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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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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시아스는 1148년경 안나 콤네네가 그리스어로 저술한 역사서로, 아버지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의 치세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책은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족 침공, 비잔틴 제국과 튀르크족의 관계, 제1차 십자군,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의 공격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룬다. 안나 콤네네는 십자군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아버지 알렉시우스 1세를 칭찬하는 등 개인적인 관점을 드러내어, 역사적 편향성 논란이 존재한다. 알렉시아스는 비잔틴 제국 연구에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으며, 젠더 관점에서의 분석 및 저자 논쟁 등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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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아스 - [서적]에 관한 문서

2. 구성

《알렉시아스》는 크게 5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주제는 여러 권에 걸쳐 서술되며, 비잔티움 제국과 주변 세력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1. 로베르 기스카르 휘하 노르만족의 비잔틴 제국 공격 (1–6권): 1권부터 6권까지는 노르만족의 침략과 이에 맞선 알렉시오스 1세의 활약을 다룬다.

2. 튀르크족과의 비잔틴 관계 (6–7, 9–10, 14–15권): 6권 일부와 7권, 9권, 10권, 14권, 15권은 셀주크 튀르크와의 전쟁과 외교 관계를 서술한다.

3. 비잔틴 북부 변경에 대한 페체네그족의 침략 (7–8권): 7권 일부와 8권에서는 페체네그족의 침입과 격퇴 과정을 다룬다.

4. 제1차 십자군과 그에 대한 비잔틴의 반응 (10–11권): 10권 일부와 11권에서는 제1차 십자군의 전개 과정과 비잔티움 제국의 대응을 설명한다.

5.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의 비잔틴 변경 공격 (11–13권): 11권 일부와 12권, 13권에서는 안티오키아 공국보에몽 1세가 일으킨 전쟁을 다룬다.

2. 1. 서문과 15권

이 책은 서문과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범위는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기간으로 제한되어 있어, 특히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 열강 간의 정치적 관계와 관련하여 세부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1]

:*'''1권'''은 알렉시오스가 장군이 되고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이 되는 과정을 다룬다. 또한 노르만족의 침략 준비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2권'''은 콤네노스 반란을 다룬다.

:*'''3권'''은 알렉시오스가 황제가 된 해(1081년), 두카스 가문의 내부 문제, 그리고 노르만족의 아드리아 해 횡단을 다룬다.

:*'''4권'''은 노르만족과의 전쟁 (1081–1082)을 다룬다.

:*'''5권''' 역시 노르만족과의 전쟁 (1082–1083)과 "이단자"와의 첫 번째 충돌을 다룬다.

:*'''6권'''은 노르만족과의 전쟁의 종식 (1085년)과 로베르 기스카르의 죽음을 다룬다.

  • '''2.''' 튀르크족과의 비잔틴 관계 (6–7, 9–10, 14–15권):


:*'''7권'''은 스키타이족과의 전쟁 (1087–1090)을 다룬다.

:*'''9권'''은 차카스와 달마티아인에 대한 작전 (1092–1094)과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의 음모 (1094)를 다룬다.

:*'''10권'''은 쿠만족과의 전쟁과 제1차 십자군의 시작 (1094–1097)을 다룬다.

:*'''14권'''은 튀르크족, 프랑크족, 쿠만족, 그리고 마니교도를 다룬다 (1108–1115).

:*'''15권'''은 마지막 원정 — 보고밀파 — 알렉시오스의 죽음 (1116–1118)을 다룬다.

  • '''3.''' 비잔틴 북부 변경에 대한 페체네그족의 침략 (7–8권)


:*'''8권'''은 스키타이 전쟁의 종식 (1091년)과 황제에 대한 음모를 다룬다.

:*'''11권'''은 또한 제1차 십자군 (1097–1104)을 다룬다.

:*'''12권'''은 국내 갈등과 노르만족의 두 번째 침략 준비 (1105–1107)를 다룬다.

:*'''13권'''은 아론의 음모와 두 번째 노르만 침략 (1107–1108)을 다룬다.

