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스 게르마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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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는 로마 제국이 게르마니아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건설한 국경 방어 시설을 의미한다. 기원후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이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요새, 감시탑, 울타리 등으로 구성되었다. 리메스는 게르만족의 출입을 완전히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인이나 주민들의 통행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2005년 상 게르마니아-라에티아 리메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21년 하 게르마니아 리메스가 추가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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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스 게르마니쿠스 | |
---|---|
위치 정보 | |
일반 정보 | |
종류 | 변경 요새 |
위치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세르비아 |
건설 시작 | 서기 83년 |
건설 완료 | 서기 260년 |
길이 | 약 568 킬로미터 |
역사 | |
시대 | 로마 제국 |
건설 목적 | 게르만족으로부터의 방어 |
붕괴 | 260년 경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붕괴 |
구성 요소 | |
주요 시설 | 성채 망루 장벽 참호 |
주요 거점 | 모곤티아쿰 (오늘날의 마인츠) |
세계유산 정보 | |
공식 명칭 | 로마 제국의 리메스 |
국가 | 독일 |
위치 | 여러 지역 |
등재 유형 | 문화유산 |
지정 연도 | 2005년 |
기준 | ii, iii, iv |
식별 번호 | 1199 |
2. 역사
기원후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국경을 따라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만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망대 주변에는 벽이 열려 있어서 상인이나 주민들이 출입할 수 있었고, 성벽의 역할은 이 통행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자금 지원을 받아 체계적인 발굴과 관련 연구가 진행되면서 로마 국경 방어 시설에 대한 정보가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 상 게르마니아-라에티아 리메스의 잔해는 독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등재되었고,[1] 2021년에는 하 게르마니아 리메스가 별도로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2] 잘부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리메스에 있는 재건된 요새이자 박물관이다.
2. 1. 기원과 초기 발전
기원후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국경을 따라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만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망대 주변에는 벽이 열려 있어서 상인이나 주민들이 출입할 수 있었고, 성벽의 역할은 이 통행을 단속하는 것이었다.국경을 따라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한 첫 번째 황제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가 참패한 직후인 기원후 9년의 아우구스투스였다. 원래는 수많은 리메스(Limes) 성벽이 있었는데, 이후 라인강을 따라 상 게르마니아 리메스와 도나우강을 따라 라에티아 리메스를 형성하기 위해 연결되었다. 이후 이 두 성벽은 연결되어 하나의 공통된 경계선을 형성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망(14년)한 후부터 서기 70년 이후까지, 로마는 게르만족과의 국경선을 라인강과 상류 다뉴브강의 수계로 정했다. 이 강들 너머로 로마는 마인츠의 로마 국경 요새 Moguntiacum|모군티아쿰la (마인츠) 맞은편의 비옥한 프랑크푸르트 평원, 검은 숲의 가장 남쪽 경사면, 그리고 몇몇 산재된 교두보만을 소유했다. 라인강이 깊고 넓은 북부 국경 지역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로마의 경계로 유지되었다. 남부 지역은 달랐다. 상류 라인강과 상류 다뉴브강은 쉽게 건널 수 있다. 이들이 형성하는 국경선은 불편할 정도로 길었고, 현대의 바덴과 뷔르템베르크 사이에 날카로운 각도의 외국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다. 로마 시대에 이 지역의 게르만족 인구는 적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대 알자스-로렌 출신의 로마 시민들이 강 동쪽으로 이동했다. 지리적 편의성과 로마 시민들의 이러한 이동을 인정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이라는 두 가지 동기가 로마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했고, 강력한 베스파시아누스가 네로의 뒤를 이었을 때, 점차 이 날카로운 각을 좁히거나 적어도 둔각으로 만드는 일련의 전진이 시작되었다.
