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로렌은 이탈리아 출신의 배우로, 1950년대 초 영화 배우로 데뷔하여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1960년 영화 《두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엘 시드》, 《어제, 오늘, 내일》, 《이탈리아식 결혼》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1960년대를 전성기로 보냈다. 1968년 이후에는 영화 출연 횟수를 줄였지만, 2020년 영화 《앞으로의 인생》에 출연하며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영화 외에도 자서전 출간, 요리책 발간, 텔레비전 영화 출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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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어머니가 된 후, 로렌은 영화 출연 횟수를 줄였다. 이후 10년 동안 그녀의 역할은 대부분 이탈리아 영화였다. 1970년대에는 리처드 버튼과 함께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마지막 영화인 ''여행(1974)''과 ''짧은 만남''(1974)의 리메이크작에 출연했다. ''짧은 만남''은 1974년 11월 12일 NBC의 ''홀마크 명예의 전당'' 시리즈로 미국 TV에서 초연되었다. 1976년에는 ''카산드라 크로싱''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미국 시장에서도 상당한 흥행 성공을 기록했다. 에토레 스콜라의 ''특별한 날''(1977)에서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오스카상(남우주연상, 외국어 영화상)을 포함해 11개의 국제 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상과 외국어 영화 부문 세자르상을 수상했다. 로렌은 이 영화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 상을 수상했다.
1979년 로렌
1978년, 로렌은 "세계 영화의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네 번째 골든 글로브를 수상했다. 같은 해 미국 스릴러 영화 ''브래스 타겟''에 출연했으나, 평가는 엇갈렸다. 이 시기 로렌은 아카데미상 후보작 ''해바라기''(1970)와 ''라만차의 사나이''(1972) 등에 출연했다. ''라만차의 사나이''는 비평과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전미 비평가 위원회는 이 영화를 1972년 최고의 영화 10편 목록에 올렸다.[16] 1979년에는 ''파이어파워''에서 제임스 코번, O. J. 심슨과 주연을 맡았다.
1980년, A. E. 홋치너의 전기 ''소피아 로렌: 삶과 사랑, 그녀의 이야기''가 성공한 후, 로렌은 자신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TV 영화 ''소피아 로렌: 그녀의 이야기''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연기했다. 1981년에는 향수 '소피아'를 출시하고, 곧 안경 브랜드도 출시했다.[16]
1980년대에 로렌은 두 아들을 키우는 데 집중하며 영화 출연을 줄였다.[19][20] 1981년 ''다이너스티''의 알렉시스 캐링턴 역을 거절했고, 1984년 CBS의 ''팰컨 크레스트'' 출연 협상도 결렬되었다. 같은 해 TV 영화 ''오로라''에서 11살 아들 에도아르도 폰티와 함께 연기했다.
로렌은 피터 셀러스와 함께 코미디 노래가 담긴 앨범을 포함, 20곡이 넘는 노래를 녹음했다. 셀러스의 구애를 거절했으며, 그의 첫 번째 부인과의 이별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로렌은 셀러스와의 관계가 플라토닉했다고 밝혔다. 피터 사르슈테트의 "Where Do You Go To (My Lovely)?"는 로렌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21][22]
1986년 로렌, 앨런 워렌 촬영
1991년, 로렌은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골든 글로브 세실 B. 드밀 상을 받았다.[23] 1993년 4월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명예 오스카상을 수여했으며, 2009년에는 펠리니가 1993년 사망 직전 그녀를 캐스팅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24]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로렌은 영화 선택에 신중을 기하며 요리책, 안경, 보석, 향수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프레타포르테''(1994)에 출연, 골든 글로브 후보에 올랐다.
1994년,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 팜스프링스 명예의 거리에 골든 팜 스타가 헌정되었다.[25] ''그럼피어 올드 맨''(1995)에서 팜므 파탈 역할을 맡아 흥행에 성공했다.[16] 1997년 제20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명예상을 받았고,[26] 1999년 미국 영화 협회는 로렌을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스타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27] 2001년 몬트리올 세계 영화제에서 특별 그랑프리 오브 아메리카 상을 받았다.[28] 이 시기 캐나다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2002), ''성인의 삶''(2004) 등 두 편의 프로젝트를 촬영했다.
