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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당강 전투 (12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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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당강 전투는 1288년 쩐흥다오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이 몽골 제국의 침략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쿠빌라이 칸은 1287년 세 번째 대월 원정을 감행하여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 병력과 보급 물자를 투입했다. 쩐흥다오는 하노이에서 관민을 소개시킨 후 박당강에서 몽골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쩐흥다오는 과거 응오꾸옌이 사용했던 전술을 참고하여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한 매복 작전을 펼쳤고, 몽골군은 매복에 걸려 전멸했다. 이 전투는 베트남이 몽골의 침략을 세 번이나 물리친 중요한 승리로 평가받으며, 베트남의 독립을 지켜낸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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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당강 전투 (1288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박당강 전투
관련 전쟁몽골의 베트남 침공
박당강 전투 1288 지도
박당강 전투
날짜1288년 4월 9일
장소박당강, 꽝닌성 꽝옌
결과대월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대월
교전국 2원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대월쩐흥다오
쩐카인즈
원나라토곤 (진남왕)
오마르
장문호
병력 규모
대월50,000명 (베트남 자료)
원나라94,000명, 500척
사상자 규모
대월4,000 ~ 6,000명 전사
원나라80,000 ~ 90,000명 사망 또는 포로
400척 침몰 또는 나포

2. 배경

몽골 제국쿠빌라이 칸은 1258년 제1차, 1285년 제2차 대월 원정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분노했다. 그는 1287년 세 번째 침공을 결정하고, 자신의 아들 중 하나인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9만 명의 병력과 수백 척의 전선, 그리고 장문호 장군이 이끄는 대규모 보급 함대를 투입하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했다. 출병에 앞서 쿠빌라이 칸은 토곤에게 "작은 나라라고 해서 교지(交趾, 대월을 얕잡아 부르는 말)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1287년 말, 토곤이 이끄는 원나라 육군은 국경을 넘어 대월을 침공했고, 오마르가 지휘하는 해군 함대 역시 바닷길을 통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대월의 총사령관 쩐흥다오는 수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의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미리 이동시킨 후, 결전을 준비했다. 그는 몽골군과의 전투 장소로 박당강 유역을 선택하고 진을 쳤다. 박당강은 약 350년 전인 938년에 응오꾸옌이 오대십국 시대 남한의 침략군을 상대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5][6] 쩐흥다오는 이곳의 지형과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전략을 준비하며 몽골군과의 일전을 대비했다.

2. 1. 몽골 제국의 동남아시아 원정

1258년 제1차 침공과 1283년 제2차 침공에 이은 두 차례의 대월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몽골 제국쿠빌라이 칸은 크게 분노했다. 그는 1287년 세 번째 침공을 계획하고 아들 중 하나인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9만 명(다른 기록에는 정병 8만 명과 보급군 21,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또한 수백 척의 전선과 장문호 장군이 이끄는 수십만 석의 식량을 실은 대규모 보급 선단도 준비했다. 출병을 앞두고 쿠빌라이 칸은 토곤에게 “작은 나라라고 해서 교지(交趾, 대월을 낮춰 부르는 말)를 얕보지 말라”고 충고했다.

1287년 말, 토곤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는 운남과 하이난을 통해 대월을 침공했다. 육군은 토곤이 직접 지휘했으며, 해군은 호라즘 출신으로 송나라 정복 당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오마르 빈 나르스 알딘(Omar bin Nasr al-Din)이 판 이(Phan Ý), 마흐무드(Mahmud)와 함께 지휘했다. 오마르 함대는 병력 1만 8천 명, 수만 명의 수병, 수송선 70척, 군함 500척으로 구성되었다. 오마르는 이전 1285년 2차 침공 당시에도 토곤을 도와 다이 비엣을 공격했으며, 베트남 왕 쩐 냔 톤을 바다로 몰아내고 하이퐁 해안 전투에서 왕을 거의 사로잡을 뻔했으나, 식량 부족으로 퇴각한 경험이 있었다.

