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치아-볼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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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치아-볼히니아는 1199년부터 1349년까지 존재했던 동유럽의 역사적 국가이다. 키예프 루스의 유산을 계승하려 했으며, 주변국들과의 동맹과 경쟁 속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했다. 12세기에는 상업적 번영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1199년 갈리치아 공국과 볼히니아 공국의 통합으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성립되었다. 1205년 로만 므스티슬라비치의 사망 이후 계승 전쟁을 겪었으며,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1340년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분할 점령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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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치아-볼히니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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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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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루테니아 사자 |
일반 명칭 | 갈리치아-볼히니아 |
다른 이름 | 갈리치-볼린, 갈리치아-볼리니아, 갈리치아-볼린, 갈리치-볼린, 할리치-볼린, 할리치-볼히니아, 갈리치아-볼로디메르 |
수도 | 볼로디미르 할리치 홀름 리비우 |
역사 | |
존속 기간 | 1199년 – 1349년 |
성립 | 공국 |
시작 연도 | 1199년 |
종료 연도 | 1349년 |
시작 사건 | 공국 |
종료 사건 | 볼히니아가 리투아니아에 합병 |
주요 사건 | 왕국으로 승격 (1253년) |
주요 사건 2 | 갈리치아를 폴란드에 상실 (1349년) |
이전 국가 | 갈리치아 공국 |
이전 국가 2 | 볼히니아 공국 |
계승 국가 | 루테니아 주 |
계승 국가 2 | 볼히니아 주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지배자 칭호 | 공작, 이후 왕 |
초대 통치자 | 로만 |
초대 통치자 재임 기간 | 1199년–1205년 |
마지막 통치자 | 류바르타스 |
마지막 통치자 재임 기간 | 1341년–1349년 |
언어 | |
공용어 | 고대 동슬라브어 |
종교 | |
주요 종교 | 동방 정교회 |
통화 | |
사용 통화 | 흐리우냐 |
기타 | |
속국 | 황금 군단의 속국 (1246년부터) |
2. 역사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키예프 루스의 할리치 공국과 볼히니아 공국이 합쳐져 만들어진 나라이다. 13세기 중반, 몽골의 침략을 받은 키예프를 대신하여 키예프 루스의 전통을 잇는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이 나라는 로마 교황 등 중세유럽 여러 나라의 지원을 받아 몽골에 맞서는 역할을 했다.[1]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루스계 나라들 중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였다. 현재의 서우크라이나, 서벨라루스, 동폴란드, 북동헝가리, 몰도바를 포함했지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볼로디미르, 할리치, 리비우 등 서우크라이나의 세 도시였다.[1]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중앙 유럽과 동유럽에서 활발하게 외교 활동을 펼쳤다. 로마 교황 및 튜튼 기사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영토 확장을 노리는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몽골인의 조치 울루스와는 갈등을 겪었다. 1245년 야로슬라프 전투에서 폴란드, 헝가리와 싸웠을 때, 대공국은 조치 울루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53년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이를 위기로 보고 다니일 대공에게 왕의 칭호를 주어 조치 울루스를 견제하려 했다. 1256년 바투 칸이 사망하자 대공국은 조치 울루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여러 차례 싸웠다. 