2010년, 로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룬 이탈리아 TV 미니시리즈에서 어머니 역할을 연기했다. 2013년, 장 콕토의 희곡 ''인간의 목소리''를 각색한 이탈리아 단편 영화로 복귀, 막내 아들 에도아르도 폰티가 감독을 맡았다.[29] 2020년, 폰티 감독의 ''더 라이프 어헤드''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마담 로사 역으로 출연, AARP 최고의 여배우상과 AWFJ 그랜드 데임 상을 받았다.[30] 2024년 90세가 된 후에도 은퇴설을 일축하며 작품 활동 의지를 밝혔다.[31]
2016년의 로렌
2017년 11월 16일, 스페인 알메리아 명예의 거리에 ''백의의 수녀''에서의 공로로 별을 받았다.[32][33][34] 알메리아 티에라 데 시네 상도 수상했다.[35]
로렌은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36] 2006년부터 제네바에 거주 중이다.[37] 캘리포니아주 히든 밸리 목장,[38] 맨해튼 햄프셔 하우스 아파트,[39] 플로리다 남부 윌리엄스 아일랜드 콘도,[40] 로마 빌라 등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39]
SSC 나폴리의 열렬한 팬인 로렌은 2007년 5월 팀이 세리에 B 3위를 기록하자 우승 시 스트립쇼를 하겠다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에 말했다.[41] 2007년 피렐리 캘린더 모델로도 활동했다.[42]
2021년 2월, BBC 라디오 4 ''사막의 섬의 디스크''에 출연, 엘라 피츠제럴드의 "I've Got You Under My Skin", 타마스 바사리 연주 드뷔시 "달빛" 등을 선곡했다.[43] 리처드 버튼이 스크래블 게임 중 그녀의 부정행위에 격분했다고 밝혔다.[44][45]
2023년 9월 24일, 스위스 자택에서 넘어져 고관절과 대퇴골 골절상을 입고 응급 수술을 받았다.[46]
1958년 폰티와 로렌
로렌은 1950년 15세 때 37세의 카를로 폰티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법률상 이혼이 허용되지 않아, 폰티는 1957년 9월 17일 멕시코에서 대리 결혼했다.[47] 1962년 중혼 혐의를 피하기 위해 결혼을 무효화했지만, 동거를 계속했다. 1965년 조르주 퐁피두 총리의 승인으로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47] 폰티는 프랑스에서 이혼 후 1966년 4월 9일 로렌과 정식 결혼했다.[48] 이 결혼은 폰티가 2007년 1월 10일 폐 질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49]
두 아들 카를로 폰티 주니어(1968년생)와 에두아르도 폰티(1973년생)를 두었다.[10][50] 며느리는 사샤 알렉산더와 안드레아 메자루스이며,[8][51] 네 명의 손주가 있다.[52][53]
소피아 코스탄차 브리지다 빌라니 시콜로네는 1934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에 있는 클리니카 레지나 마르게리타에서 태어났다.[3] 그녀의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이자 배우 지망생이었던 로밀다 빌라니(1910–1991)였고, 아버지는 실패한 엔지니어였으며, 이탈리아 국영 철도 페로비에 델로 스타토 이탈리아네에서 임시직으로 일했던 리카르도 시콜로네 무릴로(1907–1976)였다. 로렌은 자서전에서 그가 귀족 출신이라고 주장하며, 그 덕분에 자신을 "포추올리 자작 부인, 카세르타 여사,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하사한 리카타 시콜로네 무릴로 후작"이라고 칭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로렌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을 거부했고,[4] 그녀는 재정적 지원 없이 남겨졌다. 로렌은 다섯 살, 열일곱 살, 그리고 1976년 그가 임종했을 때, 세 번 아버지를 만났으며, 그를 용서했지만 어머니를 버린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5][6] 로렌의 부모는 1938년에 또 다른 아이,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를 낳았다. 시콜로네는 마리아를 자신의 딸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로렌이 성공하자, 그녀는 여동생 마리아가 시콜로네 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돈을 지불했다.[7] 로렌에게는 두 명의 어린 이복 남동생, 줄리아노와 주세페가 있다.[8] 로밀다, 소피아, 마리아는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에 있는 로렌의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9][1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포추올리의 항구와 탄약 공장은 연합군의 잦은 폭격 대상이었다. 한 공습 중에, 로렌은 방공호로 달려가다가 파편에 맞아 턱에 부상을 입었다. 그 후, 가족은 나폴리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먼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전쟁 후, 로렌과 그녀의 가족은 포추올리로 돌아갔다. 로렌의 할머니 루이사는 거실에 펍을 열고, 직접 만든 체리 리큐어를 팔았다. 로밀다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마리아는 노래를 불렀고, 로렌은 테이블에서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2. 2. 데뷔 및 초기 활동
