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다우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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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다우가스는 13세기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리투아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다. 출생 연도는 1200년경으로 추정되며, 1219년 조약에 형제로 추정되는 다우스프룽가스와 함께 언급되었다. 민다우가스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주변 공작들을 제거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며, 1251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1253년 대관식을 거행하여 리투아니아 왕국을 선포하고, 8년 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누리며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그러나 리보니아 기사단과의 갈등, 조카 트레니오타와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1263년 암살당했다. 민다우가스는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 운동 이후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재평가되었으며, 그의 즉위 750주년은 기념행사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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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우가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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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민다우가스 |
로마자 표기 | Myndowen (독일어), Mindowe (라틴어), Мендог (고대 동슬라브어), Міндоўг (벨라루스어), Mendog (폴란드어) |
칭호 | 리투아니아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
![]() | |
즉위 | 1253년 7월 6일 |
전임자 | (리투아니아 대공) |
후임자 | (리투아니아 국왕) 트레니오타 |
가문 | 민다우가스 가 |
출생일 | 1203년경 |
사망일 | 1263년 9월 12일 |
배우자 | 모르타의 자매 모르타 |
자녀 | 바이슈빌카스 최소 3명 이상 |
언어 | , , , , , , , |
통치 | |
리투아니아 대공 | 1236년 – 1253년 |
리투아니아 국왕 | 1253년 – 1263년 |
가족 | |
아버지 | 림가우다스? |
자녀 | 이름 미상의 딸 (슈바르나스의 아내) 바이슈빌카스 루클리스 루페이키스 |
추가 정보 | |
참고 자료 | Mindaugas, 리투아니아의 통치자 민다우가스 튜턴 기사 대 리투아니아 전사: 리투아니아 십자군 1283–1435 진짜 리투아니아가 태어난 곳: 오늘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었는가? |
2. 배경
13세기 초 리투아니아는 여러 영주들이 다양한 영지와 부족들을 지배하는 다분할 체제였다. 이들은 종교, 전통, 상업, 친족 관계, 군사 원정 참여,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존재라는 공통점으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서구의 상인과 선교사들은 12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1201년 라트비아 땅에 리가를 세웠다. 1236년 샤울레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서구 세력의 확장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무장한 기독교 기사단은 계속해서 리투아니아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리투아니아는 동시에 몽골 제국의 공격도 받았다.
1219년 할리치-볼리니아 공국과의 조약은 발트 민족들이 결합한 최초의 결정적인 증거로 간주된다. 이 조약에는 20명의 리투아니아 공(公)과 한 명의 후작 미망인이 서명했는데, 그 중 민다우가스와 그의 형제 다우스프룽가스를 포함한 5명은 상위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위 공으로 기록된 것은 민다우가스가 공의 칭호를 계승했음을 의미한다. 1236년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는 민다우가스를 리투아니아 전체의 지배자로 묘사하고 있다. 루시 연대기에는 민다우가스가 자신의 친족을 포함한 여러 공을 살해하거나 추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가 S. C. 로웰(Rowell)은 민다우가스가 "결혼, 살해, 군사적 정복과 같은 친숙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서술한다.
1230년대부터 1240년대에 걸쳐 민다우가스는 발트인과 슬라브인의 땅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면서 권력을 강화했다. 리투아니아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민다우가스는 쿠를란트(Kurland)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한편 키예프를 파괴하고, 1241년 폴란드 왕국에 침입하여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크라쿠프를 불태웠다. 샤울레스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북쪽 국경선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지만, 기독교 기사단은 단치히(그단스크)와 클라이페다 같은 도시를 건설하며 발트해 연안으로 계속 진출했다. 북서쪽에서 압박을 받자 민다우가스는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나바흐루다크, 그로드노, 바우카비스크 등의 도시와 포라츠크 공국을 정복했다. 1239년경에는 흑루시(Black Ruthenia) 지역의 통치를 아들 바이슈빌가스에게 맡겼다. 1248년 민다우가스는 조카이자 다우스프룽가스의 아들인 타우트빌라스와 게드비다스를 제마이티아 공(젬가이티아 공국) 비킨타스와 함께 스몰렌스크 원정에 보냈지만 실패했다. 1249년에는 조카들의 영토와 비킨타스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시도로 내전이 발발하는 등, 리투아니아 지배 강화를 위한 민다우가스의 노력은 복합적인 결과를 낳았다.