교황은 몽골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요청했지만, 폴란드 침공과 헝가리 침공의 기억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참여하지 않아 1259년 독립 시도는 실패했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대공국이 몽골과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적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고,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1259년 몽골의 두 번째 침공으로 볼레스와프 5세의 영지인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가 파괴되었다. 레프는 1287년 노가이의 세 번째 폴란드 침공에서 헝가리 왕국의 자카르파티아 지방을 빼앗고 폴란드 왕국의 루블린 주를 점령하는 등 몽골의 힘을 빌려 영토를 늘린 후, 체코,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과 동맹을 맺어 몽골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쳤다.[1]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군주의 힘이 약하고 보야르라 불리는 귀족의 영향력이 강해 항상 내란의 위험이 있었다. 1340년 왕조가 끊어지자 귀족들이 잠시 나라를 다스렸지만, 이웃 나라들의 압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1]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군대에 의해 침략당해 분할되었다(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 영토 문제는 오랫동안 동유럽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1392년 결국 할리치 공국은 폴란드 왕국령이 되었고, 볼히니아 공국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
2. 1. 기원
볼히니아 공국은 10세기 말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인 브세볼로트가 볼로디미르의 공작으로 언급되었다.[4] 1050년대에 이호르 야로슬라비치가 잠시 볼로디미르의 공작으로 재위했다고 전해진다. 야로슬라프 스뱌토폴코비치는 계승권을 이유로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통치에 반대했던 키예프 루스의 유일한 공작이었지만, 1118년에 블라디미르가 그를 몰아낸 후 그의 모노마호비치 후손들이 지역 왕조 분파를 세웠다. 로만 므스티슬라비치는 모노마흐의 증손자로 1170년에 볼히니아의 왕위를 물려받았다.[4]갈리치아 공국은 즈베니고로드 공국, 페레미실 공국, 테레보블랴 공국을 블라디미르코 볼로다로비치가 통합하여 1124~1144년에 형성되었다.[5] 1080년대 또는 1090년대부터 이 세 공국은 모두 트무타라칸의 로스티슬라프의 아들들이 통치했는데, 그는 1054/1060년에서 1067년경에 볼히니아와 갈리치아의 공작이었을 수도 있다.[6]
볼히니아와 갈리치아는 12세기에 상업적 이점으로 인해 놀라운 경제 발전을 경험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비잔틴-셀주크 전쟁 (1046–1243)으로 인해 소아시아의 육상 무역로가 심각하게 붕괴되어, 동쪽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던 많은 상인들이 방향을 바꾸고, 다른 상인들은 크리미아의 수다크 (수그다이아) 항구를 통해 아나톨리아를 우회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상업 중심지의 번성은 곧 키예프 루스 상인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비잔틴 상품(때로는 유대인 상인을 통해)의 일부를 볼히니아와 갈리치아의 도시를 통해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 독일로 우회시켰다.
북부 흑해 항구와 중앙 유럽 간의 상업의 환승 허브로서의 새로운 지위는 12세기 말에 갈리치아와 볼로디미르-인-볼히니아에 막대한 부와 증가하는 정치적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무역과 소금 채굴은 갈리치아의 보야르 계급을 강화하여 로스티슬라비치 공작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약화시킬 수 있었다.[5]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1198년 또는 1199년경에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합병되었다. 이는 로스티슬라비치 가문의 갈리치아 분파가 멸망하고 볼히니아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를 차지하면서 왕조적 연합을 이루면서 발생했다.[4]
2. 2. 로만 므스티슬라비치 시대 (1199–1205)
