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극가
1. 개요
민극가는 18세기 말 ~ 19세기 초 활동한 한국 천주교의 신자이다.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개종 후 교리 선생으로 활동하며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다. 1839년 체포되어 고문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며, 1840년 1월 30일 5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존칭 | 성인 |
|---|---|
| 이름 | 민극가 스테파노 |
| 출생일 | 1787년 |
| 사망일 | 1840년 |
| 축일 | 9월 20일 |
| 공경하는 곳 | 가톨릭 교회 |
| 출생지 | 조선 |
| 직함 | 순교자 |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 시복자 | 교황 비오 11세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 한글 | 민극가 |
| 한자 | 閔克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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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출생 -
이규경
이규경은 19세기 조선의 학자로서, 60권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저술하고 실학 사상을 계승하며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여 초기 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788년 출생 -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 왕녀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국왕의 장녀인 아우구스테 아말리아 폰 바이에른 왕녀는 외젠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이 되었고, 자녀들의 혼사를 통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정경심
정경심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가석방된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대학교수였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다미앵 신부
벨기에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예수 성심 성모 수도회 소속 선교사인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16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사목 활동을 펼치다 자신도 한센병에 감염되었으나 봉사를 이어갔고, 사후 시성되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 생애
민극가는 인천의 비천주교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중년의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충실히 신앙생활을 했다. 20세에 첫 부인과 사별 후 재혼했으나, 후처와 딸 또한 6~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한양,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떠돌며 필사한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독실한 신앙생활과 자선 활동으로 많은 비신자들을 개종시켰고, 교리 선생으로 임명된 후에는 더욱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자, 회장으로서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해 12월 한양 근교에서 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했다. "만 대의 매를 맞아도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대곤 40여 대를 맞았고, 감옥에서도 배교자들을 설득하여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
교리 교사였던 민극가는 법정에서 곤장 30여 대를 더 맞고, 1840년 1월 30일 한양 포청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2.1. 출생과 성장
민극가는 인천의 한 비천주교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중년일 때, 민극가는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충실히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는 결혼했지만, 20세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재혼을 원치 않았지만, 아버지와 친구들이 다른 교우 여성과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후처 또한 6~7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처와 함께 얻었던 딸마저도 운명을 달리했다.
2.2. 두 번의 결혼과 사별
민극가는 인천의 한 비천주교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중년일 때, 민극가는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충실히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는 결혼했지만, 20세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재혼을 원치 않았지만, 아버지와 친구들이 다른 교우 여성과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후처 또한 6~7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처에게서 얻었던 딸마저 운명을 달리했다.
2.3. 신앙 활동과 체포
민극가는 인천의 한 비천주교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중년일 때, 민극가는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충실히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는 결혼했지만, 20세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재혼을 원치 않았지만, 아버지와 친구들이 다른 교우 여성과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후처 또한 6~7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처와 함께 얻었던 딸마저도 운명을 달리했다.
그 후 민극가는 한양, 인천, 부평, 수원 등을 떠돌면서 필사한 책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매우 독실했으며 자선에도 열심이었다. 그의 모범으로 인해 많은 비신자들이 개종하게 되었다. 그는 교리 선생으로 임명되고부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비신자들을 개종시키는데 더 큰 노력을 쏟았다.
민극가는 1839년 기해년의 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자 회장으로서 각지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12월에 한양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과 유혹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신앙을 증언했다. 그는 여러 차례 주리를 틀리고 꼬챙이로 찔리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가 만 대의 매를 맞는다 하여도, 결코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석방시킨다면, 저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널리 전파할 것입니다." 형리들은 그를 더 극심하게 매질했다. 그는 대곤 40여 대를 맞았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줄곧 배교자들의 마음을 돌리고 그들의 신앙을 다시금 고백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였다.
교리 교사 민극가는 다시 법정에 세워졌고 곤장 30여 대를 더 맞았다. 며칠 후 1840년 1월 30일에 그는 한양의 포청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2.4. 순교
민극가는 인천의 한 비천주교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중년일 때, 민극가는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충실히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는 결혼했지만, 그가 20세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재혼을 원치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그가 다른 교우 여성과 결혼토록 설득했다. 후처 또한 6~7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처와 함께 얻었던 딸 마저도 운명을 달리했다.
그 후 민극가는 한양, 인천, 부평, 수원 등을 떠돌면서 필사한 책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매우 독실했으며 자선에도 열심이었다. 그의 모범으로 인해 많은 비신자들이 개종하게 되었다. 그는 교리 선생으로 임명되고부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비신자들을 개종시키는데 더 큰 노력을 쏟았다.
민극가는 1839년 기해년의 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자 회장으로서 각지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12월에 한양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과 유혹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신앙을 증언했다. 그는 여러 차례 주리를 틀리고 꼬챙이로 찔리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가 만 대의 매를 맞는다 하여도, 결코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석방시킨다면, 저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널리 전파할 것입니다." 형리들은 그를 더 극심하게 매질했다. 그는 대곤 40여대를 맞았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줄곧 배교자들의 마음을 돌리고 그들의 신앙을 다시금 고백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였다.
교리 교사 민극가는 다시 법정에 세워졌고 곤장 30여대를 더 맞았다. 몇 일 후 1840년 1월 30일에 그는 한양의 포청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