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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알폰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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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의 알폰소 2세는 1162년부터 1196년까지 아라곤 왕국을 통치한 왕이다. 그는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카스티야 왕국과 동맹을 맺어 나바라 왕국과 무어인 세력에 대항했으며, 테루엘을 정복하고 카스페를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다. 1174년 카스티야 왕의 누이 산차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와의 관계를 강화했고, 1179년에는 카솔라 조약을 통해 발렌시아 지방의 남쪽 지역을 아라곤의 영토로 확보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피레네 산맥 이북 지역에 대한 아라곤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프로방스, 세르다냐, 루시용 등을 흡수했다. 알폰소 2세는 시인이자 사자왕 리처드의 친구로, 문화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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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알폰소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2세기 필사본
12세기 필사본 "Liber feudorum maior"에서의 초상
군주 칭호아라곤 국왕
바르셀로나 백작
통치 기간1164년 7월 18일 – 1196년 4월 25일
선임자페트로니야
섭정페트로니야 (1173년까지)
후임자페드로 2세
자녀페드로 2세
콘스탄사 데 아라곤
알폰소 2세 데 프로방스
레오노르 데 아라곤, 툴루즈 백작부인
산차 데 아라곤, 툴루즈 백작부인
가문바르셀로나
아버지라몬 베렝게르 4세
어머니페트로니야
출생일1157년 3월 1일 – 25일
출생지우에스카, 아라곤 왕국
사망일1196년 4월 25일
사망지페르피냥, 카탈루냐 공국
매장지포블레트 수도원

2. 재위

우에스카에서 태어났으며,[22][2] 출생 시에는 알폰소 또는 라몬으로 불렸으나,[26][6] 아라곤 출신의 알폰소 1세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알폰소'라는 이름으로 아라곤과 바르셀로나의 통합된 왕위를 계승했다.[27][7]

알폰소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아라곤 연합왕국은 남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레콩키스타를 지속하고, 북쪽으로는 피레네산맥 너머로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는 재위 기간 대부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동맹을 맺고 나바라 왕국 및 남부의 무어인 타이파들과 대립했다.[27][7] 레콩키스타 과정에서는 테루엘(1171년)과 카스페(1171년) 등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했고,[27][7] 카스티야와는 카소를라 조약(1179년)을 맺어 향후 정복 지역을 분할하기도 했다.[27][7]

또한 피레네산맥 이북 지역에 대한 아라곤의 영향력은 그의 치세에 절정에 달했다. 프로방스(1166년경),[29][9] 세르다냐(1168년),[30][10] 루시용(1172년) 등을 확보했으며,[30][10] 베아른과 비고르는 1187년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7][10] 이러한 북부 지역 개입은 아라곤의 교역을 증진시키고 인구 이동을 촉진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27][10] 1186년에는 사르데냐의 아르보레아 왕국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아라곤의 영향력을 넓히기도 했다.[27][10]

알폰소 2세는 종교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시토회카르투시오회의 후원자였다.[11] 그는 아라곤 지방 에브로강 유역에 시토회 수도사들에게 처음으로 토지를 하사했으며, 이는 이 지역 최초의 시토회 수도원 설립으로 이어졌다.[27][10] 피에드라 수도원은 1194년 포블레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에 의해 옛 성터에 세워졌고,[10] 레알 수도원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루에다는 1202년 설립되어 수력 기술을 활용하기도 했다.[10] 또한 1196년에는 카르투시오회의 스칼라 데이 수도원 설립을 후원했다.[12]

그는 1196년 페르피냥에서 사망했다.[27][10]

