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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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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탕화는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의 무장으로, 주원장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1326년 안후이성 펑양현에서 태어났으며, 주원장과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었다. 홍건적의 난에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에 기여하여 신국공에 봉해졌다. 이후 북원과의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해안 방어에도 힘썼다. 1395년 사망했으며, 동구왕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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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탕화
원래 이름湯和
큰제목신국공 동구양무왕
자(字)딩천(鼎臣, Jeongsin)
출생일1326년 6월 8일
출생지원나라 후난 성 정저우
사망일1395년 8월 22일
사망지명나라 저장 성 항저우 신국공 사저
자녀2남 3녀 (그 중 장남 탕정, 차남 탕예)
종교불교
묘소탕화묘
왕조명나라

2. 생애

탕화는 원(元) 말기인 1352년 곽자흥이 지휘한 홍건군에 가담하여 주원장과 함께 곽자흥의 제자가 되었다.[2][4] 1355년 곽자흥이 사망한 후에는 주원장을 보좌하며 서달, 목영 등과 함께 그의 주요 부하가 되었다. 탕화는 주원장의 지휘 아래 추저우와 허저우, 리수이와 쥐롱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63년 4월 26일에는 홍건적 예하 차석부장군 주원장의 보좌관 겸 전속부관이 되어 주원장을 주군으로 섬겼으며, 서달목영의 사숙(師叔)이 되었다.[3]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초대 군주(명 태조 홍무제)로 즉위하자, 탕화는 명나라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1369년 '''신국공'''(信國公)이라는 작위에 봉해졌다.[3]

1371년 8월 3일, 탕화는 홍무제 주원장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명나라 군사를 일으켜 청두와 충칭 지역을 정벌하여 명하 제국을 멸망시키고, 폐주 명승 등을 명나라에 항복시켰다.[3] 이 일로 인해 홍무제 주원장에게 크게 질책을 받고 파직되어 유배되었으나,[3] 1376년 2월 29일 석방 및 복권(사면)되었다.[3]

1385년에는 귀주성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2][3] 1388년 7월 은퇴를 허락받고 후한 상을 받았다.[1][3]

1395년 8월 22일 탕화가 서거하자 홍무제는 그의 장례를 명 제국 귀족 국장으로 성대히 치렀다. 탕화는 사후 동와왕에 봉해졌으며, 양무(襄武)라는 시호를 받았다.[3]

2. 1. 초기 생애와 홍건적 가담

湯和|탕화중국어원(元) 말기인 1352년 곽자흥이 지휘한 홍건군에 가담하여 주원장과 함께 곽자흥의 제자가 되었다.[2][4] 탕화는 고아였으며, 주원장과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었다. 20대 때, 곽자흥의 농민 봉기군에 장사 10여 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무공을 세워 천호의 지위를 얻었다. 이때, 주원장에게 동료가 되도록 권유했다고 한다.[7] 어린 시절부터 군사적 야망과 재능을 보였던 탕화는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고, 황각사에서 수련승이 된 주원장을 홍건에 초대했다.[5] 주원장은 이 초대를 받아들였고, 공헌을 인정받아 탕화보다 높은 지위를 얻었다. 1354년 초, 탕화는 당시 곽자의 제자였던 주원장에 의해 그의 개인 지휘부 핵심 역할을 할 24명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다.

항목내용
성명탕화
시대원 -
생몰년1326년 (태정 3년) - 1395년 (홍무 28년)
자・별명정신(鼎臣) (자)
본관・출신지종리(鍾離) (안후이성 펑양현)
직관관군총관→통군원수→추밀원동첨
→정남장군→편장군→우부장군
→영록대부, 주국→정서장군→좌부장군
→정로장군
작위중산후(명)→신국공(명)→동구왕(명)
시호양무(명)
진영・소속곽자흥→주원장
가족・일족자: 탕정, 탕례


2. 2. 주원장의 부상과 탕화의 역할

1352년 주원장이 홍건군에 가담한 후, 탕화는 주원장과 함께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355년 곽자흥이 사망하자, 탕화는 주원장을 보좌하며 서달, 목영 등과 함께 주원장의 주요 부하가 되었다.

