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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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만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 출신 인물로, 목라근자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도맡아 백제와 왜 양국을 오가며 권세를 누렸으나, 구이신왕의 왕모와 간통하여 왜로 소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목만치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와 동일 인물인지, 또는 일본의 소가노 마치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목만치는 백제의 유력한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인 목(木)씨 출신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목협(木劦), 《
목만치의 성(姓)인 목씨(木氏)는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로, 백제의 유력 귀족 가문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목협(木劦),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목라(木羅)로 표기되어 두 글자 성씨였다. 《일본서기》는 백제계 사서인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여 백제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목만치를 일본 고대 씨족인 소가 씨(蘇我氏)의 시조 소가노 마치(蘇我滿智)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3] 그러나 소가노 마치와 동일인물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2. 생애
2. 1. 《일본서기》 기록
목만치의 성인 목씨(木氏)는 백제의 유력한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계 사서인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여 백제의 장군인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오진키(應神紀)〉는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여 목만치를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목라근자는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369년) 당시 백제-왜 연합군이 임나 7국을 평정하고 침미다례를 공격할 때 백제군을 지휘하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후 목만치는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도맡아보며 백제와 왜 양국을 오갔으며, 직지왕(直支王)이 죽고 구이신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해 백제의 국정을 장악하였다.
《일본서기》에는 목만치가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도맡으면서 권세가 당대에 몹시 강하였으며, 구이신왕의 왕모와 간통하여 국정을 전횡하다 오진 천황에 의해 왜로 소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7] (다만 《일본서기》 기록들의 성격상 오진 천황에 의해 소환되었다는 부분은 천황을 현창하기 위해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윤색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서기 문서 참고).
『일본서기』 응신 천황 25년 조에 따르면, 백제의 직지왕(제18대 전지왕)이 훙서하고 그 아들인 구이신(제19대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왕이 어렸기 때문에 목만치가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만치가 왕의 어머니와 밀통 등을 저질렀기 때문에 응신 천황이 만치를 소환했다는 기록이 있다.[1]
같은 조항에서 이어서 『백제기』(백제삼서 중 하나로 현재는 전해지지 않음)의 기록을 인용한다. 그 중에서, 목라근자가 신라를 토벌했을 때 그 나라의 여자를 취하여 낳은 아이가 목만치라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의 정치를 행한 외에, 백제와 일본 사이를 왕래하며 일본 조정의 명을 받아 백제의 정치를 담당하며 군주와 같은 권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 폭정이 일본에 알려졌기 때문에, 일본 조정에 소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
2. 2.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개로왕 21년(475년) 조에는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고구려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개로왕이 왕자(왕제) 부여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킬 때 조미걸취와 함께 그를 수행하였다.[8] 《삼국사기》는 이후 목협만치와 조미걸취의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름의 유사성과 활동 시기를 고려하여, 목만치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3]
3. 목만치와 목협만치
이름의 유사성과 활동 시기를 바탕으로, 목만치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劦滿致)와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 목만치는 475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권세를 누렸던 소가 씨(蘇我氏)의 시조 소가노 마치(蘇我滿智)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제기되었다.[3]
