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 다리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벤 다리오는 니카라과의 시인이자 언론인, 외교관으로, 스페인어 시의 현대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1867년 니카라과에서 태어나 15세에 니카라과 대통령 비서를 지냈으며, 이후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과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다리오는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프랑스 시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운율과 표현 기법을 사용했으며, '아술...', '세속적 송가', '생명과 희망의 노래'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스페인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16년 사망 이후에도 다양한 기념 사업과 문학 작품을 통해 기리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루벤 다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펠릭스 루벤 가르시아 사르미엔토 |
출생일 | 1867년 1월 18일 |
출생지 | 니카라과, 마타갈파, 시우다드 다리오(당시 메타파) |
사망일 | 1916년 2월 6일 (49세) |
사망지 | 니카라과, 레온 |
국적 | 니카라과 |
직업 | |
직업 | 시인 기자 외교관 작가 |
직책 | 스페인 주재 외무부 장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콜롬비아 영사 프랑스 파리 주재 니카라과 영사 프랑스 파리 주재 파라과이 영사 |
문학 | |
사조 | 모더니즘 문학 |
대표 작품 | 아술 세속적인 운문 및 기타 시 삶과 희망의 노래 아르헨티나 찬가 및 기타 시 |
가족 | |
배우자 | 라파엘라 콘트레라스 (1890년 결혼, 1893년 사별) 로사리오 무리요 (1893년 결혼) 프란시스카 산체스 델 포소 |
2. 생애
루벤 다리오는 니카라과 북부 마타갈파 주 메타파(현재의 시우다드 다리오/Ciudad Darío영어)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마누엘 가르시아 다리오와 어머니 로사 사르미엔토 알레만의 아들로 태어났다.[29] 1867년 3월 레온에서 펠릭스 루벤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29] 그의 부모인 마누엘 가르시아와 로사 사르미엔토는 1866년 4월 26일, 사촌지간이었기에 필요한 교회 허가를 받은 후 니카라과, 레온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마누엘의 과도한 음주로 인해 로사는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메타파로 도망가 펠릭스 루벤을 낳았다. 부부는 화해했고 로사는 두 번째 아이인 칸디다 로사라는 딸을 낳았지만, 딸은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사망했다. 결혼 생활은 다시 악화되어 로사는 남편을 떠나 이모 베르나르다 사르미엔토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로사 사르미엔토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함께 온두라스 촐루테카의 산 마르코스 데 콜론으로 이사했다.
다리오는 온두라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29] 레온으로 돌아와 숙모의 집에서 15세까지 생활했다. 여기서 살았던 집은 현재 루벤 다리오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다.[29] 그는 어머니의 이모와 삼촌인 펠릭스와 베르나르다에게 길러졌는데, 다리오는 어린 시절에 그들을 진짜 부모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나 "삼촌 마누엘"이라고 불렀던 아버지와는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1871년 펠릭스 라미레스의 사망 후, 가족은 어려운 경제적 시기를 겪었고 어린 루벤을 재단사 견습생으로 보낼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는 1879년과 1880년 동안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기 전에 레온에서 여러 학교에 다녔다.
3세에 글을 깨우친[30] 신동으로 알려져[30], 스페인 고전 희극과 호러 소설을 낭독했다고 한다.[30] 13세가 되자 소년 시인으로 중앙 아메리카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30] 1879년에 그가 쓴 소네트가 보존되어 있으며, 13세 때 처음으로 신문에 발표했다. 1880년 7월 26일 리바스의 일간지인 ''El Termómetro''에 발표된 비가, ''Una lágrima''가 그것이다. 얼마 후 그는 또한 레온의 문학 잡지인 ''El Ensayo''에 기고하여 "어린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초기 시에서 그의 지배적인 영향은 호세 조릴라, 라몬 데 캄포아모르, 가스파르 누녜스 데 아르세, 벤투라 데 라 베가와 동시대의 스페인 시인이었다.[5] 1881년에 쓰여진 그의 에세이 ''El jesuita''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적대적인 자유주의를 보여준다.
15세에 니카라과 대통령 비서를 맡았고 왕립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1881년 12월경, 그는 시적 재능을 감안하여 국고로 유럽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일부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요청으로 수도인 마나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의 시의 반성직자적 어조는 보수적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알파로 국회 의장을 설득하지 못했고, 그는 니카라과, 그라나다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했지만, 루벤은 마나과에 머물면서 신문 ''El Ferrocarril''과 ''El Porvenir de Nicaragua''에 기고하는 언론 활동을 계속했다. 수도에서 그는 11살 소녀 로사리오 에멜리나 무리요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는 결혼 계획을 연기하려는 친구들의 요청으로 1882년 8월 엘살바도르로 여행을 갔다.