2. 1. 레콩키스타와 영토 확장

재위 기간 대부분 알폰소 2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동맹을 맺고 북쪽의 나바라 왕국과 남쪽의 무어인타이파에 대항했다.[22][2]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그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1171년 발렌시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요 요새인 테루엘을 정복했으며, 같은 해 카스페도 점령했다.[22][2]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공동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알폰소 2세가 카스티야 왕의 누이인 산차와 1174년 1월 18일 사라고사에서 혼인하면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28][8] 두 왕국은 1179년 카소를라 조약을 체결하여 후카르강과 세구라강 유역을 기준으로 남부 이베리아의 미정복지에 대한 각자의 정복 범위를 정했다. 이 조약으로 데니아를 포함한 발렌시아 남부 지역은 아라곤의 영토로 확보되었다.[22][2][20]

한편, 알폰소 2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대립하던 발렌시아무르시아의 통치자 Muhammad ibn Mardanis|무함마드 이븐 마르다니쉬es(통칭 로보 왕)와 처음에는 대립했다. 1168년에는 나바라의 산초 6세와 상궤사 조약을 맺고 마르다니쉬의 영토 분할을 계획하며 침공하기도 했으나,[22][2][19] 이후 알폰소 8세의 중재로 마르다니쉬와 화해했다.[19] 상궤사 조약은 무르시아 타이파 영토를 아라곤과 나바라가 분할하는 내용도 포함했다.[22][2]

알폰소 2세의 통치 아래 아라곤 연합왕국피레네산맥 이북 영향력은 정점에 달했다. 이는 오크 지방, 카탈루냐, 아라곤 지역 간의 문화적, 정치적 친밀성을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확장이었다.[22][2] 그는 1166년경 사촌 레이몽 베랑게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두스 2세를 대신하여 프로방스 백작령을 차지했고,[29][9][17] 1168년에는 세르다냐 백작령을,[30][10] 1172년에는 루시용 백작령을 상속받아 영토를 넓혔다.[30][10] 또한 1187년에는 베아른과 비고르 백작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2][2] 랑그도크 지역 문제에 대한 그의 개입은 당시 아라곤의 교역을 활성화하고 북부 주민들이 새롭게 정복한 아라곤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촉진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비록 훗날 그의 아들 아라곤의 페드로 2세가 이 문제로 목숨을 잃게 되지만)[22][2]

1186년에는 사르데냐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아르보레아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사망한 바리소네 2세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친척인 아갈부르사를 지원했다. 그녀의 손자이자 바리소네 2세의 외손자인 우고네 1세(휴 1세)를 피에트로 1세(페테르 데 세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다.[22][2]

그러나 카스티야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여 1191년에는 포르투갈의 산초 1세, 레온의 알폰소 9세, 나바라의 산초 6세와 함께 반(反) 카스티야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교황 켈레스티누스 3세의 중재로 이듬해인 1192년 카스티야와 다시 화해했다.[20]

2. 2. 국제 관계와 영향력 확대

알폰소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아라곤 왕국의 국제적 위상과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레콩키스타를 지속하며 다른 기독교 왕국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고, 피레네산맥 너머에서도 활발한 외교 및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이베리아 반도 내 관계

  • '''카스티야와의 관계''': 재위 기간 대부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나바라 왕국 및 남부의 무어인 타이파들에 공동으로 맞섰다.[27][7] 양국 관계는 알폰소 2세가 카스티야에 대해 공식적인 충성의 맹세를 함으로써[27] 더욱 강화되었으며, 1174년 1월 18일 사라고사에서 알폰소 2세가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누이인 산차와 혼인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28][8] 또한 1170년에 공식적인 동맹을 맺었으며,[19] 1177년에는 레온의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쿠엥카를 포위 중이던 알폰소 8세를 지원하기도 했다.[20] 1179년에는 카솔라 조약을 체결하여 후카르강과 세구라강 유역을 기준으로 남부 미정복지에 대한 각자의 정복 범위를 명확히 했다. 이 조약으로 데니아를 포함한 발렌시아 남부 지역은 아라곤의 영향권으로, 무르시아 지역은 카스티야의 영향권으로 보장되었다.[27][7][20] 그러나 후기에 카스티야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여, 1191년에는 포르투갈의 산초 1세, 레온의 알폰소 9세, 나바라의 산초 6세와 함께 반(反) 카스티야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1192년 교황 켈레스티누스 3세의 중재로 카스티야와 화해했다.[20]

