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 갈레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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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지 갈레아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아나키스트로, 법학을 공부하며 아나키즘에 입문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폭력적인 직접행동을 통한 국가와 자본주의 전복을 주장하며, 반전 운동을 주도했으나 미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와서도 파시스트 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며, 1931년 사망했다. 그의 사상은 갈레아니스트 운동으로 이어져 1919년 미국 아나키스트 폭탄 테러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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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갈레아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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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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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정보 없음) |
출생일 | 1861년 8월 12일 |
출생지 | 베르첼리, 피에몬테주, 이탈리아 왕국 |
사망일 | 1931년 11월 4일 (70세) |
사망지 | , 아울라, 토스카나주, 이탈리아 왕국 |
배우자 | 마리아 갈레아니 |
자녀 | 4명 |
사상 및 활동 | |
사상 | 봉기적 아나키즘 |
주요 작품 | 크로나카 소브레시바 라 살루테 에 인 보이! Aneliti e Singulti: Medaglioni The End of Anarchism? |
2. 초기 생애와 사상 형성
루이지 갈레아니는 이탈리아 베르첼리에서 태어나 토리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접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한 그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1880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에서 প্রায় 20년간 생활하면서 스위스에서 엘리제 르클뤼와 교류하며 그의 저술 작업을 돕기도 하고, 1887년에는 헤이마켓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제네바 대학교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스위스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에서도 추방되었다.[4]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음모 혐의로 5년간 복역했고, 1894년 시칠리아의 판텔레리아 섬으로 유형을 갔다.[4] 그곳에서 마리아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으나,[5][6] 1900년 탈출하여 이집트를 거쳐 1901년 런던을 통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2. 1. 이탈리아에서의 청년기
루이지 갈레아니는 1861년 8월 12일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베르첼리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4] 토리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항하는 아나키스트 선전을 하기 위해 법조인의 길을 포기했다.[4] 웅변과 작문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곧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이끄는 선구자가 되었다.[4] 피에트로 고리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자를 얻으며, 투쟁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이끌었다.[4]1880년대 중반, 갈레아니는 피에몬테 아나키스트 운동을 노동 운동으로 재편하고 이탈리아 노동자당(POI)과 화해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4] 1887년 토리노에서 ''가제타 오페라이아'' 신문을 창간하고, 베르첼리에 여러 노동자 단체를 결성했으며, 비엘라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혁명 선전을 배포했다.[4] 1888년에는 피에몬테 전역에서 강연하고, 토리노와 베르첼리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주도하여 아나키스트 운동과 POI에 대한 지지를 늘렸다.[4]
갈레아니는 POI를 아나키스트적으로 침투시켜 혁명적 사회주의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4] 개량주의자와 혁명가 간의 화해를 옹호했고, 그 결과 POI는 선거 참여를 지속하면서도 계급 투쟁을 지지하게 되었다.[4] 그러나 두 파벌은 결국 화해할 수 없었고 POI를 변혁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4]
1889년, 급진적인 활동으로 체포될 위협을 받자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갔다.[4] 그곳에서 프랑스 아나키스트 지리학자 엘리제 르클뤼와 함께 ''누벨 지오그라피 위니베르살''을 준비했고, 헤이마켓 순교자를 기리는 제네바 대학교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4]
1892년, 갈레아니는 제노바 노동자 회의에 아나키스트 대표로 참석했지만, 필리포 투라티가 이끄는 사회 민주주의 다수는 결국 아나키스트들이 운동에서 분리되도록 강요하였고, 새로운 이탈리아 사회당(PSI)을 설립했다.[4]