2. 1. 가계와 이름
기록물이 부족하여 민다우가스의 출신과 가계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6세기와 17세기에 작성된 비초비에츠 연대기(Bychowiec Chronicle)는 로마 제국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진 귀족 가문인 팔레모니드(Palemonids)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부분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의 출생년도는 때때로 약 1200년경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불확실하다. 그의 아버지는 리보니아 운문 연대기(Livonian Rhymed Chronicle)에 강력한 공작(''ein kunic grôß'')으로 언급되지만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후대의 연대기에서는 그의 이름을 링골드(Ryngold)라고 기록하고 있다. 1219년 조약 문서에 언급된 다우스프룽가스(Dausprungas)는 그의 형제로 추정되며, 다우스프룽가스의 아들인 타우트빌라스(Tautvilas)와 게드비다스(Gedvydas)는 그의 조카들이다. 그는 두 명의 누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 명은 비킨타스(Vykintas)와 결혼했고 다른 한 명은 할리치의 다니엘(Daniel of Halych)과 결혼했다. 비킨타스와 그의 아들 트레니오타(Treniota)는 후일 권력 다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민다우가스는 최소한 두 명의 아내, 모르타와 모르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동생을 두었고, 아마도 그 이전의 아내도 있었을 것이다. 두 명의 자녀 – 바이슈빌카스(Vaišvilkas)라는 아들과 1255년 스바른(Svarn)과 결혼한 이름 없는 딸 – 는 모르타의 자녀들이 어릴 때 이미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 아내의 존재가 추정된다. 바이슈빌카스와 그의 누이 외에도 루클리스(Ruklys)와 루페이키스(Rupeikis)라는 두 아들이 기록에 언급되어 있다. 후자의 두 아들은 민다우가스와 함께 암살당했다.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며 역사가들은 그들의 수에 대해 계속 논의하고 있다. 그는 다른 두 아들을 두었을 수도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나중에 서기관(scribe)에 의해 루클리스와 루페이키스로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3세기 리투아니아는 다른 나라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리투아니아식 이름들은 여러 편년사가들에게 생소하게 들렸고, 그들은 자신의 모국어에 가깝게 이름을 바꾸었다. 역사적 기록에 남아 있는 민다우가스(Mindaugas)의 이름은 다양한 왜곡된 형태로 기록되었다.
언어 | 표기 |
---|---|
라틴어 | Mindowe, Mendog, Mindog, Mendolphus[7][8] |
독일어 | Mindouwe, Myndow, Myndawe, Mindaw |
폴란드어 | Mendog, Mondog, Mendoch, Mindovg |
고대 교회 슬라브어 | Mindovg, Mindog, Mindowh |
고대 교회 슬라브어 자료가 민다우가스의 삶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언어학자들은 그의 원래 리투아니아 이름을 재구성할 때 이 자료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고대 교회 슬라브어 표기는 ''Mindovg''였는데, 이는 ''Mindaugas'' 또는 ''Mindaugis''로 쉽고 자연스럽게 재구성될 수 있다. 1909년 리투아니아 언어학자 카지미에라스 부가(Kazimieras Būga)는 접미사 ''-as''를 지지하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고, 그 이후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Mindaugas''는 리투아니아의 그리스도교화 이전에 사용된 고대의 이음절 리투아니아 이름이며, ''min''과 ''daug''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어원은 "daug menąs" (많은 지혜) 또는 "daugio minimas" (많은 명성)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 2. 초기 리투아니아
13세기 초 리투아니아는 여러 영주들이 다양한 영지와 부족들을 지배하는 다분할 체제였다. 이들은 종교, 전통, 상업, 친족 관계, 군사 원정 참여,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존재라는 공통점으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서구의 상인과 선교사들은 12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1201년 라트비아 땅에 리가를 세웠다. 1236년 샤울레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서구 세력의 확장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무장한 기독교 기사단은 계속해서 리투아니아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리투아니아는 동시에 몽골 제국의 공격도 받았다.
