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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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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214년부터 기원전 148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통칭한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로마가 한니발과 싸우는 동안 마케도니아를 묶어두기 위한 소규모 분쟁으로,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필리포스 5세의 도발에 로마가 개입하여 벌어졌으며, 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하며 템피 조약이 체결되었다. 셀레우코스 전쟁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팽창에 맞서 로마가 개입하여 벌어졌고,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페르세우스의 공격적 행보에 대한 로마의 개입으로,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하며 마케도니아는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안드리스쿠스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하여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 전쟁들을 통해 로마는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헬레니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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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전쟁
주요 전투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214–205 BC)아폴로니아
1차 라미아
2차 라미아
만티네이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200–196 BC)아오우스
키노스케팔라이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192–188 BC)테르모필레
코리쿠스
에우리메돈
미오네수스
마그네시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172–168 BC)칼리니쿠스
피드나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150–148 BC)탈나 패배
피드나 (148 BC)

2.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214년 ~ 205년)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마케도니아필리포스 5세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의 지원으로 한니발의 군사력이 강화될 것을 우려하여 프라에토르를 군대와 함께 아드리아해로 파견했다. 기원전 211년 이후 아이톨리아 동맹페르가몬의 지원을 받은 로마군은 마케도니아군과 소규모 교전을 벌였고, "해적 행위 방지"를 위해 아드리아해 연안의 소규모 영토를 점령했다. 로마의 관심사는 정복이 아니라 한니발과의 전쟁 동안 마케도니아를 묶어두는 것이었다.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조약으로 전쟁은 결론 없이 종료되었다. 비록 소규모 분쟁이었지만, 이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로마의 군사 개입의 길을 열었다. 이 분쟁은 이후 로마-마케도니아 전쟁(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으로 시작)과는 대체로 독립적으로 진행되었다.[1]

마케도니아 전쟁과 그리스의 로마 정복

3.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200년 ~ 19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13]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가 한니발을 지원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군대를 아드리아해로 파견했다. 로마군은 아이톨리아 동맹페르가몬의 지원을 받아 마케도니아군과 소규모 교전을 벌였고, "해적 행위 방지"를 위해 아드리아해 연안의 소규모 영토를 점령하는 데 그쳤다. 당시 로마의 관심사는 정복이 아니라 마케도니아가 한니발과 싸우는 동안 묶어두는 것이었다. 이 전쟁은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조약으로 결론 없이 종료되었으나, 이후 마케도니아에 대한 로마의 군사 개입의 길을 열었다.

지난 세기 동안 그리스 세계는 알렉산드로스 3세 제국의 세 주요 후계 왕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다. 기원전 230년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특히 불안정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집트를 정복하려 했고, 이집트는 대규모 동원 작전으로 대응하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원전 205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집트는 남북 간 큰 내전이 벌어졌다.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집트 전체를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정복, 분할하기로 했다.[11]

이는 그리스 세계를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유지해 온 수 세기 동안의 정치 질서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으며, 특히 독립을 유지해 온 작은 그리스 왕국들에 큰 위협이었다. 페르가몬과 로도스의 사절단은 로마 원로원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 조약과 로마 개입의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그리스 대표단은 로마를 움직이는데 성공했다.[12]

로마는 필리포스에게 로마의 새로운 그리스 동맹국에 대한 작전을 중단하라는 최후 통첩을 내렸으나, 필리포스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로마는 로마군과 그리스 동맹군을 파견하여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시작했다.[13] 기원전 198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테살리아 평원에 도착했고,[14] 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필리포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평화를 호소하게 만들었다.[15] 그 결과 템페 조약이 체결되어 필리포스 5세는 국경 밖의 문제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고, 그리스 정복을 포기해야 했다. 기원전 196년 올림픽에서 로마는 "그리스의 자유"를 선포하며, 그리스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표방했다.[16]

3. 1. 배경: 헬레니즘 세계의 정세 변화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의 세 주요 후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11] 기원전 230년경,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케도니아 제국 부활의 야망을 드러내며 마케도니아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소아시아의 정세는 다시 불안정해졌다.[11] 셀레우코스 제국은 여러 차례 이집트를 침공했고, 이집트는 시민 총동원령으로 대응하여 이를 막아냈다.[11] 그러나 기원전 205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그의 간신들이 뒤를 잇자, 새롭게 등장한 이집트 군벌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남북 간 내전을 일으켰다.[11]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집트 붕괴 시 이집트 전체를 무혈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 두 국가를 통합하여 이집트를 분할 점령하려는 동맹을 맺었다.[11] 이는 100년간 그리스 세계의 상대적 안정을 유지했던 정치 질서를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였으며, 특히 독립을 유지하던 작은 그리스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었다.[12]