2. 1. 초기 생애
루벤 다리오는 니카라과 북부 마타갈파 주 메타파(현재의 시우다드 다리오/Ciudad Darío영어)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마누엘 가르시아 다리오와 어머니 로사 사르미엔토 알레만의 아들로 태어났다.[29] 1867년 3월 레온에서 펠릭스 루벤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29] 그의 부모인 마누엘 가르시아와 로사 사르미엔토는 1866년 4월 26일, 사촌지간이었기에 필요한 교회 허가를 받은 후 니카라과, 레온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마누엘의 과도한 음주로 인해 로사는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메타파로 도망가 펠릭스 루벤을 낳았다. 부부는 화해했고 로사는 두 번째 아이인 칸디다 로사라는 딸을 낳았지만, 딸은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사망했다. 결혼 생활은 다시 악화되어 로사는 남편을 떠나 이모 베르나르다 사르미엔토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로사 사르미엔토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함께 온두라스 촐루테카의 산 마르코스 데 콜론으로 이사했다.다리오는 온두라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29] 레온으로 돌아와 숙모의 집에서 15세까지 생활했다. 여기서 살았던 집은 현재 루벤 다리오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다.[29] 그는 어머니의 이모와 삼촌인 펠릭스와 베르나르다에게 길러졌는데, 다리오는 어린 시절에 그들을 진짜 부모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나 "삼촌 마누엘"이라고 불렀던 아버지와는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1871년 펠릭스 라미레스의 사망 후, 가족은 어려운 경제적 시기를 겪었고 어린 루벤을 재단사 견습생으로 보낼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는 1879년과 1880년 동안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기 전에 레온에서 여러 학교에 다녔다.
3세에 글을 깨우친[30] 신동으로 알려져[30], 스페인 고전 희극과 호러 소설을 낭독했다고 한다.[30] 13세가 되자 소년 시인으로 중앙 아메리카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30] 1879년에 그가 쓴 소네트가 보존되어 있으며, 13세 때 처음으로 신문에 발표했다. 1880년 7월 26일 리바스의 일간지인 ''El Termómetro''에 발표된 비가, ''Una lágrima''가 그것이다. 얼마 후 그는 또한 레온의 문학 잡지인 ''El Ensayo''에 기고하여 "어린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초기 시에서 그의 지배적인 영향은 호세 조릴라, 라몬 데 캄포아모르, 가스파르 누녜스 데 아르세, 벤투라 데 라 베가와 동시대의 스페인 시인이었다.[5] 1881년에 쓰여진 그의 에세이 ''El jesuita''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적대적인 자유주의를 보여준다.
15세에 니카라과 대통령 비서를 맡았고 왕립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1881년 12월경, 그는 시적 재능을 감안하여 국고로 유럽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일부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요청으로 수도인 마나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의 시의 반성직자적 어조는 보수적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알파로 국회 의장을 설득하지 못했고, 그는 니카라과, 그라나다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했지만, 루벤은 마나과에 머물면서 신문 ''El Ferrocarril''과 ''El Porvenir de Nicaragua''에 기고하는 언론 활동을 계속했다. 수도에서 그는 11살 소녀 로사리오 에멜리나 무리요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는 결혼 계획을 연기하려는 친구들의 요청으로 1882년 8월 엘살바도르로 여행을 갔다.
2. 2. 엘살바도르와 칠레에서의 활동
엘살바도르에서 다리오는 자신을 후원한 시인 호아킨 멘데스에 의해 공화국 대통령 라파엘 살디바르에게 소개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란시스코 가비디아를 만났는데, 가비디아의 후원 아래 다리오는 처음으로 프랑스 알렉산드린 운율을 카스티야어 시로 각색하려 시도했다.[7]엘살바도르에서 많은 명성과 격렬한 사회생활을 누렸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천연두에 걸렸다. 1883년 10월, 여전히 회복 중이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니카라과 국립 도서관의 직원이 되었고, 1884년 5월에는 부랑죄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새로운 시 형식을 계속 실험했고, ''Epístolas y poemas''라는 책을 출판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888년 ''Primeras nota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사랑 시와 이야기로 이름을 알린 다리오는 1886년 니카라과를 떠나 칠레로 갔고, 1886년 6월 23일 발파라이소에 도착했다. 칠레에서 그는 에두아르도 포리에르와 에두아르도 데 라 바라라는 시인과 함께 머물렀고, 그들은 공동으로 감상적인 소설인 ''에멜리나''를 공동 집필했다. 포리에르와의 친분 덕분에 다리오는 1886년 7월 산티아고의 신문 ''라 에포카''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칠레에 머무는 동안 다리오는 세련됨의 부족과 피부색 때문에 그를 경멸하는 칠레 귀족들의 끊임없는 모욕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대통령의 아들이자 시인이었던 페드로 발마세다 토로와 같은 몇몇 친구를 사귀는 데 성공했다. 그는 1887년 3월에 첫 작품인 ''아브로호스''를 출판했다. 1888년 7월, 막 시작된 모더니즘 혁명의 핵심 문학 작품인 ''아술...''(Azul...)이 발파라이소에서 출판되었다.
