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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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트 1세는 1326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 오르한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술레이만 파샤의 사망 이후 술탄의 자리에 올라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영토를 확장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투 직후 암살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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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트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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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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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베이 에미르-이 아잠 가지 한 휘다벤디가르 술타뉘스-셀라틴 멜리퀴울-뮐루크 |
재위 | 1362년 3월 – 1389년 6월 15일 |
이전 군주 | 오르한 |
다음 군주 | 바예지드 1세 |
배우자 | 귈치체크 하툰 타마라 하툰 파샤 멜레크 하툰 기타 |
자녀 | 사브지 베이 바예지드 1세 야쿠프 첼레비 네피세 하툰 |
전체 이름 | 무라트 빈 오르한 |
왕조 | 오스만 왕조 |
아버지 | 오르한 |
어머니 | 닐뤼페르 하툰 |
출생일 | 1326년 6월 29일 |
출생지 | 부르사, 오스만 베이국 |
사망일 | 1389년 6월 15일 |
사망지 | 코소보 평원, 브랑코비치 공국 |
매장 장소 | 장기: 무라트 1세 영묘, 코소보 신체: 술탄 무라트 튀르베, 오스망가지, 부르사 |
서명 | 투그라 |
종교 | 수니파 이슬람 |
기타 | |
로마자 표기 | I. Murad, Murad-ı Hüdavendigâr |
페르시아어 표기 | خداوندگار (Khodāvandgār, 하느님의 헌신자) |
2. 생애
무라트 1세는 아버지 오르한 1세의 뜻을 이어받아 발칸반도에서 군사 행동을 계속했다. 1369년 동로마 제국의 트라키아 지방에 있던 중요 거점 아드리아노폴리스(현재 에디르네)를 정복하여 부르사와 함께 제2의 수도로 삼았다.[29]
유럽에 대한 영토 확장을 계속하여 세르비아, 불가리아, 헝가리의 제후국들과 싸워 1385년에는 소피아를 정복했고, 발칸 지방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며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해 황제에게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아나톨리아 지방의 제후국인 카라만의 연합군과 싸워 코나안 전투에서 승리하고, 투르크계 여러 제후국과 융화 정책을 추진해 혼인 등의 수단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1389년 우로슈 4세 사후 쇠퇴를 시작한 세르비아와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의 왕자 라자르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투 직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탈영병으로 가장해 술탄의 막사로 들어온 세르비아의 귀족 밀로스 오블리크에게 독 묻은 단검에 찔려 암살당했다.[5][6] 밀로스 오블리크는 세르비아의 영웅 서사시에 ''무라트를 찔러 죽인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2. 1. 즉위 전
1326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 오르한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4] 아버지 오르한 1세 재위 시절에는 İnönü, Eskişehir|이노뉘영어의 총독을 지냈다.[20] 오르한 1세 생존 시에는 무라트 1세의 형인 쉴레이만 파샤가 오스만 제국의 계승자로 여겨졌으나, 1359년 쉴레이만은 불의의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다.[25] 오르한 1세 사후 황자들 사이에서 계승권 다툼이 발생하였고, 이 싸움에서 승리한 무라트 1세가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26]2. 2. 즉위 초 및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반란 진압
무라트 1세는 즉위 후 처음 2년 동안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발생한 반란 진압에 주력했다.[23] 발칸 반도의 군사 작전은 라라 샤힌 파샤, 하지 일 베이, 에우레노스 베이 등에게 맡기고 아나톨리아로 건너가, 동쪽 카라만의 선동으로 아히(장인들의 동업 조합)에게 점령당한 앙카라를 회복했다.[20]2. 3. 에디르네 점령
무라트 1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발칸반도에서 군사 행동을 계속하였다. 1369년 동로마 제국의 트라키아 지방에 있던 중요 거점 아드리아노폴리스(현재 에디르네)를 정복하여 이곳을 수도 부르사와 함께 제2의 수도로 삼았다.[29]앙카라를 탈환한 후, 무라트 1세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 공략 준비에 착수하여 원군을 저지하기 위해 주변 성을 공격했다. 에우레노스 베이는 코모티니(귈륌쥐네)와 Didymoteicho영어(디메토카)를 점령했고, 하지 일 베이는 Keşan영어(케샨)과 İpsala영어(퀴프셀라), 알렉산드루폴리스(데데아치)를 점령했다.
