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트 휠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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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뤼트 휠릿은 네덜란드의 은퇴한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며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휠릿은 HFC 할렘, 페예노르트, PSV 아인트호벤, AC 밀란, UC 삼프도리아, 첼시 FC 등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AC 밀란에서는 마르코 판 바스텐, 프랭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삼총사'를 이루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88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첼시 FC,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LA 갤럭시 등에서 감독을 역임했다.

뤼트 휠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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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뤼트 휠릿은 1962년 암스테르담에서 수리남인 아버지 헤오르허 휠릿(George Gullit네덜란드어)과 네덜란드인 어머니 리아 딜(Ria Dil네덜란드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헤오르허는 수리남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레프트백으로 뛰었던 축구 선수였고, 뤼트에게 축구 재능을 물려주었다. 뤼트는 로젠드바르스트라트(Rozendwarsstraat네덜란드어) 외곽에서 길거리 축구를 하며 축구 기술을 익혔다.

1970년, 뤼트는 ASV 메이르보이스(ASV Meerboys네덜란드어) 유소년팀에 입단했다. 10살에 요르단 지구에서 아우트베스트(Oud-West네덜란드어) 지구로 이사한 후, AFC DWS로 팀을 옮겨 그곳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만났다. 뤼트는 DWS에서 뛸 때부터 어머니의 성 '딜(Dil)' 대신 아버지의 성 '휠릿(Gullit)'을 사용했는데, 이는 '휠릿'이라는 이름이 축구 선수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구단 경력

1979년 HFC 할렘에서 데뷔하여 1981-82 시즌 팀을 리그 4위로 이끌며 UEFA컵 출전권을 획득했다. 1982년 페예노르트로 이적,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85-86 시즌부터 PSV 아인트호벤에서 활약하며 8년 만의 리그 제패에 공헌했고, 주로 리베로로 활동하면서도 2시즌 동안 46골을 기록했다.

유벤투스도 영입을 시도했지만, 1987년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어 약 1200(추정)의 이적료로 이탈리아세리에 AAC 밀란으로 이적했다. 마르코 판 바스텐, 프랭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네덜란드 트리오"로 불리며 AC 밀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적 첫 해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러나 1989-90 시즌부터 잦은 무릎 부상에 시달렸다.

1993-94 시즌 UC 삼프도리아로 이적하여 리그 3위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기여했다. 1994-95 시즌 중반 AC 밀란으로 복귀했으나, 시즌 종료 후 다시 UC 삼프도리아로 이적하였다.

1995-96 시즌 첼시 FC로 이적하여 처음에는 리베로로, 이후에는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1996-97 시즌부터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1997-98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1. HFC 하를럼

1978년, 휠릿은 배리 휴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HFC 하를럼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79년 8월 19일, MVV 마스트리흐트와의 경기에서 16세 11개월의 나이로 데뷔하며 당시 에레디비시 최연소 선수 기록을 세웠다.

1979-80 시즌에는 팀이 최하위로 강등되었지만, 1980-81 시즌 에이르스터 디비시에서 우승하며 에레디비시로 복귀했다. 휠릿은 이 시즌 에이르스터 디비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1-82 시즌에는 팀을 4위로 이끌며 1982-83년 UEFA컵 진출에 기여했다. 휠릿은 이 시즌 FC 위트레흐트를 상대로 4명의 수비수와 골키퍼를 제치고 넣은 골을 자신의 최고 골로 꼽았다. 휴스는 휠릿을 "네덜란드의 덩컨 에드워즈"라고 묘사했다.

3.2.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2년 페예노르트로 이적하여 요한 크라위프와 함께 1983-84 시즌 에레디비시와 KNVB컵에서 우승을 달성했다. 페예노르트에서 굴리트는 공격적인 미드필더로 변신하여 자신의 재능을 만개했다.

3.3. PSV 에인트호번

1985년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하여 68경기에서 46골을 기록했다. 1985-86, 1986-87 시즌 에레디비시 2연패를 이끌었다. PSV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며 유럽 빅 클럽들의 주목을 받았다. 페예노르트 지지자들은 그를 "늑대"라고 낙인찍고, 돈을 위해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했다고 비난했다.