2. 2.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
74년경 로마 제국은 바덴 지역을 침략하여 일부 합병하고, 라인강 상류 기지인 스트라스부르에서 울름 바로 위 도나우강까지 길을 내었다. 이로써 각도의 꼭짓점이 잘려나가는 형태가 되었다.[1]83년경 도미티아누스는 모군티아쿰에서 동쪽으로 로마 영토를 확장하고, 체계적으로 구분되고 방어된 국경선으로 둘러쌌다. 그는 이 길을 따라 수많은 블록하우스와 후방에 더 큰 요새를 배치했는데, 이 중 하나가 여러 차례 확장과 재건을 거쳐 바트홈부르크 근처 타우누스 산맥에 있는 잘부르크 요새로 발전했다.[1]
도미티아누스의 진격 이후, 74년과 83년의 합병 지역을 연결하는 국경선 건설이 필요했다. 이 국경선은 마인강에서 오덴발트 고지를 거쳐 네카어강 상류로 이어졌고, 일련의 요새로 방어되었다. 이 국경선 건설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미티아누스의 작품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 직후에 실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구성된 전체 국경선은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라인강에서 도나우강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나무 울타리로 재조직되었다.[1]
2. 3.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왕조 시기
기원후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국경을 따라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14년)의 사망부터 서기 70년 이후까지, 로마는 게르만족과의 국경선을 라인강과 상류 다뉴브강의 수계로 정했다.강 사이의 각도는 이제 거의 가득 찼다. 그러나 더 많은 전진과 더 많은 요새화가 남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또는 더 가능성이 높은 그의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오덴발트(Odenwald)와 다뉴브 강에서 밀고 나와 이 두 노선과 거의 평행하지만 앞선 새로운 국경선을 표시했는데, 때로는 타우누스(Taunus)에서처럼 이전 노선과 일치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것은 두 개의 뚜렷한 국경 방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팔그라벤(Pfahlgraben)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랑과 흙 언덕이 뒤에 있는 말뚝 울타리인데, 잘은 잘부르크 인근에서 볼 수 있지만 한때 라인 강에서 남쪽으로 독일 남부까지 뻗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토목 공사가 멈추는 곳에서 시작되며, 그다지 강력한 벽은 아니지만 돌로 된 벽인 토이펠스마우어(Teufelsmauer)이다. 그것은 다뉴브 강과 평행하게 대략 동서로 뻗어 있으며, 결국 레겐스부르크 근처의 하인하임에서 합류한다. 팔그라벤의 남쪽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곧다. 50km 이상 뻗어 있으며 거의 정확하게 북극성을 가리킨다.
이 국경선은 약 100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그 오랜 기간 동안 정확한 날짜를 정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수행되었을 것이다. 피우스가 설정한 국경선에 언제 인간의 구덩이와 기타 특수 요새가 갖춰졌는지조차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야만족의 압력이 2세기의 후반에 심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오랜 투쟁 끝에 라인 강 동쪽과 다뉴브 강 북쪽의 전체 또는 거의 전체 지역이 250년경, 한 짧은 기간 안에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2. 4. 로마 제국 후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국경을 따라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만족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망대 주변의 열린 벽을 통해 상인과 주민들의 통행을 단속하는 역할을 했다. 2005년 상 게르마니아-라에티아 리메스의 잔해는 독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등재되었고,[1] 2021년에는 하 게르마니아 리메스가 별도로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2]아우구스투스 (14년) 사망부터 서기 70년 이후까지, 로마는 게르만족과의 국경선을 라인강과 상류 다뉴브강의 수계로 정했다. 라인강 북부 국경 지역은 제국 멸망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상류 라인강과 다뉴브강은 쉽게 건널 수 있어 국경선이 길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기, 이 지역의 날카로운 각을 좁히는 전진이 시작되었다.
3세기 말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상 라에티아 리메스"가 폐기되고, 라인강, 일러강, 도나우강을 따라 로마 방어선(도나우-일러-라인-리메스)이 구축되었다. 빠른 강 배(나비스 루소리아)가 전초 기지나 위기 지점에 신속하게 도달하여 지원을 제공했다. 망루는 시야가 확보되었고, 중요한 고개에 강력하게 요새화된 카스트라la가 배치되었다 (예: 바젤 인근의 카스트룸 라우라센세, 빈도니사).
