily Tomlin), 라일 로벳(Lyle Lovett), 헨리 기브슨(Henry Gibson), 데이비드 아킨(David Arkin), 존 슈크(John Schuck) (각 4편), 팀 로빈스(Tim Robbins), 캐롤 버넷(Carol Burnett), 벨리타 모레노(Belita Moreno), 리처드 E. 그랜트(Richard E. Grant),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크레이그 리처드 넬슨(Craig Richard Nelson), 샐리 켈러먼(Sally Kellerman), 키스 캐러딘(Keith Carradine) (각 3편) 등과 함께 작업했다.

엘리엇 굴드(Elliott Gould)는 올트먼과 처음으로 함께 연기한 작품인 《M*A*S*H》 촬영 당시, 자신과 공동 주연인 도널드 서덜랜드(Donald Sutherland)는 올트먼이 자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는지 의심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수년 후에 "돌이켜보면, 도널드와 저는 올트먼의 천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두 명의 엘리트적이고 오만한 배우들이었습니다."라고 썼다.[30]

올트먼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을 피하고, "실제 삶의 바쁜 혼란"을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26] 그는 자신의 영화 제작 스타일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저는 이 작품을 연극이나 문학보다 그림과 더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저를 흥미롭게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행동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연출하지 않고, 관찰합니다. 관객이 감동을 받기를 기대한다면 저도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배우에게서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제가 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없습니다. 저는 배우들에게 차례로 하지 말라고 격려하려고 노력합니다. 대화를 대화로 처리하도록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이 바로 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배우가 자신의 능력 이상을 할 수 있도록 편안한 영역을 만드는 것입니다.[30]

그는 사운드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배우에게 대화 장면에서 동시에 대사를 하게 하거나, 동시녹음이 아닌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애드리브나 음향 효과를 넣어 자유로운 대사와 배경음을 추가하는 참신한 기법을 사용했다.

4. 연출 스타일 및 기법

로버트 올트먼은 촬영 시 "사운드의 가능성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 몇 안 되는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었다.[27] 그는 배우들에게 숨겨진 마이크를 부착하여 여러 사운드트랙으로 서로 겹쳐 말하는 것을 녹음함으로써, 대규모 출연진에서도 자연스러운 대화 소리를 재현하고자 했다.[27] 촬영 중에는 헤드셋을 착용하여 중요한 대사가 강조되지 않고도 들리도록 했다. 이는 관객에게 마치 여러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것처럼 여러 대화 조각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밀도 높은 오디오 경험"을 제공했다. 올트먼은 대규모 출연진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에 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37]

올트먼은 1970년 영화 M*A*S*H에서 처음으로 겹치는 사운드트랙을 사용했는데, 이는 영화 작가 마이클 바슨이 "당시 놀라운 혁신"이라고 묘사한 사운드 기법이다.[38] 그는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영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이 기법을 개발했다고 말했다.[26] 이 기법은 1971년 영화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9]

영화 역사가이자 학자인 로버트 P. 콜커는 올트먼 영화의 청각적, 시각적 동시성이 여러 사건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는 관객들이 적극적인 관객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40] 대규모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는 것은 그의 영화에 복잡성을 더했고, 처음 볼 때는 엉성하거나 연결이 끊긴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의 영화 비평가 데이비드 톰슨은 《내슈빌》(1975)을 처음 본 후 나쁜 평을 했지만, 나중에 다시 보면서 '내슈빌'의 조직성과 목적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모자이크 또는 혼합은 자유와 인간의 특이성을 허용하는데, 이는 장 르누아르가 감탄했을 것"이라고 썼다.

톰슨은 《M*A*S*H》(1970)부터 겹치는 흐릿한 사운드와 이미지, 줌으로 인해 구성의 감각이 없는 미끄러운 스타일을 올트먼 스타일의 일부로 인식했다. 올트먼은 자신의 영화에서 이러한 대사의 겹침은 특히 대규모 그룹의 경우 현실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37] 폴린 케일은 올트먼에 대해 "대규모 앙상블, 느슨한 액션, 그리고 겹치는 목소리의 거장인 그는... 거의 아무것도 없이 영화의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라고 썼다.[26]

올트먼은 와이드스크린 구성을 사용하여 동시에 화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람이나 활동을 포착하려 했다. 그는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과 같은 일부 영화에서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몬드와 함께 유려한 카메라 워크, 줌 렌즈, 특수 안개 필터를 사용한 연기 효과 등을 통해 강력한 시각적 분위기를 연출했다.[43]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올트먼에게 "촬영이 훌륭했다"고 말하며 촬영 기법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44]

''내슈빌''에서 올트먼은 빨강, 흰색, 파랑의 눈에 띄는 색상의 세트를 사용했다. ''긴 이별''에서는 지그몬드에게 움직이는 물체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카메라를 계속 움직이도록 했다.[39] 지그몬드는 올트먼이 이 영화에서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어했다"고 회상했다.[44]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은 줌 렌즈 사용에 대해 언급하며, 올트먼이 지브 암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장면을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촬영하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말했다.[43] 지그몬드는 올트먼과의 작업에 대해 "우리는 '즉흥적으로' 일하는 것을 꽤 즐겼다. 올트먼은 훌륭한 즉흥 연주자이다"라며 즐거웠다고 회상했다.[44]

로버트 올트먼은 영화 음악 사용에 있어 매우 선택적이었으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자주 선택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올트먼의 음악 사용은 항상 중요하다"라고 언급했다.[35] 올트먼은 레너드 코헨의 음악의 열렬한 팬이었고,[45] 그의 노래 세 곡을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 ''웨딩''의 마지막 장면에 한 곡을 사용했다.[46] ''내슈빌''에서는 현실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출연진에게 새로운 컨트리 음악을 작곡하도록 했다. ''긴 이별''에는 "귀에 맴도는 반복되는 선율"을 통합했고, ''뽀빠이''의 음악에는 해리 닐슨과 밴 다이크 파크스를 참여시켰다.[14]

리처드 R. 네스를 포함한 여러 음악 전문가들이 올트먼의 음악 사용에 대해 논문을 썼다.[47] 영화 연구 교수인 크린 개버드는 ''숏 컷''에서 올트먼의 재즈 음악 사용에 대한 분석을 썼다.[35] ''캔자스 시티''에서 음악은 이야기의 기초로 여겨진다. 올트먼은 "이야기에 대해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이 목표였고, 영화 자체가 "일종의 재즈"가 되도록 하려 했다고 말한다.[49]

4. 1. '알트먼 풍' 스타일

"올트먼 풍"(Altmanesque)[25]이라고 불리는 로버트 올트먼의 독특한 영화 제작 스타일은 여러 장르를 다루었지만, 보통 풍자와 유머를 사용하여 그의 개인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전복적" 또는 "반 할리우드"적인 요소가 있었다. 배우들은 특히 그의 연출 아래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 대규모 앙상블 캐스트를 선호했고, 여러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는 다층 녹음 기법을 개발했다. 이는 시청자에게 보다 자연스럽고 역동적이며 복잡한 경험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화면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매우 이동성이 높은 카메라 작업과 줌 렌즈를 사용했다. 평론가 폴린 케일(Pauline Kael)은 그의 연출 스타일을 평하면서 올트먼은 "거의 아무것도 없이 영화의 불꽃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26]