당시 그리스인들은 점차 세력이 커져가는 로마 공화정을 경멸했고, 로마인들 역시 그리스인들을 증오했다.[12]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케도니아의 존재는 이러한 정세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12] 그리스 측의 페르가몬로도스 사절단은 로마 원로원에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5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쿠스 3세가 맺은 '불가침 조약'의 증거를 제시했다.[12] 이 조약의 정확한 성격과 로마의 개입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그리스 사절단은 로마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12]

3. 2. 로마의 개입과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기원전 230년경 셀레우코스 제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그리스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집트를 정복하려 했고, 이집트는 대규모 동원 작전으로 대응하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원전 205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분할하기로 동맹을 맺었다.[11]

이는 그리스 세계의 오랜 정치 질서에 심각한 위협이었고, 특히 독립을 유지해 온 작은 그리스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페르가몬과 로도스는 로마 원로원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는 증거를 가져왔다. 로마는 처음에 외교적으로 개입하려 했다.[12]

로마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 동맹국에 대한 작전을 중단하라는 최후 통첩을 내렸으나, 필리포스는 이를 무시했다. 로마는 로마군과 그리스 동맹군을 파견하여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시작했다.[13] 당시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기원전 198년 테살리아 평원에 도착했다.[14] 기원전 197년 로마군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필리포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필리포스는 평화를 호소했다.[15]

3. 3. 템피 조약과 그리스의 자유

기원전 197년 로마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필리포스 5세를 크게 패배시켰고,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평화를 요청했다.[15] 그 결과 템피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필리포스 5세는 국경 밖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고, 그리스 정복을 포기해야 했다.[16] 사실상 마케도니아는 멸망한 상태가 되었다. 기원전 196년 올림픽에서 로마는 '그리스인의 해방'을 선포했는데, 이는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새로운 정책을 표방하는 것이었다.[16] 로마는 그리스가 안정되었고, 더 이상 불안정한 상황을 겪지 않고 그리스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16] 로마는 이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더 이상의 이익을 챙기지 않고 모든 군대를 철수시킨 후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향했다. 평화가 찾아온 그리스 동맹국들은 다시 이전의 무관심한 중립국으로 돌아갔다.[16]

4. 셀레우코스 전쟁 (기원전 192년 ~ 188년)

이집트 세력이 약해지고 마케도니아가 쇠퇴하자,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리스 전체를 점령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로마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면서 평화가 찾아온 듯했으나, 마케도니아의 몰락은 오히려 셀레우코스 제국의 팽창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17] 필리포스 5세에 맞섰던 로마의 동맹국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와 다시 손을 잡았고, 심지어 필리포스 5세 자신도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18]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황제의 군사 고문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과 셀레우코스 황제가 그리스는 물론 로마까지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경고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을 재건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19]

이에 위협을 느낀 로마는 스페인갈리아를 제외한 전 지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시칠리아에 방어 기지를 구축하는 등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로마를 외면했던 그리스 동맹국들도 다시 로마의 편에 섰다.[19]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그리스 연합군은 그리스로 진군하여 로마-시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초기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군대는 약점을 드러냈고,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리스 북부로 후퇴했다. 로마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진입,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8][20]

셀레우코스 제국은 평화를 요청했고, 로마는 그리스 정복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이 패배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고, 이후 파르티아, 그리스, 유대 등의 공격으로 제국은 붕괴되었다.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로마는 다시 그리스에서 철수했지만, 그리스 지역에는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남아있게 되었다.[21]

4. 1.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협

이집트 세력이 약해지고 마케도니아가 붕괴하자,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리스 전체를 점령하려는 공격적인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점점 성공을 거두었다.[17]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난 후 로마가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그리스 동맹국들은 평화가 찾아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확장을 막는 마지막 장애물인 마케도니아가 쓰러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필리포스에게 대항했던 로마의 동맹국들은 셀레우코스와 적대 동맹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 자신도 로마와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18]

상황은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황제의 핵심 고문이 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과 셀레우코스 황제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뿐만 아니라 로마를 포함한 유럽 전체, 북아프리카, 인도 전역까지 정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셀레우코스는 이전 아케메네스 왕조의 많은 부분을 약탈했는데 기원전 2세기에는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19]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전에 구축했던 제국을 다시 부활시켰다. 또한 이들은 알렉산더 이상으로 악랄했는데 비록 몇 세기 전에 존재했던 신아시리아 제국만큼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지나간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피정복인들을 다른 지역들로 추방하는 일도 있었다.[19]

