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르셀로나 가문은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아라곤 연합 왕국과 그 속령을 통치한 가문이다. 수니프레드 1세를 시조로 하며, 바르셀로나 백작, 아라곤 국왕, 발렌시아 국왕, 마요르카 국왕, 프로방스 백작, 시칠리아 국왕 등을 배출했다. 1410년 마르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직계가 단절되었고, 카스페 타협을 통해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아라곤 왕위를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바르셀로나가 - 바르셀로나 백작
바르셀로나 백작은 카탈루냐 지역을 다스린 역사적 작위로,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하여 세습 작위로 독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아라곤과의 결혼을 통해 아라곤 연합왕국 형성에 기여했으며, 현재는 스페인 국왕이 계승하는 작위이다. - 바르셀로나가 - 아라곤의 알폰소 2세
아라곤의 알폰소 2세는 1164년부터 1196년까지 아라곤 왕국의 왕이자 바르셀로나 백작, 프로방스 백작이었으며, 왕권 강화, 영토 확장, 예술 후원에 기여했다. - 프랑크인 -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9세기 아일랜드 출신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샤를 2세의 초청으로 궁정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아 스콜라 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자연 분할론》 저술 및 위(僞) 디오니시오스 저작 번역을 통해 서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 프랑크인 - 프랑키스카
프랑키스카는 프랑크족이 사용한 던지기 도끼로, 날카로운 날과 아치형 머리를 특징으로 하며, 백병전 전에 던져져 적의 방패를 부수고 전열을 붕괴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 바르셀로나 백작 - 마르틴 (아라곤)
마르틴 1세는 1396년부터 1410년까지 아라곤 왕국을 통치하며 왕실 권력 강화, 귀족 갈등 억제, 산적 소탕에 힘썼고 아비뇽 교황을 지지했으며 사르데냐 지배력을 강화했으나,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카스페 타협으로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었다. - 바르셀로나 백작 - 페란도 2세
페란도 2세는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레콩키스타 완수와 스페인 통일,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탐험 후원 등 스페인 발전에 기여했으나, 종교적 강제 개종 정책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바르셀로나가 | |
---|---|
개요 | |
![]() | |
유형 | 왕가 |
국가 | 서프랑크 신성 로마 제국 부르고뉴-아를 왕국 바르셀로나 백국 카탈루냐 공국 아라곤 왕국 아라곤 연합왕국 시칠리아 왕국 마요르카 왕국 발렌시아 왕국 |
모가 | 벨로니드 가문 |
창시자 | 털복숭이 기욤 |
마지막 통치자 | 아라곤의 마르티노 1세 |
해산 | 1433년 (남성), 1445년 (여성) |
폐위 | 1410년 |
작위 | |
주요 작위 | 아라곤 왕 발렌시아 왕 마요르카 왕 시칠리아 왕 사르데냐-코르시카 왕 아테네 공작 네오파트리아 공작 우르젤 백작 바르셀로나 백작 지로나 백작 아우소나 백작 베살루 백작 프로방스 백작 포르칼키에 백작 세르다냐 백작 몽펠리에 영주 |
언어별 명칭 | |
카탈루냐어 | Casal de Barcelona |
이탈리아어 | Casa di Barcellona |
스페인어 | Casa de Barcelona |
카탈루냐어 (아라곤) | Casal d'Aragó |
이탈리아어 (아라곤) | Casa d'Aragona |
아라곤어 | Casa d'Aragón |
2. 바르셀로나 가문의 기원과 발전
바르셀로나 가문은 9세기 말 기프레 1세 다모백 이후 바르셀로나 백작 지위를 세습하며 카탈루냐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아라곤 왕국과의 동군 연합을 통해 아라곤 연합 왕국을 형성하였고, 발레아레스 제도, 발렌시아, 시칠리아, 프로방스 등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15세기 초 마르틴 1세를 마지막으로 직계 남성 후계자가 단절되었고, 카스페 타협을 통해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2. 1.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확장