텔레비전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 올트먼은 중년에 영화계에 새롭게 진출했다. 그는 텔레비전 매체가 부과하는 창작의 한계를 이해했고, 이제 미국 사회와 할리우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비전을 표현하는 영화를 감독하고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는 나중에 전통적인 영화의 "오토르적 공격"과 "특이한 변형"으로 묘사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미묘한 코미디나 풍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관찰을 표현했다.[26]

그의 영화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이념적, 개인적인 주제와 관련이 있었고, 올트먼은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39] 그는 종종 "반(反)할리우드"로 묘사되며, 업계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압력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로 인해 그의 많은 영화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는 영화 제작자로서의 독립성이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저술가 이언 프리어(Ian Freer)는 "올트먼은 진정한 영화계의 독립적인 인물(마베릭)"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화 산업의 상업적인 형식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계의 골칫거리였고,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미국 문화 전반에 걸쳐 날카롭고 신랄한 시선을 던졌으며, 종종 장르와 캐릭터의 원형을 폭파했습니다. 올트먼은 불완전한 사람들, 영화가 당신에게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모습 그대로의 사람들에게 매료되었습니다."[27] 올트먼을 위한 특별한 헌정 행사에서 감독 앨런 루돌프(Alan Rudolph)는 그의 영화 제작 스타일을 "올트먼식(Altmanesque)"이라고 언급했다.[28]

독립적인 연출 스타일로 그는 각본가들과 영화 사업 측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평판을 얻었다. 그는 "나는 수년에 걸쳐 각본가들에게 나쁜 평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는 당신이 쓴 대로 하지 않아, 뭐 이런 식이죠.'... 링 라드너 주니어(Ring Lardner, Jr.)는 내 각본을 따르지 않았다고 매우 화를 냈습니다."[45]라고 인정했다. 올트먼은 스튜디오 사장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고, 한 번은 자신이 작업 중인 영화에서 6분을 삭제하라고 고집한 임원의 코를 주먹으로 때려 수영장에 빠뜨리기도 했다.[35]

배우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은 더 좋았다. 그들과 함께 그의 독립성은 때때로 배우 선택으로 확장되어 종종 합의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셰어(Cher)는 무대극과 영화 ''컴 백 투 더 파이브 앤 다임, 지미 딘, 지미 딘''(1982)을 통해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게 해준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밥 없이는 절대 영화 경력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를 캐스팅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두 다요. ... 아무도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밥만이 그렇게 할 만큼 용감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셰어는 말했다. 줄리앤 무어(Julianne Moore)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감독 로버트 도른헬름(Robert Dornhelm)은 올트먼이 "영화를 순수한 예술적 장소로 보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쇼트 컷츠''(1993)에서는 배급사가 상업적으로 실행 가능하게 하기 위해 길이에서 몇 분을 잘라내도록 "간청"했다. "밥은 그저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예술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기를 바라는 선의의 사람들이었고, 그것은 큰 상업적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술과 돈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때 그는 예술을 선택했습니다."[30]

샐리 켈러먼(Sally Kellerman)은 올트먼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언급하며 그의 영화에서 연기할 기회를 포기한 것을 후회하며 회상했다.

서부극, 뮤지컬, 전쟁 영화 또는 코미디와 같이 다양한 영화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만드는 감독들과 달리, 올트먼의 작품은 여러 비평가들에 의해 "장르를 거스르는" 것으로 규정되어 왔다.[39] 이는 그의 많은 영화들이 풍자적이고 코미디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의 딸인 제럴딘 채플린은 그의 영화 속 유머를 아버지의 영화와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트먼은 대부분의 텔레비전 및 주류 영화 제작 방식과는 달리, 자신의 영화에서 "스토리텔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올트먼의 전기 작가인 미첼 저커프에 따르면, "그는 '스토리'라는 단어를 싫어했고, 플롯은 순수한(혹은 더 나은, 불순한) 인간 행동 탐구에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30] 저커프는 올트먼의 많은 영화에 깔려 있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상반되는 관점, 놀라운 반전, 설명되지 않은 행동, 모호한 결말 등 실제 삶의 혼란스러운 본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특히 많은 목소리, 때로는 논쟁하고, 때로는 동의하며, 이상적으로는 겹치는, 마치 그가 경험한 것처럼 포착된 칵테일 파티나 거리 장면을 사랑했습니다."[30] 줄리안 무어는 그의 영화 몇 편을 본 후, 무대 배우가 아닌 영화 배우가 되기로 결정한 데 대해 올트먼의 연출 스타일에 감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 작가 찰스 데리는 올트먼의 영화는 "통찰력 있는 관찰, 의미심장한 대화, 인간의 어리석음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순간들을 특징으로 한다"고 썼다.[39] 데리가 지적했듯이, 올트먼은 사회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특히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많은 영화 등장인물들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살아가는 삶과 관련된 그런 어설픈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었다.[39] 그 결과, 그의 영화는 종종 미국 사회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된다.

올트먼의 많은 영화에서 풍자적 내용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M*A*S*H''(1970)는 한국 전쟁 중 배경으로 한 풍자적인 블랙 코미디이며,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은 서부극을 풍자한 작품이다.[31] 작가 매슈 케네디는 ''내슈빌''(1975)이 "미국 200주년 기념일 직전 미국을 비판하는 훌륭한 풍자"라고 말한다.[32] ''결혼식''(1978)은 미국의 결혼 의식과 위선을 풍자한 작품이다.[33] 올트먼 자신은 ''플레이어''(1992)가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매우 온화한 풍자"라고 말했고, 빈센트 캔비도 "풍자로서 ''플레이어''는 간지럽히지만, 피를 뽑지는 않는다"고 동의했다.[34] 그의 영화의 풍자는 배급사가 그 풍자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흥행에 실패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올트먼은 탐정 이야기인 ''긴 이별''(1973)의 흥행 실패를 스릴러로 잘못 마케팅한 탓으로 돌린다.

마찬가지로, 올트먼은 ''O.C. & Stiggs''의 실패도 자신이 촬영한 것처럼 "십대 영화의 풍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십대 영화"로 마케팅된 탓으로 돌린다.[45]

올트먼은 여러 인물 간의 상호 관계를 표현하는 이야기를 선호했으며, 복잡한 줄거리보다 인물의 동기 부여에 더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그는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만 간략하게 개요를 잡고, 시나리오를 행동에 대한 "청사진"으로 여겼다. 배우들에게 대사를 즉흥적으로 연기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올트먼은 "배우 중심의 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명성은 많은 유명 배우들을 그의 대규모 출연진에 참여시키는 데 매력으로 작용했다. 데리(Derry)는 배우들이 올트먼과 함께 일하는 것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로 "그는 배우들에게 인물을 개발하고 즉흥 연기와 협업을 통해 대본을 자주 변경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고 언급한다. 리처드 배스킨(Richard Baskin)은 "밥(Bob)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식이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는 당신이 하는 일을 신뢰했고, 그래서 당신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39]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내슈빌(Nashville)》의 첫 리허설 중 하나를 이렇게 회상한다.