1288년 초, 원나라 군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격했다. 오마르의 함대는 1287년 12월 17일 친저우를 출발하여 박당강 하구를 통해 반 키에프(Vạn Kiếp)로 항해했고, 1288년 1월 그곳에서 토곤의 육군과 합류했다. 이후 원나라 군대는 대월의 수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을 향해 진격했고, 2월 3일에는 탕롱을 점령했다. 그러나 대월의 총사령관 쩐흥다오는 이미 수도의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후였다. 그는 박당강 근처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당강은 일찍이 938년 응오꾸옌남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5][6] 쩐흥다오는 응오꾸옌의 전술을 참고하여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강바닥에 말뚝을 박고 복병을 배치하는 등 치밀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한편, 수도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 군대는 심각한 보급 문제에 직면했다. 탕롱에는 약탈할 식량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토곤은 주변 지역으로 군대를 보내 쌀을 징발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1월 말 쩐 카잉 즈 왕자가 이끄는 대월 수군이 반 돈(Vân Đồn) 섬 근처에서 장원후(張文虎)가 지휘하는 원나라 보급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살아남은 보급선들은 하이난 섬으로 흩어지거나 강한 북동 계절풍에 의해 표류했다. 보급선이 끊기면서 거대한 원나라 군대는 고립되었고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1288년 3월 5일, 토곤은 탕롱에서 반 키에프의 기지로 군대를 물렸고, 3월 말에는 식량 부족과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했다. 토곤은 육로를 통해 퇴각을 시작했고, 오마르가 이끄는 함대는 이전에 진격했던 경로인 박당강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가려 했다.

2. 2. 쩐 왕조의 방어 전략

원나라가 배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중국 전함


백당강은 바다로 흘러들기 전 옌흥 지구(현재 꽝닌성)와 하이퐁의 투이응우옌 지역을 통과한다. 이곳은 938년 응오 꾸옌이 남한을 상대로 유명한 전투를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2]

1288년 3월부터 쩐흥다오는 다가올 전투를 위해 이곳을 전략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938년 응오 꾸옌이 남한을 상대로 사용했던 전술을 참고하여, 조수 간만의 차이를 면밀히 연구하고 이를 활용한 방어 계획을 세웠다. 쩐흥다오는 병사들에게 백당강 북쪽 지류인 찬(Chanh), 껜(Kênh), 룻(Rút) 강물 속에 미리 쇠로 된 말뚝을 박도록 지시했다.

특히, 찬 강 바닥에서 껜 강 꼭대기까지 백당강을 가로지르는 암초인 게인꼭(Ghềnh Cốc)은 중요한 매복 지점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에 설치된 수중 말뚝들은 썰물 때 후퇴하는 원나라 함선의 발을 묶는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대월의 소규모 함대는 게인꼭, 동꼭(Đồng Cốc), 퐁꼭(Phong Cốc) 뒤편과 콰이(Khoái), 타이(Thái), 자드억(Gia Đước), 디엔꽁(Điền Công) 강에 비밀리에 배치되어 기습을 준비했다. 육상 병력은 훙옌(Hùng Yên) 지역과 백당강 좌안(左岸)의 트랑껜(Tràng Kênh), 그리고 백당강 우안(右岸)과 다보이(Đá Voi) 산에 배치되어 강 양쪽에서 적을 압박할 태세를 갖추었다.

3. 전투 과정

1287년, 이전 두 차례의 대월 침공에 실패했던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아들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세 번째 침공을 명령했다. 원나라는 약 9만 명의 육군과 대규모 함대를 동원했으며, 쿠빌라이 칸은 토곤에게 교지(대월)를 얕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1287년 말, 원나라 육군은 국경을 넘어 진격했고, 대월의 총사령관 쩐흥다오는 정면 대결을 피하며 청야 전술과 함께 전략적 후퇴를 택했다. 1288년 초 원나라 군대는 수도 탕롱(현 하노이)까지 점령했지만, 식량과 물자가 없는 빈 성이었기에 심각한 보급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쩐카인즈가 이끄는 대월 수군이 반돈 인근 해상에서 장문호가 이끌던 원나라 보급 함대를 기습하여 격파하면서 보급 상황은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식량 부족과 전력 약화로 인해 토곤은 1288년 3월 말 퇴각을 결정했다. 그는 군대를 육로와 수로로 나누어 철수하기 시작했다. 토곤 자신은 육로를 통해 퇴각했고, 오마르가 이끄는 함대는 박당강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가려 했다.