블라디미르 2세 야로슬라비치가 1198년[7] 또는 1199년[4]에 사망하면서 갈리치아 공국에는 더 이상 상속자가 없게 되었다.[4] 이후 로만 므스티슬라비치는 자신의 영지였던 볼히니아 공국과 갈리치아 공국을 통합하여 갈리치아-볼히니아를 건국하였다. 로만은 갈리치아 보야르들의 초대를 받아들였는데, 보야르들은 로만이 멀리서 통치하는 동안 자신들의 권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로만은 보야르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보야르들을 추방했으며, 도시와 농촌 인구의 영향력을 키웠다.로만의 시대에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주요 도시는 할리치와 볼로디미르였다. 로만은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비잔틴 제국과 외교 관계를 발전시켰다. 키예프의 대공 류리크 로스티슬라비치는 루스 공작들의 연합을 결성하여 갈리치아-볼히니아를 공격했지만, 로만은 그들을 격파하고 1200년에 키예프를 점령했다. 그러나 당시 키예프는 강력한 권력 중심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로만은 번영하는 할리치를 자신의 수도로 유지하고 키예프는 자신의 부하들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이후 로만은 1201-2년과 1203-4년에 쿠만족을 상대로 두 차례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8] 1203년에는 페레야슬라프 공국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다. 로만이 부재한 동안 류리크 2세는 쿠만족과 체르니히우족의 도움을 받아 1203년에 키예프를 탈환하고 약탈했다. 1204년에 로만은 다시 키예프를 탈환[8]하여 그의 통치는 절정에 달했다. 그는 잠시 동안 루스 공작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8] 그는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3세의 조카와 결혼했는데, 이는 갈리치아가 쿠만족에 대항하는 주요 군사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비잔틴과의 관계는 갈리치아의 루스 인구와 하부 드네스트르 및 하부 다뉴브 지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9]
2. 3. 왕위 계승 전쟁 (1205–1245)
1205년, 로만 므스티슬라비치와 폴란드 간의 동맹이 깨지면서 레셰크 1세 및 마조비아의 콘라트와의 갈등이 발생했다. 로만은 자비호스트 전투 (1205)에서 폴란드군에 의해 살해되었고,[8] 이로 인해 거의 40년 동안 지속된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 기간 동안 갈리치아의 보야르(귀족)들은 로만의 아들 다니엘 갈리츠키를 중심으로 세습 군주 왕조의 설립을 막으려 했고, 대신 그들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꼭두각시들을 왕위에 앉혔다.약화된 갈리치아-볼히니아는 폴란드와 헝가리 간의 경쟁의 장이 되었다. 헝가리의 국왕 언드라시 2세는 스스로를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왕"을 뜻하는 ''rex Galiciæ et Lodomeriæla''로 칭했다.
로만이 죽은 후 갈리치아 보야르들은 안나-에우프로시네와 두 아들 다니엘과 바실코를 몰아냈다. 1206년부터 1212년까지 블라디미르 3세 이고레비치, 스뱌토슬라프 3세 이고레비치, 로만 2세 이고레비치가 통치했다. 그들은 갈리치아 보야르들에게 패배했고, 보야르 Владислав Кормильчич|볼로디슬라프 코르밀치치uk는 1213년 또는 1214년에 갈리치아의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루스 공국을 통치한 유일한 비류리크 왕조 출신이 아닌 인물이었다. 그가 제거된 후, 1214년에 헝가리와 폴란드 사이에 갈리치아 영토를 분할하는 타협안이 체결되었다.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왕위는 레셰크 1세의 딸 살로메아와 결혼한 헝가리의 언드라시의 아들인 로도메리아의 콜로만에게 주어졌다.
1221년,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는 헝가리와 폴란드로부터 갈리치아-볼히니아를 해방시켰다. 므스티슬라프의 1221–1228년 재위 기간 동안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군대는 칼카 강 전투 (1223)에 몽골군에 맞서 참전했지만, 1228년 보야르들은 그를 몰아내고 갈리치아 공국을 헝가리 왕에게 넘겼다.
다니엘 갈리츠키는 1238년에 갈리치아를 정복하고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재통합하여 25년 동안 통치했다. 1238년 3월, 그는 도브르진 기사단의 도르호친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격파했다. 다니엘은 1239년에 키예프를 점령했고,[10] 몽골군이 1240년 말에 도시를 포위하고 정복한 후 약탈하기 직전이었다. 1245년 8월 17일, 다니엘과 그의 형제 바실코는 야로슬라프 전투 (야로슬라프)에서 폴란드군과 헝가리군을 격파하여 갈리치아-볼히니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2. 4. 다니엘 로마노비치 시대 (1245–1264)