3.4. AC 밀란

1987년, 뤼트 휠릿은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어 세계 최고 이적료인 약 1200(추정)에 세리에 AAC 밀란으로 이적했다. 8월 23일 코파 이탈리아 바리전에서 데뷔하여 골을 기록했고, 9월 13일 피사전에서 세리에 A 데뷔골을 넣었다. 유벤투스, 나폴리, 인터 밀란 등 우승 경쟁 팀과의 경기에서도 득점하며 오랫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던 밀란에 1987-88 시즌 리그 우승을 안겼다. 이적 첫 해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마르코 판 바스텐, 프랭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네덜란드 트리오"로 불리며 AC 밀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8-89 시즌, 챔피언스컵 결승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전에서 2골을 넣어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89-90 시즌 무릎 부상으로 토요타컵에 출전하지 못하는 등 1년간 치료와 재활에 전념했다. 이후 1992년까지 총 5차례 무릎 수술을 받으며 부상과 싸우면서 경기에 출전했다.

1990년 12월, 토요타컵 올림피아전에서 프랭크 레이카르트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3-0 승리에 기여했다. 1991-92 시즌 파비오 카펠로 감독 부임 후에는 주로 오른쪽 측면 하프로 기용되었다. 이 시즌에는 부상으로 26라운드부터 31라운드까지 결장했지만, 리그 무패 우승에 공헌했다.

1992-93 시즌에는 부상과 외국인 선수 제한 문제로 벤치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고, 챔피언스컵 결승 올림피크 마르세유전에서도 벤치에 머물렀다. 꾸준히 출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했고, 결국 AC 밀란을 떠나게 되었다.

3.5. UC 삼프도리아

1993-94 시즌 UC 삼프도리아로 자유 계약 이적했다. 에릭손 감독은 굴리트를 FW로 기용했다. 8월 29일 개막전 나폴리전에서 골을 넣으며 좋은 출발을 보였고, 옛 소속팀 AC 밀란과의 첫 대결(10월 31일)에서는 카타네츠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했을 뿐만 아니라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넣어 3-2 승리를 이끌었다. 리그에서 15골을 기록했고, 밀란과의 우승 경쟁 끝에 리그 우승은 놓쳤지만 리그 3위를 기록했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준결승 파르마전 2차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결승 안코나전에서는 프리킥으로 상대의 자책골을 유도했고 롬바르도의 득점을 어시스트하는 등 우승에 기여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다음 시즌 밀란으로 복귀했는데, 1994년 2월경 이미 밀란으로부터 복귀 제안을 받았을 정도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1994-95 시즌 도중 멜리와의 트레이드로 삼프도리아로 다시 이적하여 22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했지만, 전년도만큼의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3.6. 첼시 FC

1995-96 시즌, 첼시 FC로 이적하여 처음에는 리베로로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MF로 활동했다. 1995년 9월 16일 리그 6라운드 사우샘프턴전에서 이적 후 첫 골을 넣었고, FA컵 준결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도 골을 넣었지만 1-2로 패하며 우승을 놓쳤다. 시즌 중 팀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자 그 후임으로 현역 선수 신분으로 플레잉 코치에 취임했고, 이 시즌 처음으로 풀 시즌 DF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1996-97 시즌, 1996년 10월 26일 11라운드 토트넘전 득점이 현역 마지막 골이 되었다.

1997-98 시즌, 리그 6경기, 컵대회 1경기에 출전했고 마지막 리그 출전은 1998년 1월 17일 에버턴전 16분간의 출전이었으며, 1998년 1월 28일 리그컵 준결승 아스널전 1차전 출전이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 출전이었다.

4. 국가대표 경력

1981년 9월 1일, 19번째 생일에 뤼트 휠릿은 네덜란드 대표팀 소속으로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데뷔했으나, 네덜란드는 2-1로 패했다. 1982년 9월 22일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첫 골을 기록했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 아래 네덜란드는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휠릿은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소련에 패했지만, 이후 잉글랜드아일랜드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특히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3-1 승리를 거두며 마르코 판 바스텐의 3골 중 2골을 어시스트하며 맹활약했다. 함부르크에서 열린 준결승전에서 서독을 2-1로 꺾고, 결승전에서 다시 소련을 만나 휠릿의 헤딩 선제골과 판 바스텐의 발리슛으로 2-0 승리를 거두며 네덜란드는 첫 국제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휠릿은 주장으로서 이 영광의 순간을 함께했다.

