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드브레
1. 개요
미셸 드브레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912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샤를 드 골과 함께 활동했으며, 제5공화국 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드브레는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총리, 법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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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알제리 전쟁 관련자 -
샤를 드골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 관련자 -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수아 미테랑은 1916년에 태어나 1996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제4공화국 장관, 제5공화국 야당 지도자를 거쳐 1981년부터 1995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하며 사형 폐지, 사회 정책, 유럽 협력 강화 등을 추진했다. -
프랑스의 유럽 의회 의원 -
피에르 모루아
피에르 모루아는 릴 시장, 프랑스 총리, 상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주 40시간 근무제 단축 등 노동자 중심의 정책을 시행하고 사회당 제1서기 및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
프랑스의 유럽 의회 의원 -
자크 시라크
자크 시라크는 드골주의 정치인으로 총리와 파리 시장을 거쳐 1995년부터 2007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했고, 퇴임 후에는 시라크 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했다. -
파리 출신 -
폴 랑주뱅
폴 랑주뱅은 프랑스의 물리학자로서 상자성 및 반자성 연구, 초음파 발생, 상대성 이론 전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하고 프랑스 인권연맹 회장을 역임하다가 1946년 사망하여 1948년 파리의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
파리 출신 -
안 륄리에
안 륄리에는 고차 고조파 발생 연구를 통해 아토초 펄스 생성 및 응용 분야를 개척하여 202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2. 생애
파리 7구 출신으로, 현대 소아과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의학 교수 로베르 드브레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 배경을 가졌으나, 드브레 자신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명문 학교인 리세 루이르그랑과 파리 정치대학을 졸업하고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젊은 나이에 국참사원에 합격하며 공직에 입문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기병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전후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에서 샤를 드 골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공무원 제도 개혁을 주도했고, 특히 엘리트 공무원 양성 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제4 공화국 시기에는 앤드르에루아르 상원 의원을 지내며 골주의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다졌고, 프랑스령 알제리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드골의 정계 복귀를 촉구했다.
1958년 드골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1959년에는 제5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새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알제리 전쟁 종결을 위한 에비앙 협정 체결 이후 1962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경제재정부 장관, 외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 주요 각료직을 역임했다. 1963년부터는 레위니옹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개발 정책을 추진했으나, 동시에 레위니옹 아동들을 프랑스 본토로 강제 이주시킨 정책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골주의의 정통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나,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독자 출마하여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2.1. 어린 시절, 학생 시절과 정치 입문
미셸 드브레는 1912년 1월 15일 파리 7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의학 교수 로베르 드브레였다. 아버지는 유대인 배경을 가졌으나, 미셸 드브레 자신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리세 몽테뉴와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공부했으며, 파리 정치대학에서 학위를,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소뮈르에 있는 기병 예비 장교 학교를 수료했다. 1934년, 22세의 나이로 국참사원 시험에 합격하여 회원이 되었고, 이후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에는 경제부 장관 폴 레노의 비서실에 합류하여 공직 경험을 쌓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샤를 드 골의 동료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2.1.1. 가족
미셸 드브레는 프랑스 현대 소아청소년과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의학교수 로베르 드브레(1882-1978)와 의학교수자격자였던 잔 드바퐁상의 아들이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랍비 시몽 드브레(1854-1939)였고, 외할아버지는 화가 에두아르 드바퐁상이었다. 드브레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으나, 미셸 드브레 자신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드브레 가문은 의학, 예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랑스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미셸 드브레의 형제자매인 화가 올리비에 드브레와 클로드 모노브로카 역시 이 가문의 일원이다.
