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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레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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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달레 왕궁은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인 꼰바웅 왕조의 궁궐로, 1857년 민돈 왕에 의해 만달레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면서 건설되었다. 413헥타르 규모의 요새는 4개의 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 안에는 시계탑, 사리탑, 법원, 왕실 묘, 조폐국, 감시탑, 대 알현실, 사자 옥좌실, 유리 궁전 등 다양한 시설이 위치해 있었다. 영국-버마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파괴되었으나, 1989년부터 재건 사업이 시작되어 현재는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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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레 왕궁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만달레 왕궁
만달레 왕궁 전경
위치만달레
용도왕실 거주지
건축
착공1857년
완공1859년
소유 및 관리
소유주미얀마 정부
역사
건설 시작1857년
건설 완료1859년
참고마지막 버마 왕조의 왕궁

2. 명칭

만달레이 왕궁의 공식 명칭은 미얀마어로 ''먀 난 산 죠'' (မြနန်းစံကျော်|먀 난 산 쪼mya; "유명한 왕실 에메랄드 궁전")이다. 또한 ရွှေနန်းတော်ကြီး|쉐 난 도 지mya 또는 "위대한 황금 왕궁"으로도 알려져 있다.

3. 역사

꼰바웅 왕조 시대의 만달레 왕궁 정원을 그린 전통적인 버마 그림


만달레 왕궁은 1857년 2월 민돈 왕이 만달레이를 새로운 수도로 삼으면서 건설을 시작했다.[1] 이전 수도였던 아마라푸라의 궁전 자재를 상당 부분 옮겨와 재활용했으며,[2] 1859년 5월 23일에 공식적으로 완공되었다.[1]

그러나 제3차 영국-버마 전쟁 이후 영국에 점령되어 약탈당하고 '더퍼린 요새'라는 이름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었다.[5][6]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보급 창고로 쓰이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왕립 조폐국과 망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왕궁의 상세한 건설 과정과 식민 지배 시기, 전쟁 중의 파괴 과정은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건설 배경 및 초기 역사

만달레 왕궁은 1857년 2월 민돈 왕이 만달레이를 수도로 삼으면서 건설하기 시작했다.[1] 궁궐의 상당 부분은 아마라푸라에 있던 옛 궁전의 자재를 가져와 재건한 것이다.[2] 도시 계획은 만달레이 언덕을 중심으로 144개 구획의 격자형 도시를 만들고, 그 중심부에 16개 구획 규모의 왕궁 단지를 두는 방식이었다.[3]

413ha 규모의 왕궁 단지는 사방이 길이 2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벽 밖으로는 너비 64m, 깊이 4.5m의 해자가 파여 있었다. 성벽을 따라 169m 간격으로 금색 첨탑이 있는 보루가 세워졌다.[4] 성벽에는 각 면에 3개씩 총 12개의 문이 있었는데, 각 문은 별자리를 상징했다.[1] 성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자를 건너는 다리는 5개가 있었다.[3]

궁전 건설은 1857년 6월에 시작되었다. 1852년 제2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영토가 줄어든 버마 왕국은 새로운 궁전을 호화롭게 지을 만한 재정적 여유가 부족했다. 이 때문에 아마라푸라의 옛 왕궁을 해체하여 그 자재들을 코끼리를 이용해 만달레이 언덕 기슭의 새 부지로 옮겨와 재사용했다. 왕궁 단지 건설은 1859년 5월 23일에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1]

제3차 영국-버마 전쟁 중 영국군은 왕궁을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왕립 도서관을 불태웠다. 버마 왕실의 여러 장식품들은 전리품으로 영국에 빼앗겨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박물관(현재의 V&A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 장식품들은 1964년에 버마(현 미얀마)로 반환되었다.[5][6] 영국은 왕궁 단지를 당시 인도 총독의 이름을 딴 더퍼린 요새(Fort Dufferin)로 개칭하고 군사 기지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군이 이곳을 보급 창고로 사용하다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때 왕립 조폐국과 망루 등 일부 건물만 소실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3. 2. 영국 식민 지배와 약탈

영국 식민지 군대가 만달레 왕궁에 주둔했고, 그 후 약탈했다 (1887년)