3. 구조와 기능
리메스는 로마 군대가 매일 저녁 야영지를 지키기 위해 건설하는 요새와 비슷한 구조였다. 바깥쪽에 도랑을 파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 둔덕을 쌓았다. 둔덕 위에는 말뚝을 설치했다. 리메스는 야영지 요새보다 도랑이 깊고 둔덕이 높았으며, 말뚝도 더 높고 도랑 앞에 있었다. 일부 구간에는 말뚝 대신 돌담을 쌓기도 했다. 벽이나 둔덕 뒤에는 나무나 돌로 만든 감시탑이 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설치되었고, 몇 킬로미터 뒤 요새에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리메스는 게르만족 전체의 이동을 막는 것이 아니라, 상인 등의 통행을 통제하여 국경을 넘는 모든 이동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리메스를 건너려면 탑을 통과해야 했고, 이는 주둔군에게 알려지거나 벽을 파괴해야 했다. 소규모 그룹은 몰래 넘을 수 있었지만, 대규모 그룹은 눈에 띄거나 탑을 파괴해야 했고, 이는 로마군의 주의를 끌었다.
로마 제국은 넓고 병력이 적어, 군단 대부분이 국경에 주둔했다. 리메스는 조기 경보, 소규모 습격 방지, 적 대응 능력을 제공했다. 또한, 집단 이동 통제 역할도 수행했다.[3]
3. 1. 구조
리메스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띠고 있다. 이는 로마 군대가 매일 밤 야영지를 지키기 위해 건설하는 요새와 비슷하다. 바깥쪽에는 병사들이 도랑을 팠고, 도랑에서 나온 흙으로 둔덕을 만들었다. 둔덕 꼭대기에는 말뚝을 박았다. 리메스는 야영지 요새보다 도랑이 더 깊었고, 둔덕은 더 높았다. 말뚝 역시 더 높았고 도랑 앞에 설치되었다. 리메스의 일부 구간에는 말뚝 대신 간단한 돌담이 설치되기도 했다.벽이나 둔덕 뒤에는 나무나 돌로 만든 감시탑이 설치되었다. 각 감시탑은 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보통 몇 킬로미터 뒤에 있는 요새에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리메스는 게르만 부족 전체가 로마 제국 영토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고, 이는 건설 목적도 아니었다. 감시탑 근처의 리메스는 특히 상인이나 제국 내에서 살거나 일하러 오는 사람들의 통행을 허용했다. 리메스의 목적은 이러한 통행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리메스를 건너려면 탑을 통과해야 했고, 이를 통해 주둔군에게 통행 사실이 알려지거나, 벽과 말뚝을 기어오르거나 파괴해야 했다. 개인이나 소규모 그룹만이 눈에 띄지 않게 장애물을 넘을 수 있었고, 그들은 훔친 가축을 많이 가져갈 수도 없었다. 대규모 그룹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탑을 파괴할 수도 있었지만, 이는 로마군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국경을 넘는 모든 이동에 대한 정보는 로마 군대에게 매우 중요했다. 로마 제국과 같이 넓은 영토에는 병력이 부족했고, 거의 모든 군단이 국경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외곽 방어 구역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적대 세력은 별다른 저항 없이 제국 내에서 이동할 수 있었다. 리메스는 조기 경보 시스템, 소규모 습격 방지, 적이 국경 요새와 주둔군 근처에 있을 때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했다. 리메스는 또한 미국-멕시코 국경을 따라 있는 울타리 시스템처럼 집단의 이동을 통제하는 방어벽이었을 수도 있다.[3]
3. 2. 기능
