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황후 (당나라)
1. 개요
문덕황후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황후이다. 수나라 장군 장손성의 딸로 태어나 13세에 이세민과 혼인하였으며, 현무문의 변 이후 황태자비가 되었다. 이세민이 즉위한 후 황후가 되었고, 검소한 생활과 현명한 조언으로 존경받았다. 정관 10년(636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저서로는 『여칙』이 있었다. 중국 역사상 현명한 황후로 칭송받고 있으며,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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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년 사망 -
이시도루스 히스팔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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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년 출생 -
마주 (601년)
마주는 수나라에서 태어나 당나라 시대에 활동하며 교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 장하의 식객을 거쳐 고구려 태종의 부름으로 문하성에서 근무하고 감사관으로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48세의 나이로 사망한 인물이다. -
601년 출생 -
홍인
홍인은 중국 선종의 제5대 조사로, 동산법문을 창시하여 중국 선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신수와 혜능을 제자로 두었으며, 수심요론을 통해 가르침을 전한다. -
당나라의 수필가 -
유종원
유종원은 자는 자후이며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개혁 정치 실패 후 유배 생활을 하며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긴 당나라 시대의 문인, 정치가, 사상가였다. -
당나라의 수필가 -
유우석 (당나라)
유우석은 당나라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왕숙문의 개혁 정치에 참여하여 재정 분야에서 활약했으나 좌천과 유배를 겪었으며, 한유 등과 교류하며 시를 통해 정치적 풍자와 민중의 삶을 표현했고, 만년에는 검교예부상서 등을 역임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장손황후는 601년 3월 15일에 수나라의 장군 장손성(長孫晟)과 고경덕(高敬德)의 딸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장손행포(長孫行布), 장손항안(長孫恆安), 장손안업(長孫安業), 장손무기 등 최소 4명의 오빠가 있었다. 609년 장손성이 사망하자, 장손안업은 이복동생들과 고씨를 고사련에게 보냈다. 613년, 이세민과 결혼했다.
618년 당나라 건국 후 진왕비로 책봉되었고, 626년 현무문의 변 이후 황태자비가 되었다가, 이세민이 즉위하자 황후로 책봉되었다. 태종과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낳았다.
황후는 예법을 존중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다른 비빈이 난산으로 죽었을 때에는, 그 아이인 예장공주를 친자식처럼 양육했다. 이세민이 정치에 관해 묻자,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합니다"라며 답을 피했다. 장손무기가 중용되는 것을 반대했고, 장손안업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634년 병에 걸렸으며, 636년 36세로 세상을 떠나 소릉에 합장되었다. 시호는 문덕성황후(文德聖皇后)이다. 사후 태종은 황후를 세우지 않고 그녀의 능을 바라보았다. 저서로는 『여칙(女則)』 10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현명한 황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1. 어린 시절
수나라 우효위장군(右驍衛将軍) 장손성과 고씨(고만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관음비(觀音婢)였다. 장손 가문의 조상은 선비족 왕조 북위의 창시자 북위 태무제의 17대 조상인 탁발쾌립(拓拔儈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북위 효문제가 선비족 성씨를 한족 성씨로 변경하면서 장손으로 바꾸었다.
609년(대업 5년), 장손성이 세상을 떠나자, 이복 오빠 장손안업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 어머니 쪽 백부 고사렴에게 의탁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바른 행실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613년(대업 9년), 13세에 당나라 국공 이연의 차남인 이세민의 아내가 되었다.
2.2. 태자비 시절
長孫皇后zh-hant는 613년 13세에 이세민과 혼인하였다. 618년, 이연(당 고조)이 당나라를 건국하면서 이세민은 진왕(秦王)에 책봉되고, 長孫皇后zh-hant는 진왕비가 되었다. 이세민과 장손씨는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이세민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당나라 통일에 큰 공을 세웠으나, 이로 인해 황태자 이건성과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長孫皇后zh-hant는 시아버지인 당 고조를 조심스럽게 섬기며, 이건성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626년,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 이건성과 이원길이 살해되고, 이세민이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長孫皇后zh-hant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2.3. 황후 시절
626년, 당 고조의 양위로 이세민이 황제(당 태종)로 즉위하면서 장손씨는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후에도 검소하고 겸손한 생활을 유지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황태자 이승건의 유모가 물품 부족을 호소하자, "황태자가 걱정해야 할 것은 덕과 명예이지, 물건의 부족함이 아니다."라고 답하며 검소함을 강조했다. 당 태종의 정치적 결정에 간언하고, 부당한 처벌을 완화하는 등 어진 황후의 모습을 보였다. 당 태종이 이유 없이 화를 내는 경우,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녀나 환관을 변호하며 부당한 처벌을 막았다. 후궁이나 시녀들이 병에 걸리면 직접 문병하고, 자신의 물건을 치료에 사용하도록 했다.
태종은 종종 장손황후에게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지만, 그녀는 항상 거절하며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느 날, 이세민이 장손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손무기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을 때, 장손황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종은 장손황후의 말을 듣지 않고 627년에 장손무기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타락하여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628년 봄에 당 태종은 장손무기를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또한 당 태종에게는 위징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회의에서 돌아온 후 위징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장손황후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위징은 나를 항상 공식 석상에서 모욕하오!"라고 말했다. 장손황후는 침실로 물러나 조복 차림으로 황제 곁에 왔다. 당 태종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하니 장손황후가 "가장 어진 황제들은 충신의 말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위징은 폐하께서 어지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간언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당 태종의 분노는 누그러졌고 그는 위징을 벌하지 않았다.
장손황후는 심한 천식에 시달렸었다. 634년부터 그녀의 병세는 심해졌고, 당 태종은 장손황후를 낫게 하기 위해 의사를 부르는 것은 물론 불교와 도교 승려들까지 동원하며 사면령을 내렸다. 장손황후는 당 태종이 불교와 도교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잦은 사면령을 부당하다고 여겼으며, 그 모든 것들을 거절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장손황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손황후는 636년에 죽었다. 황실은 장손황후가 쓴 30권의 《여칙》(女則)을 편찬했다. 당 태종이 그것을 읽었을 때 그는 무척 슬퍼했다.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 태종은 647년에 사망한 후 장손황후와 합장되었다.
4. 평가
문덕황후는 검소하고 어진 성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당 태종의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외척 세력의 발호를 경계하고, 정적(政敵)의 처벌을 완화하는 데 힘쓰는 등 중도적이고 온건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녀의 언행과 사상은 '여칙'이라는 책으로 남아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현명한 황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황후는 예법을 존중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다른 비빈이 낳은 예장공주를 친딸처럼 양육하는 어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태종이 정치에 관해 물으면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며 쉽게 대답하지 않았고, 오빠 장손무기가 중용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복 오빠 장손안업이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여 정치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 했다.
정관 10년(636년), 36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소릉에 합장되었다. 시호는 문덕성황후(文德聖皇后)였다. 그녀가 죽은 후 태종은 다시 황후를 세우지 않고, 그녀의 능을 항상 바라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