1990년 FIFA 월드컵에서는 무릎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드리블과 슈팅을 선보이며 네덜란드의 2라운드 진출에 기여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서독과의 16강전에서 프랭크 레이카르트와 루디 펠러의 충돌 등 논란 속에 2-1로 패하며 탈락했다.

UEFA 유로 1992에서 휠릿은 개막전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러시아와 무승부, 독일을 3-1로 꺾는 등 선전했지만, 준결승에서 덴마크와 2-2 무승부 후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휠릿은 이 경기에서 레이카르트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다.

1994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휠릿은 딕 아드보카트 감독과의 불화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아드보카트 감독이 휠릿을 주 포지션이 아닌 오른쪽 미드필더로 기용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피터 판 보센과의 교체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후 대표팀 경기를 거부했지만, 1994년 5월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 출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월드컵 직전 훈련 캠프에서 다시 팀을 떠나며 국가대표 경력을 마감했다.

휠릿은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1981년부터 1994년까지 66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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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대회결과
FIFA 월드컵1990년 FIFA 월드컵16강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UEFA 유로 1988우승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UEFA 유로 19924강

5. 플레이 스타일

휠릿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세컨드 스트라이커는 물론, 양쪽 윙과 최전방, 심지어 수비형 스위퍼까지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그는 빠른 속도와 힘을 바탕으로 기술적인 부분까지 뛰어나,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키가 크고 힘이 좋아 공중볼 경합에 유리했고, 균형 감각, 기술, 드리블 능력도 뛰어났다.

1988년의 휠릿
1988년의 휠릿


휠릿은 지능적인 플레이와 창의성,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초반에는 이러한 능력으로 많은 골을 넣었고, 후반에는 플레이메이커로서 위협적인 기회를 만드는 데 능했다. 그는 정확한 프리킥을 구사하는 능력도 뛰어났고, 리더십과 끈기도 돋보였다.

조지 베스트는 휠릿에 대해 "모든 기술을 갖추고 있고, 공을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매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이 그를 마라도나보다 더 나은 선수로 만든다. 휠릿, 마라도나 둘 다 최고의 선수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핵심 자질인 균형을 갖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휠릿은 선수 생활 내내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이는 그의 체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6. 지도자 경력

휠릿은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토털 풋볼의 상징적인 선수였다.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특히 공격형 미드필더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큰 키와 힘, 뛰어난 점프력으로 공중볼에 강했고, 우아한 기술과 드리블 능력도 겸비했다. 또한 지능, 창의력, 시야를 바탕으로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플레이메이커 역할도 수행했다. 이러한 다재다능함 덕분에 그는 세계 축구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축구 선수로서의 능력 외에도 리더십과 투지가 뛰어났지만, 선수 생활 내내 잦은 부상으로 고생했다.

감독으로서는 1995-96 시즌 첼시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아 1996-97 시즌 잔루카 비알리, 잔프랑코 졸라, 로베르토 디 마테오 등을 영입하여 팀을 리그 6위와 FA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외국인 감독 최초의 FA컵 우승이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임되었다.

이후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뉴캐슬](1998-99, 리그 13위), 페예노르트(2004-05, 리그 4위), 로스앤젤레스 갤럭시(2007-08, 9개월 만에 사임), 테레크 그로즈니(2011, 13경기 3승 후 해임) 등에서 감독 생활을 이어갔지만, 첼시 시절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016년에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직을 두고 네덜란드 축구협회와 협상했으나, 선수단 변동 시 재협상 권리 등의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렬되었다.

6.1. 첼시 FC

1996년 여름 글렌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뤼트 휠릿은 첼시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네덜란드인 감독이었다. 휠릿은 1996-97 시즌 첼시를 리그 6위와 FA컵 우승으로 이끌며, 26년 만에 첼시에 주요 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그는 잉글랜드 주요 축구 대회에서 우승한 첫 번째 비(非)잉글랜드인이자 첫 번째 흑인 감독이 되었다.