2. 2. 주요 내용별 권별 구분

『알렉시아스』는 서문과 1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기간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 국가들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각 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로베르 기스카르 휘하 노르만족의 비잔틴 제국 공격 (1–6권)'''

내용
1권알렉시오스가 장군이 되고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이 되는 과정, 노르만족의 침략 준비
2권콤네노스 반란
3권알렉시오스의 황제 즉위(1081년), 두카스 가문의 내부 문제, 노르만족의 아드리아 해 횡단
4권노르만족과의 전쟁 (1081–1082)
5권노르만족과의 전쟁 (1082–1083), "이단자"와의 첫 번째 충돌
6권노르만족과의 전쟁 종식 (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의 죽음



'''2. 튀르크족과의 비잔틴 관계 (6–7, 9–10, 14–15권)'''

내용
7권스키타이족과의 전쟁 (1087–1090)
9권차카스와 달마티아인에 대한 작전 (1092–1094),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의 음모 (1094)
10권쿠만족과의 전쟁, 제1차 십자군의 시작 (1094–1097)
14권튀르크족, 프랑크족, 쿠만족, 마니교도 (1108–1115)
15권마지막 원정 — 보고밀파 — 알렉시오스의 죽음 (1116–1118)



'''3. 비잔틴 북부 변경에 대한 페체네그족의 침략 (7–8권)'''

내용
8권스키타이 전쟁의 종식 (1091년), 황제에 대한 음모



'''4. 제1차 십자군과 그에 대한 비잔틴의 반응 (10–11권)'''

내용
11권제1차 십자군 (1097–1104)



'''5.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의 비잔틴 변경 공격 (11–13권)'''[1]

내용
12권국내 갈등, 노르만족의 두 번째 침략 준비 (1105–1107)
13권아론의 음모, 두 번째 노르만 침략 (1107–1108)


3. 주요 주제

《알렉시아스》는 제1차 십자군과 종교 분쟁,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통치와 업적, 비잔틴 제국의 대외 관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1][2] 안나 콤네네는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듯한 묘사를 사용하기도 했으며,[2] 십자군을 야만인으로 여기는 등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오르기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알렉시아스》가 1차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3. 1. 제1차 십자군과 종교적 갈등

제1차 십자군과 종교적 갈등은 ''알렉시아스''의 주요 주제이다.[1] 안나 콤네네는 십자군에 관련된 다양한 집단을 "켈트족", "라틴족", "노르만족"이라고 지칭했다.[1] 또한 그녀는 아버지인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의 1081년부터 1118년까지의 통치 기간 동안의 정복 활동을 매우 상세하게 이야기한다.[2] 그녀는 십자군에 대한 "비잔틴적 시각"을 제시한다.[2]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의 작품에서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발견했는데, 레노라 네빌은 "알렉시우스를 지략과 용기로 끊임없는 폭풍 속에서 제국을 이끄는 교활한 뱃사공으로 묘사하는 것은 오디세우스를 강하게 연상시킨다"고 언급했다.[2]

3. 2. 알렉시오스 1세의 통치와 업적

안나 콤네네의 저술 《알렉시아스》는 아버지인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통치 기간(1081년 ~ 1118년)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다. 안나는 아버지의 업적을 "잊혀서는 안 될" 일로 기록하겠다는 의도를 밝혔으며, 알렉시오스 1세를 "특별히 기독교적인 황제"이자 도덕적, 정치적으로 칭찬할 만한 인물로 강조한다.

《알렉시아스》에서 알렉시오스 1세는 지략과 용기로 끊임없는 폭풍 속에서 제국을 이끄는 교활한 뱃사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오디세우스를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랭코판은 알렉시오스에 대한 묘사가 성인전의 기법과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안나는 제1차 십자군에 대한 "비잔틴적 시각"을 제시하며, 십자군을 '켈트족', '라틴족', '노르만족' 등으로 부르며 무지한 야만인으로 여겼다. 그녀는 십자군이 약탈을 자행하고 약속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지만, 스스로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안나의 십자군에 대한 감정과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편견이 있다고 지적한다.