로렌, 1959년 영화 ''나폴리에서 생긴 일''에서 "투 부오 파 라메리카노"를 부르다
소피아 라자로는 이탈리아 국립 영화학교인 실험 영화 센터에 입학하여, 16세였던 1951년 머빈 르로이 감독의 영화 ''쿼바디스''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13][14]
같은 해 로렌은 이탈리아 영화 ''에라 루이... 시! 시!''에 출연하여 오달리스크 역할을 맡았으며, ''소피아 라자르''로 크레딧에 올랐다. 1950년대 초반, 그녀는 ''라 파보리타'' (1952)를 포함한 여러 영화에서 단역과 조연을 맡았다.[15]
카를로 폰티는 고프레도 롬바르도가 제안한 ''소피아 로렌''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과 대중 이미지를 바꾸었다. 이 이름은 스웨덴 배우 마르타 토렌의 이름을 비튼 것이었다. 그녀의 첫 주연 역할은 ''아이다'' (1953)였으며, 이 영화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16]
''클레오파트라와 두 밤'' (1953)에서 주연을 맡은 후, 그녀의 획기적인 역할은 비토리오 데 시카가 감독한 ''나폴리의 황금'' (1954)에서였다.[16] 1954년에 개봉된 ''그녀는 너무 나쁘다'' 와 ''라 벨라 무나이아'' (1955)는 로렌이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함께 출연한 많은 영화 중 처음 두 편이 되었다. 이후 3년 동안 그녀는 ''소렌토의 스캔들'', ''여자가 되어 행복하다'', ''돌고래를 탄 소년'', ''잃어버린 전설'' 및 게리 그랜트와 프랭크 시나트라가 출연한 스페인 배경의 나폴레옹 시대 전쟁 서사시인 ''자부심과 열정'' (1957)을 포함한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2. 3. 국제적인 스타덤
1950년대 후반, 로렌은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5편의 영화 계약을 맺으며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이 시기 앤서니 퍼킨스와 함께 출연한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캐리 그란트와 함께한 로맨틱 코미디 《하우스보트》, 조지 큐커 감독의 《헬러 인 핑크 타이츠》 등에 출연했다.[13][14]
1960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두 여인》에서 로렌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에서 12살 딸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강인한 모습을 연기하여 극찬을 받았다. 특히 교회 안에서 집단 강간을 당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로렌은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 최고 연기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연기한 배우 또는 이탈리아 여배우가 받은 최초의 주요 아카데미상이었다.[16] 로렌은 《두 여인》으로 22개의 국제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배우로 인정받았다.
1960년대에 로렌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 중 한 명으로,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61년과 1964년에는 《엘 시드》와 《로마 제국의 멸망》에 출연하여 100만 달러를 받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965년에는 《결혼의 이탈리아식》에서의 연기로 두 번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17]
이 시기 로렌의 대표작으로는 찰턴 헤스턴과 함께 출연한 서사시 《엘 시드》, 피터 셀러스와 함께 출연한 《백만장자 부인》(1960),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출연한 《나폴리에서 시작》(1960),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함께 출연한 비토리오 데 시카의 삼부작 《어제, 오늘, 내일》(1963), 폴 뉴먼과 함께 출연한 《레이디 L》(1965),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한 《아라베스크》(1966), 그리고 찰리 채플린의 마지막 영화 《홍콩에서 온 백작 부인》(1967)에 말론 브란도와 함께 출연한 작품 등이 있다.
