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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쿨루스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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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쿨루스의 정원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조성한 호화로운 정원이다. 루쿨루스는 동방 원정에서 페르시아 정원의 영향을 받아 투스쿨룸과 나폴리에 정원을 조성했으며, 수로를 통해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등 독창적인 조경 기법을 사용했다. 루쿨루스의 사치는 '루쿨루스 향연'이라는 속담을 낳았지만, 그는 도서관을 세우고 학자들을 후원하는 등 문화적 활동에도 기여했다. 정원은 예술 작품, 특히 고대 그리스 조각상으로 가득했으며, 현대에도 발굴 조사를 통해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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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쿨루스의 정원
루쿨루스의 정원
호르티 루쿨라니의 복원 모델
호르티 루쿨라니의 복원 모델
위치핀키우스 언덕, 로마
좌표41°54′39″N 12°28′57″E
면적약 7 헥타르 (17 에이커)
역사
건설기원전 60년경
건설자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주요 시기로마 공화정 말기, 로마 제국 초기
용도정원, 빌라
소유주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메살리나
로마 황제
특징
스타일호르티 (장식 정원)
내용도서관
미술관
조각품
영향다른 호르티 건설에 영향
기타 정보
다른 이름Horti Lucullani (라틴어)
중요성로마 최초의 호르티 중 하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유명

2. 역사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정원술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원 중 하나를 조성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아시아"로 불린아나톨리아사트라프 정원과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에서 페르시아 정원 양식을 직접 경험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는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군대를 이끌고 티그리스 강을 건너 왕들의 눈앞에서 아시아의 왕궁, 티그라노케르타, 카비라, 시노페, 니시비스를 점령하고 불태운 최초의 로마인이었으며, 파시스 강까지 북쪽, 메디아까지 동쪽을 점령하고 아라비아 왕들을 통해 남쪽과 홍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했다.[1]

루쿨루스는 프라스카티 근처 언덕에 있는 투스쿨룸과 나폴리에 시골 별장을 두고 호화로운 정원을 조성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 37장에서 "야만족의 전리품으로 루쿨루스가 나폴리에 지은 바다가 보이는 방과 갤러리"를 언급했고, 플리니우스는 루쿨루스가 나폴리 영지에서 산을 관통하여 해수가 그의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수로를 팠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페르시아 왕이 아토스 산의 지협을 관통하여 팠던 수로를 연상시켰다.[1]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로마의 크세르크세스 1세"라고 조롱했고,[2] 투베로는 그를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3]

플루타르코스는 당시 로마인들처럼 루쿨루스의 은퇴 후 활동을 로마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유희로 여겼다. 그는 루쿨루스의 호화로운 건물, 주랑 현관, 목욕탕, 그림과 조각에 대한 노력, 그리고 그가 전쟁에서 얻은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것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쿨루스 정원은 황제가 가진 가장 훌륭한 정원으로 여겨졌다.[4][5] 투베로는 루쿨루스가 나폴리에 건물을 짓고, 거대한 터널 위에 언덕을 매달고, 집 주변에 해자를 만들고 양어장을 만들었으며, 물가에 유흥 시설을 설치한 것을 보고 그를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 또한 투스쿨룸에 멋진 좌석, 벨베데레, 남성용 아파트의 넓은 발코니, 산책할 수 있는 주랑 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그가 여름에는 쾌적하지만 겨울에는 살 수 없는 집을 만든다고 비난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내가 계절에 따라 집을 바꾸지 않는 학과 황새보다 덜 신중하다고 생각하는군요."라고 대답했다.[6]

"루쿨루스 연회"라는 말이 격언이 되었지만, 루쿨루스는 단순한 과시적인 소비자는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공개하고, 직접 글을 쓰고 작가들을 후원했다. 그의 정원은 예술 작품, 특히 그리스 조각상, 진품과 "옛 거장"의 복제품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고대 조각상의 풍부한 고고학적 원천이 되었다. 예를 들어, 메디치가 피렌체로 옮긴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 조각상(현재는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준비하는 처형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됨)이 이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Forma Urbis Romae (란치아니)의 평면도

2. 1. 배경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으로, 동방 원정을 통해 페르시아 정원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아나톨리아사트라프 정원과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의 정원을 둘러보았다.[8]

루쿨루스는 은퇴 후 투스쿨룸 (오늘날 나폴리 인근 프라스카티)과 나폴리에 시골 별장을 짓고 호화로운 정원을 꾸몄다.[1] 플루타르코스플리니우스는 루쿨루스가 나폴리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방과 회랑을 짓고, 산에 수로를 뚫어 바닷물이 흘러들어오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1] 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아토스산 지협에 수로를 뚫은 것을 연상케 했다.[9]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로마의 크세르크세스"라고,[9] 투베로는 "토가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10]