게오르기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아스》가 1차 사료로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3. 3. 비잔틴 제국의 대외 관계

알렉시오스 1세 시대의 비잔틴 제국은 서쪽의 노르만족, 동쪽의 튀르크족, 북쪽의 페체네그족 등 여러 민족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안나 콤네나가 저술한 《알렉시아스》는 이러한 대외 관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노르만족과의 관계: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알렉시아스》의 1권부터 6권까지는 노르만족의 침략 준비, 콤네노스 가문의 반란, 두카스 가문과의 갈등, 그리고 1081년부터 1085년까지 이어진 전쟁과 로베르 기스카르의 죽음을 다룬다. 11권에서 13권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가 이끄는 노르만족의 두 번째 침략 (1107-1108)과 그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대응을 다룬다.
튀르크족과의 관계:《알렉시아스》의 6-7권, 9-10권, 14-15권은 튀르크족과의 관계를 다룬다. 셀주크 튀르크는 비잔틴 제국의 동쪽 국경을 위협하는 주요 세력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튀르크족과 때로는 전쟁을, 때로는 외교적 협상을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
페체네그족과의 관계:페체네그족은 비잔틴 제국 북부 변경을 침략한 유목 민족이었다. 《알렉시아스》의 7-8권은 1087년부터 1091년까지 이어진 페체네그족과의 전쟁을 다룬다.
제1차 십자군과의 관계:제1차 십자군은 서유럽에서 성지 회복을 목표로 결성된 군사 원정이었다. 《알렉시아스》의 10-11권은 십자군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반응을 다룬다. 안나 콤네나는 십자군을 '켈트족', '라틴족', '노르만족' 등으로 부르며, 그들을 무지한 야만인으로 여기고 경멸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약탈을 일삼고 약속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는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4] 안나 콤네나는 십자군에 대한 "비잔틴 측 시점"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비잔틴 외교 정책의 특징:알렉시오스 1세 시대의 비잔틴 외교는 주변 세력과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제국의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때로는 군사력을 통해, 때로는 외교적 협상을 통해, 때로는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동방 문제에 대한 한국의 시각에서 볼 때, 비잔틴 제국의 외교 정책은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한국의 역사와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4. 서술 스타일

《알렉시아스》는 안나 콤네네가 당시의 일반적인 역사 기록 형식과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4] 그녀는 그 시대의 유일한 여성 그리스 역사가였으며, 역사가들은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이 여성이라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고 믿고 싶어한다.[4]

4. 1. 안나 콤네네의 개인적 관점

안나 콤네네는 《알렉시아스》에서 자신을 묘사하고 일부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솔직하게 인정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역사 기록 형식에 어긋나는 것이다.[2] 그녀는 그리스 산문 역사가들과 매우 달랐고, 이 때문에 이 책은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비판을 받았다.[3] 안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형식과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알렉시아스》는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4] 안나 콤네네는 그녀 시대의 유일한 여성 그리스 역사가이며, 역사가들은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이 여성이라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고 믿고 싶어한다.[4] 역사 기록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역사 기록과 매우 다른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안나 콤네네의 《알렉시아스》는 "직설적인" 역사로 여겨져 왔다.[4]

4. 2. 그리스 신화의 영향

역사학자 레노라 네빌은 알렉시우스 1세가 "끊임없는 폭풍 속에서 교활함과 용기로 제국의 키를 잡는 교활한 선장"으로 묘사된 것은 오디세우스를 강하게 연상시킨다고 지적했다.

4. 3. 역사 기록으로서의 가치와 한계

《알렉시아스》는 1148년경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며, 1651년 포시너스에 의해 처음 편집되었다.[1] 안나 콤네네는 이 텍스트에서 자신을 묘사하고 일부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솔직하게 인정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역사 기록 형식에 어긋나는 것이다.[2] 그녀는 그리스 산문 역사가들과 매우 달랐고, 이 때문에 이 책은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비판을 받았다.[3] 안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형식과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알렉시아스》는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4] 안나 콤네네는 그녀 시대의 유일한 여성 그리스 역사가이며, 역사가들은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이 여성이라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고 믿고 싶어한다.[5] 안나 콤네네의 《알렉시아스》는 그녀가 역사 기록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그녀의 스타일이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역사 기록과 매우 다르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직설적인" 역사로 여겨져 왔다.