쩐 인종과 쩐흥다오는 퇴각하는 원나라 군대를 공격할 기회로 삼았다. 쩐흥다오는 특히 박당강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했다. 938년 응오꾸옌의 전술을 참고하여[6] 강바닥에 말뚝을 박고 병력을 매복시키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288년 4월 9일, 박당강으로 퇴각하던 오마르의 함대는 쩐흥다오가 미리 설치한 함정과 매복 공격에 걸려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원나라 함선 400여 척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총지휘관 오마르는 생포되었다.

한편, 육로로 퇴각하던 토곤의 군대 역시 미리 파괴된 도로나 다리, 매복한 대월 군대의 공격과 추격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베트남 민병과 유격대의 지속적인 괴롭힘 속에서 토곤은 간신히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쳤으나,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 이로써 원나라의 제3차 침공은 대월의 결정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3. 1. 박당강 전투 (1288년)

원나라쿠빌라이 칸은 1258년과 1285년 두 차례에 걸친 대월(쩐 왕조) 원정 실패 이후, 지원 24년(1287년) 세 번째 침공을 감행했다. 이번 원정에는 쿠빌라이의 아들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약 10만에서 17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육군은 토곤이 직접 지휘했고, 해군은 오마르(烏馬兒)와 판 이, 마흐무드가 이끌었으며, 병력 1만 8천 명, 수만 명의 수병, 70척의 수송선과 500척의 군함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장문호가 지휘하는 대규모 보급 함대도 준비되었다. 쿠빌라이는 출병에 앞서 토곤에게 "작은 나라라고 교지를 얕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전해진다.

1287년 11월 말, 토곤이 이끄는 원나라 육군은 국경을 넘어 랑선, 북강 방면으로 침공했다. 쩐흥다오(vie: Trần Hưng Đạo, 쩐 흥 다오, 본명 쩐꾸옥뚜언)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저항하며 군대를 만끼엡(하이즈엉성 찌린)과 즈엉 강 유역으로 후퇴시켰다. 1288년 초, 토곤 군대는 만끼엡을 점령하고 장기전을 위한 거점을 구축했다. 오마르가 이끄는 해군 함대도 바다에서 백등강을 거슬러 올라와 1288년 1월 토곤의 군대와 합류했다. 오마르는 본래 장문호의 보급 함대를 호위해야 했으나, 쩐 왕조 군대의 저지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먼저 만끼엡으로 향했다.

원나라 군대는 2월 3일 수도 탕롱(현 하노이)을 점령했지만, 쩐 왕조가 미리 초토화 작전을 펼쳐 성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식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원나라 군대는 쩐 왕조의 주력군을 격파하지 못한 채 보급 문제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1월 말, 쩐카인즈가 이끄는 대월 수군이 반돈 섬 인근에서 장문호의 보급 함대를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남은 보급선들도 북동 계절풍에 흩어졌다. 식량 부족이 심각해지자 토곤은 3월 5일 탕롱에서 반끼엡의 기지로 철수했고, 3월 말에는 전면적인 퇴각을 결정했다. 토곤은 육로를 통해 랑선 방향으로 퇴각하기로 했고, 오마르가 이끄는 해군은 박당강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쩐 인종과 쩐흥다오는 이를 원나라 군대를 섬멸할 기회로 보고 총반격을 준비했다. 특히 쩐흥다오는 박당강에서의 결전을 계획했다. 박당강은 옌흥 지역(현 꽝닌성)과 하이퐁의 투이응우옌 지역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강으로, 과거 938년 응오꾸옌이 남한 군대를 상대로 유명한 승리를 거둔 장소였다.[2] 쩐흥다오는 응오꾸옌의 전술을 참고하여 박당강의 조수 간만의 차를 면밀히 조사하고, 강바닥 여러 곳(찬강, 껜강, 룻강 등 박당강 북쪽 지류)에 끝을 뾰족하게 깎고 쇠를 덧댄 나무 말뚝을 박았다. 이 말뚝들은 썰물 때 수면 위로 드러나 적 함선의 이동을 막도록 설치되었다. 또한 강 양쪽 기슭과 주변의 작은 강들(콰이강, 타이강, 자드억강, 디엔꽁강 등)에는 수군과 육군을 매복시켰다.