''아술...''(Azul...)은 1886년 12월부터 1888년 6월 사이에 칠레 언론에 이미 게재되었던 일련의 시와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영향력 있는 스페인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인 후안 발레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는 1888년 10월 마드리드 신문 ''엘 임파르시알''에 다리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게재했는데, 그 편지에서 그는 다리오의 글에 지나친 프랑스어의 영향을 비판했지만, 다리오에게 "[a] un prosista y un poeta de talento" ("재능 있는 산문가이자 시인")라고 인정했다.
2. 3. 중앙아메리카와 유럽에서의 활동
새롭게 얻은 명성 덕분에 다리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La Nación'' 특파원 자리를 얻었다.[11] 니카라과로 돌아가는 길에 페루 리마에 잠시 들러 작가 리카르도 팔마를 만났다. 1889년 3월 7일 코린토 항구에 도착했고, 레온에서 환영받았지만, 산살바도르로 이주하여 중앙아메리카 통일 국가 창설을 지지하는 ''La Unión''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다.[11] 1890년 6월 21일, 알바로 콘트레라스의 딸인 라파엘라 콘트레라스와 결혼했으나, 다음 날 카를로스 에제타 장군의 쿠데타가 발생했다.[11]150px, 다리오가 그의 송시인 ''오다 아 미트레''를 헌정한 인물.]]
그는 새 대통령의 직책 제안에도 불구하고 엘살바도르를 떠나 과테말라로 이주했다.[11] 과테말라 대통령 마누엘 리산드로 바리야스는 엘살바도르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리오는 ''El Imparcial''에 에제타를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11] 1890년 12월, ''El Correo de la Tarde'' 편집을 맡았고, 그해에 그의 책 ''Azul...''의 두 번째 판이 출판되어 문학적 명성을 얻었다.[11] 1891년 1월, 그의 아내와 재회하여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3개월 후 ''El Correo de la Tarde''는 폐간되었다.[11] 코스타리카로 이주하여 산호세에 정착했으나, 빚에 시달렸고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11] 1891년 11월 12일, 그의 첫째 아들이 태어났다.[11]
1892년, 그는 가족을 떠나 과테말라와 니카라과로 여행을 떠났고, 니카라과 정부는 그를 마드리드로 파견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임명했다.[11]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아바나에 들러 여러 예술가들을 만났고, 1892년 8월 14일 산탄데르에 하선하여 마드리드로 갔다.[11] 그는 시인, 소설가, 학자, 정치인 등 여러 저명한 인사들과 교류했다.[11] 11월에 니카라과로 돌아왔는데, 아내가 1893년 1월 23일에 사망했다.[11]
1893년 초, 마나과에 머물며 로사리오 무리요와 관계를 갱신했고, 그녀의 가족은 다리오에게 그녀와 결혼하도록 강요했다. 다리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식인 사회에서 환영을 받았고, ''라 나시온'' 외에도 여러 신문에 기고했다.[11] 콜롬비아 영사직은 명예직이었고,[11] 아르헨티나에서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하며 과도한 음주로 치료를 받기도 했다.[11] 바르톨로메 미트레, 페데리코 감보아, 리카르도 하이메스 프레이레 등과 교류했다.[11]
1895년 5월 3일,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고, 10월에 콜롬비아 정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영사관을 폐지했다.[11] 다리오는 카를로스 카를레스의 비서로 일자리를 얻었고, 189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로스 라로스''와 ''프로사스 프로파나스 이 오트라스 포에마스''를 출판했다.[11] 그의 작품은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1898년 스페인의 재앙 이후 ''라 나시온''의 특파원으로 스페인에 파견되었다.[11] 그는 호세 엔리케 로도보다 2년 앞서 쿠바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에서 아리엘과 칼리반 사이의 대립을 만들어냈다.[12] 1898년 12월 3일, 유럽으로 떠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11]
2. 4. 파리와 스페인에서의 만년
1892년, 다리오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을 코스타리카에 남겨두고 과테말라와 니카라과로 떠났다. 니카라과 정부는 그를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리는 마드리드 파견 대표단원으로 임명했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아바나에서 훌리안 델 카살 등 여러 예술가들을 만났고, 산탄데르를 거쳐 마드리드로 이동했다. 마드리드에서 가스파르 누녜스 데 아르세, 호세 조릴라 등 문인들과 교류했으며, 에밀리아 파르도 바잔 등 저명한 인물들과도 만났다. 11월에 니카라과로 돌아온 그는 아내의 병환 소식을 듣고, 1893년 1월 아내가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1893년 초, 다리오는 마나과에서 로사리오 무리요와 재회, 그녀의 가족의 강요로 결혼했다.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La Nación》에 스페인의 상황에 대한 연대기를 기고, 이는 1901년 《현대 스페인》(España Contemporánea)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스페인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깊은 애정과 회복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다. 후안 라몬 히메네스, 라몬 마리아 델 바예 인클란 등 젊은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스페인 왕립 학술원을 포함, 기존의 저명한 작가들에게 완전히 받아들여 지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모더니즘 운동을 옹호했다.