리메스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물로, 로마 군대가 매일 저녁 야영지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설하는 요새와 유사하다. 바깥쪽에는 병사들이 도랑을 팠고, 도랑에서 나온 흙은 둔덕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둔덕 꼭대기에는 말뚝이 부착되었다. 리메스는 야영지 요새보다 더 깊은 도랑과 더 높은 둔덕을 가지고 있었으며, 말뚝도 더 높았고 도랑 앞에 놓여 있었다. 리메스의 여러 부분에는 말뚝 대신 간단한 돌담이 있었다.벽이나 둔덕 뒤에는 나무 또는 돌로 지어진 감시탑 시스템이 설치되었으며, 각 탑은 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일반적으로 몇 킬로미터 뒤에 있는 요새에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리메스는 게르만 부족 전체가 로마 제국 영토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이는 건설자들의 의도도 아니었다. 감시탑 근처에서 리메스는 특히 상인이나 제국 내에서 살거나 일하러 오는 사람들의 통행에 열려 있었다. 리메스의 목적은 이러한 교통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리메스를 건너려면 탑을 통과해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둔군에게 알려지거나, 벽과 말뚝을 기어오르거나 파괴해야 했다. 개인이나 소규모 그룹만이 눈에 띄지 않게 장애물을 오를 수 있었으며, 그들은 훔친 가축을 많이 몰고 갈 수 없었다. 대규모 그룹은 눈에 띄게 될 것이고,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탑을 파괴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또한 로마인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국경을 넘는 모든 교통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로마 군사에게 매우 중요했다. 로마 제국과 같은 넓은 영토에는 병사가 거의 없었고, 거의 모든 군단이 국경 근처에 주둔해 있었다. 이 외곽 방어 구역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적대 세력은 별다른 저항 없이 제국 내에서 이동할 수 있었다. 리메스는 조기 경보 시스템, 소규모 습격 방지, 적이 여전히 국경 요새와 주둔군 근처에 있을 때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했다. 리메스는 또한 미국-멕시코 국경을 따라 있는 울타리 시스템처럼 집단의 이동을 통제하는 방어벽이었을 수 있다.[3]
4. 오늘날의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8]
4. 1. 유네스코 세계유산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8]독일의 자금 지원을 받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이와 관련된 다른 연구를 통해 로마 국경 방어 시설에 대한 정보가 훨씬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 상 게르마니아-라에티아 리메스의 잔해는 독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등재되었다.[1] 2021년 하 게르마니아 리메스가 별도로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2] 잘부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리메스에 있는 재건된 요새이자 박물관이다.
4. 2. 주요 유적
200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8]5. 로마 제국의 요새 목록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하 게르마니쿠스, 상 게르마니아 리메스, 라에티아 리메스에 걸쳐 로마 제국이 설치한 주요 요새 목록은 다음과 같다.
리메스 | 요새 이름 | 현재 지명 | 로마 시대 명칭 | |||||||||||||
---|---|---|---|---|---|---|---|---|---|---|---|---|---|---|---|---|
하 게르마니아 리메스 | 카트베이크 | 발켄부르크 | 레이던-룸부르크 | 알펜안덴라인데 | 즈와머담 | 보데그라벤 | 우르던 | 블레우텐 | 위트레흐트 | 베흐텐 | 레이스베이크 (헬데를란트) | 마우릭 | 케스테렌 | 아른험-마이너스바이크 | 네덜란드[4] 카트베이크 | 루그두눔 바타보룸 |
네덜란드[4] 발켄부르크 | 프라에토리움 아그리피나에 | |||||||||||||||
네덜란드[4] 레이던-룸부르크 | 마틸로 | |||||||||||||||
네덜란드[4] 알펜안덴라인데 | 알바니아나 | |||||||||||||||