바르셀로나가의 전신은 9세기 말 기프레 1세 다모백 (? - 897년) 이후 바르셀로나 백작을 세습한 수니프레가이다. 바르셀로나 백작은 점차 주변의 백작령들을 병합하여 카탈루냐 군주국을 형성했으며,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아라곤 왕가와의 관계는 히메네스 가문 출신의 아라곤 왕 라미로 2세 (1075년경 - 1154년)로부터 시작된다. 라미로 2세는 자신의 어린 외동딸 페트로닐라 여왕 (1135년 - 1174년)의 남편으로 기프레 1세의 후손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바랑게 4세 (1113년경 - 1162년)를 선택하고 아라곤의 통치를 맡겼다. 라몬 바랑게 4세 본인은 아라곤 왕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와 페트로닐라 여왕 사이의 장남인 알폰소 2세 (1157년 - 1196년)부터는 아라곤 왕과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아라곤-카탈루냐 연합 왕국, 즉 아라곤 연합 왕국으로 불리는 동군 연합 국가가 성립되었다. 한편, 라몬 바랑게 4세의 동생인 바랑게 라몬 (1115년 - 1144년) 가계는 프로방스 백작 지위를 세습했으나 남성 후계자가 끊기자, 알폰소 2세가 프로방스를 획득하여 처음에는 자신의 동생에게, 이후에는 차남 알폰소(알퐁스 2세, 1174년 - 1209년)에게 넘겨주었다.
알폰소 2세의 손자이자 '정복왕'으로 알려진 하이메 1세 (1208년 - 1276년)는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몽펠리에를 상속받았으며, 발레아레스 제도와 발렌시아를 정복하여 영토를 더욱 넓혔다. 하이메 1세는 사후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는 아들 페드로 3세 (1239년 - 1285년)에게, 마요르카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및 북부 카탈루냐)과 몽펠리에는 페드로 3세의 동생인 하이메(자우메 2세, 1243년 - 1311년)에게 분할 상속했다. 마요르카 왕국은 이후 4대에 걸쳐 아라곤 왕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유지되었으나, 알폰소 4세 (1299년 - 1336년) 시대에 다시 아라곤 왕국에 병합되었다.
페드로 3세는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촉발된 시칠리아 왕국의 내란에 개입(시칠리아 만종 전쟁)했다. 그는 당시 시칠리아 왕이었던 카를로 1세(앙주 가문 출신으로, 알폰소 2세의 손녀 베아트리스와 결혼하여 1246년 프로방스 백작 지위를 계승했었다)의 군대를 격파하고 시칠리아 섬을 차지하여 1282년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카를로 1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 지역만을 유지하게 되었고, 이 지역은 이후 나폴리 왕국으로 불리게 된다. 페드로 3세 사후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나뉘었다. 최종적으로 차남 하이메 2세 (1267년 - 1327년)의 가계가 아라곤 왕위를, 삼남 페데리코 2세 (1272년 - 1337년)의 가계가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시칠리아 왕가는 페데리코 3세 (1342년 - 1377년)를 마지막으로 남성 직계 후손이 끊겼다. 그의 딸인 마리아 여왕 (1362년경 - 1402년)은 아라곤 왕자 마르틴 (1374년경 - 1409년)과 결혼했고, 마르틴은 마르티노 1세로서 시칠리아를 통치했으며 아내 사후에도 통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마르티노 1세 역시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시칠리아는 그의 아버지인 아라곤 왕 마르틴 1세 (1356년 - 1410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르틴 1세마저 아들을 대신할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곧 사망하면서 바르셀로나 가문의 직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약 2년간의 왕위 공백기 이후, 카스페 타협을 통해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의 왕자였던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페르난도 1세 (1380년 - 1416년)가 1412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새로운 군주로 추대되었다.