2. 2. 유럽에서의 활동
루이지 갈레아니는 토리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 선전을 위해 법조인의 길을 포기했다.[4] 1880년, 토리노 경찰에 수배되자 프랑스로 도피하여 প্রায় 20년간 생활했다.프랑스 체류 중, 갈레아니는 스위스에서 엘리제 르클뤼와 교류하며 그의 저서 ''누벨 지오그라피 위니베르살'' 작업을 도왔고, 1887년에는 헤이마켓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제네바 대학교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4] 이후 프랑스에서도 추방되었다.[4]
1887년, 갈레아니는 피에몬테 아나키스트 운동을 노동 운동으로 재편하고 이탈리아 노동자당(POI)과 화해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4] 토리노에 본부를 둔 신문 ''가제타 오페라이아''를 창간하고, 베르첼리에 여러 노동자 단체를 결성했으며, 비엘라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혁명 선전을 배포했다. 1888년에는 피에몬테 전역에서 강연 투어를 하고, 토리노와 베르첼리에서 파업을 주도하여 아나키스트 운동과 POI에 대한 지지를 늘렸다.[4]
1889년, 급진적인 활동으로 체포될 위협을 받자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갔다.[4] 그곳에서 엘리제 르클뤼와 함께 헤이마켓 사건 희생자들을 기리는 제네바 대학교에서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4] 제네바에서 회의로 가는 도중 스위스 당국에 체포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4]
1892년, 갈레아니는 피에트로 고리, 조반니 도마니코와 함께 제노바 노동자 회의에 아나키스트를 대표하여 참석했지만, 필리포 투라티가 이끄는 이탈리아 사회당(PSI) 설립을 막지 못했다.[4]
이탈리아로 돌아온 갈레아니는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5년간 감옥에서 복역했으며, 1894년에는 시칠리아의 판텔레리아 섬으로 유형을 갔다.[4] 판텔레리아에서 마리아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4명의 아이를 더 가졌다.[5][6] 1900년, 판텔레리아에서 탈출하여 이집트로 피신했으나, 이탈리아로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런던을 거쳐 1901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3. 미국 이민과 아나키스트 운동
40세의 나이로 미국에 도착한 루이지 갈레아니는 카리스마 있는 연설로 급진적인 아나키스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저지 주 패터슨에 정착한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출판물이었던 ''La Questione Sociale''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폭력적인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전파했으며, 스스로를 정부 파괴에 헌신하는 파괴적이고 혁명적인 선전가로 묘사했다.[7]
갈레아니는 폭력 혁명 원칙을 주장하는 데 매우 뛰어난 연설가였다. 그의 연설에 감명받은 많은 급진적인 아나키스트들이 '갈레아니스트(Galleanist)'라 불리며 그를 따랐다. 이들 중에는 사코와 반제티도 있었는데, 이들이 갈레아니스트이자 ''크로나카 소베르시바''의 구독자였다는 사실은 훗날 사법당국이 그들을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다.[1]
1902년 패터슨 실크 파업 당시, 갈레아니는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얼굴에 부상을 입었으며, 폭동 선동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갈레아니는 캐나다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체포되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7]
1906년, 경쟁 이탈리아 사회주의 신문인 ''Il Proletario''의 편집자가 갈레아니의 소재를 공개하자 그는 즉시 체포되어 패터슨으로 압송, 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배심원 평결 불능으로 풀려났다.[8] 이후 바레로 돌아가 다시 열정적인 연설과 기고 활동을 펼치며 이탈리아계 미국인 무정부주의 운동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1907년 말, 나폴리 사회주의자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메를리노가 개혁주의 노동조합주의를 옹호하며 무정부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갈레아니는 무정부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때쯤 그는 노동 운동에 환멸을 느껴 노동조합을 완전히 거부하고, 반조직적인 형태의 무정부주의를 채택했다. 이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무정부주의 운동 내에서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그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과의 협력 문제로 무정부 생디칼리스트 카를로 트레스카와 공개적으로 결별하여, 이탈리아계 미국인 무정부주의 운동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갈레아니는 갈레아니스트(Galleanisti)로 알려진, 많은 전투적이고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들은 모든 공식적인 조직을 거부하고 현저한 극단주의 경향을 보였다. 이 제자들에는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포함되었다. ''갈레아니스트''는 갈레아니의 반조직 원칙에 따라 "자신을 선택하는 개인"으로 구성된 작고 긴밀한 세포를 형성했다. 그들은 공식적인 리더십을 거부했지만, 갈레아니 자신은 존경을 받았고 비공식적인 지도자의 지위를 받았다.