네덜란드[4] 즈와머담 | 니그룸 풀룸 | |||||||||||||||
네덜란드[4] 보데그라벤 | ||||||||||||||||
네덜란드[4] 우르던 | 라우리움 | |||||||||||||||
네덜란드[4] 블레우텐 | 플레티오 | |||||||||||||||
네덜란드[4] 위트레흐트 | 트라익툼 | |||||||||||||||
네덜란드[4] 베흐텐 | 펙티오 | |||||||||||||||
네덜란드[4] 레이스베이크 (헬데를란트) | 레베파눔 | |||||||||||||||
네덜란드[4] 마우릭 | 만나리시움 | |||||||||||||||
네덜란드[4] 케스테렌 | 카르보 | |||||||||||||||
네덜란드[4] 아른험-마이너스바이크 | 카스트라 헤르쿨리스로 추정 | |||||||||||||||
독일 | 뒤이펜 | |||||||||||||||
독일 | 헤르벤-데 바이란드 | 카르비움 | ||||||||||||||
독일 | 클레베-린데렌 | 하레나티움[5] | ||||||||||||||
독일 | 베트부르크-하우-콰르부르크 | 콰드리부르기움 | ||||||||||||||
독일 | 틸-모일란 | 현재 카스텔 슈타인체스호프로 알려짐 | ||||||||||||||
독일 | 칼카르-알트칼카르 | 부르기나티움 | ||||||||||||||
독일 | 잔텐 | 베테라 | ||||||||||||||
독일 | 베젤-뷔데리히 | 카스텔 베젤-뷔데리히 | ||||||||||||||
독일 | 할렌 | 칼로[6] | ||||||||||||||
독일 | 두이스부르크-베를 | |||||||||||||||
독일 | 모어스-아스베르크 | 아시부르기움 | ||||||||||||||
상 게르마니아 리메스 | 라인하우젠-베르타우젠 | 크레펠트-겔레프-스트라툼 | 노이스-그나덴탈 | 노이스-그림링하우젠 | 몬하임암라인 | 도르마겐 | 쾰른 | 독일 | 라인하우젠-베르타우젠 | 클라인카스텔 베르타우젠 | ||||||
독일 | 크레펠트-겔레프-스트라툼 | 겔두바 | ||||||||||||||
독일 | 노이스-그나덴탈 | 노바에시움 | ||||||||||||||
독일 | 노이스-그림링하우젠 | |||||||||||||||
독일 | 몬하임암라인 | 부룸굼 | ||||||||||||||
독일 | 도르마겐 | 두르노마구스 | ||||||||||||||
독일 | 쾰른 |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움 | ||||||||||||||
상 게르마니아 리메스 | 본 | 레마겐 | 라인브롤 (클라인카스텔 라인브롤) | 카스텔 엠스 | 클라인카스텔 아돌프제크 | 잘부르크 | 키비타스 타우넨시움 | 독일 | 본 | 본넨시아 | ||||||
독일 | 레마겐 | 리고마구스 | ||||||||||||||
독일 | 라인브롤 | 라인브롤 | ||||||||||||||
독일 | 카스텔 엠스 | 바트엠스 | ||||||||||||||
독일 | 클라인카스텔 아돌프제크 | 아돌프제크 | ||||||||||||||
독일 | 잘부르크 | 바트홈부르크 | ||||||||||||||
독일 | 키비타스 타우넨시움 | 베터라우 | ||||||||||||||
독일 | 마르쾨벨 | |||||||||||||||
독일 | 마인강변 그로스크로첸부르크 | |||||||||||||||
상 게르마니아 리메스 | 카스텔 슈톡슈타트 | 벨츠하임의 카스텔 | 라우리아쿰 | 독일 | 하인슈타트 | |||||||||||
독일 | 카스텔 슈톡슈타트 | 마인강변 슈톡슈타트 | ||||||||||||||
독일 | 밀텐베르크 | |||||||||||||||
독일 | 레베르크 | |||||||||||||||
독일 | 발두엠 | |||||||||||||||
독일 | 부헨 | |||||||||||||||
독일 | 오스터부르켄 | |||||||||||||||
독일 | 야그스트하우젠 | |||||||||||||||
독일 | 벨츠하임의 카스텔 | 벨츠하임 | ||||||||||||||
독일 | 라우리아쿰 | 로르흐 | ||||||||||||||
라에티아 리메스 | 아알렌 | 루펜호펜 | 군젠하우젠 | 바이센부르크 | 키프펜베르크 | 아이닝 | 레겐스부르크 | 퓐츠 | 아알렌 | 알라이 | ||||||
루펜호펜 | (알 수 없음) | |||||||||||||||
군젠하우젠 | 군젠하우젠 요새 | |||||||||||||||
바이센부르크 | 비리치아나 | |||||||||||||||
키프펜베르크 | 뵈밍 요새 | |||||||||||||||
아이닝 | 아부시나 | |||||||||||||||
레겐스부르크 | 카스트라 레지나 | |||||||||||||||
퓐츠 | 카스트라 베토니아나 |
5. 1. 하 게르마니아 리메스

하 게르마니쿠스 리메스는 로마 제국의 국경 방어 시설 중 하나로, 현재 네덜란드와 독일에 걸쳐 있었다.