2. 2. 아라곤 왕국과의 통합
히메네스 가문 출신의 아라곤 왕 라미로 2세(1075년경 ~ 1154년)에게는 외동딸 페트로닐라 여왕(1135년 ~ 1174년)만이 있었다. 라미로 2세는 페트로닐라 여왕의 남편으로 기프레 1세 다모백의 후손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바랑게 4세(1113년경 ~ 1162년)를 선택하고, 그에게 아라곤의 통치를 맡겼다. 이것이 바르셀로나 가문이 아라곤 왕위를 계승하게 된 시작이다.라몬 바랑게 4세 자신은 아라곤 왕을 칭하지 않았으나, 페트로닐라 여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알폰소 2세(1157년 ~ 1196년)부터는 아라곤 왕과 바르셀로나 백작의 칭호를 함께 사용했다. 이로써 아라곤과 카탈루냐는 한 명의 군주 아래 통합되어, 아라곤 연합 왕국이라고도 불리는 동군 연합 국가가 성립되었다.
3. 지중해 제국으로의 성장
바르셀로나가의 전신은 9세기 말 기프레 1세 다모백 이후 바르셀로나 백작을 세습한 가문이다. 바르셀로나 백작은 점차 주변 백작령을 통합하며 카탈루냐 군주국의 기반을 다졌고,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12세기 중반,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바랑게 4세가 아라곤의 페트로닐라 여왕과 결혼하면서 두 왕가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그의 아들 알폰소 2세부터 아라곤 왕과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함께 사용하며, 아라곤 연합 왕국이 성립되었다.
13세기 '정복왕' 하이메 1세 시대에 아라곤 연합 왕국은 크게 확장되었다. 그는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발레아레스 제도와 발렌시아를 정복하여 이베리아 반도 동부 해안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하이메 1세의 아들 페드로 3세는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왕국 내정에 개입하여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고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시칠리아 만종 전쟁). 이는 아라곤 연합 왕국이 지중해의 주요 해상 세력으로 부상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바르셀로나가가 이끈 아라곤 연합 왕국은 카탈루냐와 아라곤을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 동부와 프랑스 남부 일부, 그리고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등 지중해 주요 거점을 확보한 강력한 해상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3. 1. 분가들의 형성
히메네스 가문 출신의 아라곤 왕 라미로 2세는 그의 유일한 자녀인 어린 딸 페트로닐라 여왕의 남편으로 기프레 1세 다모백의 후손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바랑게 4세를 선택했다. 라몬 바랑게 4세는 아라곤의 통치를 맡았지만 스스로 아라곤 왕을 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장남인 알폰소 2세부터는 아라곤 왕과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써 아라곤 연합 왕국이라 불리는 동군 연합 국가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아라곤 왕가로서 바르셀로나가의 시작이다.한편, 라몬 바랑게 4세의 동생인 바랑게 라몬의 가계는 프로방스 백작 지위를 세습했다. 하지만 이 가문의 남계 후손이 끊기자, 알폰소 2세가 프로방스를 획득하여 처음에는 자신의 동생에게, 나중에는 차남인 알퐁스 2세에게 물려주었다.
알폰소 2세의 손자이자 '정복왕'으로 알려진 하이메 1세는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몽펠리에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발레아레스 제도와 발렌시아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하이메 1세는 자신이 정복하고 상속받은 영토를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는 장남 페드로 3세에게, 마요르카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와 북부 카탈루냐)과 몽펠리에는 차남 자우메 2세에게 분배했다. 이로써 마요르카 왕국이라는 분가가 형성되었고, 4대에 걸쳐 아라곤 왕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유지되다가 알폰소 4세 시대에 다시 아라곤 왕국에 병합되었다.
페드로 3세는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촉발된 시칠리아 왕국의 내란에 개입하여(시칠리아 만종 전쟁), 당시 시칠리아 왕이었던 카를로 1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시칠리아 섬 지역을 장악했다. 이로써 페드로 3세는 1282년에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기존의 시칠리아 왕 카를로 1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 영토만을 유지하게 되었고, 이 지역은 이후 나폴리 왕국으로 불리게 된다. 페드로 3세 사후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나뉘었다. 최종적으로 차남 하이메 2세의 가계가 아라곤 왕위를 계승했고, 삼남 페데리코 2세의 가계가 시칠리아 왕위를 이어받아 또 다른 분가를 형성했다.