올트먼은 리허설 중이나 때로는 실제 촬영 중에도 배우들이 즉흥 연기를 통해 인물을 개발하도록 규칙적으로 허용했다.[35] 영화 제작의 높은 비용으로 인해 신중한 계획, 정확한 대본, 그리고 값비싼 필름 노출 전 리허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즉흥 연기는 영화에서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트먼은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즉흥 연기를 선호했다.[36] 올트먼은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매우 설정된 것입니다. 즉흥 연기는 오해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을 풀어놓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37] 그는 배우의 모든 행동을 지시하는 것을 피하고 그들이 통제권을 갖도록 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캐롤 버넷(Carol Burnett)은 올트먼이 자신의 영화에 담긴 많은 아이디어가 배우들로부터 나왔다고 인정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감독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30] 제니퍼 제이슨 리(Jennifer Jason Leigh)와 같은 다른 배우들은 창의적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그는 셸리 듀발(Shelley Duvall)과 버트 렘센(Bert Remsen) (각 7편)을 포함한 많은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폴 둘리(Paul Dooley) (6편); 마이클 머피(Michael Murphy) (5편); 제프 골드블럼(Jeff Goldblum), 릴리 톰린(Lily Tomlin), 라일 로벳(Lyle Lovett), 헨리 기브슨(Henry Gibson), 데이비드 아킨(David Arkin), 존 슈크(John Schuck) (각 4편); 팀 로빈스(Tim Robbins), 캐롤 버넷(Carol Burnett), 벨리타 모레노(Belita Moreno), 리처드 E. 그랜트(Richard E. Grant),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크레이그 리처드 넬슨(Craig Richard Nelson), 샐리 켈러먼(Sally Kellerman), 키스 캐러딘(Keith Carradine) (각 3편). 크린 개버드(Krin Gabbard)는 올트먼이 엘리엇 굴드(Elliott Gould)와 같이 "즉흥 연기자로서 성공하는" 배우들을 기용하는 것을 즐겼다고 덧붙입니다. 엘리엇 굴드는 그의 영화 《M*A*S*H》, 《긴 작별(The Long Goodbye)》, 《캘리포니아 스플릿(California Split)》 세 편에 출연했습니다.[35] 굴드는 올트먼과 처음으로 함께 연기한 작품인 《M*A*S*H》 촬영 당시, 자신과 공동 주연인 도널드 서덜랜드(Donald Sutherland)는 올트먼이 자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는지 의심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수년 후에 "돌이켜보면, 도널드와 저는 올트먼의 천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두 명의 엘리트적이고 오만한 배우들이었습니다."라고 썼습니다.[30] 출연진 중 다른 배우들은 올트먼의 연출 스타일에 즉시 감탄했다. 르네 오베르조노아(René Auberjonoi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텔레비전과 전통적인 영화와 달리, 올트먼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을 피하고, 알버트 린다우어(Albert Lindauer)의 관찰에 따르면 "실제 삶의 바쁜 혼란"을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26] 이 효과를 내기 위한 다양한 기법 중에서 그의 영화는 종종 "엄청난 출연진이나 미친 캐릭터, 여러 개의 줄거리 또는 줄거리가 없는 줄거리, … 그리고 즉흥 연기에 대한 의존"을 포함하는 "풍부한 사운드와 이미지"를 포함한다.[26] 사망 몇 달 전, 올트먼은 자신의 영화 제작 스타일의 동기를 요약하려고 시도했다.

알트먼은 촬영할 때 "사운드의 가능성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 몇 안 되는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었다.[27] 그는 배우들에게 숨겨진 마이크를 연결하여 여러 사운드트랙으로 서로 겹쳐 말하는 것을 녹음함으로써, 대규모 출연진일지라도 자연스러운 대화 소리를 재현하려고 노력했다.[27] 촬영 중 그는 헤드셋을 착용하여 중요한 대사가 강조되지 않고도 들릴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시청자에게 마치 여러 사적인 대화를 엿듣는 것처럼 여러 대화 조각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밀도 높은 오디오 경험"을 제공했다. 알트먼은 대규모 출연진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에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37]

알트먼은 처음으로 겹치는 사운드트랙을 1970년 영화 M*A*S*H에서 사용했는데, 이는 영화 작가 마이클 바슨이 "당시 놀라운 혁신"이라고 묘사한 사운드 기법이다.[38] 알트먼은 시청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영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이 기법을 개발했다고 말했다.[26] 일부 비평가들에 따르면, 이 기법이 가장 극단적으로 사용된 작품 중 하나는 그의 걸작으로도 여겨지는 1971년 영화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이다.[39]

영화 역사가이자 학자인 로버트 P. 콜커는 알트먼 영화의 청각적, 시각적 동시성이 여러 사건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는 시청자들이 적극적인 관객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40]

대규모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는 것은 올트먼의 영화에 복잡성을 더했고, 처음 볼 때는 엉성하거나 연결이 끊긴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비평가들 중 일부는 다시 본 후 생각을 바꾸었다. 영국의 영화 비평가 데이비드 톰슨(David Thomson)은 《내슈빌》(Nashville, 1975)을 처음 본 후 나쁜 평을 했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내슈빌'과 몇몇 초기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저는 '내슈빌'이 얼마나 조직적이거나 목적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모자이크 또는 혼합은 자유와 인간의 특이성을 허용하는데, 이는 장 르누아르(Jean Renoir)가 감탄했을 것입니다." 영화 제작 중 배우들은 영감을 받았고, 공동 출연자인 루니 블레이클리(Ronee Blakley)는 영화의 궁극적인 성공을 확신했다.

톰슨은 나중에 그러한 측면들을 《M*A*S*H》(1970)부터 시작하여 올트먼의 스타일의 일부로 인식했다. "'M*A*S*H'는 겹치는 흐릿한 사운드와 이미지, 그리고 줌으로 인해 구성의 감각이 없는 미끄러운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슈빌'을 그렇게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올트먼은 자신의 영화에서 이러한 대사의 겹침은 특히 대규모 그룹의 경우 현실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만약 여러분이 저녁 식탁에 열네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중 두 명만이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일 것입니다." 폴린 케일(Pauline Kael)은 올트먼에 대해 "대규모 앙상블, 느슨한 액션, 그리고 겹치는 목소리의 거장인 그는... 거의 아무것도 없이 영화의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라고 썼다.

“할리우드의 이단아”라고 불리며, 앨런 루돌프는 기존의 수법과 상식을 뒤엎는 표현 기법을 “알트마네스크”라고 부르고 있다.