1899년, 다리오는 마드리드에서 프란시스카 산체스 델 포조를 만나 인생의 동반자로 삼았다. 1900년, 《La Nación》의 의뢰로 파리 만국 박람회를 취재, 이 내용은 《순례》(Peregrinaciones)로 출간되었다. 20세기 초 파리에서 생활하며 1901년 《세속적인 산문집》(Prosas profanas)의 두 번째 판을 출판했다. 프란시스카와 딸을 낳았으나, 딸은 곧 천연두로 사망했다. 1903년 니카라과 영사로 임명되었고, 영국, 벨기에 등 유럽을 여행했다. 1905년, 온두라스와의 영토 분쟁 해결 임무를 위해 스페인으로 갔고, 같은 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명과 희망의 노래, 백조와 다른 시》(Cantos de vida y esperanza, los cisnes y otros poemas)를 출판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A 루스벨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위협에 맞서 히스패닉 정체성을 찬양하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헌정되었다.
1906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제3차 범아메리카 회의에 참석, "독수리의 경례"(Salutación del águila)를 통해 미국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그는 로사리오 무리요와 이혼을 결심, 유럽으로 돌아가 프란시스카와 재회, 마요르카 섬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미완성 소설 《황금의 섬》(La Isla de Oro)을 집필했다. 그러나 로사리오 무리요와의 이혼 문제는 순탄치 않았고, 알코올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10년, 다리오는 멕시코 독립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나,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14] 다리오는 멕시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14] 멕시코 혁명의 전조를 감지했다.[15] 이후 아바나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파리로 돌아갔다.[14] 1912년, 잡지 ''문디알''과 ''엘레간시아스''를 편집하며 라틴 아메리카를 순회했고, 자서전 ''라 비다 데 루벤 다리오 에스크리타 포르 엘 미스모''를 집필했다. 1913년 마요르카에서 소설 ''엘 오로 데 마요르카''를 썼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14년, 그의 마지막 주요 시집인 ''칸토 아 라 아르헨티나 이 오트로스 포에마스''를 출판했다.
시인, 특파원 외에도 신대륙 발견 400주년 대표, 범미 회의 대표, 라 플라타 주재 니카라과 영사 등 수많은 공직을 맡아 조국의 발전에 기여했다.[31]
2. 5. 니카라과 대사 및 외교관 활동
뉴욕과 파나마를 잠시 거친 후 니카라과에 도착한 다리오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혼 소송은 실패했고, 영사직에서 받기로 한 급여도 받지 못해 파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몇 달 후, 호세 산토스 젤라야의 니카라과 정부는 그를 마드리드 주재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했다.[13] 다리오는 제한된 예산으로 대표단의 모든 경비를 충당해야 했고, 니카라과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13] 그는 ''라 나시온''에서 받는 봉급과 잡지 ''아테네오''의 편집장인 마리아노 미겔 데 발의 도움으로 생활을 유지했다.[13] 마리아노 미겔 데 발은 경제 상황이 어려울 때 니카라과 대표단의 비서직을 무보수로 맡았고, 자신의 집을 니카라과 대표단의 외교 사무실로 제공했다.[13] 젤라야가 축출되자 다리오는 1909년 2월 25일 외교관 직에서 사임해야 했다.[13] 그는 젤라야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저서 ''니카라과 기행과 열대 간주곡''에서 그를 칭찬했고, ''미국과 니카라과의 혁명''을 공동 집필했다.[13] 이 작품에서 미국과 과테말라의 독재자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는 젤라야 정부 전복을 계획한 혐의를 받았다.[13] 대사 재임 중, 다리오와 그의 옛 친구 알레한드로 사와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사와의 경제적 지원 요청을 다리오가 거절했기 때문이다.[13] 그들 사이의 서신은 사와가 다리오가 ''라 나시온''에 게재한 여러 기사의 실제 저자였음을 시사한다.[13]다리오는 시인, 특파원 외에도 신대륙 발견 400주년 대표, 범미 회의 대표, 라 플라타 주재 니카라과 영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콜롬비아 총영사, 파리 주재 니카라과 영사, 니카라과-온두라스 국경 중재 대표단원, 주 스페인 니카라과 공사, 파리 주재 파라과이 총영사 등 수많은 공직을 맡아 조국의 발전과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31]
2. 6. 사망
다리오는 1916년 2월 6일, 49세의 나이로 레온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며칠 동안 진행되었으며, 그는 1973년 2월 13일에 조각가 호르헤 나바스 코르도네로가 만든 대리석 사자 아래, 도시의 대성당 내 성 바오로 동상 기단 근처, 성가대석(chancel) 아래에 안장되었다.