《삼국사기》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조에는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尉禮城)을 공격한 고구려군에 맞서 개로왕이 죽기 직전, 왕실의 뒷일을 부탁하며 피신시킨 왕자(왕제) 부여문주(扶餘文周)를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호종했다.[8] 《삼국사기》는 이후 목협만치와 조미걸취의 행적을 언급하지 않아,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1971년 일본 사학자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는 소가 씨(蘇我氏)의 시조 소가노 마치(蘇我滿智)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보는 주장을 처음 제기했다. 또한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목협만치'를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설도 제기되었다.[9] 그러나 《일본서기》 오진키(應神紀) 25년은 서기 414년, 《삼국사기》의 '목협만치'는 개로왕 21년(475년)으로 시대 차이가 크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는 369년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할 때 등장하는데, 목만치가 태어난 시점을 369년으로 보면 목협만치(475년)와는 백여 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따라서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명이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목라근자의 활동 시기와 목만치의 탄생 시기 차이가 크다는 지적에 대한 반론도 있다. 백강 전투처럼 《일본서기》는 해외(주로 한반도)에서 왜 세력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전투를 '신라 정벌'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목만치의 탄생 시점인 《일본서기》의 '신라를 칠 때'(討新羅時)를 369년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369년)에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 기사가 없다. 오히려 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내물 이사금 18년(373년) 기록을 보면, 근초고왕이 신라에 도망친 백성을 돌려달라 요청하며 "두 나라가 화친하여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친 백성을 받아주는 것은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366년과 368년의 나제 화친이 373년까지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인 김현구는 한문 기록의 특성상 "신라를 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바이다"(討新羅時 聚其國婦 而所生也)라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쓴 것이라고 지적했다. 369년은 임나 지역 관련 백제의 군사 행동이 진행 중인 시기였다. 현지에서 군사적, 정치적 업무가 바쁜 와중에 부인을 얻고 자식을 본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라는 보장도 없다. 목라근자는 임나 지역 군사 행동 이후에도 현지에 머무르며 기반을 다졌을 것이고, 현지에서 부인을 얻고 아들을 낳아 장성하기까지는 기록된 시점보다 후대의 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목만치의 어머니인 '신라 여자'는 목라근자가 임나 평정 후 현지에 오래 머물며 얻은 '외처'(外妻)로, 남편보다 나이가 훨씬 젊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목만치가 아버지 목라근자와 조손(祖孫)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기록 해석에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목만치가 《일본서기》 기록대로 목라근자의 아들이자 《삼국사기》의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11]
목만치의 가문인 목씨(木氏)는 『수서』 백제전에 등장하는 백제의 8대 성씨 중 하나이다.
『일본서기』 응신 천황 25년 조에 따르면, 백제 직지왕(제18대 전지왕)이 사망하고 아들 구이신(제19대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왕이 어려 목만치가 정치를 했다. 그러나 만치가 왕의 어머니와 밀통하는 등 비행을 저질러 응신 천황이 만치를 소환했다는 기록이 있다.[1]
같은 조항에서 『백제기』(백제삼서 중 하나: 현존하지 않음)를 인용한다. 목라근자가 신라를 토벌했을 때 그 나라 여자를 취하여 낳은 아이가 목만치이다.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 정치를 담당하고, 백제와 일본 사이를 왕래하며 일본 조정의 명을 받아 백제 정치를 담당하며 군주와 같은 권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폭정이 일본에 알려져 일본 조정에 소환되었다.[1]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년) 조에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개로왕(제21대 왕)이 남쪽으로 왕자(제22대 문주왕)를 보냈는데, 왕자와 동행한 사람 중에 "목려만치"가 있다. 이를 목만치와 동일 인물로 보는 설이 있지만,[2] 연대 차이가 커서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목만치의 활동 시기는, 전지왕(직지왕)의 사망 연도가 사료에 따라 다르다. 『삼국사기』는 420년, 『일본서기』는 294년(간지 2운 적용 시 414년)으로 6년의 오차가 있다.[1] 『송서』는 「백제국전」에서 420년, 424년 영(腆)의 견사, 430년 비(제20대 비유왕)의 견사를 전하고, 본기에서는 429년 백제왕의 견사를 전하므로, 429년부터 430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1](『송서』에는 구이신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기사에서는 목라근자가 백제 장군으로서 대가야를 부흥시킨 것을 계기로 목만치가 해당 지역 정치를 담당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목만치가 백제 측에서 대가야 문제에 전문적으로 관여한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목만치가 백제 국정을 장악했다는 점도 불분명하며, 의문이 제기된다.