1353년 탕화는 다홍산 침공에서 주원장의 지휘 아래 추저우와 허저우를 점령했다. 1355년 허저우에서 다른 장군들이 주원장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탕화는 주원장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3]

같은 해, 탕화는 주원장의 지휘 아래 리수이와 쥐롱을 점령했다. 탕화는 정야현을 공격하던 중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전투를 지속하여 정야현을 함락시켰다.[3]

2. 3. 장사성과의 전투

주원장은 "장사성에게는 수비를 통해 공격하고, 진우량에게는 공격을 통해 수비한다"라는 전략을 세웠다.[7] 이 전략에 따라 탕화는 지정 17년(1357년)부터 창저우를 지키며 장사성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창저우는 주원장이 통치하는 여러 도시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으며, 주원장의 적이자 스스로 오나라 왕이라 칭한 장사성의 왕국에 대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3] 탕화와 그의 대규모 수비대는 도시를 방어하고, 다른 도시가 위협받을 때 지원하기 위한 기동 예비대 역할도 했다. 장사성은 정보를 얻기 위해 첩자를 보냈지만, 탕화의 효과적인 지휘로 모두 실패했다. 장사성은 여러 차례 도시를 침략했지만, 탕화는 1358년 2월에 공격을 격퇴했고, 1359년 5월에는 매복으로 1천 명 이상의 병사와 40척의 배를 생포했다.[2][3]

탕화는 진우량과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장사성의 영토에 대한 간헐적인 반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1363년 2월에는 비서감 소경으로 승진했고, 1364년 4월에는 좌승상에 임명되었다.[2] 주원장의 주력군은 진우량을 격파하고 난징으로 돌아왔고, 탕화의 군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탕화는 우시 시 침공에서 장사성의 군대를 격파한 공로로 좌첨도어사(左僉都御史) 직함을 받았고, 황양산(黃陽山) 지역에서 장사성의 해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평장정사(平章政事)"(명예로운 직위)로 임명되었다.[3] 1364년 12월, 탕화는 장사성의 동생 장사신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창싱을 구원했고, 전투에서 8천 명의 병사를 생포했다.[2]

1365년 10월, 탕화는 쉬다의 지휘 아래 장사성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에 참여했다. 탕화는 타이호와 우장에서 장사성의 해군을 격파하고 쑤저우를 포위한 주력군과 합류했다.[2] 창먼(쑤저우의 일부) 전투에서 탕화는 부상을 입었다. 그는 난징으로 돌아가 요양했지만, 1367년 10월 쑤저우 침공을 위해 복귀했다. 탕화는 전투 후 주원장으로부터 큰 포상을 받았고, 이듬해 2월에는 태자(皇太子)의 사부(師傅)라는 명예직을 받았다.[2][3] 주원장은 진우량을 멸망시킨 후, 지정 25년(1365년)부터 쉬다에게 장사성을 토벌하게 했다.

2. 4. 남방 정벌과 명나라 건국

1365년 주원장은 스스로 오왕(吳王)이라 칭했다.[4] 1367년 마지막 강적 장씨(張氏)가 붕괴된 후, 탕화는 부장 오진(吳禎)과 함께 남쪽 정벌을 맡아 장강주(江州), 강흥(江興), 강음의 이전 수비대를 이끌고 방국진(方國珍)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 탕화는 11월 말에 여요, 상우, 친위안을 성공적으로 정복했지만, 방국진은 몇몇 부대만 잃고 바다로 도망쳤다. 주원장은 요원중(廖永忠)에게 자신의 함선을 가지고 탕화를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연합군은 방국진의 해군을 추격하여 12월 말 방국진은 400척의 배와 2만 4천 명의 병력을 항복시켰다.[3]