1362년 7월, 아드리아노폴리스 공략에 파견된 라라 샤힌 파샤는 사즐데레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에 승리하였고[27], 1363년 아드리아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28] 라라 샤힌 파샤는 더 나아가 필리포폴리스(필리베, 프로브디프), 사그라, 세레스를 함락시켜 트라키아 지방을 오스만의 손에 넣었다. 특히 필리포폴리스는 식량 보급 기지, 에디르네 방어 최전선 기지, 발칸 산맥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군 감시 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기에,[27] 요지를 점령한 오스만 군은 진군을 일시 중단하고 군비를 정비했다.[28]
필리포폴리스의 성주는 세르비아로 도망쳐 오스만에 대한 공격을 요청했고, 교황 우르바누스 5세는 모든 기독교도에게 반 오스만 십자군을 호소했다.[28] 헝가리, 불가리아, 세르비아, 왈라키아, 보스니아로 구성된 연합군이 에디르네로 진군했고, 하지 일 베이는 정찰을 나섰다.[28] 하지 일 베이는 수적으로 우세한 발칸 연합군의 방심을 이용하여 기습을 가했고(Battle of Sırp Sındığı|마리차 전투 (1364년)영어), 기습을 받은 발칸 연합군은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던 많은 이들이 마리차 강에서 익사했다. 1364년 마리차 강변에서의 승리는 터키어로 "세르비아 대패"를 의미하는 "슬릅 슨두우" 전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28]
무라트는 적국의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28] 1366년 에디르네를 발칸 반도의 수도로 삼았다.[18][29]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점령할 때까지 에디르네는 아나톨리아의 부르사와 함께 오스만 황제의 거주지로 여겨졌다.[29]
2. 4. 발칸 반도 정복 사업
무라트 1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발칸반도에서 군사 행동을 계속했다. 1369년 동로마 제국의 트라키아 지방에 있던 중요 거점 아드리아노폴리스(현재의 에디르네)를 정복하여 이곳을 수도 부르사와 함께 제2의 수도로 삼았다.[30]무라트 1세는 유럽에 대한 영토 확장을 계속하여 세르비아, 불가리아, 헝가리의 제후국들과 싸워 1385년에는 소피아를 정복했고, 발칸 지방의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며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해 황제에게 공물을 요구하였다.
1371년, 라라 샤힌 파샤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유력한 영주인 브카신 무르냐브체비치와 Jovan Uglješa|요반 우글레샤영어를 마리차 강 전투에서 패배시키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정복의 첫걸음을 내딛었다.[31] 같은 해 무라트는 라라 샤힌 파샤가 이끄는 원정군을 불가리아에 파병했다. 라라 샤힌 파샤는 사마코프 전투에서 불가리아 황제 Ivan Shishman of Bulgaria|이반 시슈만영어를 패배시키고 불가리아를 복속시켰다.[32] 무라트는 시슈만을 후대했으며,[32] 이반 시슈만의 여동생 마리아를 왕비로 맞이했다.
1371년부터 1372년까지 불가리아 원정과 동시에 에우레노스 베이가 마케도니아를 공격했다. 에우레노스 베이의 공격으로 카바라와 드라마가 오스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375년에 세르비아가 소유한 니슈를 일시적으로 빼앗았고,[35] 1378년에는 오스만 군대가 협약을 깨고 불가리아에 침입했다. 군사력과 내정 안정을 위해 무라트는 1380년까지 발칸 여러 국가와 일시적인 휴전 협정을 맺었다.[36] 불가리아는 오스만에 복속을 맹세했고, 세르비아는 매년 일정량의 병력과 은을 공납했다.[37]
1386년에는 라자르 프레벨야노비치 공이 플로치니크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물리쳤다. 오스만 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귀환길에 니슈를 점령하지 못했다. 그동안 오스만 제국과 대립해 온 발칸 반도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세력 확장에 맞서 단결하여 저항하려 했다.[30]
1389년 무라트 1세는 우로슈 4세 사후 쇠퇴를 시작한 세르비아와 싸움을 벌여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의 왕자 라자르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투 직후 전후 처리 석상에서 탈영병으로 가장해 술탄의 막사로 들어온 세르비아의 귀족 밀로스 오블리크의 독 묻은 단검에 찔려 암살당했다. 밀로스 오블리크는 세르비아의 영웅 서사시에 그 이름을 남겼으며, ''무라트를 찔러 죽인 영웅''으로 전해지고 있다.