이러한 루쿨루스의 사치는 '루쿨루스 향연'이라는 속담을 낳았지만, 그는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고 작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의 정원에는 고대 그리스 조각 등 예술작품이 가득했으며,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 조각상도 루쿨루스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2. 1. 1. 루쿨루스의 동방 원정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공화정 말기 로마의 장군으로 동방 원정의 선봉장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토로스 산맥을 넘어 티그리스강을 건너 아시아의 왕궁을 점령하고 불태운 최초의 로마인이었다고 기록한다.[8] 그는 북쪽으로 파시스강까지, 동쪽으로 메디아까지, 남쪽으로 홍해까지 아라비아 왕국들을 점령했다.[8]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로마의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고,[9] 투베로는 "토가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10] 이는 루쿨루스가 페르시아 지역의 왕궁과 정원을 점령하고 불태운 것에서 비롯된 별명으로, 당시 보수적인 로마인들이 루쿨루스의 동방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2. 1. 2. 페르시아 정원의 영향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공화정 말기 로마의 장군으로 동방 원정에 앞장섰다. 그는 아나톨리아사트라프 정원과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의 정원을 둘러보며 페르시아 정원 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는 토로스 산맥을 넘어 군대를 이끌고 티그리스강을 건너 아시아의 왕궁을 점령하고 불태운 최초의 로마인이었다. 북쪽으로 파시스강까지, 동쪽으로 메디아까지, 남쪽으로 홍해까지 아라비아 왕국들을 점령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했다.[8] 이는 루쿨루스가 정원을 조성할 때 채택한 화려한 양식이 페르시아 지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2. 정원 조성과 그 이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으로, 동방 원정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아나톨리아사트라프 정원과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의 정원을 둘러보며 페르시아 정원 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토로스 산맥을 넘어 티그리스강을 건너 아시아의 왕궁을 점령하고 불태운 최초의 로마인이었으며, 북쪽으로는 파시스강, 동쪽으로는 메디아, 남쪽으로는 홍해까지 세력을 뻗쳤다고 기록했다.[8] 이는 루쿨루스가 조성한 정원의 화려한 양식이 페르시아 지역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루쿨루스는 은퇴 후 투스쿨룸(오늘날 나폴리 인근 프라스카티)의 언덕에 시골 별장을 짓고 호화로운 정원을 꾸몄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야만인들의 전리품으로 나폴리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방과 회랑을 지었다"[9]고 기록했고, 플리니우스는 루쿨루스가 나폴리 사유지에 있던 산에 수로를 뚫어 바닷물이 흘러들어오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9] 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황제가 아토스산 지협에 수로를 뚫은 것을 연상시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로마의 크세르크세스 1세"라고 불렀고,[9] 투베로는 " 토가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10]

이러한 루쿨루스의 사치는 '루쿨루스 향연'이라는 속담을 남길 정도였지만, 그는 단순히 사치만 부린 것이 아니라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고, 직접 글을 쓰며 작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루쿨루스의 정원에는 예술작품, 특히 고대 그리스 조각, 옛 거장들의 원본과 복제품이 가득했으며, 오늘날 고대 로마 조각품 중에는 루쿨루스 별장에서 출토된 것도 적지 않다.

루쿨루스 정원에서 발견된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 조각상은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준비하는 처형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메디치가 피렌체로 옮겼다. 55년경에 제작된 모자이크는 금 샌드위치 유리 기술로 만들어진 테세라의 초기 사용 사례를 보여주며, 이는 비잔틴과 서양 모자이크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7]

2. 2. 1. 로마 정원 조성

기원전 60년, 루쿨루스는 수도 로마에 별장과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정원은 정원 가꾸는 기술(조원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원으로도 꼽힌다. 프론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정원의 위치는 아쿠아 비르고가 지하도관에서 나와 마르티우스 캄푸스를 가로지르는 아치구조물을 통과하는 지점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얻은 막대한 전리품 덕분에 정원은 광대한 규모로 지어졌다.[11]

2. 2. 2. 소유권 변동과 역사적 사건

기원전 63년 미트리다테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루쿨루스는 막대한 전리품을 바탕으로 광대한 규모의 정원을 조성하였다.[11] 루쿨루스 사후, 이 정원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의 소유가 되었다가 국유지로 편입되어 퀴리날레 언덕 인근의 호르티 살루스티아니와 연결되었다.[11] 발레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 메살리나에게 자결을 강요당했고, 메살리나 역시 이곳에서 살해되었다.[11]