1219년 할리치-볼리니아 공국과의 조약은 발트 민족들이 결합한 최초의 결정적인 증거로 간주된다. 이 조약에는 20명의 리투아니아 공(公)과 한 명의 후작 미망인이 서명했는데, 그 중 민다우가스와 그의 형제 다우스프룽가스를 포함한 5명은 상위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위 공으로 기록된 것은 민다우가스가 공의 칭호를 계승했음을 의미한다. 1236년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는 민다우가스를 리투아니아 전체의 지배자로 묘사하고 있다. 루시 연대기에는 민다우가스가 자신의 친족을 포함한 여러 공을 살해하거나 추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가 S. C. 로웰(Rowell)은 민다우가스가 "결혼, 살해, 군사적 정복과 같은 친숙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서술한다.
1230년대부터 1240년대에 걸쳐 민다우가스는 발트인과 슬라브인의 땅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면서 권력을 강화했다. 리투아니아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민다우가스는 쿠를란트(Kurland)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한편 키예프를 파괴하고, 1241년 폴란드 왕국에 침입하여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크라쿠프를 불태웠다. 샤울레스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북쪽 국경선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지만, 기독교 기사단은 단치히(그단스크)와 클라이페다 같은 도시를 건설하며 발트해 연안으로 계속 진출했다. 북서쪽에서 압박을 받자 민다우가스는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나바흐루다크, 그로드노, 바우카비스크 등의 도시와 포라츠크 공국을 정복했다. 1239년경에는 흑루시(Black Ruthenia) 지역의 통치를 아들 바이슈빌가스에게 맡겼다. 1248년 민다우가스는 조카이자 다우스프룽가스의 아들인 타우트빌라스와 게드비다스를 제마이티아 공(젬가이티아 공국) 비킨타스와 함께 스몰렌스크 원정에 보냈지만 실패했다. 1249년에는 조카들의 영토와 비킨타스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시도로 내전이 발발하는 등, 리투아니아 지배 강화를 위한 민다우가스의 노력은 복합적인 결과를 낳았다.
3. 권력 장악
13세기 초 리투아니아는 여러 공작과 군주들이 다스리는 다수의 공국과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종교와 전통, 무역, 친족 관계, 공동 군사 작전, 그리고 이웃 지역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존재라는 공통점으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서구 상인과 선교사들은 12세기 동안 이 지역을 장악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하여 1201년 리가를 건설했다. 리투아니아에서 그들의 노력은 1236년 샤울레이 전투에서 패배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무장한 기독교 군사 수도회들은 계속해서 위협이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또한 몽골 제국의 침입을 받았다.
1219년에 체결된 갈리치아-볼히니아와의 조약은 일반적으로 이 지역의 발트족이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여 통합되고 있었다는 최초의 결정적인 증거로 여겨진다. 이 조약의 서명자에는 20명의 리투아니아 공작과 한 명의 미망인 공작 부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 5명은 장로였기 때문에 나머지 16명보다 우선권을 가졌다고 명시되어 있다. 민다우가스는 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제 다우스프룬가스와 함께 장로 공작들로 나열되어 있으며, 그들이 작위를 상속받았음을 암시한다.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는 1236년 모든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로 묘사한다. 그가 이러한 지위에 오른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루테니아 연대기는 그가 그의 친척들을 포함한 여러 공작들을 살해하거나 축출했다고 언급한다. 역사가 S.C. 로웰은 그의 권력 장악을 "결혼, 살인, 군사 정복의 친숙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1230년대와 1240년대에 민다우가스는 여러 발트와 슬라브 지역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확립했다. 이 지역의 전쟁이 심화되었고, 그는 쿠를란트에서 독일군과 싸웠고, 몽골인은 1240년 키예프를 파괴하고 1241년 폴란드에 진입하여 두 개의 폴란드 군대를 패배시키고 크라쿠프를 불태웠다. 샤울레이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의 승리는 북부 전선을 일시적으로 안정시켰지만, 기독교 수도회들은 발트 해안을 따라 계속해서 이득을 얻었고, 클라이페다 (메멜) 도시를 건설했다. 민다우가스는 나바흐루다크에 거주지를 마련했고, 상류 네만과 그 지류에 있는 흐로드나, 보프카비스크, 슬로님 도시들과 폴로츠크 공국을 포함하여 소위 흑 루테니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1239년경 그는 자신의 아들 바이슈빌카스를 임명하여 흑 루테니아로 알려진 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1248년 그는 그의 형제 다우스프룬가스의 아들인 조카 타우트빌라스와 에디비다스, 그리고 사모기티아 공작 비킨타스를 파견하여 스몰렌스크를 정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리투아니아에서 그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1249년 그는 조카들과 비킨타스의 땅을 장악하려고 했을 때 내전이 발발했다.