시칠리아 왕가는 페데리코 3세를 마지막으로 남성 직계 후손이 끊겼다. 그의 딸인 마리아 여왕은 아라곤 왕자 마르틴과 결혼했고, 마르틴은 마르티노 1세로서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마르티노 1세는 아내 마리아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 시칠리아를 다스렸으나,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이에 시칠리아는 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왕인 마르틴 1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르틴 1세 역시 아들 마르티노 1세를 대신할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바르셀로나가의 직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바르셀로나가가 단절된 후 약 2년간의 왕위 공백기를 거쳐, 카스페 타협을 통해 새로운 통치자가 결정되었다.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의 왕자였던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신의 페르난도 1세가 1412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새로운 군주로 즉위했다.
4. 바르셀로나 가문의 쇠퇴와 단절
시칠리아 왕가는 페데리코 3세를 마지막으로 남성 직계 후계자가 단절되었다. 그의 사위이자 후계자였던 마르티노 1세마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시칠리아 왕위는 그의 아버지인 아라곤 왕 마르틴 1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마르틴 1세 역시 1410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바르셀로나 가문의 직계는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이후 2년간의 왕위 공백기를 거쳐 카스페 타협이 이루어졌고,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페르난도 1세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어 바르셀로나 가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4. 1. 왕위 계승 분쟁
페드로 3세는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시칠리아 왕국의 내란에 개입하였다 (시칠리아 만종 전쟁). 그는 당시 시칠리아 왕 카를로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시칠리아 섬 지역을 확보하여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기존의 시칠리아 왕국은 나폴리 왕국(이탈리아 반도 남부)과 시칠리아 섬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페드로 3세 사후,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차남 하이메 2세의 가계가 아라곤 왕위를 계승했고, 삼남 페데리코 2세의 가계가 시칠리아 왕위를 이어받았다.
시칠리아 왕가는 페데리코 3세를 마지막으로 남성 직계 후계자가 끊겼다. 그의 딸인 마리아 여왕은 아라곤 왕자 마르틴(마르티노 1세)과 결혼했고, 마르티노 1세는 아내 사후에도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마르티노 1세 역시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시칠리아는 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왕인 마르틴 1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틴 1세마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바르셀로나 가문의 직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후 2년간의 왕위 공백기를 거쳐 카스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 왕자였던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페르난도 1세가 1412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새로운 군주로 추대되었다.
4. 2. 카스페 타협과 트라스타마라 가문으로의 왕위 계승