미셸 드브레는 건축가 샤를 르마르스쿠아(1870-1972)의 딸이자 건축가 노엘 르마르스쿠아(1903-1982)의 누이인 안마리 르마르스쿠아와 결혼하여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더 자세한 가계 정보는 드브레 가문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2.1.2. 학업
미셸 드브레는 파리의 리세 몽테뉴와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시앙스포(파리 정치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소무르에 위치한 기병 예비역 장교 학교(École des officiers de réserve de la cavalerie)에도 입학하였다. 1934년, 22세의 나이로 국참사원(Conseil d'État) 감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회원이 되었다. 이후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2.2. 초기 경력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기병 장교로 입대했다. 1940년 6월 프랑스 공방전 중 아르테네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같은 해 9월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비시 프랑스 정부의 국무원으로 복귀하여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942년에는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maître des requêtes프랑스어로 승진했다. 그러나 1942년 11월 독일이 프랑스 남부 자유 지역까지 점령하자, 기존의 페탱 지지 입장을 버리고 1943년 2월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하여 Ceux de la Résistance프랑스어(CDLR) 네트워크에서 활동했다.
1943년 여름, 샤를 드골 장군으로부터 프랑스 해방 후 비시 프랑스 정권의 관료들을 대체할 새로운 주지사 명단을 작성하는 임무를 받았다. 1944년 8월 해방 이후에는 앙제 지역의 공화국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에는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로부터 프랑스 공무원 제도 개혁 임무를 부여받아, 전쟁 전 장 자이가 구상했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국립행정학교(ENA) 설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제4 공화국 시기에는 처음 저항 민주 사회 연합(UDSR)을 지지했으나, 샤를 드골의 조언에 따라 급진 사회주의 정당으로 옮겼다. 당시 드골은 드브레와 자크 샤방-델마 등에게 "급진당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국가의 의미에 대한 마지막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골주의 정당인 프랑스 국민 연합(RPF)에 합류하여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앤드르에루아르 지역구의 상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에는 프랑스령 알제리 유지를 강력히 주장하며 드골의 정계 복귀를 촉구하는 신문 Le Courrier de la colère프랑스어를 창간했다. 그는 이 신문 1957년 12월 2일 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알제리가 프랑스 땅인 한, 알제리의 법이 프랑스 법인 한, 알제리를 위한 투쟁은 합법적인 투쟁이며, 알제리를 위한 반란은 합법적인 반란이다."
이러한 반란에 대한 명시적인 호소에 대해 사회주의 정치인 알랭 사바리는 훗날 비밀군사조직(OAS)의 반란을 언급하며 "병사들이 범인이 아니라 드브레가 범인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2.3. 제5공화국의 총리
미셸 드브레는 샤를 드골 정부 3기 시절인 1958년 6월 1일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행정부의 권한 강화를 목표로 한 제5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파리 서부 근교 라 셀 생 클루의 라 셀 성에 각료들과 함께 머물며 헌법 초안을 작성했고, 헌법 평의회 의장으로서 1958년 헌법 제정에 헌신했다.
제5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되고, 선거에서 드골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드브레는 1959년 1월 8일 제5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대부분 UNR 당 소속 인사들로 구성된 27명의 각료와 함께 새 정부를 구성했다.
드브레가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프랑스 경제는 성장세를 보였다. 투자율은 연평균 약 10%, 산업 생산율은 연평균 6% 증가했으며, 국내외 부채도 완화되었다.