2. 5. 코소보 전투
1389년 무라트 1세의 군대는 라자르의 지휘 아래 세르비아 군대 및 동맹군과 코소보 전투에서 격돌했다.[22]무라트 1세가 암살된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서로 다르게 전해진다. 당시 기록들은 주로 전투가 벌어졌고 라자르 왕자와 술탄 모두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언급한다. 무라트 1세의 죽음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와 추측은 실제 사건 수십 년 후인 15세기에 퍼져 기록되었다. 서방의 한 기록에 따르면, 전투 초기에 무라트 1세는 세르비아 귀족이자 기사였던 밀로시 오빌리치에게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5][6] 반면, 대부분의 오스만 연대기 작가들(디미트리에 칸테미르 포함)[7]은 무라트 1세가 전투가 끝난 후 전장을 돌아다니다가 암살당했다고 기록한다.
오스만군 좌익을 지휘하던 무라트 1세의 장남 바예지드 1세가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우익을 지휘하던 다른 아들 야쿠브 베이는 바예지드에 의해 술탄의 지휘 텐트로 불려갔지만, 도착했을 때 암살당하여 바예지드가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389년 10월 20일, 피렌체 상원(콜루치오 살루타티 작성)이 보스니아 왕 트르트코 1세에게 보낸 편지에는 무라트 1세(와 야쿠브 베이)의 살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12명의 세르비아 귀족들이 무라트 1세를 방어하는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다. 그들 중 한 명인, 추정상 밀로시 오빌리치는 술탄의 텐트까지 들어가 목과 배를 칼로 찔러 죽였다.[8]
무라트 1세의 내장은 코소보 전투터에 묻혔고, 오늘날까지도 전투터 모퉁이에 있는 "메셰드-이 후다벤디가르"라고 불리는 곳에 남아 현지 무슬림들에게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99년에서 2006년 사이에 훼손되었고 최근에 보수되었다.[9] 그의 다른 유해는 아나톨리아 수도인 부르사로 옮겨져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건물에 있는 묘에 묻혔다.[9]
3. 칭호
1383년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술탄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4] 무라트 1세는 아버지 오르한처럼 베이 칭호를 사용했지만, 비문이나 일부 화폐에는 술탄 칭호를 사용했다.[44][45] 이즈니크의 니르페르 구빈원 비문에도 술탄 칭호가 사용되었다.[45][46]
오스만 기록에 따르면 무라트 1세의 칭호에는 베이(Bey), 에미르(Emîr-i a’zam)(대 에미르), 가지(Ghazi), 후다벤디가르(Hüdavendigâr), 칸(Khan), 파디샤(Padishah), 술탄위스 셀라틴(Sultânü’s-selâtîn)(술탄들의 술탄), 멜리크위르 뮬룩(Melikü’l-mülûk)(말릭들의 말릭) 등이 있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록에는 차르(Tsar)로, 제노바 공화국 문서에서는 "도미누스 아르미라토룸 투르키에"(dominus armiratorum Turchie)(튀르크의 군주)로 언급되었다.[4]
4. 정책
무라트 1세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데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재상의 수를 늘리고 우라마(지식인) 출신의 챤달르 카라 할릴 파샤를 대재상으로 임명했다. 군주 직속 상비군인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했으며, 사법대신(kaziasker), 총사령관(beylerbeyi), 와지르(재상) 등 오스만 제국의 행정 및 정부 조직 대부분을 확립했다.
유목민이나 '''가지'''라 불리는 전투 집단에서 발전한 오스만 제국에서, 무라트 1세는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여 절대적인 통치자로 만들고자 했다. 1383년 술탄 칭호를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이슬람법(샤리아)에 기초한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오스만 제국을 이슬람 국가로 발전시켰다. 동시에 지배층이 아닌 그리스도교도도 포함하는 정책을 펼쳤다.