제3차 영국-버마 전쟁 동안 영국은 궁전을 점령하여 약탈한 후 왕립 도서관을 불태웠다. 버마의 왕실 장식품은 전리품으로 빼앗겨 영국으로 반출되었으며,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박물관(현재 V&A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964년에는 선의의 표시로 버마로 반환되었다.[5][6] 영국은 궁궐 단지의 이름을 더퍼린 요새로 바꾸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3. 3. 제2차 세계 대전과 파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왕궁 성채는 일본군에 의해 보급 창고로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폭격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파괴되었다. 왕궁 내에서는 왕립 조폐국과 망루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습으로 파괴되는 만달레 왕궁(당시 포트 더퍼린)

3. 4. 재건과 보존 논란 (1989년~현재)

만달레이 왕궁 재건은 1989년 미얀마 고고학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7] 당시 정부 자금이 부족하여, 국가 법질서 회복 위원회가 후원하는 만달레이 왕궁 재건 위원회가 결성되었다.[7] 재건 비용 마련을 위해 만달레이, 마궤, 사가잉의 지방 정부가 건축 계획 수립 및 왕궁의 여러 부분 건설 책임을 나누어 맡았다.[7]

구역담당 건축물
만달레이 구역대알현실, 사자 옥좌
마궤 구역망루, 백합 옥좌실
사가잉 구역거위 옥좌실



재건 과정에서 전반적인 디자인은 원형에 충실하게 따랐으나, 전통적인 건축 기법과 현대적인 기술이 함께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건물 지붕에는 골판 금속이 사용되었고, 건축 자재로 콘크리트가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이는 원래 왕궁이 전적으로 티크 목재로만 지어졌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7]

한편, 왕궁의 홀 중 하나는 티보 왕 통치 시기에 해체되어 슈웨난도 수도원으로 재건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오늘날 원래 목조 왕궁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주요 구조물이다.

2021년 10월,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이후 집권한 국가행정위원회(군사 정부)는 만달레이 왕궁의 역사적인 성벽 옆에 공공 레크리에이션 공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는 고대 건물 보존 및 보호에 관한 2015년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로, 지역 보존론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8]

4. 구조

만달레이 왕궁 평면도, 1911년


만달레 왕궁은 만달레에 위치한 꼰바웅 왕조의 마지막 왕궁으로, 전통적인 미얀마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요새형 궁궐이다. 궁궐 전체는 완벽한 정사각형 형태의 성벽과 그 바깥을 둘러싼 넓은 해자로 구성되어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도록 설계되었다. 성벽의 각 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성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성벽 위에는 방어 시설인 보루와 피아타(pyatthat)라 불리는 첨탑이 세워져 있다. 성벽 안쪽에는 왕족의 거처, 국정 운영 시설, 종교 건물 등 다양한 목적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왕궁의 방어적 기능과 함께 왕권의 위엄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4. 1. 성벽

만달레이 궁궐 벽의 보루


밤의 궁궐 벽


궁궐 요새를 둘러싼 4개의 성벽은 각각 2km 길이로 완벽한 정사각형을 이룬다. 총 48개의 보루가 169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 보루 위에는 금색 팁이 달린 ''피아타''(ပြာသာဒ်|pyatthatmy) 또는 첨탑이 세워져 있다. 성벽 바깥은 폭 64m, 깊이 4.5m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은 일반적인 미얀마 벽돌을 진흙 모르타르로 쌓아 만들었다. 벽의 두께는 기저부가 3m, 상단부가 1.47m이다. 높이는 치성을 제외하면 6.86m이고, 치성을 포함하면 8.23m에 달한다. 총안의 폭은 0.84m이다.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만든 방어벽이 완만한 경사로 설치되어 있다. 이는 비상시 성가퀴로 접근하는 통로이자 성벽 자체를 보강하는 역할을 한다. 방어벽 꼭대기는 폭 1.83m의 평탄한 공간으로, 벽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성가퀴 뒤쪽을 따라 이어진다.[1]