  • '''나바라와의 관계''': 초기에는 카스티야와 연합하여 나바라에 대항했으나,[27][7] 1168년에는 나바라의 산초 6세와 상궤사 조약을 맺고 당시 무와히드 왕조에 맞서던 무르시아 타이파 (이븐 마르다니쉬 통치)의 영토 분할을 합의하기도 했다.[27][7][19] 이후 1191년에는 카스티야를 견제하기 위해 나바라와 함께 반 카스티야 동맹에 참여했다.[20]

  • '''무어인 세력과의 관계 (레콩키스타)''': 알폰소 2세는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171년에는 발렌시아로 가는 길목의 중요 거점인 테루엘을 정복했으며, 같은 해 카스페도 점령했다.[27][7] 당시 무와히드 왕조와 대립하던 무르시아 타이파 및 발렌시아의 통치자 이븐 마르다니쉬(통칭 로보 왕)와는 초기에는 대립하여 1168년 나바라와 그의 영토 분할을 모의하고 침공하기도 했으나,[19] 이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의 중재로 화해했다.[19] 1177년에는 쿠엥카 포위 지원 중 무와히드 왕조 지배하의 로르카를 공격하기도 했다.[20]

피레네 산맥 이북 및 지중해 확장알폰소 2세의 통치 아래 아라곤의 영향력은 피레네산맥 북쪽으로 크게 확장되었는데, 이는 아라곤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오크 지방, 카탈루냐, 아라곤 지역 간의 문화적, 지리적 친밀성을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27][10]

  • 프로방스: 1166년경, 사촌인 프로방스 백작 레이몽 베랑게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두스 2세를 대신하여 알폰소 2세가 백작령을 계승했다.[29][9][17]
  • 기타 백작령: 1168년에는 세르다냐 백작령을,[30][10] 1172년에는 루시용 백작령을 상속받아 통합했다.[30][10]
  • 랑그도크 지역: 베아른과 비고르 지역은 1187년 알폰소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7][10] 알폰소 2세는 랑그도크 문제에 적극 개입했는데, 이는 아라곤의 교역을 활성화하고 북부 주민들이 아라곤 내 새로 정복한 영토로 이주하는 것을 촉진하는 등 단기적으로는 큰 이익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훗날 그의 아들 아라곤의 페드로 2세가 알비 십자군과 얽혀 전사하는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27][10]
  • 사르데냐: 1186년에는 사르데냐의 아르보레아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이자 바리소네 2세의 미망인이었던 아갈부르사를 도와, 그녀의 손자인 우고네 1세가 피에트로 1세 데 세라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했다.[27][10]

2. 3. 카스티야와의 관계

알폰소 2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27][7] 이 동맹은 공동의 적인 나바라 왕국과 남쪽의 무어인 타이파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으며,[27][7] 1170년에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19]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아라곤은 카스티야에 형식적인 충성의 맹세를 하기도 했다.[27]

양국의 관계는 1174년 1월 18일, 알폰소 2세가 사라고사에서 알폰소 8세의 누이인 산차와 혼인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28][8] 레콩키스타 과정에서도 협력하여, 1177년에는 레온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쿠엥카를 포위 중이던 알폰소 8세를 도와 무와히드 왕조의 도시 로르카를 공격하기도 했다.[20]

1179년에는 알폰소 2세와 알폰소 8세 사이에 카소를라 조약이 체결되었다.[27][7][20] 이 조약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남부 이슬람 영토에 대한 양국의 정복 범위를 정한 것으로, 후카르강과 세구라강 유역을 기준으로 남쪽 지역의 분할을 명확히 했다. 이에 따라 데니아를 포함한 발렌시아 남부 지역은 아라곤의 세력권으로, 무르시아 지역은 카스티야의 세력권으로 보장받았다.[27][7][20]