17세기 베트남 ''몽동(mông đồng)'' 전투선 모델. 13세기 대월 수군의 주력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88년 4월 9일 이른 아침, 오마르가 이끄는 원나라 함대는 보병의 호위를 받으며 박당강 하류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만조 때 강을 따라 내려가던 원나라 함대 앞에 쩐흥다오가 보낸 소규모의 대월 함대가 나타나 교전하는 척하다가 이내 후퇴했다. 원나라 함대는 이를 추격하며 미리 계획된 말뚝 지점으로 들어섰다. 마침 썰물이 시작되자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강바닥에 박힌 날카로운 말뚝들이 드러났다. 추격에 열중하던 원나라 함선들은 미처 이를 피하지 못하고 말뚝에 부딪혀 파괴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혼란에 빠진 원나라 함대를 향해 강 양쪽 기슭과 지류에 매복해 있던 수천 척의 대월 함선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일부 기록에는 불을 붙인 뗏목을 흘려보내 원나라 함선을 불태웠다고도 전해진다. 움직임이 봉쇄된 원나라 함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격파되었다. 수많은 원나라 병사들이 강물에 빠져 죽거나 익사했고, 강기슭으로 도망치려던 병사들도 매복해 있던 대월 육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되었다. 판 이는 배를 버리고 강으로 뛰어들었으나 대월군에게 사살되었고, 총지휘관 오마르는 생포되었다. 전투는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녘까지 이어졌으며, 대월군은 400척이 넘는 원나라 함선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 육로로 퇴각하던 토곤의 군대 역시 쩐흥다오 군대의 추격과 미리 설치된 함정, 파괴된 도로와 다리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토곤은 자신의 큰 배마저 버리고 소수의 병력과 함께 간신히 랑선을 거쳐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쳤다.

박당강에서의 대승으로 원나라의 제3차 침공은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이 전투는 쩐흥다오의 뛰어난 지략과 대월 군민의 용맹한 항전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3. 2. 육상 전투

쿠빌라이 칸은 이전 두 차례의 침공 실패 이후 1287년 말, 아들 토간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제3차 침공을 감행했다.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는 출병에 앞서 토간에게 "작은 나라라고 교지(대월)를 얕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1287년 11월 말, 토간이 이끄는 원나라 육군은 국경을 넘어 랑선, 북강으로 진격했다. 쩐흥다오( Trần Hưng Đạo|쩐 흥 다오vi)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저항하며 군대를 하이즈엉 성 만겁과 즈엉 강 유역 여러 곳으로 후퇴시켰다.

1288년 초, 토간은 직접 부대를 이끌고 만겁을 점령하고 장기전을 위한 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원나라 군대는 수도 승룡(탕롱)까지 점령했지만, 쩐 왕조가 이미 청야 전술을 펼친 뒤라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원나라 군대는 점차 수세에 몰렸다. 특히 쩐 카잉 즈가 이끄는 베트남 수군이 원나라의 보급선이었던 장문호의 함대를 격파하면서 식량 부족은 더욱 심각해졌다.

식량 부족과 전황 악화로 위기를 느낀 토간은 1288년 3월 말, 수도 탕롱을 포기하고 만겁을 거쳐 중국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육군은 토간이 직접 이끌고 육로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쩐 인종쩐흥다오는 이를 원나라 군대를 섬멸할 기회로 판단하고 총반격을 명령했다. 베트남군은 퇴각하는 원나라 군대의 예상 경로에 매복하고 다리와 도로를 파괴하는 등 함정을 설치했다. 특히 반끼옙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민병과 유격대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원나라 군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토간이 이끄는 주력 육군은 랑선 방면으로 퇴각했으나, 베트남군의 끈질긴 추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 육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부분의 병력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토간은 자신의 배를 버리고 남은 소수의 병력과 함께 숲을 통해 겨우 중국 국경으로 도망쳤다. 이처럼 육상 전투에서도 쩐 왕조는 원나라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4. 전투의 영향

몽골군의 패배 소식을 접한 쿠빌라이 칸은 크게 분노하여 총사령관이었던 아들 토곤을 평생 양주로 유배 보냈다. 이후 몽골은 베트남 침략을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몽골군과 베트남군은 포로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쩐년통 왕은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조공을 바치려 했으나, 원나라 조정에 직접 출석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1289년, 쩐년통 왕은 포로로 잡혀 있던 오마르를 돌려보내기로 했지만, 이 결정에 반대했던 흥도왕은 오마르가 탄 배가 바다에서 침몰하도록 손을 썼다고 전해진다.