다니엘은 바투 칸의 수도인 사라이를 방문하여 몽골 골든 호드의 지배권을 명목상 인정하고 관계를 강화했다.[11] 1246년 바투 칸과의 만남 이후, 다니엘은 군대를 몽골식으로 재편하고 몽골 무기로 무장시켰지만, 자신은 루스 공국의 전통적인 복장을 유지했다. 그는 몽골에 대한 장기적인 저항 전략을 추구하며 헝가리,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갱신하여 반몽골 연합을 계획했다. 비록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1253년에 교황 사절에 의해 다니엘이 왕으로 즉위하는 계기가 되었다.[12]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다니엘의 왕 즉위를 허락했다. 다니엘은 류리크 왕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었다.[11] 그는 1253년 도로호친에서 교황 사절에 의해 루테니아의 초대 왕으로 즉위했다. 1256년, 다니엘은 몽골을 볼히니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년 후에는 루츠크와 볼로디미르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격퇴했다. 그러나 1260년 몽골 장군 보롤다이의 대군에 굴복하고 요새를 파괴해야 했다.[12]
다니엘의 통치하에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은 동유럽 중부의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황금기'로 묘사되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가 제작될 정도로 문학이 번성했다. 인구 증가와 상업 발전이 이루어졌고, 리비우, 볼로디미르, 홀름 등 주요 도시들이 경제 및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2. 5. 레프 1세 시대 (1264–1301)

다니일이 1264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레오가 뒤를 이었다. 레오는 1272년에 수도를 헬름에서 리비우로 옮겼고, 한동안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의 강세를 유지했다. 서방 정책을 추구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레오는 몽골과 긴밀히 협력했으며, 특히 타타르 칸 노가이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다. 그는 몽골 동맹국과 함께 폴란드를 침략했다. 비록 그의 군대가 라치부르츠까지 서쪽 영토를 약탈하고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갈리치아로 보냈지만, 레오는 궁극적으로 폴란드로부터 많은 영토를 얻지 못했다. 레오는 또한 리투아니아에 자신의 가문의 지배를 확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267년 그의 형제 슈바른이 리투아니아 왕위에 오른 직후, 그는 이전 리투아니아 통치자 바이슈빌카스를 살해했다. 슈바른이 1269년에 왕위를 잃은 후, 레오는 리투아니아와 갈등을 벌였다. 1274년부터 1276년까지 그는 새로운 리투아니아 통치자 트라이데니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했고, 리투아니아는 도시 나바흐루다크를 포함한 흑 루테니아 영토를 병합했다. 1279년, 레오는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폴란드를 침략했지만, 1280년에 크라쿠프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해 레오는 헝가리를 격파하고 트란스카르파티아의 일부, 특히 도시 무카체보를 병합했다. 1292년, 그는 분열된 폴란드를 격파하고 루블린과 주변 지역을 자신의 왕국 영토에 추가했다.
레프는 1287년 노가이의 세 번째 폴란드 침공에서 헝가리 왕국의 자카르파티아 지방을 빼앗고 폴란드 왕국의 루블린 주를 점령하는 등 몽골의 힘을 빌려 자신의 영토를 늘린 후, 체코,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과 동맹을 맺어 반몽골 정책을 분명히 했다.[3]
2. 6. 쇠퇴 (1301–1340)
레오 1세의 죽음(1301년)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레오 1세의 아들 유리 1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의 통치는 7년(1301~1308)으로 비교적 짧았다. 유리 1세의 통치 시기 동안 갈리치아-볼히니아는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 1302년 폴란드에 루블린을 빼앗겼다.[3]
1308년부터 1323년까지는 유리 1세의 아들인 갈리치아의 안드레이와 레오 2세가 갈리치아-볼히니아를 공동 통치했다. 이들 형제는 스스로를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왕이라고 칭하며, 리투아니아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폴란드 국왕 블라디슬라프 1세 및 독일 기사단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왕국은 여전히 몽골에 조공을 바쳤으며, 우즈베크 칸과 그의 후계자 자니베크 칸의 몽골 군사 원정에 참여해야 했다.[3] 1323년, 안드레이와 레오 2세 형제는 몽골과의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1323년 갈리치아-볼히니아의 루리크 왕조가 단절되자,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 공작 류바르타스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갈리치아는 보야르들이 장악했다. 보야르들은 유리 1세의 손자인 폴란드 공작 유리 2세 볼레슬라프를 초청하여 갈리치아 왕위를 맡겼다. 볼레슬라프는 정교회로 개종하고 유리 2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외국인 식민지화 장려는 보야르들과의 갈등을 야기했고, 결국 1340년 보야르들은 그를 독살했다. 같은 해 폴란드 카지미에시 3세가 리비우를 공격하는 동안 류바르타스에게 왕위를 제안했다.[13]