갈레아니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The Persistent Refusal of Paradise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3. 1. 미국으로의 이주
루이지 갈레아니는 1900년에 시칠리아의 판텔레리아에서 탈출하여 이집트로 향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이탈리아 추방자들의 공동체가 있었고, 그는 동료 아나키스트들과 몇 달간을 지냈다.[4] 이집트 당국에 의해 이탈리아로 인도될 위기에 처하자, 갈레아니는 배를 통해 런던으로 갔다. 1901년, 갈레아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5][6]3. 2. "크로나카 소베르시바" 발행

갈레아니는 버몬트 주 배리의 채석장에서 석공으로 살아가는 이탈리아 공동체에 이끌렸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배리의 사회주의, 아나키스트 공동체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갈레아니는 지역 아나키스트 회의에서 연설하고, 에세이와 논문을 쓰면서, 겁쟁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이후 미국에서 행위의 프로파간다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아나키스트 신문인 ''크로나카 소베르시바''(Cronaca Sovversiva, 파괴적인 연대기)의 창립자이자 편집자가 되었고, 이 신문은 배리에서 출판되어 전국으로 배송되었다.[2] 갈레아니는 미정부가 선동금지법(Sedition Act of 1918)을 통해 폐간할 때까지 15년 동안 이 신문을 출판했다.
''크로나카 소베르시바''는 각 호가 일반적으로 8페이지를 넘지 않았으며, 한때 가입자가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신문은 무신론, 자유연애, 현대 및 역사적 국가의 폭정 비판, 지나치게 수동적인 사회주의자 비판 등 여러 급진적인 주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 또한 사업가, "자본가의 스파이", 파업 방해자,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주소와 신상 정보 목록도 종종 포함되었다. 갈레아니의 이름으로 출판된 ''La Fine dell'anarchismo?''(The End of Anarchism?)와 같은 책들은 ''크로나카 소베르시바''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것이다.
''크로나카 소베르시바''에서 갈레아니는 직접행동과 국가에 대한 무장 저항 이론을 설명했다. 그는 뉴저지 주 패터슨의 아나키스트이자 움베르토 1세를 암살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직접행동의 또 다른 제자인 가에타노 브레시의 행동을 칭송했다. 갈레아니 사후 출판된 ''Aneliti e Singulti: Medaglioni''은 ''크로나카 소베르시바''에서 발췌한 그의 글 모음집이다.
''크로나카 소베르시바''는 ''La Salute è in voi!''(Health is in You!)라는 25센트짜리 소책자를 광고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가정을 위한 필수 아이템이라고 설명되었다. 1905년에 처음 출판된 이 소책자의 머리말에는 폭력을 옹호하면서도 파괴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을 제시하지 않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있었다.[1] ''Health Is In You!''는 명백한 폭탄 제조 매뉴얼이었으며, 니트로글리세린 제조를 위한 화학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갈레아니의 친구이자 폭발물 전문가였던 에토레 몰리나리(Ettore Molinari) 교수가 편집했다.[1] 이 매뉴얼은 뉴욕 폭탄처리반에 의해 정확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갈레아니가 몰리나리의 니트로글리세린 화학식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여 조기 폭발의 위험이 있었다. 갈레아니는 1908년 ''크로나카 소베르시바''를 통해 독자들에게 경고와 함께 수정된 텍스트를 제공했다.[1]
1914년, 갈레아니는 ''Faccia a Faccia col Nemico''(Face to Face with the Enemy)라는 책을 출판하여 아나키스트 암살자들을 순교자이자 혁명 영웅으로 묘사하며 찬양했다. 1917년에는 추종자들에게 징병을 피해 멕시코로 가서 다가올 혁명을 기다리라고 촉구했다.
갈레아니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The Persistent Refusal of Paradise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3. 3. 패터슨 실크 파업과 직접행동
1902년 패터슨 실크 파업 당시, 갈레아니는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얼굴에 부상을 입었으며, 폭동 선동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갈레아니는 캐나다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체포되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7]4. 갈레아니의 사상과 실천
루이지 갈레아니는 40세의 나이로 미국에 도착한 직후, 카리스마 있는 웅변가로서 급진적인 아나키스트 서클에서 주목받았다. 그는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1902년 패터슨에서 발생한 실크 노동자 파업에서 갈레아니는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촉구하며 연설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얼굴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폭동 선동 혐의로 기소되자 캐나다로 도피했으나, 곧 체포되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갈레아니는 버몬트주 배리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착하여 지역 아나키스트 모임을 이끌고, 에세이와 논문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어 아나키스트 신문 중 하나인 ''크로나카 소베르시바''(Cronaca Sovversiva, 파괴적인 연대기)를 창간하고 편집하며, 무신론, 자유연애, 국가 폭력 비판 등 다양한 급진적 주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2] 또한, "자본가의 스파이", "파업 방해자" 등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의 신상 정보를 공개하기도 했다. 갈레아니는 1918년 미 정부가 선동금지법(Sedition Act of 1918)을 통해 ''크로나카 소베르시바''를 폐간할 때까지 15년간 신문을 발행했다.