목만치에 관해서는, 5세기 중반의 소가 가 마치와 음이 통하는 것에서 이들을 동일 인물로 보고, 목만치가 일본으로 건너와 소씨를 일으켰다는 설이 있다.[1] 이는 응신 천황 25년을 간지 3운으로 늦추면 474년이 되어 개로왕 21년(475년)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목만치의 일본 소환과 문주왕·목협만치의 "남"으로의 파견을 동일시한 설이다. 소씨의 개명성은 도래계 씨족이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설명된다.[2] 그러나, 응신 천황기는 통상 간지 2운을 적용해야 하는 점, 목만치·목협만치와 소가가 마치의 전해지는 연대가 차이가 있는 점, 대성인 "목"을 버릴 근거가 희박한 점, 진씨·한씨가 도래계를 칭하므로 당시 정세상 출신을 위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점, 문주왕은 신라로 향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서 부정하는 견해가 강하다.[2](자세한 내용은 「소가 씨」도 참조).
4. 목만치와 소가노 마치
이러한 의문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5세기 중반의 소가노 마치와 목만치의 이름이 비슷하여 이들을 동일 인물로 보고, 목만치가 일본으로 건너와 소씨를 일으켰다는 설이 알려져 있다.[1] 이 설은 응신 천황 25년을 간지 3운으로 늦추면 서기 474년이 되어 개로왕 21년(475년)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목만치의 일본으로의 소환과 문주왕·목예만치의 "남"으로의 파견을 동일시한 것이다.[2] 소씨의 개명성은 도래계 씨족이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설명된다.[2]
그러나 응신 천황기는 통상 간지 2운을 적용해야 하는 점, 목만치·목예만치와 소가가 마치의 전해지는 연대가 차이가 있어 모두 동일 인물로 볼 수 없는 점, 대성인 "목"을 버릴 근거가 희박한 점, 진씨·한씨가 도래계를 칭하므로 당시 정세상 출신을 위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점, 애초에 문주왕은 문맥상 신라로 향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서, 부정하는 견해가 강하다.[2](자세한 내용은 「소가 씨」도 참조).
5. 가계
목만치(木滿致)는 백제의 유력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인 목(木)씨 출신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백제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신라 여인을 통해 얻은 아들이라고 한다.[1]
항목 | 내용 |
---|---|
아버지 | 목라근자(木羅斤資)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신라 여인 |
아들 | 목만치(木滿致) (생몰년 미상) |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목협(木劦), 《일본서기》에는 목라(木羅)로 기록되어 있으며, 두 기록 모두 복성(復姓), 즉 두 글자 성씨이다. 이름의 유사성과 활동 시기를 바탕으로 목만치를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劦滿致)와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3]
6. 대중문화 속 목만치
- 이익준의 소설 《목만치》(전3권, 예담출판사, 2011)가 출간되었다.[1]
- 엄광용의 소설 《광개토태왕 담덕》(전9권, 새움, 2023) 제7권 ‘전쟁과 평화’에서 담덕에게 항복한 백제 아신이 고구려에 복수하고자 왜로 도망쳐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목만치에게 사두를 밀사로 보내는 장면이 묘사되었다.[2]
- 한겨레정보통신의 게임 《왕도의 비밀》(1997)은 최인호의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3D 액션 게임으로, 만년이라는 캐릭터와 함께 목만치가 플레이어 캐릭터로 등장한다. 개로왕 8년(462년)을 배경으로, 목만치는 취모검(吹毛劍)이라는 검을 사용하고 정통 본국검법을 구사하며, 왕흥사에서 행방불명된 개로왕의 왕비 해사화를 구출하고 왕비 실종 현장에 남겨진 ‘정‘(井) 자의 비밀을 추적한다.[3]
참조
[1]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2 日本書紀 (1)
小学館
2002
[2]
서적
謎の豪族 蘇我氏(文春新書495)
文藝春秋
2006
[3]
저널
蘇我氏の出自について
1971
[4]
서적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비
2002
[5]
서적
백제사회사상사
지식산업사
2010
[6]
서적
백제사회사상사
지식산업사
2010
[7]
서적
일본서기
[8]
서적
삼국사기
0475
[9]
논문
蘇我氏の出自について
1971
[10]
서적
가야정치사연구
학연문화사
1998
[11]
서적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작과비평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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