4. 1. 군사
무라트 1세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재상의 수를 늘리고, 우라마(지식인) 출신의 챤달르 카라 할릴 파샤를 대재상으로 등용했다. 또한 군주 직속 상비군인 예니체리 군단을 설립하고, 사법대신(kaziasker), 총사령관인 베일러베이(beylerbeyi), 와지르(재상) 등 오스만 제국의 행정 및 정부 조직 대부분을 확립했다.
무라트 1세는 카라만과 같은 아나톨리아의 강력한 베일릭, 그리고 유럽의 세르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헝가리와 싸웠다. 1371년 9월 26일, 무라드 1세의 유능한 부관 랄라 샤힌 파샤는 마리차 전투에서 세르비아 원정대를 격파했다.[49] 1385년에는 소피아가 오스만에 함락되었고, 1386년 플로치니크 전투에서는 오스만군이 패배하기도 했지만, 귀환길에 니슈를 점령했다.
무라트 1세 통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은 다른 이슬람 선진국들을 모델로 삼아 국가 조직을 재편했다.[44] 예니체리는 무라트가 정복지의 기독교도들을 징발하여 창설한 것으로 여겨진다.[18][19][47] 아버지 오르한이 상비군 창설을 시도했던 것을 계승하여, 노예로 얻은 이교도와 이민족에게 훈련과 교육을 시켜 군인 노예로 길렀다.[48]
1360년대 트라키아 정복 중에 시행된 펜칙(펜지크) 제도는 데브시르메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27] 전쟁에서 얻은 포로의 5분의 1이 군주에게 보내져 군인 노예로 충당되었다.[49]
군대 조직화가 진행됨에 따라 황자의 군사적 역할은 감소하고, 측근이 베일레르베이(군 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49] 대신 황자들은 산자크(소군관구)의 장으로 임명되었다.[50] 무라트 통치 시대에는 군주 직속의 군인 노예가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50]
또한 원정에는 오스만에 신종을 맹세한 발칸 반도의 왕후와 영주들도 참여했다.[26]
4. 2. 내정
무라트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국가 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그는 재상의 인원수를 늘리고, 그 우두머리인 대재상으로 우라마(지식인) 출신의 투르크계 유력자인 챤달르 카라 할릴 파샤(Çandarlı Kara Halil Hayreddin Pasha)를 등용했다. 또한 군주 직속의 상비군인 보병군단 예니체리 군단을 설립하고, 사법대신(kaziasker), 총사령관인 베일러베이(beylerbeyi), 와지르(재상) 등 오스만 제국의 행정, 정부 조직 대부분이 그의 치세 동안 확립되었다.[51][52][53]유목민이나 '''가지'''라고 불리는 전투 집단에서 발전한 오스만 제국에서, 무라트 1세는 동족이나 동년배 중 1인자에 불과했던 군주의 권력을 절대적인 통치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383년 술탄 칭호를 카이로에 있던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처음으로 공식 인정을 받은 것도 무라트 1세 시대였다.
동시에 이슬람법(샤리아)에 기초한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로 발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지배층이 아닌 그리스도교인을 포함시킨 것도 무라트 1세 시기 오스만 제국의 특징이었다.
무라트 1세 시대에는 국가의 법을 담당하는 카디(카지, قاضي)(판사) 제도가 정비되었고, 새롭게 카자스켈(카자 아스켈, قاضي عسکر)(법무장관)직이 설치되었다.[51] 행정을 담당하는 대신에게는 군사적 권한이 주어졌고, 권한 확대에 따라 대대신(大宰相)을 필두로 여러 대신이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였다.[52] 카자스켈에 임명된 찬다를루 가문(チャンダルル家)의 카라 할릴(カラ・ハリル)은 예니체리(예니체리, ينيچري) 설치에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찬다를루 가문은 대대신과 대신을 많이 배출하였다.[53]
5. 가족 관계
무라드 1세는 적어도 일곱 명의 후궁, 다섯 명의 아들,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12][13][14][15][16]
배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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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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