시칠리아 왕가는 페데리코 3세(1342년 ~ 1377년)를 마지막으로 남계 남자가 끊겼다. 그의 딸 마리아 여왕(1362년경 ~ 1402년)과 결혼한 아라곤 왕자 마르틴(1374년경 ~ 1409년)이 마르티노 1세로서, 아내의 사후에도 시칠리아를 다스렸다. 마르티노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시칠리아는 그의 아버지 아라곤 왕 마르틴 1세(1356년 ~ 1410년)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마르틴 1세 자신도 곧 마르티노 1세를 대신할 후사 없이 사망하여 바르셀로나가는 단절되었다.2년간의 공위 기간 후, 카스페 타협에 의해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 왕자였던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페르난도 1세(1380년 ~ 1416년)가 1412년에 이러한 제국의 군주가 되었다. 이로써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위는 트라스타마라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5. 바르셀로나 가문의 작위와 유지 기간
''이 목록에는 10세기에 가문과 함께 남아 있지 않은 초기 벨로니데스 가문이 쓴 작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우르헬 백작 (870–992)
- 바르셀로나 백작 (878–1410)
- 지로나 백작 (878–1410)
- 아우소나 백작 (1111–1410)
- 베잘루 백작 (1111–1410) - 방계로부터 상속
- 프로방스 백작 (1112–1245)[1]
- 베르가 백작 (1118–1410)
- 세르다냐 백작 (1118–1410) - 방계로부터 상속
- 콘플렌 백작 (1118–1410)
- 아라곤 대공 (1137–1162)
- 아라곤 왕 (1162–1410)
- 로셀료 백작 (1172–1410)
- 팔랴르스 주사 백작 (1192–1410)
- 몽펠리에 영주 (1204–1249)
- 발렌시아 왕 (1238–1410)
- 마요르카 왕 (1276–1410)
- 시칠리아 왕 (1282–1410)
- 사르데냐-코르시카 왕 (1297–1410)
- 아테네 공작 (1312–1388)
- 우르헬 백작 (1314–1413)
- 네오파트리아 공작 (1319–1390)
6. 가계도
바르셀로나 가문은 9세기 말 기프레 1세 '다모백' 이후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세습하며 시작되었다. 바르셀로나 백작들은 점차 주변 백작령을 통합하여 카탈루냐 군주국의 기반을 마련하고 랑그도크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가문의 중요한 전환점은 12세기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아라곤 왕위 계승자 페트로닐라 여왕과 결혼하면서 찾아왔다. 그들의 아들 알폰소 2세부터는 아라곤 왕과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함께 사용하여 아라곤 연합 왕국이라는 동군 연합 국가가 성립되었다. 또한, 혼인과 상속을 통해 프로방스 백작 작위도 획득하여 가문의 방계가 이어지기도 했다.
'정복왕' 하이메 1세 시대에 가문은 발레아레스 제도와 발렌시아를 정복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하이메 1세는 사후 영토를 분할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는 장남 페드로 3세에게, 마요르카 왕국 등은 차남 하이메 2세에게 물려주면서 마요르카 왕국 분가가 형성되었다.
페드로 3세는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이후 그의 아들 대에서 아라곤 본가와 시칠리아 분가로 나뉘어 계보가 이어졌다. 시칠리아 분가는 14세기 말 남계 후손이 단절되었다.
15세기 초,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던 아라곤 왕자 마르틴 1세와 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왕인 마르틴마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바르셀로나 가문의 본가 및 주요 분가의 남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1412년 카스페 타협을 통해 마르틴 왕의 조카이자 카스티야의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인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새로운 군주로 선출되어 왕위를 계승했다.
6. 1. 바르셀로나 백작, 우르헬 백작 계보
''이 목록에는 10세기에 가문과 함께 남아 있지 않은 초기 벨로니데스 가문이 쓴 작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작위 | 보유 기간 | 비고 |
---|---|---|
우르헬 백작 | 870년–992년 | 초기 벨로니데스 가문 포함 여부 불명확하나, 바르셀로나 가문 분가. |
바르셀로나 백작 | 878년–1410년 | 바르셀로나 가문의 핵심 작위. |