6.2.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8년 8월 27일, 휠릿은 케니 댈글리시를 경질하고 후임 감독을 찾고 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뉴캐슬에서의 첫 시즌에 프리미어리그 13위를 차지하고 UEFA 컵위너스컵 1라운드에서 FK 파르티잔에 패배했지만, FA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휠릿은 구단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고참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롭 리주장직과 등번호를 박탈하고 앨런 시어러에게 주장직을, 키런 다이어에게 리가 달던 등번호 7번을 주었고 팀 동료들과의 합동 훈련을 금지시켰다. 그는 스튜어트 피어스, 존 반스와도 마찰을 빚었고 "타인 위어 더비가 밀라노 더비보다 열등하다."라고 말했다. 휠릿은 시어러와 덩컨 퍼거슨과도 갈등을 빚었고, 1999년 8월 25일 FA 프리미어리그 5라운드이자 선덜랜드 AFC와의 타인 위어 더비에서 시어러와 퍼거슨을 선발에 기용하지 않고 벤치에 앉혔다. 타인 위어 더비에서 뉴캐슬은 선덜랜드에게 2대 1로 패배했고, 휠릿은 3일 뒤인 1999년 8월 28일 뉴캐슬의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휠릿이 사임한 후 스티브 클라크보비 롭슨 경이 뉴캐슬의 감독직을 맡을 때까지 뉴캐슬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휠릿은 2006년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시어러를 선발에 기용하지 않았던 선택이 옳았다고 말했지만, 시어러는 2021년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휠릿이 자신을 뉴캐슬에서 쫓아내려 했었으며 만약 8월 25일 타인 위어 더비에서 뉴캐슬이 승리했다면 휠릿에 의해 뉴캐슬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6.3. 네덜란드 U-21 대표팀

2003년 휠릿은 네덜란드 U-21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2004년까지 네덜란드 U-21 대표팀을 이끌었다. 네덜란드 U-21 대표팀은 2004년 UEFA U-21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에서 탈락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6.4.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4-05 시즌 휠릿은 페예노르트 감독을 맡았으나, 리그에서 4위에 그치면서 시즌 종료 후 사임했다. 당시 디르크 카위트, 오노 신지 등을 지도했다.

6.5. LA 갤럭시

2007년 11월 8일, 휠릿은 LA 갤럭시 감독으로 취임하여 3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의 연봉 2는 메이저 리그 사커(MLS) 감독 사상 최고액이었다. 휠릿은 프랭크 얄롭의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얄롭은 데이비드 베컴이 선수 명단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7 MLS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여 해임되었다.

갤럭시에서 휠릿의 시간은 순탄치 않았다. 연봉 상한선과 드래프트 규정과 같은 MLS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사항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북미 리그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시즌 개막전에서 0-4로 패한 후, 휠릿은 훈련 중 세트 플레이 연습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한 미드필더 피터 바게나스와 충돌했다.

시즌이 진행됨에 따라 휠릿은 랜던 도노번과 아벨 자비에르를 포함한 여러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 자비에르는 휠릿의 감독 스타일을 비판하며 대부분의 선수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중에 갤럭시 단장인 알렉시 라라스가 이 과정에서 배제되고, 데이비드 베컴의 자문사인 그의 매니지먼트 회사 19 Entertainment와 개인 매니저 테리 번이 결정을 주도하면서 휠릿의 임명이 논란 속에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2008년 8월 11일, 휠릿은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갤럭시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7경기 연속 무승 이후에 나온 것이다. 단장 라라스도 동시에 해임되었다.

6.6. FC 테레크 그로즈니

2011년 1월 18일, 뤼트 휠릿은 러시아 프리미어리그테레크 그로즈니 감독으로 임명되어 18개월 동안 팀을 이끌게 되었다. 휠릿은 《소베츠키 스포르트(Советский спорт러시아어)》와의 인터뷰에서 축구를 통해 체첸 사람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테레크 그로즈니에서 13경기를 치르는 동안 3승밖에 거두지 못했고, 리그 14위에 그치자 2011년 6월 14일 암카르 페름에 1대 0으로 패배한 후 람잔 카디로프 회장에 의해 경질되었다.

6.7. 네덜란드 대표팀

2017년 9월 9일, 뤼트 휠릿은 딕 아드보카트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2017년 11월 30일, 아드보카트가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면서 휠릿 또한 대표팀 수석코치에서 물러났다.