5. 후대에 미친 영향

《알렉시아스》는 알렉시오스 1세에 대해 알 수 있는 주요 문헌 중 하나이다.[1] 안나 콤네나는 55세 때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1] 십자군을 "켈트인", "라틴인", "노르만인" 등으로 부르며 경멸했다.[1][2] 안나는 스스로 중립적인 시각에서 묘사했다고 평가했지만, 후세 역사가들은 십자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아버지에 대한 찬양으로 인해 편견이 있었다고 지적한다.[2]

5. 1. 알렉시오스 1세 연구의 주요 자료

Ἀλεξιάςel알렉시오스 1세의 생애와 업적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1차 자료이다.[1] 안나 콤네나는 이 책에서 십자군을 "켈트인", "라틴인", "노르만인" 등으로 부르며, 그들이 비잔티움 제국에 헌상하기로 약속했던 재정복지의 대부분을 인도하지 않고 곳곳에서 약탈을 저질렀다고 경멸했다.[1][2] 안나 자신은 십자군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묘사했다고 평가했지만, 후세 역사가들은 십자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를 높이 찬양하려 했던 점이 편견을 낳았다고 지적한다.[2]

5. 2. 비잔틴 역사 연구에 대한 공헌

안나 콤네나의 저작은 그녀의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에 대해 알 수 있는 주요 문헌이 되었다[1] . 《알렉시아스》의 기술에 따르면, 그녀가 집필을 시작한 것은 55세 때였다[1] . 알렉시오스 1세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왔던 십자군에 대해, 안나는 "켈트인", "라틴인", "노르만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그들이 비잔틴 황제에게 헌상하기로 약속했던 재정복지의 대부분을 인도하지 않고, 곳곳에서 약탈을 저질렀다며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2] . 다만 안나 자신은 십자군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묘사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십자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를 높이 찬양하려 했던 점이 편견을 낳았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3] .

6. 분석

《알렉시아스》의 저자가 안나 콤네네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텍스트에서 저자의 성별이나 배경을 알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2][4] 특히 군사 관련 내용은 안나의 남편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안나 콤네네가 저자라는 데 동의한다. 군사 이야기가 많은 것은 역사 서술 방식을 선택한 안나의 의도와 콤네노스 가문의 문화적 영향 때문이라고 본다. 텍스트에서 자신의 약혼, 결혼 생활, 여성으로서의 정숙함 등을 언급한 점은 안나가 저자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안나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를 따라 군사 작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군사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료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안나 콤네네는 《알렉시아스》에서 사실을 기록했다고 주장했지만, 내용에 편향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를 지나치게 칭찬하고, 라틴인(노르만족, 프랑크족)이나 투르크인, 아르메니아인을 야만인처럼 묘사한 것이 그 예시이다.[4] 또한 동생 요한 2세 콤네노스가 자신을 제치고 황제가 된 것을 비난하기도 한다.[4]

현대 독자들은 《알렉시아스》에서 제국의 불행이 과장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호메로스 같은 문학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역사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알렉시아스》를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한다.[5]

안나 콤네네는 《알렉시아스》에서 여성에 대해 "눈물이 많고 겁이 많다"는 식으로 전형적인 고정관념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성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3] 자신의 눈물을 언급하며 역사 기록을 위해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여성적인 면을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3] 안나는 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남녀 모두 지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안나 콤네네는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역사 기록과는 다른 점이었다.[1] 이러한 방식은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 안나의 독특한 서술 방식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스승인 미카엘 프셀로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6. 1. 저자 논쟁

