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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봉신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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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중은 소설 《봉신연의》에 등장하는 인물로, 상나라의 신하이자 도사이다. 그는 제을 때부터 상나라를 섬기며, 곤륜산에서 수련했지만 선골이 없어 절교의 금오도에서 수행했다. 제신 집권 7년에 북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5년간 자리를 비웠으며, 이후 봉신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서주와 싸우다 절룡령에서 운중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봉신 계획이 끝난 후에는 뇌부신인 구천응원뇌신보화천존으로 임명된다. 문중은 또한 한국 전통 오페라 작품인 문중귀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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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봉신연의)
문중
인물 정보
이명중이 (仲夷)
직위태사 (太師)
봉호뇌부구천응원보화진군 (雷部九天應元普化真君)
종교도교
등장 작품봉신연의
봉신연의
스승벽운동의 통천교주
도구번천인, 흑기린
소속상나라
상관주왕
숙적강자아
인물 배경
출신지북해
주요 활동상나라 태사
십절진 격파
서기 공격
기타 정보
관련 인물조공명
십천군
황화산 사대제자
참고 자료
관련항목봉신연의 등장인물 목록

2. 생애

제신(帝辛)의 아버지인 제을(帝乙) 때부터 상나라를 섬긴 충신이자 태사(太師)였다. 젊은 시절 곤륜산(崑崙山)에서 수련했으나 선골(仙骨)이 없다는 이유로 하산하고, 이후 절교(截敎)의 금오도(金鰲島)에서 수행하여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2] 제신 즉위 초, 북해의 72제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5년간 자리를 비웠다.[3]

15년 만에 수도 조가(朝歌)로 돌아온 문중은 달기의 영향 아래 주왕이 폭정을 일삼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3] 또한 원시천존이 강자아를 통해 진행하는 봉신(封神) 계획의 부당함을 깨닫고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7] 그는 상나라 군사와 절교 출신 도사들을 이끌고 강자아와 무왕(武王)의 서기(西岐) 군대 및 이들을 지원하는 천교(闡敎) 선인들과 맞서 싸웠다.[7][3]

왼쪽: 문중과 비간; 오른쪽: 주왕과 달기


문중은 황비호의 서기 귀순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3] 이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기 정벌에 나섰다. 그는 십천군, 조공명 등 강력한 절교 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차례 서기 군대를 위협했으나,[3] 결국 절룡령(絶龍嶺)에서 운중자(雲中子)와의 싸움 끝에 통천화주(通天火柱)에 의해 전사했다.[7][3]

봉신계획이 끝난 후, 강자아는 문중을 뇌부(雷部)를 총괄하는 최고신인 '''구천응원뇌신보화천존(九天應元雷神普化天尊)'''에 봉했다.[7][4]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제신의 아버지인 제을 때부터 상나라를 섬겼다. 처음에는 곤륜산에서 수련했으나, 선골(仙骨)이 없다는 이유로 하산해야 했다. 이후 절교의 금오도에서 다시 수행을 쌓아 선술, 도술, 무술에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2. 2. 은나라 태사로서의 활동

제신(帝辛)의 아버지인 제을(帝乙) 때부터 상나라를 섬긴 충신이자 태사(太師)이다. 젊은 시절 곤륜산(崑崙山)에서 도술을 수련했으나 선인이 될 자질(선골, 仙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하산하였다. 이후 절교(截敎)의 금령성모 아래 비유궁에서 다시 수행하여 선술, 도술, 무술에 모두 뛰어난 경지에 이르렀다.[2] 옥황상제의 명으로 이마에 세 번째 눈을 얻었는데, 이 눈은 모든 환상과 거짓을 간파하는 능력을 지녔다.[2] 그의 탈것은 흑기린으로, 한 번의 날갯짓으로 하늘을 날며 순식간에 천 리를 갈 수 있었으나 후에 뇌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2] 주무기는 '교룡금편'이라 불리는 한 쌍의 채찍으로, 각각 음양(陰陽)을 상징하는 용으로 변신할 수 있었으나, 암컷 채찍은 나중에 강자아의 타신편에 의해 부러졌다.[2]