2. 2. 3. 현대의 발굴 현황

헤르치아나 도서관 부지에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로마 공화정 시대 건물의 정면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은 별장의 한 부분으로 주랑현관을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그물 형태의 테세라 마감 장식과 건축물, 동상을 묘사한 모자이크 장식이 발견되었다.[11]

스파냐 광장에 있는 메디오방카 궁전 안뜰에서도 주차장 건설을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루쿨루스 별장의 옹벽 부분과 별장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는 빗물을 모으는 공간이 발견되었다.[12]

16세기에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딸인 펠리체 델라 로베레의 소유였다. 오늘날 빌라 보르게세의 일부분에 걸쳐 있는데, 서기 160년~165년경에는 포도밭이었던 구역이다.

3. 정원의 특징과 의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정원술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원 중 하나인 루쿨루스 정원을 조성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로마인들에게 "아시아"로 불린 곳)의 사트라프 정원과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에서 페르시아 정원 양식을 직접 경험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는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군대를 이끌고 티그리스 강을 건너 왕들의 눈앞에서 아시아의 왕궁, 티그라노케르타, 카비라, 시노페, 니시비스를 점령하고 불태운 최초의 로마인이었으며, 파시스 강까지 북쪽, 메디아까지 동쪽을 점령하고 아라비아 왕들을 통해 남쪽과 홍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했다.[1] 이러한 경험은 루쿨루스가 페르시아의 정원 양식을 로마에 도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루쿨루스는 나폴리 별장에서 바다에 거대한 말뚝을 박아 건설하여, 폼페이우스에게 "로마의 크세르크세스"라는 별명을 얻었고, 투베로는 그를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2][3]

"루쿨루스 연회"라는 말이 격언으로 굳어졌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던 루쿨루스는, 한편으로는 훌륭한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고 작가들을 후원하는 등 문화 예술 발전에 힘썼다. 그의 정원에는 예술 작품, 특히 그리스 조각상, 진품과 "옛 거장"의 복제품이 가득했으며, 고대 조각상의 풍부한 고고학적 원천이 되었다.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 조각상(현재는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준비하는 처형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됨)이 이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3. 1. 건축 및 조경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으로,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의 정원을 둘러보며 페르시아 정원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루쿨루스는 토로스 산맥을 넘어 티그리스강을 건너 아시아의 왕궁을 점령하고 불태운 최초의 로마인이었다. 그는 북쪽으로는 파시스강, 동쪽으로는 메디아, 남쪽으로는 홍해까지 진출하여, 정원을 조성할 때 페르시아 지역의 화려한 양식을 채택하였다.[8]

루쿨루스는 은퇴 후 투스쿨룸(오늘날 나폴리 인근 프라스카티)의 언덕에 별장을 짓고 호화로운 정원을 꾸몄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나폴리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방과 회랑을 지었다고 기록했고,[8] 플리니우스는 루쿨루스가 나폴리 사유지에 있던 산에 수로를 뚫어 바닷물이 흘러들어오게 만들었다고 전한다.[8] 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아토스산 지협에 수로를 뚫은 것을 연상시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로마의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고, 투베로는 "토가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9][10]

루쿨루스의 정원은 정원술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원 중 하나였다. 그는 아나톨리아 (로마인들에게 "아시아"로 불린 곳)의 사트라프 정원과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에서 페르시아 정원 양식을 직접 경험했다. 플루타르크는 "루쿨루스는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군대를 이끌고 티그리스 강을 건너 왕들의 눈앞에서 아시아의 왕궁, 티그라노케르타, 카비라, 시노페, 니시비스를 점령하고 불태운 최초의 로마인이었으며, 파시스 강까지 북쪽, 메디아까지 동쪽을 점령하고 아라비아 왕들을 통해 남쪽과 홍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했다.

