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호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막호발은 선비족 모용부의 초대 수령이다. 그는 위나라가 건국되자 세력을 이끌고 요서로 이주하여 공손연 토벌에 협력한 공로로 솔의왕에 봉해졌으며, 이후 극성 북부에 영토를 얻었다. 당시 유행하던 보요관을 착용하여 '보요'로 불리다가 '모용'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아들 모용목연이 그의 뒤를 이었다. 막호발의 '모용'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선비의 군주 - 단석괴
단석괴는 후한 시대 선비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넓은 영역을 지배하며 후한을 위협한 지도자로, 그의 통치는 이후 선비족 발흥의 기반이 되었다. - 선비의 군주 - 모용준
모용준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연의 2대 군주이자 초대 황제로, 아버지 모용황의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한 후 후조의 혼란을 틈타 중원 진출을 본격화하여 황제를 칭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전진, 동진과 대립했고 수도를 업으로 옮겼다. - 모용씨 - 모용준
모용준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연의 2대 군주이자 초대 황제로, 아버지 모용황의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한 후 후조의 혼란을 틈타 중원 진출을 본격화하여 황제를 칭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전진, 동진과 대립했고 수도를 업으로 옮겼다. - 모용씨 - 모용황
모용황은 333년부터 348년까지 전연을 통치한 인물로, 형제들과의 내분을 극복하고 전연을 건국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고 한화 정책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다가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막호발 | |
---|---|
막호발 | |
![]() | |
개인 정보 | |
성씨 | 모용씨 (慕容氏) |
이름 | 막호발 (莫護跋) |
로마자 표기 | Mòhùbá |
생몰년도 | 미상 |
국적 | 선비족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계근 (契斤) |
아들 | 목연 (木延) |
2. 생애
막호발은 선비족 출신의 유력한 부족장 중 한 명으로, 원래는 새외 (중국 북쪽 국경 밖)에 거주했다.[4] 위나라 건국 초기에 자신이 따르던 선비족 여러 부족의 백성과 그 어른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요서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때 이주한 집단이 모용부의 모체가 되었다.[4]
그의 사후에는 아들 모용목연이 부족장의 자리를 이었다. 사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정시 6년(245년)에는 이미 모용목연이 부족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으로 여겨진다.
2. 1. 초기 활동과 이주
막호발의 조상은 본래 선비산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이후 대릉하 일대로 이주하였다.[1] 위나라가 건국되자 막호발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요서로 옮겨 정착하였다.[1] 이때 이주한 집단이 모용부의 모체가 되었다.[4]238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당시 이에 합류해 공을 세웠으며,[2] 그 공으로 솔의왕(率義王)에 봉해진 뒤 극성(棘城, 현재의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북부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2]
당시 연과 대 지방에서는 보요관(步搖冠)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며, 막호발 또한 보요관을 쓰고 다녀 막호발의 일파는 '보요(步搖)'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가 후에 비슷한 음을 가진 '모용(慕容)'이 되었다.[3]
2. 2. 위나라와의 협력과 솔의왕 책봉
위나라가 건국되자 막호발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요서로 옮겼다.[1]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이에 합류하여 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솔의왕(率義王)에 봉해진 뒤 랴오닝성 진저우시 극성(棘城) 북부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1]2. 3. 사망과 계승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합류하여 공을 세워 솔의왕(率義王)에 봉해졌으며, 극성(棘城) 북부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1] 그의 사후 아들인 모용목연이 그 뒤를 이었다.[1] 사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정시 6년(245년)에는 이미 모용목연이 어른으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으로 여겨진다.[2]3. '모용' 명칭의 유래
모용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보요관 설: 막호발이 연과 대 지방에서 유행하던 보요관을 즐겨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보요'라고 불렀고, 이후 발음이 비슷한 '모용'으로 바뀌었다는 설이다.[3]
- 천지삼광 설: 막호발이 "하늘과 땅의 덕을 모방하고, 해, 달, 별의 도량을 용(잇겠다)"라고 선언하며 모용을 성씨로 정했다는 설이다.[3]
- 모용사 지명 설: 막호발의 조상이 '모용사'라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부락 이름으로 삼았다는 설이다. 하지만 이는 《위서》의 기록 오류에서 비롯된 오해라는 주장도 있다.
- 단석괴 휘하 모용 부족장 설: 후한 환제 때 선비족 지도자 단석괴 휘하에 '모용'이라는 부족장이 있었는데, 여기서 모용부의 명칭이 유래했다는 설이다. 호삼성은 《자치통감》 주석에서 이 설을 지지했다.[2]
3. 1. 보요관 설
막호발이 사용한 보요관은 당시 연과 대 지방에서 많이 사용하던 관모였다. 막호발 또한 보요관을 쓰고 다녀서, 그의 일파는 '보요(步搖)'라고 불렸다. 이후 발음이 비슷한 '모용(慕容)'으로 바뀌었다고 한다.[3] 이는 전연 건국 후 신하들이 퍼뜨린 설이라는 주장도 있다.[2]3. 2. 모용사 지명 설
막호발(莫護跋)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부락명(및 씨족명)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막호발의 조상이 '''모용사'''라는 장소에 거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부락명으로 채택했다고도 한다. 단, 이는 왕침이 저술한 《위서》에 있는 '가최·궐거·모용 '''등'''이 대수가 되었다'라는 문장의 '등(等)'이라는 글자가, 사본 과정에서 '사(寺)'로 바뀌면서 '가최라는 인물이 대수가 되어 모용'''사'''에 거했다'라는 해석으로 바뀌게 되면서 생긴 오해라고도 한다.
3. 3. 천지삼광 설
막호발은 "이의(二儀: 하늘과 땅)의 덕을 '''모'''방하고, 삼광(三光: 해, 달, 별)의 '''용'''(도량)을 잇겠다"라고 선언하고, 모용을 성씨로 채택했다고 한다.[3]3. 4. 단석괴 휘하 모용 부족장 설
후한 환제 시대, 선비족의 대인 단석괴는 선비족의 여러 부락을 묶어 통일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그 땅을 동부·중부·서부의 3부로 나누고, 각 부에는 여러 대인을 두어 통치하게 했는데, 중부의 대인 중에는 '모용'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는 부락의 대수(部族の大帥: 부족의 대집단을 통솔하는 유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이것이 바로 모용부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2]。이것이 옳다면, 막호발은 조상의 이름을 부락명으로 한 것이 된다.4. 가계
- 아버지 : 미상
- 어머니 : 미상
- * '''본인''' : 막호발(? ~ ?)
- * 부인 : 미상
- ** 아들 : 모용목연
- ** 며느리 : 미상
5. 전승
전설에 따르면 그의 8대조는 건귀[4]라는 인물로, 신령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금은으로 된 襦鎧(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갑옷의 일종)를 입고, 금은 안장과 재갈을 갖춘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선비족 사람들은 이를 신으로 여겨 군주로 추대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資治通鑑
[2]
서적
資治通鑑
[3]
서적
晋書
[4]
서적
十六国春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