50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하산하여 제을 왕을 보좌하며 최고의 관료로 활약했다.[2] 제을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자수를 새로운 상 왕조의 왕으로 옹립했다.[2] 주왕 즉위 7년째 되던 해, 북해의 72제후 중 하나인 원복통이 반란을 일으키자, 문중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북해로 출정하여 15년 동안 자리를 비웠다.[3]

15년 만에 반란을 평정하고 수도 조가(朝歌)로 돌아왔을 때, 문중은 그가 없는 동안 달기의 영향 아래 주왕이 수많은 폭정을 저질렀음을 알게 되었다. 충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조정의 기강이 무너진 참상을 목격한 문중은 이를 바로잡고자 주왕에게 10가지 치국 방략을 제안하며 국정 쇄신을 꾀했다.[3]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해의 평령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왕은 이를 빌미로 문중을 다시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 이는 문중이 자신의 통치에 간섭하는 것을 막으려는 주왕의 의도였다.[3]

문중이 다시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로 개선했을 때(소설 30장), 황비호가 주왕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서기(西岐)로 귀순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그는 여러 관문에 방어선을 치고 황비호를 막으려 했으나, 천교(闡敎) 소속 선인 청허도덕진군의 도움으로 황비호는 다섯 관문(임동관, 동관, 천운관, 계패관, 사수관)을 모두 무사히 통과했다. 결국 문중은 황비호를 잡는 데 실패하고 조가로 돌아와 서기와의 전면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3]

한편, 문중은 원시천존이 강자아를 시켜 봉신(封神) 계획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 계획의 부당함을 느껴 이를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문중은 수도에 머물며 여러 장수를 보내 서기의 강자아와 무왕의 군대를 공격하게 했으나, 번번이 패배하고 큰 손실만 입었다.[3] 상황이 불리해지자 문중은 41장에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기 정벌에 나섰다. 그는 먼저 황화산에서 등충, 신환, 장걸, 도용 네 명의 장수를 부하로 삼았고,[3] 절교 소속의 강력한 도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52장까지 십절진을 펼친 십천군, 조공명, 운소, 경소, 벽소 세 선고 등이 차례로 합류하여 강자아의 군대를 여러 차례 궁지에 몰아넣었다.[3]

하지만 천교(闡敎) 선인들의 지원을 받는 강자아와 서기 군대를 끝내 당해내지 못했다. 연이은 패배 끝에 문중은 절룡령(絶龍嶺)에서 운중자(雲中子)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 그의 신통력인 통천신화주(通天神火柱)에 의해 불타 장렬히 전사했다.[3]

봉신계획이 마무리된 후, 강자아는 문중의 충절과 능력을 높이 사 그의 영혼을 뇌부(雷部)를 총괄하는 최고신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에 봉했다.[7][4] 그는 뇌신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아 뇌성옥부(雷城玉府)에 거하게 되었다.[4]

2. 3. 서주와의 전쟁

제신의 폭정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던 문중은 원시천존이 강자아를 통해 봉신(封神) 계획을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7] 그는 봉신 계획의 부당함을 느끼고 이를 막기 위해, 상나라 군사와 절교(截敎) 출신 도사들의 힘을 합쳐 강자아와 무왕(武王)이 이끄는 서기(西岐) 군대,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천교(闡敎) 선인들과 맞서 싸웠다.[7]

문중은 동해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후(30장), 황비호가 서기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그는 여러 관문을 지키며 황비호를 막으려 했으나, 천교 소속 청허도덕진군의 도움으로 황비호는 임동관, 동관, 천운관, 절패관, 사수관 등 다섯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탈출했다. 문중은 황비호 체포에 실패하고 수도 조가로 돌아와 서주와의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3]