4. 2. 로마-그리스 연합군의 반격

셀레우코스 제국이집트 세력이 약해지고 마케도니아가 붕괴하자, 그리스 전체를 점령하려는 공격적인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점점 성공을 거두었다.[17]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난 후 로마가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그리스 동맹국들은 평화가 찾아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확장을 막는 마지막 장애물인 마케도니아가 쓰러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필리포스에게 대항했던 로마의 동맹국들은 셀레우코스와 적대 동맹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 자신도 로마와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18]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황제의 핵심 고문이 되고,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과 셀레우코스 황제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뿐만 아니라 로마를 포함한 유럽 전체, 북아프리카, 인도 전역까지 정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셀레우코스는 이전 아케메네스 왕조의 많은 부분을 약탈했는데 기원전 2세기에는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19]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전에 구축했던 제국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들은 알렉산더 이상으로 악랄했는데 비록 몇 세기 전에 존재했던 신아시리아 제국만큼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지나간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피정복인들을 다른 지역들로 추방하는 일도 있었다.[19]

이에 로마는 막 평정된 스페인갈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19] 심지어 셀레우코스가 이탈리아 반도를 포함한 유럽에 도달할 경우를 대비하여 시칠리아에 주요 수비대를 설치하기까지 했다.[19] 이 두려움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수년간 로마를 거의 무시하다시피한 그리스 동맹국들에게도 전파되었고, 전쟁 이후 처음으로 로마를 진심으로 따랐다.[19]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지휘 하에 로마 – 그리스 본군이 동원되어 그리스로 출발, 로마-시리아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초기 전투에서 셀레우코스의 약점이 드러난 이후, 〈테르모필레 전투〉를 통해 로마의 힘을 되찾으려 했다. (수세기 전 300명의 스파르타인이 페르시아 제국에 그러했듯이)[18] 스파르타처럼, 셀레우코스도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리스 북부로 쫓겨났다. 로마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셀레우코스를 추격했다.[18] 이 순간이 로마군이 아시아에 최초로 진입했던 순간이었다.[18] 결정적인 교전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일어났으며 로마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18][20]

셀레우코스는 화친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셀레우코스의 그리스 정복을 좌절시켰다. 여전히 많은 영토를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패배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멸망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동부의 파르티아와 서부의 그리스, 남부의 유대도 점점 강해져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위협했다. 그들의 제국은 다음 세기의 폰투스에게 분할되는 과정에서 조각으로 붕괴되고 처참하게 멸망했다.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로마는 다시 그리스에서 철수했다. 주요 세력이 없으면 안정된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타나게 된다.[21]

5.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2년 ~ 168년)

기원전 179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죽자,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의 부흥을 꾀하며 주변국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22] 페르세우스가 로마의 동맹국에 대한 공격 음모를 꾸미자, 로마 원로원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선포했다. 처음에는 로마군이 마케도니아군에 고전했지만,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군이 마케도니아군을 크게 격파했다.[23] 로마는 그리스가 다른 나라에게 넘어간다면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리스를 포함한 유럽 세계에 최초로 영구적인 발판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마케도니아 왕국은 로마에 의해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로써 마케도니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1991년 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마케도니아 지역은 2000년 동안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6.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50년 ~ 148년)

기원전 150년에서 기원전 148년 사이에 벌어진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마케도니아 왕위를 주장하는 안드리스쿠스(필리포스 참칭자)가 옛 왕국을 재건하려 시도하면서 일어났다. 로마는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을 신속하게 격파했다.[24]

이에 아카이아 동맹은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를 아카이아 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케도니아 몰락 직후의 짧은 기간의 전쟁이었다. 당시 로마는 이미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해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하고 군사적 우위를 확립한 상태였다. 폴리비우스는 압도적인 로마의 힘을 알면서도 전쟁을 선동한 아카이아 동맹 지도자들을 비난했다.[25] 결국 아카이아 동맹은 패배했고, 로마는 기원전 146년 코린토스를 완전히 파괴했다.[1]

이후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아카이아와 에피루스라는 두 개의 로마 속주로 나누어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6. 1. 안드리스쿠스의 반란과 진압