국가 | 위치 | 로마 시대 지명 |
---|---|---|
네덜란드[4] | 카트베이크 | 루그두눔 바타보룸 |
발켄부르크 | 프라에토리움 아그리피나에 | |
레이던-룸부르크 | 마틸로 | |
알펜안덴라인데 | 알바니아나 | |
즈와머담 | 니그룸 풀룸 | |
보데그라벤 | ||
우르던 | 라우리움 | |
블레우텐 | 플레티오 | |
위트레흐트 | 트라익툼 | |
베흐텐 | 펙티오 | |
레이스베이크 (헬데를란트) | 레베파눔 | |
마우릭 | 만나리시움 | |
케스테렌 | 카르보 | |
아른험-마이너스바이크 | 카스트라 헤르쿨리스로 추정 | |
독일 | 뒤이펜 | |
헤르벤-데 바이란드 | 카르비움 | |
클레베-린데렌 | 하레나티움[5] | |
베트부르크-하우-콰르부르크 | 콰드리부르기움 | |
틸-모일란 | 현재 카스텔 슈타인체스호프로 알려짐 | |
칼카르-알트칼카르 | 부르기나티움 | |
잔텐 | 베테라 | |
베젤-뷔데리히 | 카스텔 베젤-뷔데리히 | |
할렌 | 칼로[6] | |
두이스부르크-베를 | ||
모어스-아스베르크 | 아시부르기움 | |
독일 | 라인하우젠-베르타우젠 | 클라인카스텔 베르타우젠 |
크레펠트-겔레프-스트라툼 | 겔두바 | |
노이스-그나덴탈 | 노바에시움 | |
노이스-그림링하우젠 | ||
몬하임암라인 | 부룸굼 | |
도르마겐 | 두르노마구스 | |
쾰른 |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움 | |
독일 | 본 | 본넨시아 |
레마겐 | 리고마구스 |
5. 2. 상 게르마니아 리메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83년경 모군티아쿰에서 동쪽으로 로마 영토를 확장하고, 체계적으로 구분되고 방어된 국경선을 구축했다. 국경선을 따라 수많은 블록하우스와 후방에 더 큰 요새를 배치했는데, 이 중 하나가 여러 차례 확장과 재건을 거쳐 바트홈부르크 근처 타우누스 산맥에 있는 잘부르크 요새가 되었다.[1]
이후 74년과 83년의 합병을 연결하는 국경선을 건설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국경선은 마인강에서 오덴발트 고지를 거쳐 네카어강 상류로 이어졌고, 일련의 요새로 방어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도미티아누스의 작품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 직후에 실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구성된 전체 국경선은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라인강에서 도나우강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나무 울타리로 재조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드리아누스 또는 그의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오덴발트와 다뉴브 강에서 더 나아가 이전 국경선과 거의 평행하지만 더 앞선 새로운 국경선을 표시했다. 이 국경선은 두 개의 뚜렷한 방벽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팔그라벤(Pfahlgraben)으로, 도랑과 흙 언덕이 뒤에 있는 말뚝 울타리인데, 잘부르크 인근에서 볼 수 있으며 한때 라인 강에서 남쪽으로 독일 남부까지 뻗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토이펠스마우어(Teufelsmauer)로, 돌로 된 벽이다. 토이펠스마우어는 다뉴브 강과 평행하게 대략 동서로 뻗어 있으며, 레겐스부르크 근처의 하인하임에서 합류한다. 팔그라벤의 남쪽 부분은 50km 이상 뻗어 있으며 거의 정확하게 북극성을 가리킨다.