로렌은 1964년부터 1977년까지 4차례에 걸쳐 "세계 영화 인기 여배우"로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했다.[18]
La mia casa è piena di specchiit(''우리 집은 거울로 가득해'')는 비토리오 신도니가 감독하고 마르게레트 마데가 소피아 로렌 역을 맡은 2부작 이탈리아 TV 미니시리즈로, 소피아 로렌은 자신의 어머니인 로밀다 빌라니 역을 연기했다.[30] 이 작품은 로렌의 여동생 마리아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2004년에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성자들의 삶''에 출연했다.[29]
1984년에는 텔레비전 영화 《오로라》에 출연했다.[30] 1986년에는 텔레비전 영화 《용기》에서 마리아나 미랄도 역을 맡았다. 1988년에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행운의 순례자》에서 루시아 역을 연기했다.[30] 1989년에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도망》에 출연했다. 1990년에는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월요일》에서 로사 프리오레 역을 맡았으며, 이 영화는 시카고 국제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 2001년에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프란체스카와 눈지아타》에서 프란체스카 몬토르시 역으로 출연했다.[30]
4. 수상 및 업적
소피아 로렌은 여러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61년 《두 여인》으로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연기한 배우가 받은 최초의 주요 아카데미상이었다. 또한 같은 영화로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도 받았다. 1958년에는 《검은 난초》로 베니스 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두 여인》으로 22개의 국제상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명예상(1991년)과 골든 글로브 세실 B. 드밀 상(1995년) 등 여러 공로상을 받았다.
1996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1등급을 수훈했다.[63] 1991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를 수훈했다.[61][62]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현재도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올림픽기를 운반하기도 했다.
SSC 나폴리의 열렬한 팬으로도 알려져 있다. 세리에 A 승격이 기대되던 2007년에는 "나폴리가 승격하면 스트립 쇼를 열어도 좋다"고 발언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4. 1. 수상 경력
소피아 로렌은 여러 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1961년 《두 여인》으로 수상. 영어 이외의 언어로 연기한 배우 또는 이탈리아 여배우가 받은 최초의 주요 아카데미상이다.
1996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1등급을 수훈했다.[63] 1991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를 수훈했다.[61][62]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현재도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올림픽기를 운반하기도 했다.
SSC 나폴리의 열렬한 팬으로도 알려져 있다. 세리에 A 승격이 기대되던 2007년에는 "나폴리가 승격하면 스트립 쇼를 열어도 좋다"고 발언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5. 사생활
가톨릭 신자인[36] 로렌은 2006년부터 스위스제네바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37]캘리포니아주 히든 밸리의 목장,[38]맨해튼 햄프셔 하우스의 아파트,[39] 플로리다 남부 윌리엄스 아일랜드의 콘도,[40]로마의 빌라 등 다양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39]
로렌은 SSC 나폴리의 열렬한 팬이다. 2007년 5월, 팀이 세리에 B에서 3위를 차지했을 때,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에 팀이 우승하면 스트립쇼를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41] 같은 해 피렐리 캘린더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42]
1982년, 탈세 혐의로 17일 동안 수감된 적이 있다. 로렌은 회계사의 실수라고 주장했으며, 2013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이와 관련된 혐의를 벗겨주었다.[56] 1999년에는 자신의 누드 사진을 조작하여 게시한 79개의 성인 웹사이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57][58]
2021년 2월, BBC 라디오 4의 ''사막의 섬의 디스크''에 출연하여 사치품으로 피자 오븐을 선택했다.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른 콜 포터의 "I've Got You Under My Skin"과 타마스 바사리가 연주한 드뷔시의 "달빛"을 선곡했다.[43]
2023년 9월 24일, 스위스 자택에서 넘어져 고관절과 대퇴골 골절상을 입어 응급 수술을 받았다.[46]