루쿨루스는 나폴리 별장에서 바다에 거대한 말뚝을 박아 건설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조롱조로 루쿨루스에게 "로마의 크세르크세스"라는 별명을 붙였고, 투베로는 그를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2][3]

플루타르크는 루쿨루스의 이러한 활동을 단순한 유희로 여겼지만, 루쿨루스 정원은 황제가 가진 가장 훌륭한 정원으로 여겨질 정도로 발전했다.[4][5] 투베로는 루쿨루스가 나폴리에 거대한 터널 위에 언덕을 매달고, 집 주변에 해자를 만들고 양어장을 만들었으며, 물가에 유흥 시설을 설치한 것을 보고 그를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불렀다. 또한 투스쿨룸에는 멋진 좌석, 벨베데레, 남성용 아파트의 넓은 발코니, 산책할 수 있는 주랑 현관이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이를 보고 여름에는 쾌적하지만 겨울에는 살 수 없는 집이라고 비난했다. 루쿨루스는 "당신은 내가 계절에 따라 집을 바꾸지 않는 학과 황새보다 덜 신중하다고 생각하는군요."라고 대답했다.[6]

루쿨루스는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고, 작가들을 후원했으며, 그의 정원에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 등 예술 작품이 가득했다.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 조각상(현재는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준비하는 처형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됨)이 이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3. 2. 예술과 문화

"루쿨루스 연회"라는 말이 격언으로 굳어졌지만, 루쿨루스는 단순한 과시적인 소비자는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고, 직접 글을 쓰며 작가들을 후원했다. 그의 정원에는 예술 작품, 특히 그리스 조각상, 진품과 "옛 거장"의 복제품이 가득했으며, 고대 조각상의 풍부한 고고학적 원천이 되었다.

3. 2. 1. 예술 작품 수집과 전시

루쿨루스는 은퇴 후 학자들을 위해 도서관을 설립하고 작가들을 후원하는 등 문화 예술 발전에 힘썼다. 그의 정원에는 고대 그리스 조각의 원본과 복제품 등 예술 작품이 가득했다. 이 정원에서 발견된 조각상 중 하나는 메디치가 피렌체로 옮긴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이다. 이 조각상은 현재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준비하는 처형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4]

3. 2. 2. 학문 후원과 문화적 교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단순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만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인물이었다. 그는 훌륭한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였고, 직접 글을 쓰며 작가들을 지원하기도 했다.[4] 그의 정원에는 예술 작품, 특히 고대 그리스 조각의 원본과 복제품들이 가득했다.[4] 오늘날 고대 로마 조각품 중 상당수가 루쿨루스의 별장에서 출토된 것일 정도로, 그의 정원은 당대 예술의 보고(寶庫)였다. 예를 들어,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가져간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 조각상(현재는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준비하는 처형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도 이 정원에서 발견되었다.[4]

이처럼 루쿨루스의 정원은 단순한 사치의 공간을 넘어, 학문과 예술이 융성했던 문화적 교류의 중심지였다.

3. 3. 사회적 영향

루쿨루스의 정원은 로마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루쿨루스 연회'라는 속담은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플루타르크는 루쿨루스가 막대한 비용으로 그림과 조각을 수집하고, 전쟁에서 얻은 재물을 아낌없이 쓴 것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4] 루쿨루스 정원은 심지어 황제[5]의 정원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겨졌다.

투베로는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루쿨루스가 나폴리에 지은 건물, 즉 거대한 터널 위에 언덕을 매달고, 집 주변에 해자를 만들고 양어장을 건설한 것을 보고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라고 비난했다.[6] 이는 루쿨루스의 건축이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과시적인 면모를 닮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사치만 일삼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에게 개방하고, 직접 글을 쓰고 작가들을 후원했다. 그의 정원은 예술 작품, 특히 그리스 조각상과 그 복제품으로 가득했으며, 이는 후대에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가 되었다. 예를 들어 스키타이 칼 가는 사람 조각상(현재는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준비하는 처형자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이 이 정원에서 발견되어 메디치가 피렌체로 옮겼다.

참조

[1] 서적 Pliny the Elder, IX.171
[2] 서적 Plutarch, Lucullus .39
[3] 웹사이트 Velleius Paterculus, II.33 https://penelope.uch[...]
[4] 문서 AD 122, when Plutarch was writing
[5] 문서 Then Hadrian
[6] 웹사이트 Plutarch, Life of Lucullus, 39 https://penelope.uch[...]
[7] 웹사이트 the earliest known use of gold tesserae was in 55 AD, in the Gardens of Lucullus by the Spanish Steps in Rome http://www.mosaicmat[...] Conventi, 1-3
[8] 서적 Pliny the Elder, IX.171
[9] 서적 Plutarch, Lucullus .39
[10] 웹사이트 Velleius Paterculus, II.33 https://penelope.uch[...]
[11] 웹사이트 the earliest known use of gold tesserae was in 55 AD, in the Gardens of Lucullus by the Spanish Steps in Rome http://www.mosaicmat[...] Conventi, 1-3
[12] 논문 La Villa di Lucullo a Palazzo Mediobanca, Paola Virgili http://bollettin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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