사운드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며, 여러 배우에게 대화 장면에서 동시에 대사를 하게 하거나, 동시녹음이 아닌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애드리브나 음향 효과를 넣어 자유로운 대사와 배경음을 추가하는 참신한 기법을 사용했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에게는 즉흥 연기 스타일을 취하게 했고, 대본 등을 청사진이라고 부르며 촬영 현장에서는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앙상블 영화 스타일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폴 토마스 앤더슨이 이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

4. 2. 주제 의식

로버트 올트먼은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제작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여러 장르에 걸쳐 나타났다. "올트먼풍"(Altmanesque)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스타일은 풍자와 유머를 사용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전복적" 또는 "반 할리우드"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다.[25]

배우들은 그의 연출 아래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는 그가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 대규모 앙상블 캐스트를 선호했고, 여러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는 다층 녹음 기법을 개발하여 관객에게 보다 자연스럽고 역동적이며 복잡한 경험을 제공했다. 또한, 화면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매우 이동성이 높은 카메라 작업과 줌 렌즈를 사용했다. 평론가 폴린 케일(Pauline Kael)은 그의 연출 스타일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없이 영화의 불꽃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평했다.[26]

올트먼은 텔레비전에서의 성공적인 경력을 뒤로하고 중년에 영화계에 진출했다. 그는 텔레비전 매체가 부과하는 창작의 한계를 인지하고, 미국 사회와 할리우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비전을 표현하는 영화를 감독하고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에 대한 "오토르적 공격"과 "특이한 변형"으로 묘사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미묘한 코미디나 풍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관찰을 표현했다.[26]

그의 영화는 주로 정치적, 이념적, 개인적인 주제와 관련이 있었고, 올트먼은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39] 그는 종종 "반(反)할리우드"로 묘사되며, 업계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압력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 그의 많은 영화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는 영화 제작자로서의 독립성이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저술가 이언 프리어(Ian Freer)는 "올트먼은 진정한 영화계의 독립적인 인물(마베릭)"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화 산업의 상업적인 형식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계의 골칫거리였고,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미국 문화 전반에 걸쳐 날카롭고 신랄한 시선을 던졌으며, 종종 장르와 캐릭터의 원형을 폭파했습니다. 올트먼은 불완전한 사람들, 영화가 당신에게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모습 그대로의 사람들에게 매료되었습니다."[27] 올트먼을 위한 특별한 헌정 행사에서 감독 앨런 루돌프(Alan Rudolph)는 그의 영화 제작 스타일을 "올트먼식(Altmanesque)"이라고 언급했다.[28]

독립적인 연출 스타일로 인해 그는 각본가들과 영화 사업 측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평판을 얻었다. 그는 "나는 수년에 걸쳐 각본가들에게 나쁜 평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는 당신이 쓴 대로 하지 않아, 뭐 이런 식이죠.'... 링 라드너 주니어(Ring Lardner, Jr.)는 내 각본을 따르지 않았다고 매우 화를 냈습니다."라고 인정했다.[45] 올트먼은 스튜디오 사장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고, 한 번은 자신이 작업 중인 영화에서 6분을 삭제하라고 고집한 임원의 코를 주먹으로 때려 수영장에 빠뜨리기도 했다.[35]

배우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은 더 좋았다. 그들과 함께 그의 독립성은 때때로 배우 선택으로 확장되어 종종 합의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셰어(Cher)는 무대극과 영화 ''컴 백 투 더 파이브 앤 다임, 지미 딘, 지미 딘''(1982)를 통해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게 해준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줄리앤 무어(Julianne Moore)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감독 로버트 도른헬름(Robert Dornhelm)은 올트먼이 "영화를 순수한 예술적 장소로 보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쇼트 컷츠''(1993)에서는 배급사가 상업적으로 실행 가능하게 하기 위해 길이에서 몇 분을 잘라내도록 "간청"했다. "밥은 그저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예술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기를 바라는 선의의 사람들이었고, 그것은 큰 상업적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술과 돈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때 그는 예술을 선택했습니다."[30]

올트먼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언급하며, 샐리 켈러먼(Sally Kellerman)은 그의 영화에서 연기할 기회를 포기한 것을 후회했다.

서부극, 뮤지컬, 전쟁 영화, 코미디와 같이 다양한 영화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만드는 감독들과 달리, 올트먼의 작품은 여러 비평가들에 의해 "장르를 거스르는" 것으로 규정되어 왔다.[39] 이는 그의 많은 영화들이 풍자적이고 코미디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의 딸인 제럴딘 채플린은 그의 영화 속 유머를 아버지의 영화와 비교했다.

올트먼은 대부분의 텔레비전 및 주류 영화 제작 방식과는 달리, 자신의 영화에서 "스토리텔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올트먼의 전기 작가인 미첼 저커프에 따르면, "그는 '스토리'라는 단어를 싫어했고, 플롯은 순수한(혹은 더 나은, 불순한) 인간 행동 탐구에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30] 저커프는 올트먼의 많은 영화에 깔려 있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상반되는 관점, 놀라운 반전, 설명되지 않은 행동, 모호한 결말 등 실제 삶의 혼란스러운 본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특히 많은 목소리, 때로는 논쟁하고, 때로는 동의하며, 이상적으로는 겹치는, 마치 그가 경험한 것처럼 포착된 칵테일 파티나 거리 장면을 사랑했습니다."[30] 줄리앤 무어는 그의 영화 몇 편을 본 후, 무대 배우가 아닌 영화 배우가 되기로 결정한 데 대해 올트먼의 연출 스타일에 감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 작가 찰스 데리는 올트먼의 영화는 "통찰력 있는 관찰, 의미심장한 대화, 인간의 어리석음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순간들을 특징으로 한다"고 썼다.[39] 데리가 지적했듯이, 올트먼은 사회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특히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많은 영화 등장인물들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살아가는 삶과 관련된 그런 어설픈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었다.[39] 그 결과, 그의 영화는 종종 미국 사회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된다.

올트먼의 많은 영화에서 풍자적 내용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M*A*S*H''(1970)는 한국 전쟁 중 배경으로 한 풍자적인 블랙 코미디이며,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은 서부극을 풍자한 작품이다.[31] 작가 매슈 케네디는 ''내슈빌''(1975)이 "미국 200주년 기념일 직전 미국을 비판하는 훌륭한 풍자"라고 말한다.[32] ''결혼식''(1978)은 미국의 결혼 의식과 위선을 풍자한 작품이다.[33] 올트먼 자신은 ''플레이어''(1992)가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매우 온화한 풍자"라고 말했고, 빈센트 캔비도 "풍자로서 ''플레이어''는 간지럽히지만, 피를 뽑지는 않는다"고 동의했다.[34] 그의 영화의 풍자는 배급사가 그 풍자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흥행에 실패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올트먼은 탐정 이야기인 ''긴 이별''(1973)의 흥행 실패를 스릴러로 잘못 마케팅한 탓으로 돌린다.