7. 방송인 경력

Ruud Gullit영어은 1990년대 AC 밀란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은퇴 후에는 BBC, 스카이 스포츠(Sky Sports), ESPN, 알자지라 스포츠(Al Jazeera Sports) 등에서 축구 해설가 및 분석가로 활동했다. 2022년 JTBC의 축구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 2》에 출연하여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선수 은퇴 후 굴리트는 다양한 팀의 감독을 맡았다. 1996년 첼시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여 첫 시즌에 팀을 FA컵 우승으로 이끌며 외국인 감독 최초 FA컵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1997-98 시즌 도중 해임되었다. 1998-99 시즌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았으나 13위에 그쳐 1년 만에 사임했다. 2004-05 시즌에는 페예노르트 감독을 맡아 디르크 카위트, 오노 신지 등을 지도했지만 리그 4위에 머물러 시즌 종료 후 사임했다. 2007년 메이저 리그 사커로스앤젤레스 갤럭시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9개월 만에 개인적인 사유로 사임했다. 2011년에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테렉 그로즈니 감독으로 1년 반 계약을 맺었지만, 리그 13경기에서 3승에 그쳐 6월에 해임되었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굴리트는 주로 축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BBC 해설가로 유로 1996 기간 중 "섹시 풋볼"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수비를 뚫는 패스와 움직임을 중시하며 매력적인 축구를 펼친 포르투갈과 같은 팀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2006년까지 네덜란드 TV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며 넬슨 만델라 등 여러 인사들과 인터뷰를 했다. 1987년 발롱도르 수상 당시에는 투옥 중이던 만델라에게 상을 헌정하기도 했다.

2006년 FIFA 월드컵 기간에는 ITV 해설가로, 스카이 스포츠(Sky Sports)와 알자지라 스포츠(Al Jazeera Sports)에서는 챔피언스리그 경기 분석가로 활동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ESPN에서 위르겐 클린스만, 스티브 맥마나만과 함께 스튜디오 분석가로, 유로 2012에서는 글렌 호들, 테리 베너블스 등과 함께 알자지라 스포츠 분석가로 활동했다. 2013년에는 EA 스포츠(EA Sports)의 FIFA 14에 "레전드" 카드로 등장하여 게임 내 최고 평점을 받기도 했다. 2014년에는 BBC의 매치 오브 더 데이(Match of the Day)에 스튜디오 해설가로 합류하여 2014-15 시즌에 처음 출연했다. 2016년에는 하이네켄 챔피언스리그 트로피 투어에 참여하여 카를레스 푸욜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했고, 2022년 FIFA 월드컵과 2022-23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BeIN Sports에서 해설을 맡았다.

8. 개인사

"검은 튤립"이라는 별명을 가진 휠릿은 세 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으로 끝났다. 1984년 이보너 더 프리스(Yvonne de Vries네덜란드어)와 결혼하여 두 딸을 얻었으나 1991년에 이혼했다. 이후 크리스티나 펜사(Cristina Pensa네덜란드어)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나, 펜사와도 이혼했다. 휠릿은 요한 크라위프의 조카딸 에스텔러 크라위프(Estelle Cruijff네덜란드어)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나, 에스텔러가 바다 하리와 만남을 가지면서 이혼했다. 휠릿과 에스텔러 크라위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막심 휠릿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축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막심 휠릿은 캄뷔르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9.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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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 휠릿 수상 내역
클럽
HFC 할렘
페예노르트
PSV 아인트호벤
AC 밀란
UC 삼프도리아
국가대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개인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1984, 1986
네덜란드 골든슈1986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 선수1987
발롱도르1987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1987, 1989
유니세프 유럽 시즌 최우수 선수1987-88
온스 데 온스1987, 1988, 1989
온스 달잔1988, 1989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드림팀1988, 1992
FIFA 드림팀1991
PFA 올해의 팀1996
첼시 FC 올해의 선수1996
FIFA 1002004
골든풋 어워드 올타임 레전드2011
AC 밀란 명예의 전당2014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2017
20세기 세계 최우수 선수 18위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1999
20세기 위대한 축구선수 100인 29위월드 사커지 선정 1999