지로나 백작 | 878년–1410년 | |
아우조나 백작 | 1111–1410년 | |
베잘루 백작 | 1111년–1410년 | 방계로부터 상속. |
프로방스 백작 | 1112년–1245년 | 혼인 및 상속으로 획득, 이후 분가. |
베르가 백작 | 1118년–1410년 | |
세르다냐 백작 | 1118년–1410년 | 방계로부터 상속. |
콘플렌 백작 | 1118년–1410년 | |
아라곤 대공 | 1137년–1162년 | 라몬 베렝게르 4세 시기. |
아라곤의 군주 | 1162년–1410년 | 알폰소 2세 이후 바르셀로나 백작과 동군연합. |
로셀료 백작 | 1172년–1410년 | |
팔랴르스 주사의 백작 | 1192년–1410년 | |
몽펠리에의 영주 | 1204년–1249년 | 혼인으로 상속. |
발렌시아의 군주 | 1238년–1410년 | 하이메 1세 정복. |
마요르카의 군주 | 1276년–1410년 | 하이메 1세 정복 후 분할, 이후 재병합. |
시칠리아의 군주 | 1282년–1410년 | 페드로 3세 획득 후 분가, 이후 재병합. |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의 군주 | 1297년–1410년 | |
아테네 공작 | 1312년–1388년 | 시칠리아 분가에서 획득. |
우르헬 백작 | 1314년–1413년 | 아라곤 왕가 방계가 다시 획득. |
네오파트리아 공작 | 1319년–1390년 | 시칠리아 분가에서 획득. |
바르셀로나 가문의 시조는 9세기 말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수니프레드 1세의 아들 기프레 1세 '다모백' (? - 897년)으로 여겨진다. 기프레 1세 이후 바르셀로나 백작들은 점차 주변의 백작령들을 통합하며 카탈루냐 군주국의 기반을 다졌고,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기프레 1세의 아들들 대에서 가문은 분화되었는데, 장남 빌프레드 2세 보렐 1세는 바르셀로나 백작위를 계승했고, 다른 아들 수니프레드 2세는 우르헬 백작이 되어 우르헬 백작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백작위는 빌프레드 2세 이후 동생 수니에르, 그의 아들 보렐 2세와 미로 형제, 보렐 2세의 아들 라몬 보렐, 손자 베렝게르 라몬 1세, 증손자 라몬 베렝게르 1세 등으로 이어졌다. 우르헬 백작 가문은 수니프레드 2세 이후 에르멩골 1세, 에르멩골 2세 등으로 이어지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라몬 베렝게르 3세 (1082년경 - 1131년)는 혼인을 통해 프로방스 백작 작위를 획득했다. 그의 아들 라몬 베렝게르 4세 (1113년경 - 1162년)는 아라곤 왕 라미로 2세의 딸이자 후계자인 페트로닐라 여왕 (1135년 - 1174년)과 결혼하여 아라곤의 통치권을 행사했다. 라몬 베렝게르 4세 자신은 아라곤 왕을 칭하지 않았으나, 그의 장남 알폰소 2세 (1157년 - 1196년)부터는 아라곤 왕과 바르셀로나 백작 작위를 함께 사용하며 아라곤 연합 왕국이라는 동군 연합 국가를 형성했다. 한편, 라몬 베렝게르 4세의 동생 베렝게르 라몬의 가계가 프로방스 백작위를 세습했으나 남계 후손이 끊기자 알폰소 2세가 이를 회수하여 동생 산초, 이후 차남 알폰소 2세에게 넘겨주었다.
'정복왕'으로 불리는 하이메 1세 (1208년 - 1276년)는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몽펠리에 영지를 상속받았고, 발레아레스 제도와 발렌시아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정복했다. 하이메 1세는 사후 영토를 아들들에게 분할했는데,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는 장남 페드로 3세 (1239년 - 1285년)에게, 마요르카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및 루시용, 세르다냐 등)과 몽펠리에는 차남 하이메 2세 (1243년 - 1311년)에게 물려주었다. 이로 인해 마요르카 왕국은 잠시 아라곤 왕국과 분리되었으나, 4대 만인 페드로 4세 (1319년 - 1387년) 때 아라곤에 다시 병합되었다.
페드로 3세는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왕국 내전에 개입하여 앙주 가문의 카를로 1세 군대를 물리치고 시칠리아 섬을 장악,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시칠리아 왕국은 섬의 시칠리아 왕국(아라곤계)과 반도 남부의 나폴리 왕국(앙주계)으로 분열되었다. 페드로 3세 사후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다시 나뉘어, 차남 하이메 2세 (1267년 - 1327년)가 아라곤 왕위를, 삼남 페데리코 2세 (1272년 - 1337년)가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하며 시칠리아 분가가 시작되었다. 시칠리아 분가는 아테네 공국과 네오파트리아 공국의 작위도 획득했다.