마찬가지로, 올트먼은 ''O.C. & Stiggs''의 실패도 자신이 촬영한 것처럼 "십대 영화의 풍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십대 영화"로 마케팅된 탓으로 돌린다.[45]

올트먼은 여러 인물 간의 상호 관계를 표현하는 이야기를 선호했으며, 복잡한 줄거리보다 인물의 동기 부여에 더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그는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만 간략하게 개요를 잡고, 시나리오를 행동에 대한 "청사진"으로 여겼다. 배우들에게 대사를 즉흥적으로 연기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올트먼은 "배우 중심의 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명성은 많은 유명 배우들을 그의 대규모 출연진에 참여시키는 데 매력으로 작용했다. 데리(Derry)는 배우들이 올트먼과 함께 일하는 것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로 "그는 배우들에게 인물을 개발하고 즉흥 연기와 협업을 통해 대본을 자주 변경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고 언급한다. 리처드 배스킨(Richard Baskin)은 "밥(Bob)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식이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는 당신이 하는 일을 신뢰했고, 그래서 당신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39]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내슈빌(Nashville)》의 첫 리허설 중 하나를 이렇게 회상한다.[30]

올트먼은 리허설 중이나 때로는 실제 촬영 중에도 배우들이 즉흥 연기를 통해 인물을 개발하도록 규칙적으로 허용했다.[35] 영화 제작의 높은 비용으로 인해 신중한 계획, 정확한 대본, 그리고 값비싼 필름 노출 전 리허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즉흥 연기는 영화에서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트먼은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즉흥 연기를 선호했다.[36] 올트먼은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매우 설정된 것입니다. 즉흥 연기는 오해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을 풀어놓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37] 그는 배우의 모든 행동을 지시하는 것을 피하고 그들이 통제권을 갖도록 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캐롤 버넷(Carol Burnett)은 올트먼이 자신의 영화에 담긴 많은 아이디어가 배우들로부터 나왔다고 인정했다는 것을 기억한다.[30] 제니퍼 제이슨 리(Jennifer Jason Leigh)와 같은 다른 배우들은 창의적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그는 셸리 듀발(Shelley Duvall)과 버트 렘센(Bert Remsen) (각 7편)을 포함한 많은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폴 둘리(Paul Dooley) (6편); 마이클 머피(Michael Murphy) (5편); 제프 골드블럼(Jeff Goldblum), 릴리 톰린(Lily Tomlin), 라일 로벳(Lyle Lovett), 헨리 기브슨(Henry Gibson), 데이비드 아킨(David Arkin), 존 슈크(John Schuck) (각 4편); 팀 로빈스(Tim Robbins), 캐롤 버넷(Carol Burnett), 벨리타 모레노(Belita Moreno), 리처드 E. 그랜트(Richard E. Grant),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크레이그 리처드 넬슨(Craig Richard Nelson), 샐리 켈러먼(Sally Kellerman), 키스 캐러딘(Keith Carradine) (각 3편). 크린 개버드(Krin Gabbard)는 올트먼이 엘리엇 굴드(Elliott Gould)와 같이 "즉흥 연기자로서 성공하는" 배우들을 기용하는 것을 즐겼다고 덧붙입니다. 엘리엇 굴드는 그의 영화 《M*A*S*H》, 《긴 작별(The Long Goodbye)》, 《캘리포니아 스플릿(California Split)》 세 편에 출연했습니다.[35] 굴드는 올트먼과 처음으로 함께 연기한 작품인 《M*A*S*H》 촬영 당시, 자신과 공동 주연인 도널드 서덜랜드(Donald Sutherland)는 올트먼이 자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는지 의심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수년 후에 "돌이켜보면, 도널드와 저는 올트먼의 천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두 명의 엘리트적이고 오만한 배우들이었습니다."라고 썼습니다.[30] 출연진 중 다른 배우들은 올트먼의 연출 스타일에 즉시 감탄했습니다. 르네 오베르조노아(René Auberjonoi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텔레비전과 전통적인 영화와 달리, 올트먼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을 피하고, 알버트 린다우어(Albert Lindauer)의 관찰에 따르면 "실제 삶의 바쁜 혼란"을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26] 이 효과를 내기 위한 다양한 기법 중에서 그의 영화는 종종 "엄청난 출연진이나 미친 캐릭터, 여러 개의 줄거리 또는 줄거리가 없는 줄거리, … 그리고 즉흥 연기에 대한 의존"을 포함하는 "풍부한 사운드와 이미지"를 포함한다.[26] 사망 몇 달 전, 올트먼은 자신의 영화 제작 스타일의 동기를 요약하려고 시도했다.

대규모 배우들의 대사가 겹치는 것은 올트먼의 영화에 복잡성을 더했고, 처음 볼 때는 엉성하거나 연결이 끊긴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비평가들 중 일부는 다시 본 후 생각을 바꾸었다. 영국의 영화 비평가 데이비드 톰슨(David Thomson)은 《내슈빌》(Nashville, 1975)을 처음 본 후 나쁜 평을 했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내슈빌'과 몇몇 초기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저는 '내슈빌'이 얼마나 조직적이거나 목적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모자이크 또는 혼합은 자유와 인간의 특이성을 허용하는데, 이는 장 르누아르(Jean Renoir)가 감탄했을 것입니다." 영화 제작 중 배우들은 영감을 받았고, 공동 출연자인 루니 블레이클리(Ronee Blakley)는 영화의 궁극적인 성공을 확신했다.

톰슨은 나중에 그러한 측면들을 《M*A*S*H》(1970)부터 시작하여 올트먼의 스타일의 일부로 인식했다. "'M*A*S*H'는 겹치는 흐릿한 사운드와 이미지, 그리고 줌으로 인해 구성의 감각이 없는 미끄러운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슈빌'을 그렇게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올트먼은 자신의 영화에서 이러한 대사의 겹침은 특히 대규모 그룹의 경우 현실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만약 여러분이 저녁 식탁에 열네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중 두 명만이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일 것입니다." 폴린 케일(Pauline Kael)은 올트먼에 대해 "대규모 앙상블, 느슨한 액션, 그리고 겹치는 목소리의 거장인 그는... 거의 아무것도 없이 영화의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라고 썼다.

올트먼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은 그의 촬영 기법 선호도에도 반영되었다. 그중 하나는 와이드스크린 구성을 사용하여 동시에 화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람이나 활동을 포착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과 같은 일부 영화에서 빌모스 지그몬드(Vilmos Zsigmond) 촬영감독과 함께 유려한 카메라 워크, 줌 렌즈, 특수 안개 필터를 사용한 연기 효과 등을 통해 강력한 시각적 분위기를 연출했다.[43]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은 올트먼에게 "촬영이 훌륭했다"고 말하며 "어떻게 찍었느냐?"고 물었다.[44]

''내슈빌''에서 올트먼은 빨강, 흰색, 파랑의 눈에 띄는 색상의 세트를 사용했다. ''긴 이별''에서는 지그몬드에게 움직이는 물체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카메라를 계속 움직이도록 고집했다.[39] 지그몬드는 올트먼이 이 영화에서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어했다"고 말하며, "카메라를 계속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위로, 아래로, 안으로, 밖으로, 좌우로"라고 말했다고 밝혔다.[44] 로저 디킨스(Roger Deakins) 촬영감독은 줌 렌즈 사용에 대해 "만약 로버트 올트먼이 알려진 것처럼 관찰적이고 이동적인 시각이라면 줌 렌즈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는 지브 암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장면을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촬영을 선택했다. 아주 좋은 작업 방식이었다."라고 언급했다.[43]

지그몬드는 또한 올트먼과의 작업이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빌모스 지그몬드(Vilmos Zsigmond)가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촬영한 영상은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ritish Academy Film Awards) 후보에 올랐다.