그러나 알제리 전쟁을 종식시키고 알제리에 자결권을 부여하는 에비앙 협정이 1962년 4월 8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약 10대 1)으로 승인되자, 드골 대통령은 며칠 뒤 드브레를 총리직에서 해임하고 조르주 퐁피두를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 드브레 내각 구성 (1959년 1월 8일) ===
| 직책 | 이름 |
|---|---|
| 총리 | 미셸 드브레 |
| 외무부 장관 | 모리스 쿠브 드 뫼빌 |
| 육군부 장관 | 피에르 길로마 |
| 내무부 장관 | 장 베르토앵 |
| 재무경제부 장관 | 앙투안 피네 |
| 상공부 장관 | 장-마르셀 잔네네 |
| 노동부 장관 | 폴 바콩 |
| 법무부 장관 | 에드몽 미셸레 |
| 국민교육부 장관 | 앙드레 불로슈 |
| 재향군인부 장관 | 레몽 트리불레 |
| 문화부 장관 | 앙드레 말로 |
| 농업부 장관 | 로제 우데 |
| 공공사업 및 운송부 장관 | 로베르 뷔롱 |
| 공중보건 및 인구부 장관 | 베르나르 슈노 |
| 우편통신부 장관 | 베르나르 코르뉘-장티유 |
| 정보부 장관 | 로제 프레이 |
| 건설부 장관 | 피에르 쉬드로 |
=== 내각 변동 사항 ===
| 날짜 | 내용 |
|---|---|
| 1959년 3월 27일 | 로베르 르코르가 협력부 장관으로 입각. |
| 1959년 5월 27일 | 앙리 로슈로가 우데를 이어 농업부 장관 취임. |
| 1959년 5월 28일 | 피에르 샤트네가 베르토앵을 이어 내무부 장관 취임. |
| 1959년 12월 23일 | 드브레가 불로슈를 이어 국민교육부 장관 임시 취임. |
| 1960년 1월 13일 | 윌프리드 보움가르트너가 피네를 이어 재무경제부 장관 취임. |
| 1960년 1월 15일 | 루이 조스가 드브레를 이어 국민교육부 장관 취임. |
| 1960년 2월 5일 | 피에르 메스메르가 길로마를 이어 육군부 장관 취임. 로베르 르코르는 해외 현 및 영토부 장관과 사하라부 장관이 됨. 이전 협력부 장관 직책은 폐지됨. 미셸 모리스-보카노프스키가 코르뉘-장티유를 이어 우편통신부 장관 취임. 루이 테르누아르가 프레이를 이어 정보부 장관 취임. |
| 1960년 11월 23일 | 루이 조스가 알제리부 장관이 됨. 피에르 길로마가 조스를 이어 국민교육부 장관 임시 취임. |
| 1961년 2월 20일 | 뤼시앵 파예가 길로마를 이어 국민교육부 장관 취임. |
| 1961년 5월 6일 | 로제 프레이가 샤트네를 이어 내무부 장관 취임. |
| 1961년 5월 18일 | 장 푸아예가 협력부 장관으로 입각. |
| 1961년 8월 24일 | 베르나르 슈노가 미셸레를 이어 법무부 장관 취임. 조제프 퐁타네가 슈노를 이어 공중보건 및 인구부 장관 취임. 에드가르 피자니가 로슈로를 이어 농업부 장관 취임. 루이 자키노가 르코르를 이어 해외 현 및 영토부 장관과 사하라부 장관 취임. 테르누아르는 정보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해당 직책은 폐지됨. |
| 1962년 1월 19일 |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보움가르트너를 이어 재무경제부 장관 취임. |
2.4. 레위니옹 하원의원
1963년 4월 레위니옹 섬에 도착한 미셸 드브레는, 1960년 자신이 도입했던 이른바 드브레 법령(ordonnance Debré프랑스어)에 대한 지역 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5월 6일 생드니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법령은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 및 해외 영토 소속 공무원이 공공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의심만으로도 프랑스 본토로 소환될 수 있도록 규정하여 논란이 되었다. 레위니옹의 자치에 반대하는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시 지역 우익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후 10년간 피에르 라구르그와 경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드브레는 1946년 이루어진 레위니옹의 레지옹화를 정당화하고 주민들의 독립 요구를 억제하기 위해,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섬 최초의 가족 계획 센터를 열었다. 당시 레위니옹에는 리세 르콩트-드-릴(Lycée Leconte-de-Lisle프랑스어)이라는 중등학교 하나밖에 없었는데, 드브레는 르탕퐁 남쪽에 두 번째 중등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교육 시설 확충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드브레의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논란을 낳은 사건은 1968년부터 1982년까지 2,000명이 넘는 레위니옹 출신 아동들을 프랑스 본토로 강제로 이주시킨 일이다. 이 아동들은 크뢰즈 지역 등에서 사실상 무보수 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아동 강제 이주 실태는 2002년, 피해자 중 한 명인 장-자크 마시알이 드브레를 '미성년자 납치, 연행 및 추방' 혐의로 고소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에는 크뢰즈 레위니옹 협회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유사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2.5. 이후 정치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샤를 드 골의 동료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골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프랑스 엘리트 공무원 양성 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 창설을 주도했다.