《알렉시아스》의 저자가 실제로 안나 콤네네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어떤 학자는 텍스트에서 저자의 성별이나 배경에 대한 언급이, 명시적인 몇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2]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알렉시아스》가 여성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4] 하워드-존스턴은 《알렉시아스》의 군사적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안나가 남편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현장 노트를 바탕으로 작업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이 책을 "니케포로스의 '알렉시아드'"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안나 콤네네가 저자라는 것에 동의한다. 군사적 문제의 비중이 높은 것은 안나가 서사 장르로 역사를 쓰기로 선택한 것과 일치하며, 이는 그녀 가족의 문화적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된다. 텍스트에서 그녀의 약혼, 아내로서의 역할, 그리고 그녀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여성적 정숙성에 대한 언급은 안나가 《알렉시아스》를 저술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든다고 여겨진다. 안나는 황제인 아버지와 함께 군사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 문제에 대해 충분히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료를 "작전에 황제를 동반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와 게오르기오스 팔레올로고스로 명시하여 "[그녀가 가장 중요한 자료에 대한 언급을 빼먹었다고] 상상할 필요가 없다." 많은 학자들은 아버지의 가정생활과 군사 스타일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그녀의 경험, 여성성에 대한 언급을 결합하여 그녀가 《알렉시아스》를 저술했다는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6. 2. 편향성 논란

안나 콤네네는 《알렉시아스》에서 진실을 기록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에 편향이 존재한다. 그녀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를 "분명한 기독교도 황제"로 강조하며,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뛰어났다고 칭찬한다.[4] 프랭코판은 알렉시오스 1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동생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나 조카 마누엘 1세 콤네노스를 다루는 방식과 대조적이라고 지적한다.[4]

안나 콤네나는 라틴인(노르만족이나 "프랑크족")을 야만인으로 묘사하고, 투르크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게도 비슷한 혐오감을 드러낸다.[4] 또한 《알렉시아스》에서는 알렉시오스 1세 사후 동생인 요한 2세 콤네노스가 자신을 제치고 제위를 계승한 것을 비난한다.[4]

현대 독자의 시각에서는 군사사 기술과 모순될 정도로 제국의 불행이 과장되고 전형적으로 강조되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 (호메로스 등 문학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역사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는 1차 사료로서 《알렉시아스》를 중요시한다.[5]

6. 3. 젠더 관점

안나 콤네네는 《알렉시아스》에서 성별과 성별 고정관념을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그녀는 여성을 "눈물을 흘리기 쉽고 위험 앞에서 겁이 많다"와 같은 전형적인 고정관념으로 묘사한다.[3] 그러나 《알렉시아스》에서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알렉시오스 1세의 장례식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이때의 슬픔은 적절한 문화적 반응으로 여겨졌다.[3] 또한, 여성 등장인물 중 누구도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는다.[3]

안나 콤네네는 특정 사건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눈물을 언급할 때, 자신의 성별을 비슷한 방식으로 언급하며, 역사적 의무로 돌아가기 위해 울음을 그칠 것이라고 독자에게 알린다. 그녀는 이러한 에피소드를 서술에서 두 번 반복하는데,[3] 이는 그녀가 자신의 문화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측면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3]

안나는 주로 지성에 관심을 가지며,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의 태도와, 그 시대 여성 작가의 비슷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일부는 《알렉시아스》가 비잔틴 제국 일반 여성들이 제1차 십자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판단하는 데 부적절한 자료라고 여기기도 한다.[3] 안나는 "지성"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며, 지성은 남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로 인해, 《알렉시아스》에서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젠더 롤에서 탈피할 여지를 주고 있다.

6. 3. 1. 젠더와 문체

안나 콤네네는 《알렉시아스》에서 자신을 묘사하고 일부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역사 기록 형식과는 다른 것이었다.[1] 그녀는 그리스 산문 역사가들과 매우 달랐고, 이 때문에 이 책은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비판을 받았다.[2] 《알렉시아스》는 안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형식과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많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1] 안나 콤네네는 그녀 시대의 유일한 여성 그리스 역사가였기에, 역사가들은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이 여성이라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고 믿고 싶어한다.[1]