이 국경선은 약 100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정확한 날짜를 정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수행되었다. 피우스가 설정한 국경선에 언제 인간의 구덩이와 기타 특수 요새가 갖춰졌는지조차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2세기 후반에 야만족의 압력이 심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오랜 투쟁 끝에 라인 강 동쪽과 다뉴브 강 북쪽의 전체 또는 거의 전체 지역이 250년경 짧은 기간 안에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요새 이름 | 현재 지명 |
---|---|
라인브롤 (클라인카스텔 라인브롤) | 라인브롤 |
카스텔 엠스 | 바트엠스 |
클라인카스텔 아돌프제크 | 아돌프제크 |
잘부르크 | 바트홈부르크 |
키비타스 타우넨시움 | 베터라우 |
마르쾨벨 | |
마인강변 그로스크로첸부르크 | |
하인슈타트 | |
밀텐베르크 | |
카스텔 슈톡슈타트 | 마인강변 슈톡슈타트 |
레베르크 | |
발두엠 | |
부헨 | |
오스터부르켄 | |
야그스트하우젠 | |
벨츠하임의 카스텔 | 벨츠하임 |
하그호프 | |
라우리아쿰 | 로르흐 |
5. 3. 라에티아 리메스
74년경, 로마는 현재 바덴 지역을 침략하여 일부를 합병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도나우 강 울름 바로 위까지 길을 냈다.[1]도미티아누스는 83년경 모군티아쿰에서 동쪽으로 로마 영토를 확장하고, 국경선을 따라 블록하우스와 요새를 배치했다.[1] 바트홈부르크 근처 잘부르크 요새가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1]
이후 마인 강에서 오덴발트 고지를 거쳐 네카어강 상류로 이어지는 국경선이 건설되었고,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라인 강에서 도나우 강까지 나무 울타리로 재조직되었다.[1]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오덴발트와 도나우 강에서 새로운 국경선을 표시했는데, 이는 오늘날 팔그라벤(Pfahlgraben)과 토이펠스마우어(Teufelsmauer)로 알려져 있다.[1] 팔그라벤은 도랑과 흙 언덕이 뒤에 있는 말뚝 울타리이며, 토이펠스마우어는 돌로 된 벽이다.[1] 팔그라벤의 남쪽 부분은 50km 이상 뻗어 있으며 북극성을 가리킨다.[1]
이 국경선은 약 100년 동안 유지되었으나, 2세기 후반 야만족의 압력으로 250년경 라인 강 동쪽과 도나우 강 북쪽 지역을 상실했다.[1]
2005년, 상 게르마니아-라에티아 리메스의 잔해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등재되었다.[1]
라에티아 리메스를 따라 설치된 주요 요새들은 다음과 같다.
요새 이름(현대 지명) | 로마 시대 명칭 |
---|---|
아알렌 | 알라이 |
루펜호펜 | (알 수 없음) |
군젠하우젠 | 군젠하우젠 요새 |
바이센부르크 | 비리치아나 |
키프펜베르크 | 뵈밍 요새 |
아이닝 | 아부시나 |
레겐스부르크 | 카스트라 레지나 |
퓐츠 | 카스트라 베토니아나 |
참조
[1]
웹사이트
Frontiers of the Roman Empire
https://whc.unesco.o[...]
[2]
웹사이트
Frontiers of the Roman Empire -- Lower German Limes
http://whc.unesco.or[...]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3]
서적
Die Römer an Rhein und Main
Societäts-Verlag
2006
[4]
문서
Tabula Peutingeriana
[5]
웹사이트
Arenacium
https://www.perseus.[...]
perseus.tufts.edu
[6]
문서
Itinerarium Antonini
[7]
문서
Lauriacum
[8]
웹사이트
http://whc.unesc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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