4. 2. 해자

1885년 만달레이 왕궁 해자 위에서 띠보 왕의 왕실 부선


성벽을 둘러싸고 약 18m 떨어진 곳에는 폭 64m, 평균 깊이 4.5m의 해자가 있다. 고대 무기로 무장한 적에게는 이 해자가 강력한 장애물이었으며, 해자를 건너려는 적군은 성벽과 바비칸의 치 위에서 방어하는 병사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해자는 원래 다섯 개의 나무 다리로 연결되었다. 그중 네 개는 각 면에 하나씩 있는 네 개의 주요 정문으로 이어졌고, 다섯 번째 다리는 남서쪽 문으로 이어져 왕조 시대에는 시신 운반과 같은 불길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후 영국군은 군수품과 보급품을 요새로 운반하기 위해 남서쪽과 북서쪽 모서리에 두 개의 다리를 추가로 건설했다.

원래의 다섯 다리는 비슷한 구조로 설계되었으며, 요새와 해자의 방어적 특징과 잘 어울린다.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두 개의 흙으로 만든 둑이 양쪽 강둑에서 해자 안으로 뻗어 나와 교각 역할을 한다. 이 교각 사이의 공간은 천연 크기의 티크 통나무로 덮여 있는데, 이 통나무 두 개의 길이가 다리의 전체 길이를 이룬다. 통나무 양쪽 끝은 교각의 석조물에 일부 덮인 다섯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가로 보 위에 놓인다. 다리 중앙에서 만나는 통나무의 끝부분 역시 다섯 개의 큰 나무 기둥으로 지지되며, 이 기둥의 머리는 유사시 다리를 빠르게 해체하고 제거할 수 있도록 설계된 클리트 위에 놓인 두 개의 큰 나무 판을 통해 연결된다.[1]

4. 3. 성문

성벽의 각 면에는 동일한 간격(508m)을 두고 3개의 문이 배치되어 있어, 총 12개의 문이 있다. 각 문은 고유한 황도대 별자리를 상징하며, 문의 폭은 4.8m이다.

각 문 위에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정자 형태의 구조물인 피얏탓(pyatthat)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문 양옆에 자리한 반원형 요새가 지지하는 기둥 위에 놓여 있다. 왕족이 이용했던 중앙 문 위의 피얏탓은 7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 문들의 피얏탓은 5층 구조이다. 12개의 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은 동쪽 벽 중앙에 위치한 문으로, 궁궐 안의 어전과 사자 옥좌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문 양쪽에 있는 반원형 요새는 성벽 바깥으로 7m 돌출되어 있으며, 그 너비는 10.36m이다. 요새의 바깥쪽 면은 단순한 몰딩과 석고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문으로 이어지는 안쪽 면은 별다른 장식 없이 지면에서 바로 솟아 있는 형태이다. 각 문에는 양쪽으로 열리는 두꺼운 나무 문짝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영국 병합 이후 철거되었다.[1] 문 양쪽에는 요새와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각각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4. 4. 궁궐 내부 시설

만달레 왕궁 내부에는 왕족의 생활 공간, 국정 운영 시설, 종교적 건축물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쪽 입구 부근에는 시간을 알리는 시계탑(바호진)과 불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사리탑(스웨다윈)이 위치했다.[1] 국정 운영의 중심지로는 최고 법원 역할을 수행한 흘루타와 왕이 신하들을 공식적으로 접견하던 대 알현실이 있었다.[1] 또한, 궁궐 북쪽에는 민돈 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의 왕실 묘가 조성되었으며,[1] 미얀마 최초의 주화를 발행했던 왕립 조폐국 건물도 궁궐 내부에 있었다. 부지 내에는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망루(난민트사웅)가 세워져 있었다.[9]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8개의 옥좌 중 가장 중요한 사자 옥좌는 대 알현실과 흘루타에 각각 놓여 있었으며,[1] 왕의 주요 거처이자 가장 화려한 건물 중 하나로 꼽히는 유리 궁전(흐만난다도지)은 왕실 생활의 중심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4. 4. 1. 시계탑 (바호진)