9.1. 선수

1988년의 굴리트
1988년의 굴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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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시즌, 대회별 출전 및 득점 기록
클럽시즌리그국내컵리그컵국제대회기타총계
리그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하를럼(HFC Haarlem)1979–80에레디비시24400244
1980–81에어스터 디비시3614524116
1981–82에레디비시3114423516
총계91329410036
페예노르트(Feyenoord)1982–83에레디비시33821359
1983–84에레디비시331589414525
1984–85에레디비시1972020237
총계853012106110341
PSV 아인트호번(PSV)1985–86에레디비시342423203827
1986–87에레디비시342234003726
총계684657207553
AC 밀란(AC Milan)1987–88세리에 A29963413913
1988–89세리에 A1951284002811
1989–90세리에 A2000100030
1990–91세리에 A267104131349
1991–92세리에 A26711278
1992–93세리에 A1576440102611
1994–95세리에 A83203011144
총계1253917102465217156
UC 삼프도리아(Sampdoria)1993–94세리에 A31151024117
1994–95세리에 A229000000229
총계532410200006326
첼시1995–96프리미어리그3137320406
1996–97프리미어리그1111010131
1997–98프리미어리그6000400000100
총계48483700000637
통산 총계47017561367032752575219


굴리트는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여러 클럽과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주요 선수로 뛰었다. 다음은 주요 클럽 경력과 국가대표 경력, 그리고 개인 수상 기록을 요약한 내용이다.

* 클럽 경력
HFC 할렘 (1979-1982): 프로 선수로 데뷔하여 에레디비시에서 활약했다.
페예노르트 (1982-1985):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PSV 아인트호벤 (1985-1987): 2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이끌며 46골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AC 밀란 (1987-1993, 1994-1995): 세리에 A유럽 챔피언스컵 우승을 이끌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마르코 판 바스텐, 프랭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네덜란드 트리오"로 불렸다.
UC 삼프도리아 (1993-1994, 1995):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기여했다.
첼시 (1995-1998):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9.1.1. 클럽

1979년 HFC 할렘에서 데뷔하여 1981-82 시즌에는 팀을 리그 4위로 이끌고 UEFA컵 출전권을 획득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1982년 페예노르트로 이적,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85-86 시즌부터 PSV 아인트호벤에서 활약하며 8년 만의 리그 제패에 공헌했고, 주로 리베로로 활동하면서도 2시즌 동안 46골을 터뜨리는 활약을 보였다.

유벤투스도 영입을 시도했지만, 1987년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어 약 1200(추정)의 이적료로 이탈리아세리에 AAC 밀란으로 이적했다. 같은 해 8월 23일 코파 이탈리아 바리전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1987-88 시즌에는 9월 13일 피사전에서 세리에 A 데뷔골을 기록했고, 유벤투스, 나폴리, 인터 밀란 등 우승 경쟁 팀과의 경기에서도 득점을 올리는 등 오랫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던 밀란에 리그 우승을 안겼다. 이적 첫 해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마르코 판 바스텐, 프랭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네덜란드 트리오"로서 AC 밀란의 황금기를 이끌며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8-89 시즌, 챔피언스컵 결승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전에서 2골을 넣어 우승에 크게 기여했지만, 1989-90 시즌에 무릎 부상을 당해 1989년 토요타컵 출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등 1년간 치료와 재활에 전념했다. 이후 1992년까지 총 5차례 무릎 수술을 받으며 부상과 싸우면서 경기에 출전했다.

1990년 12월, 토요타컵 올림피아전에서 크로스로 레이카르트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3-0 승리에 기여했다. 1991-92 시즌 파비오 카펠로 감독 부임 후 기존의 FW가 아닌 주로 오른쪽 측면 하프로 기용되었다. 이 시즌에는 부상에 시달리며 26라운드부터 31라운드까지 결장했지만 리그 무패 우승에 기여했다.

1992-93 시즌, 10월 4일 피오렌티나전에서 시즌 첫 출전을 기록하며 2골 2어시스트 활약을 펼쳤고, 4월 10일 밀라노 더비에서도 골을 넣었다. 하지만 부상과 외국인 선수 제한 문제로 벤치 멤버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챔피언스컵 결승 올림피크 마르세유전에서도 벤치에 머물렀다. 꾸준히 출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베를루스코니 회장과 구단 관계자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계약 연장 가능성도 있었지만 외국인 선수 기용에 대한 비판이 밀란을 떠나는 데 한몫했다.