같은 시기 서달(徐達)이 북중국을 정복하는 동안, 주원장의 군대는 육로를 통해 서쪽에서 푸젠을 침공했다. 탕화와 요원중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1368년 1월에 복주로 출항했다. 탕화는 짧은 포위 공격 끝에 항구를 점령했고, 이로 인해 신화(新化), 장주, 천주를 포함한 해안 도시들이 곧 항복했다.[3] 그 후 원나라에 우호적인 군벌이었던 진유정(陳友定)을 생포하면서 원정군은 강을 따라 진격했다.[3] 이것으로 푸젠성에서의 작전이 완료되었으며, 탕화의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이 되었다. 1366년 3월, 탕화는 방국진의 옛 부하들과 함께 북쪽으로 해상으로 곡물을 수송하기 위해 닝보(寧波)로 돌아왔고, 요원중에게 함대를 지휘하게 했다.[3]

1367년 어사대부에 임명된 탕화는 같은 해 10월, 정남장군에 임명되어 오정을 부장으로 삼아 방국진을 공격했다. 방국진은 부하와 함께 해선으로 도주했지만, 반치도(저장성주산시딩하이 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요영충이 해상에서 요격했고, 방국진은 12월에 투항하여 절동(저장성 동부)이 평정되었다.

같은 해, 탕화는 해상에서 푸저우의 천유딩을 공략하기 위해 민(푸젠성)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1368년 정월, 천유딩은 2만 명의 병사를 배치하여 정예 병력으로 옌핑을 수비했지만, 탕화, 요영충 등이 명주(저장성 닝보시)에서 수군을 이끌고 옌핑을 침공하여 10일 만에 함락시켰다. 천유딩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치고, 잉톈으로 호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이어서 다퉁, 좐푸(허베이성장자커우시쉬안화 구)를 공략했다. 같은 해, 광둥을 공략하여 원나라 장수 허전을 항복시켰다. 같은 해, 서달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가한 탕화는 펑성과 함께 회주, 택주, 로주를 함락시켰다(이때부터 원나라는 북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1369년(홍무 2년), 서달이 경양을 함락시킨 후, 교체되어 경양에 파견되었다.

1370년(홍무 3년), 이문충을 대장으로 하는 북정군에 펑성, 덩위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 군대는 興和(허베이성 장베이현)를 비롯한 원나라 영토를 함락시켰다. 11월에는 논공행상이 이루어졌으며, 의 지위는 놓쳤지만(6명이 있었다), 중산후에 봉해졌다. 후에 임명된 사람은 28명이었으며, 탕화는 《명사》에서 그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1371년(홍무 4년), 정서장군이 된 탕화는 랴오융중, 양징 등과 함께 명승을 공격하기 위해 구당협, 충칭을 공략했고, 명승은 명나라에 항복했다.

2. 5. 명나라 건국 이후의 활동

1371년 8월 3일, 탕화는 홍무제 주원장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명나라 군사를 일으켜 청두와 충칭 지역을 정벌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홍건적 동지였던 명옥진이 세운 명하 제국을 멸망시키고, 폐주 명승, 폐후 왕부인, 폐태후 팽부인을 모두 명나라에 항복시켰다.[3] 이 일로 인해 홍무제 주원장에게 크게 질책을 받고 파직되어 유배되었다.[3]

1372년 8월 10일, 탕화는 몽골에 대항하는 군대를 지휘했으나, 단두산(山西省 陽高縣 남동)에서 크게 패했다.[1][3] 두 달 뒤, 서달이 이끄는 명나라 주력 부대 역시 쾨케 테무르에게 패배했고, 이후 홍무제는 북쪽 방면에서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탕화는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았으며, 1373년 4월 북방 변경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이후 2년 동안 탕화는 군사 훈련, 군사 식민지 건설, 베이핑과 장덕(현 안양시)의 성벽 수리 등을 감독했다.[3] 1374년 말, 난징으로 잠시 소환되기도 했으나 1375년 2월 산시의 군사 식민지로 복귀했다. 같은 해 쾨케 테무르가 사망하면서 북방 변경의 긴장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곧 보얀 테무르가 몽골의 지도자가 되어 산시를 침략했다. 1376년 초부터 탕화는 부우덕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산시에 주둔하며 약 2년 동안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보얀 테무르가 이 지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저항했다.[1][3]