로버트 올트먼은 영화 음악 사용에 있어 매우 선택적이었으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자주 선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올트먼의 음악 사용은 항상 중요하다"라고 언급하며, "밥은 음악을 정말 사랑했죠. 정말이지, 그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35] 예를 들어 그는 레너드 코헨의 음악의 열렬한 팬이었고, 항상 "그냥 대마초를 피우고 그의 음악을 들었다"[45]고 말했는데, 그의 노래 세 곡을 1971년 작품인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 사용했고, 1978년 작품인 ''웨딩''의 마지막 장면에도 그의 노래 한 곡을 사용했다.[46]

1975년 작품인 ''내슈빌''의 경우, 올트먼은 현실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출연진에게 새로운 컨트리 음악을 작곡하도록 했다. 그는 1973년 작품인 ''긴 이별''에 "귀에 맴도는 반복되는 선율"을 통합했고, 1980년 작품인 ''뽀빠이''의 음악에는 해리 닐슨과 밴 다이크 파크스를 참여시켰다.[14]

리처드 R. 네스를 포함한 여러 음악 전문가들이 올트먼의 음악 사용에 대해 논문을 썼다. 네스는 올트먼의 여러 영화 음악에 대해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은 올트먼의 영화 제작 기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47] 마찬가지로 영화 연구 교수인 크린 개버드[48]는 1993년 작품인 ''숏 컷''에서 올트먼의 재즈 음악 사용에 대한 분석을 썼는데, 이 영화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고려한 비평가는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35]

재즈는 1996년 작품인 ''캔자스 시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이야기의 기초로 여겨진다. 올트먼은 "이야기에 대해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이 목표였고, 영화 자체가 "일종의 재즈"가 되도록 하려 했다고 말한다.[49] 영화의 주제를 음악의 형태로 만드는 올트먼의 기법은 "누구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실험"으로 여겨졌고, 올트먼은 그것이 위험한 일이었다고 인정했다. "될지 안 될지 몰랐습니다. …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정말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50]

5. 평가 및 영향

로버트 올트먼은 "할리우드의 이단아"로 불렸으며, 그의 독특한 표현 기법은 앨런 루돌프에 의해 "알트마네스크"라고 불린다. 그는 여러 배우들이 대화 장면에서 동시에 말하게 하거나, 동시녹음 대신 후반 작업에서 애드리브나 음향 효과를 넣어 자유로운 대사와 배경음을 추가하는 참신한 기법을 사용했다.[1]

폴 토마스 앤더슨, 웨스 앤더슨, 주드 에파토, 리처드 링클레이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아 바움백 등 많은 감독들이 알트먼에게 영향을 받았다.[51][52] 알트먼은 앨런 루돌프 등 여러 감독의 영화 제작을 돕기도 했다.

프랑스 칸 영화제 페스티벌 센터 밖에 있는 올트먼의 손자국

5. 1. 비평적 평가

올트먼은 사운드 분야에서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배우에게 대화 장면에서 동시에 대사를 하게 하거나, 동시녹음이 아닌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애드리브나 음향 효과를 넣어 자유로운 대사와 배경음을 추가하는 참신한 기법을 사용했다.[1] 그는 배우들에게 즉흥 연기 스타일을 취하게 했고, 대본 등을 청사진이라고 부르며 촬영 현장에서는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1] 또한, 앙상블 영화 스타일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폴 토마스 앤더슨이 이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1]

5. 2. 수상 경력

올트먼은 아카데미상 7회 후보 지명을 포함하여 다양한 상과 후보 지명을 받았으며, 2006년에는 명예 오스카상을 수상했다.[76] 그는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에 7회 후보로 지명되어, ''플레이어''(1992)와 ''고스퍼드 파크''(2001)로 두 번 수상했다. ''태너 '88''(1988)로 프라임타임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연출상을 수상했다. 골든 글로브상에 5회 후보로 지명되어 ''고스퍼드 파크''로 골든 글로브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M*A*S*H'')과 칸 영화제 감독상(''플레이어'')을 포함하여 여러 영화제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빅 아메리칸'')과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숏 컷'')을 수상했다. 1994년 미국 감독 조합 평생 공로상을, 1996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75] 200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올트먼 감독 영화의 수상 및 후보 지명
년도제목아카데미상영국 아카데미 영화상골든 글로브상
후보수상후보수상후보수상
1970M*A*S*H516161
1971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1
1972이미지111
1975내슈빌5151111
19773 여자들1
1978결혼식21
1982다시 돌아와 5앤다임, 지미 딘, 지미 딘1
1992플레이어35242
1993숏 컷121
1994프레타포르테2
2001고스퍼드 파크719251
합계213306336


5. 3. 후대에 미친 영향

폴 토마스 앤더슨, 웨스 앤더슨, 주드 에파토, 리처드 링클레이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노아 바움백, 데이비드 고든 그린, 필 로드와 크리스토퍼 밀러, 세이디 형제, 하모니 코린, 마이클 윈터바텀 등 여러 감독들이 알트먼의 영향을 받았다.[51][52] 알트먼은 앨런 루돌프, 레자 바디이, 리처드 C. 사라피안 등 여러 감독들이 영화 제작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올트먼은 자신의 여러 영화에서 특정 배우들을 자주 캐스팅했다. 주연, 조연, 카메오 등 다양한 역할로 그의 영화에 3편 이상 출연한 배우들은 다음과 같다.

배우출연 횟수
마이클 머피7
셸리 듀발7
버트 렘슨7
폴 둘리6
엘리엇 굴드5
르네 오베르주누아5
제프 골드블럼4
릴리 톰린4
라일 로벳4
헨리 기브슨4
데이비드 아킨4
존 슈크4
팀 로빈스3
캐롤 버넷3
키스 캐러다인3
샐리 켈러먼3
제럴딘 채플린3
앤 라이어슨3
벨리타 모레노3
리처드 E. 그랜트3
크레이그 리처드 넬슨3



동료 영화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2007년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올트먼에게 헌정했다.[68] 앤더슨은 프레리 홈 컴패니언 촬영 당시 건강이 좋지 않던 80세의 올트먼이 촬영을 끝마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예비 감독으로 일했다.