1993-94 시즌, 인터나 J리그 이적설도 있었지만 FC 바이에른 뮌헨프란츠 베켄바워가 직접 영입에 나서 메디컬 체크까지 받는 등 계약 직전까지 갔으나 아내의 강력한 반대로 이적이 무산되었다. 또한 토리노프란체스콜리, 아길레라와 함께 트리오를 구성하여 타이틀 획득을 노리며 영입을 추진했지만, UC 삼프도리아로 자유 계약 이적했다. 에릭손 감독은 그를 FW로 기용했다. 8월 29일 개막전 나폴리전에서 골을 넣으며 좋은 출발을 보였고, 옛 소속팀과의 첫 대결이라 큰 관심을 모았던 10월 31일 AC 밀란전에서는 카타네츠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것은 물론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넣어 3-2 승리를 거머쥐었다. 리그에서 15골을 기록했고, 밀란과의 우승 경쟁 끝에 리그 우승은 놓쳤지만 리그 3위를 기록했으며,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준결승 파르마전 2차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결승 안코나전에서는 프리킥으로 상대의 자책골을 유도했고 롬바르도의 득점을 어시스트하는 등 우승에 기여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다음 시즌 밀란으로 복귀했다. 좋은 활약을 펼쳤기에 1994년 2월경 이미 밀란으로부터 복귀 제안을 받았다.

1994-95 시즌, 복귀한 밀란에서는 카펠로 감독에게 FW로 기용되었다. 오랜 기간 뛰었기에 밀란에서 임대되어 복귀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옛 소속팀 삼프도리아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어 우승에 기여했다. 개막전 제노아전에서는 시모네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고, 9월 11일 2라운드 칼리아리전에서 골을 넣었고, 9월 18일 3라운드 라치오전에서는 2골을 넣었지만, 전방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 이후 무득점에 그치는 등 복귀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시즌 중반 멜리와의 트레이드로 삼프도리아로 다시 이적하여 22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했지만 전년도만큼의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1995-96 시즌, 첼시로 이적하여 처음에는 리베로로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MF로 활동했다. 9월 16일 리그 6라운드 사우샘프턴전에서 이적 후 첫 골을 넣었고, FA컵 준결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도 골을 넣었지만 1-2로 패하며 우승을 놓쳤다. 시즌 중 팀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자 그 후임으로 현역 선수 신분으로 플레잉 코치에 취임했고, 이 시즌 처음으로 풀 시즌 DF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1996-97 시즌, 10월 26일 11라운드 토트넘전 득점이 현역 마지막 골이 되었다.

1997-98 시즌, 리그 6경기, 컵대회 1경기에 출전했고 마지막 리그 출전은 1998년 1월 17일 에버턴전 16분간의 출전이었으며, 1월 28일 리그컵 준결승 아스널전 1차전 출전이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 출전이었다.

9.1.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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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 경기 출전 및 득점 기록
국가대표팀년도출전 경기 수득점 수
네덜란드 국가대표팀198110
198251
198364
198440
198540
198661
198765
198882
198920
199091
199141
199282
199320
199410
총계6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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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 굴리트의 국가대표팀 득점 목록
No.날짜경기장상대팀점수결과대회
11982년 9월 22일데 쿠이프, 로테르담, 네덜란드아일랜드 공화국2–02–1UEFA 유로 1984 예선
21983년 9월 7일스타디온 오스터파크, 흐로닝언, 네덜란드아이슬란드2–03–0UEFA 유로 1984 예선
31983년 10월 12일달리마운트 파크, 더블린, 아일랜드아일랜드 공화국1–23–2UEFA 유로 1984 예선
43–2
51983년 11월 16일데 쿠이프, 로테르담, 네덜란드스페인2–12–1UEFA 유로 1984 예선
61986년 12월 21일치리온 스타디움, 리마솔, 키프로스키프로스1–02–0UEFA 유로 1988 예선
71987년 1월 21일캄프 누, 바르셀로나, 스페인스페인1–01–1친선 경기
81987년 4월 29일데 쿠이프, 로테르담, 네덜란드헝가리1–02–0UEFA 유로 1988 예선
91987년 10월 14일고르니크 스타디움, 자브제, 폴란드폴란드1–02–0UEFA 유로 1988 예선
102–0
111987년 10월 28일데 쿠이프, 로테르담, 네덜란드키프로스2–08–0UEFA 유로 1988 예선
121988년 6월 25일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 독일소련1–02–0UEFA 유로 1988
131988년 9월 14일올림픽 스타디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웨일스1–01–01990년 FIFA 월드컵 예선
141990년 6월 21일스타디오 라 파보리타, 팔레르모, 이탈리아아일랜드 공화국1–01–11990년 FIFA 월드컵
151991년 4월 17일데 쿠이프, 로테르담, 네덜란드핀란드2–02–0UEFA 유로 1992 예선
161992년 5월 27일더 반데르트, 시타르트-헬렌, 네덜란드오스트리아3–13–2친선 경기
171992년 12월 16일이뇌뉘 스타디움, 이스탄불, 터키터키2–03–1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UEFA 유로 1988 우승 당시의 굴리트
UEFA 유로 1988 우승 당시의 굴리트