시칠리아 왕가는 페데리코 3세 (1342년 - 1377년)를 마지막으로 남계 후손이 끊겼다. 그의 딸 마리아 여왕 (1362년경 - 1402년)은 아라곤 왕 존 1세의 아들이자 사촌인 마르틴 (1374년경 - 1409년)과 결혼했다. 마르틴은 아내와 공동으로, 그리고 아내 사후 단독으로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마르틴 1세마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시칠리아 왕위는 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왕인 마르틴 (1356년 - 1410년)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마르틴 왕 역시 적법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1410년에 사망하여 바르셀로나 가문의 본가와 시칠리아 분가 모두 남계가 단절되었다.
이후 2년간의 왕위 공백기 끝에 카스페 타협 (1412년)을 통해 마르틴 왕의 조카이자 카스티야의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신인 페르난도 1세 (1380년 - 1416년)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새로운 군주로 선출되었다.
6. 2. 아라곤 국왕, 시칠리아 국왕, 마요르카 국왕 계보
바르셀로나 가문은 본래 바르셀로나 백작을 세습하던 가문이었으나, 아라곤 왕라미로 2세의 유일한 딸인 페트로닐라 여왕과 라몬 베렝게르 4세 백작이 결혼하면서 아라곤 왕위와 연결되었다.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 왕을 칭하지 않았으나, 그의 아들 알폰소 2세부터는 아라곤 국왕과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함께 사용하여 아라곤 연합 왕국이라는 동군 연합 국가를 형성했다.알폰소 2세의 손자인 하이메 1세는 발레아레스 제도와 발렌시아를 정복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는 사후 영토를 분할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위는 장남 페드로 3세에게, 마요르카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및 북카탈루냐, 몽펠리에 포함)은 차남 자우메 2세에게 물려주었다. 이로 인해 마요르카 왕국은 잠시 아라곤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계보를 이어갔으나, 4대 만인 페드로 4세 때 아라곤에 다시 병합되었다.
한편,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1282년)을 계기로 시칠리아 왕국 내정에 개입하여 카를로 1세를 몰아내고 시칠리아 섬을 장악, 시칠리아 국왕이 되었다. 이후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는 페드로 3세의 아들들에게 나뉘어, 차남 하이메 2세가 아라곤 왕위를, 삼남 페데리코 2세가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하며 각각 다른 가계로 이어졌다.
시칠리아 왕가는 페데리코 3세 이후 남성 후계자가 끊겼다. 그의 딸 마리아 여왕이 아라곤 왕자 마르틴(마르티노 1세)과 결혼하여 왕위를 이었으나, 마르티노 1세 역시 후사 없이 사망했다. 시칠리아 왕위는 마르티노 1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국왕인 마르틴 1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마르틴 1세마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바르셀로나 가문의 직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후 2년간의 왕위 공백기를 거쳐 카스페 타협이 이루어졌고, 마르틴 1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의 왕족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 시칠리아, 마요르카 등 바르셀로나 가문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의 군주로 선출되었다.
6. 3. 세르다냐 백작, 베살루 백작 계보
바르셀로나 가문의 방계 중 하나로, 세르다냐 백작과 베살루 백작을 세습했던 가계를 말한다. 이 가계는 바르셀로나 백작 털보 빌프레드의 아들인 미로 2세(? ~ 927년)로부터 시작되었다. 미로 2세는 세르다냐와 베살루의 백작이었다.미로 2세 사후, 그의 아들들이 작위를 나누어 계승했다.
- 수니프레드 2세 (? ~ 968년): 세르다냐 백작
- 빌프레드 2세 (? ~ 957년): 베살루 백작
- 미로 3세 본필 (? ~ 984년): 세르다냐, 베살루 백작 및 지로나 주교
- 올리바 카브레타 (920년경 ~ 990년): 세르다냐, 베살루 백작
올리바 카브레타는 988년 은퇴하여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그의 영지는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 베르나르 1세 탈랴페로 (? ~ 1020년): 베살루 백작령과 리폴 지역을 상속받아 베살루 백작 가계를 이었다.
- 빌프레드 2세 (? ~ 1050년): 세르다냐 백작령과 콘플렌, 베르가 지역을 상속받아 세르다냐 백작 가계를 이었다.