행정부의 권한 강화를 목표로 한 프랑스 제5공화국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리 서부 근교 라 셀 생 클루의 라 셀 성에서 다른 각료들과 함께 헌법 초안 작성 작업에 참여했으며, 이후 헌법 평의회 의장으로서 1958년 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주요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시기 | 주요 경력 |
|---|---|
| 1958년 | 법무부 장관 |
| 1959년 |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총리 |
| 1966년 | 경제재정부 장관 |
| ~ 1989년 | 앙부아즈 시장 |
| 1968년 | 외무부 장관 |
| 조르주 퐁피두 정권 시기 | 국방부 장관 |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1차 투표에서 1.66%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큰 차이로 패배했다.
3. 정치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샤를 드 골의 동료로 활동했으며, 종전 후 골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국립행정학교(ENA) 창설을 주도했다.
1948년부터 1959년까지 앙드르에루아르 지역구의 프랑스 상원 의원을 지냈다. 1958년 6월 1일, 드골 내각의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행정부 권한 강화를 목표로 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위해 파리 근교 라 셀 생 클루의 성에 각료들과 함께 머물며 초안을 마련했고, 헌법 평의회 의장으로서 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헌법이 통과된 후, 1959년 1월 8일부터 1962년까지 제5공화국의 초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알제리 전쟁을 종식시키고 알제리에 자결권을 부여한 1962년 프랑스 에비앙 협정 국민투표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자, 드골은 드브레를 조르주 퐁피두로 교체했다. 드브레는 알제리의 독립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식민 제국의 다른 지역들이 알제리의 전철을 밟을 것을 우려했다.
1962년 11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1963년 프랑스 해외 영토인 레위니옹으로 가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당시 레위니옹의 자결과 해외 레지옹 지위 폐지를 주장하던 레위니옹 공산당에 맞서 활동했으며, 1963년부터 1988년까지 레위니옹 지역구의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다. 또한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앙부아즈 시장을 역임했다.
1966년 경제재정부 장관으로 정부에 복귀했으며, 1968년 5월 위기 이후에는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1969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아래에서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국방부 장관 재임 시절, 군사 기지 확장을 위해 라르작 고원 농민들의 토지를 수용하려 하면서 라르작 투쟁이라는 강력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촉발시켰고, 이는 특히 좌파 진영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골주의의 정통 계승자로 여겨지던 드브레는 1974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1979년에는 유럽 연방주의에 반대하며 공화국을 위한 집결(RPR) 소속으로 유럽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이후 자크 시라크와의 갈등으로 RPR 내 입지가 약화되었다. 1981년 대통령 선거에 독자 출마했으나 1.66%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낙선했다.
주요 공직
| 직책 | 임기 |
|---|---|
| 법무부 장관 | 1958년 ~ 1959년 |
| 프랑스 총리 | 1959년 ~ 1962년 |
| 경제재정부 장관 | 1966년 ~ 1968년 |
| 외무부 장관 | 1968년 ~ 1969년 |
| 국방부 장관 | 1969년 ~ 1973년 |
주요 선출직 경력
4. 드브레 정부 (1959년 1월 8일 – 1962년 4월 14일)
드브레는 샤를 드골 정부 3기 시절인 1958년 법무장관이 되었다. 그는 제5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헌법은 국민투표와 선거에서 승리한 드골주의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제정되었으며, 드브레는 1959년 1월 8일 새로운 총리직에 취임했다. 그는 대부분 UNR당 소속인 27명의 각료와 함께 새 정부를 구성했다.
1962년 4월 8일 국민투표가 시행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에비앙 협정이 승인되자, 드골 장군은 드브레를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조르주 퐁피두를 새 총리로 임명했다. 드브레가 마티뇽 관저에서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투자율은 연간 약 10%, 산업 생산율은 6%씩 증가했으며, 국내외 부채도 완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