그는 마타갈파 주 메타파(현재의 시우다드 다리오/Ciudad Darío영어)에서 출생하여, 1867년 3월에는 레온에서 펠릭스 루벤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을 온두라스에서 보낸 후 레온으로 돌아와 숙모의 집에서 15세까지 생활하였으며, 이 집은 현재 루벤 다리오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다.[29]。
3세에 글을 깨우치고 스페인 고전 희극과 호러 소설을 낭독했으며, 13세에 소년 시인으로 중앙 아메리카에 이름을 알렸다.[30] 15세에 니카라과 대통령 비서를 맡았고 왕립 도서관에서 근무하였다. 19세에 출국한 이후 여러 신문과 잡지의 특파원 기자로 활동하며 시와 이야기를 창작했다.[30]
26세에 파리로 건너가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모더니즘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구축하고, 1907년, 40세에 개선 귀국했다.[31] 그는 시인, 특파원 외에도 여러 공직을 맡아 조국의 발전과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31]
3. 작품 세계
다리오(Darío)는 37가지 다른 운율 라인과 136가지 다른 연 형태로 글을 썼다.[16] 로베르토 곤살레스 에체바리아는 그를 스페인어 시의 현대 시대의 시작이라고 여긴다. "스페인어에는 루벤 다리오 이전과 이후의 시가 있다. ... 17세기 이후 이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 그는 16세기에 가르실라소가 카스티야어 시에 이탈리아 양식과 정신을 주입하여 영원히 변화시킨 것처럼, 파르나스주의와 상징주의의 미적 이상과 현대적 불안감을 통합함으로써 스페인어 시를 현대 시대로 이끌었다.[19] 다리오는 라틴 아메리카 시인 옥타비오 파스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가장 심오한 시적 혁명 중 하나를 이끌었는데, 그는 다리오의 시 선집 번역본에 서문을 썼다.
다리오(Darío)는 수많은 시, 산문, 단편 소설, 논평, 소설을 남겼으며, 리듬감과 다양한 운율이 특징이며, 프랑스어 억양이나 고어·예배 용어, 독자적인 조어 등을 다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푸른(Azul...)』
- 『세속적 송가(Prosas profanas)』
- 『생명과 희망의 노래, 백조들과 기타 시(Cantos de vida y esperanza, Los cisnes y otros poemas)』
- 『가을의 시, 인터메초 트로피칼, 기타 시(Cantos de otoño y otros poemas, Intermezzo tropical)』
- 『방랑의 노래(Cantos errantes)』
- 『아르헨티나에 바치는 노래(Canto a la Argentina)』
- 『마르가리타 데 바이레에게 바침(A Margarita Debayle)』
- 『개선 행진(Marcha triunfal)』
- 『생명과 희망의 노래(Canto de la vida y la esperanza)』
- 『늑대의 이유(El lobo)』
- 『마음 속의 운율(Ritmos de mi corazón)』
- 『귀향(El retorno)』
- 『파랑새(L'Oiseau bleu)』
- 『마브 여왕의 베일(El velo de la reina Mab)』
- 『부르주아의 왕(El rey burgués)』
- 『루비(Rubén)』
- 『꾸러미(El paquete)』
- 『벌새의 이야기(Cuentos de un colibrí)』
- 『요정(Las hadas)』
- 『꽃다발(Ramillete)』
- 『부활절의 이야기(Cuentos de Pascua)』
-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야기(Cuento de Nochebuena)』