동쪽에서 궁궐 구내로 들어서면 오른쪽, 즉 북쪽에 시계탑인 ''바호진''(ပဟိုရ်စင်mya)이 있다. 시계탑은 높은 사각형 받침대 위에 4개의 기둥이 나무 플랫폼을 받치고, 그 위에 이중 지붕이 얹힌 비교적 단순한 구조이다. 전체적으로 작은 장식과 hti(우산)로 꾸며져 있다. 이 플랫폼에서는 매 시각, 즉 3시간마다 징과 매우 큰 북을 규칙적으로 울려 도시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렸다. 낮과 밤은 각각 4개의 시각으로 나뉘었다. 시간 측정에는 물시계가 사용되었다. 물시계는 큰 물 항아리와 그 안에 놓인 놋쇠 그릇으로 구성된다. 놋쇠 그릇 바닥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의 크기는 그릇이 정확한 간격으로 물로 채워져 항아리 바닥으로 가라앉도록 계산되었다. 이것이 시간을 재는 방식이었다.[1]

4. 4. 2. 사리탑 (스웨다윈)

1903년경의 사리탑


시계탑 남쪽, 길 건너편에 위치한 곳은 ''스웨다윈''(စွယ်တော်စင်|스웨다윈mya) 또는 사리탑이다. 전통적인 미얀마 건축 양식의 훌륭한 예인 사리탑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낮은 기단, 둘째는 첫 번째 기단에서 솟아오르는 직사각형 블록 또는 테라스, 셋째는 3단 지붕(pyatthat|퍄탓mya)으로 덮인 사리실이다. 전체 구조물 위에는 미얀마 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인 pin|핀mya과 hti|흐티mya가 올려져 있다. 기단과 테라스의 네 면을 따라 마름모꼴 장식으로 된 성벽 난간이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마누시하(manussiha|마누시하mya), 즉 날개 달린 레오그리프 조각이 있는 작은 사각형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 상상 속 동물은 사람의 머리와 두 개의 몸을 가진 모습이다.

테라스 위의 사리실은 정사각형이며,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는 서쪽에 있으며 테라스 꼭대기로 접근할 수 있는 계단과 마주보고 있다. 이 좁은 계단은 3단으로 된 코핑(벽 위의 덮개돌)으로 장식된 두 개의 벽돌 벽 사이에 갇혀 있다. 각 코핑의 하단은 크고 우아한 소용돌이 모양으로 끝난다. 이러한 종류의 장식 계단은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미얀마 전역에서 벽돌이나 나무로 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사리실의 벽과 지붕은 우아한 석고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건물은 사리탑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불교사리, 특히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가 안치된 적은 없었다. 이 탑은 단순히 왕궁에 그러한 탑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졌으며, 이는 꼰바웅 왕조의 Bayingaung|바인가웅mya 왕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4. 4. 3. 흘루타 (최고 법원)

''흘루타''(လွှတ်တော်|흘루타my) 또는 최고 법원은 법정의 공식 업무가 수행되던 곳이었다. 사자 옥좌(Sihasana)는 궁궐 내 8개의 옥좌 중 으뜸이었다. 홀은 세 개의 지붕을 가진 두 개의 나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물과 꽃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고, 아래쪽은 빨간색으로 칠해지고 위쪽은 금박을 입힌 거대한 티크 나무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그 안에는 국왕을 위한 사자 옥좌(Sihasana)가 있었다.[1]

4. 4. 4. 왕실 묘

민돈왕의 묘, 1903년경


시계탑에서 북쪽으로 가면 왕족 몇몇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묘들이 모여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1878년에 사망한 민돈 왕의 묘이다. 원래는 벽돌로 된 뺫탓(pyatthat, 미얀마 사원의 지붕 형태)이었으며, 회반죽을 바르고 흰색으로 칠해졌다. 티보 왕이 아버지의 추모를 위해 세웠다. 사와빠는 왕의 묘를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이 묘는 전형적으로 띠(hti, 미얀마 사원의 탑 꼭대기 장식)로 끝나는 7중 지붕으로 덮인 사각형 구조이다. 다른 묘들에는 민돈 왕의 세 아내, 즉 대왕비, 티보 왕의 어머니인 라웅셰 미바야, 그리고 수파야라트 여왕의 어머니인 신뷰마신 여왕의 묘가 있다.[1]

4. 4. 5. 왕립 조폐국

왕립 조폐국은 능묘에서 북동쪽으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1865년에 최초의 버마 주화가 주조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영국에 병합된 뒤에는 몇 년 동안 군대를 위한 빵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궁궐 내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이다.