2. 7. 종말과 유산 (1341–1392)
1341년 겨울, 데트코가 이끄는 타타르족과 루테니아인, 류바르타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인들은 폴란드군을 격파했지만, 1341년 여름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데트코는 갈리치아의 스타로스트로서 폴란드의 종주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데트코가 죽은 후, 카지미르 3세는 성공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1349년에 갈리치아를 점령하고 병합했다.[1]다니엘 갈리츠키의 로마노비치 왕조(루리크 왕조의 분파)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와 더 넓은 유럽 강대국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결국 중앙집권화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의 부상하는 강대국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의 갈리치아-볼히니아 점령 이후인 1349년에야 갈리치아-볼히니아는 마침내 정복되어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이것으로 갈리치아-볼히니아의 골든 호드에 대한 종속 관계는 끝났다.[1]
1340년부터 1392년까지, 이 지역의 내전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헝가리 간의 권력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분쟁의 첫 번째 단계는 1344년에 폴란드 왕관에 페레미쉴 공국을 확보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나머지 영토는 리투아니아 게디미니드 왕조의 일원인 류바르타스에게 속하게 되었다. 결국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지역을 분할했다. 카지미르 3세 왕은 갈리치아와 서부 볼히니아를 차지했고, 동부 볼히니아 자매 국가와 키예프는 1352~66년에 리투아니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
1370년 위대한 카지미르가 죽은 후, 갈리치아-볼히니아는 1372~1379년과 1385~1387년에 블라디슬라우스 2세 오폴스키에 의해 루테니아 영주(''Terre Russie Domin'')로 통치되었으며, 벨츠 공국의 왕자들의 후손이자 헝가리 왕 루이 1세의 신하였다. 블라디슬라우스는 폴란드의 가톨릭화 정책의 일환으로 로마 가톨릭 르비우 대교구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1]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키예프 루스의 할리치 공국과 볼히니아 공국이라는 두 공국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13세기 중반, 이 대공국은 몽골의 침략을 받은 키예프 공국의 후계자가 되어 키예프 루스의 정치, 전통, 문화를 계승한 주요 국가가 되었다. 이 국가는 로마 교황을 비롯한 중세유럽의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반몽골 정책의 선두 역할을 했다.[1]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루스계 제후국 중 가장 큰 공국 중 하나였다. 그 영토는 현재의 서우크라이나, 서벨라루스, 동폴란드, 북동헝가리, 몰도바를 포함했지만,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은 볼로디미르, 할리치, 리비우 등 서우크라이나의 세 도시였다.[1]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중앙 유럽·동유럽에서 활발한 외교를 펼쳤다. 로마 교황 및 튜튼 기사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영토 확장을 노리던 이웃 국가인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몽골인의 조치 울루스와 공방전을 벌였다. 1245년 폴란드·헝가리 양국과 싸웠을 때(야로슬라프 전투), 대공국은 조치 울루스의 종주권을 받아들여 속국이 되었다.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53년에 이를 위기로 보고 대공에게 "왕으로 대관할 허가"를 부여하여 조치 울루스를 견제했다(이것을 통해 갈리치아-볼히니아를 왕국, 대공 다니일 로마노비치를 루스 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256년에 바투 칸이 사망하자 대공국은 조치 울루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싸웠다. 교황은 반몽골 십자군을 호소했지만, 폴란드 침공과 헝가리 침공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이에 응하는 국왕이나 대공 등이 없어 1259년 독립 시도는 실패했다. 