기원전 150년에서 기원전 148년 사이에 벌어진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후손을 참칭한 안드리스쿠스(필리포스 참칭자)가 일으킨 전쟁이다.[24] 그는 마케도니아 제국 재건을 외치며 그리스 반도를 다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로마는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안드리스쿠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을 크게 격파했다.[24] 이 승리로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마케도니아는 아카이아와 에피루스라는 두 개의 로마 속주로 분할되었다.[25]

7. 아카이아 전쟁 (기원전 146년)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에 맞서 새로운 전쟁을 준비했다. 이것은 종종 아카이아 전쟁으로 불리며, 마케도니아의 몰락 직후에 벌어진 짧은 기간의 전쟁으로 유명하다. 이 시점까지 로마는 마케도니아 요새, 동맹국 또는 속국과 싸우기 위해 그리스에서만 작전을 수행했다.[24]

로마의 군사적 우위는 이미 확립되었으며, 마케도니아와 그 자랑스러운 팔랑크스를 이미 세 차례 격파했고, 아시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우월한 병력으로 승리했다. 아카이아 지도자들은 로마와의 이러한 전쟁 선포가 희망 없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알고 있었다. 로마는 훨씬 더 강력하고 거대한 적들을 상대로 승리했고, 로마 군단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에 대한 우위를 입증했기 때문이다.[25]

폴리비오스는 이 동맹 도시들의 선동가들이 자멸적인 전쟁을 하도록 국민들을 부추겼다고 비난한다. 민족주의적 움직임과 우세한 적을 상대로 승리하겠다는 생각이 동맹을 이러한 성급한 결정으로 이끌었다. 아카이아 동맹은 신속하게 패배했고, 교훈을 주기 위해 로마는 카르타고가 파괴된 해와 같은 해인 기원전 146년에 코린토스를 완전히 파괴했다.[1]

그리스에서 거의 한 세기 동안 끊임없는 위기 관리를 한 후, 로마가 철수하면 항상 내부 불안정과 전쟁으로 이어졌기에,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두 개의 새로운 로마 속주인 아카이아와 에피루스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이 전쟁으로 아카이아 동맹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8. 결과 및 영향

안드리스쿠스라는 마케도니아 왕위 찬탈자가 옛 왕국을 재건하려 시도하며 다시 한번 그리스를 불안정하게 만들자, 기원전 150년부터 기원전 148년까지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벌어졌다.[1] 로마는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를 신속하게 격파했다.[1]

이에 대응하여,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에 맞서 새로운 전쟁을 준비했다. 이것은 때때로 아카이아 전쟁으로 불리며, 마케도니아의 몰락 직후에 벌어진 짧은 기간의 전쟁으로 유명하다.[1] 이 시점까지 로마는 마케도니아 요새, 동맹국 또는 속국과 싸우기 위해 그리스에서만 작전을 수행했다. 이미 로마의 군사적 우위는 확립되었으며, 마케도니아와 그 자랑스러운 팔랑크스를 이미 세 차례 격파했고, 아시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우월한 병력으로 승리한 상태였다.[1]

아카이아 지도자들은 로마와의 전쟁 선포가 희망이 없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알고 있었다. 로마는 훨씬 더 강력하고 거대한 적들을 상대로 승리했고, 로마 군단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에 대한 우위를 입증했기 때문이다.[1] 폴리비오스는 이 동맹 도시들의 선동가들이 자멸적인 전쟁을 하도록 국민들을 부추겼다고 비난한다. 민족주의적 움직임과 우세한 적을 상대로 승리하겠다는 생각이 동맹을 이러한 성급한 결정으로 이끌었다.[1]

아카이아 동맹은 신속하게 패배했고, 교훈을 주기 위해 로마는 기원전 146년에 코린토스를 완전히 파괴했는데, 이는 카르타고가 파괴된 해와 같다.[1] 그리스에서 거의 한 세기 동안 끊임없는 위기 관리를 한 후, 로마가 철수하면 항상 내부 불안정과 전쟁으로 이어졌기에,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두 개의 새로운 로마 속주인 아카이아와 에피루스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Rome – The republic
[2]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3]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4]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5]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6]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7] 서적 In the Name of Rome
[8]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9] 서적 Empires of Trust
[10] 서적 Empires of Trust
[11]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12]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13] 서적 The Enemies of Rome
[14] 서적 The Romans: From Village to Empire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15] 서적 The History of Rome
[16]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17]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18] 서적 The History of Rome
[19]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20] 서적 The Classical World
[21] 서적 Rome Enters the Greek East
[22] 서적 The History of Rome
[23] 서적 The Enemies of Rome
[24] 서적 The Romans: From Village to Empire
[25] 서적 History of Rome – The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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