3. 1.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로베르토 곤살레스 에체바리아는 루벤 다리오를 스페인어 시의 현대 시대의 시작이라고 평가하며, "스페인어에는 루벤 다리오 이전과 이후의 시가 있다"고 언급한다. 그는 17세기 이후 이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16세기에 가르실라소가 카스티야어 시에 이탈리아 양식과 정신을 주입하여 변화시킨 것처럼, 파르나스주의와 상징주의의 미적 이상과 현대적 불안감을 통합하여 스페인어 시를 현대 시대로 이끌었다.[19] 옥타비오 파스에 따르면, 다리오는 스페인에서 가장 심오한 시적 혁명 중 하나를 이끌었다.다리오의 시의 발전은 ''아술...''(1888), ''세속적인 산문과 기타 시''(1896), ''삶과 희망의 노래''(1905)와 같은 주요 작품들의 출판으로 특징지어진다. ''아술...'' 이전에는 ''서신과 시''(1885, 1888년에 ''초기 노트''로 출판), ''운율''(1887), ''가시나무''(1887) 등을 썼다. ''서신과 시''에서는 스페인 고전 작품에 대한 그의 읽기와 빅토르 위고의 영향이 나타난다. ''운율''은 고전적이며[20], 낭만주의적 어조를 띤다. ''가시나무''에서는 라몬 데 캄포아모르의 영향이 두드러진다.[21] ''운율''은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의 ''운율''을 모방하기 위한 공모전을 위해 쓰였으며, 베케르의 작품과 유사한 친밀한 어조와 표현 수단[22]을 사용한다.[23]
''아술...''(1888)은 다양한 운율을 가진 시와 산문 형식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부르주아에 대한 불만(왕 부르주아)과 같은 다리오의 특징적인 관심사를 보여준다. 1890년에 출판된 새 에디션에는 알렉산드린 구절의 소네트가 포함되었다. ''세속적인 산문과 기타 시''는 모더니즘의 전성기를 대표하며, 에로틱함과 난해한 주제("켄타우로스의 대화")를 다룬다. 1905년, 다리오는 ''삶과 희망의 노래''를 출판하여 친밀하고 성찰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루즈벨트에게"와 같은 시민 시는 ''방랑의 노래''(1907)와 ''아르헨티나에게 바치는 노래와 기타 시''(1914)에서 더욱 강조된다.
다리오는 수많은 시, 산문, 단편 소설, 논평, 소설을 남겼으며, 리듬감과 다양한 운율, 프랑스어 억양, 고어·예배 용어, 독자적인 조어 등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푸른(Azul...)』, 『세속적 송가(Prosas profanas)』, 『생명과 희망의 노래, 백조들과 기타 시(Cantos de vida y esperanza, Los cisnes y otros poemas)』, 『가을의 시, 인터메초 트로피칼, 기타 시(Cantos de otoño y otros poemas, Intermezzo tropical)』, 『방랑의 노래(Cantos errantes)』, 『아르헨티나에 바치는 노래(Canto a la Argentina)』, 『마르가리타 데 바이레에게 바침(A Margarita Debayle)』, 『개선 행진(Marcha triunfal)』, 『생명과 희망의 노래(Canto de la vida y la esperanza)』, 『늑대의 이유(El lobo)』, 『마음 속의 운율(Ritmos de mi corazón)』, 『귀향(El retorno)』, 『파랑새(L'Oiseau bleu)』, 『마브 여왕의 베일(El velo de la reina Mab)』, 『부르주아의 왕(El rey burgués)』, 『루비(Rubén)』, 『꾸러미(El paquete)』, 『벌새의 이야기(Cuentos de un colibrí)』, 『요정(Las hadas)』, 『꽃다발(Ramillete)』, 『부활절의 이야기(Cuentos de Pascua)』,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야기(Cuento de Nochebuena)』 등이 있다.