4. 4. 6. 망루 (난민트사웅)

만달레이 왕궁 감시탑


왕궁 부지에는 높이 24m의 ''난민트사웅''(နန်းမြင့်ဆောင်mya) 또는 감시탑이 있다. 이 탑은 7층짜리 ''피얏탓''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서 도시를 조망할 수 있었다.[9] 국왕과 왕비는 때때로 탑에 올라 강, 언덕, 호수가 있는 주변 경치를 감상했다. 또한 탑 꼭대기에서 바사(불교 사순절)가 끝나는 타딩윳 축제 기간 동안 마을의 등불 축제를 감상하기도 했다. 1885년 11월 만달레이를 점령한 영국군의 입성을 수파야랏 여왕이 이 탑에서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이 감시탑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4. 4. 7. 대 알현실

1903년의 대 알현실


대 알현실은 왕이 신하들을 만나는 공간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왕이 동쪽을 바라보며 옥좌에 앉았을 때를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북쪽(왼쪽) 알현실과 오른쪽에 있는 남쪽(오른쪽) 알현실,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연결하며 옥좌 주변 난간으로 이어지는 중앙 알현실이 있다. 대 알현실 전체의 크기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77.1m에 달한다.

궁궐 기단 아래, 동쪽 계단 양쪽에는 오래된 유럽식 대포 몇 문과 포탄 더미가 놓여 있으며, 서쪽 정면 계단 옆에도 같은 형태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다.[1]

대 알현실 건물은 특히 외부 장식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지붕을 이루는 나무 부분, 즉 처마, 뱃머리 널, 처마판 등은 모두 정교하게 조각되고 금박으로 덮여 화려함을 더한다(단, 두 지붕 사이 패널은 금박만 입혔다). 조각은 주로 낮은 돋을새김 기법을 사용했으며, 처마판에는 연꽃과 잎사귀 무늬 띠가 새겨져 있고, 뱃머리 널은 단순하면서도 장식 효과가 뛰어난 덩굴무늬(스크롤 디자인)로 꾸며졌다. 장식의 화려함은 특히 엉덩이 지붕(아래쪽 지붕)의 모서리와 박공(지붕의 삼각형 벽) 끝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엉덩이 지붕 모서리에는 여러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두 개의 나무 판자가 직각으로 놓여 있는데, 주요 장식 요소는 화려한 무늬, 잎사귀, 연꽃 띠, 그리고 꼬임무늬(기요셰) 등이다.

지붕 모서리 각진 부분에는 왕족의 상징인 양식화된 공작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작은 탑(종탑)이 있다. 처마판 아래에는 선반에서 깎아 만든 듯한 펜던트 장식이 달려 있다. 박공 끝 부분에도 아래에 펜던트가 달린 공작 형태의 장식이 동일하게 발견된다. 이 모든 조각은 금박 처리 외에도 단순한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반짝임을 더했다. 이러한 장식 양식은 대 알현실뿐만 아니라 궁궐 내 다른 건물에서도 유사하게 찾아볼 수 있다.

4. 4. 8. 사자 옥좌실

흘루타(Hluttaw, လွှတ်တော်mya) 또는 최고 법원은 법정의 공식 업무가 수행되던 곳이었다. 사자 옥좌(Sihasana)는 궁궐 내 8개의 옥좌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 홀은 세 개의 지붕을 가진 두 개의 목조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과 꽃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래쪽은 붉은색으로 칠해지고 위쪽은 금박을 입힌 거대한 티크 나무 기둥들이 홀을 지탱하고 있었다. 홀 안에는 국왕을 위한 사자 옥좌(Sihasana)가 놓여 있었다.[1]