올트먼 사후 몇 달 뒤 열린 추모 행사에서 그는 "열정적인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 앨런 루돌프가 "올트먼풍"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오토르로 묘사되었다.[28] 그는 대규모 배우진과 자연스러운 대화의 중첩을 선호했으며, 배우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기하며 타고난 창의성을 표현하도록 격려했다. 릴리 톰린은 "그와 함께라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그를 "항상 배우들을 챙겨주는 훌륭한 자애로운 가장"에 비유했다.[69]

그의 영화는 "현대 영화를 재정의하고 활기를 불어넣은 신랄한 풍자와 반문화적 인물 연구"로 묘사된다.[69] 서부극, 뮤지컬, 전쟁 영화, 코미디 등 대부분의 장르를 아우르지만, "반(反)장르"로 여겨지며 "솔직하게 파괴적"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주류 영화에서 보이는 "가식성"을 싫어했고, 풍자를 통해 "그것들을 폭파시키고 싶어했다."

올트먼의 개인 기록 보관소는 미시간 대학교에 있으며, 약 900개의 상자에 개인 서류, 각본, 법률 및 사업 관련 기록, 사진, 소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올트먼은 이 대학교에서 ''시크릿 아너''를 촬영하고 여러 오페라를 연출하기도 했다.[17][71]

2009년부터 로버트 올트먼 상이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매년 영화감독, 캐스팅 감독, 앙상블 배우에게 수여된다.

2014년에는 그의 삶과 작품을 영화 클립과 인터뷰를 통해 조명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올트먼''이 개봉되었다.[72]

앨런 루돌프는 “할리우드의 이단아”로 불리는 올트먼의 기존 수법과 상식을 뒤엎는 표현 기법을 “알트마네스크”라고 칭했다.

올트먼은 사운드 분야의 혁신적인 기법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배우가 대화 장면에서 동시에 대사를 하게 하거나, 동시녹음이 아닌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애드리브나 음향 효과를 넣어 자유로운 대사와 배경음을 추가하는 참신한 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배우들에게 즉흥 연기 스타일을 권장했으며, 대본을 청사진이라고 부르며 촬영 현장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앙상블 영화 스타일로도 유명하며, 폴 토마스 앤더슨이 이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

6. 작품 목록

로버트 올트먼은 영화와 텔레비전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6. 1. 장편 영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19825&다임으로 돌아와, 지미 딘, 지미 딘시네콤 픽처스1983스트리머스유나이티드 아티스츠1984시크릿 아너시네콤 픽처스1985사랑의 바보캐넌 그룹1987O.C.와 스티그스메트로 골드윈 메이어테라피 너머뉴 월드 픽처스1990빈센트와 테오메트로 골드윈 메이어1992플레이어파인 라인 피처스1993숏 컷파인 라인 피처스1994프레타포르테미라마 맥스 필름1996캔자스 시티파인 라인 피처스1998진저브레드 맨폴리그램 엔터테인먼트1999쿠키스 포춘옥토버 필름2000닥터 T와 여자들아티잔 엔터테인먼트2001고스퍼드 파크포커스 피처스2003컴퍼니소니 픽처스 클래식스2006프레리 홈 컴패니언뉴 라인 시네마


6. 2. 텔레비전

로버트 올트먼은 1957년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탄하여 의뢰한 '히치콕 극장' 연출을 통해 텔레비전 분야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8년 조셉 코튼 주연의 《크리스마스 이브》 등 1편을 제작했다.[75] 이후 《소니호 공중모험》 연출을 맡았다.

《피터 건》, 《보난자》, 《로어링 20》, 《하와이안 아이》, 《루트 66》, 《버스 정류장》 등 많은 TV 드라마를 제작하며 인기 감독이 되었다. 1962년에는 TV 시리즈 《컴뱃!》의 제작과 초기 10개 에피소드의 연출을 맡았다. 자신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혹독한 전장의 인간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제작자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5년간 인기 프로그램으로 방영되었다.[76]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텔레비전 작품을 제작하거나 연출했다.

제목연도비고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츠1957년 - 1958년2편 연출
소니호 공중모험1958년 - 1959년20편 연출
모건 경부1959년
갤런트 맨1962년1편 연출
컴뱃!1962년 - 1963년10편 연출
베이스먼트1987년TV 영화
군사법정/구축함 케인호의 반란1988년TV 영화
로버트 알트먼의 재즈1996년
GUN/염과 탄도1997년4편 연출


7. 수상 및 후보

연도부문작품결과
칸 영화제1970년황금종려상『M★A★S★H』수상
1992년감독상『플레이어』수상
아카데미상1970년작품상『M★A★S★H』후보
감독상후보
1975년작품상『내슈빌』후보
감독상후보
1992년감독상『플레이어』후보
1993년감독상『쇼트 컷츠』후보
2001년작품상『고스퍼드 파크』후보
감독상후보
2005년명예상수상
골든 글로브상1970년작품상 (뮤지컬·코미디 부문)『M★A★S★H』수상
감독상후보
1972년외국어 영화상『이미지』후보
1975년작품상 (드라마 부문)『내슈빌』후보
감독상후보
1992년작품상 (뮤지컬·코미디 부문)『플레이어』수상
감독상후보
1993년각본상『쇼트 컷츠』후보
1994년작품상 (뮤지컬·코미디 부문)『프레타포르테』후보
2001년작품상 (뮤지컬·코미디 부문)『고스퍼드 파크』후보
감독상수상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1970년작품상『M★A★S★H』후보
감독상후보
1978년감독상웨딩후보
각본상후보
1992년작품상『플레이어』후보
감독상수상
2001년영국 작품상『고스퍼드 파크』수상
감독상후보
미국 감독 조합상1970년장편영화 감독상『M★A★S★H』후보
1975년장편영화 감독상『내슈빌』후보
1992년장편영화 감독상『플레이어』후보
1993년Directors Guild of America Lifetime Achievement Award – Feature Film|미국 감독 조합상 평생 공로상|label=D. W. 그리피스 상영어수상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1970년감독상『M★A★S★H』준우승
1975년작품상『내슈빌』수상
감독상수상
1992년작품상『플레이어』수상
감독상수상
2001년작품상『고스퍼드 파크』준우승
감독상수상
캔자스시티 영화 비평가 협회상1970년감독상『M★A★S★H』수상
1975년작품상『내슈빌』수상
감독상수상
미국 영화 비평가 협회상1970년작품상『M★A★S★H』수상
감독상3위
1975년작품상『내슈빌』수상
감독상수상
1992년작품상『플레이어』3위
감독상2위
1993년작품상『쇼트 컷츠』3위
감독상3위
각본상3위
2001년작품상『고스퍼드 파크』2위
감독상수상
전미 비평가 협회상1975년작품상『내슈빌』수상
감독상수상
베를린 국제 영화제1976년금곰상『빅 아메리칸』수상
1985년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명예로운 후퇴~닉슨의 밤~』수상
2002년금곰 명예상수상
세자르상1976년외국 영화상『내슈빌』후보
1979년외국 영화상『웨딩』후보
1993년외국 영화상『플레이어』후보
1995년외국 영화상『쇼트 컷츠』후보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1976년David di Donatello per il miglior film straniero|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외국 영화상|label=외국 영화상it『내슈빌』수상
나스트로 다르젠토상1976년David di Donatello per il miglior regista straniero|나스트로 다르젠토상 외국 감독상|label=외국 감독상it『내슈빌』후보
1993년외국 감독상『플레이어』수상
1994년외국 감독상『쇼트 컷츠』수상
2002년외국 감독상『고스퍼드 파크』수상
보딜상1977년Bodil Award for Best American Film|보딜상 미국 영화상|label=미국 영화상영어『내슈빌』수상
1993년미국 영화상『플레이어』수상
1995년미국 영화상『쇼트 컷츠』수상
2003년미국 영화상『고스퍼드 파크』후보
2006년미국 영화상『오늘 밤, 핏츠제럴드 극장에서』후보
인디펜던트 스피릿상1992년작품상『플레이어』수상
1993년작품상『쇼트 컷츠』수상
감독상수상
각본상수상
1999년작품상『쿠키 포춘』후보
2006년감독상『오늘 밤, 핏츠제럴드 극장에서』후보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1992년작품상『플레이어』준우승
감독상준우승
1993년감독상『쇼트 컷츠』준우승
각본상준우승
2001년감독상『고스퍼드 파크』준우승
2003년평생 공로상수상
보스턴 영화 비평가 협회상1992년감독상『플레이어』수상
1993년각본상『쇼트 컷츠』수상
시카고 영화 비평가 협회상1992년작품상『플레이어』후보
감독상수상
1993년작품상『쇼트 컷츠』후보
감독상후보
각본상후보
2001년감독상『고스퍼드 파크』후보
사우스이스트 영화 비평가 협회상1992년감독상『플레이어』수상
런던 영화 비평가 협회상1992년감독상『플레이어』수상
2001년영국 작품상『고스퍼드 파크』수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1993년황금사자상『쇼트 컷츠』수상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수상
1996년황금사자 명예상수상
골든 비틀상1994년외국 영화상『쇼트 컷츠』수상
린컨 센터 영화 협회1994년채플린상수상
British Film Institute Fellowship|BFI 펠로우십상영어2001년수상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2003년구로사와 아키라상수상