갈레아니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혁명 이후의 사회 조직 방식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말라테스타는 즉각적인 사회 조직 방안 마련을 주장한 반면, 갈레아니는 미래 세대가 지배 논리에서 벗어나 재건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국가를 제거하기 위한 폭력적인 반란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9]
그의 사상은 독일의 개인주의자 막스 슈티르너의 폭동적 아나키즘과 러시아 공산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상호 부조를 결합한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였다. 그는 테러리즘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는데, 그가 말하는 "행동 선전"은 권위자 암살과 사유 재산 몰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레온 촐고즈의 윌리엄 매킨리 암살과 가에타노 브레시의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1세 암살을 모두 옹호한 것이 그 예이다.
갈레아니를 추종하는 반란적 아나키스트들이 벌인 일련의 연쇄 폭탄 공격 현장에서는, 권력에 대한 저항과 계급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격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4. 1. 반(反)권위주의와 조직 거부
루이지 갈레아니는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항하는 아나키스트 선전을 하기 위해 법조인의 길을 포기했다.[1] 그는 혁명적 자발성, 자율성, 다양성, 자기 결정, 직접 행동의 원칙을 옹호했으며,[2] 행동 선전을 통해 국가와 자본주의를 폭력적으로 전복할 것을 주장했다.[3]그는 아나키스트 연맹과 노동 조합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공식적인 조직을 거부했으며,[4] 노동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 운동이 본질적으로 개량주의적이며 부패에 취약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5] 그는 개량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회 변화는 폭력적인 제도 공격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를 통해 대중적인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6]
그에 따르면,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인도, 정부도, 법도, 어떤 강압적인 통제도 없는 사회, 상호 합의를 바탕으로 기능하며 각 구성원이 절대적인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7]
4. 2. 직접행동과 폭력 혁명론
그는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폭력적인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널리 알리고자 했으며, 스스로를 정부를 파괴하는 데 헌신하는 파괴적이고 혁명적인 선전가로 묘사하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7] 갈레아니는 혁명적 폭력의 원칙을 호소하는 데 매우 재능 있는 연설가였다. 그의 동료는 "네가 갈레아니가 하는 말을 들었으니, 처음 마주친 경찰을 쏠 준비가 됐다는 거겠지."라고 말하기도 했다.[8]갈레아니는 직접행동과 국가에 대한 무장 저항 이론을 설명했다. 그는 뉴저지주 패터슨의 아나키스트이자 움베르토 1세를 암살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가에타노 브레시의 행동을 칭송했다.
이후 그의 신문 '크로나카 소베르시바'는 La Salute è in voi! (Health is in You!)라는 25센트짜리 소책자 광고를 게재했는데,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 가정을 위한 필수 아이템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1905년에 처음 출판된 이 소책자의 머리말에는 파괴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을 제시하지 않고 폭력을 옹호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있었다.[1] Health Is In You!는 명백한 폭탄 제조 메뉴얼이었으며, 니트로글리세린 제조를 위한 화학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갈레아니의 친구이자 폭발물 전문가였던 에토레 몰리나리(Ettore Molinari) 교수가 편집했다.[1] 이 메뉴얼은 뉴욕 폭탄처리반에 의해 정확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갈레아니가 몰리나리의 니트로글리세린 화학식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여 조기 폭발하는 문제가 있었다. 갈레아니는 1908년 '크로나카 소베르시바'를 통해 독자들에게 경고와 함께 수정된 텍스트를 제공했다.[1]
1914년, 갈레아니는 Faccia a Faccia col Nemico ("Face to Face with the Enemy")라는 책을 출판하여 아나키스트 암살자들을 순교자이자 혁명 영웅으로 묘사하며 찬양했다.
갈레아니는 비슷한 성향의 전투적인 아나키스트인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갈레아니를 추종하는 반란적 아나키스트들이 일으킨 일련의 연쇄 폭탄 공격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기도 했다.
