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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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는 1824년 헤센 대공비 바덴의 빌헬미네의 막내딸로 태어나, 1841년 러시아 황태자 알렉산드르 2세와 결혼하여 러시아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내성적이고 병약한 체질로 러시아 궁정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남편 알렉산드르 2세와의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며 농노 해방에 기여했다. 잦은 임신과 출산, 남편의 외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1880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6남 2녀를 두었으며,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슬라브주의를 옹호했으나, 자유와 자본주의를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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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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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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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
로마자 표기 | Maria Alexandrovna |
독일어 이름 | Maximilian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 |
러시아어 이름 |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манова |
출생 이름 | Princess Wilhelmine Marie of Hesse and by Rhine |
출생일 | 1824년 8월 8일 |
출생 장소 |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
사망일 | 1880년 6월 3일 |
사망 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
매장 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대성당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개종 전 루터교) |
배우자 | |
배우자 | 알렉산드르 2세 |
결혼 날짜 | 1841년 |
자녀 | |
자녀 목록 |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부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가문 | |
가문 | 헤센-다름슈타트 가문 |
아버지 | |
아버지 |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공식) |
비공식 아버지 (추정) | 아우구스트 폰 세나르클렌 드 그랑시 |
어머니 | |
어머니 | 빌헬미네 폰 바덴 |
직위 | |
직위 | 러시아 황후 |
재위 기간 | 1855년 3월 2일 – 1880년 6월 3일 |
대관식 | 1856년 9월 7일 |
2. 생애
1824년 다름슈타트에서 헤센 대공비 바덴의 빌헬미네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친아버지는 빌헬미네의 애인인 그란시 남작이었다.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는 스캔들을 우려해 이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했고, 마리아와 오빠 알렉산더는 루트비히와 떨어져 자랐다.
1838년 신붓감을 찾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 알렉산드르는 마리아와 만나 청혼했다. 러시아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반대했지만, 1841년 4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마리아는 내성적이고 병약한 체질이었고,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건강이 더 나빠졌다. 건강 때문에 궁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자, 알렉산드르는 예카테리나 돌고루코프를 포함한 여러 애인을 두었고, 그 소생들은 궁전에서 함께 살았다. 마리아는 농노 해방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65년 큰아들 니콜라이의 죽음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855년 시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남편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마리아는 황후로서 적십자사 설립을 주도하고 여성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등 자선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마리아는 영국 왕실의 알리체 공주와 교류하며, 그녀의 오빠 에딘버러 공 알프레트와 자신의 막내딸을 결혼시켰다. 알리체 사후에도 그 아이들을 만나러 헤센 대공가를 찾았고, 이 인연으로 아들 세르게이가 알리체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은 니콜라이 2세와 헤센의 알릭스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1880년 6월 3일 55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824년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정식 이름은 막시밀리아네 빌헬미네 아우구스테 소피 마리였다. 어머니는 헤센 대공비 바덴의 빌헬미네였는데, 빌헬미네의 정부(情夫)였던 그란시 남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소문이 있었다.[4]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는 스캔들을 우려해 마리아와 마리아의 오빠 알렉산더를 자신의 자녀로 인정했다.[1]마리아와 알렉산더는 유겐하임 근처 하일리겐베르크에서 성장했다.[5] 어머니 빌헬미네와 시녀 마리안 폰 제나르클렌스 드 그란시로부터 교육받았는데,[5] 프랑스 문화, 재정, 역사, 문학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6]
어머니 빌헬미네가 사망한 후, 마리아와 알렉산더는 아버지 루트비히 2세의 궁정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출생의 정통성에 대한 의혹으로 인해 루트비히 2세는 이들에게 냉담하게 대했다.[6]
2. 2. 러시아 황태자와의 만남과 결혼
1838년, 결혼 상대를 찾아 독일을 여행하던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산드르는 헤센의 마리와 만났다.[8] 당시 14세였던 마리는 가스파레 스폰티니의 오페라 ''라 베스탈레'' 공연에서 알렉산드르에게 소개되었는데,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날씬했으며 겸손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10][11] 알렉산드르는 마리에게 첫눈에 반했고,[11] 마리가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의 친딸이 아니라는 소문에도 불구하고[13]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알렉산드르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마리의 출생에 대한 소문과 헤센 가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12] 그리고 마리가 어머니에게서 폐결핵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와 결혼하지 않느니 차라리 왕위를 포기하겠다."라고 편지를 보내며[4] 어머니를 설득했다. 결국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184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리를 직접 만나본 후 결혼을 허락했다.