3. 2. 주요 작품
다리오는 37가지 다른 운율 라인과 136가지 다른 연 형태로 글을 썼다.[16] 다리오의 시 발전은 학자들이 주요 작품으로 인정한 책들의 출판으로 특징지어진다. ''아술...''(1888) 이전에는 ''서신과 시''(1885, 1888년에 ''초기 노트''라는 제목으로 출판), ''운율''(1887), ''가시나무''(1887) 등을 썼다. ''서신과 시''에서는 스페인 고전 작품과 빅토르 위고의 영향을 보였고, ''운율''은 고전적이며[20] 낭만주의적 어조를 띈다. ''가시나무''에서는 라몬 데 캄포아모르의 영향이, ''운율''에서는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의 ''운율''을 모방한 것이 드러난다.[21][22][23]''아술...''(1888)은 산문 형식의 이야기와 시를 담고 있으며, 부르주아에 대한 불만 등 다리오의 특징적인 관심사를 보여준다. 1890년 판에는 알렉산드린 구절의 소네트가 추가되었다. ''세속적인 산문과 기타 시''(1896)는 모더니즘의 전성기를 보여주며, 에로틱함과 난해한 주제를 다룬다. 1905년 출간된 ''삶과 희망의 노래''는 친밀하고 성찰적인 경향을 보이며, 루즈벨트에게와 같이 시민 시도 등장한다. 이는 ''방랑의 노래''(1907)와 ''아르헨티나에게 바치는 노래와 기타 시''(1914)에서 더욱 강조된다.
다리오는 시, 산문, 단편 소설, 논평, 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리듬감과 다양한 운율, 프랑스어 억양, 고어·예배 용어, 독자적인 조어 등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푸른(Azul...)』, 『세속적 송가(Prosas profanas)』, 『생명과 희망의 노래, 백조들과 기타 시(Cantos de vida y esperanza, Los cisnes y otros poemas)』, 『가을의 시, 인터메초 트로피칼, 기타 시(Cantos de otoño y otros poemas, Intermezzo tropical)』, 『방랑의 노래(Cantos errantes)』, 『아르헨티나에 바치는 노래(Canto a la Argentina)』, 『마르가리타 데 바이레에게 바침(A Margarita Debayle)』, 『개선 행진(Marcha triunfal)』, 『생명과 희망의 노래(Canto de la vida y la esperanza)』, 『늑대의 이유(El lobo)』, 『마음 속의 운율(Ritmos de mi corazón)』, 『귀향(El retorno)』, 『파랑새(L'Oiseau bleu)』, 『마브 여왕의 베일(El velo de la reina Mab)』, 『부르주아의 왕(El rey burgués)』, 『루비(Rubén)』, 『꾸러미(El paquete)』, 『벌새의 이야기(Cuentos de un colibrí)』, 『요정(Las hadas)』, 『꽃다발(Ramillete)』, 『부활절의 이야기(Cuentos de Pascua)』,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야기(Cuento de Nochebuena)』 등이 있다.
3. 3. 영향
프랑스 시는 루벤 다리오의 시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자들, 특히 빅토르 위고의 영향을 받았으며, 파르나스주의자들인 테오필 고티에, 카튀르 멘데스, 호세 마리아 데 에레디아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7] 쿠바의 국민 영웅이자 작가인 호세 마르티와 상징주의자들, 특히 폴 베를렌 또한 다리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7] 다리오는 자신의 시적 궤적을 요약하며 위고에게서는 강인함을, 베를렌에게서는 모호함을 얻었다고 스스로 밝혔다.[17]다리오는 "Prosas Profanas"(1896)의 "Palabras Liminares"에서 자신의 문학 작품 발전에 프랑스 문화가 중요했음을 드러냈다.[18] 그는 세르반테스, 로페 데 베가 등 스페인 작가들을 언급하면서도, 셰익스피어, 단테, 위고, 베를렌을 언급하며 자신의 아내는 고향 출신이지만, 애인은 파리 출신이라고 말했다.[18]
"Los raros"는 다리오가 존경했던 작가와 지식인들을 소개하는 책으로, 에드거 앨런 포, 빌리에 드 릴 아담, 레옹 블로이, 폴 베를렌, 로트레아몽, 에우제니우 드 카스트루, 호세 마르티 등이 포함되어 프랑스 문화의 지배적인 영향을 보여준다. 다리오는 ''"모더니즘은 훌륭한 프랑스 시와 산문을 통해 통과된 스페인 시와 산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초기에는 누녜스 데 아르세와 캄포아모르의 영향을 받았고, 베케르를 존경했다. 스페인 주제는 "Prosas profanas"와 1899년 스페인 여행 이후 그의 작품에 나타나며, 98 세대와 공유하는 동시대 스페인의 쇠퇴에 대한 관심사를 반영하여 과거의 인물과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등 미국 작가들에게도 존경심을 표했다.
다리오는 수많은 시, 산문, 단편 소설, 논평, 소설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리듬감과 다양한 운율이 특징이며, 프랑스어 억양이나 고어·예배 용어, 독자적인 조어 등을 다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푸른(Azul...)』, 『세속적 송가(Prosas profanas)』, 『생명과 희망의 노래, 백조들과 기타 시(Cantos de vida y esperanza, Los cisnes y otros poemas)』 등이 있다.