갈레아니의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개념은 독일의 개인주의자 막스 슈티르너가 설명한 폭동적 아나키즘과 러시아 공산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옹호한 상호 부조를 결합한 것이었다. 그는 혁명적 자발성, 자율성, 다양성, 자기 결정 및 직접 행동의 원칙을 옹호했으며, 행동 선전을 통해 국가와 자본주의를 폭력적으로 전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아나키스트 연맹과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공식적인 조직을 거부했으며, 노동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노동 운동이 본질적으로 개량주의적이며 부패에 취약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량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회 변화는 폭력적인 제도 공격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를 통해 대중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테러리즘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는데, 그가 말하는 "행동 선전"은 권위자 암살과 사유 재산 몰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갈레아니는 레온 촐고즈의 윌리엄 매킨리 암살과 가에타노 브레시의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1세 암살을 모두 옹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인도, 정부도, 법도, 어떤 강압적인 통제도 없는 사회, 상호 합의를 바탕으로 기능하며 각 구성원이 절대적인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가 옹호한 것과 같은 선취적 정치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국가와 자본주의가 전복되면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4. 3. 갈레아니스트
갈레아니는 많은 급진적인 아나키스트들을 끌어들였는데, 이들은 '갈레아니스트'(Galleanisti)로 불렸다. 이들 중에는 사코와 반제티와 같은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사코와 반제티가 갈레아니스트였고 아나키스트 신문인 ''크로나카 소베르시바''의 구독자였다는 사실은 이후 사법당국이 그들을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다.[1]갈레아니스트는 갈레아니의 반조직 원칙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개인"으로 구성된 작고 긴밀한 세포를 형성했다. 그들은 공식적인 리더십을 거부했지만, 갈레아니 자신은 존경을 받았고 비공식적인 지도자의 지위를 받았다.[9]
갈레아니의 추종자들은 1917년 징병을 피하기 위해 멕시코로 가서 다가올 혁명을 기다리라는 그의 촉구를 따랐다.
5. 반전 운동과 추방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갈레아니는 반전 운동을 이끌었고, 1917년 선택적 병역법이 통과되자 징집 거부를 촉구했다. 그의 반전 활동은 미국 정부의 탄압 대상이 되었고,[10] 결국 1919년 6월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10]
이탈리아로 돌아온 갈레아니는 ''Cronaca Sovversiva'' 출판을 재개하려 했으나, 이탈리아 당국에 의해 즉시 중단되었다. 로마 진군 이후 1922년,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14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에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의 논쟁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저서 ''아나키즘의 종말?''(1925)을 출판했다. 1926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모욕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리파리와 메시나로 추방되었다. 1930년 건강 악화로 Caprigliolait로 은퇴하여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다 1931년 11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5. 1. 제1차 세계 대전 반대 운동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갈레아니는 반전 운동의 선두 주자가 되었으며, 아나키스트 운동을 "전쟁 반대, 평화 반대, 사회 혁명을 위하여!"라고 선언했다. 1917년 선택적 병역법이 통과되자 그는 추종자들에게 징집을 거부하고 숨으라고 촉구했으며, 자신을 포함한 많은 동료들은 매사추세츠주 토턴 근처 숲속의 오두막으로 이주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일부 갈레아니스트들은 멕시코로 탈출했는데, 그들은 멕시코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멕시코 혁명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레아니는 멕시코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멕시코 자체에서의 아나키스트 혁명의 가능성을 거부했다. 그는 멕시코 인구를 "관심이 없는" 인종 집단으로 특징지었다.5. 2. 미국 정부의 탄압과 추방
갈레아니의 반전 활동은 미국 정부의 정치적 탄압 대상이 되었다.[10] 1917년 6월 17일, 연방 수사국 요원들은 매사추세츠주 린에 있는 ''Cronaca Sovversiva'' 사무실을 급습하여[11] 갈레아니를 체포하고 신문을 폐간했다.[12] 공모 혐의로 기소된 그는 8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1919년 6월 24일, 미국에 가족을 남겨두고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10]6. 이탈리아 귀국과 말년
갈레아니는 1919년 6월, 미국 정부에 의해 추종자 8명과 함께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이는 갈레아니스트들의 연쇄 폭탄 공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정부에 대한 폭력적인 봉기를 주장하는 외국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10]