5. 1. 결혼과 가족
로렌은 1950년 15세, 폰티는 37세 때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47] 당시 이탈리아 법률에서 이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폰티는 1957년 9월 17일 멕시코에서 대리 결혼(두 명의 남성 변호사가 그들을 대신함)을 했을 때 법적으로 아내 줄리아나 피아스트리(Giuliana Fiastri)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다.[47] 이 부부는 중혼 혐의를 피하기 위해 1962년에 결혼을 무효화했지만, 계속 함께 살았다. 1965년, 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47] 폰티는 이후 프랑스에서 줄리아나와 이혼하여 1966년 4월 9일에 로렌과 정식으로 결혼했다.[48] 이 결혼은 폰티가 94세의 나이로 폐 질환으로 사망한 2007년 1월 10일까지 지속되었다.[49]
슬하에 두 아들, 1968년 12월 29일에 태어난 카를로 폰티 주니어와 1973년 1월 6일에 태어난 에두아르도 폰티를 두었다.[10][50] 로렌의 며느리들은 사샤 알렉산더와 안드레아 메자루스이다.[8][51] 로렌은 네 명의 손주가 있다.[52][53]
로렌과 캐리 그랜트는 1958년 영화 《하우스보트》에 함께 출연했다. 그랜트의 아내 베치 드레이크가 원작 각본을 썼고, 그랜트는 원래 드레이크가 자신과 함께 출연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가 영화 《프라이드 앤 패션》 (1957) 촬영 중 로렌과 불륜을 시작한 후, 그랜트는 드레이크 대신 로렌을 출연시키기 위해 각본을 다시 썼고, 드레이크는 크레딧에서 이름을 빼줄 것을 요청했다. 불륜은 《프라이드 앤 패션》 촬영이 끝나기 전에 좋지 않게 끝났고, 이는 《하우스보트》 촬영 현장에 문제를 일으켰다. 그랜트는 관계를 재개하길 원했지만, 로렌은 대신 카를로 폰티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55]
5. 2. 법적 문제
1982년, 소피아 로렌은 탈세 혐의로 17일 동안 수감되었다. 로렌은 자신의 회계사가 세금 신고서에서 실수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인기나 경력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2013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1974년 소득에 대해 납부해야 할 세금과 관련된 분쟁에서 그녀의 혐의를 벗겨주었다.[56]
1999년 9월, 로렌은 인터넷에 자신의 누드 사진을 조작하여 게시한 79개의 성인 웹사이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57][58]
카를로 폰티와 1957년에 결혼했지만, 당시 폰티는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중혼죄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어 1962년에 혼인 관계를 무효로 했다.[68] 두 사람은 폰티의 이혼이 성립된 1966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69]
5. 3. 관심사와 활동
로렌은 SSC 나폴리의 열렬한 팬이다. 2007년 5월, SSC 나폴리가 세리에 B에서 3위를 했을 때, 그녀는 (당시 72세)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에 팀이 우승하면 스트립쇼를 하겠다고 말했다.[41] 같은 해 피렐리 캘린더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42]
2006년부터 제네바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37] 2021년 2월, BBC 라디오 4의 ''사막의 섬의 디스크''에 출연하여 피자 오븐을 사치품으로 선택했다. 그녀가 선택한 음악으로는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른 콜 포터의 "I've Got You Under My Skin"과 타마스 바사리가 연주한 드뷔시의 "달빛"이 있었다.[43]
6. 기타 정보
소피아 로렌은 한국에서도 영화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6년 혼다 기연 공업의 오토바이 혼다 로드펄 TV 광고에 출연했는데, 오바야시 노부히코가 감독한 이 광고에서 소피아 로렌이 외친 "라타타"는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73]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 켄트 나가노, 장-파스칼 뱅튀스 – 늑대 발자국. 미하일 고르바초프, 빌 클린턴, 소피아 로렌. 펜타톤 PTC 5186011
2004
프로코피예프 – 페드로와 늑대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 켄트 나가노, 장-파스칼 뱅튀스 – 늑대의 발자국. 안토니오 반데라스, 소피아 로렌. 펜타톤 PTC 5186014
기타
"만보 바칸" (Mambo Bacan), "주 비 주 비 주" (Zoo Be Zoo Be Zoo), "솔디 솔디 솔디" (Soldi, soldi, soldi), "빙 뱅 봉" (Bing, Bang, Bong), "카리나" (Carina), "Ti 'ne Afto Pou To Lene Agapi"
대히트
6. 2. 저서 목록
소피아 로렌 (1971), ''In Cucina con Amore'', Rizzoli Editore.
소피아 로렌 (1972). ''사랑으로 요리하기(In the Kitchen with Love)'', Doubleday, Library of Congress Catalog Card 79–18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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