애초에 폴란드와 헝가리는, 대공국이 몽골과 합종연횡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그들과 적대했기 때문에 이미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은 대공국의 지원에 전혀 소극적이었다. 1259년의 두 번째 몽골 침공에서는 볼레스와프 5세의 영지인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가 황폐해졌다. 레프 다니일로비치는 1287년 노가이의 세 번째 폴란드 침공에서 헝가리 왕국의 자카르파티아 지방을 빼앗고 폴란드 왕국의 루블린 주를 점령, 몽골인의 힘을 빌려 자신의 영토를 늘린 후 체코,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과 동맹을 맺어 반몽골 정책을 분명히 했다.[1]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에서는 군주의 힘이 약하고, 보야르라고 불린 귀족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국가는 항상 내란에 빠지기 쉬운 상태였다. 1340년 대공조가 끊어지자, 귀족이 일시적으로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이웃 국가의 압력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1]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의 제후 군대에 의해 침략당해 분할되었다(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 영토 귀속 문제는 반세기에 걸쳐 동유럽 정세의 불안 요인이었지만, 1392년 결국 할리치 공국은 폴란드 왕국령이 되었고, 볼히니아 공국은 리투아니아의 지배하에 놓였다.[1]
3. 지리
갈리치아-볼히니아는 지리적으로 서쪽으로는 현재 폴란드 남동부에 있는 산 강과 비에프시 강 사이에 걸쳐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오늘날 벨라루스에 있는 프리피야트 늪지와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있는 남부 부크 강 상류 지역을 포함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투라우-핀스크 공국, 키예프 공국, 골든 호드,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몰다비아 및 독일 기사단 수도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12세기 말, 할리치와 볼히니아 두 공국의 통합으로 건국된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의 영토는 산 강, 드니스트르 강 상류 및 부크 강의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1]
대공국의 본토는 동쪽의 투라우-핀스크 공국과 키예프 공국, 남쪽의 벨라드, 조치 울루스, 서쪽의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 북쪽의 독일 기사단, 리투아니아와 폴로츠크 공국과 접해 있었다.[1] 할리치-볼히니아에서는 프리피야트 강의 여러 지류가 동쪽 경계, 보지 강, 프루트 강, 세레트 강의 상류가 남쪽 경계, 카르파티아 산맥, 산 강과 베프시 강의 강변 지역이 서쪽 경계를 이루었다.[1] 북쪽 경계는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리투아니아 부족과의 전쟁 결과에 따라 변동했다.[1]
4. 행정 구조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은 할리치 공국과 볼히니아 공국이라는 두 개의 주요 공국으로 구성되었다. 이 두 공국은 여러 개의 "분할 공국"으로 나뉘었는데, 이 분할 공국들은 중앙 공국에 속했으며 대공의 자손이나 현지 공작이 통치했다.
볼히니아 공국은 공식적으로 수도인 볼로디미르의 이름을 따 볼로디미르 공국이라고 불렸다. 13세기 초까지 볼히니아 지방 전체를 지배했지만, 이후 대공 자손들의 상속 분배와 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 분할 공국으로 나뉘었다. 중앙 공국은 볼로디미르를 중심으로 유지되었지만, 동쪽에는 루츠크를 수도로 하는 루츠크 공국, 남쪽에는 벨즈를 수도로 하는 벨즈 공국, 서쪽에는 홀름을 수도로 하는 홀름 공국, 북쪽에는 브레스트를 수도로 하는 브레스트 공국이 존재했다. 각 분할 공국 내에는 더 작은 공국이나 영지가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할리치 지방도 볼히니아와 마찬가지로 여러 분할 공국으로 구성되었다. 중앙 공국은 할리치를 수도로 하는 할리치 공국이었고, 북쪽에는 즈베니호로드를 수도로 하는 즈베니고로 공국, 서쪽에는 페레미슐을 수도로 하는 페레미슐 공국, 동쪽에는 테레보블을 수도로 하는 테레보블 공국이 있었다. 드네스트르 강 중류 지역에는 자치권을 가진 영지가 존재했으며, 할리치 공국에 종속되었다. 13세기 중반까지 여러 분할 공국이 존재했지만, 이후 다니일 대공에 의해 통합되었다.
13세기 후반,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들은 중앙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머지 분할 공국들을 폐지하고 "주"를 설치했다. 14세기에는 "공국"이라는 명칭이 할리치와 볼히니아에서만 사용되었다.