안나 콤네네의 독특한 역사 서술 방식은 그녀의 성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동안 아버지의 행동과 그 사건들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포함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른 역사 텍스트에서 특정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과 논평은 긍정적, 부정적으로 모두 그녀의 성별과 관련지어 평가되었다.[3] 이러한 역사 해석은 "젠더화된 역사"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알렉시오스 1세의 역사이자 안나의 스타일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이며, 남성 저술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4] 로마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이러한 "젠더화된" 서술 방식이 "매 페이지마다 여성 저자의 허영심"을 드러낸다고 보았고,[5] 일부 학자들도 이에 동의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스타일이 안나의 스승인 미카엘 프셀로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안나가 프셀로스의 『연대기』를 자신의 역사 서술의 모델로 삼았고 그의 스타일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이는 그녀의 성별이 아니라 그녀의 영향이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을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안나 콤네네는 자신의 서술과 감정을 통합하는 강렬함에서 당시로서는 독특한 인물로 여겨지지만,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과 같은 모든 개인적인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스타일의 조합과 개인적이고 젠더화된 정보의 부족은 그녀가 현대 페미니즘 이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즉, 그녀는 자신의 서술에서 사회적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비록 그녀가 묘사한 여성들이 당시 대부분의 남성 작가들과는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을 유지했다. 그녀의 스타일은 지성과 고귀함이 성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으며, 안나는 자신의 역사가 어떠한 성 역할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7. 한국어 번역

The Alexiad영어, 에드가 로버트 애쉬튼 슈터 역, (해먼즈워스: 펭귄, 1969), 피터 프랑코판 개정 (런던: 펭귄, 2009)



2023년 도서출판 히스토리퀸에서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8. 필사본

《알렉시아스》의 필사본은 크게 완전한 작품 또는 요약본을 포함하는 경우와 일부만 수록된 경우로 나뉜다.

'''완전한 작품 또는 요약본 포함 필사본:'''


  • 코덱스 코이슬리니아누스 311, 퐁 코이슬랭 (파리)
  • 코덱스 플로렌티누스 70,2
  • 바티칸 코덱스 Graecus 1438
  • 바르베리니아누스 코덱스 235 & 236
  • 오토보니우스 코덱스 Graecus 131 & 137
  • 코덱스 아포그라품 그로노비
  • 바티칸 코덱스 Graecus 981 (서문 및 요약)
  • 모나첸시스 코덱스 Graecus 355 (서문 및 요약)
  • 파리시누스 코덱스 Graecus 400 (서문 및 요약)


'''일부만 수록된 필사본:'''

  • 코덱스 코이슬리니아누스 311, Fonds Coislin|퐁 코이슬랭영어 (파리)
  • 코덱스 플로렌티누스 70,2
  • 코덱스 바티카누스 그라에쿠스 1438
  • 코덱스 바르베리니아누스 235 & 236
  • 코덱스 오토보니아누스 그라에쿠스 131 & 137
  • 코덱스 아포그래품 그로노비
  • 코덱스 바티카누스 그라에쿠스 981 (서문 및 요약)
  • 코덱스 모나첸시스 그라에쿠스 355 (서문 및 요약)
  • 코덱스 파리지누스 그라에쿠스 400 (서문 및 요약)

9. 주요 간행본

언어번역자출판사출판 연도ISBN
독일어디터 라인쉬 (de), 아타나시오스 캄빌리스 (de) (편집)데 그루이터2001
영어엘리자베스 도스루트리지, 케건 폴, 트렌치, 튜브너 & Co.1928
영어에드가 로버트 애쉬튼 슈터, 피터 프랑코판(개정)펭귄 클래식1969, 2009,
프랑스어베르나르 립 (편집 및 번역)레 벨 레트르1937–1945
러시아어야코프 류바르스키나우카1965
폴란드어옥타비우스 주레비츠 (pl)오솔리네움1969–1972
체코어루제나 도스탈로바오데온1996
튀르키예어빌게 우마르잉킬라프1996
독일어디터 라인쉬두몽1996
이탈리아어자친토 아넬로팔라초 코미티니 에디치오니2010ISBN 978-88-967621-0-3
일본어아이노 요조유쇼칸2019ISBN 978-4-86582-040-9


참조

[1] 서적 알렉시아드 1991
[2] 서적 1996
[3] 서적 Alexiad
[4] 서적 1996
[5] 간행물 Anna Komnene and Her Sources for Military Affairs in the Alexiad https://www.publicac[...]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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