1378년 2월, 탕화는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다.[1] 이후 2년 동안 북서 지역에서 군대 훈련을 지휘했다. 1381년 초, 서달의 부장으로서 몽골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수년간 새롭게 점령한 지역에 머물렀다. 1383년, 사천성 영녕으로 파견되어 군대를 지휘했으며, 다음 해에는 왜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복건성절강성의 군대 및 군사 식민지를 시찰했다.[1][3]

1385년, 홍무제는 여섯째 아들 초왕 주유진을 귀주성에서 발생한 무면 농민 반란 진압에 파견했고, 탕화는 왕자의 고문이자 실제 지휘관으로 동행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4만 명의 반군을 생포하고 몇 달 만에 반란을 평정했다.[3] 1386년 2월, 수도로 귀환한 탕화는 홍무제에게 은퇴를 요청했다. 홍무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정정한 탕화에게 절강성의 해안 방어를 감독하는 비교적 가벼운 임무를 맡겼다. 1388년 7월, 탕화가 다시 은퇴를 요청하자, 홍무제는 이를 허락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1][3]

1376년 2월 29일에는 석방 및 복권(사면)되었다.[3]

1395년 8월 22일, 탕화가 서거하자 주군(主君)인 홍무제는 그의 장례를 명 제국 귀족 국장으로 성대히 치렀다.

2. 5. 1. 명나라 초기 군사 활동

1352년 2월 29일, 탕화는 곽자흥이 지휘한 홍건군에 가담하여 홍건도 입문 선배인 주원장과 함께 곽자흥의 제자가 되었다.[3] 1363년 4월 26일, 탕화는 홍건적 예하 차석부장군 주원장의 보좌관 겸 전속부관이 되어 주원장을 주군으로 섬겼다.[3] 서달목영에게는 사숙(師叔)이 되었다.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초대 군주(명 태조 홍무제)로 즉위하자, 탕화는 명나라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1369년 '''신국공'''(信國公)이라는 작위에 봉해졌다.[3]

1369년, 탕화는 황제를 따라 카이펑으로 가서 북부 허난성과 남부 산시성의 도시를 정복하는 임무를 맡았다.[3] 임무를 완수한 후, 서달 휘하의 주력 부대에 합류하여 1369년에 함께 산시성에 들어갔다.[3] 9월에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탕화와 서달은 황제로부터 포상을 받기 위해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탕화는 창저우에서 술을 마시고 황제를 불쾌하게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된 인물들보다 적은 포상을 받았다.[3]

몇 주 후, 탕화는 북부 정복을 위해 서달의 부사령관이 되었고, 쾨케 테무르(왕 바오바오라고도 알려짐)에 대한 간쑤에서의 큰 승리에 참여했다.[3] 그 후 탕화는 주력 부대에서 분리되어 북쪽으로 보내져 싱샤와 오르도스 지역을 정복하고 수만 마리의 가축을 얻었다.[3] 그의 군대는 연말까지 황하 상류에 머물렀고, 탕화와 다른 여러 장군은 의식을 위해 난징으로 소환되어 황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3] 이때 탕화는 연봉 1500석의 중산후(Marquis of Zhongshan) 작위를 받았으며, 명나라 귀족 서열 7위이자 당시 후작 중 1위였다.[3]