한편, 알폰소 2세는 초기에 무와히드 왕조에 대항하던 발렌시아무르시아의 통치자 이븐 마르다니시 (통칭 로보 왕)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이후 알폰소 8세의 중재로 화해했다.[19]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카스티야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알폰소 2세는 이를 경계하게 되었다.[20] 1191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산초 1세,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 나바라 왕국의 산초 6세와 함께 반(反) 카스티야 동맹을 결성했다.[20] 하지만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교황 켈레스티누스 3세의 중재로 이듬해인 1192년에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다시 화해했다.[20]

3. 내치

레콩키스타를 통해 알폰소 2세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1171년 발렌시아로 가는 길목의 중요 거점인 테루엘을 정복하고 같은 해 카스페를 점령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피레네 산맥 북쪽에서 아라곤 왕관의 영향력이 정점에 달했다. 그는 프로방스 백작령(1166년경부터)[9], 세르다냐 백작령(1168년), 루시용 백작령(1172년 상속)[10]을 자신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베아른과 비고르는 1187년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랑그독 문제에 대한 그의 개입은 아라곤의 무역을 활성화하고, 새롭게 정복한 남쪽 땅으로 북부 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알폰소 2세는 종교 기관 후원에도 힘썼다. 그는 에브로 강 유역의 시토회 수도사들에게 처음으로 토지를 하사했으며, 이는 아라곤 지역 최초의 시토회 수도원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1194년에는 포블레 수도원에서 온 13명의 수도사들이 피에드라 강 옆의 오래된 성터에 피에드라 수도원을 세웠다. 1202년에 설립된 레알 수도원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루에다는 강의 물길을 바꾸어 수력을 이용하고 중앙 난방 시설을 갖추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수력 기술을 활용했다. 그는 또한 카르투시오회의 후원자였으며,[11] 1196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최초의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인 에스칼라데이 수도원을 설립했다.[12]

4. 문화적 후원

알폰소 2세 아라곤과 그의 아내 산차, 궁정의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다. ''Liber feudorum maior''에서.


알폰소 2세는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었으며, 사자왕 리처드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와 음유시인 지로 드 보르넬이 함께 작곡한 것으로 보이는 텐소 "Be·m plairia, Seingner En Reis"[13]는 당시 유행했던 시적 논쟁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 논쟁은 여성이 자신보다 더 부유한 연인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불명예스러운 일인지에 대한 질문을 다루었다. 이 논쟁은 기옘 드 생레디에가 처음 시작했으며, 아잘레 드 포르카이락과 오랑주의 람보 등이 참여하여 이어갔다. 또한 달피 달베르냐와 페르디곤 사이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파르티멘'' (토론 형식의 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알폰소 2세의 개인적인 연애 관계 역시 여러 음유시인들의 작품에서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기옘 드 베르게다는 알폰소 2세가 툴루즈의 아잘라이스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반면, 페이레 비달은 알폰소 2세가 비잔티움 제국 황제 마누엘 1세의 조카딸인 에우도키아 콤네네 대신 카스티야 출신의 산차와 결혼하기로 한 결정을 칭찬했다. 페이레 비달은 이를 두고 알폰소 2세가 "황제의 황금 낙타보다 가난한 카스티야 하녀를 더 선호했다"고 표현하며 그의 선택을 높이 평가했다.

5. 혼인과 후손

알폰소 2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의 딸인 카스티야의 산차(1155/57년 ~ 1208년)와 혼인했다.[14] 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이름생몰년비고
페드로 2세1174/76년 – 1213년 9월 14일아라곤의 국왕, 몽펠리에의 영주.[14]
콘스탄사1179년 – 1222년 6월 23일처음에는 헝가리 국왕 임레와 혼인했고, 이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재혼했다.[14]
알퐁스 2세1180년 – 1209년 2월프로방스, 미요, 라제스의 백작.[32][15]
레오노르1182년 – 1226년 2월툴루즈 백작 레몽 6세와 혼인했다.[14]
라몬 베렝게르1183/85년경 – 요절
산차1186년 – 1241년 이후툴루즈 백작 레몽 7세와 1211년 혼인했다.[14]
페르난도1190년 – 1249년시토회 수도승, 몬테아라곤의 수도원장.
둘차1192년 – ?시헤나의 수녀.