1840년 4월, 헤센 공주와 러시아 황태자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14] 같은 해 8월, 마리아는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16] 1841년 4월 16일, 두 사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의 대성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17]
2. 3. 러시아 황태자비 시절
마리아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에 병약한 체질로, 러시아 궁정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마리아는 궁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고, 남편 알렉산드르는 아내 외에 애인을 두기 시작했다.[19] 특히 예카테리나 돌고루코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서자는 궁전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결혼 후, 젊은 부부는 겨울 궁전 남서쪽 구역의 스위트룸에 정착했다.[15] 여름에는 차르스코예 셀로에 거주했는데, 그들의 아파트는 예카테리나 궁전의 주보프 별관에 있었다.[18] 마리아는 시골 생활을 선호하여 그곳에서 더 사적인 삶을 즐겼다.[20]
마리아는 시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의 호감을 얻었으며, 니콜라이 1세는 그녀에 대한 모든 소문에 대해 언급조차 금지했다.[21] 또한, 남편의 고모인 엘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녀의 지도를 받았는데, 17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은 가까운 친구가 되어 함께 살롱을 운영하기도 했다.[22]
마리아와 알렉산드르는 서로를 배려하는 행복한 부부였다. 알렉산드르는 아내를 위해 신선한 딸기 연회를 열도록 명령하고, 아침에 그녀의 침대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16] 젊은 부부의 집에서는 낭독, 음악, 카드 놀이와 같은 비공식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렸다. 마리아는 남편과 함께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영혼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었고, 이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를 읽으며 농노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알렉산드르의 공감을 공유하며 열렬한 노예 폐지론자가 되었다.[22]
결혼 16개월 후, 마리아는 첫 아이 알렉산드라 대공녀를 낳았고, 이후 아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낳았다. 1845년과 1847년에는 두 아들 알렉산드르 3세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태어났다. 셋째 아들을 낳은 직후 건강이 나빠져 바트키싱겐에서 요양해야 했다. 1849년, 딸 알렉산드라가 6살 반에 유아 수막염으로 사망하자 큰 슬픔에 잠겼고, 탈린의 해변 도시 레벨로 가서 요양해야 했다.[23] 1850년에는 넷째 아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낳았다.[23] 1853년에는 둘째 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를 낳았다.[25]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아의 판단력과 진지한 성격을 신뢰하여 그녀와 함께 정부를 지지했고, 공식 문서를 열람하고 국정에 대해 논의했다.[16] 마리아는 알렉산드르의 개혁을 지지했으며, 특히 1861년 3월 3일 (구력)에 발표된 농노 해방 선언을 통해 현실화된 농노 해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4]
마리아는 낯가림이 심하고 옷차림에 대한 취향이 없으며 매력이 없는 여성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어머니를 닮아 호흡 기관이 약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후와 맞지 않았다. 잦은 임신은 병을 동반했고, 이는 알렉산드르에게 유혹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마리아는 알렉산드르가 불륜을 저지르고 많은 애첩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의 사이에서 생긴 3명의 서자들과 궁전에 살았다. 1855년 알렉산드르 2세 즉위 후, 마리아의 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공무에 참여하게 했다. 1865년 마리아가 가장 사랑했던 황태자 니콜라이의 죽음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 4. 러시아 황후 시절
1855년 2월 18일, 시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남편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 황제(차르)로 즉위했다.[26] 당시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패배하여 혼란스러운 시기였다.[27] 1856년 8월 14일부터 26일까지 비잔틴 양식의 화려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는데, 5시간 동안 진행된 대관식에서 네 명의 궁정 여인이 마리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다 거의 땅에 떨어뜨릴 뻔했으나, 망토 자락에 걸려 간신히 막아졌다. 이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29]대관식 9개월 후인 1857년 4월에 다섯 번째 아들 세르게이를 낳았다.[30] 우울증을 앓던 마리아는 요양을 위해 키싱겐으로 보내졌다.[31] 1860년 10월 3일에는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자녀인 파벨을 낳았지만,[32] 너무 쇠약해져서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다.[33]
러시아 전통에 따라 황후는 차르의 배우자보다 우선권을 가졌기에, 마리아는 자선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의 주도로 적십자사가 러시아에 설립되어 가장 크고 부유한 공공 기관으로 발전했다.[34] 그녀는 제국 전역의 후원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모금했다.[34] 여성 위원회는 지방 위원회가 모금한 평균 자금의 두 배를 모금했다.[35]