1371년 2월,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된 두 군대가 쓰촨성하(Xia)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보내졌다.[1][3] 탕화는 랴오융중, 저우더싱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해군 전체를 지휘하게 되었고, 그의 임무는 협곡을 통과하여 충칭으로 가는 것이었다.[1][3] 그러나 탕화는 푸유더가 지휘하는 육군이 전진하는 동안 협곡을 통과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몇 차례의 전투 후 자신감을 잃었다. 결국 랴오융중이 자신의 함대로 돌파구를 찾아 해군 전체가 상류로 계속 진격할 수 있었다.[1][3] 충칭은 8월 초에 함락되었고, 청두도 같은 달에 항복했다. 탕화가 11월에 황제에게 돌아왔을 때, 황제는 탕화의 부진한 활약으로 인해 이 원정의 보상은 랴오융중과 푸유더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판단했다.[1]

같은 해, 탕화는 광둥을 공략하여 원나라 장수 허전을 항복시켰다. 같은 해, 서달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가하여 펑성과 함께 회주, 택주, 로주를 함락시켰다(이때부터 원나라는 북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1369년(홍무 2년), 서달이 경양을 함락시킨 후, 탕화는 경양에 파견되었다.

1370년(홍무 3년), 이문충을 대장으로 하는 북정군에 펑성, 덩위 등과 함께 참여하여 興和(허베이성 장베이현)를 비롯한 원나라 영토를 함락시켰다. 11월에는 논공행상이 이루어졌으며, 의 지위는 놓쳤지만(6명이 있었다), 중산후에 봉해졌다. 후에 임명된 사람은 28명이었으며, 탕화는 《명사》에서 그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1371년(홍무 4년), 탕화는 정서장군이 되어 랴오융중, 양징 등과 함께 명승을 공격하기 위해 구당협, 충칭을 공략했고, 명승은 명나라에 항복했다.

2. 5. 2. 대몽골 방어 및 은퇴

1372년, 탕화는 북쪽에서 몽골에 대항하는 군대를 지휘했으나, 8월 10일 단두산(山西省 陽高縣 남동)에서 큰 패배를 겪었다.[1][3] 두 달 뒤, 서달이 이끄는 명나라 주력 부대 역시 쾨케 테무르에게 패배했다. 이후 홍무제는 북쪽 방면에서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탕화는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았으며, 이듬해 4월 북방 변경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이후 2년 동안 탕화는 군사 훈련, 군사 식민지 건설, 베이핑과 장덕(현 안양시)의 성벽 수리 등을 감독했다.[3] 1374년 말, 난징으로 잠시 소환되기도 했으나 1375년 2월 산시의 군사 식민지로 복귀했다. 같은 해 쾨케 테무르가 사망하면서 북방 변경의 긴장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곧 보얀 테무르가 몽골의 지도자가 되어 산시를 침략했다. 1376년 초부터 탕화는 부우덕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산시에 주둔하며 약 2년 동안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보얀 테무르가 이 지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저항했다.[1][3]

1378년 2월, 탕화는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다.[1] 이후 2년 동안 북서 지역에서 군대 훈련을 지휘했다. 1381년 초, 서달의 부장으로서 몽골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수년간 새롭게 점령한 지역에 머물렀다. 1383년, 사천성 영녕으로 파견되어 군대를 지휘했으며, 다음 해에는 왜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복건성절강성의 군대 및 군사 식민지를 시찰했다.[1][3]

1385년, 홍무제는 여섯째 아들 초왕 주유진을 귀주성에서 발생한 무면 농민 반란 진압에 파견했다.[2][3] 탕화는 왕자의 고문이자 실제 지휘관으로 동행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4만 명의 반군을 생포하고 몇 달 만에 반란을 평정했다.[3] 1386년 2월, 수도로 귀환한 탕화는 홍무제에게 은퇴를 요청했다. 홍무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정정한 탕화에게 절강성의 해안 방어를 감독하는 비교적 가벼운 임무를 맡겼다. 1388년 7월, 탕화가 다시 은퇴를 요청하자, 홍무제는 이를 허락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1][3]