쩐년통 왕은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고자 결국 원나라의 종주권을 형식적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직접 조공을 거부하자 쿠빌라이 칸은 1293년 베트남 사신 도자기를 억류했다. 쿠빌라이 칸의 뒤를 이은 테무르 칸 (재위 1294–1307) 대에 이르러서야 억류되었던 모든 사신이 풀려났고, 이후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명목상의 조공 관계가 유지되었다.

박당강에서의 몽골군 패배는 주변 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승리는 다른 국가들이 몽골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동남아시아 전역을 정복하려던 몽골 제국의 야망을 꺾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1. 베트남의 승리 요인

박당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에서 초강대국에 맞서 자주독립을 지켜낸 위대한 승리로 평가받는다.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의 다른 왕국들, 예를 들어 남부의 진랍이나 중부의 참파몽골쿠빌라이 칸을 간섭자로 받아들였지만, 대월(베트남)은 달랐다. 베트남은 이 전투를 포함하여 총 세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이 승리 이후 몽골은 다시는 베트남을 침략하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의 강력한 저항 의지와 효과적인 방어 전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59년에는 굴착 공사 중 1288년 전투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말뚝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5. 현대적 의의

박당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상 외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로,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자주 정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당시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던 몽골 제국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점에서 베트남 민족의 불굴의 저항 의지와 뛰어난 전략적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이 전투의 승리는 쩐 왕조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후 베트남 역사에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쩐흥다오가 보여준 뛰어난 지략과 민관이 하나 되어 싸운 단결력은 오늘날까지도 베트남인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현대 베트남에서도 박당강 전투는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자, 어떠한 외세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베트남의 국방 정책과 국민들의 정신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1. 문화적 영향

박당강 전투는 베트남의 전통과 문학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쩐밍통 황제(1300년 ~ 1357년)는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시 "박당강"을 썼다.

쩐밍통 황제의 시 "박당강"
원문 (한자)번역



쩐 왕조의 문관이자 학자였던 팜 스 만(Phạm Sư Mạnh, 1300년 ~ 1384년) 또한 이 전투를 묘사한 시를 썼다. [3]

팜 스 만의 시 "행역등가산"
원문 (한자)번역



레 왕조의 학자 응우옌 짜이 (Nguyễn Trãi, 1380년 ~ 1442년) 또한 그곳을 방문하여 시 "박당해구"(白藤海口)를 썼다.

"박당강"은 또한 1940년대에 루우 후 푸억(Lưu Hữu Phước)이 쓴 애국가의 제목이기도 했다.

5. 2. 역사적 평가

박당강 전투는 베트남의 전통과 문학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쩐 왕조의 쩐밍통 황제(1300-1357)는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박당강"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원문 (한자)번역



쩐 왕조의 문관이자 학자였던 팜 스 만(Phạm Sư Mạnh, 1300-1384) 또한 이 전투를 묘사한 시 "행역등가산(行役簦家山)"을 썼다.[3]

원문 (한자)번역 (부분)



레 왕조의 학자 응우옌 짜이 (1380-1442) 역시 이곳을 방문하여 "박당해구"(白藤海口)라는 시를 남겼다.

"박당강"은 1940년대에 루우 후 푸억이 작곡한 애국가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Postcolonial Vietnam: New Histories of the National Past 2002
[2] 웹사이트 China's Encounters on the South and Southwest: Reforging the Fiery Frontier Over Two Millennia https://books.google[...] BRILL 2014-11-07
[3] 웹사이트 Bài thơ: Hành dịch Đăng gia sơn - 行役登山 (Phạm Sư Mạnh - 范師孟) https://www.thivien.[...]
[4] 서적 大越史記全書
[5] 문서
[6] 웹사이트 China's Encounters on the South and Southwest: Reforging the Fiery Frontier Over Two Millennia https://books.google[...] BRILL 201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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