- 올리바 (971년 ~ 1046년): 베르가와 리폴 지역을 상속받았으나, 1002년 또는 1003년 성직자가 되기 위해 영지를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었다. 이후 비크의 주교이자 산타 마리아 데 리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 베살루 백작 가계 ===
베르나르 1세 이후 베살루 백작위는 다음과 같이 계승되었다.
- 기예르모 1세 (? ~ 1052년)
- 기예르모 2세 (? ~ 1066년)
- 베르나트 2세 (? ~ 1097년경)
- 베르나트 3세 (? ~ 1111년)
1111년, 마지막 베살루 백작인 베르나트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영지는 친척이자 바르셀로나 백작인 라몬 베렝게르 3세에게 상속되었다. 원본 가계도 중 하나는 베르나트 3세가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다고 나타내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히메나(Ximena)로 표기되는 등 배우자 이름에 차이가 있다.
=== 세르다냐 백작 가계 ===
빌프레드 2세 이후 세르다냐 백작위는 다음과 같이 계승되었다.
- 라몬 (? ~ 1068년)
- 기예르모 1세 (? ~ 1095년)
- 기예르모 2세 조르다 (? ~ 1109년)
- 베르나트 (? ~ 1117년 또는 1118년)
1118년, 마지막 세르다냐 백작인 베르나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영지 역시 라몬 베렝게르 3세에게 상속되었다. 이로써 세르다냐와 베살루 백작령은 다시 바르셀로나 백작 본가로 통합되었다.
6. 4. 우르헬 백작 계보 (분가)
우르헬 백작위는 본래 바르셀로나 가문의 초기 분가 중 하나였으나, 10세기 이후 단절되었다가 14세기에 다시 바르셀로나 가문의 분가로 이어졌다. 알폰소 4세가 우르헬 여백작 테레사 데 엔텐자와 혼인하면서 우르헬 백작령은 아라곤 왕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알폰소 4세와 테레사의 차남 자우메 1세(1321년–1347년)가 어머니로부터 우르헬 백작위를 상속받으면서 새로운 우르헬 백작 분가가 시작되었다. 이 계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세대 | 인물 | 배우자 | 비고 |
---|---|---|---|
1 | 알폰소 4세 | 테레사 데 엔텐자 | 아라곤 왕. 테레사는 우르헬 여백작. |
2 | 자우메 1세 | 세실리아 데 코멩주 | 알폰소 4세의 차남. 우르헬 백작 (1328년–1347년). |
3 | 페레 2세 | 마르가리타 팔레올로기나 | 자우메 1세의 아들. 우르헬 백작 (1347년–1408년). |
4 | 자우메 2세 | 이사벨 데 아라곤 | 페레 2세의 아들. 우르헬 백작 (1408년–1413년). 카스페 타협에서 왕위 계승 실패. |
5 | 이사벨 | 페드루, 코임브라 공작 | 자우메 2세의 딸. 아들 페드로 5세는 아라곤 대립왕으로 추대됨. |
5 | 엘레오노르 | 라이몬도 오르시니 | 자우메 2세의 딸. |
5 | 후아나 | 장 1세, 푸아 백작 후안 라몬 폴크 3세 데 카르도나 | 자우메 2세의 딸. |
자우메 2세(1380년–1433년)는 마르틴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로 부상했다. 그는 부계로는 알폰소 4세의 증손자이자 페드로 4세의 동생인 자우메 1세의 손자였으며, 마르틴 1세의 가장 가까운 부계 친척이라는 점에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12년 카스페 타협 결과, 카스티야의 트라스타마라 가문 출신인 페르난도 1세가 새로운 아라곤 왕으로 선출되었다. 자우메 2세는 이 결정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투옥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이로써 우르헬 백작 분가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자우메 2세의 딸 이사벨은 포르투갈의 아비스 가문 출신 페드루와 혼인하였고, 그들의 아들인 페드로는 훗날 카탈루냐 내전(1462년-1472년) 중에 카탈루냐인들에 의해 아라곤의 왕 페드로 5세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왕위를 확립하지는 못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