두 공국의 경계선은 할리치 측의 도시인 야로슬라프, 리비우, 즈베니호로드, 테레보블과 볼히니아 측의 도시인 스테이시크, 벨즈, 크레메네츠 사이에 있었다.
4. 1. 일시적 분할
볼히니아 공국은 10세기 말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 브세볼로트가 볼로디미르의 공작으로 언급되면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4] 1050년대에 이호르 야로슬라비치가 잠시 볼로디미르의 공작으로 재위했다고 전해진다. 야로슬라프 스뱌토폴코비치()는 계승권을 이유로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통치에 반대했던 키예프 루스의 유일한 공작이었지만, 1118년에 블라디미르가 그를 몰아낸 후 그의 모노마호비치 후손들이 지역 왕조 분파를 세웠다.[4] 1170년에 로만 므스티슬라비치는 모노마흐의 증손자로서 볼히니아의 왕위를 물려받았다.[4]갈리치아 공국은 블라디미르코 볼로다로비치가 즈베니고로드 공국, 페레미실 공국, 테레보블랴 공국을 통합하여 1124~1144년에 형성되었다.[5] 1080년대 또는 1090년대부터 이 세 공국은 모두 트무타라칸의 로스티슬라프의 아들들이 통치했는데,[5] 그는 1054/1060년에서 1067년경에 볼히니아와 갈리치아의 공작이었을 수도 있다.[6]
볼히니아와 갈리치아는 모두 12세기에 상업적 이점으로 인해 놀라운 경제 발전을 경험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비잔틴-셀주크 전쟁 (1046–1243)으로 인해 소아시아의 육상 무역로가 심각하게 붕괴되어, 동쪽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던 많은 상인들이 방향을 바꾸고, 다른 상인들은 크리미아의 수다크 (수그다이아) 항구를 통해 아나톨리아를 우회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상업 중심지의 번성은 곧 키예프 루스 상인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비잔틴 상품(때로는 유대인 상인을 통해)의 일부를 볼히니아와 갈리치아의 도시를 통해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 독일로 우회시켰다.
북부 흑해 항구와 중앙 유럽 간의 상업의 환승 허브로서의 새로운 지위는 12세기 말에 갈리치아와 볼로디미르-인-볼히니아에 막대한 부와 증가하는 정치적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무역과 소금 채굴은 갈리치아의 보야르 계급을 강화하여 로스티슬라비치 공작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약화시킬 수 있었다.[5]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1198년 또는 1199년경에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합병되었다.[4] 이는 로스티슬라비치 가문의 갈리치아 분파가 멸망하고 볼히니아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를 차지하면서 왕조적 연합을 이루면서 발생했다.[4]
5. 역대 통치자
볼히니아 공국은 10세기 말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 브세볼로트가 볼로디미르의 공작으로 언급되면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4] 1050년대에 이호르 야로슬라비치가 잠시 볼로디미르의 공작으로 재위했다고 전해진다.[4] 야로슬라프 스뱌토폴코비치는 계승권을 이유로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통치에 반대했던 키예프 루스의 유일한 공작이었지만, 1118년에 축출되었다.[4] 이후 그의 모노마호비치 후손들이 지역 왕조 분파를 세웠다.[4] 로만 므스티슬라비치는 모노마흐의 증손자이며 1170년에 볼히니아의 왕위를 물려받았다.[4]
갈리치아 공국은 즈베니고로드 공국, 페레미실 공국, 테레보블랴 공국을 블라디미르코 볼로다로비치가 통합하여 1124~1144년에 형성되었다.[5] 1080년대 또는 1090년대부터 이 세 공국은 모두 트무타라칸의 로스티슬라프의 아들들이 통치했는데,[5] 그는 1054/1060년에서 1067년경에 볼히니아와 갈리치아의 공작이었을 수도 있다.[6]
1198년 또는 1199년경, 로스티슬라비치 가문의 갈리치아 분파가 멸망하고 볼히니아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를 차지하면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합병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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