4. 기독교 개종과 대관식
민다우가스는 1250년 또는 1251년에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세례를 받고 서리투아니아 지배 지역 전체를 할양하는 데 동의했다. 교황은 몽골의 위협에 대한 방어벽으로서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를 환영했고, 민다우가스는 리투아니아와 기독교 기사단의 분쟁에 대한 교황의 중재를 노렸다. 1251년 6월 17일, 인노첸시오 4세는 두 개의 결정적인 교황령에 서명했다. 하나는 헬름 주교에게 보낸 민다우가스의 대관을 위한 것으로, 리투아니아 주교 임명과 성당 건설 지시가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교황령에는 새로운 주교가 리가 대주교가 아닌 로마 교황청에 직속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자치권은 바람직한 결과였다.
민다우가스의 세례에 대한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내, 두 아들, 궁정 인물들도 세례를 받았다. 인노첸시오 4세는 나중에 민다우가스의 많은 신민들도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즉위 과정과 기독교회 설립에는 2년이 걸렸다. 내전은 계속되었고, 1251년 봄과 여름에 타우트빌라스와 그의 남은 동맹자들은 보루타 성의 민다우가스 전사들과 리보니아 기사단의 석궁병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타우트빌라스의 군대는 트베리멘트 성(제마이티야의 트베라이로 추정)을 방어하기 위해 후퇴했다. 비킨타스는 1251년 또는 1252년에 사망했고, 타우트빌라스는 다닐로와 재결합해야 했다.
5. 리투아니아 왕국
1253년 여름, 민다우가스와 그의 아내 몰타는 대관식을 올렸다. 하인리히 하이덴리히 폰 쿨름 주교가 교회 의식을 주관하고 안드레아스 슈틸란트가 왕관을 수여했다. 6월 6일은 오늘날 건국 기념일(Lithuanian: ''Valstybės diena'')로 기념되며, 현대 리투아니아의 공식 공휴일이다. 대관식의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 날짜를 널리 알린 역사가 에드바르다스 구다비치우스는 이 날짜에 대해 종종 이의를 제기받았다. 대관식 장소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약 8년 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가 이어졌다. 민다우가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쪽으로의 영토 확장에 집중하고 국가 기구를 설립하여 조직화했다. 흑루테니아, 포로츠크, 다우가바 강 유역의 주요 상업 중심지, 그리고 핀스크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동시에 할리치-볼리니아 공국과도 평화 협상을 진행하여 다닐로 공의 아들이자 훗날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는 시반과 그의 딸을 결혼시켰다. 리투아니아와 서유럽 국가들 및 교황청과의 관계는 강화되었다. 1255년에는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부터 아들을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대관시키는 허가를 받았다. 궁전이 완성되었고, 행정 제도, 외교관의 직무가 시작되었다. 건국의 표징으로 긴 은화가 발행되었다. 민다우가스는 아마도 오늘날의 빌뉴스 대성당이 세워진 곳에 빌뉴스 대성당 건설을 지원했다.
민다우가스는 대관식 후 즉시 제마이티야의 일부, 나드루바, 주키야(하지만 이들 서부 지역에는 민다우가스의 지배권이 미치지 않았다)의 땅을 리보니아 기사단에 양도했다.