6. 1. 이탈리아에서의 활동과 탄압
갈레아니는 미국에서 추방된 후 이탈리아에서도 '크로나카 소베르시바'를 계속 출판했다.[10]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뒤, 갈레아니는 선동 혐의로 기소되어 14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0] 1926년에는 다시 체포되어 판텔레리아 섬, 리파리 섬, 메시나로 차례로 유배되었다.[11] 이후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와 카프리욜라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1931년 11월 4일 7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2]6. 2. 죽음
갈레아니는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시칠리아의 판텔레리아 섬으로 추방되었다.[1] 그곳에서 이미 어린 아들이 있던 마리아 랄로와 결혼했다. 루이지와 마리아 갈레아니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2]엘리제 레클뤼의 도움으로[3] 이탈리아에서 이집트로 탈출하여,[4] 다른 이탈리아 이민자들과 함께 1년 동안 머물렀다.[5] 이탈리아로 범죄인 인도될 위협을 받자,[6] 1901년 10월,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 암살 직후 미국으로 도망쳤다.[7]
7. 유산과 영향
루이지 갈레아니의 사후, 그의 폭력 혁명론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사상과 운동은 미국 아나키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추종자들인 갈레아니스트들은 1919년 미국 아나키스트 폭탄 테러와 월가 폭탄 테러 등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탄압을 불러왔다.
갈레아니의 사상은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와 국가 폭력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한국 사회에서 갈레아니의 사상은 경종을 울리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갈레아니의 극단적인 폭력 투쟁 방식은 한국 사회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민주주의와 평화적 시위 문화가 정착된 한국 사회에서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7. 1. 미국 아나키즘 운동에 끼친 영향

갈레아니의 미국 추방에 대한 보복으로, 갈레아니스트들은 테러 공격을 시작하여 1919년에 일련의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1919년 4월, 갈레아니스트들은 정부 관리들에게 약 30개의 폭탄을 보냈으나,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해체되었고, 단 하나만 폭발하여 표적의 하녀를 다치게 했다. 1919년 6월, 그들은 미국 북동부 전역에서 9개의 폭탄 테러를 조직적으로 감행했지만, 목표 중 누구도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았다. 폭탄 중 하나는 A. 미첼 팔머 법무장관의 집 밖에서 조기에 폭발하여 공격자를 죽였다. 교회에 설치된 또 다른 폭탄은 경찰에 의해 발견된 후 폭발하여 경찰관 10명과 구경꾼 1명이 사망했다. 팔머 습격 이후의 정치적 탄압에서,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를 포함한 많은 갈레아니스트들이 체포되었고, 증거 부족에도 불구하고 처형되었다. 보복으로, 갈레아니스트 마리오 부다는 1920년 월가 폭탄 테러를 감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33명이 사망했다.
1930년대, 루마니아계 미국인 아나키스트 마커스 그레이엄은 샌프란시스코에 기반을 둔 신문 ''Man!''으로 갈레아니스트 운동을 부활시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1939년에 신문은 폐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 파시즘이 패배할 무렵,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나키스트 운동은 대부분 쇠퇴했다. 갈레아니스트 ''L'Adunata dei Refrattari''는 1971년까지 간행되었고, 이후 권위주의 반대 정기 간행물 ''Fifth Estate''가 그 뒤를 이었다.
참조
[1]
서적
Sacco and Vanzetti: The Anarchist Backgrou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서적
Faccia a Faccia col Nemico
Gruppo Autonomo
[3]
간행물
Conflict Studies: Terrorism versus Liberal Democracy, the Problems of Response
Institute for the Study of Conflict, Current Affairs Research Services Centre
[4]
서적
Luigi Galleani: Quarant'anni di lotte rivoluzionarie, 1891–1931
Antistato
[5]
서적
Anarchist Voices: An Oral History of Anarchism in America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서적
Anarchist Voices
[7]
서적
La Fine Dell'Anarchismo?
University of Michigan
[8]
서적
Anarchist Voices: An Oral History of Anarchism in America
Princeton University Press
[9]
웹사이트
The Persistent Refusal of Paradise
https://theanarchist[...]
[10]
서적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1]
서적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2]
서적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3]
웹사이트
http://www.history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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