굴리트는 UEFA 유로 1988에서 네덜란드의 주장을 맡아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9.1.3. 개인

1988년의 휠릿
1988년의 휠릿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84, 1986
* 네덜란드 황금구두상: 1986
*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 선수: 1987
* 발롱도르: 1987, 준우승 1988
* 월드 사커: 1987, 1989
* 옹즈 드 옹즈: 1987, 1988, 1989
* 옹즈 다르장: 1988, 1989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토너먼트 베스트 팀: 1988, 1992
* FIFA XI: 1991
* 프리미어리그 PFA 올해의 팀: 1995–96
* 첼시 올해의 선수: 1996
* FIFA 100
* UEFA 골든 주빌리 폴: 13위
* 골든풋: 2011, 축구 레전드로
* AC 밀란 명예의 전당
* 최고 중의 최고 – 세기의 선수: 톱 50
* 월드 사커: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100인
* FAI 인터내셔널 풋볼 어워즈 – 국제 인물: 2008
* IFFHS 레전드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7

9.2. 감독

1995-96 시즌 첼시로 이적하여 처음에는 리베로로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MF로 활동했다. 시즌 중 팀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자 그 후임으로 현역 선수 신분으로 플레잉 코치에 취임했고, 이 시즌 처음으로 풀 시즌 DF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1996-97 시즌, 정식 감독으로서 첫 시즌에 잔루카 비알리, 잔프랑코 졸라, 로베르토 디 마테오 등의 톱 선수들을 영입하여 리그 6위를 기록했지만, 27년 만에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외국인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FA컵 우승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1997-98 시즌,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1998-99 시즌 개막 직후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에 취임했으나, 13위에 그치며 1년 만에 사임했다.

잠시 해설가로 활동한 후, 2004-05 시즌 페예노르트 감독에 취임했다. 당시 소속 선수였던 디르크 카이트, 小野伸二 등을 지도했으나, 리그 4위에 머물렀고 시즌 종료 후 사임했다.

2007년 11월 8일, 메이저 리그 사커로스앤젤레스 갤럭시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9개월 후인 2008년 8월 개인적인 사유로 사임했다.

2011년 1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테렉 그로즈니 감독으로 1년 반 계약을 맺고 부임했다. 그러나 리그 13경기에서 3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6월에 해임되었다.

2016년 8월, 딕 아드보카트가 네덜란드 대표팀 2번째 수석코치직에서 돌연 사임하자, 급히 휠릿이 후임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KNVB(네덜란드 축구협회)와의 협상 중 계약서에 "선수단에 변동이 있을 경우 재협상할 수 있는 권리"와 "좋은 제안을 받으면 사임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는데, KNVB의 한스 판 브뢰이켈렌(기술이사)이 아드보카트의 돌연한 사임 사태를 피하고 싶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FIFA로부터 접촉을 받은 1번째 수석코치 마르코 판 바스텐이 이미 사임을 결정했지만, 판 브뢰이켈렌은 그 정보를 알리지 않았다. 휠릿은 판 바스텐 본인으로부터 직접 그 사실을 듣고 격분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