1903년 사자 옥좌


궁궐에는 총 8개의 옥좌가 있었는데, 그중 사자 옥좌( သီဟာသနပလ္လင်mya, Sihasana Palanka)가 가장 크고 다른 옥좌들보다 훨씬 정교하게 조각되고 마감되었다. 이 옥좌와 동일한 복제품이 한때 흘루타에도 있었다. 오직 왕만이 옥좌에 앉을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이 앉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이 옥좌에 앉는 사람은 정당한 주인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사실상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옥좌의 받침대는 두 개의 연꽃으로 이루어진 연꽃 형태로, 위쪽 연꽃이 아래쪽 연꽃 위에 거꾸로 놓인 모습이다. 이는 불상 받침대와 유사하지만, 두 연꽃이 만나는 가장 좁은 부분 중앙에는 작은 틈새 띠가 있고, 그 위에는 약간 더 큰 틈새가 있다. 이 틈새에는 두 마리의 큰 사자 외에도 작은 사자 조각상들이 있었다. 옥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뒤쪽 방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야 했으며, 이 통로는 금박을 입힌 철제 격자 미닫이문으로 막혀 있었다.

다른 옥좌들은 다음과 같다.

옥좌 이름 (버마어)영어 명칭설명
힌타 옥좌 (ဟင်္သာသနပလ္လင်mya)Hinthasana힌타(신화 속 새) 모양 옥좌
가자사나Gajasana비다익(추밀원)에 있던 코끼리 모양 옥좌
싱가사나Singhasana소라 모양 옥좌
미가사나Migasana사슴 모양 옥좌
마루라사나Marurasana공작 모양 옥좌
파두마사나 (ပဒုမ္မာသနပလ္လင်mya)Padumasana백합(연꽃) 모양 옥좌
바마라사나Bhamarasana벌 모양 옥좌



원래의 사자 옥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인한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제3차 영국-버마 전쟁 이후 1885년, 영국 당국이 옥좌를 인도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후 미얀마로 반환되어 현재 양곤의 미얀마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4. 9. 유리 궁전 (흐만난다도지)

유리 궁전 설계


오늘날의 유리 궁전


မှန်နန်းတော်ကြီး|흐만난다도지my(Hmannandawgyi) 또는 유리 궁전은 만달레 왕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민돈 왕의 주요 거처였으며, 모든 어전처럼 나무 칸막이로 동쪽과 서쪽 두 개의 방으로 나뉜다.

동쪽 방에는 '벌 좌'(Bhamarasana|바마라사나my)라는 어좌가 있다. 받침대 아래 작은 틈새에 벌의 형상이 장식되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는 정실 왕비 지명, 왕실 결혼식, 미얀마 설날 기념 행사, 어린 공주들의 공식적인 귀 뚫는 의식 등이 열렸다. 1878년 민돈 왕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시신이 이 방에 안치되기도 했다.

서쪽 방은 민돈 왕의 주요 생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4명의 정실 왕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각 왕비는 왕실 침실 근처에 방을 배정받았다. 왕실 침실은 왕궁 동쪽의 사자 어전 위에 있는 황금 첨탑과 비슷한, 7개의 지붕이 겹쳐진 작은 첨탑인 '햣탓' 아래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이 햣탓은 금박을 입힌 구리로 만들어졌고, 첨탑 방 양쪽에는 항상 하얀 우산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유리 궁전의 시녀들은 교대로 서쪽 방 주변에 배치되어 왕을 모셨다. 공주나 작은 왕비라 할지라도 슬리퍼를 신거나 황금 우산을 든 채 이 방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하인들과 함께 입구에 두고 와야 했다.

티보 왕 시대에는 수파얄랏 왕비가 이 흐만난의 서쪽 방에 작은 방을 마련해 사용했다.

5.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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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Mandalay Palace https://web.archive.[...] Directorate of Archaeological Survey, Burma 2006-08-22
[2] 서적 List of Ancient Monuments in Burma (I. Mandalay Division) https://archive.org/[...] Office of the Superintendent, Government Printing, Burma 1910
[3] 서적 The Management of Secondary Cities in Southeast Asia. Case Study: Mandalay UN-Habitat
[4] 서적 Mandalay and Other Cities of the Past in Burma https://archive.org/[...] Hutchinson & Co.
[5] 서적 Burmese Art 1974
[6] 서적 Wanderings in Burma http://reader.librar[...] F. J. Bright & Son
[7] 간행물 The Reconstruction of mandalay Palace University of London
[8] 웹사이트 Myanmar Junta Criticized Over Mandalay Palace Park Plan https://www.irrawadd[...] 2021-10-14
[9] 서적 Burmese design & architecture Tuttle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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