연도사건
1372년단두산 전투에서 패배
1373년서달의 북벌군 부장으로 참여, 산시와 북평 방어
1375년등유와 함께 북평, 산시, 허난 수비
1376년부우덕 등과 함께 옌안 수비
1378년신국공(信國公)에 봉해짐
1381년서달의 부장으로 북원 격퇴
1385년주유진과 함께 귀주성 반란 진압
1388년은퇴


2. 6. 만년과 평가

1390년 정월 초하루, 탕화는 뇌졸중으로 실어증을 겪었고, 그 이후로는 드물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3] 그의 건강 상태는 그 후 몇 년 동안 악화되었다. 1395년 8월 22일 홍무제는 탕화가 서거하자 신하였던 그의 장례를 명 제국 귀족 국장으로 성대히 치렀다. 탕화는 사후 동와왕에 봉해졌으며, 신국공(信國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3]

탕화는 황제를 한 번 짜증나게 하고 평범한 지휘관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지만, 주원장의 총애를 끝까지 받았다.[1][3] 주원장이 어려움을 겪을 때 탕화가 끊임없이 지원했기 때문에, 그가 황제로부터 얻은 신뢰는 어린 시절의 좋은 우정에 기초했다. 탕화가 주원장이 군사력을 집중시키려 할 때 기꺼이 지휘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러한 신뢰는 138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2][3] 탕화는 명나라 초기에 권력과 명성을 얻은 농민의 전형적인 예였다.[3]

1380년 홍무제는 호유용의 옥을 기점으로 공신 숙청을 시작했다.

1384년, 탕화는 해상 경비를 명받아 산둥, 강남 북, 절강 동서 연안에 성을 쌓고 절동의 백성 5만 8천여 명을 이끌고 왜구로부터 연안 방어에 나섰다.

1385년 숙청에 대한 위기감도 있었을 것이다. 탕화는 은퇴를 간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술에 취해 푸념하는 척하는 등 아슬아슬한 연출을 시도한 결과, 다음 해에 민 연안의 성이 완공된 것을 계기로 드디어 은퇴를 허락받았다. 탕화는 고향인 펑양으로 소환되어 저택을 하사받았다.

1390년, 탕화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원장은 즉시 가신을 파견하여 병세를 조사하게 했다.

1394년, 주원장이 문병을 왔을 때 탕화는 침을 흘리고,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1395년 8월, 탕화는 사망했다. 동구왕(東甌王)으로 추봉되고, 양무(襄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3. 가족 관계

탕화는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을 두었다. 장남 탕리는 훗날 부원수 직위에 올랐으나 공작위는 폐지되었다.[3] 1492년, 주우탕 황제는 탕화의 6대손 탕소종을 금의위 남경 지휘사로 임명했다.[3] 탕소종 가문은 영벽후 세습 작위를 받았으며, 명나라 말까지 연간 1000석의 녹봉을 상속받았다. 탕화의 장녀는 주원장의 열 번째 아들 주탄의 후궁이 되었고, 1387년 8월 장녀가 사망하자 그녀의 여동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1][3]

참조

[1] 웹사이트 History of Ming, Volume 126 Biographies 14: Li Wenzhong, Deng Yu, Tang He, Mu Ying http://chinesenotes.[...] 2018-10-04
[2] 웹사이트 ChinaKnowledge,Ming Dynasty (1368-1644) http://www.chinaknow[...] 2018-10-04
[3] 서적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vol2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 https://archive.org/[...] The Press Syndicate of the University of Cambridge
[5] 웹사이트 The Red Turban Rebellion in China, 1351-1368 https://www.thoughtc[...] 2017-03-08
[6] 문서 明史・湯和伝 https://zh.wikisourc[...]
[7] 서적 超巨人・明の太祖朱元璋 講談社文庫
[8] 서적 明の太祖 朱元璋 白帝社
[9] 문서 明史・太祖本紀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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