3. 4. 정치적, 사회적 관점
루벤 다리오는 수많은 시, 산문, 단편 소설, 논평, 소설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리듬감과 다양한 운율이 특징이다. 프랑스어 억양이나 고어·예배 용어, 독자적인 조어 등을 다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푸른(Azul...)』, 『세속적 송가(Prosas profanas)』, 『생명과 희망의 노래, 백조들과 기타 시(Cantos de vida y esperanza, Los cisnes y otros poemas)』, 『가을의 시, 인터메초 트로피칼, 기타 시(Cantos de otoño y otros poemas, Intermezzo tropical)』, 『방랑의 노래(Cantos errantes)』, 『아르헨티나에 바치는 노래(Canto a la Argentina)』, 『마르가리타 데 바이레에게 바침(A Margarita Debayle)』, 『개선 행진(Marcha triunfal)』, 『생명과 희망의 노래(Canto de la vida y la esperanza)』, 『늑대의 이유(El lobo)』, 『마음 속의 운율(Ritmos de mi corazón)』, 『귀향(El retorno)』, 『파랑새(L'Oiseau bleu)』, 『마브 여왕의 베일(El velo de la reina Mab)』, 『부르주아의 왕(El rey burgués)』, 『루비(Rubén)』, 『꾸러미(El paquete)』, 『벌새의 이야기(Cuentos de un colibrí)』, 『요정(Las hadas)』, 『꽃다발(Ramillete)』, 『부활절의 이야기(Cuentos de Pascua)』,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야기(Cuento de Nochebuena)』 등이 있다.4. 유산
라몬 마리아 델 바예-인클란의 1920년 소설 ''보헤미안의 불빛''에 루벤 다리오가 등장한다. 다리오의 1867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니카라과 정부는 50 코르도바 금메달을 주조하고 우표 세트를 발행했다. 기념 세트는 8개의 항공 우편 우표(20 센타보 묘사)와 2개의 기념 시트로 구성된다.[24]
니카라과 국립 도서관 루벤 다리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고국인 니카라과에는 루벤 다리오 거리와 루벤 다리오 박물관이 있으며, 그의 얼굴이 조각상, 그림, 복권에 등장한다.[24]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루벤 다리오 광장과 루벤 다리오 지하철역이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제너럴 우르키자 철도에 루벤 다리오 기차역이 있다. 볼리비아 코차밤바 동쪽에는 거대한 콩코드 그리스도상 바로 아래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루벤 다리오 가(Ruben Dario avenue)가 있다.
지안니나 브라스키의 스페인어-영어를 혼용한 소설 ''요요 보잉!''(1998)에는 루벤 다리오의 천재성과 케베도, 공고라, 파블로 네루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등 다른 스페인어 시인들의 천재성을 비교하는 논쟁이 등장한다.[25] 2013년 1월 18일, 구글 두들[26]은 루벤 다리오의 146번째 생일을 기념했다.[27]
5. 외부 링크
참조
[1]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Darío
2019-07-23
[2]
Merriam-Webster
Darío
2019-07-23
[3]
서적
Autobiografía. Oro de Mallorca
Mondadori
1990
[4]
문서
[5]
서적
Rubén Darío
Historia 16 Quórum
1987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웹사이트
Cronología
http://www.dariana.c[...]
2016-07-20
[10]
웹사이트
Dariana
http://www.dariana.c[...]
2016-07-20
[11]
문서
[12]
간행물
Calibán, icono del 98. A propósito de un artículo de Rubén Darío
Revista Iberoamericana
1998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뉴스
The Master of Modernismo
https://www.thenatio[...]
2006-01-25
[17]
문서
[18]
문서
[19]
뉴스
The Master of Modernismo
http://www.thenation[...]
The Nation
2006-01-25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웹사이트
Los Alamos Daily Post
http://www.ladailypo[...]
2015-03
[25]
서적
Yo-Yo Boing!, Introduction by Doris Sommer, Harvard University
Latin American Literary Review Press
1998
[26]
웹사이트
Rubén Darío's 146th Birthday
https://doodles.goog[...]
2013-01-18
[27]
웹사이트
18 January: Remembering Rubén Darío on Birthday
https://observervoic[...]
2023-01-17
[28]
학술
Rubén Darío and the romantic search for unity: the modernist recourse to esoteric tradition
http://discoverarchi[...]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3-01-01
[29]
서적
地球の歩き方・中米
ダイヤモンド社
[30]
서적
エルサルバドル・ホンジュラス・ニカラグアを知るための45章
明石書店
[31]
서적
エルサルバドル・ホンジュラス・ニカラグアを知るための45章
明石書店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