민다우가스가 리보니아 기사단에 양도한 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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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지역 |
1253년 6월 | 제마이티야의 일부 (라세이니아이의 절반, 베티갈라, 아리오갈라 및 라우쿠바 – 나머지 절반은 1254년 3월에 가톨릭교회의 주교령이 됨), 주키야와 나드루바의 절반 |
1255년 10월 | 세리야 |
1257년 | 칼슈바, 나드루바, 제마이티야의 일부 |
1259년 8월 7일 | 주키야의 일부, 스칼바와 제마이티야 전토 |
1260년 6월 | 리투아니아 전토 (민다우가스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
1261년 8월 7일 | 세리야 전토 |
1255년–1261년에 민다우가스가 기사단에 더 많은 땅을 양도했는지 여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양도는 기사단의 위조였을 가능성도 있다. 기사단이 위조했다는 가설은 신빙성이 높은데, 민다우가스가 사실상 지배하지 않았던 땅에 관한 문서가 있다는 사실과 조약의 증인과 인장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다우가스와 그의 적대자인 다닐로는 1255년에 흑루테니아를 다닐로의 아들인 로만에게 양도하는 안으로 화해했다. 후에 민다우가스의 아들인 바이슈빌가스는 정교회의 세례를 받고 수도사가 되어 수도원과 여자 수도원을 설립했다. 타우트빌라스의 적대감은 자신이 민다우가스의 우위를 인정하고 포로츠크를 봉토로 받아들임으로써 일시적으로 가라앉았다. 몽골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벨케가 리투아니아 지배에 도전하기 위해 장군을 파견(다닐로와 다른 여러 제후들이 참가하도록 명령했다)한 1258년 또는 1259년에 발생했다. 『노브고로드 제1년대기』는 이때의 행동에 대해 리투아니아의 패배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동시에 민다우가스에게는 실질적인 승리로 볼 수 있다.
민다우가스 자신이 보루타를 조카와 비킨타스로부터 지켰다는 기록은 『이파티에프 연대기』에 약간 등장한다(다른 두 자료는 “민다우가스의 성”으로 기술하고 있다). 보루타의 위치는 명기되어 있지 않으며 그의 궁전을 둘러싸고 고고학적 탐구 외에도 상당한 추측이 제기되어 케르나베와 빌뉴스를 포함한 최소 14곳의 다른 장소가 제시되었다. 케르나베에서 진행된 공식적인 고고학 발굴은 “민다우가스의 옥좌 둔덕”이라고 명명된 곳의 일부가 붕괴된 1979년에 시작되었다. 이 도시는 현재 건국 기념일의 주요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6. 암살과 그 이후
리보니아 기사단은 민다우가스와의 동맹을 이용하여 사모기티아(제마이티아)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 1252년 민다우가스는 기사단의 클라이페다 성 건설을 승인했다. 그러나 기사단의 통치는 억압적이었고, 현지 상인들은 기사단이 승인한 중개인을 통해서만 거래해야 했으며, 상속법과 결혼, 거주지 선택에도 제한이 있었다. 이에 따라 여러 전투가 벌어졌는데, 1259년 스쿠오다스 전투와 1260년 두르베 전투에서 기사단은 크게 패배했다. 스쿠오다스 전투의 패배는 세미갈리아인들의 반란을, 두르베 전투의 패배는 프러시아인들의 대프러시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과 조카 트레니오타의 격려로 민다우가스는 기사단과의 평화를 파기했고, 기독교화로 얻고자 했던 이득은 미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다우가스는 이후 이교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개종 동기가 전략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민다우가스의 배교에 대한 주장은 1324년 요한 22세 교황의 주장과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 기록에 근거한다. 연대기에는 민다우가스가 이교 신앙을 계속 실천하며 제물을 바치고 시체를 태우는 등 이교 의식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민다우가스가 볼히니아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 기록에 편향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클레멘스 4세 교황은 1268년 "행복한 기억의 민다우가스"를 언급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민다우가스의 세례는 이후의 발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다수의 인구와 귀족들은 이교도로 남았고, 백성들은 개종할 필요가 없었다. 빌뉴스에 세워진 대성당은 이교 사원으로 대체되었고, 대관식 이후의 외교적 성과는 모두 사라졌지만, 기독교의 실천과 혼인은 용인되었다.