8. 사생활

올트먼은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라본 엘머(LaVonne Elmer)로, 1947년부터 1949년까지 결혼 생활을 했고 딸 크리스틴(Christine)을 낳았다. 두 번째 부인은 로터스 코렐리(Lotus Corelli)로,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결혼했고 마이클(Michael)과 스티븐(Stephen) 두 아들을 낳았다. 마이클은 15세에 올트먼의 영화 ''M*A*S*H''의 주제가인 "자살은 고통스럽다"의 가사를 썼다. 스티븐은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종종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세 번째 부인은 캐서린 리드(Kathryn Reed)로, 1957년부터 올트먼이 2006년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로버트(Robert)와 매튜(Matthew) 두 아들을 낳았다. 올트먼은 캐서린과 결혼하면서 콘니 리드(Konni Reed)의 계부가 되었다.[53][54][55]

2016년에 사망한 캐서린 올트먼은 2014년에 출판된 올트먼에 관한 책을 공동 집필했다.[56] 그녀는 2014년 다큐멘터리 ''알트먼''의 자문과 내레이션을 맡았고, 남편의 영화 회고전 상영회에서 여러 번 연설했다.[57]

1960년대에 올트먼은 캘리포니아주 브렌트우드의 맨드빌 캐니언에 거주했다.[58] 197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주 말리부에 살았지만, 1981년에 집과 라이온스 게이트 제작사를 매각했다. 그는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포페이'''의 실패 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가족과 사업 본부를 뉴욕시로 옮겼지만, 결국 말리부로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59]

2000년 11월, 올트먼은 조지 W. 부시(조지 W. 부시)가 당선되면 파리로 이주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텍사스주 파리를 의미했다고 농담했다. 그는 "부시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주(텍사스주)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언급했다.[60] 올트먼은 공개적으로 대마(대마)를 사용했으며, 미국 대마 합법화 협회(NORML)(NORML)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61] 그는 또한 무신론자이자 반전 운동가였다.[62] 그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노엄 촘스키)와 배우 수잔 서랜든(수잔 서랜든)을 포함한 여러 유명 인사들과 함께 2003년 이라크 침공(이라크)에 반대하는 "우리 이름으로는 아니다"(Not in Our Name)(우리 이름으로는 아니다) 선언에 서명했다.[63][64] 줄리안 펠로즈(줄리안 펠로우스)는 올트먼의 반전 및 반부시 입장 때문에 그가 영화 《고스포드 파크》로 감독상 아카데미상(감독상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30]

올트먼은 자신의 1970년 영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텔레비전 시리즈 《M*A*S*H》(M*A*S*H)(M*A*S*H)를 혐오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영화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반전 메시지가 "인종차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1년 《M*A*S*H》 DVD 해설에서 그는 시리즈를 불쾌하게 여긴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65]

9. 기타

올트먼은 2006년 11월 20일, 81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의 시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66][67] 동료 영화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의 2007년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올트먼에게 헌정했다.[68] 앤더슨은 당시 건강이 좋지 않던 80세의 올트먼이 촬영을 끝마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서 예비 감독으로 일했다.

사망 몇 달 후 올트먼을 기리는 추모 행사에서 그는 "열정적인 영화 제작자"이자 관습을 거부하고 감독 앨런 루돌프가 "올트먼풍"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 오토르로 묘사되었다.[28] 그는 대규모 배우진과 자연스러운 대화의 중첩을 선호했으며, 배우들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연기하고 타고난 창의성을 표현하도록 격려했다. 릴리 톰린은 그를 "항상 배우들을 챙겨주는 훌륭한 자애로운 가장"과 같다고 비유하며, "그와 함께라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69]

그의 많은 영화는 "현대 영화를 재정의하고 활기를 불어넣은 신랄한 풍자와 반문화적 인물 연구"로 묘사된다.[69] 그의 영화는 서부극, 뮤지컬, 전쟁 영화, 코미디 등 대부분의 장르를 아우르지만, 그는 "반(反)장르"로 여겨졌고 그의 영화는 "솔직하게 파괴적"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주류 영화에서 보이는 "가식성"을 싫어했고, 풍자를 통해 "그것들을 폭파시키고 싶어했다."라고 알려져 있다.

여러 편의 올트먼 영화에 출연한 배우 팀 로빈스는 그의 연출 방식의 독특한 측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올트먼의 개인 기록 보관소는 미시간 대학교에 있으며, 약 900개의 상자에 개인 서류, 각본, 법률, 사업 및 재정 기록, 사진, 소품 및 관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올트먼은 대학교에서 ''시크릿 아너''를 촬영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오페라를 연출하기도 했다.[17][71]

2009년부터 로버트 올트먼 상은 매년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영화의 감독, 캐스팅 감독 및 앙상블 배우에게 수여된다.

2014년에는 그의 삶과 작품을 영화 클립과 인터뷰를 통해 살펴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올트먼''이 개봉되었다.[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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