참조

[1] 서적 Los "condes-reyes" de Barcelona y la "adquisición" del reino de Aragón por la dinastía bellónida https://books.google[...] Hidalguía 1995
[2] 서적 Colectánea paleográfica de la Corona de Aragon: Siglo IX-XVIII https://books.google[...] Universitat Barcelona 1980
[3] 서적 Historia de Aragón. Creación y desarrollo de la Corona de Aragón http://www.derechoar[...] Anúbar, Zaragoza 1987
[4] 간행물 Aproximación a la historia de la Corona de Aragón http://www.seacex.es[...] Sociedad Estatal para la Acción Cultural Exterior (SEACEX); Generalitat Valenciana and Ministerio de Cultura de España: Lunwerg 2006
[5] 논문 The Rise of Catalonia: Identity, Power, and Ideology in a Twelfth-Century Society Annales: Economies, Sociétés, Civilisations 1984
[6] 웹사이트 Ubieto (1987:184–186) http://www.derechoar[...]
[7] 서적 Historia de España Antigua y Media https://books.google[...] Rialp, Madrid 1976
[8] 웹사이트 Ubieto (1987:202) http://www.derechoar[...]
[9] 서적 Historia de Cataluña y de la Corona de Aragon https://books.google[...] Salvador Manero, Barcelona 1861
[10] 서적 La Corona de Aragón CAI (Colección Mariano de Pano y Ruata, 18), Zaragoza 2000
[11] 서적 Carthusian Spirituality The Writings of Hugh of Balma and Guigo de Ponte https://books.google[...] Paulist Press 1997
[12] 웹사이트 Carthusian Monastery of Escaladei https://patrimoni.ge[...] Generalitat de Catalunya 2023-11-26
[13] 서적 The Troubadour Tensos and Partimens. A Critical Edi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2010
[14] 서적 The Shorter Cambridge Medieval History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60
[15] 서적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A Short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16] 문서 田澤、P53 - P54
[17] 문서 関、P214。
[18] 문서 田澤、P54、関、P215 - P216。
[19] 문서 ローマックス、P154 - P155。
[20] 문서 ローマックス、P140、P158 - P159、P162、芝、P128 - P130、関、P153、西川、P136 - P137。
[21] 서적 Los "condes-reyes" de Barcelona y la "adquisición" del reino de Aragón por la dinastía bellónida https://books.google[...] Hidalguía 1995
[22] 서적 Colectánea paleográfica de la Corona de Aragon: Siglo IX-XVIII https://books.google[...] Universitat Barcelona 1980
[23] 서적 Historia de Aragón. Creación y desarrollo de la Corona de Aragón http://www.derechoar[...] Anúbar, Zaragoza 1987
[24] 간행물 Aproximación a la historia de la Corona de Aragón http://www.seacex.es[...] Sociedad Estatal para la Acción Cultural Exterior (SEACEX); Generalitat Valenciana and Ministerio de Cultura de España: Lunwerg 2006
[25] 논문 The Rise of Catalonia: Identity, Power, and Ideology in a Twelfth-Century Society Annales: Economies, Sociétés, Civilisations 1984
[26] 웹사이트 Ubieto (1987:184–186) http://www.derecho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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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웹사이트 Ubieto (1987:202) http://www.derechoar[...]
[29] 서적 Historia de Cataluña y de la Corona de Aragon https://books.google[...] Salvador Manero, Barcelona 1861
[30] 서적 La Corona de Aragón CAI (Colección Mariano de Pano y Ruata, 18), Zaragoza 2000
[31] 서적 The Troubadour Tensos and Partimens. A Critical Edi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2010
[32] 서적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A Short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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