이후 문중은 수도에 머물며 여러 장수들을 파견해 서기를 공격했지만, 계속된 패배와 막대한 손실만 입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 결국 41장에서 문중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기 정벌에 나섰으며, 이는 강자아와 서기 측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는 출정 전 황화산(黃華山)에서 등충(鄧忠), 신환(辛環), 장절(張節), 도융(陶融) 네 명의 장수를 부하로 받아들였다.[3] 이후 52장까지 문중은 십절진을 펼친 십천군(十天君), 조공명(趙公明), 운소궁(雲霄宮)의 세 선녀(운소, 경소, 벽소) 등 절교의 강력한 도사들을 차례로 초빙하여 서기를 공격하게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강자아의 군대는 여러 차례 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3]

그러나 문중과 절교 세력은 결국 강자아와 천교 선인들의 연합을 당해내지 못하고 연이어 패배했다. 문중 자신도 최후에는 절룡령(絶龍嶺)에서 운중자(雲中子)의 통천화주(通天火柱)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7][3]

봉신 계획이 마무리된 후, 강자아는 문중의 공적과 능력을 인정하여 그의 영혼을 뇌부(雷部)를 총괄하는 최고신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에 봉했다.[7][4]

2. 4. 사후

봉신계획이 끝난 이후 강자아는 문중을 뇌부신(雷部神)의 통령(統領)인 '''구천응원뇌신보화천존'''(九天應元雷神普化天尊)에 임명했다.[7]

3. 봉신연의에서의 묘사

문중은 소설 봉신연의의 첫 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절교의 금령성모 아래에서 도술을 수련했으며,[2] 상 왕조의 제을 왕 때부터 태사(太師)로서 섬겼다. 제을 사후에는 주왕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국정을 총괄했다.

그러나 문중은 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랫동안 수도 초가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첫 장에서는 북해에서 일어난 원복통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고, 15년 만인 27장에서야 평정하고 돌아왔다. 그 사이 달기의 영향력 아래 주왕의 폭정이 심해져 많은 충신들이 희생되고 조정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돌아온 문중은 이러한 상황을 개탄하며 주왕에게 충언하고 국정 쇄신을 위한 10가지 방책을 올렸으나, 주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주왕은 이를 빌미로 다시 문중을 파견하여 그를 조정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3]

30장에서 동해의 난까지 평정하고 개선한 문중은 황비호서기로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찬교 소속 청허도덕진군의 도움으로 황비호는 무사히 관문을 통과했고, 문중은 추격에 실패하고 초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3]

이후 문중은 수도에 머물며 여러 장수들을 보내 강자아가 이끄는 서기군을 공격하게 했지만 번번이 패배하고 막대한 손실만 입었다. 결국 41장에서 문중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기 정벌에 나섰으며, 이는 강자아와 서기 진영에 큰 위협이 되었다. 출정 도중 황화산에서 등충, 신환, 장걸, 도용 네 명의 장수를 부하로 맞이하기도 했다. 문중은 절교의 동문인 십절진의 진주들(십천군), 조공명, 삼선고(운소, 경소, 벽소) 등 강력한 도사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서기군을 여러 차례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강자아와 찬교 선인들의 활약으로 결국 연이어 패배했고, 마지막에는 운중자에 의해 절룡령에서 최후를 맞이했다.[3]

사후 강자아에 의해 뇌부(雷部)를 총괄하는 최고신인 보화천존(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중국어)으로 봉해졌다.[4]

3. 1. 능력

문중은 젊은 시절 금령성모 아래서 절교의 비유궁에서 수련하였으며,[2] 이 과정에서 옥황상제의 명으로 이마에 세 번째 눈을 얻었다. 이 세 번째 눈은 모든 수준의 환상과 거짓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녔다.[2]

그의 탈것은 흑기린으로, 머리에 풍운 뿔이 있고 한 번의 날갯짓으로 하늘을 날아 순식간에 천 리를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흑기린은 훗날 뇌진자에게 죽임을 당한다.[2] 문중의 주 무기는 교룡금편이라는 한 쌍의 채찍인데, 이 채찍은 두 마리의 용으로 변신할 수 있으며 각각 음양의 속성을 지닌다. 이 중 암컷 채찍은 나중에 강자아의 타신편에 의해 부러지게 된다.[2]

운중자에 의해 절룡령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3] 강자아가 신들의 칭호를 내릴 때 문중의 영혼은 보화천존(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칭호를 받았다.[4] 그는 뇌부(雷部)의 최고 신으로서 뇌신들의 복잡한 조직을 주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4]