마리아는 적십자사의 최고 후원자로서 5개의 병원, 12개의 자선 시설, 30개의 보호소, 2개의 연구소, 38개의 체육관, 156개의 하위 학교, 5개의 사립 자선 단체를 후원했다. 1877년-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자선 활동을 더욱 확장했다. 1872년에는 전 연방 여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러시아 여성 교육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34] 학생들은 물리학, 화학, 의학 수업을 받았다.[35]
러시아 궁정은 12월 초에 시즌을 시작하여 사순절까지 이어졌다.[38] 영하의 기온과 살을 에는 바람이 부는 동안, 과열된 궁궐 안에서는 무도회와 연회가 열렸다.[39] 그러나 마리아는 궁정 행사를 싫어했고 러시아 귀족들을 경박하다고 여겼다.[40] 사회는 그녀가 차갑고 거리를 두며 옷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불평했다.[14]
마리아는 자녀 양육과 교육에 힘썼으며, 경험 많은 교사를 신중하게 선택하고 엄격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녀의 노력은 장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에게 집중되었다.[41]
마리아는 빅토리아 여왕이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며느리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을 "어리석은 늙은이"라고 비난하며, 딸 마리아에게 "그런 시어머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렵고 마리가 안타깝다"라고 말했다.[43],[44]
마리아는 낯가림이 심하고 옷차림에 대한 취향이 없으며, 매력 없는 여성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호흡 기관이 약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후와 맞지 않았다. 잦은 임신과 출산은 그녀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알렉산드르 2세가 많은 애첩을 두는 계기가 되었다. 마리아는 남편의 외도와 정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의 관계,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서자들이 궁전에서 함께 사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했다. 1865년 장남 니콜라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 5. 건강 악화와 죽음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많은 공식 행사에 참석해야 했지만, 1860년대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다. 의사들은 그녀에게 따뜻한 기후에서 겨울을 보내고 남편과의 관계를 중단하여 수명을 연장하라고 조언했다.[45] 러시아에 남는 것을 선호한 그녀는 크림반도에서 휴양하라는 제안에 동의했고, 알렉산드르 2세는 이후 아내를 위해 리바디아 빌라를 구입했다.[45] 1861년 8월, 마리아와 남편, 자녀 알렉세이, 세르게이, 파벨은 처음으로 크림반도를 방문하여 남부의 식물, 온화한 기후, 아름다운 집, 주변 공원에 매료되었다.[45][47]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습한 여름은 마리아의 허약한 체질에 타격을 주어, 그녀는 오랫동안 러시아 수도에 부재했다. 1864년 6월, 남편과 세 명의 어린 자녀와 함께 바이에른의 바트 키싱겐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1865년 초, 니스에서 아들 니콜라이가 척수 수막염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돌고루코바 공주와 세 자녀를 두었는데,[53] 그녀가 암살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마리아의 마지막 병환 동안 궁으로 옮겨졌다.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1880년 6월 3일, 55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3. 자녀
알렉산드르 2세와의 사이에서 6남 2녀를 낳았다.[61]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 1842년 8월 30일 | 1849년 7월 10일 | 리나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아 수막염으로 6세에 사망했다.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1843년 9월 20일 | 1865년 4월 24일 |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 약혼했으나 결핵 수막염으로 사망했다. |
알렉산드르 3세 | 1845년 3월 10일 | 1894년 11월 1일 | 러시아 황제.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1847년 4월 22일 | 1909년 2월 17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대공비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1850년 1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 알렉산드라 즈코브스카야와 결혼하여 1남을 두었다. |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 1853년 10월 17일 | 1920년 10월 24일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드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1857년 5월 11일 | 1905년 2월 17일 | 헤센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905년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 |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1860년 10월 3일 | 1919년 1월 30일 |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알렉산드라와 초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올가 발레리아노브나와 재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1919년 혁명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
4. 유산
케메로보주의 마린스크[63]와 올란드 제도의 마리에함은 마리아 황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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