기사단과의 지역 갈등은 고조되었다. 노브고로드의 알렉산더 네프스키, 타우트빌라스와 그의 아들 콘스탄틴은 민다우가스에 반대하는 연합을 구성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트레니오타는 사모기티아 저항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군대를 이끌고 체시스(현재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해안에 도달하고, 마조프셰(현재 폴란드)와 싸웠다. 그의 목표는 정복당한 모든 발트족들이 기독교 기사단에 맞서 리투아니아의 지도력 아래 통합하는 것이었다. 민다우가스는 루테니아 땅 정복에 집중하며 대규모 군대를 브랸스크로 파병하면서, 트레니오타와 민다우가스는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추구하게 되었다. 리보니아 운율 연대기는 민다우가스가 트레니오타가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에서 동맹을 맺지 않은 것에 불쾌감을 느꼈고, 외교를 선호하게 되었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 와중에 아내 모르타가 사망하자, 민다우가스는 그녀의 여동생이자 다우만타스의 아내였던 여성을 차지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우만타스와 트레니오타는 1263년 가을 민다우가스와 그의 두 아들을 암살했다. 후기 중세 전통에 따르면, 암살은 아글로나에서 이루어졌다. 민다우가스는 조상의 전통에 따라 그의 말들과 함께 묻혔다. 민다우가스 사후, 리투아니아는 내부 혼란에 빠졌다. 이후 7년 동안 트레니오타, 그의 사위 스바른, 그의 아들 바이슈빌카스 등 세 명의 후계자가 암살당했다. 안정은 약 1270년 대공으로 지명된 트라이데니스의 통치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7. 유산
19세기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 운동 이전까지 민다우가스는 리투아니아 역사 서술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교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종교를 배신했다고 경멸했고, 기독교인들은 그의 지지가 미온적이었다고 보았다. 그는 게디미나스 대공의 언급에서 간략히 언급되었을 뿐이며, 비타우타스 대공에 의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의 알려진 가족 관계는 그의 자녀들로 끝나며, 역사 기록에는 1572년까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통치한 게디미나스 왕조와 그의 후손들 사이의 어떤 연관성도 나타나 있지 않다. 17세기 빌뉴스 대학교의 학장은 그를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겪고 있던 어려움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리투아니아인들 사이의 내분의 씨앗이 뿌려졌다"). 20세기의 한 역사가는 그에게 "리투아니아 국가 조직의 파괴"라는 죄책감을 부여했다.
리투아니아 학자 요나스 토토라이티스(Jonas Totoraitis)가 그의 생애에 대해 처음으로 학술 연구를 한 논문 (''Die Litauer unter dem König Mindowe bis zum Jahre 1263'')은 190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1990년대 역사가 에드바르다스 구다비추스(Edvardas Gudavičius)는 그의 연구 결과, 즉위일을 명확히 밝혀냈으며, 이는 국경일이 되었다. 그의 즉위 750주년은 2003년 빌뉴스에 있는 민다우가스 다리의 헌정, 수많은 축제와 콘서트, 그리고 다른 국가 원수들의 방문으로 기념되었다.
벨라루스에는 아담 미츠키에비치가 1828년 시 ''콘라드 발렌로드(Konrad Wallenrod)''에서 언급한 노보그루도크(Navahrudak)에 있는 전설적인 민다우가스 언덕(Гара_Міндоўгаbe)이 있다. 민다우가스 언덕에는 1993년 기념비가 세워졌고, 2014년에는 민다우가스의 금속 조각상이 세워졌다.
민다우가스는 3대 서정시인 중 한 명인 유리우스 스워바츠키(Juliusz Słowacki)가 쓴 1829년 극 '민도베(Mindowe)'의 주요 주제이다. 그는 20세기 여러 문학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라트비아 작가 마르티뉴스 지베르츠(Mārtiņš Zīverts)의 비극 '바라(Vara, 힘, 1944)', 유스티나스 마르친케비추스(Justinas Marcinkevičius)의 극시 '민다우가스(Mindaugas, 1968)', 로무알다스 그라나우스카스(Romualdas Granauskas)의 '야우치오 아우코지마스(Jaučio aukojimas, 황소의 제물, 1975)', 그리고 유오자스 크랄리카우스카스(Juozas Kralikauskas)의 '민다우가스(Mindaugas, 1995)' 등이 있다. 민다우가스의 대관식과 대공국의 건설은 2002년 벨라루스 소설 '알히에르드의 창(Alhierd's Lance)'의 주요 주제이며, 이 소설은 민다우가스 즉위 750주년을 기념하여 볼가 이파타바(Volha Ipatava, Вольга Міхайлаўна Іпатаваbe)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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