3. 2. 성격

thumb; Right: 주왕과 달기]]

문중은 상 왕조의 충신이자 최고위 관료로서, 강한 책임감과 충성심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젊은 시절 절교의 금령성모 밑에서 수련했으며, 옥황상제로부터 환상과 거짓을 간파하는 세 번째 눈을 얻었다.[2] 이러한 능력과 강력한 무기(교룡금편), 신수(흑기린)를 바탕으로 제을 왕 때부터 상 왕조를 위해 헌신했다.

대을 왕 사후에는 주왕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국정을 보좌했으나, 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없는 동안 달기의 영향력 아래 주왕의 폭정이 심화되고 충신들이 희생되는 등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북해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온 문중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주왕에게 충언하고 10가지 개선책을 제시하는 등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주왕은 동해의 반란을 핑계로 다시 문중을 초가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으로 보냈다.[3]

문중은 상 왕조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바탕으로, 황비호가 서기 진영으로 투항하자 크게 분노하여 직접 추격에 나서기도 했다. 비록 청허덕진군 등 찬교 선인들의 도움으로 황비호를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는 왕조를 지키려는 그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3]

이후 서기와의 전면전에서 문중은 절교의 동료들인 십천군, 조공명, 운소 삼선고 등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진법과 도술로 강자아의 군대를 여러 차례 위기에 빠뜨렸다. 이는 절교 동료들과의 깊은 유대와 그가 가진 영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상 왕조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그의 집념을 드러낸다. 하지만 결국 찬교와 서기 연합 세력의 힘에 밀려 연패를 거듭했고, 운중자에 의해 절룡령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3]

그의 충성심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주왕의 실정과 달기의 간계, 그리고 시대의 흐름(천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패배한 비극적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사후 강자아에 의해 뇌부의 최고 신인 보화천존(九天应元雷声普化天尊|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중국어)으로 봉해졌다.[4]

3. 3.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문중 귀조''는 한조와 이황 스타일로 공연되는 전통적인 중국 오페라 작품으로, ''대귀''라고도 불린다. 이 이야기는 소설 봉신연의 제27장을 바탕으로 약간의 변형을 가미했다. 줄거리는 문중 태사가 북해 원정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는 귀환하며 비간 재상의 흉악한 행동, 강황후의 자해, 가부인(賈夫人)의 비극적인 낙사, 그리고 황비호가 이끄는 반란에 대해 듣게 되고, 이는 주왕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궁궐로 물러나게 만든다.[5]

총애하는 후궁 달기가 권력을 잡고 충신들이 박해받으며 부패한 관리들이 거리낌 없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목격한 문중 태사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는 비중(費仲)과 유혼(尤渾)을 포함한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서기(西岐)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 후 떠난다.

이 오페라는 문중 태사가 절룡령(絕龍嶺)에서 패배하고 죽은 뒤, 복수심에 불타는 영혼으로 궁정에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음양조(陰陽朝)''라고도 불린다. 이황 스타일로 전곡이 불리며 주요 공연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뇌명진(雷鳴 진)과 같은 유명 예술가들이 이 오페라를 공연했으며, 여러 오페라 극단들이 이 작품의 공연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오페라의 필사본은 산시성 예술 연구소(陕西省艺术研究所)에 보존되어 있다.[6]

참조

[1] 서적 History of Literature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DeepLogic 2023-04-03
[2] 서적 From Kuan Yin to Chairman Mao: The Essential Guide to Chinese Deities https://books.google[...] Red Wheel Weiser 2023-04-03
[3] 서적 Chinese Shadow Theatre: History, Popular Religion, and Women Warriors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23-04-03
[4] 문서 Fengshen Yanyi Chapter 99
[5] 웹사이트 京剧剧本 - 《太师回朝》 https://scripts.xika[...]
[6] 서적 中国楊柳青木版年畫集: Li shi gu shi https://books.google[...] 天津楊柳青畫社 1992-01-01
[7] 문서 《봉신연의》 장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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